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빛깔로 유혹하는 멋진 5월입니다. 우리의 삶의 모습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싱그러운 향긋한 내음으로 가득 차 삶의 무게에 고달픈 이웃의 몸과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행복한 5월이 되길 기원합니다.
대한민국의 음악계는 크게 기독교계의 안익태(安益泰, 1906-1965) 선생과 천주교와 불교계의 윤이상(尹伊桑, 1917-1995: 불교신자) 그룹으로 구분한다.
안 선생은 김구선생의 인정 그리고 이승만 전 대통령, 박정희 전 대통령의 환대로 인해 대한민국음악가로 자리매김한데 반해, 윤 선생은 안 선생에 대한 시기와 질투로 대한민국대신 북한 김일성 독재수령체제를 선택하여, 김 주석의 사랑을 받는다.
윤 선생은 1963년 평안남도 강서고분 사신도(四神圖: 동쪽 벽의 청룡도, 서쪽 벽의 백호도, 남쪽 벽의 주작<봉황>도, 북쪽 벽의 현무<玄武: 암수가 한 몸이고 뱀을 몸에 칭칭 감아 얽혀 뭉쳐 있는 다리가 긴 거북의 모습을 한 신화 속 동물>도 등 4방위를 호위하는 벽화, 도교의 영향을 받았음>)를 보기 위해, 또 어릴 적 친구 최상한(북한에서 조선국립교향악단의 콘트라베이스<바이올린류類의 현악기 중 최저음의 악기> 단원으로 활동하고 있었음)을 만나보고 싶어 처음으로 평양을 방문했다고 하는데, 그것은 핑계에 불과하다.
이런 상황을 감안하며 애국가 작사자 좌옹(佐翁) 윤치호(尹致昊, 1865-1945) 장로를 조명하고자 한다.
1. 윤 장로의 배경
노론의 대가였던 해평윤씨 출신의 윤치호 장로는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윤두수(尹斗壽, 1533-1601)의 후손으로, 그의 가계는 윤보선(尹潽善, 재위 1960.8.13.-1962.3.24, 1897-1990) 전 대통령, 윤치영(尹致暎, 1898-1996) 장로(문중의 창씨개명 시도를 반대하고 저항한 독립운동가로, 16세인 1912년 그는 YMCA 기독교청년회 학당에서 영어 교사였던 이승만에게 매료되어, 그 후 우남雩南 이승만李承晩, 재위 1948-1960, 1875-1965 전 대통령을 ‘아버지’ 혹은 ‘한국의 아버지Father of Korea’라 부르며, 도산 안창호安昌浩, 1878-1938 선생이 직접 찾아와 국민회와 흥사단에 들어와 도와 줄 것을 부탁하였으나, 윤 장로는 자신은 이승만의 사람이 되기로 결심했다며 정중하게 사양했으며, 이 전 대통령의 하야를 가져왔던 4.19에 대한 알레르기가 대단해, 5.16을 찬양하며 박정희 전 대통령의 측근으로 활동. 성북동 덕수교회에서 발인), 윤일선(尹日善, 1896-1987: 천주교에서 감리교로 개종) 제6대 서울대총장 등을 배출하였다.
2. 만남
(1) 탁사(濯斯: 성리학의 엘리트 최병헌은 복음을 진정한 도道로 받아들이며 성리학 등의 기존종교로 물든 몸과 마음을 씻고 예수를 따르겠다는 의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호) 최병헌(崔炳憲, 1858-1927) 목사는 1888년 조선을 사랑하지만 다소 친일경향의 조지 헤버 존스(George Heber Jones, 趙元時조원시, 1867-1919) 선교사(1887-1909‘대한제국’에서 활동한 북감리회 선교사로 세 개의 학술지 ‘한국인의 보고The Korean Repository’, ‘한국인논평The Korean Review’, ‘신학월보Shinhak Wolbo Theology Monthly’ 등을 탁사와 협력, 발행하여 대한민국 감리교의 토대를 쌓으며, 조선인의 하와이 이민을 주선)의 어학 선생이 된다. 존스 선교사와의 만남을 계기로 탁사는 동년배 헨리 G.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 조선명 亞篇薛羅아편설라, 1858-1902: 1885년 조선에 입국하여 활동한 미국 북감리회 선교사)를 만나며, 두 선교사와 탁사는 1885년 8월 3일, 아펜젤러가 한성에 세운 조선 최초의 근대식 중등교육기관인 배재학당(1886년 6월 8일 고종은 배양영재의 줄임말인 배재학당이라는 교명과‘액額’을 하사)을 중심으로 기도 모임을 갖고, 1889년 탁사는 한문 실력을 인정받아 배재학당 한문 교사가 되며, 두 감리교 선교와 만난 이후 무려 5년 동안이나 스스로 성경을 공부하고 기독교의 진리를 터득하고 난 후 35세 때인 1893년 2월 8일 마침내 존스에게 세례를 받고, 기독교에 입교하여, 1894년 7월 아펜젤러 선교사가 현대의 도서관에 해당하는 ‘대동서시大東書市’라는 서점을 열었을 때 그는 그 서점의 관리를 맡는다. 당시‘대동서시’는 도서관이자 서점, 출판사 등의 역할도 담당했다. 탁사는 44세 때인 1902년 목사안수 받고, 1903년 아펜젤러 선교사가 복음 전파를 위해 목포로 가던 배가 파선하였을 때, 수영선수 출신이어서 혼자서는 얼마든지 살 수 있었지만, 그는 끝까지 자신이 책임지고 있었던 정신여학교 어린 학생을 구하려다 함께 익사)를 뒤이어, 정동제일교회 초대 한국인 목사(1903-1914)가 된다.
