자유와 정의의 나라/신학 이야기

‘비오 11세의 스페인내전지지는 인류를 절망케 한다’ YouTube!!!

아우구스티누스 2021. 6. 25. 10:13

6월의 비, 오늘의 비는 무더위의 기승을 누그러뜨리는 동시에 농작물의 목마름을 해갈해줍니다. 역경과 절망의 어둠의 속을 단비와 같은 성령의 역사의 영적해갈로 대승하길 기원합니다.

 

대한민국의 현대정치사는 매우 이상한 스토리로 전개된다. 그것은 천주교도가 있는 곳엔 반드시 고위공직자나 단체장이 매장된다는 사실이다.

 

이런 사실을 감안하며 오늘 강의를 시작하고자 한다.

 

그러면 에스파냐의 약사에 대해 살펴보자.

 

1. 카르타헤나(Cartagena: 해군기지가 있는 항구도시)

 

포에니전쟁은 로마(그리스어ώμηRhṓmē; 라틴어, 이탈리아어 Roma; 영어 Rome)와 페니키아(그리스어 ΦοινίκηPhoiníkē; 라틴어 Phœnicia; 영어 Phoenicia: 현재 레바논과 시리아, 이스라엘 북부로 이어지는 고대 도시 국가)의 식민시(植民市) 카르타고(라틴어 Carthāgō; 영어Carthage; 현재 북아프리카 튀니지Tunisia) 사이의 3회에 걸친 포에니전쟁(라틴어 Bella Punica; 영어 the Punic Wars: B. C 264-146 B. C.)이 발생한다.

 

카르타고의 하밀카르 바르카(라틴어 Hamilcar Barca, B. C. 275-B. C. 228)는 당시 시칠리아의 카르타고군 사령관으로 선전하기는 하였으나 로마의 부자들이 자신들의 막대한 재산을 군선을 만들기 위한 군자금으로 제공하는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함으로써 패배하자, 하밀카르 바르카는 가족과 자신의 나라인 카르타고의 미래를 위해 카르타고에서 히스파니아(Hispania: 이베리아 반도<현재의 포르투갈Portugal, 스페인España에스파냐, 안도라Andorra, 지브롤터Gibraltar)로 건너가 카르타헤나(Cartagena: 해군기지가 있는 항구도시)도시국가를 건설하다가 B. C. 228년 전투 중에 죽는다. 그의 사후 바르카 가문의 지도권은 사위(둘째 딸 남편)인 공정 하스드루발(Hasdrubal the Fair, B. C.270B. C.221)에게 계승되고 이후 하스드루발이 켈트족 암살자(a Celtic assassin)에게 살해당하자, 하밀카르 바르카의 셋 아들 중 장남 한니발 바르카(라틴어 Hannibal Barca; 그리스어 ννίβας Βάρκας Hannibas Barkas, B. C 247-B. C 183) 지도권을 계승하며 카르타헤나도시를 완성한다.

 

1992 25회 올림픽 개최지로 스페인 북동부의 항구 도시 바르셀로나(Barcelona)의 명칭의 기원엔 여러 설이 존재하나 가 대다수의 학자들은 한니발 성인 바르카(Barca)에서 유래했다고 본다.

 

2. 서고트왕국(라틴어 Regnum Visigothorum; 영어The Visigothic Kingdom or the Kingdom of the Visigoths, 418-721)

 

서고트왕국의 초대왕 알라리쿠스 1(라틴어 Alaricus I; 영어 Alaric I, 재위 395-410, 370-410)410년 로마를 침공해 함락시키고, 급사하자, 후계자들이 418년 남프랑스 (southern Gaul)에서 451년 이베리아 반도에 걸치는 왕국을 건설하고 중부의 도시 톨레도(스페인어 Toledo; 라틴어 Toletum: 1986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언)를 수도로 하여 아리우스파의 서고트왕국을 세운다. 그런데 레카레두스 1(라틴어 Reccaredus I; 스페인어 Recaredo I; 영어 Reccared I or Recared 재위 586-601, 559-601)587년 아리우스파에서 기독교(오컬트 바티칸은 변질되었기 때문에 천주교로 부르지 않고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그것을 기초하여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정통개혁복음주의로 대체)로 개종하고, 589년 제3차 톨레도종교회의(The Third Council of Toledo, 589)에서 서고트 왕국 전 주민이 기독교신앙을 선택하는 교회사적으로 대이변이 일어난다.

그런데 중국 금()나라 때 동해원(董解元)이 지은 서상(西廂) 그리고 청()나라 때 조설근(曹雪芹)이 지은 홍루몽(紅樓夢)에 등장한 호사다마(好事多魔)가 재현된다.

 

위티자(Wittiza, Witiza, Witica, Witicha, Vitiza, or Witiges, 부왕Ergica와 공동통치 694-702, 702-710, 687-710)가 세습제 선언하자, 왕위 선출권을 갖고 있는 귀족들과 주교들은 710년 로드리고(스페인어 Rodrigo; 영어Roderic)란 유력한 귀족을 차기 왕으로 선출한다. 위티자 왕의 아들들은 왕위를 확보하기 위해 로드리고를 찬탈자로 규정하고 이슬람 세력을 끌어들여 극렬한 저항에 돌입한다.

 

그래서 7114, 우마이야 왕조의 아프리카 총독 무사(Musa)는 자신의 수하 장군인 타리크(Tarik)와 함께 7천여 명으로 구성된 이슬람 군대를 이끌고 지브롤터해협(Gibraltar)을 건너 가, 서고트 왕국에 침입해 들어와 그해 7월 서고트 군대와 싸워 승리를 거둔다.

 

이 시기 동안 무어인(Moor: 이베리아 반도와 북아프리카, 인도에 살았던 이슬람교도)은 안달루시아지역에 집중적으로 거주하며, 안달루시아는 이슬람과 그리스도교, 아프리카와 유럽, 아랍과 라틴 문화를 하나로 녹여 내는 용광로 역할을 하며 유럽의 르네상스 개화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3. 이슬람 왕국

 

40세 때인 610년 이슬람교를 창시한 무함마드(Muhammad, Mohammed; 영어식 표현 Mahomet, 570-632)가 죽은 후 네 명의 칼리프(caliph; 아랍어로는 칼리파Khalīfah: 정치와 종교의 권력을 아울러 갖는 이슬람교의 지배자/술탄sultan: 칼리프가 수여한 정치적 지배자의 칭호)가 차례로 선출되어 이슬람 공동체를 이끌었다. 이때를 정통 칼리프 시대라고 한다. 이 시기에 이슬람 세력은 아라비아 반도를 넘어 사산 왕조 페르시아(Sassanid Empire, Sassanian Dynasty, 226-651), 이집트 등을 정복하였다.

