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봄은 저만큼 물러가고 어느덧 여름의 길목, 녹음이 짙어가는 싱그러운 6월의 첫날이 되었습니다. 6월의 뜨거운 태양이 눈부신 초록을 만들어가듯, 우리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활기차고 건강하며 행복한 삶을 만들어 가시길 기원합니다.
2016(총선), 2018(6.13재보선), 2020(총선)의 서울 노원구 병에서 3번 낙선한 36세의 천주교 신자(안드레아) 이준석(李俊錫, 1985-)을 언론이 세대교체용으로 띄우는 이유는 전북 장수군 출신 50세의 천주교 신자(베드로)더불어민주당의 박용진(朴用鎭, 1971-)의원을 대통령 후보로 만들기 위한 천주교세력의 난리브루스이다.
그러면 천주교신도가 공직자가 되어서는 안되는 이유는 천주교전래를 살펴보면 자연스럽게 밝혀진다.
1. 1592년 임진전쟁 시 세례명이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 히포넨시스(라틴어 Aurelius Augustinus Hipponensis)고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소서행장, 1555? or 1558?-1600: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 재위 1603-1605, 1543-1616가 대승리해, 도쿠가와 바쿠후徳川幕府덕천막부; 에도 바쿠후; 江戶幕府강호막부; 1603-1868 시대를 열고, 고니시 유키나가는 에서 패배해 할복대신 예전 스페인 국왕 펠리페 3세Felipe III, 1598-1621, 1578-1621의 왕비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리타Margarita de Austria-Estiria, 1584-1611로부터 선물 받은 예수와 성모 마리아의 이콘을 들어 세 번 머리 위로 대고 난 뒤에 참수되었다고 할정도로 천주교골수분자다. 그의 죽음은 예수회를 통해 서구에까지 알려져 당시 바티칸의 교황 클레멘스 8세Clemens PP. VIII, 이탈리아어: Papa Clemente VIII, 재위 1592-1605, 1536-1605는 그의 죽음에 대해 애도를 표한다는 말을 했고, 그의 사후 7년 뒤인 1607년에 이탈리아의 제노바에서 그를 주인공으로 하는 음악극이 만들어짐)가 조선 침공 선봉대 제1군의 지휘관이 되고, 그의 초청으로 에스파냐 출신 예수회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Gregodio de Cespedes, 1551-1611)신부가 1593년 12월 27일 최초로 오늘날 경남 진해시 남문동 웅천왜성에 발을 딛음으로써 조선천주교와의 접촉이 이루어진다. 세스페데스 사제는 웅천왜성에서 한 해 정도를 머물면서, 고니시 유키나가의 천주교부대원들을 위해 미사를 집전하며 고해성사의 사목활동을 했다. 그 당시는 중국명나라와 일본이 화친조약회담을 진행하던 시기였지만, 왜군 진영 밖으로 나가 조선인의 선교사역은 거의 불가능했던 상황이었다.
세스페데스의 고향인 스페인 알카르데테드 주민들은 그가 조선을 방문한 지 400년째를 맞은 1993년 기념비를 만들어 당시 진해시(현 창원시 진해구)에 선물했다. 창원시는 시비 3억 원을 들여 세스페데스 기념공원을 조성했다고 하는데, 그것은 매국노짓거리에 불과하다.
2. 1614년 지봉(芝峯) 이수광(李睟光, 1563-1629)이 편찬한 조선 최초의 백과사전 ‘지봉유설’(芝峰類說 , 1614: 목판본으로 20권 10책이다. 목차가 20개, 단행본 10개가 모여 한 세트를 구성)은 이탈리아 출신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리치(이탈리아어 Matteo Ricci; 라틴어 Mattheus Riccius Maceratensis; 리치의 첫 발음과 마테오를 음역하여 중국어로 利瑪竇이마두, Matteo는 세례명, 1552-1610)의‘천주실의’(天主實義, 1603; The True Meaning of the Lord of Heaven: 천주에 대한 참된 의미)를 소개함은 물론 지구가 네모진 것이 아니라 둥글다는 것을 제시하며, 조선인으로 하여금 유교문명권 이외에도 기독교문명권 이슬람문명권 그리고 불교문명권을 인식하게 함으로써, 중국 외에 수많은 나라가 존재하기 때문에, 중국 중심의 세계관인을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한 혁명적인 역작이다.
1579년 이탈리아 예수회 신부 미켈레 루지에리(Michele Ruggieri, 중국명 羅明堅루오밍지엔, 1543-1607)가 중국 선교를 위해 최초로 마카오로 왔고, 마테오리치는 이보다 3년 뒤인 1582년에 마카오에 도착했다.
루지에르가 1584년 저술한, 중국 명대에서의 최초의 한문본 천주교 교리서인‘천주실록’(天主實錄; 마테오리치와 중국유교학자의 윤색을 거쳐 원고를 새롭게 정리하였다는 것을 강조하여 서명을 ‘신편서축국천주실록新編西竺國天主實錄’이라 했고, 로마의 예수회 고문서실에 소장되어 있으며, 1637년 이후엔‘천주성교실록天主聖敎實錄’으로 개명하여 출간하였는데, 바티칸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음) 불교적 색채가 담겨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중국보다 먼저 일본에 들어가 활동했던 예수회 선교사들이 일본에서는 불승이 일본인으로부터 존경받는 지식인의 신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 영향으로 루지에리 등 초창기 선교사들도 중국에 발을 들일 때부터 머리를 깎은 민머리에 가사를 걸치고 불가의 승려 신분을 취하여 접근하며, 스스로를 ‘승(僧)’, ‘천축승’(天竺僧인도승려)이라고 자칭하였고, 당시 중국 사람들도 예수회 신부들을 서역에서 온 승려, 곧 서승(西僧), 번승(番僧-)이라 여겼다. 그들이 처음 자오칭(肇慶조경)에 갔을 때 지방관도 예수회선교사들(西士서양선비)들이 세속을 떠나 도를 닦으며, 여색을 끊고 혼인도 하지 않는 불자(佛子)들과 다르지 않다고 여기고 조경부(肇慶府)의 동쪽 천령사(天寧寺)에 머물게 하였다.
