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공 김재준의 교회와 국가’를 YouTube로 올렸다.
독자 여러분께서 구글의 검색에 ‘함시영 목사’를 기입하면 함시영 목사 관련 이미지가 나타나고, 그 위에 검색결과(함 목사 강의 분야별로 정리)를 참조하면 위의 강의를 듣고, 기독교와 오컬트 바티칸의 천주교의 차이점은 물론 철학과 타종교와도 비교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필자가 그 동안 강의한 내용도 시청할 수 있다.
또 하나의 방법은 ‘김영일한국종교문화원원장’youtube를 통해서도 시청할 수 있다.
당시 조선청년 김재준이가 일본과 미국 유학을 했다는 것은 유학이라는 단어자체만으로 그는 촉망받는 지도자 그룹에 속한다는 사실을 증언한다.
그런데 김재준 평가엔 다소 허세와 과장의 그림자가 짙게 깔려 있다. 그는 자신의 나이 19세가 되는 해이자, 3.1혁명이 일어난 다음 해인 1920년 만우(晩雨) 송창근(宋昌根, 1898-1951) 박사의 인도로 김재준은 기독교를 접하고, 다니던 직장(옹기금융조합)을 그만두고 19세에 한성(漢城)에 와 3년을 지내면서 신문화, 특히 YMCA영어학교에서 알파벳 수준의 영어를 접하고, 23세 때인 1924년 승동교회(현재 합동소속)에서 개최된 서울장로교연합사경회의 김익두 목사 창세기 1:1의 설교를 듣고 회심한다.
그는 회심의 사건을 분명히 말하지만, 1900년에 출판된 신약과 1911년에 간행된 신구약성경을 읽었다고 고백하지 않는다.
신앙연륜도 매우 짧고 성경에 대한 무지 상태로 만우 송 박사의 권면대로 일본과 미국의 유학을 떠난다. 그는 1926-1928년 감리교계통의 진보주의신학의 산실인 아오야마학원에서 신학을 접하지만, 정규학생이 아니라 청강생신분이었고, 게다가 중노동하며 이 신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오컬트 바티칸이 정통복음주의기독교를 말살시키려고 창안한 성경난도질(성경비평학)에 대해 어렴풋이 눈뜨고, 미국 프린스턴신학교의 생활(1928.9-1929.9)도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세미나식의 신학공부에 손들고, 그저 수료수준, 곧 영어훈련시간으로 보낸다. 그 후 장로교계통의 진보주의의 산실인 웨스턴신학교(1929.9-1932.5)에서 수학하여, 영어도 능숙하지 못한 상태에서 매우 짧은 기간 동안 신약사(논문: ‘출애굽 연대에 대한 고찰’)와 신약석사(논문:‘오경비판과 주전 8세기 예언운동’) 학위를 받고 1932년 5월 귀국한다.
그는 성경을 일독조차 하지 않는, 초보적인 수준의 성경 지식도 갖추지 않은 상태에서, 오컬트 바티칸이 만들어 놓은 성경난도질의 덫에 걸린 범바티칸주의자가 된다.
이러한 사실을 감안하며 장공 김재준의 교회와 국가관에 대해 살펴보자.
1. 교회
(1) 평양 숭인 상업학교 교목과 성경교사(1933.4-1936)
장공은 일제강점기의 조선청년으로 미국에서 신학사와 신학석사 학위를 받았다는 자부심에 의기양양하게 귀국하며, 초창기의 조선 기독교를 옹호하기 보다는 성경난도질의 깐죽거림에 매진하다가, 일반학문과 정통신학사상으로 무장한 죽산(竹山) 박형룡(朴亨龍, 1897-1978)의 기독교변증의 테스트에 걸려, 평양신학교의 교수팀에 합류하지 못하고 영원히 아웃사이더의 운명이 되어,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와 독립운동가가 세운 학교에서 어린 학생들에게 오컬트 바티칸의 성경관인 독초를 먹이는데 대 성공하며, 훗날 이들이 자라나 범바티칸주의자가 되며, 성경을 난도질하며 정통복음주의기독교의 분열에 앞장선다.