 

무함마드의 사촌이자 사위(무함마드의 딸 파티마 자흐라Fatimah Zahra, 605? or 615?-632의 남편)였던 4대 칼리프 알리(Alī ibn Abī Ṭālib, 601-661)가 암살당한 후, 칼리프 선출을 둘러싼 대립으로 3개의 왕조가 등장한다.

 

우마이야왕조(Umayyad Dynasty; The Umayyads)는 전() 우마이야왕조(661-750)와 후() 우마이야 왕조(코르도바 칼리프 왕조; 라틴어 Caliphatus Cordubae; 스페인어 Califato de Córdoba; 영어 Umayyad dynasty of Córdova, 756-1031), ‘타이파’(라틴어, 스페인어 taifa, pl. taifas=kings of the territorial[tèrǝtɔ́:riǝl] divisions or party kings)시대(1031-1492)로 나눈다.

 

칼리프계승의 수니파 우마이야왕조가 시리아의 다마스쿠스(Damascus)를 수도로 하여 세워진다. 흰 깃발이 상징이다. 우마이야 왕조는 정복 전쟁을 통해 서쪽으로는 북아프리카와 이베리아 반도를 차지하고 동쪽으로는 인도, 당과 국경을 맞대는 대제국을 건설한다. 이베리아 반도와 북아프리카, 인도에 살았던 이슬람교도를 무어인(Moor)이라고 칭한다.

 

750년에 이슬람의 창시자 무하마드의 조카인 아바스의 혈통을 이은 아불 아바스(Abu’l Abbās)가 중심이 되어, 시아파와 페르시아인의 도움으로, 우마이야 왕조를 전복시키고, 현재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Baghdad)를 중심으로 검은 깃발을 상징으로 아바스 왕조(the Abbasid dynasty, 750-1258. 1258년에 훌라구 칸Hūlākū Khān, 재위 1259-1265, 1218-1265이 이끄는 몽골군에 멸망됨)를 건설하고 아라비아 반도, 이집트 등을 지배하며. 이 지역에 살았던 이슬람교도를 사라센(Saracen)이라고 부른다.

 

파티마 왕조(Fatima, 909-1171): 이슬람교 창시자 무함마드의 딸 파티마 자흐라(Fatimah Zahra, 605? or 615?-632)인 파티마계의 시아파가 북아프리카에 세운 왕조다.

 

아바스 왕조에 의해 쫓겨난 전() 우마이야왕조가()의 일족(一族)인 압둘 라흐만 1(Abderramán I, 재위 756-788, 731-788)756년 에스파냐의 안달루시아(Andalucia: 현재 주도는 세비야; 스페인어 Sevilla; 영어 Seville이고, 코르도바Córdoba, 그라나다Granada 도시로 구성) 피난해 코르도바를 수도로 하며 이곳에 후기 우마이야왕조, 곧 코르도바 칼리파국(라틴어 Caliphatus Cordubae; 스페인어 Califato de Córdoba 또는 후기 우마이야 칼리파국, 756-1031)를 개창하고, 스페인은 이슬람 문화와 예술의 중심지로 자리잡는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내분으로 칼리프의 권력이 약화되다가, 1031, 내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 부유하고 막강했던 코르도바 우마이야 칼리파국(라틴어 Caliphatus Cordubae, 스페인어: Califato de Córdoba; the Umayyad Caliphate of Córdoba, 1009-1031)이 멸망한다. 그 후 이베리아 반도의 이슬람 세력은 39명의 군주(터키어 Emir; 아랍어 Amir)가 통치하는 독자적인 소왕국들로 분산된타이파’(라틴어, 스페인어 taifa, pl. taifas=kings of the territorial divisions or party kings)시대가 도래 한다.

 

이슬람 세력이 자기들끼리 싸우는 동안 스페인 북부로 쫓겨나 숨죽여 살고 있던 기독교 정통파 서고트족의 후예들이 기지개를 켜기 시작한다. 그들은 톨레도를 잃고 도망친 후부터 300여 년 동안 절치부심(切齒腐心)하며 세력을 키워왔다. 그 결과 카스티야 왕국(스페인어 Castilla: 중세 카스티야 왕국; 스페인어 Reino de Castilla; 영어 The Kingdom of Castile: 역사적인 지역명칭으로 현재 지방행정구역으로서의 카스티야는 존재하지 않음), 아라곤왕국(라틴어 Regnum Aragoniae; 스페인 Reino de Aragón; 영어 The Kingdom of Aragon), 레온왕국(스페인어 Reino de León; 영어 The Kingdom of León, 910-1230. 카스티야 왕국에 병합), 나바라왕국(라틴어 Regnum Navarrae; 스페인어 Reino de Navarra,; 프랑스어 Royaume de Navarre나바르왕국; 영어 The Kingdom of Navarre, 824-1620)4개 왕국을 중심으로 힘을 모을 수 있었다. 그리고 1085년 레온 왕국과 카스티야 왕국의 공동 통치자였던 용맹왕(스페인어 El Bravo; 영어 the Brave) 알폰소 6(Alfonso VI 재위 1065-1109)가 톨레도(Toledo)를 점령한 뒤, 스스로 히스파니아(Hispania)의 황제라고 자처했고, 이슬람은 두 번 다시 톨레도를 탈환하지 못했다.

 

코르도바 시대에는 기독교왕국들이 코르도바 칼리파국에게 조공을 바쳤지만, 소국으로 전락한 39개의 이슬람 타이파들은 침략당하지 않는다는 조건과 더불어, 필요시 군사원조에 응하는 명목으로 기독교왕국들에게 파리아스’(parias)라는 조공을 바쳐야 했다.

 

4. 레콩키스타

 

이자벨 1(Isabel 1. 카스티야 여왕 재위 1474-1504. 1451-1504: 스페인, 포르투갈어의 이자벨Isabel’, 이탈리아어의 이자벨라Isabella’, 프랑스어의 이자벨Isabelle’, 독일어의 이자벨레Isabelle’, 미영의 엘리자베스Elizabeth)와 페르난도 2(스페인어 Fernando II de Aragón; 영어 Ferdinand II, 아라곤 국왕 재위1479-1516. 1452-1516) 둘은 왕위에 오르기 전인 14691019일 바야돌리드(스페인어 Valladolid)에서 결혼식을 올리며, 1479년 연합왕국을 건설하고, 14921월 마지막 이슬람 국가인 그라나다(Granada) 타이파(Taifa)를 점령함으로 마침내 타리크가 서고트 왕국의 분열을 틈타 톨레도를 함락한 지 무려 781년 만(711Tarik의 침략-1492 레콩키스타)에 걸친 이베리아반도를 회복하는 레콩키스타(스페인어 Reconquista; 포르투갈어 Reconquista 헤콩키스타; 영어 re-conquest)를 완성한다.

