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와 정의의 나라/신학 이야기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군사사상에서 고찰한 21세기 한반도와 차기 대통령에 대한 진단과 그 해법!

아우구스티누스 2016. 10. 4. 13:25

야마가타 아리토모(산현유붕山縣有朋, 1838-1922)와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伊藤博文, 1841-1909)는 요시다 쇼인(길전송음, 吉田松陰, 1830-1859)쇼카손주쿠(송하촌숙松下村塾)가 배출한 문하생중 가장 성공한 케이스인 선후배사이 이지만 지독한 라이벌 관계다. 이 세 사람은 모두 혼슈(본주, 本州) 서쪽, 한반도 도래(渡來)인이 많이 살던 조슈한(장주번, 長州藩: 일제 때 육군을 장악; 현재의 ‘야마구치현, 山口県, 山口縣, 산구현’)출신이기도 하다.


야마가타가 쩐의 중독자라면, 이토는 색마였고, 전자가 즉각적인 군사행동을 우선시하는 내성적이며 권위적인 성격의‘일본 군국주의의 아버지’라면 후자는 실리에 바탕을 둔 외교적 협상 우선시하는 외향적이며 개방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메이지헌법의 기초자’요 ‘반(反)문명국가일본을 근대화된 문명대국으로 만든 일등공신’이라고 할 수 있다.


전자는 즉각적인 조일병탄을 선호한 반면, 후자는 점진적인 조일병탄을 추진하여 시기적인 차이점은 있어도, 서구열강에서 침탈당한 일본의 국익을 손쉬운 상대인 조선과 만주를 취해 만회해야 한다는 주장한 요시다의 정한론을 실현해야 한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그런데 일본은 이토를 저격한 대한제국 의군 참모중장 겸 특파 독립대장 안중근(安重根, 1871-1910)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며 이토의 사망을 명분 삼아 조일병탄 할 수 밖에 없었다고 쌩구라를 날리고, 이런 일제의 지능적인 얄팍한 꼼수에 놀아나는 한국인들이 즐비하다.


다음과 같은 이토의 행위는 일제의 강점기를 ‘근대화의 수혜’라고 입에 거품을 불고 씨부렁대는 뉴라이트역사관을 단죄한다.


이토는 1907년 ‘정미7조약’(丁未七條約: ‘제3차 조일협약’ 또는 ‘조일신협약’이라고 하는데 헤이그밀사사건을 계기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킨 다음, 일제가 법령제정권, 일본관리임명권, 행정권 등을 내용으로 한 7개항의 조약을 일컬음)을 체결한 후 사람을 보내 요시다 쇼인(길전송음吉田松陰, 1830-1859)의 무덤에 대한제국의 국가체제에 마지막 숨통을 조였음을 보고한다.


사실 대한제국국민들 가운데 한 사람 정도는 일본군국주의를 상징하는 야마가타에게도 거듭나라고 총알세례를 퍼부어야 했었는데, 그렇지 못해 유감이고, 결국 대한제국은 일제의 먹이감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러면 대한제국을 자근자근 씹어 삼킨 야마가타의 쌩얼을 들여다보자.


1. 요시다 쇼인과 쇼카손주쿠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야마가타와 이토는 요시다와 동향인이고 요시다의 제자이지만 요시다가 사랑한 제자는 구사카 겐즈이(구판현서久坂玄瑞, 1840-1864: 17세 때인 1857년 요시다의 여동생 후미와 결혼하고 25세에 자결), 다카스기 신사쿠(고삼진작高杉晋作, 1839-1867), 요시다 토시마로(길전임마吉田稔磨)이며, 요시다 기념관에 가운데에 요시다, 왼편에 구사카, 오른쪽에 다카스기의 동상이 이를 증언한다.


이들에 비해 이토와 야마가타는 뒤처진 인간들이었는데, 요시다 제자들 가운데 이 두 작자가 일왕다음의 내각총리대신을 한 번 이상 지낸 인물로 업그레이드한다. 그 이유는 이 두 사람의 기라성 같은 대선배들이 메이지정부에서 꽃을 피우지 못한 채 거의 다 죽었기 때문이다.


야마가타는 조슈한 벽촌 하기(추萩)마을에서 주겐(中間: 무가의 고용인)신분으로 태어난다. 20세 때인 1858년 요시다의 쇼카손주쿠에서 교육을 받으며 존왕양이(尊王攘夷; Revere the King, Expel the Barbarians)사상에 입각한 바쿠후타도(토막討幕)와 천황의 직할 통치론의 옹호자가 되며, 쇼인의 비이장목(飛耳長目: 정보수집꾼)으로 충성한다.


