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와 정의의 나라/신학 이야기

‘정치적 좌우파(자코뱅당과 지롱드당) 개념의 허상과 대한민국의 밝은 미래를 위한 개념 정리: 적과 아군의 구분법’ YouTube!!!

아우구스티누스 2021. 4. 21. 16:04

눈부시게 아름다운 4월 입니다! 바람에도 봄 향기가 가득합니다. 주위의 사람들이 우리 기독교인을 만나면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에 흠뻑 취하는 대승의 역사로 여러분이 건강하며 행복한 삶을 향유하시길 기원합니다.

 

178955삼부회’(三部會; 프랑스어 États Généraux; 영어 Estates General)가 개최되었지만, 1, 2신분의 신분별표결과 제3신분의 머리수표결의 논쟁으로 삼부회가 결렬되고, 1789617국민의회’(Assemblée nationale; 영어 the National Assembly, 1789.6.17.-1789.7.9.) 결성되고, 헌법을 제정할 때까지는 국민의회를 해체하지 않겠다는 테니스 코트의 서약’(Serment du Jeu de paume; 영역 Tennis Court Oath or The Oath of the Tennis Court, 1789.6.20.)을 통해 178979국민국민제헌의회’(Assemblée nationale constituante; the National Constituent Assembly, 1789.7.9.-1791.9.30.)로 변경하며 다음과 같은 위대한 작품을 만들어 낸다.

 

1.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Déclaration des droits de l'homme et du citoyen de 1789; 영역 The Declaration of the Rights of Man and of the Citizen; 인권선언a human civil rights)

 

(1) 입안자

 

1) 미국 독립전쟁에 참가한 장군(조지 워싱턴 George Washington, 재위 1789.4.30.-1797.3.3., 1732-1799는 라파예트를 이용해 프랑스 내에서 미국 독립전쟁에 대한 우호적 여론을 조성하고, 나아가 프랑스의 참전을 끌어내려는 정치적 계산아래, 라파예트를 소장에 임명하고 참모로 기용한다. 독립전쟁 승리 후 워싱턴의 라파예트 광장뿐 아니라 미국 전역에 있는 수십 곳의라파예트이름을 딴 시와 타운, 그를 기리는 기념비와 동상 등이 세워짐)으로 시민군 총사령관 라파예트 후작(Marquis de La Fayette, 본명 Marie-Joseph-Paul-Roch-Yves-Gilbert du Motier, 1757-1834: 2002년에는 미국 명예 시민권을 받았음)은 제헌의회에 참여하며, 미래의 미국 제 3대 대통령 토마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재위 1801-1809, 1743-1826)의 조언을 받아 1789711, 미국독립선언의 영향이 배여 있는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의 초안(a draft constitution known as the Declaration of the Rights of Man and of the Citizen, which echoed some of the provisions of the Declaration of Independence)을 작성한다.

 

2) ‘국민의회의 결성에 주도적 역할을 한 에마뉘엘 조제프 시에예스(Emmanuel Joseph Sieyès, the Abbé Sieyès/Abbé=라틴어 abbas; 그리스어 ββς; abbot, 1748-1836)와 미라보 백작 오노레 가브리엘 리케티(Honoré Gabriel Riqueti, Comte de Mirabeau; 영어 Count Mirabeau, 1749-1791: 1791년 국민제헌의회 의장)17898월 라파예트 초안을 다듬어 국민제헌의회는 1789826일 전문(前文) 17개 조문(articles)으로 이루어진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인권선언a human civil rights; Déclaration des droits de l'homme et du citoyen de 1789; 영역 The Declaration of the Rights of Man and of the Citizen)을 발표하여 혁명의 기본이념을 천명한다.