 

그리고 동년 417일 스페인 이사벨1세는 이탈리아 제노바(이탈리아어 Genova, Gènova; 영어 Genoa/스위스의 geneva와 구분) 출신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 이탈리아어 Cristoforo Colombo, 1451?-1506)와 산타페 협정을 체결하고, 콜럼버스를 해군 제독에 임명하여, 콜럼버스의 해양탐사를 지원한다.‘레콩키스타의 위업 덕분에 1496년 오컬트 바티칸의 교주 알렉산데르 6(라틴어 Alexander PP. VI; 이탈리아어 Papa Alessandro VI; 영어 Pope Alexander VI, 재위 1492-1503, 1431-1503)는 두 사람을 천주교 군주’(Los Reyes Católicos; 영어 the Catholic Monarchs)이라는 칭호를 하사하고, 이후 이자벨은 천주교신자 이자벨(Isabel la Católica; 영어 Isabel the Catholic)이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5. 에스파냐의 황금시대와 몰락징후

 

이자벨 1세와 페르난도 2세 사이에 7명의 자녀가 태어났으나 2명은 유산한다. 14녀가 장성하였는데 이중 장남이자 왕세자인 후안(1478-1497)19세인 1497년에 사망한다.

 

이자벨 1세는 포르투갈과 원만한 관계유지를 위해 큰 딸 이자벨(1470-1498)을 포르투갈 왕자 아폰수와 초혼을 했으나, 아폰수가 사망하자, 포르투갈의 마누엘 1(Manuel I, 재위 1495-1521, 1469-1521: 주앙 2세의 사촌이다. 바스쿠 다 가마Vasco da Gama , 1460/1469-15243차례 1497-99, 1502-03, 15243월의 3차례에 걸친 인도 항로의 개척과 1500년 페드루 알바르스 카브랄Pedro Álvares Cabral, 1468?-1520 인도항해 중에 폭풍을 만나 브라질에 표착하고 , 토르데시야스 조약에 의해 브라질은 포르투갈의 영토가 되어, 해상무역의 강대국의 기초를 다진다. 토르데시야스 조약의 배경은 이렇다. 포르투갈의 최전성기를 이룩한 포르투갈의 주앙 2João II, 재위 1481-1495, 1455-1495의 주도로 149467일 에스파냐의 작은 마을인 토르데시야스에서 아프리카 서쪽 끝 카보베르데; 포르투갈어 Cabo Verde; 영어 Cape Verde섬으로부터 1800KM까지 선을 그어, 곧 대서양에 세로로 선을 그어 동쪽의 브라질, 한국, 일본, 중국은 포르투갈, 서쪽은 에스파냐의 식민지로 인정하는 토르데시야스 조약에 의해 브라질은 포르투갈령이 되어, 포르투갈은 해상제국이 됨)와 혼인시킨다. 그러나 혼인 전 포르투갈 내 유대인 추방을 제1조건으로 제시하였고 이로 인해 1506년 리스본에서 7,000명의 유대인 대학살이라는 큰 비극이 발생한다. 장녀 이자벨은 28세인 1498년에 아들 미겔(Miguel) 을 낳던 도중 사망하고, 미겔도 유아기에 죽는다. 셋째 딸 마리아(María de Aragón, 1482-1517)가 친언니 이자벨의 사망으로 홀아비가 된 포르투갈의 왕 마누엘 1세와 혼인하고, 둘 사이에서 10명의 자녀가 태어난다. 장남은 포르투갈의 15대 국왕 주앙 3(João III, 재위 1521-1557, 1502-1557: 주앙 3세는 프란시스코 하비에르; 영어 St. Francis Xavier; 라틴어 Sanctus Franciscus Xaverius; 스페인어 San Francisco Javier; 方濟各방제각, 1506-1552에게 인도선교를 의뢰하고 하비에르는 인도의 사도the Apostle of the Indies와 일본의 사도the Apostle of Japan의 사도로 불림)이고, 장녀 이자벨라(Isabel de Portugal, 1503-1539)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카를 5(독어 Karl V; 라틴어 Carolus V; 프랑스어 Charles V; 신성로마황제 1519-1556, 에스파냐 국왕 1516-1556, 1500-1558)와 혼인하며, 두 명의 추기경, 곧 아폰수(1509-1540) 추기경과 엔리케(1512-1580) 추기경의 어머니가 된다.

 

이자벨 1세는 막내딸 아라곤의 캐서린(라틴어 Katerina; 스페인어 Catalina de Aragón카탈리나; 이탈리아어 Caterina d’Aragona; 독어 Katarine; 프랑스어 Catherine; 영어 Catherine/Katherine of Aragon, 1485-1536/the name of one of the first Christian saints, Catherine of Alexandria 또는 순결한pure의 그리스어 καθαρός katharos에서 유래)을 튜더 왕가(House of Tudor) 또는 튜더왕조(Tudor dynasty)를 창시한 헨리 7(Henry VII, 재위 1485-1509, 1457-1509.4.21.)의 장남 아서 튜더(Arthur Tudor, 웨일스 공 아서Prince of Wales, 1486-1502)와 혼인을 맺게 해, 두 사람은 1501년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아서가 결혼한 지 6개월 후인 150242일에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헨리 7세는 당시 강력한 카를 5세와의 협력을 얻는 동시에 캐서린의 지참금을 잃지 않으려고 교황 율리오 2(라틴어 Iulius PP. II; 이탈리아어 Papa Giulio II; 영어 Pope Julius II, 재위 1503-1513, 1443-1513: 교황 식스토 4; 라틴어 Sixtus PP. IV; 이탈리아어 Papa Sisto IV; 영어 Pope Sixtus IV, 재위 1471-1484, 1414-1484의 조카다. 147128세의 나이에 추기경에 임명되고, 150360세에 교황 좌에 오름)에게 캐서린이 아서의 동생인 헨리 8세와 결혼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설득하고, 교황도 캐서린이 아직 처녀임을 인정해 이전의 혼인을 무효화시킨다.

 

헨리 7(Henry VII, 재위 1485-1509, 1457-1509.4.21)의 임종 2개월 후인 1509611일에 헨리 7세의 둘째 아들인 키가 약 188cm이고, 몸집이 크고 강한 체력을 가진 18세의 헨리8(Henry VIII, 재위 1509-1547, 1491-1547)를 아서의 미망이자, 헨리보다 6살 연상인 24세 캐서린(14851536)과 결혼이 이루어지고(levirate; 형사취수혼兄死娶嫂婚), 624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즉위식을 거행한다.

