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부시게 아름다운 5월입니다. 5월의 신록은 우리의 가슴에 청춘의 활기를 선사합니다. 우리의 심장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사랑으로 넘쳐, 이웃의 아픔과 절망을 말끔히 치유하고 삶의 기쁨과 희망을 노래하는 5월의 갈무리를 기원합니다.
박정희(朴正熙, 권한대행 1962.3.23.-1963, 제5, 6, 7, 8, 9대 대통령 1963.12.17.-1979.10.26., 1917-1979) 전 대통령을 이해하려면, 일제강점기, 거대담론인 사회진화론과 사회주의 그리고 만주국 육군군관학교(2기-박정희 1등, 이한림 2등)와 일본육사57기(1등 이한림, 3등 박정희) 동기인 천주교 신자 천주교신자(세례명 가브리엘) 이한림(李翰林, 1921-2012)과의 관계를 살펴야 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키 워드는 ‘기독교와 천주교와의 관계’다.
그러면 박정희 전대통령의 친일과 사회주의 그리고 5.16에 대해 살펴보겠다.
1. 친일
친일은 1910년 조일병탄이전인 15세(당시 15세는 21세기의 20세 이상의 성숙한 나이) 1895년생부터 적용하되, 자신의 출세와 집안의 이익을 위해 조선을 의도적으로 배반하며 조선인을 무참하게 짓밟은 사람들에게만 물어야 한다.
(1) 박정희 전 대통은 1917년에 태어났는데, 이미 1910년 조일병탄 이후의 일제강점기시대이고, 2살 때 1919 3.1혁명이 일어났기 때문에, 사실 박 전 대통령에게 조선은 낯설고 일제가 낯익었다. 네 분의 형과 두 분의 누나로부터 조선에 대한 이야기를 듣지만, 그것은 실제의 삶과는 유리된, 곧 머리속에만 존재하는 추상명사에 불과했다.
대구사범학교를 다닐 때 군사 및 체육 관련 교과목의 성적이 유달리 뛰어나, 그 담당관련 일본 선생님이 박정희 소년에게 문무를 고루 갖추었지만, 무의 능력이 특출하기 때문에, 군인의 길을 권유했다.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20세인 1937-22세인 1939년 동안 교사로 재직하다가 일본 선생님의 권면을 생각하며, 만주국 육군군관학교(신징新京신경 군관학교2기: 1939-1945 동안 만주국 수도 신징<新京신경=21세기 지린 성吉林省길림성의 성도省都 창춘長春장춘=고대 부여의 수도>에 설치된 4년제 군관학교)에 입학하였다. 그 때 만주국 육군군관학교(2기)의 동기가 천주교신자(세례명 가브리엘) 이한림(李翰林, 1921-2012)이었다. 박정희는 1등, 이한림은 2등으로 졸업하고, 성적우수자 추천을 받아, 두 사람 모두 일본육사(57기)에 입학해, 이한림이 1등, 박정희가 3등으로 졸업한다.
그런데 천주교세력들은 천주교 신자 이한림은 보호하고, 기독교정통개혁복음주의를 말살시키려고 박정희 전 대통령을 친일파로 매도하는 역사조작을 해왔다.
그러면 그 당시 이한림 중장에 대해 살펴보자.
이 중장은 육군 제1군사령관재직(1군사령부는 원주에 있었음) 시 1961 5.16 주도 세력과 대척점에 섰으나, 김종필(金鍾泌, 1926-2018)은 5.16에 반감을 갖고 있던 이한림 사령관을 감시하기 위해 육사 동기생으로 이 사령관의 참모들인 조창대, 이종근, 박용기, 엄용길, 심이섭 중령 등을 끌어들여, 이 사령관을 감시하고 체포해 서울로 압송케 해, 1961년 8월 24일 강제 전역되면서 육군 중장으로 예편된다. 미국 망명 중 박정희 대통령과 동년생인 정일권(丁一權, 1917-1994)의 권유로 박정희 정권과 화해한 후 1969년부터 1971년까지 건설부 장관(’도로혁명 없이 산업혁명 없다’는 박정희 대통령 명령에 1968.2.1-1970.7.7. 2년5개월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역임하고, 관광공사 사장을 거쳐 1974년부터 1980년 초까지 주 터키 및 호주 대사를 지낸다.
그런데 천주교 세력은 이한림의 과거사를 조작해, 박정희 대통령만 오징어 씹듯 친일파라고 매도한다.
