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덧 산과 들은 푸르름으로 물들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섭리하시는 6월의 태양아래의 싱그러운 초록처럼 소망이 넘치는 푸른 날이 되길 기원합니다.
1829년 ‘천주교해방령’(Catholic Emancipation)을 내리며, 대영제국 빅토리아여왕(Queen Victoria, 재위 1837-1901, 1819-1901) 시대를 맞이한다. 그러나 그 후 몰락의 길을 가며, 그 자리를 미국에게 넘겨준다.
그 이유는 영국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기 때문이다. 오컬트 바티칸의 예수회의 농간으로 1870년 영국 국교회 협의회는‘킹 제임스 성경’의 개정(a revision of the King James Bible)할 것을 결정하며, 엉터리 ‘킹 제임스 개정판’(Revision of the King James Bible. 1881 신약, 1885 구약, 1895 외경)이 탄생하였다. 뿐만 영국성공회는 천주교세력을 아주 가소롭게 여겼다.
그런데 미국도 존 F. 케네디(John Fitzgerald <Jack> Kennedy, 재위 1961.1.20.-1963.11.22., 1917-1963) 대통령 이래로 아일랜드계가 대통령 이 자리를 잡아와서 미국의 모든 고위공직자자리는 천주교교도들이 사탄의 구렁이처럼 똬리를 틀고 있고, 기독교는 찬밥신세다.
현재 아일랜드계 80세의 천주교도 미국 바이든(Joseph Robinette Biden Jr., 1942-) 대통령, 이탈리아계 82세의 천주교도 낸시 P. 펠로시(Nancy Patricia Pelosi, , 1940-) 연방 하원의장 그리고 포르투갈의 총리 출신 73세의 천주교도 안토니우 구테흐스(António Guterres, 1949-) 유엔 사무총장 등이 오컬트 바티칸의 명령을 수행하며 전 세계를 천주교화 하고 있다.
이런 사실을 감안하며 아르망 리슐리외 추기경(Armand Jean du Plessis, Duke of Richelieu or Cardinal Richelieu, 재상재위 1624-42, 1585-1642) 에 대해 살펴보자.
1. 프랑스의 약사 (略史)
메로빙거왕조(The Merovingian dynasty, 486-751)->카롤링거 왕조(The Carolingian dynasty, 751-843)->카페왕조(프랑스어 Les Capétiens; 영어 The Capetian dynasty, The House of Capet[kéipit], 987-1328)-카페왕조분가(a branch of the Capetian dynasty) 발루아 왕조(프랑스어 La maison de Valois; 영어 The House of Valois, The Valois Dynasty, 1328-1589, 필리프 6세Philippe VI de Valois, 재위 1328-1350, 1293-1350-앙리 3세Henri III, 재위 1574-1589, 1551-1589)-카페왕조분가(a branch of the Capetian dynasty) 부르봉 왕조(프랑스어 La Maison de Bourbon; 영어 The House of Bourbon, The Bourbon dynasty, 1589-1793, 앙리 4세; 프랑스어 Henri IV; 영어 Henry IV, 나바라왕 재위 1572-1589, 프랑스왕 재위 1589-1610, 1553-1610-루이 16세Louis XVI 재위 1774-1792, 1754-93; 부르봉왕조복고1814-1830, 루이 16세 첫째 동생 프로방스 백작Count of Provence가 루이 18세Louis XVIII, 1755-1824가 되고, 루이 16세 두 번째 동생 아르투아 백작Count of Artois가 샤를 10세Charles X, 재위 1824-1830.8.2, 1757-1836)-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e‘on Bonaparte or Napoleon I, 프랑스 제1제국의 황제1804-1814, 1815, 1769-1821)
리슐리외 추기경은 부르봉왕조의 루이 13세(Louis XIII, 재위 1610-1643, 1601-1643) 때 인물이다.
2. 리슐리외의 배경
리슐리외는 리슐리외의 영주(seigneur de Richelieu)이자 프랑스 대 프로포스트로 근무한 군인(a soldier and courtier who served as the Grand Provost of France)인 아버지 프랑수아 뒤 플레시(François du Plessis)와 당시 유명한 법관의 딸 쉬잔 드 라 포르트(Susanne de La Porte, was the daughter of a famous jurist) 사이에 태어났다. 리슐리외 나이 5살 때 아버지가 위그노전쟁(The French Wars of Religion,1562-98) 중 1590년에 사망하고, 집안의 경제적 상황이 나빠지면서 그는 자신이 집안을 다시 부흥시키겠노라 결심한다.
그래서 종교권력과 정치권력 모두를 거머쥐려고 천주교성직자의 길을 걷는다. 1607년 4월 17일 리슐리외는 22살의 나이로 사제서품을 받고 24세 때인 1609년에는 뤼송 교구의 주교(Bishop of Luçon)가 된다. 루이13세는 교황 그레고리오 15세(라틴어 Gregorius PP. XV; 이탈리아어 Papa Gregorio XV; 영어 Pope Gregory XV, 재위 1621-1623, 1554-1623)에게 리슐리외를 로마 천주교의 추기경의 자리에 오르도록 요청하여 1622년 37세 나이에 추기경에 서임된다. 2년 후인 1624년 39세 때 그는 궁정 복귀하여 왕의 수석국무대신(사실상의 프랑스의 초대재상)으로서 마리와 완전히 거리를 두고 루이 13세의 측근이 된다.