 

헨리8세와 캐서린 사이에 1511년 첫 아들을 낳았으나 몇 주 만에 사망한다. 이후 캐서린은 다섯 번의 임신과 유산을 거듭하지만 결국 생존한 유일한 혈육은 1516년에 태어난 공주 메리튜더(Mary Tudor), 곧 후에 여왕이 되는 메리 1(Mary I; 피의 메리Bloody Mary, 재위 1553-1558, 1516-1558) 뿐이다.

 

이자벨 1세는 1496년 둘째 딸 광녀 후아나(스페인어 Juana, 1479-1555)를 신성 로마 황제 막시밀리안 1(Maximilian[mæ̀ksǝmíljǝn] I, 1508-1519, 1459-1519)와 부르고뉴 여공작 마리(Marie de Bourgogne, 1457-1482: 남편이 황제가 되기 전 낙마사고로 사망)의 아들 카스티야의 펠리페 1(Felipe I, 미남왕le Beau, 1478-1506)와 결혼하여 , 둘 사이에서 24녀가 태어나짐, 펠리페 1세는 28세에 사망한다.

 

장녀 레오노르 데 아우스트리아(스페인어 Leonor de Austria; 독어 Eleonore von Kastilien; 프랑스어Eléonore 엘레아노르, 1498-1558)는 포르투갈의 마누엘 1(Manuel I, 재위 1495-1521, 1469-152)의 셋째 왕비(1518-1521: 첫째, 둘째 왕비는 외할머니 이자벨 1세의 딸로, 이모들임)가 되고, 마누엘 1세 서거 후 프랑스 르네상스의 아버지 프랑수아 1(프랑스어 François I, 재위 1515-1547, 1494-1547)의 두 번째 왕비(1530-1547)가 되었으나 자녀가 없다. 둘째 딸 오스트리아의 엘리사베트(스페인어 Isabel de Austria; 덴마크어 Elisabet af Østrig 엘리사베트 아프 외스트리, 1501-1525)는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국왕 크리스티안 2(덴마크어 Christian II; 노르웨이어 Christian II; 스웨덴어 Kristian II, 덴마크의 국왕 재위 1513-1523, 노르웨이의 국왕 재위 1513-1523, 스웨덴의 국왕 재위 1520-1521, 1481-1559)의 왕비이다. 셋째 딸 마리아 폰 외스터라이히(Maria von Österreich, 1505-1558)는 헝가리와 크로아티아의 국왕(재위 1516-1526)이자 보헤미아의 국왕(재위 1516-1526) 러요시 2(헝가리어 II. Lajos; 슬로바키아어 Ľudovít II루도비트 2; 크로아티아어 Ludovik II루도비크 2, 1506-1526)의 왕비이지만 둘 사이에 자녀가 없다. 막내 딸 카탈리나 데 아우스트리아(스페인어 Catalina de Austria, 1507-1578)는 사촌오빠 포르투갈 국왕 주앙 3(João III, 재위 1521-1557, 1502-1557)의 왕비로 63녀의 아홉 명의 자식들이 모두 주앙 3세보다 먼저 죽었기 때문에 주앙 3세의 5남의 아들 세바스티앙 1(Sebastião I, 별명은 대망왕, 아비스 왕조 포르투갈 왕국의 왕 재위 1557-1578, 1554-1578))가 왕위를 계승한다.

 

두 아들은 카를 5세와 차남 페르디난트 1세다. 이들에게 있어 이자벨 1세와 페르난도 2세는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다.

 

1519년 조부, 신성 로마 황제 막시밀리안 1(Maximilian[mæ̀ksǝmíljǝn] I, 1508-1519, 1459-1519)가 사망하자, 카를 5(독어 Karl V; 라틴어: Carolus V; 영어 Charles V, 재위 1519-1556, 1500-1558: 최초의 에스파냐 국왕 카를로스 1Carlos I, 1516-1556)는 교황 레오 10(라틴어 Leo PP. X; 이탈리아어 Papa Leone X; 영어 Pope Leo X, 재위 1513-1521, 1475-1521)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융자)채권 방식을 고안한 현대 금융업의 아버지, 당대 최고의 재벌 야콥 푸거(독어 Jakob Fugger von der Lilie; 영어 Jakob Fugger of the Lily, Jakob Fugger the Rich or Jakob II, 1459-1525)가의 재정지원으로 독일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선출된다. 카를 5세는 아버지를 통해 부르고뉴공령(프랑슈콘테와 네덜란드)과 오스트리아대공국을 상속받고, 모친을 통해서는 에스파냐왕국과 아프리카 및 이탈리아영토(시칠리아, 나폴리, 사르데야), 아메리카 식민지를 물려받았다. 헨리 8세의 첫 번째 왕비인 캐서린이 카를 5세의 이모이고, 나중에 그의 아들 펠리페 2세와 결혼하게 되는 메리 1(Mary I; 본명 메리튜더Mary Tudor; 피의 메리Bloody Mary, 재위 1553-1558, 1516-1558)는 카를 5세의 사촌이다.

 

카를 5세는 1556년 동생 페르디난트 1(Ferdinand I, 재위 1556-1564, 1503-1564)에게 신성 로마 제국을, 장남 펠리페 2(스페인어 Felipe II; 포르투갈어 Filipe I, 1527-1598)에게 스페인 왕국을 물려주고 에스파냐의 산 유스테San Yuste수도원에 들어간다.

 

카를 5세의 선가당시 레오 10(라틴어 Leo PP. X; 이탈리아어 Papa Leone X; 영어 Pope Leo X, 재위 1513-1521, 1475-1521)는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1(Carlos I, 1516-1556)와 프랑스의 왕 프랑수아 I(Franςois I, 재위 1515-1547, 1499-1547)보다 작센주(독어 Sachsen; 영어 Saxony)의 선제후(選帝侯; 라틴어 Princeps Elector; 독어 Kurfürst, pl. Kurfürsten; 영어 The Prince-electors or Electors: 신성로마 제국 황제를 선정하는 역할을 하였던 신성로마제국의 선거인단) 프리드리히 3(현공 賢公)(Friedrich III, Friedrich der Weise von Sachsen; 영어 Frederick III or Frederick the Wise, Elector of Saxony, 1486-1525, 1463-1525)를 황제후보로 지지하며,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의 단죄를 연기하기 위해, 레오 10세는 프리드리히 3세의 친척이었던 카를 폰 밀티츠(Karl von Miltitz, 1490-1529)를 작센대사로 보낸다. 그러나 루터와 라이프치히논쟁(Leipziger Disputation: 1519627-716일에 라이프치히에서 있었던 공개신학논쟁)을 한 인골쉬타트 대학(The University of Ingolstadt)의 신학교수인 요한 에크(독어 Johann Maier von Eck, 1486-1543)에 의해 이러한 계획이 결렬된다. 라이프치히논쟁이 있은 지 수 주일 후 카를 5세가 스 황제로 선출된다.