(2) 일제강점기의 만주국
만주는 일명 중국 둥베이삼성(東北三省동북삼성)이라고 하며 3개의 성, 곧 헤이룽장성(龍江省흑룡강성-성도省都: 하얼빈哈尔滨합이빈), 지린성(吉林省길림성-성도省都: 창춘長春장춘), 랴오닝성(遼寧省요녕성-성도省都: 선양沈阳심양=옛 지명의 펑톈奉天봉천)을 말한다. 이곳은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를 거쳐, 거란족의 요나라, 여진족의 금나라, 몽골족의 원나라, 만주족의 청나라( 1778의 ‘흠정만주원류고欽定滿洲源流考’는 청제국이 신라계가 세운 국가임을 증언), 일제의 괴뢰국가 만주국(1932-1945: 일본간토군関東軍관동군은 1931년 9월 18일 밤 10시 30분경 선양 부근 류탸오후에서 만철선로를 스스로 폭파하고 이를 중국의 장쉐량張學良 장학량, 1898-2001 지휘하의 동북군 소행이라고 발표한 후, 간토군은 만주 침략을 개시하여 만주를 중국 침공을 위한 전쟁의 병참 기지로 만들고 식민지화하기 위해 만주사변을 일으킨 후 1932년 3월 1일 ‘만주국’성립을 선언하고, 1912년 신해혁명으로 퇴위한, 청조의 폐제廢帝 선통제宣統帝, 재위 1908-1912년, 푸이 溥儀부의 1934-1945, 1906-1967을 세워 간접지배케 하고, 실권은 간토군사령관이 장악. 1932-1945존속) 등의 등장이 있었다. 일제강점기엔 항일독립투쟁의 무대(6.25전쟁 때엔 중공군의 선봉에 섰음)였다.
만주전체가 간도인데, 서간도와 북간도의 구분은 일제강점기 때 조선 스스로가 자신을 비하시켜 만들어낸 허상일 뿐만 아니라 1712(숙종 38년)의 백두산정계비(白頭山定界碑)의 ‘서쪽은 압록강, 동쪽은 토문강(土門江)을 경계로 국경을 정함’의 토문강의 위치에 대한 청제국의 덫에 걸려서 나온 구분이다. 1883년(고종 20)에 청나라와 국경에 대한 분쟁이 발생했는데 청나라 측에서는 토문강을 두만강으로 여겨 북간도 지역을 청나라 땅이라고 주장하였고, 1909년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청나라로 부터 만주철도부설권을 획득하면서 간도지역을 청나라 땅이라고 불법적으로 인정해버려, 우리는 간도, 곧 만주전체를 잃었고, 지금은 대한민국에서 똬리를 틀고 있는 중국의 노예학자들 때문에, 한국인들은 모두 꿀 먹은 벙어리요 침 먹은 지네가 되었다.
그러면 토문강의 위치에 대해서 살펴보자.
토문강은 백두산(白頭山; 중국어 창바이산長白山장백산)의 천지(天池)에서 발원하여 북쪽 지린성(吉林省길림성)의 지린 시(吉林길림)를 거쳐 동쪽 헤이룽장성(黑龍江省흑룡강성)의 성도(省都) 하얼빈(哈尔滨합이빈)으로 관류하는 쑹화장(松花江송화강: 강을 다스리는 신 ‘하백河伯’이 살았던 강이자 고조선, 부여, 발해의 영토로, 하백의 딸 유화와 천제의 아들 해모수에서 태어난 주몽의 ‘어별성교魚鱉成橋/鱉은 鳖이나 龞로 대체할 수 있음’는 이스라엘민족의 홍해도하사건과 유사하다. 이것을 분석심리학의 창시자 칼 G. 융Carl Gustav Jung, 1875-1961은 ‘집단무의식; 개인의 경험을 넘은 선천적 구조의 보편적 무의식; 독어Das kollektive Unbewusste; 영어 collective unconscious’이라고 한다. 이처럼 쑹화장은 세계사적인 사건을 배태하고 있음)과 합류하고, 쑹화장은 중국청나라와 러시아와의 국경인 헤이룽장(黑龍江흑룡강; 러시아어 아무르강)과 합수한다.
토문강(土門江)의 왼쪽(압록강 북부지역)을 서간도, 토문강의 오른쪽을 동간도(두만강 북부지역의 북간도)로 편의상 구분하여 부른다.
서간도의 주요지역으로 랴오닝성(遼寧省요녕성)의 단둥(丹東단동: 고려문高麗門의 소재지로 신의주와 경계), 지린성(吉林省길림성)의 지안(集安집안: 고구려 수도로 광개토대왕비와 장수왕릉의 소재지로 자강도의 만포시滿浦市와 경계), 지린성의 린장(臨江임강: 자강도의 중강과 경계), 지린성의 창바이(長白장백: 중국에서 유일한 조선족 자치현으로 양강도의 도청 혜산시와 경계) 등을 들 수 있다.
동간도는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토문강의 동쪽지역이기 때문에 생긴 단어이고, 두만강북부지역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북간도라고 불린다. 주요지역으로 현재의 지린성(吉林省길림성)의 옌볜(延邊연변)조선족자치주(연변조선족자치주延邊朝鮮族自治州의 주도: 옌지延吉연길)의 룽징(龍井용정)을 들 수 있다. 특히 대한민국에서 동간도(북간도)하면 룽징이란 단어가 떠오를 정도다. 그 이유는 세 가지 차원에서 비롯된 것이다.
