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비판의 길을 걸어간 장공 김재준의 정체성’을 YouTube로 올렸다.
독자 여러분께서 구글의 검색에 ‘함시영 목사’를 기입하면 함시영 목사 관련 이미지가 나타나고, 그 위에 검색결과(함 목사 강의 분야별로 정리)를 참조하면 위의 강의를 듣고, 기독교와 오컬트 바티칸의 천주교의 차이점은 물론 철학과 타종교와도 비교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필자가 그 동안 강의한 내용도 시청할 수 있다.
또 하나의 방법은 ‘김영일한국종교문화원원장’youtube를 통해서도 시청할 수 있다.
‘성경비평학’이란 단어는 오컬트 바티칸이 ‘성경을 하나님 말씀이다’라고 믿는 정통복음주의기독교를 말살하려고 만들어낸 단어이며, ‘성경비평학’의 전문가가 되면 신학의 대가로 행세하는 풍토가 조성되어, 현재 정통복음주의기독교는 거의 초토화되어 가고 있다. 그래서 ‘성경비평학’이란 단어는 ‘성경난도질’이란 단어로 대체되어야 한다.
이런 현상은 오컬트 바티칸의 예수회세력들이 미국을 완전히 점령하여, 최종적으로 오컬트 바티칸의 천주교 신자, 노예를 통해 미국을 오컬트 바티칸의 세계로 만들기 위해 기독교인 트럼프 대통령을 차기 대통령으로 선출되지 못하도록 계략을 꾸미고 있다. 실상 트럼프 대통령의 주변 모두 오컬트 예수회회원 그렇지 않으면 오컬트 예수회가 만들어놓은 학교출신들로 채워져 있기 때문에, 성삼위하나님의 은혜가 절실히 필요하다.
장공 김재준도 1870년 오컬트 바티칸이 교주의 무오성을 절대화하고, 정통복음주의기독교의 성경을 상대화시켜 정통복음주의기독교를 말살시키려는 음모의 희생자에 불과하다.
이런 사실을 감안하며 장공 김재준의 성경비판에 대해 살펴보자.
1. 배경
자신을 ‘출애굽 인간’이라고 부르고‘역사 참여’를 강조한 장공(長空: 찬송가 중 “바람과 태양과 구름과 만리의 장공”이라는 구절에서 가져온 것이라는 주장이 있음) 김재준(金在俊, 1901-1987)은 두만강 변 산골인 동시에 조선시대 유배지였던 함경북도 최북단 경흥군 오아지읍 창동에서 2남 4녀 중 막내를 여동생으로 둔 다섯 번째로 태어났다.
2. 문자 읽기
김재준의 외사촌 형님 채규표, 채규홍 등의 주도로 설립된 사립학교인 향동학교에 다니다가 폐쇄되자 일본인이 교장으로 있는 고건원 보통학교를 다닌 후, 12세 때인 1913-15세 때인 1916 함경북도회령간이농업학교(1911년 회령간이농업학교가 설립되었으며, 1918년 경성공립농업학교의 창설로 폐교됨)에 다니지만, 1914년 캐나다 장로계가 설립한 신흥학교에 관심 없을 정도로 무신론자였다.
3. 사회생활
(1) 일본인 상사와의 조우를 통한 항일정신부재
16세 때 향동학교 시절 김재준을 가르쳤던 김희영 선생의 추천으로 함경북도 회령군청 재무부 간접세과 임시직에 취업하였는데, 그의 직속상관인 간접세과 수석 모두 일본인이었지만 차별대우를 받지 않았다고 한다. 일본인이 교장으로 있는 고건원 보통학교 때의 경험이 더해져 그에겐 자연스럽게 ‘항일정신의 부재’가 자리 잡는다.
그의 임무는 주로 세 가지였다. 그것은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양조장관리, 밀주 단속, 담배 무허가 경작 단속 등을 하는 것이며, 범법자를 찾아 상사에게 보고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 경우 20원 벌금을 내야하기 때문에, 그는 죄 없는 자신의 동포 조선인을 범죄자로 둔갑시키는 역할을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그는 결혼하기 전에 일본인 직속상관들을 통해서 음주문화와 섹스문화를 배운다.
