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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도 야코프 푸거는 오컬트 바티칸, 신성로마제국 그리고 자본주의를 희롱했다’ YouTube!!!

아우구스티누스 2021. 7. 2. 15:46

올해의 절반을 마무리할 6월의 끝자락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와 사랑이 넘치는 풍성한 결실의 끝맺음과 더불어 다가오는 새로운 절반은 새로운 목표로 대승하시기 바랍니다.

 

20191220일 중앙일보성모마리아와 아기예수바위 발견양양군청 명소될 것의 보도 내용에 의하면 강원도 양양 설악산 주전골에서 발견된 성모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조각한 것처럼 보이는 바위가 있다고 화제다. 그래서 양양군은 성모마리아와 아기 예수바위가 주전골의 새로운 명소가 될 수 있을 것을 판단하고, 설악산국립공원사무소와 협의해 바위를 바라볼 수 있는 곳에 안내 간판을 세우기로 했다고 한다.

 

수백 년이 흐르면 오컬트 바티칸과 대한민국 천주교세력은 이런 자연섭리를 조작해, 오컬트 마리아가 이곳에 현현하였다고 선언하며, 성지순례지로 확정할 것이다. 그 이유는 오컬트 바티칸은 모든 것을 조작해내는 사탄의 후예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왕은 군림하지만, 은행은 지배한다.’라는 속담을 남기며 (융자)채권 방식을 고안한 현대 금융업의 아버지, 천주교도 야코프 푸거(독어 Jakob Fugger von der Lilie; 영어 Jakob Fugger of the Lily, Jakob Fugger the Rich or Jakob II, 1459-1525)가 어떻게 오컬트 바티칸, 신성로마제국 그리고 자본주의를 희롱했는가에 대해 살펴보자.

 

1. 아우크스부르크

 

바이에른주(독어 Bayern; 영어 Bavaria: 주도 뮌헨 München) 아우크스부르크(Augsburg)로마제국의 초대황제 아우구스투스(Augustus, 재위 B. C. 27-A. D. 14, B. C. 63-A. D. 14)B. C. 15년에 설립한 도시다.

 

아우크스부르크는 기독교에겐 매우 중요한 도시다. 그러면 그것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겠다.

 

1530625일 최초의 에스파냐(스페인어 España; 영어 Spain)의 왕(Carlos I카를로스 1)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카를 5(독어 Karl V; 라틴어 Carolus V; 프랑스어 Charles V; 신성로마황제 1519-1556, 에스파냐 국왕 1516-1556, 1500-1558)는 신성로마제국의 종교 및 정치의 일치를 회복하고 오스만 제국(오스만 튀르크, 1299-1922)의 침략에 대한 단결을 위해 아우크스부르크 의회’(Diet of Augsburg)를 소집하여 루터교 지지자들에게 루터교 최초의 신앙고백서인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라틴어 Confessio Augustana; Augsburger Bekenntnis oder Augsburger Konfession; 영어 The Augsburg Confession)을 요구했다.

 

152045(마르틴 루터의 8년 선배)의 교황 레오10(라틴어 Leo PP. X; 이탈리아어 Papa Leone X; 영어 Pope Leo X, 재위 1513-1521, 1475-1521)1520615일 자신의 사냥지 숙소에서 시편 74:22의 첫 단어 문구로 시작하는 교황의 칙서인 파문장(라틴어 Exsurge Domine엑스수르게 도미네; 영어 Arise, O Lord)을 발행한다. 이 교서는 독일 주교들이 심한 반대를 했기 때문에 발행된 지 석 달이 지난 15201010일에야 비로소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에게 전달되며, 그 내용은 루터의 저술 속에 포함된 41개의 이단사항을 열거하고, 이를 철회할 수 있는 60일간의 유예기간을 주고, 루터의 저서들이 불태워질 것을 명령한다. 그런데 2개월 후 15201210일 루터는 교황의 교서와 교령집(敎令集)(the bull and decretals)을 현재 작센안할트주(Land Sachsen-Anhalt: 주도 마그데부르크 Magdeburg)의 비텐베르크(Wittenberg; 정식 명칭은 루터시 비텐베르크Lutherstadt Wittenberg)의 엘스터 성문(독어 Das Elstertor; 영어 Elster Gate) 앞에서 그들이 나의 책들을 불 질렀기 때문에 나는 그들의 것을 불사른다.”며 많은 대학생들이 지켜보고 환호하는 가운데서 불사른다.

 

그러자 152113일 레오 10세는 그렇게 하는 것이 로마교황의 기쁨이다’(라틴어 Decet Romanum Pontificem; 영어 It Pleases the Roman Pontiff)로 마르틴 루터를 파문시킨다.