3. 마리 드 메디시스와의 만남
29세 때인 1614년 10월 리슐리외 주교는 13세 루이 13세Louis XIII, 재위 1610-1643, 1601-1643)와 에스파냐 왕 펠리페 3세(Felipe III, 1578-1621: 스페인의 국왕 겸 포르투갈의 국왕으로 포르투갈에서는 Filipe II로 불림)의 장녀(합스부르크의 오스트리아) 13세 안 도트리슈(프랑스어 Anne d’Autriche; 영어 Anne of Austria, 1601-1666)와의 국혼에 대한 동의를 얻기 위해 개최된 전국 삼부회(三部會; 프랑스어 États généraux; 영어 Estates General: 프랑스 세 신분, 곧 제1신분; The 1st Estate성직자the clergy, 제2신분; The 2nd Estate귀족the nobility: 공작duke, 후작marquis, 백작earl-영국 이외의 대륙에서는count, 자작viscount, 남작baron, 제3신분; The 3rd Estate의 대표자가 모여 중요 의제에 관하여 토론하는 장으로 존재했던 신분제 의회)에서 성직자 대표로 출석하여 국혼의 정당성을 설파하는 연설로 국혼의 동의를 이루어 내어, 루이 13세의 모후이자 섭정인 41세의 마리 드 메디시스(프랑스어 Marie de Médicis; 이탈리아 마리아 데 메디치Maria de' Medici, 1573-1642: 이탈리아 피렌체의 명문귀족 집안인 메디치 가문 출신의 프랑스 왕비로, 앙리 4세의 부인)의 눈에 들어 총애를 받는다. 1615년 프랑스와 에스파냐의 국혼이 이뤄지고, 리슐리외는 마리의 측근이 되어 파리의 궁성에 입성하며, 마리의 총애에 의해 루이 13세의 왕비 안 도트리슈의 궁중 고해사제(1615), 루이 13세의 고문관(1616)을 거치다가, 루이 13세와 마리아 간의 정쟁(마리는 장남 루이13세의 혀의 일부를 이유도 없이 잘라내서 루이 13세는 말을 평생 더듬게 하는 등의 아동학대에 가까운 양육을 한 반면, 장남보다 7살 아래 동생인 오를레앙 공작 가스통Gaston d'Orléans, 1608-1660을 편애했음)에 휘말려 1618년 루이 13세는 리슐리외를 아비뇽(Avignon)으로 추방시키고, 리슐리외는 불평하며 절망 가운데 세월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최초의 저서 ‘교리문답’(a catechism entitled L'Instruction du chrétien천주교에서는 ‘교리서’라고 부름)을 집필하여 자신의 성직자 임무를 수행한다.
4. 루이 13세와의 만남
루이13세는 교황 그레고리오 15세(라틴어 Gregorius PP. XV; 이탈리아어 Papa Gregorio XV; 영어 Pope Gregory XV, 재위 1621-1623, 1554-1623)에게 리슐리외를 로마 천주교의 추기경의 자리에 오르도록 요청하여 1622년 37세 나이에 추기경에 서임된다. 2년 후인 1624년 39세 때 그는 궁정 복귀하여 왕의 수석국무대신(사실상의 재상)으로서 마리와 완전히 거리를 두고 루이 13세의 신용과 신뢰를 얻으며 사망할 때까지 루이13세의 재상을 맡는다.
리슐리외의 정책의 목적은 두 가지, 곧 국내적으로 중앙집권제도(centralization of power in France)와 전제주의 (absolutism) 그리고 국외적으로 오스트리아와 스페인이 통치하는 합스부르크 왕조에 대한 저항(opposition to the Habsburg dynasty which ruled in both Austria and Spain)이다.
(1) 국내
1) 라 로셀 공성전(Le Siège de La Rochelle; 영어 The siege of La Rochelle, 1627-1628)
앙리4세(프랑스어 Henri IV; 영어 Henry IV, 나바라왕 재위 1572-1589, 프랑스왕 재위 1589-1610, 1553-1610)의 1598년 4월 13일 ‘낭트칙령’(프랑스어 Edit de Nante; 영어 Edict of Nantes)에 의해 위그노는 서프랑스 끝에 있는 대표적인 해상무역 도시 라 로셸(La Rochellee)을 자신들의 집단 거주지로 삼고, 21세기의 용어로 말하면 내주 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부하나님을 찬양감사하며, 성경을 읽고 실천함으로써 성삼위하나님의 자녀로 살면서, 자유민주공화정신과 자유무역으로 부유한 삶을 살아가는데, 이런 자유와 창조의 삶을 방해하는 루이 13세 왕조에 대해 저항한다. 마침 영국 왕 찰스 1세(Charles I, 재위 1625-1649, 1600-1649)도 잉글랜드 내전(The English Civil War, 1642-1651), 곧 청교도혁명(The Puritan Revolution)이전이라 프랑스에서 기독교인 위그노를 구원하고자 참여하겠다고 선전포고를 한다.
그런데 찰스 1세의 왕비 앙리에타 마리(프랑스어 Henriette Marie de France; 영어 Henrietta Maria of France, 1609-1669)는 앙리 4세(Henri IV, 1553-1610)의 딸로 한 살 때 부왕 앙리 4세가 암살당하면서 어머니와 오빠 루이 13세의 궁정에서 자랐다. 훗날 라 로셀의 침략을 위해서 해군이 강한 영국과 동맹을 맺기 위해 앙리에타 마리를 찰스 1세와 혼인시킨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런 상황이라면 영국과 프랑스가 매우 절친 관계로 발전되어야 하는데, 신앙문제에선 두 나라가 물러서지 않을 정도로 매우 단호하다.