일본인들이 술자리나 공창가(公娼街; 윤락가淪落街, 사창가私娼街, 집창촌集娼村, 창녀촌)에 갈 때 꼭 그를 데려가, 그는 타락한 어른 세계를 일찍이 경험한다.
17살 때인 1918년 그는 장석연씨 장녀 장분녀 처녀와 결혼했는데, 아내가 볼 때 자신은 무학이고, 시대적 상황도 그렇고, 남편은 일본과 미국 유학을 거친 지식인이라는 생각이 들자, 장분녀는 어느 날 밤 남편 김재준에게 훌쩍훌쩍 울면서 “당신이 원하면 이혼해주겠다”고 했다고 고백한다. 그런데 김재준은 이혼하지 않고, 아내와 금실 좋은 부부로 해로(偕老)하여 슬하에 3남 3녀(정자, 신자, 혜원, 은용, 경용, 관용)를 둔다.
(2) 1920. 옹기금융조합 근무
3. 만우 송창근과의 만남
만우(晩雨) 송창근(宋昌根, 1898-1951)의 인도로 김재준은 20세에 기독교를 접한다. 송창근를 알면 김재준이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먼저 송창근에 대해 살펴보자.
(1) 배경
송창근은 김재준과 동일한 고향인 함경북도 경흥군에서 장남으로 태어난다. 그는 부친의 사촌 형제 송시명이 세운 북일학교 신학교에서 공부하며 기독교에 접한다. 13세 되던 1911년에는 6세 위인 19세의 김재원과 결혼을 하고, 간도로 건너가 명동중학교와 광성중학교를 세운 교장 이동휘(李東輝, 1873-1935: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로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총리)의 제자가 된다. 이동휘가 독립운동을 위해 시베리아로 떠날 때 송창근이가 자신을 따라가려고 하자, 이동휘는 “너는 본국에 돌아가서 목사가 돼라.”고 하면서 돌려보내고, 송창근은 이동휘의 권면대로 목회자의 길을 걷는다.
(2) 학업
1) 피어선기념성경학원수학 그리고 함태영과 김재준과의 만남
송창근은 1916년에 경성부의 피어선기념성경학원(Pierson Memorial Union Bible Institute: 미국의 침례교 평신도 설교자 드와이트 라이먼 무디Dwight Lyman Moody,1837-1899와 함께 미국 복음주의 운동의 선두 역할을 하며 조선 선교사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1910년 12월 조선을 방문하여 선교사들을 대상으로 성경공부를 인도하며, 매우 열악한 여건에서도 성경을 공부하는 조선인들의 모습에 크게 감동 받았으나 병세가 악화되어 1911년 1월 뉴욕으로 돌아간 후 1911년 6월 3일 74세로 소천하기 전 조선에 성경학교를 세우라는 미국의 북장로교 목사 Arthur Tappan Pierson, 조선명 피어선皮漁鮮, 1837-1911의 유언에 따라 1912년 10월 15일 서울 서대문구 냉천동에 있던 감리교 협성신학교協成神學校 학교의 건물 일부를 빌려서 설립하며, 북장로교와 남북감리교 선교사들이 돌아가며 원장직을 수행하는 등 장감연합정신의 토대 위에 운영돼 왔다. 1996년 3월 1일 평택대학교로 변경) 들어가 수학하고, 1919년 3월 남대문교회의 조사(해방 후 전도사로 불림)로 들어간다.
