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와 정의의 나라/신학 이야기

‘바스티유 감옥이 무너진 날은 오컬트 천주교에 대한 기독교 승리의 축제일이다’ YouTube!!!

아우구스티누스 2021. 4. 15. 15:36

푸른 산과 향긋한 봄꽃이 반겨주는 4월입니다. 4월의 길목에서 우리를 찾아오시는 성삼위하나님의 은총과 사랑 속에서 모든 시련을 극복해 건강하며 행복한 삶이되시길 바랍니다.

 

이 강의를 하는 배경은 다음과 같다.

 

야당인 국민의 힘청년 정치 플랫폼 청년당이 있는데 독일 기독교민주당의 청년 조직인 영 유니온’(Junge Union)을 본 떠 만드는 조직이다. 언론을 통해서청년당의 간부들의 사상을 엿볼 수 있다. 이들 가운데는 김어준의 TBS ‘뉴스공장에 정기 출연할 정도로 국민의 힘의 전통적인 이미지와는 거리가 먼 활동을 하는데, 간부들 상당수의 이념도 이와 맥을 같이한다.

 

이들의 공통된 견해는 다음과 같다.

 

박정희·이승만 전 대통령에 대한 향수는 글로벌 스탠더드 보수로 받아들여지긴 어렵다”,“보수의 가치를 찾아야 한다. 경제발전은 안 된다. 그건 가치가 아니다”.“보수는 엄격한 심판이어야 하지만, 포용능력이 필요하다. 이기는 사람이 다 갖도록 놔두는 것은 잘못이다”.

 

이들의 견해는 자유민주주의, 건전한 건강한 자본주의에 입각한 복지국가건설의 기독교사상과는 다른 오컬트 바티칸의 네오마르크시즘(neomarxism)이기 때문에, ‘국민의 힘은 오컬트 바티칸주의자가 되었다.

 

이런 사실을 감안하며 위의 제목에 대해서 논할까 한다.

 

1. ‘삼부회개최

 

(1) 루이 16(Louis XVI 재위 1774.5.10.-1792.8.10, 1754-93)는 즉위하자마자 1774년 중농주의 경제학자 출신인 자크 튀르고(Anne-Robert-Jacques Turgot, Baron de Laune, 1774.8.24.-1776.5.12., 1727-1781)를 재무총감(기획재정부장관)으로 임명하고, 계몽절대주의(계몽전제주의; Enlightened absolutism) 지지자 튀르고는 경제적인 관점에서 프랑스의 미국 독립 전쟁 참전을 반대하며, 1, 2신분에게 과세를 시행하는 개혁을 내세웠으나 왕실과 특권층의 반대에 부딪쳐 2년 후인 1776년에 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 d'Autriche, 재위 1774-1791, 1755-1793)에 의해 물러난다.

 

(2) 스위스 태생으로 제네바 은행의 총재를 지낸 기독교인 재무총감(기획재정부장관, 1776.10-1781.5., 1787.8.-1789.7.11) 자크 네케르(Jacques Necker, 1732-1804)는 무정부주의자에 불과한 역대 천주교인 재무총감과는 달리 재정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하는 동시에 왕실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해 1781재정보고서’(프랑스어 Compte rendu au roi; 영역 The Record of Accounts for the King or Report to the King)를 출판해 궁정 구성원들의 연금 내역, 수입과 지출 내역 등에 대한 대차대조표를 게재하여 왕실이 재정을 분식회계(粉飾會計; 분식결산粉飾決算; window dressing settlement<window dressing or accounting fraud)해 엄청난 규모의 적자를 숨기고 있다고 프랑스 시민에게 알린다. 네케르 재무총감은 파리 시민과 부르주아지로부터 진실을 사랑하는자유의 상징으로 환호를 받고, 국왕의 권위와 신비성은 추락해 왕실은 분노한다. 1781519일 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 d'Autriche, 재위 1774-1791, 1755-1793)의 압력을 받아 사임한다.