리슐리외는 부친이 위그노전쟁에서 참전해 사망했고, 라 로셀 부근의 뤼송주교로 재직하면서, 라 로셀의 역사에 대해 정통하다. 리슐리외는 스스로 지휘관이 되어 라 로셸을 1년 동안 포위해 공략해, 시장 장 귀통(Jean Guiton, 1585-1654: 라 로셀 시내 한복판에 동상이 세워짐)의 지휘 아래 있는 위그노를 점령해, 1628년 10월 28일 항복을 받아내고, 루이 13세의 강력한 중앙집권을 위해 그리고 30년 전쟁 중이라 내전을 막기 위해 위그노에게 루이 13세에게 충성하면 낭트 칙령에 의한 보호를 지속하겠다고 약속한다.
그러자 프랑스 내 주교들과 천주교도들뿐만 아니라 리슐리외 측근들조차 이에 강력하게 반발하며, 리슐리외를 이단자이자 배신자라고 공격한다. 리슐리외는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다음과 같은 명언을 남긴다. “개종은 칼로 하는 게 아니라 하늘이 하시는 것이다”
1629.7.28의 알레의 화의(Peace of Alais; the Edict of Alès)에 의해 낭트칙령의 근본정신을 유지하는 차원, 곧 위그노는 신앙의 자유를 얻고, 자신들의 영지, 정치적 그리고 군사적 여러 특권을 반납한다. 그러나 이런 신앙의 관용은 루이 14세(Louis XIV, 재위 1643-1715, 1638-1715)의‘퐁텐블로 칙령’(Edict of Fontainebleau)으로 사라지고, 그 후 프랑스경제의 주춧돌 역할을 한 칼뱅파가 위그노전쟁의 당시처럼 유럽의 각국으로 망명하여, 프랑스국력은 악화되기 시작한다.
2) 문화국가건설
리슐리외는 1635년 2월 22일 프랑스어의 순수성을 보존하고 문화 발전을 위해서‘아카데미 프랑세즈’(프랑스어 Académie Française; 영어 French Academy: 프랑스혁명으로 중단되었다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éon Bonaparte, 1769-1821에 의해 1795년 10월 25일 설립된 프랑스 학사원을 구성하는 5개의 아카데미 가운데 하나로a division of the Institut de France, 1803년 부활되어 오늘에 이른다. 회원은 40명이고 일단 회원으로 선출되면 종신직이며 문학상을 수여하고, 프랑스어 사전을 편찬)를 창설한다. 이 기관은 오늘날까지 존속하며, 프랑스 아카데미의 회원으로 지명되는 것은 문화예술인에게 매우 큰 영광이라고 한다. 뿐만 아니라 리슐리외는 음악 등의 예술분야를 후원하여 문화강대국 프랑스를 탄생케 한다.
3) 가문의 명예
리슐리외는 추락한 가문의 격을 올리는데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리슐리외는 자신이 죽을 때 막대한 재산을 조카들에게 상속하면서 낮은 신분의 가문과 혼인하지 말 것을 유언하는 동시에 루이 13세에게 상당한 부를 건네주면서, 자신의 일족을 돌봐줄 것을 부탁한다.
(2) 국외
리슐리외의 최고의 업적은 오컬트 바티칸의 이익보단 루이 13세의 왕권과 왕국의 영광 그리고 세계최강의 프랑스의 건설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30년 전쟁(독어 Dreißigjähriger Krieg; 영어 Thirty Years’War, 1618-1648: 독일의 법리학자이며, 정치철학자, 경제학자이며 역사가 자무엘 푸펜도르프Samuel von Pufendorf, 1632-1694이 ‘30년 전쟁’용어를 최초로 사용) 때 리슐리외가 취한 정책, 곧 강대국 프랑스의 탄생을 위해 리슐리외는 천주교의 천추의 원수인 기독교나라와 동맹을 맺거나 협력하는 것을 넘어서서 전 유럽의 적이자 이슬람 국가인 오스만튀르크제국과도 맺은 우호 관계는 이를 증언한다.
30년 전쟁은 독일을 무대로 전개되었으며, 전쟁의 당사자로는 보헤미아, 네덜란드, 덴마크, 스웨덴, 프랑스가 있으며 그 상대편에는 합스부르크 왕가(오스트리아의 신성로마 황제계열과 스페인계열로 양분)가 중심에 있었다.
유럽최대의 왕가였던 합스부르크 왕가가 위임받은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제권보다는 오스트리아 공국의 왕권이 더욱 우세한 이름만의 황제여서 가능한 한 제권과 영토를 확장하려하였다.