당시 송암(松岩) 함태영(咸台永)(1873-1964, 함경북도 무산茂山 출신 송암은 1894년 과거제도가 폐지되자, 1898년 서울법대의 전신인 한성법관양성소를 수석 졸업하고, 훗날 서울법대 동창회 명부에 제1호 회원이 되는 명예가 주어진다. 1910년 10월 2일 한일 합방 조약 체결로 사퇴하고, 후에 평양신학교에서 수학 한 후 제6대 마산 문창교회 담임목사, 제2대 연동교회의 담임목사, 평양숭실전문학교 재단 이사, 조선예수교회서회이사, 한국신학대학 이사장, 이승만 대통령 정부 때 부통령 등을 역임) 조사가 3.1 혁명사건으로 수감되자, 함태영 조사는 자신의 후임으로 자신의 고향인 함경북도출신 후배인 송창근 청년을 남대문교회의 조사로 초청한 것이다. 송창근 조사도 자신의 스승인 이동휘 선생님과 고향 대 선배인 함태영 조사의 길을 걷기 위해 1920년 1월 독립의 노래를 작사하여 조선백성들에게 전파하자, 일본 헌병경찰에게 붙들려, ‘정치범죄 처벌령’과 ‘출판법 위반’으로 잡혀 들어갔다가 6개월 간 고문의 수감생활을 마치고, 요양차 그는 고향 함경북도로 돌아가 웅기와 회령 등지에서 강연회 연설을 하고 다녔는데, 김재준을 만나 그를 설득하자, 김재준은 웅기금융조합 서기직을 그만두고 한성으로 향한다.
2) 일본유학
송창근 학생은 1922년 일본 도요(東洋)대학 문화학과에 입학, 1923년 미국 감리교에서 파견된 선교사 들이 설립한, 감리교 계통의 진보주의 산실인 아오야마가쿠인(靑山學院, 현, 아오야마가쿠인대학: 1949년에 대학으로 승격되었다. 미션스쿨답게 신학과가 있었지만 1971년에 없어졌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시인이자 소설가, 번역문학가 백석白石, 1912-1996, 롯데그룹 신격호 총괄회장의 두 아들 신동주, 신동빈 등이 학부졸업)에 편입, 1926년 졸업한다.
3) 미국유학
1926년 9월 송창근은 이용도(李龍道, 1901-1933: 1924년 협성신학교<현 감리교신학대학교>에 입학하고, 1928년 1월 졸업하여 목사가 됨)가 자신의 집을 팔아 마련해준 뱃삯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캘리포니아 주 장로교 신학교 샌프란시스코신학교(San Francisco Theological Seminary, SFTS)에 입학하고, 1927년 뉴저지 주의 프린스턴신학교(Princeton Theological Seminary, PTS: 1812년 세워진 미국 장로교 신학교로 미국장로교Presbyterian Church USA, PCUSA산하 교육기관으로 성경관문제로 1929.7.18.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분리)로 편입, 1928년 9월 초 펜실베니아 주 피츠버그에 있는 웨스턴 신학교(Western Theological Seminary: 웨스턴신학교Western Theological Seminary와 피츠버그 크세니아 신학교Pittsburgh-Xenia Theological Seminary가 1959년 통합되어 피츠버그신학교Pittsburgh Theological Seminary가 됨)로 옮긴다. 만우는 1930년 5월에 진보주의 웨스턴 신학교를 졸업하면서 신학석사 학위를 받은 뒤, 콜로라도 주 덴버의 미연합감리교회 계통의 진보주의 아일리프 신학교(Iliff School of Theology)로 옮겨가서 박사과정을 밟고, 1931년 6월에 박사학위를 받아 졸업한다.
송창근 학생이 장로교와 감리교 신학에 집착한 이유가 피어선기념성경학원의 수학 그리고 미국 유학시 자신이 살던 집을 팔아서 뱃삯을 마련해준 감리교의 이용도(李龍道, 1901-1933) 목사에 대한 사랑 때문이라고 추정한다.
4) 귀국과 산정현교회
만우 송창근 박사는 1932년 귀국하여 평양의 산정현교회 전도사가 되며, 평양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아 이 교회 담임 목사로 재직하지만, 진보주의적 색채가 강한 신학사상 때문에 1936년 산정현교회를 사임하고 6.25전쟁 중 납북된다. 그 후임으로 주기철(朱基徹, 1897-1944)이 담임목사가 되어 평양 산정현교회(1936-1944)에서 시무하던 중 47세에 순교한다.