 

신성로마제국황제 카를 5세의 장남 펠리페 2(스페인어 Felipe II-영어 Philip II; 스페인어 Felipe el Prudente-영어 Philip the Prudent , 재위 1556-1598, 1527-1598)는 에스파냐 황금시대(the Spanish Golden Age)를 연다.

 

펠리페 2세는 1581년에 포르투갈과 해외식민영토를 에스파냐에 병합시키지 않는다는 조건 아래 포르투갈의 왕도 겸하게 된다. 그 까닭은 펠리페 2세의 생모가 포르투갈 왕국의 왕 마누엘 1(Manuel I, Manuel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God with us’히브리어 עִמָּנוּאֵלI mmanu'el에서 기원한 것이다. 비잔틴제국에선 Μανουήλ, 재위 1495-1521, 1469-1521)의 장녀인 이사벨(Isabel de Portugal, 1503-1539)이고, 게다가 16세 때인 1543년 결혼한 여성이 포르투갈 왕국의 왕 주앙 3(João III; 에스파냐어 Juan후안; 이탈리아어 Giovanni조반니; 프랑스어: Jean; 러시아어 Иван이반; 영어 John, 1502-1557)의 맏딸로 자신과 동갑내기인 16세 마리아 마누엘라(María Manuela de Portugal, 1527-1545)이기 때문이다

 

펠리페 2세는 1554년에 영국의 기독교화를 막으려고, 부친의 이모 캐서린(라틴어 Katerina; 스페인어 Catalina; 이탈리아어 Caterina; 독어 Katarine; 프랑스어 Catherine; 영어 Catherine 또는 Katherine, 14851536)의 딸이자, 천주교 수호자로, 자신보다 11세 연상인 38세의 메리 튜더(Mary Tudor; Blood Mary, 재위 1553-1558, 1516-1558)와 결혼하지만 자녀가 없자, 펠리페 2세는 영국에서 1년을 보내고 에스파냐로 돌아가서 펠리페 2세 왕이 된다. 메리 튜더는 펠리페 2세의 환심을 사기 위해 영국성공회신자를 박해한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자녀가 없다.

 

메리 튜더는 펠리페 2세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그리고 모친 캐서린의 복수를 위해서 영국성공회신자를 비롯해 프로테스탄트 관료들과 시민들을 박해하고 죽이며, 철저히 천주교신앙을 고수한다. 그러나 메리 튜더는 잉글랜드를 천주교화하여 펠리페 2세에게 바치려고 했을 만큼, 그녀에겐 국가지도자의 개념과 애국심이 부재하였다.

 

메리 튜더 사후 펠리페 2세는 영국을 천주교나라로 만들려고 자신보다 6세 연하인 엘리자베스 1(Elizabeth I, 재위 1558-1603, 1533-1603)에게 청혼하지만 거부당한다. 그래서 1586년 잉글랜드에서 25세의 배빙턴 경(Sir Anthony Babington, 1561-1586)을 중심으로 하는 예수회 비밀 결사가 기독교인 엘리자베스 1세를 암살하고, 1568년 이래 19년 동안 감금 중인 천주교도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Mary Stuart, 1542-1587을 구출하여 잉글랜드 여왕으로 추대하려고 벌인 배빙턴 음모사건(Babington Plot)이 펠리페 2세 아래서 진행된다. 그런데 여왕의 측근(1573-1590)F. 월싱엄 경(Sir Francis Walsingham, 1532-1590) 사건이 탐지되어 메리는 단두대에서 처형된다.

 

엘리자베스 1세를 제거하고 메리 스튜어트를 잉글랜드 여왕으로 앉히고, 결혼하려고 했던 자신의 계획이 물거품이 되자, 펠리페 2세는 잉글랜드에 대해 선전포고를 한다. 그는 1588년 무적함대(Spanish Armada, Armada Invincible)를 네덜란드를 돕는 영국으로 진군시킨다. 하지만 무적함대는 영국함대에 완패하고 제해권을 잃는다.

 

펠리페 2세와 예수회가 주도한 1586년의 배빙턴 음모사건은 에스파냐 태생의 예수회 선교사 알론소 산체스(Alonso Sanchez, 1547-1593) 사제의 중국 명나라(1368-1644)침략(1579년 멕시코에서, 1581년엔 필리핀으로 건너가 선교사역을 하는데, 그 때부터 중국 명나라를 정복해서 개종시키자고 주장을 한다. 그 이유는 1582년부터 명나라 선교사역하는 이탈리아 출신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리치; 이탈리아어 Matteo Ricci; 라틴어 Mattheus Riccius Maceratensis; 리치의 첫 발음과 마테오를 음역하여 중국어로 利瑪竇이마두, Matteo는 세례명, 1552-1610을 앞세워 명나라를 쉽게 정복할 것이라고 생각) 그리고 포르투갈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 가스파르 코엘류(Gaspar Coelho, 1530?-1590) 초대 일본 준관구장 등이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 秀吉, 1537-1598)에게 제안한 조선과 중국명나라 침략에 의한 선교전략이 시기적으로 동일하다.

 

6. 미국-스페인 전쟁

 

미국은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영어 Spanish-American War; 스페인어: Guerra hispano-americana 또는 미서전쟁美西戰爭)을 일으키고, 18981210일 파리조약을 맺으며, 미국은 스페인으로부터 쿠바(Cuba), 필리핀(Republic of the Philippines), (Guam), 푸에르토리코(Commonwealth of Puerto Rico)의 지배권을 넘겨받는다.

