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와 정의의 나라/신학 이야기

‘RSV Bible은 기독교 변증가요 독립 운동가이자 애국자인 죽산 박형룡 박사를 두려워한다’ YouTube!!!

아우구스티누스 2020. 12. 16. 06:20

‘RSV Bible은 기독교 변증가요 독립 운동가이자 애국자인 죽산 박형룡 박사를 두려워한다YouTube로 올렸다.

 

독자 여러분께서 구글의 검색에 함시영 목사를 기입하면 함시영 목사 관련 이미지가 나타나고, 그 위에 검색결과(함 목사 강의 분야별로 정리)를 참조하면 위의 강의를 듣고, 기독교와 오컬트 바티칸의 천주교의 차이점은 물론 철학과 타종교와도 비교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필자가 그 동안 강의한 내용도 시청할 수 있다.

 

오컬트 바티칸 추종자들인 웨스트코트(Brooke Foss Westcott, 1825-1901)의 더럼주교(Bishop of Durham, 1890-1901) 그리고 아일랜드 출신의 케임브리지 대학교 교수 F. J. A. 호르트(Fenton John Anthony Hort, 1828-1892) 박사가 1611년의킹 제임스 성경’(The King James Version, 약칭 KJV/The King James Bible, 약칭 KJB),‘흠정역’(欽定譯; Authorized Version, AV)을 추방시키는 동시에 영국성공회를 오컬트 바티칸의 노예로 전락시키기 위해, 고등비평의 시각으로 재단한 오역투성이인영어개역성경’(English Revised Version. RV, 신약 1881, 구약 1885, 외경 1895) 세상에 내놓듯이, 오컬트 바티칸의 첩자 필립 샤프(Philip Schaff, 1819-1893)도 웨스트코트와 호르트의 간계를 모방하여 ASV Bible(The American Standard Version , The American Revised Version. 신약 1900, 신구약 1901)를 발행해 여호와증인이 자체의 경전을 제작하기 전인 1960년대까지 사용하는, 곧 이단의 도구로 전락하고, 잘 팔리지 않자, 미국은 또 다시이것을 오역해 RSV Bible (신약 1946, 구약 1952, 외경 1957)를 내놓아, 특히 구약의 이사야 7:14의 히브리어 알마’(עַלְמָה almāh)동정녀’(a Virgin)로 번역한 킹 제임스 성경을 비판하기 위해 젊은 여성’(a young woman)으로 해석해 놓았는데, 구약의 발행연도가 1952년이고, 이 해는 대한민국 장로교도 이사야 7:14의 해석문제로 갈등의 시기였다.

 

결국 RSV는 기독교 변증가요 독립 운동가이자 애국자인 죽산(竹山) 박형룡(朴亨龍, 1897-1978) 박사를 두려워하여, ‘역사적 비평적 방법’(the historical-critical method)인 고등비평(higher criticism: 하등비평lower criticism 인 본문비평textual criticism과 달리, 고등비평은 성경본문에 내재하는 증거들을 찾아내어 성경문서의 형성사와 그 역사적 가치를 이해하려는 관심과 목적을 의미)의 성경관을 갖고 기독교를 분열시키고 국가의 존재를 멸하기 위해 진력한 반() 정부 시위자 장공(長空) 김재준(金在俊, 1901-1987)과 더불어 정통 복음주의 기독교세계에서 추방당해, 영원히 오컬트 바티칸의 노예로 전락했다.

 

그러면 죽산 박형룡 박사를 통해 그러한 사유를 살펴보자.

 

1. 신앙

 

죽산 박형룡 박사는 미국 북장로교에서 파송한 선교사들의 선교지역인 평안북도 벽동의 출신으로 김익두(金益斗, 1874-1950: 황해도 출신으로 1906년 평양신학교에 입교하여 19103회로 졸업) 목사의 설교를 듣고 실존적 결단을 하고, 자기의 고향 백동교회에서 예수천당의 종최권능(본명 최봉석崔鳳奭, 1869-1944: 1907년 평양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와 동시에 1897년 북장로교 선교사로 내한한 시릴 로스Cyril Ross 1868-1963, 盧世永1902년부터 담임하고 있는 벽동읍교회에 조사助事로 부임하였다. 7년 만에, 19136월 제 6회로 평양장로회신학교졸업)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위에서 보듯이 죽산은 정통 복음주의 기독교사상의 세례를 받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였다.