 

(2) 영향

 

1) 직접영향

 

미국독립선언(177674the U.S. Declaration of Independence) 외에 샤를-루이 드 스콩다 몽테스키외(Charles Louis Joseph de Secondat, Baron de la Brède et de Montesquieu, 1689-1755)가 자신의 저서 법의 정신’(De l'Esprit des Lois, 1748; 영역 The Spirit of Laws or The Spirit of the Laws: 오컬트 바티칸에서 금서목록; 라틴어 Index Librorum Prohibitorum; 영어 List of Prohibited Books’로 지정)에서 주장한 삼권분립(입법, 사법, 행정), 스위스 태생의 프랑스 계몽주의 철학자, 사회계약론자, 직접민주주의자, 공화주의자, 교육학자, 음악평론가로 프랑스혁명에서 예언자적 역할을 담당했던 장 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1778)의 개인주의(individualism)사회계약론: 정치적 권리의 제원리’(Du Contrat Social ou Principes du droit politique, 1762; 영역 The Social Contract: Principles of Political Right), ‘인간불평등기원론’(프랑스어Discours sur l'origine et les fondements de l'inégalité parmi les hommes, 1755; 영어 Discourse on the Origin and Basis of Inequality Among Men)

 

2) 간접영향

 

첫째, 1215년의 마그나 카르타(대헌장 大憲章 라틴어 Magna Carta, Magna Carta Libertatum, 영어 the Great Charter of Freedoms: 대헌장이 견제하고자 한 것은 존John, 재위 1199-1216, 1166-1216왕의 절대권력을 견제하고 귀족의 권리였으며 인권은 부재)

 

둘째, 청교도혁명(Puritan Revolution, 잉글랜드 내전English Civil War, 1642-1651)의 도화선이 된 1628권리청원’(Petition of Rights)

 

셋째, 1688년 명예혁명(Glorious Revolution)의 결과로 이루어진 권리장전’(Bill of Rights, 1689)

 

넷째, 1776612일의 버지니아 권리장전(Virginia Bill of Rights 또는 Virginia Declaration of Rights버지니아 권리 선언: 조지 메이슨George Mason, 1725-17921776520-526일 기초. 전체 16개 조항으로 구성되어 있고, 영국 권리장전이 보장했던 귀족원 등 세습 및 특권적 계급 개념을 배제하고 생명과 자유, 재산권을 보장한 근대적 인권선언)

 

다섯째, 177674일의 미국독립선언(United States Declaration of Independence)

 

3) 자연법( 라틴어 lex naturalis; 영어 natural law, the law of nature)

 

법은 자연법과 실정법(제정법)으로 구분한다. 실정법은 국내법(공법, 사법, 사회법)과 국제법(조약, 국제법규, 국제관습법)으로 나누어진다.

 

자연법은 근세이전과 이후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근세이전에서 자연법은 신법(神法)과 동일시하여 신이 정한 인간사회의 질서로서 형이상학적으로 존재한다고 하였으나, 근세이후에서 자연법은 신권설(神權說)에 대항하여 인간의 이성을 통하여 인식되기 때문에 인간의 사회생활을 이성적으로 분석하면 민족이나 사회 및 모든 시대와 문화 등에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법체계의 기반을 세울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사상이 발전하여 자연권(자연적 권리; jus naturale)관념으로 바뀌고, 프랑스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에선 자유권, 소유권, 생존권, 저항권 등이절대적 자연권으로 기술되어 있다.

 

이것을 근거하여 어떠한 경우에도 제한되거나 침해될 수 없는 절대적 자연권엔 행복추구권, 사생활의 비밀, 양심상 결정의 자유, 신앙의 자유, 연구의 자유 등이 있고, 사회질서나 국가적 목적을 위하여 제한할 수 있는 상대적 자연권엔 평등권, 신체의 자유, 거주이전의 자유, 직업선택의 자유, 주거와 통신의 불가침, 표현의 자유, 학문과 예술의 자유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3) 결과

 

프랑스 인권선언은 194812103회 유엔 총회에서 선포된세계 인권선언’(Universal Declaration of Human Rights)의 바탕이 된다.

 

(4) 내용: 전문인 인권 선언(17)을 비롯하여 본문 7201조로 되어있다.

 

1) 1: 인간의 기본권(천부인권)

 

2) 2: 저항권(자유권과 재산권과 신체 안전에 대한 권리와 억압에 대한 저항권)

 

3) 3: 국민주권의 원리

 

4) 6: 참정권, 평등권

 

5) 11: 사상과 언론의 자유

 

6) 16: 권력 분립의 원칙

 

7) 17: 소유권의 신성불가침에 대한 조항

 

2. ‘프랑스 헌법’(Constitution de 1791; 영어 The short French Constitution of 1791)

 

국민제헌의회'(Assemblée nationale constituante; the National Constituent Assembly)179193일 프랑스 최초의 성문헌법인 프랑스 헌법’(Constitution de 1791; 영어 The short French Constitution of 1791)을 제정하고, 이 헌법을 바탕으로 그해 101일 첫 번째 선거가 실시되어, ‘국민제헌의회는 해체되고, ‘국민입법의회’(프랑스어 Assemblée nationale législative; 영어 Legislative[lédʒislèitiv] Assembly, 1791.10.1.-1792.9.20.)가 구성된다.