 

루이 14(Louis XIV, 재위 1643-1715, 1638-1715)의 경우, 재임 초기 그는 재무총감(1665-1683) 장바티스트 콜베르(Jean-Baptiste Colbert, 1619-1683)의 영향으로 회계의 유용성에 주목하고, 그의 조언을 청종하며, 그가 마련해준 휴대용 회계장부를 수시로 살펴본다. 베르사유궁전건축과 전쟁참여로 늘 적자인 장부를 보며 긴장을 하는데, 콜베르가 서가하자, 국왕은 더 이상 회계장부를 사용하지 않고, 그 때부터 절정기의 프랑스가 몰락의 길로 들어선다.

 

사실 신학자와 철학자들은 회계를 통해서 윤리적 및 종교적 의미를 찾았고, 위대한 화가들도 회계사의 초상을 그렸을 정도로 회계는 아주 중요했다.

 

네케르는 1784년에 프랑스 재정관리에 대한 논설’(Traité de l'administration des finances de la France, 1784; 영역 A Treatise on the Administration of Finances in France)이라는 책을 출판하자, 당시 재무총감(기획재정부장관)으로 네케르와 동년배인 샤를 알렉상드르 드 칼론(Charles Alexandre de Calonne, 재위 1783.11.3.-1787.4.8, 1732-1802)은 이 저서가 파리에서 유통되지 못하도록 노력했으나 실패하고, 1787년 루이 16세는 네케르를 파리에서 추방한다.

 

(3) 국가 부도가 임박하자 루이 16세가 1787222일 백작가문출신 재무총감(재무장관, 1783.11.-1787.4) 샤를 알렉상드르 드 칼론(Charles Alexandre de Calonne, 1732-1802)에게 명사회’(名士會; 프랑스어 Assemblée des notables; 영어 Assembly of Notables: 1367년 샤를 5Charles V, 재위 1364-1380, 1338-1380이 제1, 2신분, 곧 성직자와 귀족으로 구성된 자문기관을 설치하였지만, 왕권의 절대화에 따라 중단됨)를 재개케 하고, 칼론은 당시 144명의 명사회의원들에게 재정 결손을 메우기 위해 프랑스 인구의 5%미만의 제1신분과 제2신분의 특권층으로부터 인지세와 토지세를 걷겠다는 안을 제시하자, 특권층은 법률심사권을 갖고 있는 파리고등법원을 조정하여 파리고등법원으로부터 세금을 내지 않는 판결을 얻어내며, 이에 격분한 칼론은 재정에 대한 개혁안을 출판하고, 왕실과는 소원해지며, 루이 16세는 178748일에 칼론을 해임하고, 로렌(Lorraine)으로 추방한다.

 

(4) 칼론의 후임으로 칼론의 적대자였던 상스의 대주교(Archbishop of Sens, 1788-1790) 로메니 드 브리엔(Loménie de Brienne, 1727-1794)이 재무총감(1787.5.1.-1788.8.25)으로 임명되고, 178888일 삼부회 개최를 루이 16세로 부터 재가 받은 후 공표한다. 브리엔은 파리고등법원의 행정 권한을 박탈하여 귀족들의 힘을 약화시킨 뒤 세금을 개정하려하였으나, 특권 계층과의 파워게임에서 밀리며, 825일 해임된다.

 

(5) 루이 16세는 1787826일 천주교인 재무총감과는 달리 재정악화의 근원을 진실의 눈으로 바라보며 해결하려는 자크 네케르(Jacques Necker, 1732-1804)를 다시 재무총감(1776.10- 1781.5., 1787.8.-1790)에 임명한다. 네케르는 재정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788년에 명사회를 소집했으나 별 소득이 없자 1212일 해산시킨다.

 

178955(1302년 보니파시오 8; 라틴어 Bonifacius PP. VIII; 이탈리아어 Papa Bonifacio VIII, 재위 1294-1303, 1235-1303에 대항하던 필리프 4Philippe IV, 1285-1314, 1268-1314를 지원하기 위해 사제, 귀족, 도시의 대표들이 노트르담 성당에 모인 것을 그 기원으로 한다. 1614년 귀족들의 특권 확장을 위해 열린 이후로 176년간 한 번도 열리지 않았음), 네케르는 삼부회(전국三部會; 프랑스어 États Généraux; 영어 Estates General)를 베르사유 궁전(the Palace of Versailles)에서 개최한다.