첫째, 독립운동의 산실
비암산의 소나무 정자 일송정(윤해영尹海榮, 1909-1956의 작시, 천주교 가정에서 태어난 조두남趙斗南, 1912-1984의 작곡의 가곡 ‘선구자先驅者’의 가사로 매우 유명해짐)과 하이란 강(海蘭江해란강)은 한국인의 가슴을 적신다.
둘째, 시인 윤동주(尹東柱, 1917-1945)는 룽징시 명동촌에서 출생하여 명동학교에서 수학하고, 평양 숭실중학교와 서울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에 건너가 1942년 교토 도시샤다이가쿠(同志社大学)에 입학 1943년 항일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후쿠오카 형무소(福岡刑務所)에 투옥, 100여 편의 시를 남기고 27세의 나이에 옥중에서 요절하였다.
젊은 나이의 죽음과 사후에 출간된 그의 시집‘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룽징은 한국인의 정신적이며 정서적인 고향이 되었다.
셋째, 오컬트 바티칸의 노예 기장과 한신대의 주역
장공(長空) 김재준(金在俊, 1901-1987)은 신앙연륜이 매우 짧고, 성경지식이 부족한 상태에 유학했고, 그 기간도 짧을 뿐만 아니라 정통신학사상보다는 오컬트 바티칸의 독초를 먹고 귀국했다. 그가 받은 석사학위는 당시 조선시대에선 그 위력을 발휘할지 모르지만, 21세기 관점에서 보면 영어도 서툰 조선유학생에게 조선복음화를 위해 선물로 준 것에 불과하다. 장공은 그런 알량한 실력을 갖고 조선에 들어와 성경난도질에 앞장서다가, 풍부한 일반학문의 지식과 성숙한 성경지식 그리고 미국유학기간에 수학한 정통신학에 기초한 기독교 변증가요 독립 운동가이자 애국자인 죽산(竹山) 박형룡(朴亨龍, 1897-1978) 박사의 테스트에 걸려, 평양신학교교수직에 임명되지 못해, 1936.8-1939년 동안 캐나다장로교계열 룽징 은진중학교(恩眞中學校) 교목과 성경교사를 하며, 그 곳에서 당시 학생회장이었던 강원용, 2학년생 안병무, 문동환 등을 만난다. 당시 문익환과 윤동주는 학교를 떠났지만, 문익환을 비롯해 이들이 후에 장공의 제자로서 기장과 한신대에서 주요역할을 한다.
(3)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만주는 대한대륙의 한 부분이었고, 일제 강점기의 만주국 육군군관학교는 조선의 사관학교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매우 익숙한 단어며, 당시 박정희 청년은 일본선생님의 권고로 군인의 길을 들어섰기 때문에, 친일파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2. 사회주의
사회주의(Socialism: 사유재산인정)와 공산주의와(Communism: 사유재산폐지)는 차이가 있지만, 편의상 사회주의라는 단어로 사용하겠다.
일제 강점기 중국과 러시아는 사회주의의 단풍잎으로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사회주의는 6.25전쟁이후 그 실체를 정확히 알 수 있었지만 일제 강점기의 사회주의는 조선지식인들에겐 희망의 탈출구였다. 그래서 사회주의를 추종하지 않으면 조선지식인에 낄 수 없을 정도였다.
중앙일보 2021.04.28.의 기사는 필자의 견해를 입증한다.
정진석 전 추기경은 자신이 빨갱이 자식임에 대한 변명을 다음과 같이 한다.
“서울대 합격했을 때 호적초본을 떼고서야 아버지가 일제시대에 활동한 사회주의자였다는 걸 처음 알게 됐습니다. 해방 후 북으로 갔습니다...저는 아버지를 개인의 문제에서만 보지 않습니다. 우리 민족이 겪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불가피한 요소들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렇게 해석합니다. 아버지를 원망한 적은 없습니다. 아버지는 당시 지식인이었고, 사회주의 사상에 물들었던 겁니다. 그런데 그건 당대의 적지 않은 지식인들이 겪은 시대적 조류이기도 했습니다.”
“아쉬웠습니다. 아버지도 천주교 신자셨죠. 그런데 일본강점기 지식인의 조류에 휩쓸렸던 겁니다. 하느님을 통해서 진리를 찾지 않고, 이데올로기를 통해서 진리를 찾으려 했던 건 참 아쉽습니다.”