 

(1) ‘프랑스 헌법3가지 특징이 담겨있다.

 

첫째, 입헌군주제(constitutional monarchy or 제한군주제limited monarchy)

 

왕권신수설(Divine Right of Kings: 국왕의 권력은 신으로부터 받은 것이며, 지상의 여하한 것으로부터도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상)에 근거하여 대왕 루이(프랑스어 Louis le Grand; 영어 Louis the Great), 태양왕(프랑스어 le Roi Soleil; 영어 the Sun King) 루이14(Louis XIV, 재위 1643-1715, 1638-1715)(: 임금의 자칭)이 곧 국가이다’(프랑스어 L'État, c'est moi; 영역 The state, it is I or I myself am the nation: 볼테르Voltaire, 1694-1778이 퍼뜨린 헛소문이라는 견해가 있음)라는 말이 보여 주듯이 모든 것은 오로지 국왕 한 사람의 전단(專斷)에 맡겨져 있는 절대군주제(absolute monarchy)와는 달리 왕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왕권의 권한을 법 아래에 두는, 곧 왕권과 의회(입법권을 가진 의회가 행정권을 가진 국왕보다 우위에 있음)라는 두 국가기관의 병존타협의 형태를 일컫는다.

 

둘째, 권력분립(séparation des pouvoirs; 영어 separation of powers/대한민국에서는 삼권분립; 라틴어 trias politica)

 

행정부(the executive): 왕과 왕정의 각료(the king and royal ministers)

 

입법부(the legislative): ‘프랑스 헌법을 바탕으로 1791101일 첫 번째 선거가 실시되어, ‘국민제헌의회는 해체되고, ‘국민입법의회’(프랑스어 Assemblée nationale législative; 영어 Legislative Assembly, 1791.10.1.-1792.9.20.)가 구성되어 입법부를 담당

 

사법부(the judiciary): 행정부 및 입법부와 독립

 

셋째, 제한선거

 

재산과 납세 능력에 따라 참정권을 크게 제한했다. 능동시민(active citizenship)과 수동시민(passive citizenship: women, slaves, children, and foreigners)로 구분한 동시에 재산과 납세의무의 25세 이상의 능동적 시민(남성)은 선거인단을 선출하고, 선거인단이 입법의원을 선출한다. 선거인단이 되기 위해서는 훨씬 더 까다로운 재산 자격이 설정되어 있다.

 

(2) ‘프랑스 헌법폐지

 

1) 프랑스혁명으로 주변의 국가인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은 각국의 왕조멸망을 염려하여, 프랑스와 혁명전쟁을 일으키 고, 프랑스가 열세에 몰리자 파리 시민과 의용군은 그 원인은 전쟁에 비협조적인 루이 16(Louis XVI 재위 1774.5.10.-1792.8.10, 1754-93)에게 있다고 생각하고, 1792810일 튈르리 궁전 습격(Prise des Tuileries)을 감행하여 국왕 일가를 탕플 탑(Tour du Temple)에 유폐시켜 왕정폐지를 하고, ‘1791년 프랑스 헌법은 사실상 파탄에 이르게 된다.

 

2) 1793121일 루이 16세가 기요틴에서 처형됨으로 입헌군주제의 프랑스 헌법의 의의가 없어진다.

 

3) 부르주아지의 지지를 받고 있는 온건파 지롱드 당(The Gironde: ‘지롱드 주() ’출신의원이 많아 여기에서 명칭이 기원하고, 입헌군주제를 주장하고 루이 16세 처형을 반대)1791년부터 주도권을 잡고 있다가 179362일 그 주도권을 급진파 자코뱅 당(the Jacobin Club or the Jacobins)에게 넘겨 사실상 지롱드파의 성문헌법인 프랑스헌법의 존재가치가 사라진다.