 

2. 국내학력과 항일운동

 

(1) 16세인 1913-19세인 1916 동안 죽산은 평안북도 선천군 선천읍에 설립한 기독교 중등 사립학교인 신성학교(信聖學校)를 다녔다.

 

신성학교는 선천 지역의 조선인 기독교 지도자 및 미국 북장로교 선교회의 협력에 의해 19069월 설립하고, 19429월 선천중학교로 개칭하였으며, 1980년 경기도 안양시에서 안양 신성중고등학교로 재건하였다.

 

신성학교는 1911‘105인 사건’(百五人事件)과 깊은 관계를 갖조 있다. 이 사건에 대해 개략적으로 살펴보겠다.

 

안중근 토마스의 사촌 아우인 안명근 야고보가 191012월에 서간도에 무관학교 설립을 위한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면서, 프랑스인 니콜라 빌렘(조선명 홍석구) 신부를 찾아가, 1916-1918 동안 일본의 제18대 내각총리대신을 지낸 초대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内 正毅, 1852-1919) 암살하겠다고 고해성사를 하니까, 그 내용을 종현 성당(현재 명동성당) 뮈텔 주교에게 서신을 통해 알리고, 뮈텔은 4년 동안 해결치 못한 성당의 부지 문제를 종결시키기 위해, 안명그느이 고해성사의 내용이 담긴 비밀 편지를 아카시 장군에게 전달한다. 조선 총독부는 1907년 초에 안창호 이동녕 이승훈 등이 조직한 항일단체, 비밀결사였던 신민회(新民會)를 해체하고 기독교계 항일세력을 통제하기 위해 시도한 축출작업을 말한다.

 

지면 관계상 105명 가운데 한 분인 길진형(吉鎭亨, 1891-1917) 애국자에 대해서만 언급하겠다. 그는 1907년 장로교가 배출한 최초의 조선인 목사 7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한국의 사도 바울이라고 일컫는 길선주(吉善宙, 1869-1935) 목사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길 목사가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시무하였기 때문에 그 영향으로 평양 숭실중학교에 입학해 1907년 제4회로 졸업하였으며, 20세 때인 1911년 제3회로 숭실대학교를 졸업하였다. 졸업 후 선천의 신성학교의 교장으로 있던 매큔(George Shannon McCune, 윤산온 尹山溫 1872-1941)의 추천으로 신성학교에서 수학과 성경을 가르치는 교사로 활동하였다. 16세 때인 1907신민회에 가담해, 1911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3년간 복역하였다. 일경의 감시와 통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1913년 미국으로 건너가 안창호 등과 함께 민족운동을 하다가 고문의 후유증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1916년 귀국, 이듬해, 26세 때인 1917년에 서거한다.

 

그러면 ‘105인 사건에 대한 미국 북장로교에서 파송한 선교사들의 반응을 살펴보자.

 