루지에리는 교리서에 부지불식간에 불교적 용어도 차용, 서술하여 예수회의 적응주의 선교(Jesuit adaptationism)를 실시하였다. 루지에리가 저술한 책의 최대의 성과는 최초로 지상(至上), ‘지고’(至高)의 신의 이름을 ‘천주’(天主)라는 명칭으로 규정하여, 한자문화권에서 Catholicism을 바로 ‘천주교’(天主敎)라고 부르게 한 것이다. 대한민국의 천주교는 루지에리의 저서‘천주실록’에서 기인 한 것이다.
한편, 기독교의 ‘하나님’의 명칭은 이렇게 태어났다.
스코틀랜드 연합장로선교회(the Scottish United Presbyterian Mission)로부터 1872년 중국에 파송되어, 만주와 조선선교에 주력한 존 로스(John Ross, 罗约翰나약한, 1842-1915)는 “조선인에게 ‘heaven’은 ‘하ᄂᆞᆯ’(hanal)이고, Lord 혹은 prince는 ‘님’(nim)이다. ‘하나님’(hananim)은 어느 곳에서든 위에서 다스리시는 분이고, 지상에서 가장 높은 분이라고 조선인들이 알고 있는 낱말이다.”라고 하면서 ‘하나님’명칭을 사용했는데, 후에 제임스 S. 게일(James Scarth Gale, 조선어 이름 奇一, 1863-1937) 선교사가 1911년 ‘성경전서’ 출판기념사에서‘하나님’성호 주장하고, 참가한 모든 사람들이 동의하여, 그 때부터 ‘하나님’성호가 사용되었다.
이렇듯 ‘천주’의 명칭은 중국청나라선교사들에게서 태어난 외래어라면,‘하나님’의 성호는 조선선교사들에게서 기원된 순수한 한글이다.
루지에리는 달리 마테오리치는 유생(儒生)들과 지식인들의 권고로 중국 청나라에서는 불승을 천하게 여기는데 반해, 유자(儒者)들은 사회를 주도하는 최고의 지식층으로 존경을 받는 다는 것을 알고, 승려신분에서 벗어나 유자신분으로의 적극적인 전환을 시도할 뿐만 아니라 불교색이 짙은 루지에리의 ‘천주실록’을 바로 잡고자 하여 리치가 ‘천주실의’를 지었다. ‘천주실의’는 불교와 도교에 대해 극단적인 부정적 비판을 가하는 ‘보유역불론’의 선교전략을 수립하여, 예수회의 적응주의의 선교가 실패작임을 증언한다.
3.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
성호 이익은 ‘성호사설’(星湖僿說:성호星湖는 이익의 호이며, 사설은 ‘세쇄細碎-매우 가늘고 작음’한 논설을 의미)로 유명하다. 이 저서는 천지문(天地門), 만물문(萬物門), 인사문(人事門), 경사문(經史門), 시문문(詩文門)의 다섯 문으로 분류해 총 3007편의 항목에 대한 글이 실려 있는 백과사전이다. 성호가 40세 전후부터 학문과 사물의 이치탐구에서 깨닫거나 제자들의 질문과 답변 등의 지식을 그때그때 기록해 둔 것들을 그의 나이 80에 이르렀을 때에 집안 조카들이 정리한 책인데, 그의 제자 안정복(安鼎福, 1712-1791)이 다시 정리한 것이 ‘성호사설유선’(星湖僿說類選)이다. 이 저서는 이중환(李重煥, 1691-1756), 박지원(朴趾源, 1737-1805), 박제가(朴齊家, 1750-1805), 정약용(丁若鏞, 1762-1836), 박지원(朴趾源)의 학문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성호는 마테오리치의 ‘천주실의’를 읽고 예수의 동정녀 잉태설, 부활설, 천당지옥설 등은 실증할 수 없는 황당무계한 궤변으로 치부하며, 유학을 보호하려는 입장에서‘천주실의발’(天主實義跋)을 쓴다.
그래서 성호학파는 자연스럽게 천주교를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우파인 신서파(信西派)와 유학의 관점에서 천주교를 분석하고 비판하는 좌파인 공서파(攻西派)로 구분되어, 남인엔 공서파와 신서파가 존재한다.
후에 언급하겠지만, 이것이 발전되어 영조(英祖, 재위 1724-1776, 1694-1776) 지지의 왕당파로 성리학중심의 조선왕조를 지키고 이에 저항하는 사도세자(思悼世子또는 장헌세자莊獻世子, , 1735-1762: ‘사도思悼’란 ‘세자를 생각하며 추모한다’는 의미다. 어릴 때 소론의 지지를 받는 경종景宗, 재위 1720-1724, 1688-1724 비 어씨의 상궁들에 의해 양육되고, 세자시절에는 소론 계열의 학자들로부터 학문을 배움)를 단죄하며 천주교를 박해하는 노론벽파(僻派) 그리고 사도세자옹호파로 천주교에 대해 우호적이거나 묵인한 정조를 지지하는 시파다.
4. 이벽(李蘗, 1754-1786)과 천진암
역사조작 문서조작에 뛰어난 천주교측의 자료에 근거하여 필자가 언급하기 때문에, 이것을 유의하며 독자들이 필자의 글을 읽으면 기독교 모조품에 지나지 않는 천주교에 빠지지 않는다.
이벽(李檗, 1754-1785)의 가문은 문무(文武)를 겸했는데, 후손들이 대부분 기골이 장대하여 증조부 이후로는 주로 무관직에 종사하였다. 형 이격(李格)과 동생 이석(李晳)은 무관 벼슬의 장군으로 활약했다. 이벽은 키가 2m가 넘는 8척의 거구로 한 손으로 무쇠 100근(60Kg; 1근=약 600g)을 너끈히 들어 올릴 수 있을 정도이며, 외모로 풍기는 위엄이 있어 모든 이의 시선을 끌었던 미남자로 공중에서 몸을 3바퀴씩 핑글핑글 돌아서 사뿐히 땅에 내려와 서기도 하였고, 사람 키의 2배나 되는 높이까지 뛰어 올라, 일반 어른 키의 2길씩이나 뛰어넘었다고 한다.