 

이 전쟁은 18952월 쿠바인들이 스페인 통치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일으킨 독립투쟁 과정에서 비롯되었다. 쿠바의 수도 아바나(스페인어 La Habana; 영어 Havana)에서 반()스페인 폭동이 발생하자, 1898215일 미국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군함 메인 호를 파견해 아바나 항구에 정박하던 중 폭발 사고가 일어난다. 미해군 260여 명이 숨진다. 사고 원인은 불확실했다. 미군은 스페인 함대를 괴멸시키고 90일 만에 쿠바와 필리핀을 점령한다. 스페인의 제의로 18981210일에 파리강화조약(The Treaty of Paris of 1898)이 체결되어 쿠바의 독립(쿠바는 1902년 독립되지만, 1901-1934 동안 미국의 보호국)이 승인되고, 배상으로서 미국은 푸에르토리코(Puerto Rico)와 괌(Guam)을 양도받았으며, 필리핀(The Republic of the Philippines: 필리핀이 본격적으로 역사에 등장한 것은 포르투갈 출신의 항해가, 탐험가인페르디난드 마젤란; 포르투갈어: 페르낭 드 마갈량이스Fernão de Magalhães; 스페인어: 페르난도/에르난도 데 마가야네스Fernando 또는 Hernando de Magallanes; 영어 Ferdinand Magellan, 1480-15211521년 필리핀 중부 세부 주의 막탄 섬Mactan Island에 도착하면서부터다. 1543년 에스파냐 탐험가 빌라로보스Ruy López de Villalobos. 1500-1544가 당시 오스트리아의 황태자 Philip of Austria-후에 국왕펠리페 2; 스페인어 Felipe II; 영어 Philip II of Spain, 재위 1554-1558, 1527-1598-의 이름을 따서라스 이슬라스 필리피나스Las Islas Filipinas’라고 이름을 지었고, 그 후 스페인 점령기에 전 섬을 필리핀Philippines이라 불러, 오늘날 나라 이름이 된다. 1571년부터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스페인이 패할 때까지 327년간 스페인 식민지였다. 일본은 하와이 진주만을 공격한 다음날인 1941128, 루손섬의 클라크 공군기지를 공습한 뒤 필리핀을 점령한다. 태평양 전쟁이 끝나고 다시 미국령으로 복귀했다가 1946년 독립)에 대하여서는 2천만 달러에 매수한다.

 

그 결과 스페인은 제국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고, 미국은 영향력을 태평양 지역까지 확장하며 유럽 열강에 필적하는 지위를 가지게 된다.

 

7. 에스파냐내전

 

1931년 정권을 잡은 에스파냐 공화당정부(The Republican government; 스페인 제2공화국Segunda República Española)가 매국노집단인 오컬트 바티칸을 말살시키기 위해 학교에서 천주교교육금(, 예수회축출, 스페인 영토의 1/3를 차지한 로마 가톨릭 재산을 국가재산으로 환원 등의 반가톨릭정책을 취하자, 비오 11(라틴어 Pius PP. XI; 이탈리아어 Papa Pio XI; 영어 Pious XI, 재위 1922-1939, 1857-1939)193363딜렉티시마노비스’(라틴어 Dilectissima Nobis; 영어 On Oppression[ǝpréʃən] of the Church of Spain)의 회칙을 통해 에스파냐 공화당정부를 비난한다.

 

1936717, 천주교도 바울로 프란시스코 프랑코(Francisco Franco, 재위 1939-1975 총통, 국가원수, 정부 수반, 내각의 의장, 1892-1975)장군이 독일의 히틀러, 이탈리아의 무솔리니의 지원아래 모로코인 용병을 포함한 자신의 직속 군대를 이끌고 공화당정부에 반대해 군사반란을 일으킨다. 그것이 에스파냐내전(The Battle for Spain, The Spanish Civil War, 1936-1939)으로 발전하자, 비오 11세는 프랑코 장군의 쿠데타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한다.

 

프랑코 장군은 공화당정부를 1933년에 창당된 국민주의, 전체주의 정당인 팔랑헤당(Phalange)1당 독재에 의한 파시즘국가로 대체한다고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하느님과 역사 앞에서만 책임이 있을 뿐이다” ‘

 

나는 정당을 미워한다

 

우리는 투표 행위 따위의 위선적인 방법이 아닌 총 칼과 동지들의 피로써 정권을 쟁취했다

 

프랑코 장군은 철저하게 반대파를 보복하기 위해 그들의 유아 납치를 저질렀고, 이 납치에는 천주교 수녀들까지 가담했을 정도다.

 

프랑코 독재 정권 아래에서 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로 전락하였다.

 

그리고 예수회자리에 오푸스데이(라틴어 Opus Dei; 영어 Work of God; 신의 과업: 스페인 출신 성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 라틴어 Sanctus Iosephmaria Escrivá; 스페인어 Josemaría Escrivá de Balaguer, 1902-19751928108일 설립하고, 1941년 로마 교황청에서 이 단체를 공식 승인하였으며, 회원은 주교와 신부<수도 사제 제외>, 평신도로 구성되어 있음)1956년 프랑코의 경제개발계획을 지지하며, 스페인에서 정치세력이 되었다. 프랑코 통치 말년에는 19명의 각료들 가운데 10명이 오푸스데이 소속이었다.

 

카롤 보이티야는 456년 만에 처음으로 비()이탈리아(폴란드) 출신으로 19781016일 요한 바오로 2(라틴어 Sanctus Ioannes Paulus PP; 이탈리아어 Papa San Giovanni Paolo II; 영어 Saint Pope John Paul II, 본명 Karol Wojtyla카롤 보이티야, 재위 1978-2005, 1920-2005)가 되었는데, 4년 후 1982년 오푸스데이를 자신의 직속 기구로 만들고, 2002106일 마침내 오푸스데이 창설자 에스크리바를 성인품에 올렸다.

 

그런데 매우 아이러니컬하게도 교황의 분열(1378-1417)을 종식시키기 위해 스스로 오컬트 바티칸의 교주자리에서 물러난 그레고리오 12(라틴어 Gregorius PP. XII; 이탈리아어 Papa Gregorio XII; 영어 Pope Gregory XII, 재위 1406.11.30.-1415.7.4., 1325-1417) 598년 만에 교주직을 중도 사퇴한 후 명예 교주’(emeritus pope)에 추대된 베네딕토 16(라틴어 Benedictus PP. XVI; 이탈리아어 Papa Benedetto XVI; 영어 Pope Benedict XVI, , 본명 Joseph Aloisius Ratzinger, 재위2005.4.24.-2013.2.27., 1927-: 신앙교리성 장관1981-2005)의 뒤를 이어 1282년 만에 교주로 선출된 비유럽 아르헨티나 출신 프란체스코(라틴어 Franciscus PP.; 이탈리아어 Papa Francesco; 그리스어 Πάπας Φραγκίσκος; 프랑스어 Pape François; 독어 Papst Franziskus; 영어 Pope Francis; 본명은 스페인어로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료 시보리 Jorge Mario Bergoglio Sívori’, 재위 2013. 3-, 1936-)는 첫 예수회 출신이다.

 

8. 종합

 

에스파냐내전은 모든 이념이 집결된 각축장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두부자르 듯이 파시즘, 나치즘 대 공산주의의 투쟁이라고 할 수 없다. 이 이념 안에도 갖가지 사상으로 무장된 사람들이 참여했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구분하는 것도 역사의 피상적인 인식이다.