탁사가 미국이나 유럽에 유학을 했더라면 죽산(竹山) 박형룡(朴亨龍, 1897-1978)에 버금가는 대학자가 될 수 있었지만, 탁사는 유학가지 않는 토종 조선인으로 성경번역위원, 독립협회간부, 각종 신문 편집, 각종 신학 잡지 편집 등의 일을 맡으며 토착화 사상의 선구자가 될 정도로 뛰어난 학자이자 목회자였다.
윤 장로는 탁사보다 7살 어렸지만 두 분은 막역한 사이로 형제처럼 지냈으며, 정동제일교회 교인이었다.
탁사는 ‘독립신문’에 ‘독립가’를 지어 발표 한다.
그래서 애국가의 본문은 최병헌의 ‘불변가’(不變歌: 독립과 애국을 기원하는 마음은 변치 말자는 취지로 ‘불변가’를 지었는데, 이승만, 신흥우, 김규식 등 배재학당 출신 13명과 ‘바보클럽’이라는 친목회를 만들어 매주 1회 만났으며, 회원들이 해외로 망명할 때 ‘불변가’를 적어서 줌)에서, 후렴구는 윤치호의 ‘황실가’(일명 무궁화가)에서 따온 것이라는 설이 있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 윤 장로가 애국가에 대한 탁사의 의견을 청취하며, 후에 애국가를 작사할 때 탁사의 견해를 반영했을 뿐이다.
(2) 윤 장로는 대한기독교청년회연맹(National Council of the Young Men's Christian Associations of Korea; 한국YMCA, Young Men’s Christian Association: 영국의 복음주의자들이 1844년 결성한 기독교 민간단체이다. 조선에서는 선교사들과 이상재李商在, 1850-1927, 윤치호 등의 주도로 1903년에 황성기독교청년회라는 이름으로 출범했으며, 호머 베절릴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 1863-1949초대회장을 역임했다. 1994년에 한국기독교청년회로 개칭)을 조직한 후, 자신보다 13년 연하인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 1878-1938)와 더불어 평양에 중등 교육기관 대성학교(大成學校, 1908-1912)를 설립하고, 교장으로 재직하면서, 애국가 가사에 대한 도산 선생의 조언을 듣고, 후에 그것을 반영한다.
(3) 윤치호 역술(譯述) 1908년 재판 ‘찬미가’ 기록(순수찬송가 12편+애국찬미가 3편: 윤 장로가 자신이 설립한 한영서원 교재로 찬미가를 편찬해 보급하고 1945년 10월경에 애국가 가사를 옮겨 쓴 ‘가사지’를 남겼음), 1910년 미주 신한민보에 게재된 ‘국민가’(노래 가사가 현행 애국가와 거의 같다)에 작사자 윤티(치)호 기록 등은 윤치호 장로가 애국가 작사자임을 증언한다.
(4) 윤 장로는 애국가를 작사할 때 탁사와 도산의 의견을 반영했기 때문에, 두 분을 배려해 일기를 쓸 때도 단 한 줄도 애국가에 대해 언급하지 않음은 물론 자기 스스로‘애국가’ 작사자로 나서지 않았는데, 윤 장로의 애국가 작사자를 부정하는 자들은 이런 윤 장로의 인격에 대한 깊은 이해가 부족하다.
3. 윤치호의 애국가 작사의 거부이유
윤 장로가 친일파라는 이유로 대한민국 국민들이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지만, 그것은 역사왜곡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면 그 이유에 대해서 밝히겠다.
4. 윤치호의 친일파는 역사의 조작에서 비롯된 것임
(1) 조사시찰단의 수행원
박정희(朴正熙, 권한대행 취임일 1962.3.23., 재위 1963.12.17.-1979.10.26, 1917-1979) 전 대통령은 보통학교 시절 동아일보에 연재중인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 1892-1950)의 ‘이순신’을 읽고 나서부터 이순신과 도산 안창호를 숭배하기 시작한다.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고나서 1968년 광화문 네거리에 이순신 동상을 건립하고, 도산공원을 조
성하고 망우리의 도산묘를 도산공원에 이장한다.
이처럼 어렸을 때 교육과 독서는 인생을 좌지우지 한다.
윤치호는 제2차 공식적인 수신사(예조참의 김홍집金弘集, 1842-1896을 수행하여 별군관<別軍官조선 후기 군대 장교>으로 다녀옴/1876년 강화도조약 이전엔 통신사通信使가 주는 입장에서의 외교사절이라면, 이후의 수신사修信使는 받는 입장에서의 외교사절/중국청나라 영선사領選使, 미국 보빙사報聘使)의 일행으로 일본을 다녀온 부친, 서얼 출신 대한제국 군부대신(군부의 수장)을 지낸 무관 윤웅렬(尹雄烈, 1840-1911)의 권유로 16세 때인 1881년 봄 어윤중(魚允中, 1848-1896)의 수원(隨員) 자격으로 역시 수원인 유길준(兪吉濬, 1856-1914) 등과 함께 비공식적인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 1881.5.7.-8.26)의 일원으로 일본에 건너가, 어윤중이 윤치호의 부친의 부탁과 더불어, 자신도 윤치호의 재능을 아깝게 생각해, 일본 외무상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정상형, 이전의 이름 이노우에 분타井上聞정상문다, 1836-1915: 요시다 쇼인吉田松陰길전송음, 1830-1859의 쇼카손주쿠松下村塾에서 수학할 때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도 수학하였다. 그는 이토 그리고 다른 3명과 함께 1863년 5월 5월말 영국 런던대학에 유학을 떠난다. 런던대학엔 ‘조슈 파이브Choshu Five長州五傑조슈한 5걸’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음)를 설득시켜 윤치호를 1866년에 카와지 칸도(川路寛堂)의 보좌역으로 막부에서 파견한 영국 유학생들(토야마 마사카즈 등 12인)의 감독으로 영국에 갔다 온 기독교인(1874년 요코하마의 유니온 교회에서 아일랜드 출신의 캐나다 감리교회 선교사인 조지 코크란George Cochran, 1834-1901의 설교를 듣고 그를 도진샤同人社의 선생으로 초빙한다. 이후 코크란에게 세례를 받은 뒤 캐나다 감리교인이 됨) 나카무라 마사나오(中村正直, 1832-1891: 1870년에, 새뮤얼 스마일스의 ‘Self Help’를 ‘서국입지편’이라는 이름으로 출간해 100만부 이상 팔려서 후쿠자와 유키치의 학문을 권함과 함께 메이지 양대 베스트셀러가 된다. ‘서국입지편’ 서문에 유명한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는다’라는 문장이 나온다. 이 책은 나중에 자조론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번역됨)가 1873년 3월 사저에 개설한 도진샤(同人社)학교에 입학시킨다. 윤치호는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복택유길, 1835-1901)의 게이오기주쿠(慶応義塾)에 입학한 유길준(兪吉濬, 1856-1914), 유정수와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도쿄 유학생이 된다. 1881.5-1883.4(16세-18세)의 2년간 일본에 거주하면서 영어와, 영국학을 배우며, 후쿠자와 유키치 등을 수시로 만나 면담하며 그의 지도를 받는다.