(1) 이벽의 6대조 묵암 이경상(1603-1647)에 대한 것은 일반역사에선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하찮은 인물일 뿐만 아니라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벽에 대한 이야기도 과장이 너무 지나치다.
천주교 논리에 의하면 이경상은 1636년의 병자호란 때 선양( 랴오닝성遼寧省요녕성-성도省都: 선양沈阳심양=옛 지명의 펑톈奉天봉천)에 인질로 잡혀간 소현세자(昭顯世子, 1612-1645)를 8년간 모셨다고 한다.
1644년 청군 대장 다르곤이 베이징(북경)으로 진군하면서 명의 최후를 확인시키기 위해 소현세자를 대동했다. 소현세자는 베이징에서 70여 일을 체류하면서, 독일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 요한 아담 샬 폰 벨(Johann Adam Schall von Bell, 중국명湯若望 탕약망, 1591-1666) 신부를 만나 천주교와 서양 문물을 접하고, 그와 함께 연구진을 구성해 천문, 지리학, 수학, 지동설, 항해법, 화포 제조법, 토목공사법 등을 전수받는다. 소현세자가 9년간의 인질생활 끝에 1645년 귀국할 때 아담 샬 신부에게 받은 천주교 서적 중 일부가 이벽 집안에 전해져왔다고 한다. 이런 차원에서 보면 이벽은 천주교 사제를 통해서라기보다는 조상들이 전해준 천주교서적들을 통해 스스로 천주교를 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 이벽은 1779년 경기도 광주 천진암(天眞菴)에서 강학회(講學會)를 결성하여 약 5년간 천주교교리연구와 강의 그리고 공동생활을 하며 자생적으로 천주교 신앙운동이 일어나게 되는 기반을 조성한다. 천진암은 천진당(당산제 등을 지낼 때 모셨던 단군의 영정影幀이 있음)이 있던 자리고, 후에 불교의 천진암(天眞庵)이 들어섰다가 폐찰이 되고, 나중에 제지공장으로 사용되다가, 이벽을 비롯한 4인의 남인학자들이 자신들의 호의 돌림자 ‘암’(암자, 절 ‘암菴’)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필자는 천주교의 글이나 문서를 신뢰하지 않기 때문에 독자여러분이 이들의 호를 점검하기 바란다.
그리고 세례명도 없는 정약용을 천주교신자로 만들려고 다음과 같은 역사조작이 이루어진다.
요한 바오로 2세(라틴어 Sanctus Ioannes Paulus PP; 이탈리아어 Papa San Giovanni Paolo II; 영어 Saint Pope John Paul II, 재위 1978-2005, 1920-2005)는 지난 1984년 5월 6일, 서울을 방문해, 한국천주교회 순교복자 103위를 시성한 후, 동년 10월 14일 성베드로대성당에서 개최된 103위 한국 순교성인 첫 번째 축일 장엄 대미사 강론을 통하여, 한국천주교회는 1779년부터 1835년까지 56년간이나 성직자없이, 한국평신도들이 자발적으로 진리를 탐구하고 실천하는 강학회 활동으로 한국교회를 세웠으니, 마땅히, 이 평신도들은 ‘한국천주교회 창립자들’이라고 불러야만 한다고 선언하였다.
뿐만 아니라, 1993년 9월 21일, 천진암 성지 100년 계획 천진암대성당 정초식에 당시 주한 교황대사 존 불라이 티스(John Bulaitis, 재위 1991-1997, 1933-2010: 런던출생으로 1958년 리투아니아에서 사제서품을 받은 고위 성직자) 대주교를 통하여 전달된 오컬트 요한 바오로 2세가 작성하고 친필 서명한 머릿돌 강복문에서, ‘천진암 성지를 한국천주교회 탄생지’라고 언명하였다.
그러면 천진암 강학회에 정약용 형제들이 참여했기 때문에, 정약용 가계를 통해 이들의 천주교입문여부에 대해 살펴보자.
첫째, 나주정씨 정재원(丁載遠, 1730-1792)와 의령(경남) 남씨 남하덕(南夏德)의 딸(1729-1752) 사이에 정약현(丁若鉉, 1751-1821)이 태어나는데 세례자 요한 이벽(李檗, 1754-1786)의 누나 경주이씨(1750-1780)와 혼인하여, 3남 6녀를 두었으며, 천주교를 받아들이지 않고 화를 면하여 집안을 보전하였으나 1821년 9월 전염병으로 죽었다. 그런데 맏딸 마리아 정난주(丁蘭珠, 아명 命連명련, 1773-1848)는 알렉시오(Alexis) 황사영(黃嗣永, 1775-1801)과 결혼하여 아들 황경한(黃景漢 또는 황경헌黃景憲)을 둔다.
황사영백서사건으로 황사영은 체포되어 능지처참에 처해졌으며, 숙부 황석필(黃錫弼)은 함경도 경흥으로 귀양을 갔고, 홀어머니는 관비가 돼 거제도로, 부인 정난주는 제주 대정현의 관노로 유배되던 중 당시 2살이던 아들 황경한을 제주시 추자도 예초리 해안가에 내려두고 떠났고, 예초리 주민 오씨 부인이 울고 있는 아이를 데려다 키웠다고 한다.
둘째, 나주정씨 정재원(丁載遠, 1730-1792)+해남 윤씨 윤덕렬(尹德烈)의 딸 윤소온(尹小溫, 1728-1770: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1587-1671의 증손인 윤두서尹斗緖, 1668-1715의 손녀. 윤선도의 5대 손녀)사이에 3남 1녀가 태어난다.
정약전(丁若銓, 1758-1816): 1801년(순조 원년)-1814년(순조 14년)의 13년 동안 흑산도에서 유배생활하면서 이곳에서 죽었다. 저서로는 흑산도 연해의 어류 생태계를 연구, 기록한 최초의 해양어류전문지인 ‘자산어보’(총 3권으로 이뤄져 있으며 원본은 없고 필사본만 남아 있음)가 있다.
