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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의 영부인 프란체스카 도너를 통해서 본 애국가 작곡가 안익태’ YouTube!!!

아우구스티누스 2021. 5. 6. 07:45

우남(雩南) 이승만(李承晩, 재위 1948.7.24.-1960.4.27, 1875-1965) 전 대통령의 영부인 프란체스카 도너(Francesca Maria Barbara Donner 또는 Francesca Donner Rhee, 1900-1992)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천주교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영어명은 프란체스카 여사가 천주교인임을 보여준다.

 

그러면 여사의 이름에 대해 상고해보자.

 

Donner는 프랑스어이며, 라틴어로는 dōnāre이고, 영어로는 to give, donate이다. 성의 의미는 하나님의 축복임을 보여준다.

 

Francesca는 이탈리어 여성이름으로, 라틴어 남성이름 Franciscus(프랑스남자를 의미)에서 기인한 것이다.

 

Maria는 라틴어, 이탈리아어, 독어와 동일한 단어로 그리스어의 마리아’(ΜαρίαMaría), 프랑스어의 마리’(Marie), 영어의 메어리’(Mary)에 해당되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친의 이름이다.

 

Barbara는 천주교 여성순교자이름이다.

 

이러한 사실에서 보면 프란체스카 여사는 자신이 천주교 신자임에도 불구하고, 형식적으로 기독교 장로인 이승만 전 대통령의 영부인 기독교 신자로 사신 분이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한국명으로 이금순 또는 이부란으로 불리며, 별칭은 호주댁(한국인들이 오스트리아와 오스트레일리아를 혼동)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안익태(安益泰, 1906-1965) 선생을 비평하면 안 선생님은 친일파나 친나치파도 아니고 순전한 애국자임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안 선생님에 대해 살펴보자.

 

1. 국내(1906-1926)

 

안익태 선생은 1906년 평안남도 평양 문무리에서 여관을 경영하던 안덕훈(安德勳)과 김정옥(金貞玉) 사이의 7형제 중 셋째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 기독교의 교회(천주교의 성당이 아님)에서 처음으로 음악을 접하고, 바이올린과 트럼펫의 연주를 배우며 음악가가 되려는 꿈을 키운다.

 

12세 때인 1918년 평양숭실중학교에 입학하면서 선교사 모리스 마우리 박사(1880-1971)를 만나면서 안 선생의 음악길이 열린다. 13세 때인 19193.1운동이 일어났을 당시 숭실학교는 평양독립운동의 주도적 역할을 했고, 안 선생은 3.1운동 관련 수감자 구출운동에 가담했다가 일경의 지목대상이 되어 숭실중학교 퇴교처분을 받고, 마우리 박사의 주선으로 안 선생은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2. 일본유학(1926-1930)

 

안 선생은 자신의 영문명을 Ahn Eaktai로 표기했는데, 당시 조선을 장악한 일본 관리들이 한국어의 받침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기 때문에, 영문명을 자신들 멋대로 Ahn Ekitai로 수정하며 비자 발급해, 그 후에 그대로 사용한다.

 

창씨개명은 중일전쟁(1937.7.7.-1945.9.2)로 인한 전시동원 체제에 조선인들의 자발적 동원을 이끌어내기 위한 목적으로 내선일체가 강조되면서 1940211일부터 일제 총독부의 내선일체정책에 의해 추진되었기 때문에, 1926년의 안 선생의 영문표기와는 거리가 멀다.

 

그리고 1940927일 독일과 이탈리아 그리고 일본, 곧 추축국동맹(Axis Alliance, Axis Powers)이 결성했기 때문에, 창씨개명의 이유를 알 수 있다.