후쿠자와는 규슈(구주九州) 오사카 도지마(堂島)에 있는 나카쓰 현(중진번中津藩: 오늘날의 오이타大分 현)의 하급사무라이집안에서 2남3녀 중 막내로 태어나 1836년에 아버지를 여윈다.
그는 한학(漢學)을 통해서 유학을 배우고, 란가쿠(蘭學난학: 당시 네덜란드는 ‘화란和蘭’이나 ‘아란타阿蘭陀’로 표기했기 때문에 에도시대에 네덜란드에서 전래된 지식을 연구한 학문)를 통해서 네덜란드학문을, 양학(洋学: 란가쿠 이후에 들어온 서양학문을 가리킴)을 통해 미국을 비롯해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의 구미선진국의 학문을 배운다.
1860-1867년에는 후쿠자와는 바쿠후(幕府막부)에 출사하여 번역 업무 담당 관리로 일한다. 이 기간에 네 번에 걸쳐 바쿠후의 해외사절단의 일원으로 미국과 유럽을 시찰하는 기회를 얻는다.
첫 번째인 1860년에 후쿠자와는 해리스조약(1858년 7월29일 초대 미국영사인 Townsend Harris와 도쿠가와 바쿠후의 이이 나오스케井伊直弼가 체결한 조약) 비준을 위하여 미국으로 가는 바쿠후소속 조사시찰단의 일원으로 미국에 6개월간 방문하고 영어 사전을 가져와 일본 최초의 일영사전을 편찬한다. 1862년에 후쿠자와는 바쿠후의 통역담당 외교관자격으로 유럽을 1년간 방문한다. 세 번째인 1863년에 후쿠자와는 영국 만국박람회를 참석하고 러시아를 방문한다. 네 번째인 1867년에 후쿠자와는 다시 6개월간 미국을 방문한다.
후쿠자와는 서구열강의 탐방을 통해 이들의 핵심사상이 제국주의, 곧 영국의 스펜서(Herbert Spencer, 1820-1903)가 제창한 사회진화론(social Darwinism)에 의한 땅따먹기임을 간파한다. 국가 간 평등이 만국공법에 입각한 상호존중에 의거하기보다는, 힘으로 강대국이 약소국을 지배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현실을 목도하면서 강한 깨달음을 얻는다. 후쿠자와는 ‘약육강식론’, ‘힘의 정의론’이라는 강자 중심의 세계관, 곧 제국주의에 의한 과격한 국권 확장론자가 된다.
후쿠자와는 이토 히로부미의 정치적 라이벌 위치에 오르며, 메이지이신을 완성한‘일본의 볼테르’, 로 칭송받는다.
한국 최고액권인 만 원 권의 주인공이 세종대왕이라면 일본 최고액권인 만엔권의 주인공 자리는 반세기 이상 차지할 정도로 그는 일본인들에게 ‘국부’(國父)다.
‘후쿠자와 삼부작’은 그 뿐만 아니라 메이지이신의 정체를 보여준다. 그는 자신의 저서를 통하여 회의(會議), 연설(演說), 자유(自由), 권리(權利) 등의 일본식 한자어를 창안한다.
‘서양사정’(西洋事情, 1866-1870), ‘학문의 권유’(學問の勸め, 1872-1876), ‘문명론의 개략’(文明論之槪略, 1875)은 지금까지도 일본인의 필독서로 꼽힌다.
도산 안창호가 존경하는 유길준 선생은 후쿠자와의 ‘서양사정’을 모델로 ‘서유견문’(西遊見聞)을 집필하여 후쿠자와의 도움으로 1895년에 후쿠자와가 창설한 도쿄 교순사(交詢社)라는 출판사에서 ‘서유견문’을 발행한다. 유 선생이 26세 때부터 27세 때까지 후쿠자와가 경영하던 게이오기주쿠에 유학해, 후쿠자와와 인연을 가진 바 있어서 출판이 가능한 것이다.‘서유견문’은 갑오개혁(甲午改革: 갑오경장甲午更張이라고도 불리며, 1894년 7월 초부터 1896년 2월 초까지 약 19개월간 3차에 걸쳐 추진된 일련의 개혁운동)의 사상적 배경이 되었을 뿐 아니라 조선계몽사상 형성에 영향을 주었으며 국문학이나 신소설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친다.
‘문명론의 개략’(1875)은 사회진화론을 개진하는데, 이 저서는 조선의 개화사상에 큰 영향을 끼치며, 1881년부터 김옥균(金玉均, 1851-1894)을 비롯해 유길준, 박영효(朴泳孝, 1861-1939), 서재필(徐載弼, 1864-1951), 윤치호 등은 일본을 방문하면서 후쿠자와를 만나면서 그의 광팬이 된다.