평양신학교(平壤神學校)의 교장(1907-1924)으로 은퇴할 때까지 1000교회와 3백여 학교가 설립되며, 평양을 한국의 예루살렘과 학문의 중심지로 변화시킨 새뮤얼 오스틴 모펫(Samue Austin Moffet, 조선이름 마포삼열馬布三悅, 1864-1939) 중심으로, 신성중학교 2대 교장(1909년 취임) 조지 섀넌 매큔(George Shannon McCune, 조선이름 윤산온 尹山溫, 1873-1941: 토머스 우드로 윌슨Thomas Woodrow Wilson, 1913-1921, 1856-1924민족자결주의Principle of National Self-determination’을 학생들에게 주입시킨 동시에 19193.1혁명에 영향을 미쳐 19212월 추방되고, 1928년 다시 조선에 오지만, 신사참배반대로 1936년 또 다시 추방됨), 올리버 R. 에이비슨 (Oliver R. Avison, 조선이름 어비신魚丕信, 1860-1956: 영국계 캐나다의 선교사. 1890년 토론토 의과대학 Univerasity of Toronto Medical School을 졸업하고 약학대학 College of Pharmacy에서 강의를 했다.18929월 선교 모임에서 만난 언더우드 선교사로부터 해외 선교의 제안을 받자 교수직을 사임하고 미국 장로회 해외선교부의 의료 선교사가 되어 18937월 임신한 부인 및 세 자녀와 함께 부산에 도착한다. 제중원의 제4대 원장, 1916-1934 동안 연희전문학교 및 세브런스의과전문학교의 교장을 역임하면서 오늘날 연세대학교의 기틀을 마련하고 1935년에 퇴직하면서 12월 조선을 떠남) 선교사 등과 함께 이 사건이 당시의 조선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에게 이 사건은 날조된 사건에 불과한데, 고문 등 비인도적 방법을 자행하고 있다 하여 항의한 동시에 미국의 장로회 본부에 일제의 만행을 보고하여 국제여론을 환기시키는 데 힘썼다.

 

모펫 선교사는 신앙관(하나님사랑)과 국가관(이웃사랑)이 뚜렷한 위대한 인물이었다. 그가 기미만세사건이 일어난 다음해 19204월 동아일보에 기고한 글은 그의 신앙관과 국가관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 그 내용을 일별해보자.

 

금일 조선에 가장 유망한 점은 조선백성이 에수 그리스도의 복음전도에 호응함이니 그리스도의 복음은...독립적 정신을 가지게 하며...백성의 복리를 위하여 노력하며, 정의를 위하여 튼튼히 설지라.”

 

복음과 항일운동의 모판인 신성학교는 연세대학교 초대 총장을 지낸 백낙준(白樂濬, 2대 문교부장관 1950-1952, 1895-1985), 정암(正岩) 박윤선(朴允善, 1905-1988) 목사, 충현교회의 김창인 목사 등을 배출하여, 대한민국의 현대사에 기여하였다.

 

(2) 19세인 1916-23세인 1920년 동안 죽산은 평양 숭실대학(1897-1925숭실대학, 1925-1938숭실전문학교, 1954-1971숭실대학, 1971-1987숭전대학교, 1987-현재 숭실대학교로 이름이 변경)에서 수학하고, 졸업반시절 191931일 혁명에 동참하여, 일본 헌병경찰에 연행되어 고초를 겪고, 1920년 대학을 졸업한 뒤에 숭실전도대의 일행으로, 목포에서하늘의 검으로 설교했는데, 일본헌병경찰이 그 내용을 듣고, 반일감정을 부추긴다고 우기며, 재판을 받게 해, 죽산 학생은 목포감옥에서 10개월간의 수감생활을 겪는다.

 

3. 국제학력(문학과 칼뱅신학, 기독교변증)

 

(1) 일제의 블랙리스트에 올라 미국 유학을 곧 바로 갈 수 없어, 죽산은 중국을 경유해 가려고, 일단 24세인 1921-26세인 192년 동안 중국의 금릉대학(金陵大學)에서 수학하며, 문학사 학위를 취득한다.

 

(2) 26세인 1923-29세인 1926년 동안 칼뱅신학의 산실인 미국 뉴저지의 프린스턴 신학교(Princeton Theological Seminary, PTS: 1812년 세워진 미국 장로교 신학교로 미국장로교Presbyterian Church USA, PCUSA산하 교육기관)에서 신학사(Th. B)와 신학석사(Th. M) 학위를 동시에 취득하고, 30세인 19279켄터키주 루이빌에 있는 남 침례교 신학교(The South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 SBTS, in Louisville, Kentucky: 1859년에 설립)에 입학해 32세인 1929박사과정을 마친다. 1932년 봄 남 침례교 신학교에서 죽산은 기독교 변증학(자연과학으로부터의 반()기독교적 유추Anti-Christian Inferences from Natural Science)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한다.