 

삼부회는 5%미만의 제1신분(The 1st Estate성직자the clergy), 2신분(The 2nd Estate귀족the nobility, 공작duke, 후작marquis, 백작earl-영국 이외의 대륙에서는count, 자작viscount, 남작baron) 그리고 제3신분(The 3rd Estate)으로 구성되었다. 3신분(The 3rd Estate)은 이론적으로는 서민(the commons)이나 실제로는 부르주아지(bourgeoisie유산계급-안전하고 윤택한 성 bourg안 에 거주하던 프랑스 시민)를 가리켰으나 마르크스주의 이후 생산수단을 소유하는 자본가 계급과 이를 소유하지 않는 프롤레타리아(prolétariat무산계급)로 구분하지만, 당시 프랑스혁명에서 제3신분은 부르주아지, 곧 의사, 변호사, 부유한 상인과 같은 시민 계급만 해당된다. 그리고 제2신분에서 1신분, , 귀족에서 성직자가 되는 것은 가능하였으나, 3신분에서 2신분 혹은 1신분으로 가는 것은 금지되었다.

 

1, 2시민은 면세특권을 향유하면서 관직을 독점하고 토지까지 사유화한 데 반해, 3신분은 봉건적 의무와 과중한 세금만 부담하고, 참정권이 없어서 자기들의 권리를 누리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 삼부회는 천이백 명의 신분대표(1신분과 제2신분 대표는 각각 약 300명이고, 3신분 대표는 약 600: 실제로 성직자 290, 귀족 270, 평민 585명의 대표가 참석)로 구성되었으며, 3신분 대표들은 아무 장식이 없는 수수한 검은 옷을 입어야 했고, 국왕과 귀족, 성직자 대표들이 입장할 때 일어서서 경의를 표해야 했으며, 좌석도 따로 떨어져 있었다.

 

루이 16세는 삼부회를 열어서 세제개혁을 통해 국가 재정파탄을 해결하려고 했는데, 삼부회는 초반부터 표결방식을 두고 갈등이 발생하였다. 신분별 표결과 머릿수 표결을 놓고 의견이 충돌하며 난항이 거듭된다. 머릿수에 따른 표결 방법일 경우 제3신분이 유리하고, 신분별 표결방식을 채택할 경우에 기득권 유지를 위해 제1신분인 성직자와 제2신분인 귀족 대표가 협력하여 21이 되므로 제3신분이 불리했다.

 

2. ‘국민의회결성

 

표결방식의 논쟁이 고착되자 제3신분은 자신들이 삼부회가 아니라 국민의 95%를 대표한다고 주장하며 1789617일 에마뉘엘 조제프 시에예스(Emmanuel Joseph Sieyès, 1748-1836: 시에예스는 성직자<천주교총대리와 대법관, 주교>이었지만, 그의 아버지가 우편 배달부였기 때문에 제3신분을 대표했고, 소책자 3신분이란 무엇인가?Qu’est-ce que le tiers état?; 영역 What Is the Third Estate?, 1789’를 저술했고, 프랑스 인권 선언의 초안을 작성했으며, 루이 16세의 사형에 찬성했고, 1780년 처음으로 사회학sociologie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통령정부, 프랑스 제1제국에 대한 핵심적인 사상의 기반을 마련했음) 주도하에 별도로국민의회’(Assemblée nationale; 영어 the National Assembly, 1789.6.17.-1789.7.9)를 결성하고, 이에 루이 16세는 국민의회의 해산을 명한 후 자신의 동생 아르투아 백작(Louis' younger brother the Comte d'Artois, 1757-1836) 등의 의견에 따라 619일 한밤중에 회의장을 폐쇄한다. 굳게 닫힌 회의장의 문을 본 제3신분대표들은 베르사유 궁전의 테니스 코트에 몰려들어헌법을 제정할 것과 헌법이 제정될 때까지 절대로국민의회를 해산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결의를 다지는네, 이것을 테니스 코트의 서약’(Serment du Jeu de paume; 영역 Tennis Court Oath or The Oath of the Tennis Court, 1789.6.20.)라고 한다. 프랑스의 천문학자(1763년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이 됨) 장 실뱅 바이(Jean Sylvain Bailly, 1736-1793)가 초대 의장으로 선출되고, 624일 제1, 2신분 소수가 국민의회에 합류한다.