4. 김재준의 회심과 유학
(1) 회심
김재준은 23세 때인 1924년 김익두 목사가 한성에서 처음으로 인도하는 집회인 승동교회의 서울장로교연합사경회 마지막 날 집회에서 행한 창세기 1:1의 설교 듣고 회심한다.
(2) 유학과 귀국
김재준은 만우 송창근 박사의 인도로 만우의 길을 그대로 걷는다.
1925-1928년 감리교 계통의 진보주의 산실인 아오야마가쿠인(靑山學院) 정규학생이 되지 못하고, 청강생으로‘바르트의 초월론’의 논문으로 졸업했다고 하는데, 회심하고 곧 바로 신학지식은커녕 성경지식도 부재한 상태에서 그것도 힘든 아르바이트를 하며, 청강생신분으로 과연 신학훈련을 감당했는가에 대해 필자는 깊은 회의감을 갖는다.
송창근이 프린스턴대학 입학허가증과 1년 200달러 장학금 허락 통지서를 보내온다. 김재준 학생은 현재 합동측 승동교회 제 7대 목사 이재형(1924.12.28.-1928.7.8.)과 김대현(金大鉉, 1873-1940: 1923년 장로장립, 조선신학교 초대원장) 장로의 도움으로 재정보증서를 만들어 여권을 받고, 윤치호의 도움(100원)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김재준은 미국의 샌프란체스코에 도착하고, 다행스럽게도 백일규 교포가 주도하여 교포로부터 100달러가량을 모금하여 김재준 학생에게 표를 사주어(송창근은 김재준이 샌프란시스코에서 프린스턴까지 올 차비를 마련하기 위해서 여름방학 동안 일하여 돈을 모아 놓은 것으로 갚음) 프린스턴 역에 무사히 도착하고, 김선두(金善斗, 1876-1949) 목사의 맏아들 김성락(金聖樂, 1904-1989)과 한경직의 마중을 받는다.
김재준은 1928.9-1929.9 1년 동안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수학하지만, 신학보다는 고국에서 영어훈련이 없었기 때문에, 영어공부시간에 지나지 않는다.
김재준은 1929년 9월 피츠버그(Pittsburgh) 시 웨스턴신학교에서 수학 한 후 신약사(논문: ‘출애굽 연대에 대한 고찰’)와 신약석사(논문:‘오경비판과 주전 8세기 예언운동’) 학위를 받고 1932년 5월 귀국하며, 1958년 캐나다의 브리티시 컬럼비아대학(University of British Columbia, UBC)에서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받는다.
김재준이가 귀국한 이유는 두 가지 차원에서 생각할 수 있다.
첫째, 대공황(Great Depression, 1929-1939)
미국 대공황으로 경제적 사정이 좋지 않아 김재준이가 박사과정을 걷지 않는 것으로 추정한다.
둘째, 만우 송창근 박사와 추양 한경직의 귀국
만우 송 박사는 박사학위를 취득했기 때문에 곧바로 1932년 귀국하고, 당시 추양(秋陽) 한경직(韓景職, 1902-2000)은 1926년 미국으로 유학하여, 캔자스주의(State of Kansas) 장로교 계열 학교인 미국 엠포리아 대학(Emporia College) 1년을 수료한 후, 1927.9-1929.5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수학하며, 1929년 5월에 신학석사학위를 받아 프린스턴 신학교를 졸업한다. 예일대학교 대학원 등록을 앞두고 폐결핵으로 뉴멕시코 알버커크 요양원과 덴버에서 2년 6개월 동안 투병생활을 하다가 목회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1932년에 귀국한다.
김재준도 박사 학위 취득 없이 귀국하는 후배 한경직을 보고 그리고 그동안 도움을 준 만우 송 박사귀국으로 더 이상 스스로 개척할 의지가 자신에게 부재하다는 것을 깨닫고 귀국한 것으로 추정한다.