 

카를 5세는 152158보름스제국의회(독어 Reichstag zu Worms; 영어 the Diet of Worms/보름스Worms: 라인란트팔츠주Land Rheinland-Pfalz<주도: Mainz>에 있는 도시)를 통해 보름스의 최종 칙령’(the final draft of the Edict of Worms)을 제출하여 루터는 법률상의 보호를 박탈당한 사람(outlaw)이며, 그의 저서의 발행을 금지하고, 그를 체포하라. 우리는 그가 체포되어 소문난 이단자로 처벌받기를 바란다. 독일에서 루터에게 음식이나 처소를 제공하는 것은 범죄행위이며, 합법적인 절차 없이 그를 죽여도 된다고 선언한다.

 

작센주(독어 Sachsen; 영어 Saxony)의 선제후(選帝侯) 프리드리히 3(현공 賢公)(독어 Friedrich III, Friedrich der Weise von Sachsen; 영어 Frederick III, Elector of Saxony, 재위 1486-1525, 1463-1525)의 선처로 10개월가량(1521. 5.-1522. 3. 6)독일 중부 튀링겐주(독어 Thüringen; 영어 Thuringia: 주도 Erfurt)에 있는 도시 아이제나흐(Eisenach: 바로크 음악의 대가로 루터교 신자인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의 고향이자 루터의 모친의 고향으로 루터가 고등학교를 다니던 곳이다. 14세 때 성가대에 섰던 성 게오르그 교회와 교회 부속 라틴어 학교, 루터가 1498년부터 3년간 하숙했다는 루터하우스 등 다양한 루터의 흔적이 남아 있음)의 삼중문의 바르트부르크 성(독어 Die Burg Wartburg bei Eisenach; 영어 the Wartburg Castle at Eisenach: 38, 39세의 루터는 불면증과 신경쇠약과 공황장애와 환영 등으로 괴로워서, 이곳을 나의 밧모섬my Patmos’이라 불렀고, 1999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록돼 있음)에서 지내며, 루터는 기사의 이름 귀공자 게오르크(Junker Georg; 영어 Knight George)라는 가명아래 중세기사의 옷을 입고 수염을 기른 채 데시데리위스 에라스뮈스(Desiderius Erasmus, 1469-1536)의 그리스어신약성경 본문 제2(1519년 판)을 사용 하여 11주 만에 신약성경을 번역했다. 로마서 3:28에 원문에 없는 ’(alein)이라는 단어를 삽입했다. 1530성경번역에 관한 공개서한에서 원문에 sola라는 네 글자가 없는 것은 사실이다...나는 독일어를 말하려고 하지 라틴어나 그리스어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나는 번역에서 독일어를 말하려고 했기 때문에 그렇게 두었다. 두 가지를 비교하여 말하는데 그 중의 하나는 용납하고 다른 것을 부정할 때 아니라는 말과 나란히 이라는 글자를 쓰는 것이 우리 독일어의 보존이다

 

15229월 비텐베르크의 시장(1537-1544), 튀링겐주의 바이마르(Weimar)의 궁정화가를 지낸 루카스 크라나흐(독어 Lucas Cranach der Ältere; 영어 Lucas Cranach the Elder, 1472-1553)의 인쇄소에서 루터의 독일어신약성경이 출간되고, 이를‘9월 성경(독어September Testament; 영어 September Testament)부른다.

 

1530625일 루터는 작센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3(현공 賢公)의 셋째 동생 선제후 요한(John, Elector of Saxony, 재위 1525-1532, 1468-1532)이 다스리는 작센주의 코부르크성(Veste Coburg: 1920년 바이에른Bayern 주에 편입)에서 15304-10월 사이의 6개월 동안 머물며 도피생활을 했기 때문에, 필리프 멜란히톤(Philipp Melanchthon, 1497-1560)이 독일어와 라틴어로 28개조(The 28 articles)의 신앙고백서를 작성해 카를 5세 앞에서 낭독했다. 신앙고백의 핵심주제는 이신칭의’(독어 die Rechtfertigung durch den Glauben; 영어 Justification by Faith).

 

카를 5세는 자신의 동생으로 1556년 신성로마황제가 될 페르디난트 1(Ferdinand I, 재위 1556-1564, 1503-1564) 주도아래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의회에서 프로테스탄트 제후간의아우크스부르크 화의’(독어 Augsburger Religionsfrieden; 영어 The Peace of Augsburg, Augsburg Settlement)를 체결한다. 그 내용은 각 지역 주민의 신앙은 지역 통치자의 신앙에 따른다’(라틴어 cuius regio, eius religio; 영어 whose region, his religion) 것인데, 이 화의에 의해 루터파는 독일의 많은 지역, 특히 북부와 동부에서 지배적인 종교가 된다. 아쉽게도 칼뱅주의는 제외된다.