 

안 선생은 도쿄 세이소쿠 가쿠엔코토갓코 세이소쿠 가쿠엔 중학교(당시)(正則学園高等学校정칙학원고등학교)에서 첼로 특기자로 수학한 후, 20세 때인 1926년 도쿄 구니타치 고등음악학원(당시)(国立音楽大学)에 진학하여 전문 첼로연주자의 길을 걷게 된다. 24세 때인 1930년 구니타치 고등음악학원 졸업 후 일시 귀국하여 수차례의 첼로독주회를 연 안 선생은 다시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3. 미국(1930-1936.6)

 

(1) 샌프란시스코 한인교회에서의 최초로 태극기와 애국가의 만남

 

안 선생은 미국 캘리포니아 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해 한인교회를 찾아간다. 거기 생면부지(生面不知)의 황사선 목사가 청년음악가 안 선생을 반가이 맞이하고, 안 선생은 황 목사의 배려로 이십여 명 동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첼로 연주를 선보인다.

 

안익태는 그날 교회당에서 태극기를 난생 처음 보며, 그 태극기 앞에서 성도(동포)들이 모두 일어서서 절절하게 조국을 향한 염원인 담긴 애국가를 부르는 광경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는다. 당시 애국가의 곡조가 스코틀랜드의 가곡이자 민요인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 old long since의 스코틀랜드 어. 영미 권에서는석별의 정으로 해석한다. 영화 Waterloo Bridge의 주제곡이며, 2020.1.29일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 합의안이 통과된 직후 유럽의회에 이 노래가 울려 퍼졌음)이었다.

 

안 선생은 이때부터 애국가를 자기 손으로 작곡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2) 학업과 성가대지휘와 애국가 작곡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신시내티에 당도한 안익태는 그 해 9월 신시내티 음악원(The Cincinnati Conservatory)에 장학생으로 입학한다. 19332월에는 필라델피아 템플대학교(Temple University in Philadelphia, Pennsylvania) 음악대학원에 역시 장학생으로 편입한다.

 

이 시기 안 선생은 폴란드계 영국출신 미국의 대지휘자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Leopold Anthony Stokowski, 1882-1977: 미국의 수많은 교향악단의 음악감독을 지내며 클래식부터 대중음악, 곧 영화음악까지 영향을 미친 미국의 음악의 아버지)가 지휘하는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의 연주회를 관람하며 지휘자의 꿈을 키우며, 스토코프스키의 권유로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의 첼로 연습단원으로 입단하여 값진 경험을 쌓는다.

 

1934년부터 1935년에 걸쳐 필라델피아 심포니클럽(Symphony Club Philadelphia)과 앱나키캠프 관현악단(Camp Abnaki Orchestra) 및 체스트넛 힐 장로교회(The Presbyterian Church of Chestnut Hill) 성가대 지휘자 등으로 활동하며 지휘의 기초를 쌓는다.

 

안 선생은 스토코프스키의 영향과 자신의 음악활동으로 미국에서 인정받고, 마침내 1935년 엘칸-보걸사의 의뢰로 한국음악의 첫 선언모음곡을 출판한다. 안 선생은 첼리스트, 지휘자, 작곡가로 분방하게 활동하면서, 애국가를 창작하기 위해 무려 40여 개국의 국가(國歌)를 수집하고, 세계 각국의 민요, 가곡, 성가곡을 모아 비교하며 작곡에 착수한다.

 

마침내 29세 때인 193511월에 안 선생은애국가의 작곡을 완성하고, 이 애국가 곡조를 19351228일 한인 예배당에서 직접 연주하여 발표한다.

 

30세 때인 1936326일자 미주 신한민보에 안 선생이대한국 애국가라는 제목의 칼럼을 투고했는데, 애국가가 성삼위 하나님의 은총에서 기원한 것임을 보여준다.

 

5년 전 미주 상항(샌프란시스코의 무역항)에 도착하여 많은 감상과 인상을 가졌는데 특별히 제게 가장 깊은 인상을 준 것은 상항 한인 예배당 강당 위에 걸린 대한국의 태극기와 제일성에 처음 부른 대한국 애국가였습니다. (중략) 과거 5년간 구심(求心: 중심으로 쏠리는 힘) 근작(近作: 최근의 작품)하여 약 2년 전에 처음 절은 필하였습니다만은 후렴은 필하지 못하고 지나는 중 지난 11월 하루 어느 날 이른 아침에 실로 하나님의 암시(성령하나님의 조명)로 후렴 전부를 근작하였습니다.”

 

19368월 베를린 올림픽에 참가한 손기정 선수 등을 찾아가 자신의 애국가를 열창한다.

