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와 정의의 나라/신학 이야기

‘카인의 후예인 오컬트 천주교 추종자는 대통령과 모든 고위공직자가 되면 안된다’ YouTube!!!

아우구스티누스 2021. 7. 9. 11:08

매미가 쉬지 않고 여름을 노래하며 코로나와 후덥지근한 날씨로 지친 우리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고 있습니다. 성삼위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도 선한 행위로 이웃으로 하여금 성삼위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깨닫고, 우리와 함께 성삼위 하나님을 찬양하는, 초록의 싱그러운 역사가 일어나길 대망합니다.

 

오컬트 바티칸은 자신들에겐 매우 관대한 반면, 세계인들에겐 매우 엄격한 잣대를 댄다. 자신들의 종교권력(=정치권력)과 돈에 불이익을 주는 집단이나 사람들은 파멸시키거나 살해하고, Aids의 기원인 동성애 집단인 신부들, 레즈비언 집단인 수녀들의 죄를 인류에게 전가하기 위해서 이 세상을 LGBT, 곧 사탄의 세계로 만들고 있다.

 

현재 청와대를 점령한 천주교 세력들도 자신들에겐 매우 관대하기 때문에, 국민은 불행하고, 대한민국은 중국 위성국가로 추락하고 있다.

 

이런 사실을 감안하며 이 글을 열겠다.

 

1. 카오스의 기원

 

니콜라오 5(라틴어 Nicolaus PP. V; 이탈리아어 Papa Niccolò V; 영어 Pope Nicholas V, 재위 1447-1455, 1397-1455)는 인문주의 학문이 교회를 분열시키는 이단의 학문이라기 보단 그리스도교 도시인 로마의 문화수준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해주는 도구로 보았다. 그래서 그는 145321세의 오스만제국(오스만 튀르크) 메흐메트 2(Mehmet II, 1444-1446, 1451-1481, 1432-1481)의 침략에 의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 후 그리스 학자들을 데려오기 위해 동방에 특사를 보냈고, 또한 로렌초 발라(Lorenzo Valla, 1407-1457: 33세 때인 1440년 자신의 논문인 콘스탄티누스의 증여문서의 위조에 관한 선언라틴어 Dēclāmātiō; 영어 Declamation’에서 조잡한 라틴어 문체, 인용된 문서와 문서 자체의 연도의 불일치 등의 근거들을 제시하면서 이 문서가 4세기에 기록된 것이 아니라 8세기경에 조작된 것임을 폭로)로 하여금 종교차원을 떠나 그리스 역사책들을 라틴어로 번역하도록 했음은 물론 바티칸 도서관을 설립하였다.

 

니콜라오 5세는 교주의 자리에 앉자마자 1447바티칸 궁전’(Vatican Palace)을 새롭게 건축하여 오늘날의 교황청이 자리하게 하였다.

 

라테라노(라테란)(이탈리아어 Palazzo Laterano; 영어 Lateran Palace)은 콘스탄티누스 1(라틴어 Constantinus I; 영어 Constantine I, 재위 306-337, 272-337/콘스탄티누스 대제; 그리스어 Κωνσταντνος Μέγας; 라틴어 Sanctus Constantinus Magna; 영어 Constantine the Great)311년 기증하여 1309년부터 1377년까지 70년간 프랑스의 아비뇽(Avignon)으로 이주한 이른바 아비뇽 유수’(프랑스어 cattività avignonése; 영어 Avignonese Captivity)기간을 제외한 천 년 동안 교주가 사용했던 궁전이다. 5세기경 교주 심마코(라틴어 Symmachus PP.; 이탈리아어: Papa Simmaco; 영어 Pope Symmachus, 재위 498-514, ?-514)라테라노궁의 대비공간(對比空間)으로 베드로 성당(the Old St. Peter’s Basilica) 인근에 요새화된 사도궁’(라틴어 Palatium Apostolicum; 이탈리아어 Palazzo Apostolico; 영어 The Apostolic Palace)을 건축했다. 교황 그레고리오 11; 라틴어 Gregorius PP. XI; 이탈리아어 Papa Gregorio XI; 영어 Pope Gregorius XI, 재위 1371-1378, 1329-1379)137717일 로마에 당도하면서 아비뇽 유수를 종식시키고, ‘사도궁으로 교황청을 옮겼다. 1447년 니콜라오 5세가 바티칸 궁전’(Vatican Palace)으로 새롭게 건축하여 오늘날의 교황청이 자리하게 된다.