 

카를 5세는 1556년 동생 페르디난트 1(Ferdinand I, 재위 1556-1564, 1503-1564)에게 신성 로마 제국을, 아들 펠리페 2(에스파냐어 Felipe ; 영어 Philip , 재위 1556-1598, 1527-1598)에게 스페인 왕국을 물려주고 퇴위하고, 신성로마제국과 스페인은 두개의 국가가 된다.

 

30년 전쟁(독어 Dreißigjähriger Krieg; 영어 Thirty Years’War, 1618-1648)의 결실인 1648베스트팔렌조약’(독어 Westfälischer Friede; 영어 The Peace of Westphalia)이 체결된다.

 

이 조약은 베스트팔렌(독어 Westfalen; 영어 Westphalia) 주도인 기독교의 뮌스터(Münster, 1648.5. 15)와 베스트팔렌지방의 천주교의 오스나브뤼크(Osnabrück, 1648.10.24.)에서 체결된 수많은 규정들을 통합하여, 프랑스어로 조문을 쓴 평화 조약으로 국제법의 기원이다. 뮌스터와 오스나브뤼크 두 도시 모두 독일의 베스트팔렌 지방에 있었다.

 

독일 제후국 내의 칼뱅파도 루터파와 함께 천주교처럼 각각 동등한 지위를 확보한다. 영방제후들은 완전한 주권을 확보하지는 못했지만, 황제의 간섭 없이 제국의회에서 특정문제(국방, 사법, 조세 등)를 결정할 수 있음은 물론 황제와 독립적으로 동맹관계를 맺고 대외정책을 추구할 권리를 추구하게 되어 핵심적인 정치적 주체는 이제 더 이상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아니라 영방군주들이기 때문에, 천주교의 신성로마제국은 사실상 붕괴된다.

 

2. 결혼을 통한 신분상승

 

야코프 푸거의 할아버지 한스 푸거(Hans Fugger)는 농부였으나 1367년 자유도시 아우크스부르크로 이주했는데, 서기가 이름을 Hans Fucker로 기록해. 한스가 농노출신임을 보여준다. 한스는 클라라 위돌프(Klara Widolf)와의 결혼을 통해 특권시민(burgher=a rank or title of a privileged citizen=an Augsburg citizen)이 되고, 클라라의 사망 후 그는 엘리자베스 가터만(Elizabeth Gattermann)과 결혼해 직물길드에 가입해 이탈리아와 직물(면직물, 모직물, 견직물로 짠 피륙 따위)거래로 상당한 부를 획득하고, 1461년엔 납세자 가운데 12번째의 자리를 차지하며 부유시민계급에 속한다.

 

야코프 푸거의 부친 야코프 푸거(Jakob Fugger the Elder, 1398-1469)는 아우크스부르크의 부유한 금세공인의 딸(the daughter of a goldsmith) 십대의 바르바라 배싱어(Barbara Bäsinger, 1419-1497)와 결혼해, 75녀가 태어나는데, 장남, 다섯째의 4, 7번째 막내아들은 장성하고, 넷째 아들 마르크스(Markus Fugger, 1448-1478)는 천주교신부로, 22세인 1470년부터는 바티칸법정의 서기(a writer in a papal chancery in Rome)로 근무하다가 30대에 죽고, 차남 안드레아스(Andreas Fugger, 1443-1461)와 넷째의 삼남 한스(Hans Fugger, 1445-) 십대에 사망하고, 여섯째의 5남 베드로(Peter Fugger, 1450-1473)1473년 누렘베르크(Nuremberg)에서 전염병으로 죽는다. 그리고 11, 12번째의 딸들은 영아 때 사망한다.

 

야코프는 그 가운데 7번째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바르바라는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직물사업을 이어받아 당시 막대한 수익을 올리는 양모 사업에 집중하여 많은 재산을 모은 후 장남 울리히 푸거(Ulrich Fugger the Elder. 1441~1510)와 여섯 번째 중 5남 게오르크 푸거(Georg Fugger, 1453-1506)에게 경영 수업을 시킨다. 막내 야코프는 성직자로 키우려고 했는데, 바르바라는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넷째 아들 마르크스를 성직자로 만들고, 1473년엔 14세인 막내 야코프 푸거를 당시 지중해 최강국으로 최대 무역도시베네치아(이탈리아어 Venezia; 영어 Venice)로 유학을 보낸다. 야코프는 베네치아에 있는 가문 사무소에서 금융과 복식부기 등 당시 최첨단 지식을 습득한다. 유학을 마친 야코프는 18세 위인 형 울리히와 6살 위인 형 게오르크와 더불어 교역중심지였던 이탈리아 베네치아와 독일 바이에른 주의 뉘른베르크(독어 Nürnberg; 영어 Nuremberg: 나치 전범의 국제 군사 재판이 열렸던 곳)에 모직공장을 경영했다. 회사 이름은 장남을 앞세워 울리히 푸거 형제회사(독어 Ulrich Fugger und Gebrüder von Augsburg; 영어 Ulrich Fugger and Brothers of Augsburg)였다.