특히 1881년 3월 6일 김옥균은 후쿠자와와 면담을 하며 조선독립에 협력을 의뢰하자 서로 강렬하게 끌린다.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 일본식 군제 도입과 민씨정권에 대한 반항으로 일어난 구식군대의 병란)이 발발하자 후쿠자와는 요코하마 정금 은행에서 17만원의 대출금을 얻어 조선 측 배상금의 일부를 대신 납부해준다.
윤치호는 미국의 생물학적 진화론과 함께 사회진화론을 주장하는 동물학자, 고고학자, 에드워드 모스(Edward Sylvester Morse, 1838-1925)에 대한 소문을 듣는다. 그는 1877년 6월 일본을 방문해 도쿄제국대학의 최초의 동물학 교수가 되어 찰스 진화론을 강의하며 후에 일본의 고고학의 아버지(Father of Japanese archaeology)가 된다. 모스의 동경대학 강의노트는 당시 지식인에게 큰 영향을 끼친 진화론의 대표적 필독서였다.
카토 히로유키(加藤弘之, 1836-1916)는 당시의 도쿄제국대학 초대 및 2대 총장이었는데, 초기의 천부인권설을 신봉하는 계몽주의자에서 사회진화론의 강력한 옹호자가 되며, 도쿄제국대학은 진화론의 허브가 된다.
윤치호 청년의 마음은 후쿠자와 모스 두 사람을 통해, 제도적인 면에서의 사회진화론, 21세기 용어로 말하면 전체주의, 독재주의, 공산주의, 인권탄압 국가의 김일성세습독재수령체제와 다름없는 조선을 자유민주공화국, 자본주의, 건전하며 건강한 복지국가로 부활시키겠다는 신념으로 가득 찬다.
(2) 통역관
윤치호는 17세 때인 1882년 5월 조미수호조약비준 때 초대 주한미국공사 루시우스 푸트(Lucius H. Foote, 1826-1913)의 통역관으로 잠시 귀국하여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 주사(主事)에 임명된다.
1884년 6월 일본 주재 감리교 선교사 로버트 새뮤얼 매클레이(Robert Samuel Maclay, 1824-1907: 1848년 중국에 부임하여 주로 푸저우福州에서 활동하였고, 1873년 6월부터는 일본으로 건너가 선교했다. 조선선교를 위해 1882년부터 당시 일본에 있던 김옥균과 사귀었음)가 김옥균(金玉均, 1851-1894)과 함께 한성에 와, 김옥균을 통해 고종에게 조선선교활동을 신청하고, 이 과정에 미국 공사 푸트가 개입하며, 1881.5-1883.4(16세-18세)의 2년간 일본의 생활을 마친 윤치호는 푸트의 통역관으로 참여하고, 고종의 허락을 받는 쾌거를 이룩한다. 그래서 미국 북감리교회의 윌리엄 벤턴 스크랜턴(William Benton Scranton, 施蘭敦, 시란돈1856-1922), H. G.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 1858-1902) 등이 조선에 선교사로 입국한다.
(3) 중국망명(유학)
1884년 12월 4일 저녁 조선 최초의 우체국인 우정국(郵政局) 개국 축하 만찬회가 있던 날을 계기로 일어난 갑신정변(甲申政變, 1884.12.4.-1884.12.6., 총 46여 시간)은 후쿠자와가 깊이 관여했는데, 갑신정변이 실패하자 당일 후쿠자와는 식음을 전폐하고, 아까운 인재들을 잃었다며 대성통곡한다.
실제 후쿠자와를 통해 무기를 조달한 수제자 이노우에 가쿠고로(井上角五郞)는 이렇게 증언한다.
“김옥균, 박영효 등 일파의 거사는 당초부터 선생이 관여하고 듣고 계신 바이다. 선생은 단지 그 대본의 작자임에 그치지 않고 스스로 나서서 배우를 선택하고 배우를 가르치고 또한 필요한 도구를 갖추는 등 만반의 수단을 강구한 사실이 있다”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난 지 100일 만인 1885년 3월 16일 후쿠자와는 ‘시사신보’에 ‘탈아론’을 발표한다. ‘탈아론’은 ‘탈아입구’적 우월감과 융합되면서 후일 ‘대동아 공영권’을 만든다.
그러면 후쿠자와의 ‘탈아론’을 일별해보자.