평양신학교(平壤神學校)의 교장(1907-1924)으로 은퇴할 때까지 1000교회와 3백여 학교가 설립되며, 평양을 한국의 예루살렘과 학문의 중심지로 변화시킨 새뮤얼 오스틴 모펫(Samue Austin Moffet, 조선이름 마포삼열馬布三悅, 1864-1939)은 평양널다리교회를 세우는데, 그 이름이 평양중앙교회, 그 후엔 장대현교회(1907년 평양대부흥회)로 변경된다. 그 장대현교회에서 남문외교회, 서문외교회, 사창골교회, 산정현교회, 연화동교회, 명촌교회가 나온다. 이 7교회와 모펫선교사 그리고 독립운동가들이 주체가 되어 남학교인 숭덕(모펫주도), 숭인상업(설립허가의 용이성을 위해 ‘숭인’에서 ‘숭인상업’으로 변경하여 조만식 주도로 설립되었으며, 유일한 조선인 운영), 여학교인 숭현(모펫주도)이 설립된다.
당시 진보주의산실인 캐나다장로교계통의 선교사들과 교제를 나누던 장공은 미국 북장로교계통의 모펫선교사의 주도로 설립된 숭덕이나 숭현에서 활동하지 못하고, 조선인이 유일하게 운영하고 있던 숭인상업학교에 근무함으로써, 오컬트 바티칸의 독초을 먹은 자신의 성경난도질을 은밀하게 감출 수 있었다.
(2) ‘신학지남’의 정규 기고자(1933-1935.5)
장공은 남궁혁(南宮爀, 1881-6·25전쟁 당시 납북)(14살 때인 1895년 배재학당에 입학해 1900년 졸업하고, 36세 때인 1917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921년 신학교 졸업. 남장로회 선교사들의 주선으로 미국에 유학, 41세 때인 1922년 프린스턴신학교Princeton Theological Seminary 3학년생으로 편입한다. 1년 만에 졸업한 뒤 대학원에 진학, 1924년 신학 석사학위를 받는다. 같은 해 장로교계통의 버지니아 리치먼드 유니온 신학교<Union Theological Seminary in Virginia. 1812년에 설립되었고, 뉴욕에 있는 유니온 신학교와 이름이 동일해 2009년에 유니온 장로교 신학교Union Presbyterian Seminary으로 변경> 박사과정에 입학하여, 1년 과정만 마친 채 1925년 귀국과 동시에 평양신학교 최초의 한국인 신약학 교수로 임명되고, 귀국 후 박사학위 논문을 유니온 신학교에 제출한 후, 1929년 한국인으로 최초의 신약학 전공, 신학박사학위를 취득한다. 1928년부터 ‘신학지남’의 편집장으로 활동) 박사의 배려로 ‘신학지남’(神學指南)의 정규 기고자가 된다.
‘신학지남’(神學指南)은 1918년 3월, 호주 빅토리아장로회 해외선교부 선교사 겔손 엥겔(Gelson Engel, 왕길지王吉志, 1864-1939: 독일출신으로 호주출신 아내와 결혼하여 호주에 거주하다가 1900년 내한하여 부산에서 선교사역을 재개하다가, 1906-1937 31년간 평양신학교 교수로서 성서원어와 교회사를 강의하며, 성경 개역 작업에도 참여하였다. 엥겔은 1937년 은퇴한 후에 호주로 돌아가 멜버른에서 요양하다가 2년 후 별세)이 창간한 장로교단 신학연구지로, 그 의미는 장로교회의 목사와 신학생들에게 정통신학을 가르치거나 가리켜 지시(指南)하려는 목적으로 창간되었으며, 초기 10년간 서양선교사들에 의해 편집운영되다가, 1928년 이후, 평양신학교 교수 남궁혁 빅사가 편집장을 맡았다.
장공은 짧은 신앙과 신학훈련으로 오컬트 바티칸의 성경난도질 계획에 걸려들어, 초창기의 조선교회를 양육하여 성장시키기 보다는 구미 신학계의 연구경향을 소개한다는 빌미로 구약에 역사적 비평적 방법인 고등비평을 적용한 8편의 논문을 기고하였는데, 무엇보다도 1934년 1월호에 기고한 ‘이사야의 임마누엘 예언연구’의 논문은 구약성경 이사야 7:14의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개역한글)는 내용을 주석한 것이었다. 여기서 장공은 ‘동정녀’라는 단어가 ‘방년의 젊은 여자’를 가리키는 히브리어 ‘엘마’를 번역한 것으로, 반드시 생물학적 의미의 동정녀라고 옮길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또한 ‘잉태’를 가리키는 히브리어 ‘히라’는 히브리어의 상태 동사 ‘하라’의 분사형태이기 때문에, ‘엘마’의 형용사 역할을 하는 것이라 했다. 즉, “잉태한 방년의 젊은 여자가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는 번역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임마누엘이 원래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 것이 아니라 후대의 신약성경 기자가 덧붙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에 대해서 필자는 지난 2일‘RSV Bible은 정통 복음주의 기독교의 분열을 초래하였다’에서 충분히 논했기 때문에 생략하고, 단 하나만 지적하겠다.