 

4) 국민공회(Convention nationale; 영어 The National Convention, 1792.9.20.-1795.10.26.)에서 로베스피에르(Maximilien François Marie Isidore de Robespierre, 1758-1794.7.28.)와 로베스피에르의 오른팔 루이 앙투안 레옹 드 생쥐스트(Louis Antoine Léon de Saint-Just, 1767-1794) 주도로 1793624일 프랑스 헌법(Acte constitutionnel du 24 juin 1793; 영어 The Constitution of 1793; the Constitution of the Year I공화력 1년 헌법; the Montagnard Constitution자코뱅 헌법 또는 몽타뉴<산악파> 헌법)을 채택한다. 이 헌법은 21세 이상 남성의 보통선거와 일정 조건을 충족하는 외국인에게도 참정권을 인정하는 등 선거권 확대를 지향한다. 이 헌법은 로베스피에르의 처형으로 실현되지 못한다.

 

3. 국민공회(Convention nationale; 영어 The National Convention대회, 총회1792.9.20.-1795.10.26)

 

국민공회는 회기 2일째인 1792921, 공화정을 선포하여 앙시앵 레짐(구체제; Ancien Régime; 영어 Old or Former Regime: 1789년 프랑스 혁명 전의 절대군주정체를 가리킴)이 무너뜨리고, 1791년에 제정된 입헌군주제 프랑스헌법도 불과 1년 만에 폐지하고, 프랑스 제1공화국(the French First Republic, 17921795)을 수립한다.

 

4. 자코뱅 당(the Jacobin Club or the Jacobins)

 

(1) 기원

 

급진파 자코뱅 당의 이름은 제3신분의 대표들이 자주 모였던 파리 자코뱅(도미니크 수사) 수도원(the Dominican rue Saint-Honoré Monastery of the Jacobins)의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1792년 프랑스혁명 당시 국민공회에서 왼쪽 좌석에 앉아서 좌파로 불리고(지롱드 당은 오른쪽 좌석에 앉아 우파로 불림), 국민공회 왼쪽의 가장 높은 의석에 앉았기 때문에 산악파(La Montagne; the Montagnards몽타뉴파; 영어 the mountain for their seats in the uppermost part of the chamber)라 부른다.

 

이런 실례는 조선에서도 찾을 수 있다.

 

조선 14대 왕 선조(宣祖, 재위 1567-1608, 1552-1608) 때 인사권을 쥐고 있는 이조정랑(吏曹正郞) 오건(이황과 조식에게 학문을 배운 영남학파의 학자)이 물러나면서 후임으로 영남학파의 김효원(金孝元, 1542-1590: 윤원형의 사위 이조민의 친구이며, 허균許筠, 1569-1618은 그의 사위이고, 허균의 친형 허봉許篈, 1551-1588의 딸이 그의 맏며느리임)을 이조정랑으로 천거하자 조선 13대의 왕 명종(明宗, 재위 1545-1567, 1534-1567: 중종은 제1계비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와의 사이에서 제12대 왕 인종仁宗, 재위1544-1545, 1515-1545를 낳고, 2계비인 문정왕후文定王后 윤씨와는 명종을 낳았다. 장경왕후의 오빠 윤임尹任을 대윤大尹, 문정왕후의 아우 윤원형尹元衡을 소윤小尹이라고 칭했음)비 인순왕후(仁順王后: 청릉부원군靑陵府院君 심강沈鋼의 딸)의 동생이자 이조참의(이조판서-이조참판-이조참의-이조전랑<이조정랑+이조좌랑: 이조吏曹 오늘날의 행정안전부-인사혁신처>) 심의겸(沈義謙, 1535-1587)은 김효원이 일찍이 명종 때의 권신(權臣: 권세 있는 신하)이던 소윤(小尹: 문정대비文定大妃) 영수인 윤원형(尹元衡)의 식객으로 있었던 사실을 들먹이며 이를 반대했다. 그러나 결국 1574년 김효원은 이조전랑에 발탁되었고, 1575년에 심의겸의 아우인 심충겸(沈忠謙)이 김효원의 후임으로 이조전랑에 추천되자, 이번에는 김효원이 전랑(銓郞)의 직분이 척신(戚臣: 임금과 성은 다르나 일가인 신하)의 사유물이 될 수 없다 하여 반대함으로써 두 사람은 대립하기 시작했다. 결국 심의겸을 지지하는 서인(西人)과 김효원을 지지하는 동인(東人)으로 갈라져 당쟁의 시초가 된다.