“세계교통은 편리해져서 서양문명의 바람이 동쪽으로 점점 불어와 이르는 곳마다 풀과 나무도 이 바람에 휘말리지 않는 것이 없다. 생각하건대 서양의 인물, 고금에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하지만 그 거동이 옛날에는 느렸으나 이제 와서는 활발해지고 있다. 이는 단순히 교통의 이기(利器)를 이용해 기세를 타고 있기 때문일 뿐이다. 그러므로 현재 동양에 있는 나라 사람들은 이 서양문명의 동점(東漸) 기세에 놀라 이를 어떻게든 막을 각오가 되어 있다면 그럴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있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의 세계정세를 살펴볼 때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세파에 밀려 문명의 바다에 함께 뜨고 내리면서 더불어 문명의 파도를 타고 고락을 함께 할 수밖에 없다. 문명은 곧 홍역의 유행과도 같다. 현재 도쿄(東京)의 홍역은 서쪽 나가사키(長崎)로부터 동진(東進)해서 봄기운과 함께 갈수록 만연하고 있다. 이런 시기를 맞아 이 유행병의 해악을 막으려 해도 과연 막을 방법이 있을까. 결코 그럴 수단은 없다. 그저 해로울 뿐인 유행병이라 하더라도 그 기세에 놀라지 말아야 할 일이다. 하물며 이해상반이 따르고, 항상 이익이 많은 문명에 있어서랴. 단지 이것을 그냥 막지 않는 데 그칠 일이 아니라 그것이 만연하도록 힘써 돕고 국민으로 하여금 빨리 그 바람을 쐬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지혜로운 사람들이 할 일이다. 서양문명이 일본에 들어온 것은 가에이(嘉永)개국에서 시작되었다. 국민들은 마침내 그것을 취해야 할 필요를 깨닫고 점차 활발하게 받아들이게 되었지만 진보의 길에 걸림돌이 되는 고풍노대(古風老大)한 정부가 가로누워 있어 이를 어찌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근대문명은 일본의 낡은 구각(舊殼)과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구투(舊套)를 벗으려면 동시에 정부도 갈아치울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곧 문명바람을 막아 그 반입을 금지할 것인가, 그리하면 일본은 독립할 수 없다. 왜냐하면 세계문명의 기세가 동양 고도(孤島)를 홀로 잠자도록 내버려두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 일본의 지사들은 국가를 중히 여기고 정부를 가볍게 보는 대의에 기초하여, 또 다행히 황실의 신성존엄에 의뢰하여 마침내 구 정부를 무너뜨리고 신정부를 수립하였다. 따라서 조야(朝野) 구별 없이 모두 서양 근대문명을 받아들여 오로지 일본의 낡은 틀을 벗는 것뿐만 아니라, 아시아 전체를 하나의 축으로 하여 주의(主義)로 내세워야 할 것이다. 주의로 하기 위해서는 오직 ‘탈아(脫亞)’라는 두 글자에 있을 뿐이다. 우리 일본의 국토는 아시아 동쪽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 국민정신은 이미 아시아의 고루(固陋)함을 벗고 서양문명을 따르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 불행한 일은 이웃에 있는 나라이다. 하나는 중국이고 또 하나는 조선이다. 이 두 나라는 국민도 고래 아시아 류(流)의 정교풍속(政敎風俗) 아래 자라온 배경은 우리 일본 국민과 다르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 인종의 유래가 다른 것일까, 아니면 같은 모양의 정교풍속 속에 살면서도 유전교육(遺傳敎育)의 취지가 같지 않은 점일까. 일․지(支)․한(韓) 삼국을 비교하여 중국과 조선의 서로 닮은 상황은 조선과 중국이 일본보다 가깝고 이 두 나라 사람들은 한편이 되어 나라에 관해 고쳐 나아가는 길을 알지 못한다. 교통 편리한 세상에 문명의 사물을 못 듣거나 못 보았을 턱이 없는데도 마음을 움직이지 않고 고풍구습에 연연한 정은 백년 천년의 옛날과 다름이 없다. 이 문명 일신(日新)의 활극장(活劇場)에 교육은 유교주의를 부르짖어 인의예지(仁義禮智)만을 칭송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외견상 허식에 구애되어 진리, 원리를 가르치지 않고 도덕마저 땅에 떨어져 지독한 불염치(不廉恥)가 극에 달해도 거만하게 자기반성의 빛이 없다. 우리들이 이 두 나라를 보면 지금처럼 서양문명이 동쪽으로 밀려들고 있는 때에 독립할 수 있는 길은 없다. 다행히 그 나라에 지사들이 나와 우리의 유신 때처럼 큰일을 꾀한다면 다르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수년 안에 망하여 국토는 세계문명 제국이 분할하게 되리라는 예상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홍역과 같은 문명개화를 맞으면서도 조선과 중국 두 나라는 그 전염의 순리에 역행하여 무리하게 이를 피하기 위해 방안에 틀어박혀 공기를 차단하고 질식 상태에 빠져드는 상황을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수레와 수레바퀴, 입술과 이빨 관계인 이웃 나라는 서로 도움이 되는 것이 보통의 예이다. 그렇지만 지금의 중국․조선은 일본에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서양문명인의 눈에는 세 나라가 지리적으로 가까이 있어 동일하게 보고 중국과 조선을 평가하는 데도 일본과 같이한다. 중국과 조선 정부가 전제(專制)정치를 행하고 법률에 따르지 않으면 일본 또한 무법 국가가 아닌가 하고 의심하여 중국과 조선의 인사(人事), 과학을 모르니까 일본도 음양오행의 나라라고 생각한다. 중국인의 비굴함과 수치를 모르므로 일본인의 의협심도 함께 매도당하고, 조선의 형벌이 참혹하면 일본인도 무정하다고 단정해 버린다. 이를 마을에 비유하면 한 마을 한 고을이 어리석게 무법(無法) 잔혹(殘酷)할 때는 설령 그 마을 안의 한 가족이 정당한 일을 해도 다른 많은 사람들의 잘못에 가려 묻혀버리는 이치와 다르지 않다. 그 영향이 간접적으로 우리들의 외교에 장애가 되는 일이 적지 않다. 일본의 일대 불행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오늘의 꿈을 펴기 위해 이웃 나라의 개명(開明)을 기다려 함께 아시아를 일으킬 시간이 없다. 오히려 그 대열에서 벗어나 서양과 진퇴를 같이하여 중국․조선을 접수해야 한다. 접수 방법도 인접 국가라는 이유만으로 사정을 헤아려 줄 수 없으며 반드시 서양인이 접하는 풍에 따라 처분해야 할 뿐이다. 나쁜 친구를 친하게 하는 자와 함께 악명을 피할 수 없다. 우리가 마음으로부터 아시아 동방의 나쁜 친구를 사절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21세기 관점에서 살펴보면 99%의 시민을 무시하고 1%의 기득권을 위해 존재하는 국가는 존재할 이유가 없듯이, 오직 조선왕실과 양반층의 기득권만 존중받고, 조선백성은 하대 받는 국가도 존속할 필요가 없다. 이런 차원에서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21세기용어로 말하면 전체주의, 독재주의, 공산주의, 인권탄압 국가인 김일성세습독재수령체제와 흡사한 조선을 자유민주주의, 자유시장경제주의, 건강하며 건전한 복지국가로 건설하겠다는 갑신정변의 실패로 개화당 내각의 형조판서로 임명된 부친 윤웅렬이 유배당하자, 윤치호는 1885년 1월 푸트 공사의 소개장을 갖고 일본을 경유, 상투를 자르고 양복을 입고 상하이로 망명 겸 유학의 길에 오른다. 윤치호는 1881년 미국 남감리교 선교사 영 J. 앨런(Young J. Allen,林樂知, 1836-1907)이 세운, 상하이 중서서원(中西書院; Anglo-Chinese College, Shanghai)에서 1884년부터 3년 6개월 동안(19세-22세) 공부한다.