장공은 외국어에 대한 이해의 폭이 좁다. 그 이유는 한정적인 용법일 경우 한국어로 번역할 때 서술적으로 옮기는 것이 훨씬 좋다. 학문적으로 장공식의 해석을 존중할 경우, “잉태한 방년의 젊은 여자가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보다는 “방년의 젊은 여자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가 보다 잘 이해할 수가 있다.
신학지남 편집위원이었던 죽산 박형룡 박사는 기독교 변증가로 장공의 신학을 용납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장공에게 관용을 베풀며 집필의 기회를 주었던 남궁혁 박사도 장공의 신학을 우려했다. 결국 장공은 1935년 5월호를 끝으로 신학지남에 더 이상 기고 할 수 없게 되고, 1937년 5월 독자적인 잡지 ‘십자군’을 창간한다. 일제의 규제로 일 년도 못돼 폐간되었다가 1950년 속간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오컬트 바티칸의 킹 제임스 성경난도질에서 태어난 RSV의 이사야 7:14는 장공의 해석을 담았다. 실상 RSV의 등장(신약 1946, 구약 1952, 외경 1957)은 대한민국의 장로교에게 쓰라린 아픔을 선사했다. 그것은 김재준 목사파면(1952년 총회가 경기노회에게 일임, 1953년 총회파면결정, 1954년 기장설립)이다.
그리고 1934년 12월에 신생사(新生社)에서 출판된‘아빙돈 성경 주석’(The Abingdon Bible Commentary) 사건으로 여기에 동참한 장로교 목사, 곧 채필근, 송창근, 한경직, 김재준 등이 이단 시비에 휘말려 곤욕을 치른다.
이 사건의 개요는 이렇다. 미국 감리교회 출판국이었던 아빙돈 출판사에서 성서고고학과 성서비평학을 수용하여 다양한 교단의 66명의 학자들이 복음적으로 저술한‘아빙돈 성경 주석’을 1930년에 출판사 아빙돈(Abingdon)에서 출판한다. 조선 선교 50주년을 기념하여 미국의‘아빙돈 성경 주석’을 감리교회 교육국 총무였던 유형기(柳灐基,1897-1989. 평안북도 영변에서 출생했다. 배재학당을 거쳐서 평양의 숭실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 유학하여 아오아마학원에서 수학했다. 다시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1923년 오하이오 웨슬리안 대학교 문학부를 졸업하였고, 1926년과 1927년에는 보스턴 대학교 대학원과 하버드 대학교 대학원을 각각 졸업했다. 미국 유학 중 이화학당 출신의 유명한 신여성으로 유관순의 스승이기도 했던 신준려와 만나 결혼. 1948년에는 재건된 감리교신학대학교 제9대 교장에 취임해 1953년까지 재직) 목사가 편집책임자 주도로 52명의 신학자와 목회자들이 참여하여 번역하여, 1934년 12월에 신생사(新生社)에서 출판한다.
이 주석에 대해 길선주 목사는 진보주의 신학자의 진보주의 사상이 장로교단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하여 한다고 하자, 평양신학교 교수 죽산 박형룡 박사도 이 주석이 고등비평의 기초위에 계시의 역사를 종교적 진화로 해석하며 성경을 파괴하고 있다고 동조하며, 장로교회와 감리교회와의 신학적 대립이 표면화한다.