 

심의겸 거주지가 도성(종로구 광화문) 서쪽의 정릉동(貞陵洞: 태조 이성계의 계비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곡산 강씨谷山康氏-의 정릉貞陵-사적 208-이 있어 붙여졌다. 정릉 이전의 지명은 살한리였고, 그것을 한자어로 사을한리沙乙閑里 또는 사아리沙阿里로 불리며, 현재 성북구에 위치)에 위치한다 하여 서인이라 부르고, 김효원의 거주지가 도성(종로구 광화문) 동쪽 낙산 및 건천동(乾川洞: 비가 오지 않으면 개천의 바닥이 말라붙어 통행로로 사용되지만 비가 조금이라도 내리면 곧 물이 불어 냇가로 변한데서 유래되었음: 현재 을지로 4가와 충무로 4가 사이에 있으며, 현재 중구 인현동의 명보극장 앞에 충무공 이순신 생가 터라는 표지석이 있음)에 위치한다 하여 동인이라고 불렀다.

 

(2) 구성원: 파리 시민 노동자 (working-class Parisians)인 상퀼로트(the sans-culottes)

 

(3) 지도자

 

1) 급진사상가의 장폴 마라(Jean-Paul Marat, 1743-1793)

 

2) 관용파의 조르주 자크 당통(Georges Jacques Danton, 1759-1794)

 

3) 루소사상을 실천하는 막시밀리앵 드 로베스피에르(Maximilien François Marie Isidore de Robespierre, 1758-1794.7.28)

 

로베스피에르가 최고 권력을 장악하면서 항소할 수 없는 혁명재판소(Tribunal révolutionnaire; 영어 The Revolutionary Tribunal: 1793.3.10.-1795.5.31.)와 공안위원회(Comité de salut public; Committee of Public Safety, 1793.4.7.-1795.11.4) 등의 기관을 이용해서 반대파를 단두대(기요탱Joseph-Ignace Guillotin, 1738-1814은 예수회 회원이었고 사형제 폐지론자였다. 1789년 프랑스 혁명 직후에 국민의회 의원으로 활동하며, ‘모두에게 공평하고 고통이 덜한 처형 방법이 필요하다며 단두대의 사용을 제안해, 그의 이름을 따서 기요틴Guillotine으로 불림)로 보내 숙청하는 공포 정치(la Terreur, 영어: the Reign of Terror, 1793.9.5.-1794.7.27.)를 열었다고 천주교 역사가들이 비판하는데, 그것은 오컬트 바티칸의 지시대로 30-40만에 이르는 사망자가 생겨 혁명 중 가장 처참한 살육이 벌어진 방데반란’(Rébellion Vendéenne; 방데전쟁Guerre de Vendée; 서부 전쟁Guerres de l' Ouest’, 1793-1801)을 감추기 위해서 로베스피에르를 희생양으로 삼은 것이다.

 

그러면 로베스피에르에 대해 상고해보자.

 

로베스피에르는 체구와 목소리가 작고, 사형선고문에 서명해야 하는 압박감 때문에 판사직을 내려놓았을 정도로 혁명가에 어울리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그는 천주교신자로 아침저녁으로 기도하며 윤리도덕으로 흠잡을 없을 만큼 살았지만, 당시 천주교성직자들의 극도로 타락한 상황을 보고, 천주교를 떠나, 그 대체제로 스위스 제네바(Geneva; 프랑어 Genève주네브)공화국 출신 장 자크 루소(Jean Jacques Rousseau, 1712-1778)를 스승으로 삼고, 그의 사상을 추종하며, ‘최고 존재의 숭배’(Culte de l'Être suprême; 영어 The Cult of the Supreme[səprí:m] Being), 이성 숭배’(The Cult of Reason)를 프랑스 제1공화국의 국교로 삼고, 179368일 튈르리 공원에서 최고 존재를 기리는 제전을 벌였다. 1802년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e‘on Bonaparte or Napoleon I, 프랑스 제1제국의 황제1804-1814, 1815, 1769-1821)에 의해 금지된다. 그 대신 나폴레옹은 1808년 철학-논술 시험인 ’‘바칼로레아’(Baccalauréat)를 교육과정의 중등과정 졸업시험으로 지정해 프랑스인들의 철학적 사고와 대화법을 세계 최고의 수준으로 만들었다.