이 무렵 중서서원의 앨런학장과 지도교수인 본넬(W. B. Bonnel) 선교사가 세례 받을 것을 권면하자, 22세 때인 1887년 4월3일 1887년 4월 3일 신앙고백서 ‘원봉진교서’(願奉眞敎書)를 제출하고, 본넬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고, 조선인 최초의 남감리교인이 된다.
그는 중서서원 재학 동안 서양의 선진문물을 접하며 중국을 세계의 중심으로 보던 조선왕조의 중화사상에 입각한 사고방식에서 벗어나면서, 조선 근대화, 곧 21세기 용어로 말하면 자유민주주의, 자본주의, 건전하며 건강한 복지국가 건설을 이룩하겠다는 각오를 한다.
(4) 미국 유학
윤치호는 1888년 선교사 A. J. 앨런의 주선으로 미국으로 건너 가 남북 전쟁의 격전지이며 미국 country music 레코드 산업의 중심지로 남감리교가 운영하는 밴더빌트대학교(Vanderbilt University, Vandy or VU in Nashville, Tennessee) 신학부에서 3년(1888.11-1891), 에모리대학교(Emory University in Atlanta, Georgia)에서 2년(1891-1893)간 인문, 사회, 자연과학 등을 수학한다. 에모리 대학교 수학시절 공부하면서 그는 틈틈이 순회강연을 하고 받은 돈과 학비를 절약하여 모은 돈 등 모두 200달러를 1893년 3월11일 에모리대학교 제10대 총장 캔들러(Warren Akin Candler, 1857-1941) 박사에게 위탁, 조선에 기독교선교와 학교 설립하는데 쓰도록 요청한다.
윤치호는 미국 유학을 통해서 중국의 중서서원에서 다졌던 조국 조선의 근대화에 대한 성공은 기독교 신앙에 의한 서양교육에 달려있음을 깨닫고 성삼위 하나님께 기도하며 조선을 기독교의 나라로 만드는데 최선을 다한다.
(5) 귀국과 선교
윤치호는 갑신정변으로 정치적 망명을 한 몸이기 때문에 귀국하지 못하고 1893년 11월 모교인 상해 중서대학으로 가서 교수로 부임해 가르치다가, 동학 농민 혁명(1894.1.11.-1895.3.29.)이 청일전쟁(1894.8.1.-1895.4.17.)으로 확대되어 일본이 승리하고, 청국정권이 무너지며 친일정권이 들어서자 윤치호는 조국을 떠난 지 10년 만인 1895년 2월 3일 귀국하자마자 동년 8월 19일 그는 남감리교 본부와 연락하여 조선선교를 요청한다.
윤치호의 요청으로 1895년 10월 13일 주일 헨드릭스(Eugene Russell Hendrix, 1847-1927) 감독이 중국에서 17년간 선교한 리드(Reid, C. F, Clarence Frederick Reid, 조선명李德이덕, 중국청나라 선교 1878-1895, 조선선교 1895-1910, 1849-1915) 선교사와 함께 선편으로 인천을 경유하여 한성에 도착한다. 미국 북감리교회의 윌리엄 벤턴 스크랜턴(William Benton Scranton, 施蘭敦, 시란돈, 1856-1922 선교사: 미국 코네티컷주 뉴헤이븐에서 출생. 1878년에 예일 대학교를 졸업했고 뉴욕 의과대학에 진학, 1882년에 졸업했다. 아펜젤러 목사 부부, 아내, 어머니와 함께 1885년 2월 3일 출발, 인천에 도착했으나 갑신정변으로 조선 정국이 불안하여 잠시 일본 요코하마로 건너가 거기서 수신사 박영효에게서 조선말을 공부하였다. 그 해 5월 3일 조선에 도착하였고 의사이자 장로교 선교사인 앨런 박사가 설립한 광혜원에서 6주간 근무한 후 정동에 집 한 채를 마련하여 1886년 병원을 세우고, 고종 황제로부터 ‘시병원’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았고, 그의 어머니 메리 스크랜턴Mary Fletcher Scranton, 1832-1909여사<메리의 부친E Benton과 오빠는 감리교 목사였고, 1855년에 뉴헤븐에서 제조업을 하던 윌리엄 스크랜턴William T. Scranton과 결혼하여 둘 사이에 외아들을 두었으며 나이 40세가 되던 해에 남편과 사별>는 이 집에서 이화학당을 시작하였다. 스크랜턴 선교사는 아현교회, 상동교회, 동대문교회 등을 설립하였고 전덕기를 비롯한 많은 교회 지도자들을 길러냈다. 1907년 선교 정책을 둘러싸고 친일파인 메리맨 콜버트 해리스Merriman Colbert Harris, 1846-1921 감리교 감독<1904년에는 미감리회 총회에서 한일 동시 선교감독으로 피선되어 이듬해 내한, 1916년 은퇴하기까지 일본과 조선을 오가며 활동>과 의견 충돌을 일으켜 선교사직과 함께 감리교 목사직을 사임하고, 성공회로 교파를 옮겨, 평신도로서 의사로 활동하였음) 상동교회(1888년 스크랜튼 선교사가 설립한 감리교 교회. 후에 정식교회건물은 당시 도시건설자, 건축가인 심의석沈宜錫, 1854-1924이 건축에 참여하여 1900-1901에 걸쳐 건립하였다. 상동교회는 민족운동의 산실이었다. 이동녕, 박용만, 이승만, 김구, 이준, 이회영, 전덕기 등이 상동교회성도) 담임목사가 상동교회 청년 김주현과 김홍순을 리드 목사에게 보내어 협조하도록 하였고, 리드 목사는 두 조선성도를 매서인으로 임명하여 서울 근교에 복음을 전하고, 그 결실을 보아 1897년 5월 2일 리드목사 집례로 고양읍에서 장년 24인 유년 3인에게 세례를 베풀어 남감리회 최초의 고양읍교회(윤 장로의 사재로 한옥건물을 마련하여 남감리교 최초 교회인 고양읍교회 창립에 중추적 역할을 담당)가 탄생하여 이날이 남감리회 기념일이 된다.