 

이처럼 니콜라오 5세는 대학자로서 오컬트 바티칸의 주춧돌을 놓은 위대한 교주로 생각되지만 다음과 같은 사실은 그가 카오스세계의 진원지임을 보여준다.

 

1454년 대항해시대(포르투갈의 엔히크 항해왕자Henrique; Prince Henry the Navigator, 1394-1460이 서아프리카 연안탐사와 대서양 탐험과 개척을 이끌고 지원하며 대항해시대개막)에 니콜라오 5세는 포르투갈 군주들에게 새로운 땅에 대한 정복과 지배권을 보장하는 교령을 내렸다.

 

본인은 사라센인들(아라비안 반도와 이집트에 거주하는 이슬람인/무어인: 이베리아반도, 북아프리카, 인도에 거주하는 이슬람인)과 이방인들과 다른 그리스도의 적들을, 그들이 어디에 있든지, 침략하고 정복하고 전쟁하고 패배시키고 복종시킬 수 있도록 완전하고 자유로운 권한을 부여한다. 이 권력을 부여받은 알폰소 왕은 자신과 그의 후계자들에게 속해 있는 섬들과 땅들과 항구들과 바다들을 정당하고 합법적으로 소유한다.”

 

2. 15-16세기 에스파냐와 포르투갈

 

(1) 에스파냐

 

부군 페르난도 2(스페인어 Fernando II de Aragón; 영어 Ferdinand II, 아라곤 국왕 재위1479-1516. 1452-1516)와 함께 711년 우마이야 왕조의 아프리카 총독 무사(Musa)의 수하 장군인 베르베르인(Berber) 타리크(Tarik)의 침략 후 781년 만인 1492년 그라나다(Granada)의 이슬람 나스르(Nasr) 왕조를 멸망시키고 이베리아반도를 회복한 레콩키스타’(스페인어 Reconquista; 포르투갈어 Reconquista 헤콩키스타; 영어 re-conquest)를 완성한 이자벨 1(Isabel 1. 카스티야 여왕 재위 1474-1504. 1451-1504: 스페인, 포르투갈어의 이자벨Isabel’, 이탈리아어의 이자벨라Isabella’, 프랑스어의 이자벨Isabelle’, 독일어의 이자벨레Isabelle’, 미영의 엘리자베스Elizabeth)1492331일 유대인의 추방을 골자로 하고 있는알함브라 칙령’(Alhambra Decree)을 부군과 합작하여 발표한다. “우리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신지 1492년째가 되는 해의 331, 우리의 도시 그라나다에서 이 교서를 반포하노라. 유대인들은 빈부와 귀천, 남녀노소, 거주지역, 현지 출생 여부를 불문하고 모두 떠나라.”

 

레콩키스타 이전의 코르도바 우마이야 칼리파국(라틴어 Caliphatus Cordubae, 스페인어: Califato de Córdoba; the Umayyad Caliphate of Córdoba, 1009-1031)은 유대인들에게 관용을 베풀었고, 유대인들은 외무장관을 비롯해 고위직까지 진출했음은 물론 39명의 군주(터키어 Emir; 아랍어 Amir)가 통치하는 독자적인 소왕국들로 분산된타이파’(라틴어, 스페인어 taifa, pl. taifas=kings of the territorial divisions or party kings)시대엔 각 군주들이 학식을 갖춘 인재를 필요로 했기 때문에 유대인은 정권에 참여해 주도적 역할을 했다. 그라나다 왕국에선 군 총사령관을 지낸 유대인인 있을 정도다.

 

중세 유럽시대엔 고대 그리스와 로마 문화가 잊혀 졌으나, 에스파냐에선 유대인들이 아라비아어로 번역되어 있던 고대 의학과 철학 서적을 히브리어와 라틴어로 번역한 동시에 아라비아 수학과 기하학도 전파해, 세파르딤(Sephardim) 문화를 꽃피웠다.

 

유대인들이 이베리아반도에 거주한 이유는 팔레스타인의 유대국가가 고대 로마제국에 의해 멸망한 이후 세계 각지에 유랑하던 유대인들에게 랍비들은 근거도 없이 스페인을 새로운 약속의 땅이라고 제시했기 때문이다. 구약성경 예언서 오바댜 1:20사로잡혔던 이스라엘의 뭇 자손은 가나안 사람에게 속한 땅을 사르밧까지 얻을 것이며 예루살렘의 사로잡혔던 자 곧 스바랏에 있는 자는 남방의 성읍들을 얻을 것이니라”(개역한글)“20.And the captivity of this host of the children of Israel shall possess that of the Canaanites, even unto Zarephath; and the captivity of Jerusalem, which is in Sepharad, shall possess the cities of the south. ”(KJV. Obadiah 1:20)고 했는데, 그 스바랏(Sepharad; סְפָרַדSp̄āraḏ)이 스페인 지역이라고 해석한 것이다. 그래서 이베리아 반도에 살던 유대인들을 세파르디(Sephardi; The Jews of Sepharad)이라고 부른다.