최초의 에스파냐(스페인어 España; 영어 Spain)의 왕(Carlos I카를로스 1세)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카를 5세(독어 Karl V; 라틴어 Carolus V; 프랑스어 Charles V; 신성로마황제 1519-1556, 에스파냐 국왕 1516-1556, 1500-1558)는 1555년의 독일 남부의 바이에른 주(독어 Bayern; 영어 Bavaria)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독어 Augsburger Religionsfrieden; 영어 The Peace of Augsburg, Augsburg Settlement)의 결정, 곧 ‘각 지역 주민의 신앙은 지역 통치자의 신앙에 따른다; 라틴어 cuius regio, eius religio; 영어 whose region, his religion’에 의해 루터파는 독일의 많은 지역, 특히 북부와 동부에서 지배적인 종교가 됨) 이후 1556년 동생 페르디난트 1세(Ferdinand I, 1556-1564, 1503-1564)에게 신성 로마 제국을, 아들 펠리페 2세(에스파냐어 Felipe Ⅱ; 영어 Philip Ⅱ, 재위 1556-1598, 1527-1598)에게 스페인 왕국을 물려주고 퇴위하였다. 그 후 신성로마제국과 스페인은 영원히 두개의 국가로 나뉘었다. 그러나 한 혈통이라는 의식은 언제나 존재했으며 매 세대마다 항상 단결을 강화하기 위하여 오스트리아와 스페인가의 근친결혼을 시도하여 제국의 영토가 다른 가문으로 넘어가는 것을 방지하였다. 이 같이 오스트리아와 스페인의 합스부르크가에 항상 반복되는 근친결혼으로 인한 유전학적 폐해로 스페인의 합스부르크가는 마침내 1700년 스페인의 국왕 장애인 카를로스 2세(Carlos II, 1661-1700)의 사망으로 전멸되었고,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유전적 질병을 간파한 이탈리아 출신 프랑스 왕실 고문 쥘 마자랭(프랑스어 Jules Raymond Mazarin, cardinal-duc de Rethel et de Mayenne et de Nevers; 이탈리아어: Giulio Mazzarini 줄리오 마차리니, 1602-1661) 추기경은 프랑스 대왕 루이(프랑스어 Louis le Grand; 영어 Louis the Great), 태양왕(프랑스어 le Roi Soleil; 영어 the Sun King) 루이14세(Louis XIV, 재위 1643-1715, 1638-1715)와 오스트리아의 마리 테레즈(프랑스어: Marie-Thérèse d'Autriche, 1638-1683)의 결혼을 배후에서 성사시키고, 그녀의 손자인 앙주 공(公) 필리프(프랑스어 Philippe d'Anjou)가 마리의 장애인 이복 남동생 스페인 왕국의 왕 카를로스 2세가 자식이 없자 후계자로 지명된다.
톨레도 대주교의 압박으로 프랑스 대왕 루이(프랑스어 Louis le Grand; 영어 Louis the Great), 태양왕(프랑스어 le Roi Soleil; 영어 the Sun King) 루이14세(Louis XIV, 재위 1643-1715, 1638-1715)의 손자인 앙주 공(公) 필리프(프랑스어 Philippe d'Anjou)가 펠리페 5세(Felipe V, 1700.11.1.-1724.1.14., 1724.9.6.-1746.7.9, 1683-1746)로 즉위하자, 영국은 신대륙 무역 확보를 위해 네덜란드와 동맹을 맺고, 에스파냐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는 오스트리아도 이에 합류하며, 이 세 국가는 프랑스와 에스파냐에 선전 포고를 하고, 전쟁을 개시한다. 그런 가운데 1713년의 위트레흐트 조약(네덜란드어 Vrede van Utrecht)과 1714년의 라슈타트바덴 조약으로 에스파냐 왕위 계승권 전쟁이 종결된다.
프랑스는 펠리페 5세의 왕위 계승을 인정받아 정치적 권위를 얻는 대신 식민지 영토를 잃고 전쟁으로 인해 국고는 파산에 이르고, 루이 14세는 1715년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이처럼 17세기 합스부르크왕가와 프랑스 부르봉왕가와의 결혼정책은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전멸과 함께 스페인에서 프랑스 부르봉 왕가의 즉위로 나타나게 된다,
이런 사실을 감안하며 30년 전쟁에 대해 살펴보자.
첫째, 1618-1623의 첫째 국면(The first phase from 1618 to 1623): 보헤미아 시기
일반적으로 30년 전쟁은 프랑스의 부르봉가와 오스트리아와 스페인의 합스부르크가의 유럽지배에 대한 해묵은 경쟁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하는데, 그것은 표면적인 것에 불과하고, 오컬트 바티칸의 예수회가 기독교를 말살하려고 의도적으로 기획한 것이다.
그러면 그 이유에 대해 살펴보자.
보헤미아(Bohemia; 독어 Böhmen: 현재 체코 공화국을 구성하고 있는 세 지방<‘보헤미아’, ‘모라바; 체코어 Morava; 라틴어 Moravia; 영어 Moravia’, ‘실레시아Silesia; 독어 Schlesien’> 중의 하나)는 얀 후스(체코어 Jan Hus; 독어 Johannes Huss; 영어 John Huss, 1369?-1415)의 영향으로 기독교국가가 되어, 합스부르크가에선 골치 아픈 왕국이다.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마티아스(독어 Mattias, 보헤미아의 왕 재위 1611.3.11.-1617.5.16,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1612-1619, 1557-1619)는 자식이 없어 사촌 동생 페르디난트 2세(Ferdinand II, 재위 1619-1637, 1578-1637)에게 제위를 양위하기로 결심하고 황제 선거에서 안전하게 이길 수 있도록 페르디난트에게 보헤미아 왕위를 먼저 내줬다.
그 이유는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천주교교도(마인츠 대주교The Archbishop of Mainz and The Electorate of Mainz, 쾰른 대주교The Archbishop of Cologne and The Electorate of Cologne, 트리어 대주교The Archbishop of Trier and The Electorate of Trier), 기독교제후(룩셈부르크 가문이 보유하고 있는 보헤미아 국왕, 작센 공작, 팔츠 백작,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작) 등 선거권을 가진 일곱 명의 제후(선제후)가 다수결로 선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선제후에 대해 살펴보자.