 

야코프도 할아버지와 아버지처럼 결혼을 통해 신분상승을 한다. 39세 때인 1498년 야코프는 아우크스부르크의 대특권시민신분(독어 남성 Großbürger, 여성 Großbürgerin; 영어 남성 Grand Burgher, 여성 Grand Burgheress)을 소유한 유명인사의 딸 시빌라 아르츠트(Sibylla Artzt, 1489-1546, Grand Burgheress to Augsburg, the daughter of an eminent Grand Burgher of Augsburg)와 결혼하여 자녀가 태어나지 않지만, 아우크스부르크의 대특권시민으로 상승할 기회를 가지며, 아우크스부르크의 시평의회의원(독어 Stadtrat; 영어 the city councilof Augsburg)이 된다.

 

3. 정경유착

 

26살 되던 1485년 야코프는 직물산업을 청산하고 더 많은 수익을 위한 광산업에 뛰어들기 위해 신대륙발견이전 유럽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오스트리아의 은 광산(은이 당시 화폐) 도시 티롤주(Tirol)의 슈바츠(Schwaz)로 간다. 광산을 소유하고 있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기스문트 대공(독어 Großherzog Sigismund von Tirol; the Archduke Sigismund, 1427-1496: 오스트리아 왕자의 칭호. 황제나 왕보다는 낮지만, 귀족the nobility, 곧 공작duke, 후작marquis, 백작count-영국에선 earl, 자작viscount, 남작baron 보다는 높은 소국小國의 군주)과의 접견이 성사된다. 지기스문트 대공은 당시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3(독어 Friedrich III; 영어 Frederick III, 1440-1493 독일 왕 프리드리히 4, 1452-1493 신성로마황제, 1415-1493)와 사촌 간이었다.

 

대공은 슈바츠에서 생산되는 은으로 주화를 대량으로 주조했는데, 그의 은화 주조량은 로마제국 멸망 후 최대였다고 한다. 그는 주화에 홀을 들고 왕관을 쓴 자신의 얼굴을 새겨 넣었다. 그는 사치와 전쟁으로 돈을 헤프게 쓸 뿐만 아니라 화려한 궁정을 짓고 수많은 정부를 두어 50여명의 혼외 자녀를 두었다. 야코프가 만날 당시 대공은 베네치아에 배상금을 지불해야 하는데, 이전에 빚을 갚지 않아 은행가들이 돈을 빌려주지 않아, 제정상태가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다. 야코프는 이 기회를 활용해 대공이 은광에 손을 대지 못하도록 하고, 광산업자들이 연대보증하며, 대출금을 할부로 지급하며, 티롤 정부의 국고통제권을 갖는다는 상환 조건을 까다롭게 제시하며, 1487년 첫 거래로 3,000 길더를 빌려주는 모험을 한다. 이 거래를 통해 푸거가는 직물 중개업에서 금융업, 광산업으로 진출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뿐만 아니라 야코프는 이 거래에서 은으로 상환하도록 계약을 맺으며, 1파운드를 8플로린으로 받고, 그 은을 베네치아로 가져가 파운드당 12플로린으로 되팔아 수익을 챙겼다.

 

뿐만 아니라 푸거가는 대공을 거치지 않고 채권자에게 직접 채무를 상환하고, 지기스문트의 관료와 피고용자에게 봉급을 주며 사실상 티롤 정권의 재정 통제권을 행사했다. 1517년 푸거가는 티롤 공공예산의 절반을 제공했고, 그 대가로 티롤에서 생산되는 은과 구리에 대해 전권을 부여받았다.

 

야코프는 1489년 프랑크푸르트의 박람회 합스부르크 가문의 실세인 막시밀리안(Maximilian, 부친 프리드리히 3; 독어 Friedrich III; 영어 Frederick III, 1440-1493 독일 왕 프리드리히 4, 1452-1493 신성로마황제, 1415-1493과 공동신성로마황제 1483-1493, 단독신성로마황제 1508-1519, 1459-1519/후임 카를 5세가 손자)을 처음 만나며, 푸거는 막시밀리안을 후원해 황제가 되게 하고, 막시밀리안 황제는 통치자금이 필요해 리히텐슈타인(Liechtenstein) 공작을 야코프에게 보내 신흥섬유도시 키르히베르크(Kirchberg)와 바이센호른(Weißenhorn)을 푸거가의 영지로 주는 동시에 백작 칭호도 제시한다. 야코프는 황제에게 5만 길더를 빌려주고 일종의 매관매직의 조건을 받아들여, 1509년 푸거가는 키르히베르크와 바이센호른의 영주가 되고, 그 후에도 황제는 돈이 필요할 때마다 영지를 팔아 1508년에 시미헨(Schmiechen), 1514년에 비버바흐(Biberbach)가 푸거가의 영지가 된다. 이어 푸거가는 15115월 신성로마제국의 귀족 반열에 올라 1514년에 키르흐베르크와 바이센호른 제국 백작의 타이틀(the title Imperial Count of Kirchberg and Weissenhorn)을 받는다. 농노신분에서 시작한 푸거가는 3대만에 귀족들과 대등한 위치에 오르며, 귀족들도 부터 고리대금업자, 장사치 등의 비난에서 벗어난다.