 

세파르디 유대인들은 당대 어느 곳에 있던 유대인들보다 부유했다. 당시 이들의 평균소득은 독일, 폴란드, 러시아계의 유대인 아쉬케니지(Ashkenazi)의 소득보다 40배나 많았다고 한다.

 

알함브라 칙령의 내용을 살펴보자.

 

유대인들의 모든 재산권을 인정하고 보호하며, 동산과 부동산을 자유롭게 처분해 국외로 반출할 권리를 부여한다

 

하지만금과 은, 화폐의 반출을 비롯해 국가가 정한 품목은 금지한다단서조항이 뒤 따른다.

 

기일 이후에 머물러 있거나 되돌아오는 유대인 또는 잠시 방문하는 유대인은 법 절차 없이 극형에 처하고 재산은 국고에 귀속한다

 

추방시한은 7월말이라, 4개월의 짧은 시간에 부동산을 최소한도 제값에 처분하기가 어려웠고, 설령 사는 사람이 나타나더라도 헐값으로 낙찰될 수밖에 없었다.

 

알함브라 칙령의 기원은레콩키스타의 성공에 기여한 영주와 기사들에게 나눠줄 재화를 유대인들에게서 빼앗아 마련하려 하기 위한 것이다.

 

유대인들의 다수는 상공업에 종사했고 금융, 유통망을 장악하고 있었기에 추방 이후 스페인 경제가 침체하기 시작했고, 농민들로 구성된 이슬람교도도 추방되었기 때문에 에스파냐는 침몰의 위기를 맞고 있었다.

 

1492417일 이자벨 1세는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 이탈리아어 Cristoforo Colombo, 1451?-1506)와 산타페 협약(Santa Fe Capitulations: 콜럼버스는 발견한 땅의 총독으로 임명되며 그 땅에서 나오는 재물의 10%를 갖는다는 것이 계약의 골자)을 체결하고, 이사벨은 선박과 항해자금을 제공하고, 죄수들을 선원으로 모집하는 일도 도왔다. 또한 산타마리아호의 선주 핀손도 자신의 배를 끌고 함께 참가하였다. 당시 아메리카에서 약탈한 금은보화로 일시적 융성을 향유하나 매우 아이러니컬하게도 에스파냐 황금시대(the Spanish Golden Age)의 펠리페 2(에스파냐어 Felipe ; 영어 Philip , 재위 1556-1598, 1527-1598)가 즉위한 후 1년 뒤 1557년 파산선언을 한다.

 

이때 상당수의 부유한 유대인들 6만 여명은 포르투갈 주앙 2(João II; 스페인어 Juan II후안 2; ; 영어 John II, 재위 1481-1495, 1455-1495)의 도움으로 포르투갈로 이주하였다.

 

(2) 포르투갈

 

주앙 2세는 1488년 희망봉 발견과 1494년 토르데시야스 조약체결로 포르투갈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다.

 

1488년 포르투갈인 바르톨로마이우스 디아스(Bartolomeu Dias; 그리스어 ΒαρθολομαοςBartholomaîos; 리틴어 Bartholomaeus; 영어 Bartholomew; 나다나엘; 히브리어 נְתַנְאֵל ; 그리스어 ΝαθαναήλNathanaḗl; 영어 Nathanael, 1451?-1500)가 폭풍을 만나 대서양과 인도양이 만나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대서양 해변에 있는 암석으로 이루어진 곶을 발견하여 폭풍의 곶(포르투갈어 Cabo Tormentoso; 영어 Cape of Storms: 바다 쪽으로 좁고 길게 뻗어 있는 육지의 끝 부분이 곶cape, headland)이라고 명명하였으나, 주앙 2세는 디아스가 개척한 항로가 인도 항로 개척의 기점으로 부와 황금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확신하며,‘희망의 곶’(희망봉; The Cape of Good Hope)으로 개명한다. 일반적으로 희망봉이 아프리카의 최남단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사실이 아니다. 최남단 지역은 희망봉에서 동남쪽으로 150km 떨어진 곳에 있는, 바늘이라는 의미를 가진 아굴라스 곶(Cape Agulhas)이다.