농촌 고양읍교회가 설립된 그 다음 달인 6월 21일에는 서울 리드 목사 댁에서 처음으로 공중 예배를 시작하였는데 윤치호 선생이 설교하고, 이 교회가 뒤에 광화문교회가 된다.
1908년 모교인 에모리대학교로 부터 명예법학박사 학위 수여를 결정했으나 본인이 사양한다.
(6) 조선근대화개혁의 대실패
1) 갑신정변실패와 김옥균의 암살
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실패 그리고 자신이 존경한 김옥균(金玉均, 1851-1894) 선생이 상하이 뚱허양행(東和洋行) 호텔에서 홍종우(洪鍾宇, 1850-1913: 그는 2년여 간 일본에서 일해 배 삯을 모아 프랑스에 최초로 유학한 조선인으로 파리 체류 시절 늘 한복을 입고 다닐 정도로 자주적 개화파 인사로 고종의 총애를 받으며 황국협회설립을 주도하는 동시에 보부상을 동원하여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활동을 방해하였고, 감리사로 이승만사건의 재판에 관여해, 이승만 청년에게 사형을 구형하였으나 후에 형을 감하여 종신형에 태형 100대를 선고)의 리볼버 권총으로 저격, 암살당한 사건은 윤치호 청년의 개혁의지전체를 송두리째 빼앗아갈 정도의 대 충격이었다.
2) 독립협회설립과 해산(1896.7-1898.12)
1895년 10월 8일 을미사변(乙未事變: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 고종과 세자는 자신들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경복궁을 떠나 21세기 용어로 설명하면 자유민주공화국 미국이나 입헌군주제 영국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전체주의, 독재주의, 공산주의, 인권탄압국가인 러시아제국공사관으로 이주하는 아관파천(俄館播遷: 1896.2.11.-1897.2.20.)이라는 어리석은 짓을 저지른다.
마침 서재필(徐載弼, 1864-1951) 선생이 갑신정변으로 미국에 망명 중 김홍집(金弘集, 재위 1895.12.17.-1896.2.11, 1842-1896) 내각의 귀국요청에 1895년 12월 조선에 돌아와 1896년 4월 7일(1957년 4월 7일 한국신문편집인협회는 독립신문 창립일을 신문의 날로 지정)에 조선 최초의 순한글체 신문(4면 중 3면)이자 조선 최초의 영자신문(4면 중 1면) 독립신문(서재필 선생님이 미국으로 추방당하자 헨리 아펜젤러를 발행인으로 하여 윤치호 선생이 맡아 발행하다가 독립협회의 해산과 함께 폐간됨)을 발간하며, 신분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칼럼을 투고할 수 있었으며, 필진으로는 유길준, 윤치호, 이상재, 주시경 등이 참여하며, 고종의 경복궁환궁을 주장하였다.
21세기의 용어로 말하면 자유민주공화주의, 자본주의, 건전하며 건강한 복지국가의 실현을 위해 독립신문의 창간과 더불어 독립협회가 한성부에서 서재필 주도로 1896년 7월 2일 창설되며, 이상재, 윤치호, 이승만 등이 참여한다. 1896년 11월 서대문구에 청나라로부터의 독립을 기념해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독립문을 세우는 동시에, 그 옆에 있던 모화관(慕華館)을 독립관으로 개칭한 후에, 1897년 2월 20일 고종의 환궁을 성사시키고, 만민공동회를 개최한다. 고종의 퇴위와 공화정을 실시한다는 소문이 돌자, 1898년 5월 서재필 선생은 미국으로 추방되고, 독립협회를 견제하는 황국협회가 1898년 6월 30일 결성되고, 황국협회는 보부상(부보상=봇짐장수=등짐장수)들을 내세워 만민공동회를 훼방한다.
서재필 선생이 미국으로 강제출국 당한 뒤 윤치호 선생이 독립협회와 독립신문을 이끌며 국권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 독립협회가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국을 세우려고 한다는 유언비어가 퍼지자 고종은 위기를 느끼고, 독립협회에 해산 명령을 내리고, 독립협회 임원을 체포하며, 1898년 12월 25일 만민공동회를 강제 해산시키고, 윤치호 선생이 주도한 독립협회의 개화운동은 막을 내린다.