 

에스파냐내전은 오컬트 바티칸세력들이 오직 자신들의 재산과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에스파냐에 자기들의 이익을 대변해주는 천주교지도자가 필요했다. 그 사람이 35년 넘게 파시즘 전체주의국가를 이끈 천주교도 바울로 프란시스코 프랑코(Francisco Franco, 1892-1975).

 

프랑코는 오푸스데이와 협력하면서 오컬트 바티칸의 이익대변에 앞장섰고, 그 결과로 프랑코 집권시기의 에스파냐는 유럽에서 가장 빈곤국가가 되었음은 물론 21세기의 자유민주공화국과 자유시장경제주의 그리고 건전하며 건강한 복지국가건설과는 거리가 먼 오컬트 바티칸의 체제를 모방한 파시즘 전체주의 독재주의국가였다.

 

에스파냐내전 희생자 4만 여명이 묻혀 있는전몰자의 계곡은 대한민국식의 국립묘지라고 할 수 있고, 프랑코는 이곳에 흰색 화강암으로 지어진 바실리커 모양의 특별묘역에 안치되었는데, 21세기의 자유민주공화주의의 지도자와는 거리가 먼 오컬트 바티칸의 독재체제, 전체주의 지도상이라 에스파냐의 국민의 동의로 프랑코의 유해가 헬기편으로 1988년 부인 카르멘 폴로가 안장된 마드리드 시내 밍고루비오 공동묘지로 이장되었다.

 

그리고 에스파냐내전에 대한 책이 쏟아져 나왔음은 물론 영화까지 제작되었다. 이것들이 에스파냐내전에 대한 세계시민의 사상을 반영한다고 필자는 생각하기 때문에 이것을 소개하고자 한다.

 

(1) 1953노인과 바다’(The Old Man and the Sea, 1952)라는 소설로 퓰리처상(Pulitzer Prize)1954년 노벨 문학상(스웨덴어 Nobelpriset i litteratur; 영어 Nobel Prize in Literature)을 수상한 헤밍웨이(Ernest Miller Hemingway, 1899-1961)공화파 지지자로 에스파냐내전에 미국의 50개 주요 일간지 발행사들로 구성된 북미신문연맹의 종군기자의 안전한 신분으로 참전하여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For Whom the Bell Tolls, 1940)라는 소설은 베스트셀러가 된다.

 

(2) 인도출생으로 전체주의를 비판하며 민주사회주의를 지지한 영국의 작가이자 언론인 조지 오웰(George Orwell; 본명 Eric Arthur Blair, 1903-1950)은 의용군으로 에스파냐내전에 참전하여, 졸지에 총상까지 입고 간신히 체포를 면해 구사일생으로 살아난다. 그는 내전을 미화하는 대신 오히려 그 이면의 부조리한 현실을 고발하는 데 전념한다. 그로 인해 나온 카탈로니아 찬가’(Homage to Catalonia, 1938: 전쟁의 어리석음과 스페인 인민들에 대한 애정이 가득 담긴 르포문학<르포는 르포르타주; reportage’의 준말로 기록 문학. 보고 문학을 일컬음>의 걸작)는 출간 15여 년이 지나도록 초판 1500부가 다 팔리지 않은 채 남아 있던 악성 재고였지만, 오늘날은 스페인 내전에 대한 가장 신뢰할 만한 기록 가운데 하나로 손꼽힌다.

 

그 후 오웰은 19458월 러시아 혁명과 스탈린의 배신에 바탕을 둔 정치우화 동물농장’ (Animal Farm)을 출간하여, 그는 일약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작가가 된다. 그는 또한 1949년 현대 사회의 전체주의적 경향이 도달하게 될 종말을 기묘하게 묘사한 공포의 미래소설의 최대 걸작인 ‘1984’(Nineteen Eighty Four, 1949)을 출판하여,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며 그의 명성을 확립한다.

 

(3) 사회적 사실주의(Social realism; 사회주의적 사실주의Socialist realism은 구소련, 중국, 북한에서 유행한 예술 사조) 영화를 많이 제작한 영국의 케넷 C. 로치(Kenneth C. Loach, 1936-: 1970케스Kes, 1969’로 매년 7월에 열리는 체코의 카를로비바리 영화제; 체코어 Mezinárodní filmový festival Karlovy Vary’ 대상을 받았으며, 1977년에는 대영제국훈장Order of the British Empire 4등급 수훈자로 지명되었으나 이를 고사했고, 2006년 제59회 칸 영화제에서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The Wind That Shakes the Barley’으로 황금종려상; 프랑스어 Palme d’Or’을 받았으며, 2014년에는 베를린 국제 영화제 명예 황금곰상; 독일어 Goldener Bär’수상자로 선정되었고, 2016년 제69회 칸 영화제에서 , 다니엘 블레이크I, Daniel Blake’로 황금종려상을 또 수상) 감독은카탈로니아 찬가를 바탕으로 국가와 자유’(Land and Freedom, 1994)이라는 영화를 제작했다.

 

(4) 나치의 괴뢰정부인 비시정부’(프랑스어 Régime de Vichy ; 영어 Vichy France; 정식 명칭은 프랑스국l’État français: 페탱은 2차 세계 대전 중에 나치 독일에 항복하고 프랑스 남부의 휴양 도시인 비시를 수도로 하여, 새 프랑스 정부를 세우고, 1940년부터 1944년까지 통치하나 194211월 나치 독일이 남부까지 점령하면서 비시 프랑스는 사실상 정부 기능을 전혀 수행하지 못하게 됨)수반을 지낸 앙리 필리프 페탱(Henri Philippe Pétain, 1856-1951)을 자신의 상관으로 모시며 자신의 맏아들인 이름을 패탱의 중간 이름 필리프를 따서 지을 정도로 존중했지만 그에게 사형선고를 선언하다가 고령을 참작해서, 대서양에 떠 있는 외로운 섬 일드외(the Île d’Yeu)의 독방에서 95세 나이로 사망케 했음은 물론 비시정부관련자들을 나치부역 및 전범자로 처형시킨 민족주의자로 프랑스 제18대 대통령이자 제5공화국 초대 대통령인 샤를 드골(Charles de Gaulle, 재위 1959-1969, 1890-1970) 정부에서 임시 공보장관(Minister of Information, 1945. 11-1946. 1), 세계에서 처음 독립부처로 창설한 문화부의 초대 장관(France's first Minister of Cultural Affairs, 1959-1969)을 역임하며 프랑스를 문화대국으로 발전시킨, 프랑스를 대변하는 민족주의자 앙드레 말로(1901-1976)인간의 조건’(La Condition humaine, 1933; 영역 Man’s Fate, 1934)의 소설을 발표하여, 1903년 설정된 프랑스 최고 권위의 공쿠르문학상(프랑스어 Le prix Goncourt; 영어 The Prix Goncourt) 상을 수상하면서 행동주의의 대표적인 세계적인 작가로 인정받게 된다.

