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SV Bible은 독립운동가를 조롱하고, 반(反) 정부 시위자를 두둔하는 도구로 전락하였다’를 YouTube로 올렸다.
독자 여러분께서 구글의 검색에 ‘함시영 목사’를 기입하면 함시영 목사 관련 이미지가 나타나고, 그 위에 검색결과(함 목사 강의 분야별로 정리)를 참조하면 위의 강의를 듣고, 기독교와 오컬트 바티칸의 천주교의 차이점은 물론 철학과 타종교와도 비교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필자가 그 동안 강의한 내용도 시청할 수 있다.
1. 네비어스의 선교지 분할정책
존 리빙스톤 네비어스 (John Livingston Nevius, 1829-1893)은 미국 뉴욕 출생으로, 유니언대학(Union College in Schenectady)과 프린스턴신학교(Princeton Theological Seminary)를 졸업하였다. 이후 북장로회 중국 청왕조 선교사로 파송을 받아 1854년 중국 남부 닝보(寧波)에 도착해 선교를 시작, 1871년 동북부 옌타이(煙臺)로 옮겨가 1893년 별세하기까지 40년간 선교사로 활동하였다.
마침 1885년 4월 5일 조선에 도착한 호러스 G.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조선명 원두우元杜尤, 1859-1916) 선교사를 비롯한 북장로회 선교사들은 네비우스의 저서 ‘선교 교회의 설립과 발전’(The Planting and Development of Missionary Churches, 1886)을 접한다.
네비어스 선교사는 1890년 봄 상하이에서 개최된 제2차 중국 선교 10주년 연차대회에서 자신의 선교 정책을 발표한 후, 6월 안식년 휴가를 얻어 귀국하던 중 자신보다 30세 연하의 언더우드 선교사의 요청을 받고 제물포를 통하여 한양을 방문한다. 그는 언더우드가 담임목사로 있는 새문안 교회에서 2주간 머물면서 사경회를 통하여 언더우드와 새뮤얼 A. 모펫(Samuel Austin Moffet, 조선이름 마포삼열馬布三悅, ‘삼열’은 세 가지 ‘기쁨’을 의미, 1864-1939), 제임스 S. 게일(James Scarth Gale, 조선어 이름 奇一기일, 1863-1937: 1888년 조선에 온 캐나다 장로교 선교사 로 1891년 8월 31일 캐나다 선교 지원 중단으로 미국 북장로교 선교회로 선교 단체를 옮겨, 연동교회의 제1대 담임목사를 역임), 기퍼드(Daniel L. Gifford, 1861-1900) 등에게 자신의 선교 경험과 방법론을 소개한다.
언더우드를 비롯한 선교사들은 ‘자전’(自傳, self-propagation: 조선 기독교인은 조선인들에게 전도하여 선교사역을 담당), ‘자립’(自立, self-support: 외국인으로부터 경제독립. 조선 기독교 성도는 조선 교회 목회자의 생활비와 교회 운영을 책임짐), ‘자치’(自治, self-governance[gʌ́vǝrnǝns: 조선인 성도가 자신들의 교회 문제를 스스로 처리)의 네비우스 선교방법(The Nevius Plan; The three-self formula or three-self principle: 네비우스가 중국에서의 선교활동을 위해 잉글랜드 선교사 헨리 벤Henry Venn, 1796-1873과 미국의 선교사 루프스 앤더슨Rufus Anderson, 1796-1880의 기존 선교사상을 발전시킴)의 자유민주주의의 선교사상에 매료되며, 네비어스의 선교분할정책을 따른다.
(1) 미국 북장로교: 평안과 황해, 경북
죽산(竹山) 박형룡(朴亨龍, 1897-1978) 박사는 평안북도, 추양(秋陽) 한경직(韓景職, 1902-2000)은 평안남도 출신으로 정통 기독교의 신앙을 갖는다.
(2) 미국 남장로교: 제주도를 포함한 전라도와 충청도
(3) 캐나다 장로교: 함경도
장공(長空) 김재준(金在俊, 1901-1987)은 함경북도 출신인데, 현대주의사상과 자유신학의 중심지인 캐나다 연합 선교회의 책임자였던 서고도(William Scott, 1886-1976) 선교사의 영향을 받고, ‘역사적 비평적 방법’(the historical-critical method)인 고등비평(higher criticism: 하등비평lower criticism 인 본문비평textual criticism과 달리, 고등비평은 성경본문에 내재하는 증거들을 찾아내어 성경문서의 형성사와 그 역사적 가치를 이해하려는 관심과 목적을 의미)의 성경관을 갖는 계기가 된다.
(4) 오스트리아 장로교: 부산과 경남지방
침례교 성결교 구세군 그리고 성공회 등은 동참하지 않았고, 이들 교파는 자유롭게 선교하였다.