정 추기경은 자신의 아버지가 가짜 천주교신자인데도 사회주자였음에 프라이드를 갖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 이유는 당시 사회진화론(Social Darwinism)과 사회주의는 21세기의 영미가 주도한 자유민주공화주의와 자본주의처럼, 거대담론이었다. 무엇보다도 이 두 사상은 지식인의 점유물이었기 때문에, 이 두 사상을 모르면 자신이 노예신분 또는 무학자로 수모당하는 신분계급의 척도였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셋째 형이자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장인인 박상희(朴相熙, 1905-1946)가 독립운동가, 언론인, 사호주의자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박정희 청년은 자연스럽게 사회주의를 접한다. 사실 사회주의의 정체는 6.25전쟁을 통해서 세계사적으로 드러났지, 당시 사회주의는 여인의 장신구처럼 지식인의 멋이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군 시절 자신이 사회주의자임을 고백했고, 사회주의자들의 명단을 밝혀 21세기 대한민국은 자유민주공화국으로 세계경제부국되었다. 그런 점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애국심에 대한민국국민들은 모두 감사해야 한다.
정진석 전 추기경이 빨갱이 가계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에, 박정희 전 대통령을 빨갱이로 모는 것은 모두 천주교의 역사조작에서 비롯된 것이다.
3. 5.16
(1) 군과 사관생도들의 반응
1) 기독교 신자 장도영(張都暎, 1923-2012) 육군참모총장(중장)은 애국심이 부재한, 오컬트 바티칸의 노예인 천주교 신자 장면(張勉1899-1966) 전 총리보다는 애국심이 투철한 기독교 장로 윤보선(尹潽善, 1897-1990) 전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6.25전쟁과 같은 피비린내 나는 싸움보다는 평화의 길을 선택해, 5.16혁명세력의 지지로 국방부 장관(1961.5.20.-1961.6.6.), 계엄사령관이자 초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1961.5.19.-7.3: 부의장: 2군사령부 부사령관, 소장 박정희)의 자리를 차지하지만, 5.16각본은 소장 박정희 장군이 대통령 자리에 올라야 하기 때문에, 김종필 지시로 당시 노태우 대위가 장도영을 체포 연행하여, 중장으로 예편시킨다.
2) 흰색 바지와 X자 멜빵에 화려한 예복 차림을 갖춘 육군사관학교 생도 800여 명(1-4학년 생도, 18~21기)과 육사 장교단 전원이 1961년 5월 18일 오전 서울 태평로에서 5.16을 지지하는 시가행진을 벌이고, 그 이튿날 공군 사관생도들은 서울에서, 해군 생도들은 부산에서 각각 혁명을 지지하는 시가행진을 벌려, 대부분 국민들은 자연스럽게 5.16혁명이 애국의 충정에서 나온 것임을 직감한다.
(2) 정치권의 반응
1) 기독교 장로 윤보선 전 대통령
장로 해위(바다‘해海’, 갈대 ‘위葦’: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영국으로 유학을 떠날 때 스승인‘신규식申圭植, 1880-1922, 1921년 11월 3일에 쑨원孫文, 1866-1925가 이끄는 중화민국정부로부터 임정의 승인을 얻어낸 대한제국의 군인이자 한국의 독립운동가’가 지어준 것으로‘바닷가 갈대는 바람에 휘날려도 꺾이지 않는다’는 뜻이 담겨있음) 윤보선(尹潽善, 1897-1990) 대통령은 국군간의 교전과 이로 인한 북한의 남침을 우려해, 당시 5.16주체세력들의 계엄령 사후추인과 정변지지성명 발표 요구를 모두 거절할 뿐만 아니라 주한미군 카터 B. 매그루더(Carter B. Magruder, 재위 1959.7.1.-1961.6.30, 1900-1988) 제7대 유엔 사령관 겸 제5대 제8군 사령관과 마셜 그린(Marshall Green, 1916-1998) 미국 대리대사(재위 1961-1964)의 군사정변 진압을 위한 병력동원에 대한 요구를 거부한다.
천주교 신자 미국 존 F. 케네디(John Fitzgerald <Jack> Kennedy, 재위 1961.1.20.-1963.11.22., 1917-1963)와 오컬트 바티칸은 제2의 4.19를 재현하면 자신들의 정체가 들통이 날까봐 매그루더와 마셜 그린을 통해 윤 전 대통령을 움직여 5.16을 진압하고자 했으나, 윤 전 대통령이 평화의 길을 택해, 케네디 전 대통령과 오컬트 바티칸은 아주 무능한 장면을 버리고, 후에 천주교 대구교구의 5.16지지의 편을 든다.
2) 천주교 신자 운석(雲石)장면(張勉; 세례명‘요한John’/일제 강점기의 창씨개명은 ‘다마오카 쓰토무玉岡 勉, 1899-1966)전 총리는 키가 작고 마른 체구였으나 배가 나왔다. 그는 천주교 신자 케네디와 마셜 그린 주미 대사를 의지했으나 연락두절로 통수권조차 행사하지 못하고, 5.16쿠데타세력들이 두려워 새벽에 혜화동 카르멜 수녀원(장 총리 부인과 평소 친교가 있었던 원장 수녀 프랑스 인 부르이 클레어가 받아들임)으로 도망친 비겁한 자다.