룩셈부르크 왕가 출신 신성로마황제 카를 4세(Karl IV, 재위 1355-1378, 1316-1378)는 1356년 1월 10일 뉘른베르크 및 동년 12월 메츠(Metz)의 제국의회(라틴어 Dieta Imperii 또는 Comitium Imperiale; 독어 Reichstag)에서 총 31장으로 구성된 신성 로마 제국의 법률인 금인칙서(金印勅書; 라틴어 bulla aurea; 독어 Goldene Bulle; 영어Golden Bull: 당시 주로 서신에 인장을 찍을 때 밀랍이나 실 대신 황금의 인새印璽-옥새-를 사용한데서 이르는 말로 금인헌장金印憲章 또는 황금문서黃金文書라고 도 부름)를 공포하면서, 서임권 투쟁 이후에 전개된 교황의 간섭 없이 7명의 선제후, 곧 마인츠, 쾰른, 트리어의 대주교 3명과 팔츠(Pfalz)백작, 작센(Sachsen)공작, 브란덴부르크(Brandenburg) 변경백(邊境伯; 후작), 보헤미아의 국왕 등의 4명 모두 7명이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를 선출하고, 황제는 교황의 승인 없이 대관식을 할 수 있게 되고, 금인칙서를 통해 선제후는 영지 내 완전한 재판권, 광산 채굴권, 화폐 주조권, 관세 징수권과 유대인 보호권을 갖게 되었는가 하면, 선제후 영지는 완벽한 장자 상속제로 분할 상속이 금지되고, 선제후는 황제의 호출에 응하지 않고, 황제에 의해 소환되지 않을 권리를 갖게 되었으며, 선제후에 대한 반역은 대역죄로 처벌하게 된다.
그리고 금인칙서는 1806년 신성로마제국이 멸망하기까지 450년간 효력을 가진다. 금인칙서 발표를 전후해서 신성로마제국의 영토는 독일어 사용권으로 한정되고, 제국의 지방분권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된다.
그러면 보헤미아 왕으로 임명된 페르디난트 2세에 대해 살펴보자.
페르디난트 2세는 예수회원들에게 교육을 받는 동시에 예수회원이다. 그는 1617년 보헤미아 왕, 1618년 헝가리의 왕이 되자, 그동안 신성로마황제들이 묵인해온 보헤미아의 종교를 천주교로 선언하고 기독교를 탄압하기 시작하며, 기독교 귀족들이 관직에 오르는 것을 금지하고 기독교 교회를 허물거나 폐쇄했다. 보헤미아 귀족과 백성들이 분노하며 1618년 5월 23일 보헤미아의 수도 프라하로 몰려갔다. 페르디난트 2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위를 대대로 계승하던 합스부르크 가의 본거지 오스트리아의 빈에 있었기 때문에, 프라하 성에는 국왕을 대신하여 보헤미아를 다스리던 섭정 마르티니츠 백작(Count Jaroslav Bořita of Martinice)과 슬라바타(Count Vilem Slavata of Chlum) 백작이 있었다. 보헤미아 귀족들이 페르디난트 2세의 기독교 탄압에 대해 따져묻자, 섭정들은 “신성한 황제 폐하의 포고문을 너희 미천한 무리들이 왈가왈부하다니, 썩 물러가라”고 꾸짖었다.
이에 귀족들은 격분하며 2명의 섭정과 1명의 비서관 3명을 성 3층 창문에서 밖으로 집어던져 버렸다. 땅으로부터의 높이는 20m 이상이었지만 마침 창문 밖에 건초가 잔뜩 쌓여 있었기 때문에 기적적으로 목숨은 건졌다(천주교교도들은 세 사람이 천사나 오컬트 바티칸의 마리아 은총 때문에 살아남았다고 주장하지만, 기독교인들은 세 사람이 두엄더미에 떨어졌기 때문에 살아남았다고 실상을 보고). 오스트리아의 빈으로 달아난 이들은 페르디난트 2세에게 “보헤미아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간언했다.
프라하 창밖 투척사건(라틴어 Defenestratio Pragensis; 독어 Prager Fenstersturz; 영어 The Defenestrations of Prague) 직후, 보헤미아 귀족들은 ‘30인 집행위원회’를 구성한 후 독자적 헌법 제정 및 군대 소유도 선언한다. 1619년 마티아스 황제가 죽자 페르디난트 2세가 신성로마황제를 겸하게 되자, ‘30인 집행위원회’는 8월 26일 천주교교도인 페르디난트의 보헤미아 왕위 폐위를 선언하고, 칼뱅주의자인 팔츠(Pfalz)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Friedrich V, 재위 1610-1620, 1596-1632: 부인은 제임스 1세 James I,James I, 영국 왕 재위 1603-1625, 1566-1625; James VI, 스코틀랜드 왕 재위 1567-1625의 딸 엘리자베스 스튜어트Elizabeth Stuart, 1596-662)를 옹립하여 30년 전쟁의 발단이 되고, 그는 전쟁 중 사망한다. 보헤미아의 프로테스탄트 귀족들은 영지를 몰수당하고 목숨을 잃는다.
프라하 창밖 투척사건은 기독교와 천주교에서 아주 유명한 사건이다.
제1차 투척사건(The First Defenestration of Prague)은 다음과 같다.
프라하 스노우의 성모교회(Church of Our Lady of the Snows in Prague) 소속의 얀 젤립스키(Jan Želivský, 1380-1422)는 ‘양형영성체파’(兩形領聖體派; 이종성찬파; 이종배찬파; Utraquists or Calixtines: 성찬 때 평신도가 예수의 성체와 보혈을 은유하는 빵과 포도주를 모두 받아야 한다고 주장)의 후스파 사제다. 1419년 7월 30일 젤립스키 사제와 후스파들(the Hussite)이 시청사로 몰려가 후스파 수감자들의 석방을 요구했다. 시청 측은 이를 거부했다. 이들이 행진하던 와중 시청 창문에서 누가 돌을 던졌고, 젤립스키 사제가 그 돌에 맞았다. 그러자 격분한 군중들이 시청 건물 안으로 쏟아져 들어갔고, 판사와 시장을 비롯한 시 평의원 7명을 창문으로 집어던졌고, 투척당한 7명은 모두 추락사했다.