 

그리고 주앙 2세의 주도로 149467일 에스파냐의 작은 마을인 토르데시야스에서 아프리카 서쪽 끝 카보베르데(포르투갈어 Cabo Verde; 영어 Cape Verde)섬으로부터 1800KM까지 선을 그어, 곧 대서양에 세로로 선을 그어 동쪽의 브라질, 한국, 일본, 중국은 포르투갈, 서쪽은 에스파냐의 식민지로 인정하는 토르데시야스 조약’(스페인어 Tratado de Tordesillas; 영어 The Treaty of Tordesillas)이 체결되고, 1506년에는 교주 율리오 2(라틴어 Iulius PP. II; 이탈리아어 Papa Giulio II; 영어 Pope Julius II, 재위 1503-1513, 1443-1513)가 이 조약을 재가하며, 브라질은 포르투갈령이 되어, 포르투갈은 해상제국이 된다.

 

이처럼 주앙 2세의 포르투갈은 해양 개척에 관심이 많았고, 돈이 필요했다. 포르투갈은 유대인 1명당 1두카트(Ducat: 금화, 은화의 단위)씩 받고 입국을 받아들인 것이다.

 

주앙 2세는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체결한 다음 해인 149540세 나이로 서거하고, 주앙 2세의 사촌동생으로, 인도 신항로 개척(1498)과 브라질 발견(1500)에 이어 유럽-인도를 잇는 해상무역에 확고한 입지를 구축한 마누엘 1(Manuel I, 재위 1495-1521, 1469-1521)가 즉위한다.

 

마누엘 1세 시절 바스쿠 다 가마(Vasco da Gama , 1460/1469-1524)3차례(1497-99, 1502-03, 15243)3차례에 걸친 인도 항로의 개척으로 고아(1510), 말라카(1511), 호르무즈(1515)가 인도양 무역의 주요 거점 점령지역이 되어, 주앙 2세가 예언한희망봉의 비전이 실현된다. 또한 1500년 페드루 알바르스 카브랄(Pedro Álvares Cabral, 1468?-1520)이 인도항해 중에 폭풍을 만나 브라질에 표착하고, 토르데시야스 조약에 의해 브라질은 포르투갈의 영토가 되어, 해상무역의 강대국의 기초를 다진다.

 

마누엘 1세는 포르투갈을 이웃국가인 에스파냐처럼 세계강대국으로 발전시키려고 고심하던 차에 이자벨 1세가 포르투갈과 원만한 관계유지를 위해 장녀 이자벨(1470-1498)을 포르투갈 왕자 아폰수와 초혼을 했으나, 1491년 왕세자 아폰소가 낙마사고로 죽자, 장녀를 마누엘 1세에게 재혼시키겠다는 의견을 제시하고, 마누엘의 동의를 받은 후, 혼인 전 포르투갈 내 유대인 추방을 제1조건으로 제시한다.

 

1496124마누엘 1세는 유대인과 무슬림의 강제개종과 추방을 추진하였고, 이런 분위기를 타고 1506419일 수도 리스본에서는 약 7,000명의 유대인 대학살의 참극이 벌어진다.

 

1498년 왕비 이자벨은 아들 미겔(Miguel) 출산 중 사망하고, 미겔 왕자도 2년 후인 1500년에 유아기에 죽는다. 마누엘 1세의 희망이 무너질 찰나에 이자벨 1세의 셋째 딸 마리아(1482-1517)가 마누엘 1세와 혼인하면서, 마누엘 1세도 가슴속의 비전을 소중히 키운다.

 

(3) 세파르디 유대인의 운명

 

레콩키스타 이전의 코르도바 우마이야 칼리파국이 유대인들에게 관용을 베풀었기 때문에, 세파르디 유대인들은 이슬람 국가로 망명했는데, 오스만튀르크에 9만 명, 오늘날 모로코 지역에 2만 명, 알제리에 1만 명이 몰려들었다. 오스만튀르크의 수도 이스탄불에는 이들로 인해 유대인 타운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네덜란드로 건너가 자리 잡았고, 이 때 바뤼흐 스피노자(네덜란드어 Baruch Spinoza; 라틴어: Benedictus de Spinoza; 포르투갈어 Bento de Espinoza, 1632-1677)도 네덜란드에서 웅지를 펼쳤다. 스피노자의 친할머니가 천주교회에 마녀로 몰려 화형을 당한 것이다.