천주교 신자, 1군사령관 중장 이한림은 회고록에서 이렇게 당시 상황을 설명한다.
“장 총리의 지시만 있으면 바로 반란군을 토벌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장면은 실질적인 군 통수권은 장면이 갖고 있었지만 결정적 순간에 칩거해, 54시간 부재로 그는 정권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그에겐 천주교 신자답게 애국심이 부재했다.
장면은 거사 상황이 종료된 18일 상오11시께 카르멜 수녀원을 나와 중앙청에서 낮12시 제69차 임시국무회의를 열고, ‘군부 쿠데타에 대한 책임을 지고 내각은 총 사퇴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총리직을 사임했다.
(3) 미국의 반응
4.19의 이승만 전 대통령의 하야를 주도한 오컬트 바티칸과 미국이 자신들의 정체가 밝혀질까 봐 천주교의 대구교구의 손을 들어준다.
(4) 천주교의 반응
1) 대구교구
박정희 전 대통령은 천주교 신자 이한림 장군과 절친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에 어렸을 때 기독교의 추억을 보류하고 천주교에 호감을 가져, 1950년 12월 12일 대구계산동 천주교 성당에서 육영수여사와 결혼식을 올리는 동시에, 5.16혁명이후 언론사 가운데 가장 먼저 6월 3일 천주교재단에서 운영하는 대구매일신문(당시 석간신문인데 2015년 1월 1일을 기점으로 석간신문에서 조간신문으로 전환)과의 인터뷰를 갖는다.
박 전 대통령의 고향은 경북구미이지만, 청소년시절 대구사범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대구는 제2고향이었고, 대구매일신문이 2.28 대구 학생의거의 선봉기사를 내어 4.19 혁명을 유발시켜 이승만 전 대통령을 하야시켰기 때문에, 박 전 대통령은 기독교에 대한 반감과 고향의 지지를 고려한 것이다.
당시 요한 서정길(徐正吉, 1911-1987) 주교(1962년에 대주교가 됨)는 대구를 관향(본관)으로 하는 달성 서씨 집안 출신인데, 후배 장군이 제 발로 찾아와 도움을 청하자, 대환영한다. 그 이유는 서정길 주교가 요한 장면(張勉, 1899-1966) 전 총리-바오로 노기남(盧基南, 1902-1984: 1930.10.26.의 사제서품 , 교황 비오 12세에 의한 40세 때인 1942.12.20.의 주교서품, 교황 요한 23세에 의한 60세 때인 1962년 대주교로 임명)대주교(1962-1984)-스테파노이며 아호가 옹기인 광산 김씨(光山 金氏) 김수환(金壽煥, 1922-2009.2.16) 전 추기경(1969-)-토마스 모어 김대중(金大中, 재위 1998-2003, 1924-2009.8.18.)으로 이어지는 서울대교구와의 경쟁심이 있었고, 전라도 출신 김대중보단 경상도 출신 박정희 장군을 대통령으로 추대하는 것을 선호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서 주교는 박 장군이 대통령의 자리에 오르면 오컬트 바티칸과의 외교관계가 수립되고, 불교세가 강할 뿐만 아니라 기독교세력도 만만하지 않는 대구를 천주교성지로 바꿀 수 있다는 야무진 꿈을 꾼다.
그러면 서 주교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자.
서 주교는 경남 울산 출신으로 원래 이름은 서봉길이었는데, 주교서품 얼마 후에 서정길(徐正吉)로 개명한다. 그는 1932년 대구 성 유스티노신학교(중국 상하이에서 익명의 신자가 유스티노 성인의 이름을 딴 신학교 건립을 소망한다며 거금을 전해 와서 설립됨)에 입학, 중등과, 철학과를 거쳐 27세 때인 1938년 신학과를 졸업하고 사제서품을 받는다. 교황 비오 12세(라틴어 Pius PP. XII; 이탈리아어 Papa Pio XII; 영어 Pious XII, 재위 1939-1958, 1876-1958)에 의해서 44세 때인 1955년 대구교구 제7대 교구장이자 주교로 승격된다. 주교가 되고 나서 소식결핵치료를 위해 독일에가 당시 독일 유학생 스테파노 김수환의 간호로 결핵을 완치한다.
서 주교는 노기남 대주교와 함께 51세 때인 1962.7.5. 교황 요한 23세(라틴어 Ioannes PP. XXIII; 이탈리아어 Papa Giovanni XXIII; 영어 Pope John XXIII, 재위 1958.10.28.-1963.6.3, 1881-1963)에 의해 대주교로 승격된 후, 1962년 10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1·2·3·4차 회의에 참석한다.