 

로베스피에르는 루소의사회계약론: 정치적 권리의 제원리’( Du Contrat Social ou Principes du droit politique, 1762; 영역 The Social Contract : Principles of Political Right)의 두 사상, 곧 나라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주권 재민설’(主權在民說; popular sovereignty or sovereignty of the peoples’rule)일반의지’(volonté générale; 영어 General will: 시민의 공통의 이익을 추구하는 의지)를 위한 경제적 평등사상을 프랑스 제1공화국의 모토로 삼고 실현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천주교 타락에 대한 절망감으로 기독교의 유산을 모두 없애기 위해 예수 탄생 연도(B.C./A.D.) 대신 1792(1792.9.21. The French First Republic선포)을 혁명 원년으로 삼고, 1주일 체제가 아닌 10일 기준으로 바꾸며, 달력도 완전히 개조했다. 종래의 수많은 종교기념일은 혁명 전사들을 위한 경축일로 바꾸고, 기독교적 이름을 가진 도시나 마을, 거리 이름까지 제거했다.

 

로베스피에르가 루이 16(Louis XVI 재위 1774-1792, 1754-93)의 처형에 찬성한 배경엔 다음과 같은 스토리가 있다.

 

루이 16(Louis XVI 재위 1774-1792, 1754-93)는 대관식 직후 비오는 날 파리의 리세 루이르그랑(Lycée Louis-le-Grand루이왕립 고등학교: 로베스피에르는 11세 때인 176910월 주교의 추천으로 이 학교에 장학생으로 입학)을 방문한다는 소식에, 당시 17살이던 로베스피에르와 학생들은 아침 일찍부터 교사들에 의해 동원되어 학교 청소 정리를 했다. 그 후 추위와 빗속에서 국왕 내외를 기다리며, 국왕 내외가 도착하자 열렬히 환영했고, 로베스피에르는 대표로 선출되어 500명의 학생들 앞에서 환영사까지 읽는 영광을 누렸지만, 국왕 루이 16세 부부는 기념식 직후 축사에 답례나 학생들의 수고에 대해서도 한마디의 의사 표시도 없이 떠났다. 사실 국왕과 로베스피에르와는 나이 차이가 4살 정도이기 때문에, 국왕도 철이 없었다. 그렇지만 로베스피에르는 국왕 내외가 사려가 매우 부족한 지도자라고 결론내리고, 그 후 국왕 내외를 비판하며, 결국 처형해야한다는 상황까지 이른 것이다.

 

1794728, 로베스피에르는 콩코르드 광장에서 친동생인 오귀스탱 로베스피에르(Augustin Bon Joseph de Robespierre, 1763-1794), 자신의 오른팔 생쥐스트 등 22인과 함께 기요틴에 올라가 처형됐다.

 

로베스피에르의 죽음 후 혁명 주도권은 지롱드파가 장악했다. 이오시프 스탈린, 모택동, 호치민, 피델 카스트로 등은 로베스피에르를 이상적인 혁명가의 모범으로 규정하였다.

 

5. 종합

 

지롱드 당은 국민공회에서 오른쪽 좌석에 앉아 우파로 불리고, 자코뱅 당은 국민공회에서 왼쪽에 자리잡아 좌파로 불린다. 21세기 용어로 정리하면 지롱드 당은 영국식의 입헌군주제를 지지했고, 자코뱅 당은 미국식의 공화정과 북유럽의 복지국가건설을 지향했기 때문에, 좌우파개념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대한민국에선 국가와 국민을 사랑하는애국파와 국가보단 오컬트 바티칸을 사랑하는 무정부주의자인반애국파만 존재할 뿐이다. 전자는 기독교인이고, 후자는 천주교인이다.

 

19193.1혁명 때 16명의 기독교인들이 참여한 반면, 천주교인들은 단 한 명도 참여하지 않았다.

 

이런 사실은 기독교인이 대한민국의 대통령을 비롯해 정치지도자가 되면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자본주의, 건전하며 건강한 복지국가가 되어 세계를 리드하는 위대하며 아름다운 국가가 되지만, 천주교인이 될 경우 대한민국은 오컬트 바티칸의 노예가 되는 동시에 네오마르크시즘국가로 전락해, 비참한 신세가 된다는 것을 증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