둘째, 1625-1629 둘째 국면(The second phase from 1625 to 1629): 덴마크 개입 시기
루터파 크리스티안 4세(덴마크어 Christian IV; 노르웨이어: Christian IV, 덴마크의 국왕이자 노르웨이의 국왕 재위: 1588-1648, 1579-1648)의 덴마크 군대는 강한 해군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1625년 5월 9일 덴마크 군대는 보헤미아의 군인이자 정치가이지만, 1606년에 천주교도로 개종해 페르디난트 2세에 충성하는 사령관 발렌슈타인(독Albrecht Wenzel Eusebius von Wallenstein 또는 발트슈타인Waldstein, 1583-1634: 발렌슈타인 황제 진영의 복잡한 세력 관계를 이용하여 군사력을 보유하며 독자적인 야심을 키우고 있었는데, 페르디난트 2세는 그를 제거하기로 작정하고, 음모, 변절, 도피 끝에, 1634년 부하들에게 암살됨)이 지휘하는 신성 로마 제국 군대에게 패하고, 1629년 5월 뤼베크에서 체결된 평화 조약에 따라 덴마크는 철수한다.
당시 프랑스는 라 로셀 공성전(Le Siège de La Rochelle; 영어 The siege of La Rochelle, 1627-1628)에 여념이 없었고, 영국은 위그노를 지원하기 위하여 파병하고 있었으며, 스웨덴은 폴란드와 전쟁을 시작하고 있었기 때문에 크리스티안 4세를 지원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셋째, 1630-1635 셋째 국면(The third phase from 1625 to 1629): 스웨덴 개입 시기
루터파 스웨덴 제국의 왕 구스타브 2세 아돌프(스웨덴어 Gustav II Adolf; 라틴어Gustavus Adolphus, 재위 1611-1632, 1594-1632)는 스웨덴을 강국으로 만든 왕으로 군제개혁으로 역사를 통틀어 최고의 지휘관들의 반열에 들어‘북방의 사자’ 또는 ‘설왕’(雪王) 이라 불린다.
구스타브 2세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발트해 진출에 위협을 느끼고, 프랑스의 재상 리슐리외의 원조를 받아 1630년부터 전쟁에 개입해 전쟁에서 승리하며 천주교에 대한 기독교의 우세를 증명하지만, 1635년 전사하고, 스웨덴 군은 철수한다.
넷째, 1635-1648 넷째 국면(The fourth phase from 1635 to 1648): 프랑스 개입 시기
리슐리외는 부르봉왕조의 최강국화를 위해 천주교신앙과 적대적인 관계에 있는 스웨덴 및 오스만 제국과 동맹을 맺고 이들 국가를 후원해주며, 신성로마제국인 합스부르크가의 세력을 저지하다가 마침내 1635년 5월 19일 스페인에 선전포고를 한다.
전쟁 초기엔 합스부르크가에 유리하였으나 프랑스와 스웨덴이 동맹을 맺자, 전황은 역전된다. 이런 가운데 1637년 3월 전쟁광 예수회의 페르디난트 2세가 서거하고 그 아들 페르디난트 3세(Ferdinand III, 재위 1637-1657, 1608-1657)가 황제위에 오른다. 1642년 12월 프랑스의 재상 르슐리외가 먼저 사망하고,1643년 1월‘스페인의 리슐리외’라고 불리는 올리바레스 백공작(Count-Duke of Olivares, 1587-1645)도 실각한다.
1648년 초 보헤미아가 스웨덴 군에게 점령당하고 프랑스군이 합스부르크 군을 크게 압도하자 1648년 ‘베스트팔렌조약’(독어 Westfälischer Friede; 영어 The Peace of Westphalia/독어Westfalen=영어Westphalia)이 체결된다.
이 조약은 베스트팔렌(독어 Westfalen; 영어 Westphalia) 주도인 기독교의 뮌스터(Münster, 1648.5. 15)와 베스트팔렌지방의 천주교의 오스나브뤼크(Osnabrück, 1648.10.24.)에서 체결된 수많은 규정들을 통합하여, 프랑스어로 조문을 쓴 평화 조약으로 국제법의 기원이다. 뮌스터와 오스나브뤼크 두 도시 모두 독일의 베스트팔렌 지방에 있었다.
독일 제후국 내의 루터파, 칼뱅파도 천주교처럼 각각 동등한 지위를 확보하여, 영방제후들은 완전한 주권을 확보하지는 못했지만, 황제의 간섭 없이 제국의회에서 특정문제(국방, 사법, 조세 등)를 결정할 수 있음은 물론 황제와 독립적으로 동맹관계를 맺고 대외정책을 추구할 권리를 추구하게 되어 핵심적인 정치적 주체는 이제 더 이상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아니라 영방군주들이기 때문에, 천주교의 신성로마제국은 사실상 붕괴된다.
독일의 주도권 싸움은 합스부르크의 오스트리아와 브란덴부르크, 프로이센으로 압축되고, 프랑스는 서방 강국으로 부상하며 스웨덴은 발트 해의 지배권을 장악하고, 스페인은 서유럽에서의 주도적 입지를 상실한다. 그리고 네덜란드와 스위스는 독립된 공화국으로 승인받으며, 근대 유럽의 주권 국가 구조가 확립되고, 그 질서는 1806년 신성로마 제국이 종언을 고할 때까지 진행된다.
30년 전쟁에서 부르봉가를 유럽강대국으로 진입시킨 리슐리외 추기경에 대해 우르바노 8세(라틴어 Urbanus PP. VIII; 이탈리아어 Papa Urbano VIII; 영어 Pope Urban VIII, 재위 1623-1644, 1568-1644)는 이렇게 비평한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리슐리외 추기경은 죄 값을 치르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그는 매우 잘 처신했다”
5. 종합
(1) 오컬트 바티칸의 존재목적은 인류의 행복과 세계의 평화라기보다는 오직 자신들의 존재와 특권만을 위해서 존재하는 암흑세력이다. 다음과 같은 실례는 이를 잘 증언해준다.