그런 가운데 서 대주교는 추기경의 꿈을 갖는다. 그런데 뜻밖에 1966년 주교, 1968년 대주교가 된 김수환이가 1969년 추기경이 된다. 김수환은 연령에서 서 대주교보다 11년 후배이고, 대주교직도 서 대주교보다 6년 늦게 수여되었고, 서 대주교의 승인 아래에서 독일 유학을 한 김수환의 추기경 탄생은 서 대주교에겐 날 벼락이었다.
5.16에 대한 서 주교의 태도에 오컬트 바티칸과 케네디 대통령의 적극적인 지지를 보낸다. 그러자 서 주교는 장면 전 총리와 DJ와 맞서는 인물로 아갈로 이효상(李孝祥, 1906-1989) 천주교신자를 박 장군에게 추천하고, 이효상은 정치계에서 그의 차남 이문희(李文熙, 1935-2021) 바오로 대주교(1985-2007)는 천주교내에서 5.16을 강력하게 지지한다.
서 대주교의 권면으로 정계에 입문한 당시 국회의장(1963-1971) 이효상은 경상도표와 전라도표를 계산한 결과 경상도표가 더 많음을 인식하고, 1963년 최초로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이 고장은 신라 천 년의 찬란한 문화를 자랑하는 고장이지만 이 긍지를 잇는 이 고장의 임금은 여태껏 한 사람도 없었다. 박 후보는 신라 임금의 자랑스러운 후손이다. 이제 그를 대통령으로 뽑아 이 고장 사람을 천 년만의 임금으로 모시자.”
“경상도 대통령을 뽑지 않으면 우리 영남인은 개밥에 도토리 신세가 된다”
1971년 3월 선거를 앞두고 민주공화당 경남지부 연차대회에서 이효상은 이렇게 외친다.
“이러한 시국에 대통령으로 모실 분은 박정희씨 오직 한 분밖에 없다”
“후진국에 있어서 군세력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경우엔 흔히 쿠데타가 일어나는 것을 우리는 많이 보고 있다. 국가의 지도자는 군부의 지지를 받는 사람이라야 지도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은 하나도 그릇된 판단이 아닌 줄 안다.”
“경상도에서 전라도표를 맞먹고도 백만표를 더 박 대통령에게 주자”
이와 같이 천주교가 영호남의 지역분쟁을 일으키고, 그것을 기독교에게 떠 넘긴다.
천주교는 대한민국의 갈등과 투쟁의 원천이다.
4. 5.16혁명의 근현대화 동력이 된 기독교
1962년 2월 9일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대한민국의 발전을 위해서 고심하던 중 주의의 권고를 받아들여, 군복을 입고 총을 찬채, 최고위원 30명(장성들도 포함)과 함께 김용기(金容基, 1909-1988)장로가 운영하는 가나안농군학교를 방문한다.
그러면 김 장로에 대해 언급하겠다.
김 장로는 박 전 대통령처럼 작고 다부진 체구를 가졌다. 김 장로는 경기도 남양주 와부면 능내리에서 농부이며 한학자이고 기독교인 김춘교의 다섯 형제 중 넷째로 태어나, 선친으로부터 “조상인 안동 김씨 가문이 나라를 망하게 한 죄가 크다. 그러니 후손인 우리는 그 죄를 갚는데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라는 말씀을 듣고, 대한대륙전체가 젖과 꿀이 흐르게 하는 가나안 땅이 되게 하자고 하며 농민의 지도자가 될 것을 결심하며, 자녀들에게도 “절대 벼슬을 하지 말고, 남들이 싫어하고 어렵게 생각하는 농사를 지으며 살아야 한다 ”고 훈계했다.
(1) 봉안교회와 광동(光東)학교
김 장로의 아버지 김춘교가 1912년 고향에 봉안교회(경기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528)를 설립했고, 마을 안동김씨 문중은 김춘교 축출을 결의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으나 그는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
김 장로는 부모로부터 엄격한 신앙훈련을 받았고, 부친의 권고로 미션스쿨 광동(光東)학교에 입학한다. 이 학교는 기독교 교역자, 카이저수염의 몽양 여운형(1886-1947: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기골이 장대하여 풍채가 우람한데다가 스포츠를 좋아해서 근육이 장난 아니었고, 조선 체육의 아버지로 불리며, 패션 센스도 뛰어난데다 강한 감화력과 설득력을 가진 대화천재 연설전문가. 남북을 아우르는 좌우 합작을 통한 정부 수립을 위해 신변의 위협을 무릅쓰고 5번이나 38선을 넘어 다녔음)이 1907년 대한협회에서 주최하는 강연회에서 도산 안창호(島山 安昌浩, 1878-1938) 선생의 연설에 감화되어 클라크(Charles Allen Clark, 조선명 곽안련 제3대 승동교회목사 1906.3-1924.6, 1878-1961: 24세 때인 1902년 9월 22일에 조선에 입국한 조선교회 최초의 실천신학교수) 선교사의 지원을 받아 고향에 예배당을 겸해 세운 근대 교육기관이다. 게다가 김 장로의 부친이 여운형 선생을 존경했다.