아우구스티노 정약종(丁若鍾, 1760-1801): 1794년 중국 청나라 야고보(세례명) 저우원모(周文謨주문모, 1752-1801) 신부가 조선천주교사에서 조선에 최초로 입국하여 북촌 계동에 있는 역관 최인길의 집에서 처음으로 천주교 미사를 집전하며 전교활동을 펼치며, 천주교회의 교리 연구, 전교 활성화를 위해 결성한 평신도 단체인 명도회(明道會)의 회장을 역임했다. 한글로 최초로 천주교교리서 3권, 곧 ‘주교요지’(主敎要旨)를 출판했고, 1801년 2월에 ‘성교전서’(聖敎全書)를 집필하던 도중에 일어난 1801년 2월 22일의 신유박해(辛酉迫害)의 여파로 인해 체포되어, 장형(杖刑곤장으로 볼기를 치던 형벌; 곤형棍刑)을 맞아 죽었다,
정약종의 둘째 부인(한산 이씨 이수정李秀廷의 딸) 아들인 가롤로 정철상(丁哲祥, ?-1801)은 1801년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며, 정약종도 이승훈·최필공·최창현 등과 함께 서문 밖에서 참수당하면서 순교하였다. 2014년 8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국을 방문하였을 때에 시복되었다.
정약종의 셋째 부인 체칠리아(Caecilia) 유소사(柳召史, 1761-1839)가 남편 서거 후 아들 바오로 정하상((丁夏祥, 1795-1839: 이문우등과 함께 앵베르 주교에게 라틴어와 신학을 배운 신학생. 성직자 영입, 신학생 선발<김대건,최양업, 최방제> 등에 참여한 천주교회 평신도 활동가로 ‘상재상서’를 저술하여 조선의 천주교 박해가 부당하다고 주장), 딸 엘리샤벳(Elisabeth) 정정혜(丁情惠, 1797-1839)와 함께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당시 경기도 광주부 초부면 마재<마현馬峴>)에 있는 시동생 정약용의 집에 가서 살았지만, 정약용을 비롯한 정씨가계는 천주교란 말만 들어도 벌벌 떨며, 그런 교를 계속 믿으려 한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고, 통렬한 비난, 협박, 멸시, 조소, 심지어 학대까지도 모두 동원하여 이들이 천주교를 버리게 하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정하상은 이런 박해를 견디며 조선의 사제초빙을 위해 9차례나 중국청나라를 방문하며 조선천주교재건에 앞장선다.
1925년 비오 11세(라틴어 Pius PP. XI; 이탈리아어 Papa Pio XI; 영어 Pious XI, 재위 1922-1939, 1857-1939)가 성 베드로 광장에서 집전한 조선인 천주교신도 79위 시복식을 통해 유소사 체칠리아와 정정혜 엘리사벳은 복자품에 올랐고,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을 기념하여 방한한 요한 바오로 2세(라틴어 Sanctus Ioannes Paulus PP; 이탈리아어 Papa San Giovanni Paolo II; 영어 Saint Pope John Paul II, 재위 1978-2005, 1920-2005)가 1984년 서울특별시 여의도에서 집전한 조선인 천주교신도 103위 시성식을 통해 성인품에 올랐다.
정약용(丁若鏞, 1762-1836): 1801년의 신유박해(辛酉迫害)로 정약용은 경상도 포항 부근에 있는 장기로 유배되었다. 그러나 그는 곧 이어 발생한 ‘황사영백서사건(黃嗣永帛書事件)’의 여파로 다시 문초를 받고 전라도 강진(康津)에서 1818년(순조 18) 유배에서 풀려날 때까지 약 18년간의 길고긴 유배생활을 한다. 어머니 해남 윤 씨의 할아버지 윤두서의 집안은 당대 강진 해남 일대를 다스리던 사대부 귀족이었다. 윤두서의 손자 윤단은 시대의 천재 정약용을 위해 만덕산 중턱의 정자를 내어주었고, 정약용은 사돈댁의 후원을 받으며 독서와 저술 작업에 몰두할 수 있었다. 정자는 훗날 다산초당으로 불리게 되었는데,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붙여 만든 현판이 걸려 있다.
정약종 여동생이자 정약용의 누나 평창 이씨 베드로 이승훈(李承薰, 1756-1801)에 출가했다.
셋째, 나주정씨 정재원(丁載遠, 1730-1792)과 김의택(金宜澤, 1694~?)의 딸 우봉 김씨(牛峰金氏, =岑城金氏, 1754-1813) 사이에 1남 3녀가 태어났다.
정약횡(丁若鐄, 1785-1829): 부인은 청주 한씨(淸州韓氏), 평창 이씨(平昌李氏), 여흥 민씨(驪興閔氏) 셋이나 되었는데 모두 일찍 사망하였다. 첫 부인인 한 씨는 한영익(韓永益, 1767~?, 자:時重)의 누이였는데 이런 이유로 정약용은 한영익과 함께 급변을 꾸민 것으로 1799년에 조화진(趙華鎭, ?~?)에게 고발당하는 일도 있었다.
3녀 큰딸이 채제공(蔡濟恭, 1720~1799, 호:樊巖)의 서자인 채홍근(蔡弘謹, ?~?)과 결혼했다.
이벽은 마재에 있는 누님 댁, 즉, 정약현의 집에 자주 들려, 매우 영리하고 학구적인 어린 사돈들, 곧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에게 천문학과 지리학, 의학, 수학, 역학, 기하원본과 천주교 등에 대한 지식을 가르쳐 줌으로써, 이들 삼형제로부터 존경과 신망을 받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자연스레 이루어지게 되고, 삼형제를 천진암 강학회에 초청하였다.
5. 베이징(北京북경)의 사절단
먼저 사행(使行)의 구성원에 대해 살펴보자.