70세에 교황의 자리에 올라 11년 재임(잉글랜드 내전English Civil War or The Puritan Revolution, 1642-1651)한 인노첸시오 10세(라틴어 Innocentius PP. X; 이탈리아어: Papa Innocenzo X; 영어 Pope Innocent X, 재위 1644-1655, 1574-1655)는 1648년 ‘하느님의 집에 대한 열정으로’(라틴어 Zelo Domus Dei; the zeal of God's house) 교서(Papal Bull)로 30년 전쟁을 종식시킨 ‘베스트팔렌 조약’을 폐기한다.
그 이유는 베스트팔렌조약엔 스위스와 네덜란드가 독립국 지위를 승인받았고, 루터파의 존재를 인정했던, 아우크스부르크 국회에서 카를 5세(독어 Karl V; 라틴어 Carolus V; 프랑스어 Charles V; 신성로마황제 1519-1556, 에스파냐 국왕 1516-1556, 1500-1558)와 기독교 제후 간에 맺어진 1555년의 독일 남부의 바이에른 주(독어 Bayern; 영어 Bavaria[bəvέəriə])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독어 Augsburger Religionsfrieden; 영어 The Peace of Augsburg, Augsburg Settlement; )의 결정(각 지역 주민의 신앙은 지역 통치자의 신앙에 따른다cuius regio, eius religio; whose region, his religion에 의해 루터파는 독일의 많은 지역, 특히 북부와 동부에서 지배적인 종교가 됨)을 재확인하고, 관용의 대상에 칼뱅파도 넣기로 함으로써 기독교가 비로소 유럽에서 인정받음은 물론 주민이나 농노가 영주와 종교가 다를 경우에도 사적 또는 공적으로 종교 행사에 참가할 수 있는 권리가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베스트팔렌조약은 신성로마제국을 붕괴시키고, 주권 국가들의 공동체인 근대 유럽의 정치구조, 근대적 국민국가의 틀을 만들고, 과학기술과 자본주의 태동을 진전시켰다.
사실 근대이전의 교황의 도덕과 윤리는 조선왕조의 왕들의 수준과 별반 다를 바 없었고, 근대 이후는 미국 대통령수준 밑에서 놀고 있다.
인노첸시오 10세의 베스트팔렌조약파기선언은 그의 도덕과 윤리 수준을 보여준다. 다음과 같은 실례는 이를 잘 보여준다.
인노첸시오 10세는 죽은 형 팜필리오 팜필리의 아내인 올림피아 마이달키니가 형과 사별한 이후에도 재혼하지 않은 점 때문에 그녀에 대한 애정이 깊어 1645년 10월 7일 형수 올림피아에게 산 마르티노 알 치미노라는 작은 마을과 함께 산 마르티노 여공작(duchess)이라는 직함을 하사한다.
인노첸시오 10세는 교황으로 즉위하자마자 죽은 형과 올림피아의 아들이자 자신의 조카인 카밀로를 추기경에 서임했음은 물론 이제 겨우 7살 된 올림피아의 조카 프란체스코 마이달키니를 추기경에 서임했을 정도로 사리가 밝지 못했다.
앤서니 찰스 린턴 ‘토니’ 블레어(영어: Anthony Charles Lynton "Tony" Blair, 1953-) 총리(1997-2007)는 유럽연합의 헌법을 인노첸시오 10세의 석상아래에서 서명한 것은 많은 의미를 선사한다.
2007년 ‘토니’ 블레어는 교황의 분열(1378-1417)을 종식시키기 위해 스스로 바티칸의 수장직에서 물러난 수장 그레고리오 12세(라틴어 Gregorius PP. XII; 이탈리아어 Papa Gregorio XII; 영어 Pope Gregory XII, 재위 1406.11.30.-1415.7.4., 1325-1417) 후 598년 만에 교황직을 중도 사퇴한 후 ‘명예 교황’(emeritus pope)에 추대된 베네딕토 16세(라틴어 Benedictus PP. XVI; 이탈리아어 Papa Benedetto XVI; 영어 Pope Benedict XVI, , 본명 Joseph Aloisius Ratzinger, 재위2005.4.24.-2013.2.27., 1927-) 수장을 만날 때 선물한 액자에는 천주교로 전향한 성공회 사제인 추기경 존 헨리 뉴먼(John Henry Newman, 1801-1890)의 사진이 있었다. 그리고 토니는 2008년 12월 21일 천주교로 개종한다. 토니의 부인 셰리 블레어(Cherie Blair or Cherie Booth, 1954-)와 3녀, Euan(1984-), Nicholas(1985-), Kathryn(1988-), 1남 Leo(2000-) 모두 천주도다. 그런데 토니의 모친 하젤 H. 코어스캐덴(Hazel Elizabeth Corscadden)은 기독교신자다.
(2) 천주교 예수회의 집요한 역사조작
‘소설 제조 회사’라는 비아냥을 받을 정도로 일생동안 엄청난 숫자의 상업 작품을 남긴 19세기 프랑스의 소설가 알렉상드르 뒤마(Alexandre Dumas, 1802-1870)가 17세기 부르봉 왕조 시대에 활약한 프랑스의 군인 샤를 오졔 드 바츠 드 카스텔모 다르타냥 백작(Charles Ogier de Batz de Castelmore, Comte d'Artagnan, 1611?-1673)에게서 영감을 얻어 이른바 ‘다르타냥 로망스’(d'Artagnan Romances)라고 불리는 연작 소설들을 집필했다.