 

3. ‘국민제헌의회로 변경

 

178979일 되자 제3신분은 은 '국민의회'를 스스로 국민제헌의회’(Assemblée nationale constituante; the National Constituent Assembly, 1789.7.9.-1791.9.30)라고 선언하고 헌법 제정에 착수한다.

 

미라보 백작 오노레 가브리엘 리케티(Honoré Gabriel Riqueti, Comte de Mirabeau; 영어 Count Mirabeau, 1749-1791)1791년 국민제헌의회 의장이 되나, 왕궁에 매수되었음이 밝혀져 반역자로 낙인찍힌다.

 

4. 바스티유 감옥습격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와 아르투아 백작의 권고에 의해 루이 16세는 1789711일 귀족들과는 달리 시민들에게는 인기가 있었던 자크 네케르를 재무총감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고, 또한 국민제헌의회를 무력으로 해산시키 위해 파리와 베르사유 궁전에 포진한 25,000여 근위대 가운데 절반인 독일과 스위스 출신의 외국인 연대가 파리로 진입한다는 소문이 나돌자, 파리의 시민들은 분노하며, 714일 앵발리드 호텔(the Hotel des Invalides: 루이 14Louis XIV, 재위 1643-1715, 1638-1715 통치시대인 1671년에 착공하여 1706년에 완공한 부상병 간호 시설/앵발리드: 군사적 업적을 가진 위인들을 위한 묘지 및 예배당, 군사 박물관 등의 시설로 이루어져 있음)무기고에서 머스키트 총(muskets: 강선< 탄환이 회전하면서 나가도록 총포의 구멍 안에 나사 모양으로 판 홈>이 없는 구식 총)3만 정을 탈취했으나 문제는 탄약이었다. 불과 며칠 전 화약 250통을 안전한 바스티유 감옥으로 옮겼다는 정보를 접한 시민들은 1789714일 절대주의의 상징인 바스티유 감옥습격(Prise de la Bastille; 영어 The Storming of the Bastille)을 감행한다.

 

바스티유감옥(Bastille Saint-Antoine or Bastille de Paris)에서 프랑스어 바스티유라는 명칭은작은 요새를 뜻하는 바스티드’(bastide)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바스티유는 성채, 요새를 뜻하는 보통명사다. 바스티유는 30미터 높이의 탑 8개가 같은 높이의 벽으로 이어져 있으며, 24미터 너비의 해자(垓字: 성 주변에 조성한 인공 연못)가 둘레를 싸고 있다.

 

샤를 5(Charles V, 재위 1364-1380, 1338-1380)가 백년전쟁(1337-1453)때 파리 동부 외곽을 방어하기 위해서 파리에 쌓은 요새로, 그 후 성채가 증축되었고, 앙리 4(프랑스어 Henri IV; 영어 Henry IV, 나바라왕 재위 1572-1589, 프랑스왕 재위 1589-1610, 1553-1610)8개 탑 가운데 트레조르 탑을 금고로 사용했고, 공정왕(le Juste 루이13Louis XIII, 재위 1610-1643, 1601-1643)의 아르망 리슐리외(Armand Jean du Plessis, cardinal et duc de Richelieu, 수상재위 1624-42, 1585-1642) 추기경의 주도로 반왕정세력과 반왕정철학서적(3년 마다 한 번씩 파쇄해서 종이상자 제조업자에게 판매)의 감옥으로 사용해왔다.

 

파리 시민군이 바스티유감옥을 침략할 때 대포 30문에 장병 114(82명의 수비병과 31명의 스위스 용병으로 구성) 수비대가 바스티유 감옥을 지키고 있었고, 식량이 하루치밖에 남지 않아서 수비대 사령관 베르나르-레네 드 로네이(Bernard-René de Launay, 1740-1789) 후작은 시민대표와의 협상에 응하지만, 파리 시민군의 무기와 탄약의 반출요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1789714일 오후 530분 문이 열리고, 사령관 로네이 후작은 전투가 끝난 뒤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일부 시민군이 처형한 로네이 사령관과 장교들의 목을 잘라 창에 걸고 시내를 행진한다.