 

세파르디 유대인들은 16-17세기 네덜란드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당시 청어 잡이가 성행했는데, 그것을 절임청어로 만들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소금판매유통을 맡으면서 경제이익을 극대화하고, 마침내 네덜란드인과 협력해 1602년 동인도회사를 설립하고, 주식을 위해 1611년 증권거래소를 세운다. 그리고 1609년 네덜란드가 규슈(九州구주)의 나가사키(長崎장기)에 네덜란드 상관(무역관)을 설립하고, 그 후 일본은 서구열강의 최첨단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마침내 1868년의 메이지유신(明治維新명치유신)을 단행해 서양열강반열에 오른다.

 

한편 네덜란드의 유대인들은 잉글랜드의 명예혁명(The Glorious Revolution, Bloodless Revolution, 1688)과 함께 대거 잉글랜드로 이주해 새로운 세상에서 꿈을 펼친다. 대표적 인물로 영국의 경제학자 데이비드 리카도(David Ricardo, 1772-1823: 상품의 가치는 노동량, 곧 노동 시간에 따라 결정된다는 노동가치설, 애덤 스미스의 개인 간 분업 이론을 국가 간 분업으로 확장 적용한 , 곧 국가마다 비교 우위에 있는 재화와 용역을 특화하여 생산해야 한다는 비교우위론, 토지가 비옥할수록 보다 많은 곡물을 생산할 수 있다. 때문에 비옥한 토지를 빌리기 위해서는 높은 토지임대 비용을 내야 한다는 차액지대론 등을 주장)를 들 수 있고, 영국 총리를 지낸 벤저민 디즈레일리(Benjamin Disraeli, 1st Earl of Beaconsfield, 1868.2.27.-1868.12.1., 1874.2.20.-1880.4.21., 1804-1881)의 경우 이탈리아 유대인이던 조부 대에 영국으로 이민하였으며, 디즈레일리는 아버지를 따라 12세부터 성공회 신자가 되었다. 에스파냐계 유대인인 세파르디 유대인들의 조상들은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또는 이탈리아를 거쳐 영국으로 건너갔다.

 

500년이 지난 2015년에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알함브라 칙령의 역사를 반성하며, 유대인들에 대해 국적 회복법을 제정했다. 이 법안은 국외에 거주하는 유대인 중 자신이 세파르디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면 스페인, 포르투갈 국적을 취득하고 여권을 발급받을 수 있도록 했다. 영국 국적 세파르디들이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제정된 국적회복법을 통해 스페인, 포르투갈 국적을 취득하고 있다. 영국은 이중 국적을 허용하기 때문에, 스페인이나 포르투갈 국적을 취득해 놓은 영국인들은 브렉시트 이후에도 EU 시민권과 여권을 가지고 유럽을 자유롭게 통행할 수 있다.

 

3. 16-18세기 프랑스

 

칼뱅파(위그노)의 수가 전체 인구의 4분의 1에 육박하자 위그노전쟁(The French Wars of Religion; Huguenots Wars ,1562-98)이 발생했고, 그런 가운데 1572824-917일까지의 성() 바돌로매(그리스어 ΒαρθολομαοςBartholomaîos; 리틴어 Bartholomaeus; 영어 Bartholomew=나다나엘; 히브리어 נְתַנְאֵל Netanel; 그리스어 ΝαθαναήλNathanaḗl; 영어 Nathanael) 축일의 학살(프랑스어 Massacre de la Saint-Barthélemy; 영어 The St. Bartholomew's Day massacre)로 위그노들은 이웃 기독교국가로 망명을 떠났고, 1598413낭트칙령’(프랑스어 Edit de Nante; 영어 Edict of Nantes)으로 위그노들이 천주교도들과 공존의 삶을 향유하다가 168510월 루이 14세가 반포한 퐁텐블로 칙령’( Edict of Fontainebleau)으로 낭트칙령이 폐지되자, 위그노들의 대이동이 시작되어, 프랑스는 후진국으로 몰락하고, 이웃 기독교국가(영국, 미국, 독일, 스위스, 북유럽 등)는 경제강국이 되었다.

 

미국의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25대 부통령 1901. 3. 4-1901. 9. 14. 26대 대통령 1901. 9. 14승계-1909. 3. 4, 1858-1919) 대통령과 4선 대통령(1933.3.4.-1945.4.12; 1932, 1936, 1940, 1944)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 1882-1945)가 대표적인 위그노혈통이고, 프랭클린 부인 엘리너(Anna[ǽnǝ] Eleanor[élǝnǝr] Roosevelt, 1884-1962)는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질녀(조카딸).