김용기 소년은 나룻배를 이용해 두물머리를 건너 통학했다고 한다.
김 장로는 이 학교를 통해 ‘근로 봉사 희생’이라는 예수의 정신을 배워, 일생의 좌우명으로 삼는다. 그리고 이 정신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새마을 정신 ‘근면, 자조, 협동’으로 자리 잡는다.
(2) 1935-1946 고향인 경기도 남양주 와부면 능내리의‘봉안 이상촌’->1946년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구기리(현재 서울 은평구 구기리)삼각산 농원->1952년 에덴향 개척(경기도 용인군 원삼리)->1954년 경기도 광주군 동부면 풍산리(현 경기도 하남시 풍산동)에 가나안 농장(1955년), 1962년‘가나안농군학교’
지면관계상 두 가지만 언급하겠다.
김 장로는 근로, 봉사, 희생을 삶의 덕목으로 삼아 몸소 실천하며 평생 양복을 입거나 구두를 신어 본 일이 없고, 자신이 재단한 국민복을 입고, 고무신을 신으며 매일 새벽 4시(겨울엔 5시) 산소통으로 만든 개척의 종을 치시고, ‘조국이여 안심하라!’고 외치며 한평생 ‘하나님사랑, 이웃사랑, 땅 사랑((天地人. 우리에겐 자본도 기술도 없다. 그러나 땅이 있다. 땅을 일구는 것만이 우리가 살 길이다)’을 실천하며 몽양 여운형이 이곳에 몸을 숨기기도 했다.
일제의 신사참배(한번은 경기도 경찰국의 고등계 주임인 다니치가 김용기를 불렀다. 그는 김용기를 취조실로 끌고 가서 마구 욕설을 퍼부었다. 신사참배를 하지 않는 것은 ‘천황 폐하’에게 불경한 것과 같다고 했다. 그러자 김용기는 이렇게 대꾸했다.“사람들이 당신 아버지에게는 절을 하지만, 그 문패에 절을 하지는 않소. 나도 마찬가지요. 천왕 폐하가 내 앞에 있다면야 수십 번인들 절을 못하겠소? 그러나 그 문패에는 못하겠단 말이오.”), 창씨개명, 공출(供出 일제가 식량, 물자 등을 민간에게 강제로 바치게 한 일. 공출을 막기 위해 논을 없애고 벼를 심었던 땅에 고구마를 심었음)과 징용(徵用: 전사나 사변 등의 비상사태에 국가의 권력으로 국민을 강제로 일정한 업무에 종사시킴), 징병(徵兵: 국가가 법령으로 병역 의무자를 강제로 징집하여 일정한 기간 병역에 복무시키는 일)에 저항하며 징병에 에 끌려갈 처지의 젊은이들을 숨겨준 기독교 선각자이며, 조선총독부의 제2인자인 옌도 정무총감 까지 ‘봉안 이상촌’에 감탄하며, 총독부로 들어와 ‘대동아’를 만드는 데 동참하라고 하며 총독부 전시생활과에 자리를 마련하겠다는 제의를 거절한다.
김용기 장로는 1946년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구기리(현재 서울 은평구 구기리)삼각산 농원(현재 임마누엘 수도원), 1952년 에덴향 개척(경기도 용인군 원삼리) 그리고 1954년 경기도 광주군 동부면 풍산리(현 경기도 하남시 풍산동)에 가나안 농장(1955년)을 창설했고, 1962년 2월1일 이곳에‘제1가나안농군학교. 농군農軍: 가난을 몰아내야 공산주의를 막음, 군대. 육ㆍ해ㆍ공군 외에 제4군. 이후 경기도 양평으로 이전/1973년에는 강원도 원성군 신림면 용암리<현 원주시 신림동>에 제2농군학교, 2000년에는 경남 밀양에 제3농군학교를 만들었고, 제2가나안농군학교 동일한 장소에 1981년 농군사관학교 설립, 1977년 LA에 가나안복민학교설립/복민사상福民思想=복민운동福民運動. 복민은 ‘하나님의 복을 받는 백성, 즉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백성’이다.‘복 받은 공동체'를 구성하는 일원이 아니라 '복 받은 일원'이 구성해가는 공동체. 복은 누구에게나 주어진다. 발견하지 못할 뿐이다. 눈으로 찾은 것이 아니라 삶으로 느끼는 것이기 때문이다. 관계의 기반 위에서 자신의 일을 고 숭고한 이상과 고귀한 삶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 그 자체가 복이다. 잠언 30:8-9)을 설립했다. 김 장로(이사장)는 한국사회 근대화에 앞장선 인물로 평가받는다.
교육이념은‘근로, 봉사, 희생’이다.
‘가나안농군학교’라는 고유명사는 ‘새마을운동’과 함께 근대화의 상징적 언어가 된다.