첫째, 3사신(三使臣)
3사신은 사행의 우두머리인 정사(正使; 상사上使), 부사(副使), 서장관(書狀官)으로 구성되었는데, 서장관은 임시 벼슬인 기록관으로 귀환한 뒤 문견단자(聞見單子)를 왕에게 올리고, 왕의 재가를 받아 이를 승정원(承政院: 국왕의 비서기관)에 보내 등록하였다. 뿐만 아니라 일행을 감찰하고 도강(도하渡河: 강을 건넘) 할 때에 일행의 ‘인마’(人馬: 사람과 말), ‘복태’(卜駄: 말에 실은 짐바리)를 점검하기도 하는 행대어사(行臺御史/행대行臺: 임시로 겸한 사헌부司憲府의 관직. 삼사三司는 백관百官모든 벼슬아치에 대한 감찰, 탄핵하는 사헌부司憲府 , 국왕에게 간쟁諫諍하는 사간원司諫院, 궁중의 경서 및 문서 따위를 관리하고 임금의 자문에 응하는 일을 맡아보던 홍문관弘文館)를 겸했다.
둘째, 종사관(從事官)
종사관은 대부분 역관으로 구성되었는데, 역관은 통역관이면서 외교관이었고, 외국 현지사정을 탐지하는 정보원인 동시에 양국 간의 문물을 교류하는 중간자, 무역상이었으며, 문화인이자 골동품 감식가였다. 역관들은 평소에 조선정부로부터 월급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사신을 따라 중국에 갈 때 한몫 챙겨, 거부가 된 역관들이 많다.
셋째, 자제군관(子弟軍官)
자제군관이란 한자어(아들 ‘자子’, 아우 ‘제弟’ , 군사 ‘군軍’, 벼슬 ‘관官’)과 보여주듯이, 외국에 보내는 사신의 아들이나 동생 또는 조카 등을 군관으로 임명하여, 견문을 쌓도록 한 제도다.
1783년 황인점(黃仁點)을 정사(正使)로 하는 사절단이 구성될 때, 이승훈(李承薰, 1756-1801, 베드로)의 부친 이동욱(李東郁)은 서장관(書狀官)으로 사절단의 일원이 되어 베이징(北京북경)에 가게 되었는데, 이승훈도 부친을 수행하여 가게 된다. 이 때 이벽은 이승훈을 찾아가 베이징에서의 임무, 곧 먼저 세례를 받고, 교리와 그 실천 방법을 자세히 살피고 올 것과 천주교에 관한 서적을 구해 올 것을 부탁한다. 이듬해(1784) 주교좌(主敎座)성당인 남천주당에서 필담으로 교리를 배운 후, 동년 음력 1월 프랑스 예수회 선교사들의 포교 본부인 베이징의 북천주당(북당北堂)에서 프랑스 예수회 그랑몽(Jean Joseph de Grammont, 1736-1812, 중국명 梁棟材양동재, 1736-1812?: 1750년 예수회에 입회)신부로부터 조선인 최초로 세례를 받고, 조선 천주교회의 주춧돌이 되라는 뜻에서 ‘베드로(반석)’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1784년(정조 8년) 4월 13일(음력 3월 24일) 이승훈은 성서와 성상, 묵주 등을 가지고 한양에 돌아온다.
그런데 이승훈의 세례는 무효다. 그 까닭은 그랑몽은 오컬트 바티칸의 명령을 준수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이승훈의 세례의 효력을 인정하면, 오컬트 베드로 수위권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클레멘스 14세(라틴어 Clemens PP. XIV; 이탈리아어 Papa Clemente XIV; 영어 Pope Clement XIV , 재위 1769-1774, 1705-1774)는 한때 이냐시오 데 로욜라오(라틴어 Sanctus Ignatius de Loyola; 스페인어 Ignacio de Loyola, 1491-1556)를 공경했음에도 불구하고 정도에서 벗어난 예수회의 지나친 정치적 행위 때문에 1773년 6월 9일 자신이 서명한 칙서 ‘구세주’(라틴어 Dominus ac Redemptor; 영어 master and for our redeemer)를 통해 예수회를 강제로 해산했기 때문에, 프랑스 예수회 회원들은 모두 중국 청나라의 선교에서 손을 떼어야했다. 그러나 그라몽 신부를 비롯한 방타봉(de Ventavon) 등 6명의 예수회 회원은 클레멘스의 칙서를 무시하고 1785년까지 북당에 계속 머물러 있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클레멘스 14세는 예수회해산 그 이듬해인 1774년 9월 22일 서거하고, 비오 7세(라틴어 Pius PP. VII; 이탈리아어 Papa Pio VII; 영어 Pope Pius VII, 재위 1800-1823, 1742-823)가 1814년 예수회를 복구시킨다.
오컬트 바티칸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곧 불법으로 사제직을 행한 그랑몽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이승훈은 1784년 초겨울, 한성부(漢城府) 남부(南部: 현재 서울 중구) 수표교(水標橋) 근처의 이벽의 생가에서 이벽(李檗, 세례명 ‘세례자 요한’, 1754-1785), 권철신(權哲身, 세례명 ‘암브로시오’, 1736-1801), 권일신(權日身, 세례명 프란시스코 하비에르, 1742-1791), 정약종(丁若鍾, 세례명‘아우구스티노, 1760-1801) 등 20대의 동료선비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렇게 클레멘스 14세의 명령불복종으로 태어난 세례자 요한 이벽, 베드로이승훈, 암브로시오 권철신, 프란시스코 하비에르 권일신, 복자 아우구스티노 정약종을 한국천주교회 창립성조 5위라고 한다.
이렇듯 한국천주교기원자체가 불법이다.