 

한편, 메디치 가문에 바탕이 되었던 10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메디치 은행이 5대 째인 1494년 파산하자, 아우크스부르크에서 탄생한 푸거가문’(Fugger family)벨저가문’(Welser family)의 은행이 창립되며, 푸거가문은행은 바스쿠 다 가마(Vasco da Gama, 1460?-1524)3차례, 1497-99, 1502-03, 15243월의 3차례에 걸친 인도 항로의 개척에 막대한 자금을 지원하여 황금알 낳은 사업의 신세계를 연다.

 

푸거가는 돈을 통해 합스부르크 가문에 영광을 가져다주는 동시에 그 가문을 쥐락펴락했다. 1523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5세에게 보낸 독촉장은 이를 잘 증언한다.

 

지극히 고귀하고 전능하신 로마 황제이자 지극히 너그러운 군주이시여! (중략) 소신(小臣)이 없었다면 폐하께서는 황제관을 쓰지 못하셨을 지도 모릅니다. () 폐하께 요청 드리는 것은 제가 빌려드린 금액에 이자까지 계산해 지체 없이 상환하도록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4. 오컬트 바티칸과의 유착

 

(1) 장남 울리히(Ulrich Fugger, 1441-1510)와 여섯 째 아들 게오르크(Georg Fugger, 1453-1506)는 넷째 아들 마르크스(Markus Fugger, 1448-1478: 천주교신부로, 22세인 1470년부터는 바티칸법정의 서기a writer in a papal chancery in Rome로 근무)의 도움으로 교황청에 면벌부 판매와 교회 성직록(聖職祿; 라틴어 beneficium; benefice: 천주교 성직자에게 교회가 부여하는 물질적인 직봉職俸praebenda을 의미하고, 성직록의 수입원은 교회가 갖는 동산과 부동산, 신자단체나 국가에서 규칙적으로 지불하는 금품, 신자들의 헌금, 사례금. 수당으로 이뤄짐) 조달의 송금을 담당하며, 1508-1515년 동안 로마화폐주조소(the Roman mint)를 관리한다.

 

(2) 야코프는 오랫동안 신학자들을 후원해 그들을 통해 고리대금의 합법성을 학문적으로 밝히게 하고, 오컬트 바티칸에서 목소리가 큰 최고위층 성직자들을 뇌물로 매수한 후, 레오 10라틴어 Leo PP. X; 이탈리아어 Papa Leone X; 영어 Pope Leo X, 재위 1513-1521, 1475-1521)에게 편지를 쓰고, 결국 레오 10세는 1515년 이자부과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칙령에 서명을 한다.

 

이런 차원에서 보면 야코프가 자본주의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자리를 장 칼뱅(라틴어 Ioannes Calvinus; 프랑스어 Jean Calvin; 독어 Joannes Calvinus; 영어 John Calvin; 본명 장 코뱅Jean Cauvin, 1509-1564)에게 넘겨준다. 그 이유에 대해서 후에 언급하겠다.

 

5. 종교혁명의 기원

 

마르틴 루터 선생님이 1517년 종교혁명을 하였다고 흔히 알고 있는데, 사실 종교혁명이 일어난 배경을 보면, 야코프에서 기원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먼저 오컬트 바티칸의 기획종교상품인 면벌부(免罰符; 大赦符대사부; 라틴어Indulgentia; 영어 indulgence)와 연옥(煉獄; 라틴어 purgatorium; 영어 purgatory)에 대해 살펴보자.

 

(1) 면벌부

 

천주교신자들은 고해성사를 통해 죄를 용서받으며, 고해성사 때 사제가 주는 보속(補贖)을 통해 죄의 대가를 치른다. 그러나 보속을 현세에서 완전히 실천하지 못하여 남게 되는 잠벌(暫罰)은 사후에 연옥에서 채워야 한다. 이 잠벌을 면해주는 것이 바로 면벌부다. 면벌부는 오컬트 바티칸의 교주나 주교들이 줄 수 있으며, 대사의 조건으로 제시되는 행위는 고해성사, 영성체, 기도, 성지순례 등의 신앙 실천이다.