2. 교회와 국가
(1) 미국
1) 로저 윌리엄스(Roger Williams, 1603-1683)는 영국 런던에서 출생했으며, 종교의 자유와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주장한 청교도 목사였으나, 청교도 공동체(The Massachusetts Bay Colony, 1628–1691)에서 추방당하여, 1638년 미국 최초로 침례교회the Baptist Church). 곧 프로비던스 침례교회(the First Baptist Church of Providence)를 창설하고 로드아일랜드주(The State of Rhode Island and Providence Plantations)의 주도 프로비던스(Providence)에서 죽는다.
윌리엄스 목사에 의하면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던 십계명이 ‘두 개의 분리된 돌판’에 새겨져 있는 이유는, 첫째 돌판에는 하나님과의 관계, 곧 영적영역에 관계된 계명들이 그리고 둘째 돌판에는 인간들과의 관계, 곧 시민영역에 관계된 계명들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윌리엄스 목사는 이 두 돌 판이 분리되어 떨어져 있는 것처럼, 기독교와 국가는 분리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윌리엄스 목사는 또 하나의 실례로 ‘바다 위에 떠 있는 배’(ship at sea)와 ‘항구에 정박해 있는 배’(ship at harbor)의 비유를 들면서, 배가 항해할 경우, 배 안의 지도자는 선장이고 선원들을 비롯해 배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선장의 명령에 순응해야 하고, 배가 항구에 정박해 있는 동안에는, 배 안의 지도자는 그 항구를 관장하는 관리가 되고 배의 선장도 그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차원에서 보면 교회의 지도자는 교회를 섬기도록 위임받은 목회자이고, 국가의 지도자는 대통령이나 수상이라고 할 수 있다.
2) 제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재위 1801-1809, 1743-1826)이 1777년에 작성한 버지니아 종교자유 법안(Virginia State Bill for Establishing Religious Freedom)의 초안(이 주법은 1786년이 되어서야 통과되고, 1787년 미국헌법이 제정되며, 1788년 비준됨)은 그의 종교적 신념을 대표하는 문서로 평가된다. “어느 누구도 특정한 종교의 예배나 장소나 성직자에 대한 참석이나 지지를 강요받지 않아야 하며, 어느 누구도 이와 관련해 자신의 신체나 재산에 대한 강요나 억제나 폭력이나 부담을 받지 않아야 하며, 자신의 종교적 의견이나 믿음 때문에 고통을 받지 않아야 한다.”
(2) 조선
초대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는‘정교이원론’(政敎二元論)을 주장한다. 이토는 당시의 조일 감리교회의 감독이었던 해리스(C. M. Harris)와 만나 종교의 영역은 기독교가 그리고 정치, 사회적인 영역은 조선 통감부가 각각 담당하는 역할 분담론을 제안한다.
“정치상의 일체의 사건은 제가 그것을 담당하지만 금후 조선에서 정신적인 방면의 계몽․교화에 관한 것은 바라건대 당신이 그 책임을 담당해 주시오. 그리하여야만 조선 인민을 유도하는 사업은 비로소 완성될 수 있습니다”
이런 사상 때문에, 일제치하에서의 조선독립문제로 서양선교사와 조선인들 간의 끊임없는 긴장이 있었고, 후에 정통복음주의기독교가 개인구원에 집착하고, 정치와 사회 문제, 곧 사회구원 등에 대해서 다소 무관심경향을 보이는 원인을 제공한다.
(3) 조선의 선교사
미국 북장로교에서 파송된 선교사들은 정교분리를 따르지 않고, 정교일치를 주장한다. 지면 관계상 한 선교사의 실례를 들겠다.
호러스 N. 앨런(Horace Newton Allen, 조선어 이름은 안련安連, 1858-1932)은 선교사, 의사, 외교관의 다양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그는 미국 오하이오주 델라웨어에서 출생하여 웨슬리언 대학교(Wesleyan University) 신학과를 나온 후 마이애미 의과대학교를 나왔고 1883년 미국 북장로교회 의료 선교사로 중국 청나라의 상하이에 갔지만 그곳에서 환영받지 못하자, 조선을 선교지로 택한다.
앨런은 1884년 9월 20일 가족을 데리고 조선(1392-1897의 ‘조선왕조’ 그리고 1897-1910의‘대한제국’)에 도착한 최초의 기독교 의료 선교사가 된다.
앨런이 도착한 후 동년 12월 4일 고종황제 정부를 타도하는 갑신정변이 발생한다. 갑신정변 중에 명성황후의 조카인 민영익이가 치명상을 입는다. 독일인으로 조선의 외교고문을 담당하고 있던 묄렌도르프(Paul Georg von Möllendorff, 조선이름 목인덕穆麟德, 1848-1901: 청나라 주재 독일 영사관에 근무하던 중, 청의 이홍장은 조선에서 일본의 영향을 줄이려고, 묄렌도르프를 조선의 통리아문 협판이 되어 외교와 세관 업무를 담당하도록 추천)가 재빨리 앨런 의사를 부르러 보내고, 앨런은 민 왕자를 서구의료기술로 살린다. 이를 계기로 앨런은 고종(高宗, 재위 1864-1897, 1852-1919),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재위 1897-1907)와 친밀한 관계를 갖는다.