 

볼테르(Voltaire, 1694-1778)나 드니 디드로(Denis Diderot, 1713-1784) 같은 계몽사상가들이 수용됐던 정치범 수용소라고 알려진 바스티유 감옥에 정치범은 없고, 4명의 경제사범(화폐 위조범four forgers), 2명의 변태(성범죄자)귀족(two noblemen held for immoral behaviour), 정신병자(루이 15세를 암살하려고 했던 살인용의자a murder suspect)

등의 총 7명의 잡범이 있었다.

 

인간을 기계와 동일시하는 유물론자이며 타인에게 고통을 가함으로써 성적 쾌감을 얻는 가학성(加虐性) 변태 성욕’(Sadism)이라는 단어의 어원이 된 성도착증 환자로 루이 14세의 특별 명령으로 수감된 사드 후작(Donatien Alphonse François, marquis de Sade, 1740-1814)은 바스티유 감옥습격 열흘 전에간수들이 죄수를 무차별 학살한다며 군중을 선동하다 파리 근교 샤랑통 정신병원으로 이감되어 없었고, 사드가 감옥에서 폭 12cm 작은 종이조작 들의 끝과 끝을 이어 붙여서 만든 10m의 긴 두루마리의 앞뒤 면에 쓴 작품으로, 돌 틈에 감춰둔, Sadism의 기원인 소돔의 120’(Les Cent Vingt Journées de Sodome, 1785; 영역 The 120 Days of Sodom) 원고를 파리시위대가 찾아냈는데, 그것이 수확이라면 수확이었다.

 

혁명정부는 이런 사실에 경악하면서, 바스티유 감옥을 혁명의 성지로 만들기 위해 바스티유를 공격한 836명에게 혁명 영웅으로 선정하고, 혁명 연금이라는 명예 연금을 지급하여 1874년까지 예산에 편성하였다.

 

혁명 정부의 명령으로 바스티유감옥은 철거되고 오늘날 그 자리에는 바스티유 광장(Place de la Bastille)이 위치하고 있다. 광장 중앙에는 18307월 혁명을 기념하는 52미터의 7월 혁명 기념탑이 있고 이 탑 밑에는 당시 혁명 때 희생된 사람들의 유해가 묻혀 있으며, 청동 기둥에 그 이름들이 새겨져 있다. 238 계단을 올라가 정상 부근의 전망대에 서면 에펠 탑, 상젤리제 거리 등 파리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 부지에 오페라 바스티유라는 극장이 건설되었다.

 

프랑스에서는 1880년부터 해마다 714일을 바스티유의 날’(프랑스인들은 ‘Bastille Day’보다 ‘c'est le 14 juillet’라고 부름)로 지정해 국경일(the French National Day)로 기념하고 있다. 이것은 미국이 177674일 미국 독립 선언이 채택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매년 74일을 독립기념일’(Independence Day)로 지키고 있는 거와 비슷하다.

 

5. 종합

 

바스티유 감옥은 앙시앵 레짐(구체제; Ancien Régime; 영어 Old or Former Regime)이다. 바스티유 감옥의 무너짐은 기독교의 자유(청색)와 배려(평등; 백색) 그리고 사랑(박애; 적색)의 대승리이며 천주교의 복종()과 차별(성직자와 평신도 구분)과 살인과 중상모략의 파멸이다.

 