 

4. 귀국(결혼과 목사안수)

 

1929년 귀국하여 산정현교회(19061월 평양 장대현교회章臺峴敎會에서 분립하여 평양의 닭골鷄洞산정현에 세워진 장로교회)에서 교육전도사를 역임하고, 33세인 19304월 장로회평양신학교임시교수가 되며, 19305월 결혼하고, 19314월 전임교수가 되면서, 산정현교회에서 평양노회로부터 목사안수를 받는다.

 

5. 성경관

 

죽산의 성경관은 디모데후서 3:16-17에 입각한언사적言辭的, 또는 언어적言語的(사상과 문자는 불가분적으로 상호 연결이 되어 있음)-유기적(하나님은 성경 기자들을 기계적 방식으로 사용치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 기록시키려는 단어들을 그들의 귀에 불어넣지 않으셨고, 오직 그들의 성격, 성벽, 재능, 교육, 수양, 용어, 문체 들을 있는 그대로 사용하신 유기적 작업이다. 열왕기상 11:41, 4:29, 역대상 29:29, 누가복음 1:1-4는 기계적 영감설을 부정)-완전 영감설(성경은 하나님 말씀이 되거나 하나님 말씀을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이다)’(Verbal-Organic-Plenary inspiration)이다.

 

그런데 대한민국 기독교는언어적 영감’(verbal inspiration)축자(逐字)영감’(verbatim inspiration)으로 오용했으며, 이것은 지적수준의 한계를 보여준다. 장공 김재준도 이런 용어를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지적 능력이 매우 빈곤해, 죽산의 성경관에 대하여 그릇된, 아주 혹독한 비판을 가한다.

 

그리고 장공이 비평적인 시각으로 성경을 난도질했다면, 죽산은 성경을 상삼위 하나님을 대하듯 경외와 변증자세로 대했다. 성경에 대한 죽산의 사상은 다음과 같은 단어가 대변한다. “성경엔 증명된모순’(contradiction)이나 오류’(error)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인간의 이성을 뛰어넘는난제’(Bible difficulties, hard sayings)만 있을 뿐이다

 

6. 종합

 

성경은 하나님 말씀이다라는 세례를 받은 죽산의 삶은 자유가 있되 책임을 요구하는 자유민주주의 그리고 건전한 물질관과 건강한 노동관에 기초한 자본주의, 자유 시장경제주의를 실천했다.

 

그는 학문을 통해 기독교를 변증하고, 조선의 독립과 대한민국의 수호에 열정을 바친 동시에 당시 조선의 조혼과는 달리 평양 신학교 교수된 후에 결혼을 했을 정도로 경제적 책임감도 뛰어났다.

 

이에 반해 장공은 19193.1혁명 이후인 20세 때인 1921년 송창근(이동휘의 제자)의 인도로 기독교를 접하고, 그 후23세 때인 1924년 회심했을 정도로 성경의 무지한 상태에서 25세 때인 1926년 자유주의산실인 일본에서 신학을 했다. 성경에 대한 기초 지식 없을 뿐더러, 미국 유학을 통해 성경을 난도질하는 가라지의 신세로 전락하였다. 그에겐 처음부터 성경에 대한 사랑이 없었기 때문에 항일정신이 부재하였다.

 

오히려 5.16이후 3개월째인 19619, 장공은 대학총학장 연령제한을 60세로 한다는 군사혁명정권의 일방적 지시하달로 인하여, 졸지에 한국신학대학 학장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자신의 밥 그릇이 사라지자, 그 때부터 반정부 시위자가 된다. 33녀 가운데 1969년 두 아들이 캐나다로 이민가고, 2녀는 이미 캐나다에서 상주하자, 1969‘3선개헌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 위원장’, ‘국제 앰네스티 한국위원회 이사장’(1972), ‘민주수호국민협의회 공동의장(1973)의 역할을 하면서, 제자 장준하와 함께 오컬트 천주교 신자 김대중 대통령 만들기 위한 오컬트 전라도 광주 출신 (부계) 김수환 전 추기경의 프로젝트에 걸려든다.

 

RSV Bible은 이런 사실 때문에 기독교 변증가요 독립운동가이자 애국자인 죽산 박형룡 박사를 두려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