 

그런데 면벌부는 하나님의 계시적 차원이 아니라 오컬트 바티칸의 이성의 사색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면 그 이유에 대해 지면 관계상 간략하게 살펴보겠다.

 

첫째, 욥의 고난

 

욥은 절대적 관점이 아니라 상대적 관점에서 의인이다. 그런데 그에게 오컬트 바티칸의 시각의 하늘의 벌이 내렸다. 인간의 이성의 관점에선 해석이 안 되는 고난이다. 그 이유는 욥의 고난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예표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중보자(욥기 9:32-33), 천국의 그리스도(욥기 16:1821), 구속(대속) 신앙과 대속물(욥기 36:18), 부활의 소망(욥기 19:2527), 중보기도(욥기 42:79) 등이다.

 

훌륭한 목회자나 신앙이 돈독한 사람들에게 벌이 내려질 수 있다. 그것은 교회차원에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한 예표이기 때문에, 소속된 교회나 관련된 성도들은 그것을 거울로 삼아 자신의 신앙을 점검해, 성숙한 신앙인으로 거듭나야 한다.

 

이것은 성삼위 하나님의 주권에 속하기 때문에 오컬트 바티칸의 교주나 주교의 권한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둘째, 요나의 심판설교

 

요나 예언자는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로 가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자,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고, 앗수르는 당시 강대국으로 등장한다. 여기에선 오컬트 바티칸이 말하는 이 없다.

 

셋째, 다윗의 죄와 그 벌(사무엘하 12:13-14)

 

다윗은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의 간음죄를 하나님께 회개하여 죄용서를 받았지만, 아이가 죽는 벌을 받는다. 다윗은 이 벌을 달게 받으며 성숙한 지도자로 거듭나기 때문에 오클트 바티칸의 면벌부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오컬트 바티칸에게 교훈한다.

 

“8.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개역한글. 히브리서 12:8)

 

“8.But if ye be without chastisement, whereof all are partakers, then are ye bastards, and not sons.”(KJV. Hebrews 12:8)

 

(2) 연옥

 

외경 마카베오 하권 12:41-45(죽은 자들의 구원을 위한 기도), 대 그레고리 교황(라틴어 Gregorius Magnus; 영어 Gregory the Great, 재위 590-604, 540-604)의 마태복음 12:32,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 or Augustine of Hippo, 354-430)의 베드로전서 3:18-20, 4:6 그리고 누가복음 16:23, 고린도전서 3:10-15 등에서 연옥교리의 흔적을 발견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그릇된 해석이다.

 

프랑스 중세사학자 거장인 자크 르 고프(Jacques Le Goff, 1912~2014)의 저서 연옥의 탄생’(프랑스어 La naissance du Purgatoire, 1984; 영역 The Birth of Purgatory)을 독자 여러분에게 추천한다.

 

연옥교리가 탄생하게 된 배경에 대해 생각해보자.

 

12세기 해상공화국인 베네치아(이탈리아어 Venezia; 영어 베니스Venice), 제노바(이탈리아어 Genova; 영어 Genoa), 피사(Pisa)는 해상무역으로 경제번영을 꾀하는 동시에 자유공화정을 추구하였다. 21세기 용어로 말하면 자유민주공화정과 자본주의에서 거부가 된 사람들이 성당에 가면, 이자대부업자들은 지옥에 간다는 강론을 듣거나 지옥에 떨어지는 성화를 보고, 성당가기를 멈추는 것이다. 성당은 텅텅 비어가고 성당유지비도 만만치 않기 때문에, 당시 오컬트 바티칸세력과 부자들이, 일단 7성례를 받으면 지옥에 가지 않지만, 그렇다고 곧 바로 천국 간다고 말하기가 민망하니까, 영적 야바위꾼인 오컬트 바티칸 교주는 연옥이라는 허구적 단어를 만들어냈다.

 

당시 부자들은 천국 갈 자신은 없고, 지옥은 꺼려, 오컬트 바티칸에서 제시하는 연옥교리를 받아들이고, 교주의 면벌부인 연옥을 거친 천국직행표를 돈으로 산 것이다.

 

오컬트 바티칸의 112일의 위령(慰靈)의 날’(모든 죽은 자를 위한 기도; 라틴어 Commemoratio omnium Fidelium Defunctorum; 영어 commemoration of all the faithful departed, all souls’day) 선포는 연옥교리와 면벌부의 정체성을 보여준다.

 

한편 장 칼뱅(라틴어 Ioannes Calvinus; 프랑스어 Jean Calvin; 독어 Joannes Calvinus; 영어 John Calvin; 본명 장 코뱅Jean Cauvin, 1509-1564)은 스위스의 두 번째 제네바 체류 시절(33세 때인 1542-55세 때인 1564)1547(38)년 제네바에서 소비(생활)를 위한 돈에 대한이자(부정적인 고리대금)는 반대하고, 건설적인 생산인 투자를 위한 돈에 대한 이자는 인정하면서, 5%이상의 이자는 위법이라고 선언하면서 자본주의의 시조가 되고, 기독교가 자유민주공화정과 자본주의를 기초하여 건강하며 건전한 복지국가이상향을 전 인류에게 제시해 자본주의 시조가 되었다.