앨런은 고종 황제의 도움으로 1885년 4월 10일 조선 최초의 근대서양식의료기관인 광혜원(廣惠院: 은혜를 널리 펼친다)을 설립한다. 광혜원은 조선 근대서양식 의료기관이다. 동년 4월 26일 ‘백성을 구제한다’는 의미의 제중원(濟衆院)으로 이름이 변경되고, 연세대학교건강시스템의 일부분이 될 정도로 발전하여, 1957년 1월 5일 연세대학교 이름으로 연희대학교와 통합한다.
앨런은 3년 동안 의료선교사로 사역한 후 외교관으로 변신한다.
앨런은 1887년 주미 전권공사 박정양(朴定陽, 1842-1905)의 서기관으로 미국 워싱턴으로 건너가 조선공사관을 설립하는데 산파역할을 한다. 2년 후인 1889년 6월 그는 조선공사관의 서기관을 사임한다. 그 다음해 1890년 7월 9일 그는 주한 미국공사관의 서기관으로 임명되면서 선교사의 직무에서 완전히 사직한다. 그는 1890년 11월 12일 부총영사로 승진하고, 1897년 7월 27일 공사와 총영사가 된다.
1905년 7월 27일 미국 육군 장관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와 일본 내각총리대신 가쓰라 다로 사이에서‘태프트-가쓰라 밀약’(The Katsura-Taft Agreement)이 체결된다. 그것은 러일전쟁(1904.2.8.-1905.9.5)에서 일본승리의 여파 가운데서 조선(대한제국)과 필리핀의 상태에 관한 것이다. 일본이 미국의 필리핀지배를 인정하는 대가로 미국은 일제의 조선(대한제국)지배를 승인한다는 비밀협정이다.
당시 미국의 공사와 총영사직에 있던 앨런은 공개적으로 ‘태프트-가쓰라 밀약’에 저항하며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재위1901.09-1909.01, 1858-1919) 대통령에게 불만을 제기하자, 1905년 미국정부는 앨런을 소환하여 미국의 공사와 총영사직을 해임시킨다. 주조선(대한제국)미국공사관을 폐쇄시킨다.
그는 미국에 돌아가 오하이오주 톨레도에서 의술을 행하며, ‘조선견문기’(Things Korean: A Collection of Sketches and Anecdotes, Missionary and Diplomatic. New York: F.H. Revell Co., 1908)이란 책을 집필하며, 그 서문에서 조선에 대한 애정과 자신의 조국 미국의 매정함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불행하게도 미국은 조선의 신의를 저버렸다. 양국은 1882년 한나라가 외세침략을 받을 경우 다른 나라가 도와준다는 내용의 조미수호통상을 맺었지만, 미국은 이 신성한 맹약을 지키지 않아 조선인들의 분노와 반감을 샀다. 필자의 진심어린 동정과 애정을 조선에게 전한다”
그곳에서 1932년 12월 11일 74세로 세상을 하직한다.
3. 종합
죽산 박형룡 박사는 미국 북장로교에서 파송된 선교사들 그리고 독립운동가들과 더불어 세운 학교에서 ‘성경이 하나님 말씀’이라는 성경관을 기초한 복음을 듣고, 하나님 사랑(성경과 기독교변증)과 이웃사랑(가정, 공동체, 국가)을 실천한 진실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요 독립 운동가였다.
이에 반해 장공 김재준은 거듭나지 않은 케나다선교사 윌리엄 스콧으로부터 역사적 비평적 방법인 고등비평의 성경관을 배워, 그 자신도 거듭남의 체험 없이 성경을 계시의 산물로 보기보다는 인간의 이성과 역사와 문화 등에서 기원한 것으로 보고, 당시의 사상인 이성과 과학 그리고 다윈의 진화론 사상에 근거해서 성경을 난도질하는 흑암의 세력의 편에 서있었기 때문에, 그에겐 항일정신이 부재하였고, 결국 하나님 사랑의 결핍 속에서 선교사들이 아주 힘들게 세운 기독교 공동체를 세우기보다는 허무는데 진력한 가라지에 불과했다.
뿐만 아니라 장공은 일제엔 저항하지 않고, 협력의 길을 걷다가, 오히려 해방 이후의 정국에서 친일사생아에 불과한 오컬트 천주교 세력(김수환 전 추기경)과 연합해 전라도 출신 천주교 신자 김대중을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반정부 시위를 주도했는데, 훗날 기장과 오컬트 천주교는 ‘민주화운동’이라고 미화시키는 역사조작을 한다.
결국 역사적 비평적 사고에서 번역된 RSV Bible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이자 애국자인 죽산 박형룡 박사를 조롱하고, 성경과 기독교를 허물기 위해 고등비평의 칼을 가지고 난도질하는 동시에 대한민국도 무너뜨리기 위해 반정부 시위에 진력한 장공 김재준을 두둔하는 도구로 전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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