 

안 선생은 1960년 일본 공연 때 일본인 합창단원들에게 애국가를 한국어로 부르게 한다.

 

애국가곡조가 불가리아 민요를 표절한 것이라고 방정맞게 입방아를 찧었지만, 이미 학계에 표절이 아니라는 결론이 났고, 만일 표절했다면 불가리아가 지적재산권을 청구했어야 하는데, 전혀 반응이 없다.

 

4. 유럽(1936.6-1936.12)

 

1936년 년 6월 학업을 보류하고 안 선생은 유럽행에 오르며 베를린으로 가서 세계적인 작곡가이자 바이올리니스트, 베를린 국립음악학교 교수였던 파울 힌데미트(Paul Hindemith, 1895-1963)를 면담하여 1주일 동안 지도를 받고, 6월 말 오스트리아 빈에 도착하여 세계적인 지휘자이자 작곡가, 피아니스트, 빈 국립오페라극장 감독인 파울 펠릭스 바인가르트너(Paul Felix Weingartner, Edler von Münzberg, 1863-1942: 20세기 전반을 대표하는 전설적인 지휘자이자 베토벤 교향곡 전곡을 1930년대 세계 최초로 녹음한 베토벤 해석의 최고 거장)로부터 3개월가량 지휘법을 배운다. 바인가르트너의 추천으로 안 선생은 1936911일 부다페스트 교향악단 객원 지휘자로 유럽 무대에 데뷔하며, 방송을 타는 영광의 시간을 가진다.

 

5. 미국(1937-1937.11)

 

안 선생은 미국으로 돌아와 19376월 템플대학교에서 음악학 석사학위를 받는다.

 

6. 영국과 아일랜드(1937-1938)

 

안 선생은 템플대학교 졸업 후 193711월 영국으로 건너가고, 그 다음해인 1938220일 아일랜드 수도 더블린 게이어티 극장에서에서 조선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더블린 방송교향악단을 지휘하며 관현악(관악기, 현악기, 타악기 따위의 합주 음악곡)‘한국 환상곡’(Korea Fantasy: 이 작품의 당시 정식 명칭은 교향환상곡 1번 코리아Symphony Fantasie No.1 Korea였고 네 악장으로 구성됨)을 초연하였는데, 안 선생의 정열적인 지휘에 환호를 보내며, 아일랜드인들이 찬탄해 마지않는다.

 

안 선생은 자신이 작곡한한국환상곡외에도 베토벤의에그몬트 서곡’,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4등을 지휘했다고 한다.

 

안 선생은 19571110일 자 미국 찰스턴 가제트’(Charleston Gazette)지와의 인터뷰에서 코리아 판타지의 작곡의 동기를 다음과 같이 밝힌다.

 

“‘한국 환상곡(코리아 판타지)’은 러시아의 작곡가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Nikolai Rimsky-Korsakov, 1844-1908)러시아 부활제 서곡’(Russian Easter Festival Overture Op.36: 러시아 정교음악을 모티브로 삼은 독립적 관현악곡)에 영향 받아 작곡되었다

 

7. 헝가리(1938-1941)

 

193810월부터 194110월까지 헝가리정부의 장학금을 받으며, 부다페스트 리스트 페렌츠 음악예술대학을 다녔다. 이때 헝가리의 대작곡가 코다이 졸탄(Kodály Zoltán, 1882-1967: 헝가리의 민속음악자, 교육자, 언어학자이자 철학자)로부터 작곡을 배운다.

 

2012510일 부다페스트 시민공원에 안익태선생의 흉상이 세워진다.

 

8. 독일

 

(1)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 1864-1949)

 

안 선생은 바그너(Wilhelm Richard Wagner, 1813-1883)이후 독일의 가장 뛰어난 작곡가, 독일 후기낭만파 최후의 거장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를 만나고, 안 선생이 1942312일 빈 무지크페라인잘에서 빈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고 난 후, 객석에 있던 슈트라우스가 안익태의 지휘실력을 깨끗이 인정한다고 쓴 친필편지가 전해진다. 이때로부터 194998일 슈트라우스가 타계할 때까지 8년 간 안 선생은 유일한 동양인 제자로 작곡과 지휘를 사사(師事)한다.