 

(3) 종교혁명의 배경

 

당시 르네상스의 보호자로 이름난 피렌체(Firenze)의 메디치가(Medici)출신의 레오10(라틴어 Leo PP. X; 이탈리아어 Papa Leone X; 영어 Pope Leo X, 재위 1513-1521, 1475-1521)는 신성 로마 황제 막시밀리안 1세가 사망하자 교황 레오 10세는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1(Carlos I, 1516-1556)프랑스 르네상스의 아버지 프랑수아 1(프랑스어 François I, 재위 1515-1547, 1494-1547)보다 작센주(독어 Sachsen; 영어 Saxony)의 선제후(選帝侯; 라틴어 Princeps Elector; 독어 Kurfürst, pl. Kurfürsten; 영어 The Prince-electors or Electors: 신성로마 제국 황제를 선정하는 역할을 하였던 신성로마제국의 선거인단) 프리드리히 3(현공 賢公)(Friedrich III, Friedrich der Weise von Sachsen; 영어 Frederick III or Frederick the Wise, Elector of Saxony, 1486-1525, 1463-1525)를 황제후보로 지지했다. 쟁쟁한 후보들이 선거전을 치르고 있어 교황은 더 많은 돈이 필요했다.

 

레오 10세는 손님접대, 연극, 가면극, 발레, 무언극, 사냥 등의 호화로운 생활과 우르비노 전쟁비용 등으로 파산직전에 몰려있었다. 그는 성직매매(한번에 31명의 추기경을 돈 받고 임명)를 통해 자금부족을 해결하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베드로성당의 리모델링(remodeling)의 경비로 심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브란덴부르크의 대주교 알브레히트(독어 Erzbischof Albrecht von Brandenburg; 영어 Archbishop Albert of Brandenburg, 1490-1545)가 면벌부판매를 레오 10에게 요청한다.

 

알브레히트는 23세 때인 1513년과 24세 때인 1514년에 각 각 마그데부르크 대주교(archbishop of Magdeburg, 1513-1545)와 마인츠 대주교(독어 Erzbischof Albrecht von Mainz; 영어 Archbishop Albert of Mainz, 1514-1545)와 선제후, 28세 때인 1518년 추기경이 됐을 정도로 그는 권력과 명예욕에 맛이 간 청년 고위성직자였다.

 

1514년 그는 마그데부르크와 마인츠 대주교직을 차지하기 위해 야콥 푸거로부터 29000두카트(48천 굴덴; 최소 65억원)이라는 거금을 빌렸다. 무엇보다도 마인츠 대주교직은 그에게 매우 매력적이었다. 그 이유는 마인츠가 독일천주교회에 있어서 최고위 성직자(primas Germaniae)이며, 알프스 이북 지역에서 교주를 대리할 뿐만 아니라 마인츠가 선제후에 속하기 때문이다. 당시 7명의 선제후는 마인츠(Mainz), 트리어(Trier), 쾰른(Köln)의 대주교 3명 그리고 팔츠(Pfalz)백작, 작센(Sachsen)공작, 브란덴부르크(Brandenburg) 변경백(邊境伯; 후작), 보헤미아(Bohemia; 독어 Böhmen)의 국왕이었다.

 

알베르트는 마인츠 대주교직을 위해 푸거가로부터 돈을 빌렸기 때문에 그 빚을 갚기 위해 레오 10세에게 면벌부판매를 요청한 것이다. 1514년 레오10세는 베드로성당의 리모델링을 위해 면벌부를 팔기 시작했고, 어느 정도 견고한 통일국가를 형성한 영국이나 프랑스 보다는 독일이 정치적 분열이 심해서 교황청의 둘도 없는 좋은 착취의 대상감 이었다. 레오 10세는 독일사람들에게 세금을 무겁게 책정하고 면벌부를 팔기 시작했다.

 

알브레히트는 1517년 이후 8년 동안 자신의 관구 브란덴부르크와 작센(Saxony) 지역에서의 면죄부의 판매를 레오 10세로부터 허가 받고 판매대금의 절반은 교황청에 상납하고, 나머지 절반은 푸거가로부터 빌린 자신의 빚을 갚는데 충당하기로 한. 동년 1517년 알브레히트는 도미니크 수도회 수사로 이름만 걸고 있던, 1502년부터 실상 면벌부 판매 전문 수도사가 된 신학박사(1518) 요한 테첼(Johann Tetzel, 1465-1519: 1509년 폴란드 종교재판관an inquisitor of Poland)이란 인물을 영입하여, 자신의 영내를 편력하며 설교하면서 면죄권사기를 권유했다. 비텐베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는 테첼일행이 들어오는 것을 금하였다.