 

4. 20세기 에스파냐

 

19362월 치러진 스페인 총선에서 공화주의자,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무정부주의자 등 이질적인 집단의 혼합체인 공화파가 승리하지만, 천주교에 대한 압박정책으로 동년 7천주교도 바울로 프란시스코 프랑코(Francisco Franco, 재위 1939-1975 총통, 국가원수, 정부 수반, 내각의 의장, 1892-1975) 장군이 이끈 국민전선이 쿠데타를 일으키고, 에스파냐내전(1936-39)이 시작된다. 프랑코 장군은 잘 훈련된 군대, 수적인 우세 그리고 독일과 이태리의 파시스트 정권의 지원으로 소련과 멕시코로부터 무기, 식료품, 비행기, 군사 고문단 등을 지원받는 한편, 미국의 링컨 여단 3천명과 세계 각국에서 온 반파시스트 국제여단 10만 명의 지원을 받은 공화파를 패배시키고 정권을 잡는다. 공화파가 참패한 이유는 체계적이고 실질적인 전투력을 보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히틀러와 무솔리니는 프랑코 장군에게 물자, 무기, 비행기, 군대를 지원하면서 스페인 내전을 자신들의 실전연습과 무기실험을 위한 제2차 세계대전의 전초전의 장으로 만들었다. 전선에서만 약 백만 명이 전사하였고, 민간인을 포함하여 쌍방에서 약 20만 명이 살해되었다.

 

프랑코는 범천주교세력의 지원을 받으며 스페인을 하나의 거대한 감옥으로 만들어, 의심스러운 인물을 소리 없이 제거하는데 그치지 않고 수만 명의 아이들을 납치하는 전대미문의 범죄를 자행했고, 여기엔 수녀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할 뿐만 아니라 이 추악한 범죄를 은밀하게 지원한 것도 역시 오컬트 바티칸이었다. 오컬트 바티칸과 천주교도들은 스스로 지옥의 세력임을 증언했다.

 

이에 저항하는 정치인, 지식인, 작가, 예술가 등을 포함해 약 50만 명의 전문직 인재들이 주로 천주교국가인 프랑스나 중남미로 망명하였다.

 

5. 19세기말-20세기의 캐나다

 

영토 크기순서로 보면 러시아->캐나다->중국->미국 순이다. 캐나다는 광활한 영토를 가졌고, 국가원수는 영국여왕 엘리자베스 2(엘리자베스 2세는 16개국의 국왕).

 

캐나다가 태어난 배경엔 제18세기 세계대전이 있다. 그러면 그것에 대해 살펴보자.

 

오스트리아에서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ia, 재위 1740-1780, 1717-1780)가 여성의 상속권을 부정한 고대 게르만법인 살리카법전(라틴어 Lex Salica; 영어 Salic Law)을 무시하고 17401020일 여군주로 등장하자, 대략 5개월 이전인 1740531일 프로이센 국왕으로 등극한, 장 칼뱅(라틴어 Ioannes Calvinus; 프랑스어 Jean Calvin; 독어 Joannes Calvinus; 영어 John Calvin; 본명 장 코뱅Jean Cauvin, 1509-1564) 신학사상인 칼뱅주의(Calvinism)의 신봉자 프로이센 프리드리히 2(Friedrich II, 재위 1740-1786, 1712-1786)가 석탄, , 납 등 광석이 풍부한데다 인구가 100만 명에 달하며, 천주교가 아니라 기독교 지역이고, 프로이센과의 유일한 국경인 슐레지엔(독어 Schlesien; 영어 Silesia; 현재 실레시아의 대부분 지역은 폴란드에 귀속)을 프로이센에거 넘겨준다면, 여성의 군주재위를 눈감아주겠다고 제안한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여걸답게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1740-48)을 야기시키며 프리드리히 2세와 한판 붙지만 패배해, 슐레지엔을 빼앗긴다.