(3) 프린스턴 3인방
프린스턴에서 송창근, 김재준, 한경직은 조선교회를 세계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서양선교사의 손이 아니라 조선인의 힘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절감하고, 송창근은 목회신학, 김재준은 구약, 한경직은 신약을 전공하고 학업을 마친 뒤 서로 협력하자는 다짐을 한다.
이에 반해 국내에서 성경과 신학의 초보적인 수준을 닦고, 미국 프린스턴신학교에서 신학학사와 석사 학위를 취득한 남궁혁혁(南宮爀, 1882-1950) 박사와 죽산(竹山) 박형룡(朴亨龍, 대한제국 원년 1897-1978/대한제국1897.10. 12-1910.8.29.)은 귀국 후 선후배의 밀접한 관계를 유지한다.
위의 삼인방은 프린스턴에서 수료했거나 신학석사 학위만 소유했기 때문에, 자신들보다 학문적으로 우월한 남 박사와 죽산 박사를 경원한 듯하다.
다음은 이들의 프린스턴신학교 수학기관과 학위를 설명해준다.
남궁혁: 1922-1924 신학사와 신학석사
박형룡: 1923-1926 신학사와 신학석사
송창근: 1927.9-1928.9 수학(학위 없음)
한경직: 1927.9-1929.5 (1년 반) 신학석사
김재준: 1928.9-1929.9 수학(학위 없음)
웨스트민스터신학교(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가 1929년 7월 18일 개교하고, 아이러니컬하게도 대공황(Great Depression, 1929-1939)이 일어난다.
삼인방(三人幇)은 국내에서 일제의 천리교 소유지를 분배하여 교회를 세운다.
일제강점기에 한양 한복판에 본정이라는 일본거리가 있었는데, 지금의 충무로다. 본정 이정목(二丁目), 곧 현재 종로 2가에서 북쪽으로 구부러진 거리가 영락정이었는데, 여기엔 일본인들이 만든 천리교(신토와 불교의 버무림) 중앙본부가 있었고, 한경직 목사가 이 자리에 베다니교회(현재 영락교회)를 설립한다. 또 다른 두 개의 천리교 절이 있었는데, 장충단에 김재준 목사가 야고보교회(현재 경동교회)를 세우고, 또 하나의 동자동(현재 용산구 남영동)에 송창근 목사가성바울교회(현재 성남교회)를 창립한다.
5. 종합
만우 송창근 박사는 북장로교와 남북감리교 선교사가 협력하여 운영한 피어선기념성경학원의 졸업과 감리교 이용도 목사의 도움 때문에 그는 일본과 미국유학도 장로교 진보주의 웨스턴신학교에서 석사와 감리교계통의 진보주의 아일리프 신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여 신학사상엔 칼뱅주의와 아르미니안주의가 지평융합을 이루고 있어, 6.25전쟁 중에 납북되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추양 한경직 목사는 1년 반에 프린스턴신학교에서 신학석사학위를 취득하지만, 신학기간이 매우 짧아 후에 오컬트 바티칸이 정통복음주의기독교를 자신들의 노예로 만들기 위해 WCC의 고문노릇을 하고 있음을 감지하지 못해, 예장분열에 앞장선다.
1924년 때 회심한 장공 김재준은 일반서양학문의 소양도 없이, 얄팍한 성경지식과 초보적인 신앙상태에서 감리교계통 진보주의 아오야마가쿠인에서 청강생신분을 유지하지만, 기초적인 정통신학보다는 성경비평을 통한 성경의 오류성을 어렴풋이 접하고, 미국에서도 장로교계통 진보주의 웨스턴신학교에서 2년 반 동안 수학하면서 신학사와 신학석사 학위를 취득하지만, 논문제목도 구약성경비평에 관한 것이고, 그 짧은 기간에 제대로 신학훈련을 했다고 볼 수 없다.
결국 삼인방은 오컬트 바티칸이 자신의 교주의 무오성을 절대화하고 정통기독교복음주의를 말살시키기 위해서 창안한 성경비평, 곧 성경난도질의 희생자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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