 

다음과 같은 테첼의 면벌부판매선전은 당시 면벌부판매의 정체성을 보여준다.

 

금화가 면죄부 헌금함에 떨어지며 땡그랑!’ 소리를 내는 순간, 죽은 자의 영혼이 연옥에서 천국으로 올라간다”(As soon as the gold in the casket rings the rescued soul to heaven springs)

 

마르틴 루터는 15171031일 비텐베르크대학 궁정교회 정문에 95개조 반박문(성당건축비와 면죄부판매성토)을 붙였다.

 

오컬트바티칸은 1567년 면죄부 판매를 금지했다. 하지만 2000요한 바오로 2(라틴어 Sanctus Ioannes Paulus PP; 이탈리아어 Papa San Giovanni Paolo II; 영어 Saint Pope John Paul II, 재위 1978-2005, 1920-2005)가 새천년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주교들에게 면죄부 발급 권한을 주었고, 베네딕토 16(라틴어 Benedictus PP. XVI; 이탈리아어 Papa Benedetto XVI; 영어 Pope Benedict XVI, , 본명 Joseph Aloisius Ratzinger, 재위2005.4.24.-2013.2.27., 1927-: 신앙교리성 장관1981-2005) 체제가 들어서면서 전세계적으로 면죄부 발급이 보편화 되었다.

 

6. 푸거라이(Fuggerei) 설립

 

야코프는 종교와 정치권력가들과의 유착을 통해 거부가 된 냉혹한 자본가라는 세상의 비난을 잠재우기 우해 1521년 독일 아우크스부르크의 푸거라이(Fuggerei) 설립한다. 푸거라이는 67동건물과 142가구로 구성되었고, 당시 이 집의 1년 집세는 1 라인굴덴(Rheinischer Gulden)인데 오늘 날의 돈으로 환산하면 0.88 유로이고, 대한민국의 돈으로 환산하면 약 1,140원 정도 된다. 푸거라이입주조건은 빈곤의 위험에 처한 수공업자, 가족이 없는 일용 노동자로 푸거와 푸거가문을 위한 기도를 하루 3번 하나님께 기도하는 천주교신자여야 한다는 것이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독일어: Wolfgang Amadeus Mozart, 1756-1791)의 증조부인 프란츠 모차르트(Franz Mozart, 1649-1693)1681년부터 1693년까지 살았다는 사실이 핫 토픽감이다.

 

1525년 푸거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의 재산은 유럽 내 총생산(GDP)2%에 육박할 정도였다고 하지만, 그는 가난한 인류를 위해 헌신한 것이 아니라 오직 천주교신자를 위해 재정을 썼기 때문에 진정한 자본가라고 할 수 없다.

 

이에 비해 대한민국의 기독교(침례교) 신자로 유한양행 창업자 유일한(柳一韓, 1895-1971) 박사는 대한민국과 국민전체를 위해 자신의 재산을 사회에 환원했고. 부산복음병원 원장을 지낸 기독교 장로 장기려(張起呂, 1911-995) 박사도 대한민국과 국민전체를 위해 헌신하다 하나님나라로 가신 위대한 기독교인이다.

 

미국의 침례교 신자 석유재벌 존 데이비슨 록펠러(John Davison Rockefeller Sr. 1839-1937)와 미국의 철강재벌 앤드루 카네기(Andrew Carnegie, 1835-1919)도 미국과 미국시민을 위해 자신의 재산을 기부한 기독교인이었다.

 

이것이 기독교와 천주교와의 커다란 차이점이다.

 

7. 종합

 

천주교도 야코프 푸거가 오컬트 바티칸, 신성로마제국 그리고 자본주의를 희롱하고, 오컬트 바티칸의 교주, 황제들이 푸거가의 돈의 노예가 된 사실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선언한다.

 

“44.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개역한글. 요한복음 8:44)

 

“44.Ye are of your father the devil, and the lusts of your father ye will do. He was a murderer from the beginning, and abode not in the truth, because there is no truth in him. When he speaketh a lie, he speaketh of his own: for he is a liar, and the father of it.”(KJV. John 8:44)

 

“13.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14.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15.그러므로 사단의 일군들도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개역한글. 고린도후서 11:13-15)

 

“13.For such are false apostles, deceitful workers, transforming themselves into the apostles of Christ. 14.And no marvel; for Satan himself is transformed into an angel of light. 15.Therefore it is no great thing if his ministers also be transformed as the ministers of righteousness; whose end shall be according to their works.”(KJV. 2 Corinthians 11:13-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