 

그 후 마리아 테레지아가 슐레지엔을 되찾기 위해 200년 동안 적대관계에 있던 프랑스(마담 퐁파두르, Marquise de Pompadour, 1721-1764)와 러시아 여제 엘리자베타(Yelizaveta Petrovna, 1741-1761, 1709-1762)와 협력하여 프로이센에 포위망을 배치하자, 프리드리히 2세는 선전포고 없이 선제공격에 나서며, 7년 전쟁(1756-1763)이 시작된다. 결과는 프로이센의 승리다. 그 이유는 엘리자베타 서거 후 프리드리히 대왕을 숭배하는 표트르 3(Pyotr III; 영어 Peter III, 재위 1762.1.5.-1762.7.9., 1728-1762: 표트르 3세와 마찬가지로 독일태생으로 루터교의 교육을 받고 성장. 황후 예카테리나 Yekaterina; 영어 Catherine , Catherine the Great, 재위 1762-1796, 1729-1796이 황실 근위대의 도움을 얻어 남편 표트르 3세를 폐위하고 스스로 제위에 올라 예카테리나 2세라고 선포하고, 제위에 오른 지 1주일 후에 표트르 3세에게 사형판결. 볼테르Voltaire, 1694-1778과 교류)가 즉위하며 이 전쟁에서 손을 떼기 때문이다.

 

한편 영국은 북아메리카의 누벨 프랑스(뉴프랑스: 현재의 퀘벡주와 온타리오주)의 대다수를 차지하며, 북아메리카에서 프랑스 세력을 패배시키고, 스페인령 플로리다, 서인도 제도의 일부 섬, 서아프리카 해안의 세네갈 식민지, 인도에서도 프랑스 세력을 추방시킨 후 대영제국의 기초를 닦았다.

 

현재 두 번째 총리로 재위 중 인 쥐스탱 트뤼도(Justin Pierre James Trudeau, 재위 2015-2019, 2019-, 1971-)2차례 총리를 지낸 자신의 부친 피에르 엘리엇 트뤼도(Pierre Elliott Trudeau, CH, CC, 1968-1979, 1980-1984, 1919-2000)와 같이 예수회가 운영하는 장드브레뵈프 칼리지에서 수학한 예수회 회원이다.

 

그런데 천주교세력들이 188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100년 넘게 북미 인디언 자녀(3-청소년) 15만 명을 대상으로 한 기숙학교를 전국 139곳에 운영했다고 한다.

 

1880년대는 비오 9(라틴어 Beatus Pius PP. IX; 이탈리아어 Beato Papa Pio IX; 프랑스어 Pape Pie IX; 독어 Papst Pius IX; 영어 Pope Pius IX, 본명 조반니 마리아 마스타이 페레티Giovanni Maria Mastai-Ferretti, 재위 1846-1878, 1792-1878)가 재직한 시기인데, 그의 임기동안은 이탈리아의 해방전쟁과 통일전쟁 시기였다.

 

주세페 마치니(Giuseppe Mazzini, 1805-1872)와 주세페 M. 가리발디(Giuseppe Maria Garibaldi, 1807-1882)가 이탈리아 통일 운동(Risorgimento, 1750-1870)을 완성하여, 1860년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이탈리아어 Vittorio Emanuele II; 영어 Victor Emmanuel II , 재위 1861-1878, 1820-1878)에게 근대 통일 이탈리아 국가의 통치를 넘긴다. 에마누엘 2세는 당해 오컬트 바티칸 교주의 근위대를 격퇴한 후 로마와 라티움(Latium)을 제외한 모든 교주의 영토를 점령하고, 1870년엔 교주의 영토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고 무력으로 침공해 점령한다. 당시 비오 9세는 강력하게 저항하지만, 이때부터 교황은 바티칸의 포로로서 살아야만 했다

 

비오 9세는 오컬트 바티칸의 멸망을 막기 위해 제1차 바티칸공의회(라틴어 Concilium Vaticanum Primum; 영어 The First Vatican Council of 1869-1870)를 개최하며, 1870년 영국성공회가 만들어낸 킹 제임스 성경은 오류투성인 것을 전 세계에 전파하기 위해 교황 무류성’(無謬性; 무오성無誤性; 라틴어 infallibilitas; 영어 Papal infallibility)을 선언한다.

 

그리고 비오 9세는 예수회를 영국에 보내 1870년 영국 국교회 협의회로 하여금 킹 제임스 성경의 개정판(a revision of the King James Bible)을 만들 것을 결정하도록 유도하고, 엉터리 킹 제임스 개정판’(Revision of the King James Bible. 1881 신약, 1885 구약, 1895 외경)이 탄생하며, 영국 성공회는 완전히 바티칸의 노예가 된다.