 

런던 필의 프로그램에는 다음과 같은 거장 리하르트 스트라우스의 추천서가 함께 인쇄 되어 있다.

 

친애하는 나의 친구 안에게.

 

나는 당신이 지휘자로서 특출한 재능과 풍부한 경험을 가지고 있음을 여러 차례 나에 의해 확인돼 증명해 주는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당신의 국제적이며 값진 음악적인 자질은 세계 주요 음악계에 관심의 대상이 될 것을 확신합니다. 당신의 예술적인 장래에 행운을 기원합니다. ”

 

슈트라우스는 나치 치하 시절, 유대인 며느리와 손자들을 지키기 위해 제국음악원 초대 총재를 지낸 것으로 전해진다.

 

슈트라우스가 오스트리아의 소설가, 저널리스트, 극작가, 전기작가인 슈테판 츠바이크(Stefan Zweig, 1881-1942)에게 쓴 편지는 슈트라우스가 총재직에서 물러나는 결정적 계기가 됨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가 친나치주의자가 아님을 밝혀준다.

 

극장에 오는 사람이 어떤 민족인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음 오페라가 완성되기까지 2년 정도 걸릴 것이고 그때쯤이면 나치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겠지요

 

안 선생은 슈트라우스 대가의 지지와 추천으로 유럽 내 저명악단 다수를 지휘했는데, 감사하는 차원에서 슈트라우스의 전기를 출판한다.

 

(2) 에하라 고이치(江原綱一, 1896-1969)

 

에하라는 도쿄제대를 졸업한 변호사로 1932년 만주국 건국 이후 하얼빈 부시장을 지낸 뒤 1938년 주베를린 만주국 공사관 참사관으로 부임해 19457월까지 독일에 머물며, 주독 일본 정보기관의 총책으로, 주폴란드 정보기관과 공동 작전을 수행했다.

 

안 선생은 에하라의 협조아래 추축국에서 음악활동이 가능함을 인식하고, 에하라가 또한 일본 기독교교회의 찬송가 가사 번역자로 활동한 기독교 신자임을 알고, 솔선수범하여 에하라를 만나 1941년부터 1944년까지 에하라의 관저(Gustav-Freytag-Straße 15 in Berlin-Grunewald)에서 숙식을 같이하며, 친선관계를 도모한다. 에하라 또한 작사에 능하기 때문에 안 선생은 그의 작사를 자신의 작품에 반영한다.

 

안 선생이 에하라 관저에 기숙했지만 그 기간 동안 16차례의 외지 공연(타국 14, 타 지방 2)과 그에 따른 연습 일정을 감안하면, 베를린의 에하라 관저에 머문 기간은 수개월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여하튼 안 선생은 자신의 탁월한 친화력으로 국제무대를 누비며 세계적인 음악가로 우뚝 솟는다.

 

9. 스페인(1946-1965)

 

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안 선생은 일제의 독일과 이탈리아의 동맹 때문에 유럽의 천주교국가에서 활동할 수밖에 없었고, 2차 세계대전이 종료되지만, 안 선생은 미영의 기독교국가로 갈 수 없어, 1946년 천주교 국가 스페인 마요르카섬(Mallorca)의 빨마 데 마요르까 교향악단의 초청으로 상임지휘자로 부임하고, 동년 여름, 스페인 여성 롤리타 탈라베라와 바르셀로나에서 결혼하며(1965년 선생이 작고한 이후엔 한국 국적을 유지하고 2005년 애국가 저작권을 한국 정부에 무상 기증하는 등 생전 한국인으로서 각별한 애국심을 보였다. 2009년 별세한 스페인 마요르카섬에서 별세했던 마리아 돌로레스 딸라베라 여사의 유해가 남편 안 선생과 합장), 스페인엔 거의 교회를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에, 요한이란 세례명으로 천주교에 입교하지만, 평생 칼뱅사상으로 충만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안 선생은 조국의 현실에 대해 몹시 괴로워하며, 조국의 참상을 알리기 위해 한국환상곡으로 1952년 최초의 멕시코 순회연주를 갖는다.