(1) 혁명파의 저널리스트 카미유 데물랭(Lucie Simplice Camille Benoist Desmoulins, 1760-1794: 파리의 루이 르 그랑 고등학교Lycée Louis le Grand에서 로베스피에르Robespierre, 1758-1794와 동급생인데, 로베스피에르에 맞서 조르주 당통Georges Jacques Danton, 1759-1794와 더불어 반혁명파에 대한 관용을 주장하고, 그것이 원인이 되어, 당통파로 몰려 처형됨)이 파리 시민의 봉기를 촉구했다. 그 연설내용은 다음과 같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네케르 해임은 1572824일 성() 바돌로매(그리스어 ΒαρθολομαοςBartholomaîos; 라틴어 Bartholomaeus; 영어 Bartholomew[=나다나엘; 히브리어 נְתַנְאֵל Netanel; 그리스어 ΝαθαναήλNathanaḗl; 영어 Nathanael) 축일의 학살(프랑스어 Massacre de la Saint-Barthélemy; 영어 The St. Bartholomew's Day massacre)<파리에서의 위그노 학살>처럼 애국자들을 죽이려는 예고편이다. 독일과 스위스 군대 용병이 우리 모두를 학살하려고 마르스 광장에서 출발할 것이다. 우리에게는 한 가지 선택만 남았을 뿐이다. 모두 무기를 들자.” (Citizens, there is no time to lose; the dismissal of Necker is the knell of a Saint Bartholomew for patriots! This very night all the Swiss and German battalions will leave the Champ de Mars to massacre us all; one resource is left; to take arms!)

 

위그노 전쟁(1562-1598) 15728월 위그노인 나바르 공국 왕자앙리 드 나바르’(Henri de Navarre, 나바르 왕국에서는 에스파냐어로 엔리케 3Enrique III’라고 불리고 훗날 프랑스의 앙리 4; 프랑스어 Henri IV; 영어 Henry IV, 나바라왕 재위 1572-1589, 프랑스왕 재위 1589-1610, 1553-1610)와 천주교 신자인 프랑스 공주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프랑스어 Marguerite de Valois, 1553-1615)의 결혼을 축하하는 축제가 벌이지고 있던 엿새째인 날이 성 바돌로매 축일이다.

 

카미유 데물랭의 연설은 칼뱅파의 위그노가 프랑스국가와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애국자라면, 천주교신자는 프랑스국가와 국민보단 오컬트 바티칸을 위해 사는 무정부주의자, 반애국세력이라고 비판한다.

 

(2) 프랑스혁명 당시 카미유 데물랭이 녹색을 새로운 프랑스의 상징으로 삼으려 했으나, 시민군 총사령관 라파예트 후작(Marquis de La Fayette, 본명 Marie-Joseph-Paul-Roch-Yves-Gilbert du Motier, 1757-1834)은 바스티유 감옥 점령 직후 시민과 군인들에게 청색, 백색, 적색(blue, white, and red)이 들어간 원뿔 모양의 프리지앙 모자’(The Phrygian cap or liberty cap)를 나눠줬다. ‘프라지앙 모자는 로마시대 해방 노예들이 즐겨 써서 자유를 상징했던 원뿔형 모자는 시민군의 상징이 됐고, 나중에는 깃발로 바뀌어 자유()와 평등(), 박애()라는 혁명 이념의 표상이 됐다.

 

1794년 국민군에 의해 국기로 제정됐다가 나폴레옹의 워털루전투 패배 이후 잠시 사라졌으나 1830년 라파예트에 의해 다시 등장했다. 라파예트는 프랑스인들이 말 그대로 삼색기’(La Tricolore)라 부르는 프랑스 국기의 명실상부한 아버지다. 후에 프랑스와 같은 세로형 삼색기가 22개국, 네덜란드 같은 가로형 삼색기는 48개국에 달한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삼색기는 기독교의 이념을 담고 있지, 천주교와는 거리가 멀다.

 

(3) 프랑스 혁명에 참가했던 사람들은 또한 상퀼로트라는 바지를 즐겨 입었다. 프랑스어 상퀼로트(Sans-culotte)없이’(without)sans+‘반바지’(shorts, breeches)culotte로 이루어졌는데, 그 의미는 반바지를 입지 않은이라는 뜻으로, 당시 귀족들은 반바지(퀼로트)를 입고 양말을 신었기 때문에, 이런 신분차별에 반대한다는 의미로 시민군들은 넓고 긴 통바지를 입었다.

 

퀼로트가 형식적인 의식이나 천주교의 제7성례를 의미한다면, ‘상퀼로트는 자유와 책임을 상징한다. ‘상퀼로트는 각자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내주하시는 성령 하나님 가운데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부 하나님을 찬양예배하며, 자신의 구원과 성화를 자유함 가운데서 책임을 갖고 주도적으로 이끈다. 이에 반해 퀼로트는 복음과는 거리가 먼 자연인의 사회적 인격을 위한 삶을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