 

이렇게 기독교를 말살시키는 가운데 캐나다의 천주교화가 시작된 것이다. 천주교세력들이 운영하는 기숙학교에선 천주교교리주입과 백인동화정책을 실시하며, 이에 저항하거나 도망치려는 어린이나 청소년을 구타, 신체적 및 성적 학대 등 가혹 행위를 행했고, 그러다가 그들이 죽을 경우 가족에게 알리지도 않고 암매장했다.

 

캐나다 원주민 단체가 땅속을 볼 수 있는 레이더를 이용한 수색을 통해 오컬트 바티칸의 극악무도한 만행을 폭로하였다.

 

쥐스탱 트뤼도 총리는 어둡고 부끄러운 역사라며 공식 사과하고, 식민지 시대 과오를 기억하고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한 법정 공휴일(930)도 지정했고, 626일 프란체스코 교주에게 캐나다에 직접 와서 교회의 잘못에 대해 사과해 달라고 요구하며, 전세계의 천주교화를 거부하는 기독교계의 저항을 무마시키고 있다.

 

그런데 올 71일 캐나다 주의회 앞에 설치된 영국 빅토리아 여왕(Queen Victoria, 재위 1837-1901, 1819-1901) 동상과 현 엘리자베스 2(Elizabeth II, 재위 1952-, 1926-) 여왕의 동상이 쓰러지면서, 오컬트 바티칸은 자신들의 책임을 영국에게 떠넘기는 교묘한 작전을 성공시키고 있다.

 

6. 종합

 

요한 바오로 1(라틴어 Ioannes Paulus PP. I; 이탈리아어 Papa Giovanni Paolo I; 영어 Pope John Paul I, 재위 1978.9.3.-1978.9.28., 1912-1978)는 독살당하여 25일간의 오컬트 바티칸 교주직을 마감하였다. 교황청에서는 심장마비에 의한 것이라고 사인을 발표했지만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 이유로 첫째, 사인 진단과 부검상의 의문점이다. 요한 바오로 1세의 개인 주치의는 안토니오 다 로스 박사로 바티칸과 멀지 않은 곳에 머물고 있었는데, 교화청에서 요한 바오로 1세의 죽음을 발견하자마자 주치의가 아닌 다른 의사인 레너드 부조네티를 부른 것이다. 둘째로 클레멘스 14세와 비오 8세 등 두 명의 교황을 부검한 전례가 있었지만 요한 바오로 1세의 부검은 거부했다. 셋째로 장의사가 929일 오전 8시경 도착해 요한 바오로 1세의 시신을 수습했는데, 교그 시신엔 온기가 남아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교황청이 928일 밤 11시에 사망했다고 발표하여, 교황청 스스로가 요한 바오로 1세의 죽음을 조작하였다고 증언한다. 넷째로 평소 요한 바오로 1세는 책을 읽을 때 안경을 벗는데 사망 당시 책을 들고 안경을 쓴 채 발견됐다. 다섯째, 요한 바오로 1세의 침대에는 위급상황에 쓰이는 약이 있었는데도, 이를 사용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천주교불가지론자’(Catholic agnostic)로 부르며, 주로 미스터리 범죄를 다룬 영국작가 데이비드 얄롭(David Anthony Yallop, 1937-2018)신의 이름으로?’(In God's Name: An Investigation Into the Murder of Pope John Paul I, 1984)라는 제목의 책은 요한 바오로 1세의 죽음에 대해 소상히 밝혀주고 있는데, 요한 바오로 1세는 극약물에 의해 암살당한 것이라고 폭로한다.

 

이와 같이 오컬트 바티칸과 천주교도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침해하거나 저항하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독살하거나 암살시키기 때문에, 이들에게 있어서 범천주교세력에 들지 않는 자들의 생명은 파리 목숨에 불과할 뿐이다.

 

성경은 오컬트 바티칸과 천주교도들의 정체를 다음과 같이 밝힌다.

 

“44.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개역한글. 요한복음 8:44)

“44.Ye are of your father the devil, and the lusts of your father ye will do. He was a murderer from the beginning, and abode not in the truth, because there is no truth in him. When he speaketh a lie, he speaketh of his own: for he is a liar, and the father of it.”(KJV. John 8:44)

 

“13.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14.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15.그러므로 사단의 일군들도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개역한글. 고린도후서 11:13-15)

“13.For such are false apostles, deceitful workers, transforming themselves into the apostles of Christ. 14.And no marvel; for Satan himself is transformed into an angel of light. 15.Therefore it is no great thing if his ministers also be transformed as the ministers of righteousness; whose end shall be according to their works.”(KJV. 2 Corinthians 11:13-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