 

2차 세계대전 후의 문제가 종료되자, 1953년 안 선생은 신시내티 교향악단(The Cincinnati Symphony Orchestra)의 초청을 받고 미국 땅을 밟으며 송년음악회를 지휘한다.

 

10. 논란의 대상

 

(1) ‘한국 환상곡만주 환상곡

 

1940927일 독일, 이탈리아, 일본의 추축국 동맹(Axis powers, Axis alliance, Axis nations, Axis countries라고도 하며 간단하게 Axis라고도 표기)결성 이후 더 이상 연주회에서 한국이란 명칭을 사용하지 못하는 동시에 애국가 합창도 할 수 없게 된다.

 

이런 국제적인 상황과 더불어 유럽 전역의 오케스트라가 모두 국영이고, 국가의 요구를 거부하면 음악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안 선생은 1941한국환상곡교쿠토(極東의 일본식 발음)’란 이름으로 바꿔 연주할 수밖에 없었다. 만주환상곡도 그런 차원에서 비롯된 것이다.

 

안 선생은 1942918일 독일 베를린필하모니 홀에서 열린 만주국 건국 10주년 경축 음악회에서 4악장으로 된 만주국 축전곡을 지휘했다.

 

안 선생은 평양 출신이기 때문에 만주가 옛 부터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 등 우리 민족의 역사가 어려 있고 우리의 기상과 서정이 녹아 있는 아름다운 영토라는 인식이 안 선생님에게 각인되어 있어서, 만주 환상곡’(Manchurian Fantasy)을 연주했는데, 일본 사람들이 그 프로그램을 기획, 주최했기 때문에 자기들 맛대로 만주국 축전곡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그래서만주 환상곡’=‘한국 환상곡이라는 등식이 성립된다.

 

(2) 교향시 강천성악’(降天聲樂, 1959)

 

안 선생은 1940430야상곡과 에텐라쿠((越天樂월천악: 하늘, 곧 대한대륙을 넘어 일본열도에 온 음악)’를 초연한다. 추축국동맹 체결 직후의 연주회부터 야상곡이 사라진 에텐라쿠만이 등장한다. 당시 시대적 상황도 그렇고, 국가가 오케스트라 자체를 운영하기 때문에, 안 선생은 친일문제를 떠나 순수한 음악가로 활동한 것임을 보여준다.

 

훗날 이것이강천성악’(降天聲樂: 하늘에서 내려온 음악)으로 곡명이 바뀐다. ‘야상곡강천성악의 도입부와 피날레를 장식한다.

 

에텐라쿠를 두고 안 선생의 친일문제를 논하는데, 그것은 무지의 소치에서 기인한 것이다.

 

당시 일반학문을 등한시 하고, 오직 음악에만 열중한 한국 음악가들과는 달리, 안 선생은 한국음악사에 정통했다. 안 선생은 통일신라(676-935)의 전성시대를 이룬 경덕왕(景德王, 재위 742-765, ?-765) 때의 거문고 명인으로 신라 땅에 거문고의 전통을 뿌리내리도록 큰 공헌을 한 육두품 귀족 출신 옥보고(玉寶高)의 거문고곡인 강천성곡’(降天聲曲: 하늘에서 내려온 음악)을 알고 있다.

 

강천성곡이 일본열도에 전수되어 거문고 곡인에텐라쿠로 거듭나 794년 출범한 헤이안(平安교토) 시대를 연 일본 50대 간무(桓武환무) 천황(재위781-806) 시대부터 유행했다. 간무천황은 백제 25대 무령왕(武寧王 462-523, 재위 501-523)의 후손(그의 모친 다카노노 니가사高野新笠가 무령왕의 직계 10대손임)이다. 간무 천황은 자신의 모국인 대한대륙을 그리워하며 강천성곡에 기인한 에텐라쿠를 부흥시킨 것이다.

 

이런 사실에서 보면 안 선생을 친일파로 매도하는 작업은 어불성설임을 알 수 있다.

 

안 선생은 에텐라쿠강천성곡의 다른 이름이라고 간파했고, 이 같은 이유에서 훗날 자신의 대표작 야상곡과 에텐라쿠강천성악이라 명명한 것이다.