 

그리고 그는 1936년에 에스파냐내란이 일어나자 프랑스작가이자 번역가이며 레지스탕스 일원인 자신의 아내 클라라(Clara Malraux, 1897-1982)와 함께 스페인으로가 공화국 공군을 조직, 지휘하여 국제의용군 항공대 비행대장 대령으로 참전하여, 그 체험을 바탕으로 르포르타주 소설의 걸작 희망’(프랑스어 L'Espoir, 1937; 영역 Man's Hope, 1938)을 집필해 스페인의 파시즘을 고발한다. 1938년에 그는 희망을 근거하여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서 직접 제작 감독한영화를 만들어낸다. 1945년에 개봉된 이 영화는 당해의 가장 창조적인 영화로 인정받아 루이들뤼크 상을 수상했으며 1970년에 재개봉되어 또 한 번 극찬을 받는다.

 

이처럼 말로는 행동의 문학의 표본을 보여주었다.

 

1957이방인’(프랑스어 L'Etranger, 1942; 영역 The Outsider, 1946 or The Stranger, 1989) 작품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1913-1960)가 수상 소식을 전해 듣고 처음 뱉은 말이 상을 받아야 할 사람은 말로인데일 정도였다.

 

(5) 유럽의 화폐가 유로화로 통일되기 전까지 프랑스에서 유통되던 50프랑 지폐에 어린 왕자(프랑스어 Le Petit Prince, 1943; 영역 The Little Prince)의 삽화와 자신이 담겨져 있던, 프랑스의 비행사(공군 장교)이자 작가인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Antoine Marie Jean-Baptiste Roger de Saint-Exupéry, 1900-1944)내전은 전쟁이 아니라 병()이다. ()이 내 안에 있고, 사람들은 자기 자신과 싸운다.”라고 에스파냐내전을 평가한다.

 

(6) 스페인 말라가(Málaga) 출신으로 프랑스에서 활동한 입체파의 거장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19371월 스페인 제2공화국 정부가, 그에게 5개월 뒤 개막하는 파리세계박람회의 국가관 전시할 작품을 의뢰한다. 에스파냐내전 당시 나치가 1937426일 오후 430분경 제2차 세계대전대비, 곧 창설 중인 공군의 신병기의 성능테스트를 위할 겸 프랑코 정권을 지원하기 위해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방의 친공화주의의 마을 게르니카(Guernica) 지역 일대를 24대의 비행기로 5만 발의 포탄을 3시간에 걸쳐 퍼 부는,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 폭격참상을 보고, 피카소는 흑색과 회색이 주된 기조(基調)인 가로 7.8m, 세로 3.5m게르니카’(Guernica, 1937)라는 작품을 창작한다.

 

게르니카는 동년 65일 개막한 파리세계박람회 국가관 전시되었는데, 단연 화제대상이었다. 박람회 폐막 뒤 게르니카는 유럽 각지를 순회했다. 193941일 에스파냐내전이 프랑코의 승리로 마무리되자, ‘게르니카는 미국으로 이송돼 스페인 난민을 위한 기금 마련 행사에 동원됐으며, 피카소의 요청에 따라 뉴욕현대미술관(MoMA, The Museum of Modern Art)에 기탁된다.

 

1940년 독일 점령 하의 파리에서 한 나치 장교가 피카소의 아파트에 걸린 게르니카의 사진을 보고 당신 작품인가?”라고 묻자, 피카소는 아니오, 당신들의 작품이지라고 답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정치에 무관심한 피카소는 자기 조국의 참상을 보고 잠시나마 공산당에 입당한다.

 

실상 피카소는 공습을 주도한 히틀러 정권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폭격을 사주한 스페인 프랑코 군부임을 고발하기 위해 그린 것이다.

 

그래서 피카소는 프랑코가 사망한 후 반파시즘 및 반전(反戰) 운동의 아이콘이 된게르니카작품을 스페인으로 보내라고 유언한다. 피카소 사후 8, 프랑코 사후 619819드디어 전쟁이 끝났다라는 신문의 헤드라인과 함께 그림이 완성된 지 44년 만에 스페인에 반환된다. 반환 후 스페인 수도 마드리드(Madrid)의 프라도미술관(Museo del Prado: 15세기 이후 스페인 왕실에서 수집한 미술 작품을 전시)에 소장되어 있다가, 1992년 마드리드의 국립소피아왕비예술센터(스페인어: Museo Nacional Centro de Arte Reina Sofía)에 이전된다.

 

피카소는 1951년에 다시 한 번 1.09m×2.09m 크기의한국에서의 대학살’(Massacre in Korea, 1951)이라는 그림을 통해 전쟁의 참상을 고발한다. 그런데 이 그림은 피카소가 공산당에 가입한 후 미군들이 한국인을 학살하는 장면을 그림으로 그린 것이다. 그래서 공산당원이던 피카소는 생애 단 한 번도 미국에 가 보지 못하고 죽는다.

 

뿐만 아니라 박정희 대통령 시절피카소 크레파스가 있었는데, 피카소가 공산당원이며, 6.25전쟁을 왜곡한 작품을 그린 작가라고 하여 그 명칭의 제품을 생산하지 못하게 하였다고 한다.

 

이런 사실을 감안할 때 비오 11세는 20세기 모든 이념들의 격전장이자 제2차 세계대전의 예고편인 에스파냐내전에서 생명사랑과 평화를 주장해야 하는데, 오직 천주교체제유지와 재산을 위해서 파시즘과 나치즘 주도자를 이끌고 인권탄압의 철권 통치자이자 독재자 프랑코 총통을 지지하여, 오컬트 바티칸의 실상이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됨에 대해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사제가 되기 위해 17세 때인 1951년 예수회가 설립한 캠피온 고등학교(Campion High School, a Jesuit institution in Prairie du Chien, Wisconsin)를 졸업하고, 예수회(he Society of Jesus)에 들어가나 후에 탈퇴한 게리 윌스(Garry Wills, 1934-)는 자신의 저서교황의 죄’ (Papal Sin: Structures of Deceit, 2000)에서 평균적으로 보면 미국 대통령들이 오컬트 바티칸 교주들보다 훨씬 바른 삶을 살았다고 고백한다.

 

게리 윌스가 주장한 것처럼, 오컬트 바티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섬김의 철학에 순종하기 보다는 오직 세계를 지배하기 위해, 온 세계를 카오스로 만드는 악의 집단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