이 소설은 모두 3부로 구성이 되어 있는데 그 제목은 각각‘삼총사’(Les Trois Mousquetaires, 1844; 영역 The Three Musketeers. 총사는 머스켓 총으로 무장한 왕실 호위병인데, 등장인물 중 총사들도 대부분은 칼을 잡고 싸우며 작품 속에는 머스킷이 별로 등장하지 않는다. 일본에서 이 소설을 삼총사로 번역한 이후 한국어 번역에서도 이를 따라서 같은 제목을 사용), ‘20년 후’(Vingt ans après, 1845; 영역 Twenty Years After), ‘브라즐론 자작: 10년 후’(Le Vicomte de Bragelonne, ou Dix ans plus tard, 1847; 영역 The Viscount of Bragelonne: Ten Years Later)이다.
‘브라즐론 자작: 10년 후’의 마지막 3부 정도에 해당하는 부분을 따로 떼어내 출판한 것이 ‘철가면’(鐵假面; L'Homme au Masque de Fer; 영역 The Man in the Iron[áiǝrn] Mask)이다. ‘철가면’은 실제로 루이 14세(Louis XIV, 재위 1643-1715, 1638-1715)가 왕위에 오른 지 60년째 되던 1703년까지 34년간 ‘철’(실제로는 검은색 벨벳velvet [우단: 거죽<물체의 겉 부분>에 고운 털이 돋게 짠 비단])로 얼굴을 가린 채 수감되어 있다가 죽은 순간까지 검은색 벨벳을 쓰고 있었다고 한다.
이 죄수는 루이 14세의 실제적인 아버지(루이13세Louis XIII, 재위 1610-1643, 1601-1643은 안 도트리쉬와의 결혼을 강제한 모후를 증오하는 한편 이 결혼 자체를 굴욕으로 생각한다. 서로 별거하다가 당시 아르망 리슐리외 추기경의 주선으로 정식으로 화해하여 결혼 23년 만에 장남 루이가 태어나지만, 리슐리외 추기경이 국왕 부부의 동의를 얻어 왕족 중의 하나를 왕비와 동침 시켜서 루이 14세를 낳았다는 소문이 자자)가 추방당하여 망명 생활을 하던 중 자신의 아들 루이 14세가 친정을 시작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귀국하다가 여러 감옥을 거쳐, 마침내 1698년‘바스티유 감옥’으로 이감되어 그 곳에서 죽고.‘외스타슈 도제, 하인’(Eustache Dauger)라는 이름으로 매장되었다고 한다.
’뒤마’의 소설에서는 이 정체불명의 죄수가 바꿔 치기 당한 루이 14세이거나, 루이 14세의 쌍둥이 동생, 또는 배다른 형제일 것이라는 이론으로 전개하며, 가면의 재료를 벨벳에서 철로 바꾼다.
그런데 볼테르는 ‘루이 14세 시대 1751’에서 루이 14세 때 철가면을 쓴 채 감옥에 34년간 갇혔던 실존인물을 루이 13세의 왕비(안 도트리슈)와 당시 수상인 이탈리아 태생의 쥘 마자랭(프랑스어 Jules Mazarin; 이탈리아어, 줄리오 마차리노 Giulio Mazarino, 1602-1661) 추기경 사이의 사생아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1998년 미국의 랜달 웰러스가 제작, 감독, 각본으로 태어난 액션 드라마 영화‘아이언 마스크’(The Man in the Iron Mask)가 태어난다.
알렉상드르 뒤마의 소설 ‘삼총사’에서 프랑스의 재상 리슐리외 추기경이 악역으로 등장한다. 그 까닭은 리슐리외가 오컬트 바티칸과 천주교를 위해 사역하기 보단 오직 부르봉가의 이익과 프랑스의 강대국화를 위해 전념하면서 자신의 가문의 명예를 위해 국정을 운영했기 때문이다.
(3) 리슐리외 추기경은 루이13세의 재상을 지내면서 중앙집권화(왕권절대주의)와 세계 최강 프랑스 건설(30년 전쟁 때 기독교국가 덴마크, 스웨덴 등과 동맹을 맺고 천주교 국가 오스트리아와 스페인으로 구성된 합스부르크가를 멸망시킴), 그리고 자신의 가문의 명예를 위해 살다가간 종교인이요 정치가다.
현재, 대한민국 집권 세력인 천주교도들은 리슐리외 추기경처럼 양심적 애국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대한민국은 자유민주공화국으로써 남북분단과 지리상 주변국과 끈임 없이 긴장과 갈등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강한 리더쉽을 요구하고 있다. 지난 조선 오백년 역사를 보면 세종대왕시대에는 왕권과 신권이 조화를 이룬, 곧 최고의 내각책임제를 운영하여 선진조선을 이룩했지만, 그 이후엔 신권(노론)이 왕권보다 강하여 조선은 멸망의 길로 갔다. 역사의 교훈에 입각해서라도 내각제는 대한민국의 멸망의 지름길이기 때문에 대통령 중심의 자유민주공화국을 유지해야 한다.
그리고 건전하고 건강한 자본주의에 기초한 대기업육성과 최첨단산업으로 많은 부를 창출해야 행복한 복지국가를 창조할 수 있다. 그런데 현재 천주교집권세력은 오컬트 바티칸의 네오마르크시즘의 정치실험을 하며 대한민국을 추락시키는 동시에 공산주의 전체주의 독재국가인 중국의 위성 국가화를 시도하고 있다. 이런 차원에서 대한민국은 천주교도의 공직자 입문을 금하고 공직자추방을 명령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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