6. ‘명례방공동체’(明禮坊共同體)
베드로 이승훈은 김범우(金範禹, 1751-1786?: 국내 최초 천주교 순교자), 최인길(崔仁吉, 1765~1795), 지황(池璜, 1767~1795), 최창현(崔昌顯, 1759~1801), 이존창(李存昌, 1759~1801) 등에게 세례를 주면서, 신도들의 숫자가 점차 증가하자, 1784년 초겨울부터 1785년 봄 사이에 모임 장소를 수표교에서 멀지 않은 한성부(漢城府) 남부(南部) 명례방(明禮坊)에 위치한 김범우(金範禹, 1751~1786?, 토마스)의 역관(한의원과 한약방을 겸하는 집안으로 양반, 상민, 남녀노소가 진맥과 치료를 빙자하여, 자유로이 출입할 수 있어 선택)의 집으로 옮겼는데 이곳이 당시 행정구역상 명례방에 속했기 때문에 당시 천주교신도의 모임을 천주교측에서‘명례방공동체’(明禮坊共同體)라고 부른다.
그런데 조정에서 형조의 포졸들을 파견해 불시에 김범우의 집을 방문해, 불법의 신앙집회에 참여한 양반자제들에겐 아량을 베풀고, 중인과 상민은 혹독하게 다룬다. 김범우는 참혹한 형벌 끝에 너덜너덜해진 몸으로 귀양을 떠나 뒤에 그곳에서 죽었는데, 이것이 바로 1785년 봄에 일어났던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 일명 명례방사건)이다. 1785년 명례방공동체가 와해된 때로부터 113년이 지난 1898년 5월 29일 이곳에는 고딕식의 장엄한 명동성당(明洞聖堂)이 건립됨으로써, 명동성당은 현재까지 한국 천주교회를 대표하는 상징적 건물이 되었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천주교운동이‘천진암의 강학회’에서 시작되었지만, 그 열매(불법세례)를 맺은 곳은 한성 수표동 ‘이벽의 집’이고, ‘명례방공동체’가 현재 명동성당의 전신이기 때문에, 불법으로 태어난 한국천주교의 기원은‘천진암’이 아니라 ‘이벽의 생가’나 ‘명동공동체’가 되어야하는데, 오컬트 바티칸과 한국천주교가 천주교와는 무관한 정약용을 천주교신도로 만들려고 ‘천진암’을 한국천주교의 모태로 규정하는 역사조작을 감행하였다.
7. 1801년(순조 1년)에 발생한 신유박해(辛酉迫害)
조선 최초의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1791년의 신해박해(辛亥迫害)인데, 여기에선 지면관계상 신유박해에 대해서만 언급하겠다.
1799년 사도세자스승, 정약용, 이가환 등의 정치적 후견자, 남인의 영수 영의정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이 서거하고, 그 이듬해인 1800년 남인 시파(時派: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思悼世子 또는 장헌세자莊獻世子, 1735-1762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기며 조선의 성리학을 부정하는 천주교도)를 두둔하던 정조(正祖, 재위 1776-1800, 1752-100)가 승하하고, 그의 아들 순조(純祖, 재위 1800-1834, 1790-1834)가 10살의 어린 나이로 왕이 되자, 영조(英祖, 재위 1724-1776, 1694-1776)의 계비(1759-1776) 정순왕후 김씨(貞純王后, 1745-1805: 혼례를 올릴 당시 영조의 나이는 66세, 정순왕후는 15세였기 때문에 영조의 총애는 깊었지만 임신했다는 기록도 없고 유산했다는 기록도 없다. 영조의 아들인 사도세자와 며느리인 혜경궁 홍씨惠慶宮 洪氏, 헌경왕후 홍씨獻敬王后 洪氏, 1735-1816보다 10살이나 어렸음)가 수렴첨정을 하면서 정조붕어 당일 영의정으로 승진한 노론 벽파의 지도자 심환지(沈煥之, 1730-1802)의 협력 속에 노론의 벽파(僻派)와 함께 영조의 노선에 반대하는 사도세자를 지지하는 동시에 조선왕조를 지탱해주는 성리학을 부정하고 천주교를 받아들이며, 천주교를 묵인한 정조의 지지세력인 남인세력을 축출할 목적으로 1801년 2월 신유박해를 일으킨다.
조선천주교사에서 조선에 최초로 입국하여 북촌 계동에 있는 역관 최인길의 집에서 처음으로 천주교 미사를 집전하며 전교활동을 펼친 중국 청나라 야고보(세례명) 저우원모(周文謨주문모, 1752-1801) 신부, 이승훈, 황사영, 정약종, 권철신 등이 한강 새남터에서 참수당하고, 2014년 8월 16일 시복(라틴어 Beatificatio; 영어 the Blessed; 복자)된다. 정조의 이복동생 은언군 이인(恩彦君 李䄄, 1754-1801)은 가족이 사교(邪敎)에 물들도록 단속하지 못했다는 죄로, 정실부인 상산군부인 송씨(常山郡夫人 宋氏, 1753-1801: 저우원모를 양제궁에 숨겨줌) 마리아, 며느리 상계군 이담(常溪君 李湛, 1769-1786) 부인 신마리아와 같이 사약을 받는다.
8. 황사영백서(黃嗣永帛書)
알렉시오(Alexis) 황사영((黃嗣永, 1775-1801)은 1790년(정조 14년) 15세의 나이로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한다. 이 때 정조가 황사영의 손목을 잡고 이렇게 말한다. “네가 20세가 되거든 나를 만나러 오너라. 내가 어떻게 해서든 네게 일을 시키고 싶다.”
황사영은 정조의 옥수(玉手)가 닿았던 손목에 붉은 비단으로 감고 다녔고, 조정대신들도 황사영을 아꼈다.