3) 1911년 ‘105인 사건’(百五人事件)
안중근(安重根, 1871-1910) 토마스의 사촌 아우인 안명근(安明根, 1879-1927) 야고보가 1910년 12월에 서간도에 무관학교 설립을 위한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면서, 프랑스인 니콜라 조셉 마리 빌렘(Nicolas Joseph Marie Willhelm, 조선이름 홍석구, 파리외방전교회, 1860-1938) 신부를 찾아가, 초대 조선총독(조선에서 제3대 통감을 겸임하며, 1910년 5월- 1916년 10월 14까지 초대 조선총독역임)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사내정의, 1852-1919)를 암살하겠다고 고해성사를 하니까, 그 내용을 종현성당(현재 명동성당) 뮈텔(Gustave-Charles-Marie Mutel, 조선명 민덕효, 1854-1933) 주교에게 서신을 통해 알리고, 뮈텔은 기독교세력을 박멸하는 동시에 4년 동안 해결치 못한 성당의 부지 문제를 종결시키기 위해, 안명근의 고해성사의 내용이 담긴 비밀 편지를 뮈텔은 눈길을 헤치며 헌병대로 일제 아카시 장군(조선총독부 경무총감 아카시 모토지로 육군 소장, 당시 헌병경찰 총책, 1864-1919)에게 전달한다. 조선 총독부는 1907년 초에 안창호 이동녕 이승훈 등이 조직한 국내 항일비밀결사단체였던 신민회(新民會)를 해체하고 기독교계 항일세력의 축출작업을 한다. 그 후 데라우치는 1916년 10월-1918년 제18대 내각총리대신을 지낸다.
윤치호 선생은 개혁실패와 천주교의 친일적인 행동으로 인한 혹독한 역사적 현실을 인식하고, 노예봉건제에서 신음하는 조선 동포를 위해 입헌군주국인 일본의 조선 합병을 받아들인다. 윤 선생은 사회진화론적 강대국 논리에 따른 친일파가 아니라, 성삼위 하나님이 주시는 자유의 축복을 조선 백성과 공유하기를 원했던 애국자이며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였다. 이것이 강대국 논리가 전 세계를 지배했던 그 시대의 역설적 한계 상황 이다.
5. 윤치호에 대한 비판자의 정체
윤치호 장로의 애국가 작사자에 대해 비판하는 부류를 보면 전공은 국악, 종교는 범천주교와 불교계, 지역은 거의 전라도출신, 사상은 김일성세습독재수령체제선호와 공산주의 독재국가 중국편애다. 그러면 비판하는 자들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자. 고인을 제외하곤 생존자에 대한 비평은 가급적 삼가며 독자의 판단에 맡기겠다.
(1) 노동은(1946-2016)은 항일음악과 친일음악의 분석으로 뛰어난 사람으로 음악계에서는 알려져 있는데, 그의 학문배경을 보면 이런 평가는 속단이다.
그는 전북 익산출신으로 한양대 음대(관현악전공)와 연세대 사범대 졸업했다고 한다. 이런 학문은 중고등학교 선생의 자격 수준밖에 되지 않는데,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으로 말미암아, 석박사의 교수자격을 가진 사람들이 부족해 그는 목원대 관현악과 교수와 음대학장을 거쳐 1999년부터 중앙대학교 국악대학 교수와 국악대학장을 역임하며, 한국음악학회 회장,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부위원장 등의 감투까지 쓴다.
그는 1990년 평양에서 열린 범민족통일음악회에서 윤이상(尹伊桑, 1917-1995) 선생과 함께하는데, 윤이상은 북한 김일성과 절친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에 박 정희 전 대통령으로부터 푸대접을 받은 인물이다.
노동은은 안중근 의사가 직접 작사, 작곡한 ‘옥중가’를 소개할 정도로 천주교에 매우 관대하다.
이런 사실에서 보면 노동은은 안익태 선생을 친일파로 몰고, 그 자리를 윤이상으로 대체시키는 동시에 기독교 대신 천주교신자의 음악을 대한민국의 주류음악으로 삼으려고 하지 않았나 하는 합리적인 비판을 불러일으킨다.
(2) 안익태 선생의 친일, 친나치 경력을 고발한 이해영(한신대 국제관계학부 교수)의 ‘안익태 케이스’가 있는데, 소설가 조정래(趙廷來, 1943-)가 한 교수의 저서를 상찬(賞讚)하며 추천한다.
조정래는 전라남도 순천시 출신의 소설가인데, 부친 조종현은 전라남도 순천군(현 전라남도 순천시)의 승려이자 시조 시인이다. 조정래는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 등의 대하소설을 집필했는데, 문학계에서는 그의 저서가 좌파 문학계에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3) 창작판소리 명창인 임진택 씨는 전북김제 출신인데,‘안익태 애국가는 우리 민족의 수치’이지만 ‘안창호 선생의 애국가 노랫말은 우리 민족의 심금을 울린 위대한 가사로 평가받아야 한다’고 하며, 안익태 곡조 대신 ‘아리랑’에 애국가 가사를 얹어 부르는 ‘아리랑 애국가’ 운동을 펼치고 있다.
(4) 부산 출신 여성 국악작곡가 김정희는 안익태의 애국가는 불가리아 민요 표절이라고 주장한다.
김 교수는 중앙대전자공학과 4학년 때 학교를 자퇴하고 1991년 구로공단 전자부품 공장에 들어가 노동운동에 참여한다. 한예종에서 북한민요로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서울대에서 한국민요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6. 종합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윤치호 장로의 애국가 작사자에 대한 비판은 천주교를 비롯해 불교와 무신론 집단이 기독교를 말살시키려는 계획된 행동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모두 힘을 다해 성삼위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애국가를 사수해야 한다.
(1) 현재의 애국가의 가사 ‘삼천리’는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의 대륙역사를 부정하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에,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프랑스공화국에게 승리를 안겨준 ‘라 마르세예즈’(초창기엔 6절이었으나 후에 9절이 첨가되어,7절만 부름)처럼, 애국가의 4절 가사에 ‘대한대륙’등의 단어를 넣어 대한민국의 진취적인 기상을 전 세계에 선언해야 한다.
(2) 윤치호 장로가 편찬한 1908년 재판‘찬미가’ 기록 가운데 애국찬미가 “하나님이 보호하사”라는 가사가 나오는데, 현재의 ‘하느님이 보우하사’의 가사대신 사용해, 안익태 선생님도 언급했다시피 애국가가 성삼위 하나님께서 주신 영감에 기원한 것임을 전 세계에 밝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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