 

11. 대한민국에서의 특별환대

 

(1) 19553월 우남(雩南) 이승만(李承晩, 재위 1948.7.24.-1960.4.27, 1875-1965) 대통령 탄신 80주년에 특별초청을 받고, 안 선생은 스페인에서 귀국하여 이승만 대통령 80회 탄신 경축음악회를 위해 오케스트라와 혼성합창을 위한 환상적 교향곡 코리아를 서울 시공관(市公館)에서 개최하며,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해 참석한 모든 사람들로부터 뜨거운 찬사를 받고, 1957년 안 선생에게 대한민국 최초의 문화포상이 수여된다. 그 때 안선생은 이승만 전 대통령에게 자신의 한국환상곡-코리아 판타지악보를 선물했는데, 관현악보의 첫 장에는 안 선생이 지난 10여 년 동안 순회 연주한 연도와 유럽 각국 도시 이름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이때부터 안익태라는 이름은 우리 국민들에게 애국가뿐 아니라 대규모 교향곡 코리아판타지를 직접 작곡하여 세계 각국을 순회하며 국위를 선양한 애국자로 각인된다.

 

안 선생은 19603월 다시 이승만 대통령 탄신 85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재차 귀국하여 연주회를 가진다.

 

(2) 안 선생은 박정희 전 대통령을 면담하여 ‘5.16혁명 1주년 축하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1962-1964서울국제음악제를 개최하고, 1965년 문화훈장 대통령장을 받고, 197778일에 국립묘지 제2묘역에 안장된다.

 

안 선생이 천주교 신자 장면 전 총리를 밀어내고 대통령 자리에 오른 박정희 전 대통령의 5.16을 찬양하자, 범 천주교세력은 요한 안 선생이 자신들처럼 오컬트 바티칸에 속한 것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곧 기독교인을 깨닫고, 마침내애국가 곡조 표절 논란을 불러일으켜 안 선생을 매장시키려고 혈안이다.

 

12. 비평

 

노동은(1946-2016)은 항일음악과 친일음악의 분석으로 뛰어난 사람으로 음악계에서는 알려져 있는데, 그의 학문배경을 보면 이런 평가는 속단이다.

 

그는 전북 익산출신으로 한양대 음대(관현악전공)와 연세대 사범대 졸업했다고 한다. 이런 학문은 중고등학교 선생의 자격 수준밖에 되지 않는데,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으로 말미암아, 그는 목원대 관현악과 교수와 음대학장을 거쳐 1999년부터 중앙대학교 국악대학 교수와 국악대학장을 역임하며, 한국음악학회 회장,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부위원장 등의 감투까지 쓴다.

 

그는 1990년 평양에서 열린 범민족통일음악회에서 윤이상(尹伊桑, 1917-1995) 선생과 함께하는데, 윤이상은 북한 김일성과 절친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에 박 정희 전 대통령으로부터 푸대접을 받은 인물이다.

 

노동은은 안중근 의사가 직접 작사, 작곡한 옥중가를 소개할 정도로 천주교에 매우 관대하다.

 

이런 사실에서 보면 노동은은 안익태 선생을 친일파로 몰고, 그 자리를 윤이상으로 대체시키는 동시에 기독교 대신 천주교신자의 음악을 대한민국의 주류음악으로 삼으려고 하지 않았나 하는 합리적인 비판을 불러일으킨다.

 

생존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의 저서만 소개하겠다. 그것은 이해영의 안익태 케이스. 그는 한신대 국제관계학부 교수로 있는데, 소설가 조정래(趙廷來, 1943-)가 한 교수의 저서를 상찬(賞讚)하며 추천한다.

 

조정래는 전라남도 순천시 출신의 소설가인데, 부친 조종현은 전라남도 순천군(현 전라남도 순천시)의 승려이자 시조 시인이다. 조정래는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등의 대하소설을 집필했는데, 문학계에서는 그의 저서가 좌파 문학계에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안 선생에 대한 비판은 이런 부류에서 나왔기 때문에 독자들의 판단에 맡기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