그 후 정약현(丁若鉉, 1751-1821)의 딸 마리아 명련(命連)과 결혼하여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조카사위가 되며, 그는 1791년 베드로 이승훈(李承薰, 1756-1801)에게서 천주교 서적을 얻어 보며 천주교 명도회(明道會) 회장인 아우구스티노 정약종(丁若鍾, 1760-1801)에게서 교리를 배우고, 정약종은 황사영의 빼어난 재능에 반해 장차 교회의 큰 일꾼으로 삼을 것을 다짐한다. 진지한 토론 끝에 황사영은 양반 관료로서의 길을 포기하고, 천주교에 입교하여 중국 청나라 야고보(세례명) 저우원모(周文謨주문모, 1752-1801)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알렉시오 세례명을 받는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황사영은 수염을 깎고 상복으로 갈아입고 천주교도촌인 충청북도 제천의 배론(舟論)이라는 옹기 가마골로 피신하여, 토굴에 숨어서 자기가 겪은 신유박해의 전말과 그 대응책을 가로 62㎝, 세로 38㎝의 흰 비단에다 한 줄에 110자씩 121행, 도합 1만 3311자를 검은 먹글씨로 깨알같이 써서, 동지 토마스 황심(黃沁)과 요한 옥천희(玉千禧)에게 1801년 10월에 중국으로 떠나는 베이징(북경) 동지사(冬至使) 일행 편에 끼어서 당시 포르투갈 중국 베이징(北京북경)의 프란체스코회의 포르투갈인 구베아 주교(The Most Rev. Alexandre de Gouvea, Bishop of Beijing at that time, 중국명 湯士選탕사선, 재위 1782-1804, 1751-1808: 국립 천문대인 흠천감<欽天監: 천문을 관측하고, 역수曆數를 정하고, 길흉을 점치며, 금기를 판별하는 등의 일을 맡아 하던 관청>의 감정 및 산학 관장직을 맡고 있었음) 주교에게 전달하고자 했던 청원서이지만, 옷 속에 이 비밀문서를 품고 가던 황심이 검문소에 걸려, 보고를 받은 정순왕후 김씨와 노론 벽파는 다시 한 번 충격에 휩싸이고, 황사영은 체포되어 능지처참에 처해졌으며, 숙부 황석필(黃錫弼)은 함경도 경흥으로 귀양을 갔고, 홀어머니는 관비가 돼 거제도로, 부인 정난주는 제주 대정현의 관노로 유배되던 중 당시 2살이던 아들 황경한을 제주시 추자도 예초리 해안가에 내려두고 떠났고, 예초리 주민 오씨 부인이 울고 있는 아이를 데려다 키웠다고 한다.
이 백서로 인해 천주교 박해는 더욱 거세졌다.
그러면 ‘백서’(帛書)에 대해 살펴보자.
‘백서’의 한자는 비단‘백帛’, 글‘서書’로 이루어졌기 때문에,‘흰비단’에 쓴 글을 의미한다. 영어로 ‘Silk Letter’라고 한다.
백서의 내용을 살펴보자.
“이 나라는 방금 위태롭고 불안하고 문란한 지경에 처해 있어 무슨 일이나 막론하고 중국 황제 가경제(嘉慶帝, 재위 1796-1820, 1760-1820)의 명령이 있으면 감히 좇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때를 타서 구베아 주교께서 황제에게 서한을 보내시어 내가 조선에 성교(천주교)를 전하고자 하는데 듣건대 ‘그 나라는 중국 조정에 속하여 있어 외국과 상통하지 아니한다 하므로 이렇게 청하오니 원컨대 폐하는 그 나라에 따로 칙령을 내리시어 서양 선교사를 받아 들여 그들로 하여금 충성하고 효도하는 도리를 가르쳐 백성들이 황조(청나라)에 충성을 다하여 폐하의 덕에 보답케 하옵소서’ 하고 간청하면 황제는 본래 서양 선교사의 충실하고 근실함을 잘 알고 있으므로 그 허락을 받을 가망이 있습니다”
“(만약 조선의 왕이 황제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마땅히 조선을 중국의 내부와 같은 행정 구역으로 삼아 의복을 중국과 차별 없이 입게 하고 서로의 왕래를 터 이 나라 (조선)를 만주에 소속시켜야 합니다. ”
“여기에 조선 사람으로 하여금 꼼짝 못하고 명령에 복종시킬 수 있는 계책이 또 있습니다...만일 할 수 있다면 (프랑스) 군함 수백 척과 정예군 5만-6만 명을 징병하여, 대포와 무서운 무기를 많이 싣고, 언변이 유창하고 사리에도 밝은 중국선비 3-4명을 승선시켜, 조선의 해안에 이를 경우, 조선국왕에게 다음과 같은 서한을 보내시면 됩니다.‘우리는 조선 여자와 재물을 탐내어 온 것이 아니라 천주교의 전교를 위해 바티칸교주의 명령을 받고 조선인의 영혼을 구원하러 온 것이니 조선에서 우리 선교사를 용납하여 기꺼이 받아들이신다면 우리는 이상 더 많은 것을 요구할 것도 없고 절대로 대포 한방이나 화살하나 쏘지 않고 티끌하나 풀 한 포기 건드리지 않을 뿐 아니라 영원한 우호 조약을 체결하고는 북치고 춤추며 떠나갈 것입니다.’ ”
황사영백서의 원본은 1801년에 압수된 이후 줄곧 의금부(義禁府중죄인을 신문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아) 창고 속에 숨겨져 있다가 1894년 갑오경장 후, 옛 문서를 파기할 때 그 원본이 우연히 발견되어 당시 조선교구장이던 종현 성당(현재 명동성당) 뮈텔 (Gustave-Charles-Marie Mutel, 세례명 아우구스티노, 조선이름 민덕효閔德孝, 1880-1885, 1885 귀국, 대주교1926-1933, 1890-1932, 1854-1933)주교에게 전달되었다. 뮈텔 주교는 1925년 로마에서 거행된 조선순교복자 79위의 시복식 때 이 자료를 교주 비오 11세(라틴어 Pius PP. XI; 이탈리아어 Papa Pio XI; 영어 Pious XI, 재위 1922-1939, 1857-1939)에게 선물하였고, 현재 교황청 민속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교황청에서는 이를 200부 영인(影印책 따위의 내용을 사진으로 찍어 복제하여 인쇄하는 일)하여 세계 주요 천주교국가에 배포하였다고 한다.
9. 종합
황사영은 당대에 조선의 신동이라고 알려졌지만, 그것은 조선에서만 통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웃국가인 중국청나라의 정세, 곧 천주교에 대한 정책에 무지할 뿐만 아니라 당시 국제정세의 문법해독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아주 아둔한 사람이었다. 황사영을 비롯한 당시 조선지도층의 실력은 조선왕조가 멸망할 수밖에 없는 그 이유를 보여준다.