이에 채필근은 재빠르게 사과의 성명을 발표하나, 송창근, 김재준, 한경직은 묵묵히 숨을 죽이며 기회를 엿본다. 몇 달이 지나자 장로교회 측에서‘신학지남’의 편집책임자인 남궁혁 박사에게 압력을 행사하며 이 세 사람을 집필진에서 빼라고 명령한다. 이에 남궁혁 박사는 세 사람에게 사과의 성명서를 요청하고, 이 들은 공동명의로 성명서를 써서‘신학지남’에 보낸다. 그 내용의 개략은 다음과 같다. “자신들이 쓴 주석에는 문제되는 것이 없지만, 이 때문에 교회가 소란하게 된 점은 유감으로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3) 북간도 용정 은진중학교 교목과 성경교사(1936.8-1939)
위의 두 사건으로 장공 김재준은‘신학지남’의 정규기고자의 생명이 끝나고, 1936.8-1939년 동안 북간도 용정 캐나다장로교계열 은진중학교(恩眞中學校) 교목과 성경교사를 하며, 그 곳에서 당시 학생회장이었던 강원용, 2학년생 안병무, 문동환 등을 만난다. 문익환과 윤동주는 학교를 떠났지만, 이들이 후에 장공의 제자로서 기장과 한신대에서 주요역할을 한다.
오컬트 바티칸의 성경난도질의 부추김에 휘말려 장공은 자신의 목사직에서 제명 그리고 예장과 기장의 분열의 아픔을 겪는다.
2. 국가
(1) 공산주의수용
1945년 8월 해방이 되자마자 김재준은, 제자들로 구성된 선린형제단 집회에서 ‘기독교의 건국이념’이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강연을 한다.
“우리는 우선 신앙과 예배의 자유, 사상 언론 집회 출판의 자유, 개인양심의 자유를 확보하는 정부만 수립하면 감사할 것이다. 우리는 당면한 문제로 소위 공산주의 운동을 몹시 우려하는 경향이 있음을 잘 안다. 그러나 그것이 사회과학으로 경제기구의 실상을 검토하며 더 좋은 재건을 기획하는 점에 있어서 존경할 것이며 그것이 사회과학적 입장에서 객관적 사실을 드러낸 것인 한 우리는 그것을 수락할 의무가 있다. (중략) 즉 상술(上述)한 제 자유만 확보한다면 공산주의 기타 여하한 정부라도 조선의 현실에 비추어 우선 감사히 수락한다.”
(2) 반정부시위
5.16이후 3개월째인 1961년 9월, 장공은 대학총학장 연령제한을 60세로 한다는 군사혁명정권의 일방적 ‘지시하달’로 인하여, 졸지에 한국신학대학 학장직에서 물러나게 되고, 자신의 밥그릇이 없어지자 그 때부터 반정부 시위자가 된다.
1969년 두 아들이 캐나다로 이민 가고, 두 딸도 1969년 이전 이미 캐나다로 이민 간 상태로 가족의 안위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어지자, 곧 당해 1969년 ‘3선개헌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 위원장’을 비롯해 감투를 쓰기 시작한다.
자신도 1974년 캐나다로 이주한다. 그 곳에서 반정부시위를 한다.
실상 장공의 반정부시위는 오컬트 천주교 신자 김대중 대통령 만들기 위한 오컬트 전라도 광주(부친계열) 출신 김수환 전 추기경의 프로젝트에 걸려든 것이다.
그래서 장공은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하라”(마태복음 5:37)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예’와 ‘아니오’를 분명히 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자신의 반정부시위를 민주화운동인 것처럼 가장한다.
3. 종합
장공이 ‘신학지남’의 기고한 논문과 ‘아빙돈성경주석사건’으로 1947년 4월 총회에서 조선신학교 학생의 ‘51인 신앙동지회의 진성서’가 제출되고, 그 여파로 1952년 4월 총회가 경기노회에게 김재준 목사직을 면직하도록 결의하게 하고, 경기노회소속의 장공을 추종하는 목사들의 거센 반대에 부닥치자, 1953년 4월 총회에서 김재준의 파면을 결정한다. 그리고 1954년 기장이 설립된다. 2016년 통합은 ‘고 장공 김재준 목사제명 결의’철회공문을 전달하는 해프닝을 일으키며, 자신들도 기장처럼 오컬트 바티칸의 노예에 불과한 존재임을 세상에 선언한다.
장공의 성경난도질은 결국 공산주의수용을 낳고, 그의 반정부시위는 오컬트 천주교 신자 김대중 대통령 만들기 위한 오컬트 전라도 광주(부친계열) 출신 김수환 전 추기경의 프로젝트로 변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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