(3) 박정희 가나안 농군학교 두 번 방문
삶은 고구마와 감자와 호박잼을 바른 식빵이 나왔는데, 별 생각 없이 박 의장이 빵을 입에 물었는데, 김 장로는 “의장님은 3천리 강토, 3천만 백성의 대통령이지만 저는 여기 1만5천 평, 30명 직원의 대통령이다. 여기 식대로 하십시오. 우리는 밥 먹기 전에 식탁의 노래를 부르고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합니다”정중하면서도 근엄하게 말했다. 박 대통령은 즉시 빵을 내려놓고, ‘그러냐’고 하며 고개를 숙였다. 큰 소리의 기도를 경청한 다음, 김 장로와 함께 구호제창(먹기 위하여 먹지 말고 일하기 위해 먹자!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말라!---데살로니가후서 3:10/김용기 자녈김평일 교장은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마라’는 구호에 이어 ‘효도하기 싫으면 먹지도 마라’를 새로운 교육 모토로 세워 교육생들에게 효의 중요성을 강조한다)까지 했다. 그때 함께 했던 장성들 중에서 여러 명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가나안농군학교를 방문해 쓴 글이 두 개가 있다. 하나는 1962년에 방문해 ‘청경우독’(晴耕雨讀. : 비가 갠 날은 논밭을 갈고 비 오는 날은 책을 읽는다는 뜻으로, 부지런히 일하면서 틈나는 대로 공부함을 이르는 말)이라고 한자로 썼고, 다른 하나는 1969년 방문해 ‘농민의 빛’이라고 쓴 것이다. 그리고 새마을운동이 시작된다.
5. 종합
(1) 성삼위 하나님께서는 기독교 장로 이승만 전 대통령을 하와이로 보내고, 천주교 신자 장면정부를 등장시킨 오컬트 바티칸과 한국천주교세력을 단죄하여, 장면정부는 아주 초라한 9개월(1960.8.19.-1961.5.18.)의 단막을 연기하고 내려와, 아주 무능한 지도자가 되었다.
(2) 박정희 전 대통령은 일하지 않고 산 속에서 목탁만 두드리는 불교세력과 대한민국의 부를 오컬트 바티칸에 바치는 천주교세력을 싫어하는 대신 자신의 신앙생활도 지키며 애국하는 기독교를 아주 좋아하셨다. 이것은 김용기 장로의 영향이 매우 크다.
1) 가나안농군학교의 생활헌장 가운데 13번: 창조주 하나님을 외국 사람에게 빼앗기지 말고 우리 온 국민의 아버지로 삼자.
2) 김 장로주장: 애국가를 4절까지 불러야 한다며, “우리를 항상 보호하시는 하나님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늘 강조하셨다.
3) 김 장로는 1975년부터 매일 새벽 4시부터 6시까지, 오후 4시부터 6시까지 하루 두 번, 네 시간씩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했다. 구국 기도실 좌우 기둥에는 “조국이여 안심하라, 온 겨레여 안심하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3) 천주교세력들의 집요한 공격으로 육영수 여사는 장녀 박근혜를 천주교 학교인 성심여자중고등학교를 보낼 수밖에 없었고, 선생님의 끈질긴 권고로 박근혜 학생은 1970년 천주교 예수회가 설립한 서강대학교 공과대학 전자공학과에 진학하여 1974년에 졸업한다. 같은 해 봄 교수가 되려고 프랑스 유학을 떠났으나, 동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행사에서 어머니 육영수가 재일 한국인 문세광의 저격으로 사망하자 급거 귀국하여, 부친 박정희 대통령 곁에서 모친 역할을 대신하며, 부모님의 희망대로 제18대 대통령이 되어 재직(2013.2.25.-2017.3.10.) 하던 중 국가와 민족을 위해 오컬트 바티칸의 노예로 매국노짓거리만 하는 천주교와 거리를 두자, 천주교세력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박근혜 대통령을 자리에서 내려오게 하여 결국 옥에 갇힌 신세가 된다.
'자유와 정의의 나라 > 신학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프랑스의 리슐리외추기경은 천주교도의 공직자입문을 금하는 동시에 공직자추방을 명령한다’ YouTube!!! (0) | 2021.06.10 |
---|---|
천주교신도, ‘황사영백서’를 근거로 공직자입문을 금하는 동시에 공직자추방을 명령한다’ YouTube!!! (0) | 2021.06.04 |
‘마리 앙투아네트를 통해서 본 4.19의 진실’ YouTube!!! (0) | 2021.05.19 |
‘애국가 작사자 윤치호 장로: 조선백성을 노예봉건제에서 해방시키기를 원했던 진취적인 애국자’ YouTube!!! (0) | 2021.05.16 |
프랑스 군가 ‘라 마르세예즈’를 통해서 본 대한민국의 위대한 애국가 YouTube!!! (0) | 2021.05.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