그러면 당시 중국사정에 대해 살펴보자.
강희제(康熙帝, 순치順治, 재위 1661-1722, 1654-1722)는 1692년 로마 가톨릭을 공인하지만, 1704년(강희 43년) 클레멘스 11세(라틴어 Clemens PP. XI; 이탈리아어:Papa Clemente XI; 영어 , 재위 1700-1721, 1649-1721)는 천주교가 아니라 기독교식의 회칙을 발표하여 강희제를 조롱한다. 그 회칙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천주교의 God개념은 예수회가 창안한 상제(上帝)나 천주(天主)와는 상이하며, 매년 봄과 가을마다 지내는 공자의 제사와 조상의 제사는 우상 숭배이기 때문에 천주교교리로 수용할 수 없다.
클레멘스 11세는 1715년(강희 54년) 이를 재확인하며 예수회의 선교사역을 부정한다. 강희제도 이에 대해 매우 불쾌하게 여겨 1706년(강희 45년) 예수회를 제외하고 중국의 전통을 존중하지 않는 선교사들을 모두 국외로 추방한다.
옹정제(擁正帝, 재위 1722-1735, 1678-1735)는 1724년 천주교의 선교사들의 포교를 금하고, 선교사들의 청나라 출입을 모두 불법화한 후, 중국의 전례를 존중하는 예수회 선교사들조차 당시 포르투갈인들이 많이 살고 있던 마카오로 추방한다.
건륭제(乾隆帝, 재위 1735-1796, 1711-1799)는 재위 61년과 4년의 태상황제 재위 기간을 합쳐 무려 65년 기간 동안 천주교를 박해했고, 건륭제 시대인 1773년 교황 클레멘스 14세(라틴어 Clemens PP. XIV; 이탈리아어 Papa Clemente XIV; 영어 Pope Clement XIV, 재위 1769-1774, 1705-1774)는 예수회를 폐지하는 법령을 공포했으나, 1774년 9월 22일 독살 당한다. 1814년 교황 비오 7세(라틴어 Pius PP. VII; 이탈리아어 Papa Pio VII; 영어 Pope Pius VII, 재위 1800-1823, 1742-1823)는 예수회를 재건한다. 교황이 White Pope라 고 불리는데 반해, 예수회 수장은 Black Pope라고 불린다.
가경제(嘉慶帝, 재위 1796-1820, 1760-1820)는 등극하기 전부터 서양 학문이나 서양 예술을 좋아하지 않아, 서양 선교사들과는 거리를 두었다.
설상가상으로 가경제 재위 기간 중에 백련교도의 난(白蓮敎徒-亂, 1796.3.-1804.8)이 발생해, 천주교는 찬밥신세였다.
백련교는 남송 시대에 창설된 백련종에서 기원한 불교 종파로 미륵신앙과 마니교의 평등주의와 금욕주의가 혼합된 종교인데, 천리교, 의화권, 팔괘교 등으로 이름을 바꿔 가며 명맥을 유지해왔다.
백련교주 유송(劉松)이 만주족 왕조의 멸망을 예언하자 청 조정은 그를 체포하여 처형했다. 그리고 청 조정은 본격적으로 백련교 탄압에 나섰다.
그 후 제1차(1840-1842), 제2차(1856-1860) 아편전쟁(鴉片戰爭, 영어: Opium Wars)은 영국의 승리로 돌아갔기 때문에 중국 청나라에서의 천주교의 포교는 사라지고, 기독교의 선교시대가 열렸다.
그리고 1789-1799의 프랑스혁명(프랑스어 Révolution française; 영어 French Revolution)은 천주교말살정책을 띠고 있었고,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éon Bonaparte, 프랑스 제1제국의 황제1804-1814년, 1815, 1769-1821)의 등장과 그가 일으킨 나폴레옹전쟁(1803-1815)은 조선의 천주교포교와는 전혀 관련성이 없었다.
이와 같이 황사영을 비롯한 조선의 지도자들은 대항해시대를 경험하여 서구열강들과 무역을 하며 선진기술을 받아들인 일본의 지도자들과는 달리 국제정세는커녕 중국청나라에 대한 정세에 무지하여, 조선왕조의 멸망을 앞당겼다.
황사영의 사고방식은 무정부주의(매국노), 전체주의, 독재주의, 신분차별(귀족성직자와 노예천주교신도)의 오컬트 바티칸의 정체성을 보여준다.
일제강점기 때 천주교는 기독교를 말살시키기 위해서 기독교의 독립운동가들을 색출검거하는데 협력한 일제사생아에 불과했다. 천주교신도로 항일운동을 한 안중근의사의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伊藤博文, 1841-1909)의 저격도 김약연(金躍淵, 1868-1942: 시인 윤동주尹東柱, 1917-1945의 외숙부로 1908년 북간도 화룡현 명동촌에 조선민족교육기관인 명동학교明東學校를 설립하고, 1929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후 명동교회를 설립) 장로교 목사의 도움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당시 룽징(龍井용정)의 천주교신부는 조선독립보단 조선의 일제병탄을 찬성했기 때문에 안 의사의 제의를 철저히 외면했고, 당시 뮈텔주교는 안 의사의 저격사건이후에도 안 의사를 아주 매몰차게 대하며 지옥행을 선언하였다.
이처럼 천주교의 유일한 항일운동가 안 의사의 독립운동은 장로교 목사님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21세기 한국천주교정치세력들은 대한민국과 국민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중국의 15억 인구의 천주교신자만들기운동을 전개하는 오컬트 바티칸 노선을 추종하며, 대한민국을 중국 위성국가로 전락시키는데 온 힘을 쏟고 있다. 게다가 한국천주교도들이 1801 신유박해 때 한강 새남터에서 참수형으로 서거한 중국 청나라 야고보(세례명) 저우원모(周文謨주문모, 1752-1801) 신부(복자)에 대한 애정이 지극해 대한민국의 중국공산당화로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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