2. 일제육군의 창설자


야마가타는 25세 때인 1863년 다카스기 신사쿠(고삼진작高杉晋作, 1839-1867)가 중심이 되어 조슈한 혁명가들이 조직한 기헤이타이(기병대奇兵隊)의 군감(軍監: 민병民兵조직인 기헤이타이와 조슈한의 정규군인 선봉대先鋒隊 사이에 벌어진 무력충돌에 책임을 지고 다카스기가 기헤이타이의 총독에서 물러난 후 군감으로 등장)이 되어 1864년‘시모노세키전쟁’(하관전쟁下關戰爭; 시모노세키의 옛 지명을 따서 ‘바칸전쟁馬關戰爭’이라고도 부르고 서구열강에 대한 개항 이후 금과 원료 등이 대량으로 유출되면서 커다란 경제적 손실이 발생하자 ‘간몬해협關門海峡관문해협’을 봉쇄하기 위해 미국,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의 서구열강과 맞장 뜨다 패전)으로 부상을 입으며 서구열강의 군사제도에 눈을 뜬다.


1868년 메이지(명치明治) 정부가 수립되자 야마가타는 토벌군을 이끌고 바쿠후(막부幕府)의 반란군을 진압하여 무사의 군대보다 평민군대가 더 우세한 것을 알고 1869년 ‘메이지유신 3걸’의 한 사람인 규슈(구주, 九州) 사쓰마한(살마번薩摩藩: 일제때 해군을 장악; 현재의 ‘가고시마 현, 鹿兒島藩, 녹아도번’) 출신의 사이고 다카모리(서향융성西鄕隆盛, 1828-1877)의 동생 사이고 쓰구미치(서향종도西鄕從道, 1843-1902: 1874년 육군 중장이 되어 타이완臺灣출병을 지휘하였으며, 1876년의 西南戰爭때 형의 노선을 선택하지 않고 육군경 대리를 역임하면서 정부군에 협력하며, 제1차 이토 히로부미 내각에서 육군중장과 초대 해군대신을 겸임하고 1892년에는 추밀원고문관에 임명되며 1895년 후작의 작위를 받음)와 함께 유럽에 나가 군사제도를 연구하며 당시 프로이센의 군국주의, 팽창주의, 그리고 공업발전에 감명을 받고 농업국이었던 일본을 프로이센과 같은 공업군사국가로 탈바꿈시키겠다고 각오한다.


1870년 귀국하여 야마가타는 국방차관급의 효부다이후(병부대보兵部大輔)에 임명되어 프로이센을 본 딴 군의 근대화를 추진한다. 사이고 다카모리의 도움으로 징병제도(특권계급인 사무라이로 구성되던 군대를 일반인에게 개방하는 국민개병제國民皆兵制)를 도입하고, 야마카다는 비스마르크의 프로이센 육군을 모델로 근대식 일본육군을 창설하여 천황 직속으로 두어 내각과 의회의 통제력 차단하며 일본육군의 창설자가 되고 정부가 군부를 해군과 육군으로 재편하자 1873년에는 초대 육군경(陸軍卿)에 취임해 징병령(徵兵令)을 실시한다. 1876년의 세이난센소(서남전쟁西南戰爭) 때 징병령에 의해 육성된 군대가 사이고의 사무라이들을 격파하며, 그 후 그는 일본 육군을 지배한다.


3. 세이난센소


메이지정부는 조슈한의 기도 다카요시(목호효윤木戶孝允, 1833-1877)의 주도로 1868년 7월 에도(江戶)의 지명을 도쿄(동경東京)로 변경하고 1869년 수도를 교토(경도京都)에서 도쿄로 천도하고, 동년에 참의(參議)에 임명된 사쓰마한 오쿠보 도시미치(대구보리통大久保利通, 1830-1878)는 1871년 대장경으로 취임한다. 사쓰마한, 조슈한, 도사한(토좌번土佐藩)의 1만여 사무라이 군대를 메이지 일왕의 직속 군대인 고신페이(어친병御親兵: 황군)으로 귀속시킴으로써 메이지 신정부 군대를 편성하며, 사쓰마한의 5000여 병력을 이끌고 가세한 사이고 다카모리가 신정부군의 사령관으로 임명된 후 참의로 재직한다.


‘정한론’(征韓論)의 내분으로 사이고를 위시한 정한론자들이 참의직을 사퇴하면서 신정부 집권세력이 분열되는 1873년 10월의 ‘메이지 6년 정변’이 초래된다.


1876년 사이고가 맹주로서 주도하여 사쓰마한 사무라이가 일으킨 일본의 최후의 반정부 내란인 세이난센소(서남전쟁西南戰爭)에서 징병제로 징집된 신정부군이 사이고 반군의 사족 무사들을 제압하는 성과를 거두고, 패퇴한 사이고는 사쓰마한에 돌아와 저항하다가 1877년 9월 24일 동굴에서 할복자살하고, 그의 목이 야마가타 앞에 바쳐지자, 그는 그것을 직접 들고 염불을 외웠다고 한다.

세이난센소의 패배로 사족계급은 몰락하고, 이듬해인 1878년 오쿠보는 세이난센소에 참전했던 이시카와(석천石川)현 사족들에 의해 암살된다. 이후 조슈한 출신들이 메이지 신정부의 실권을 장악하면서 메이지 신정부 군대는 고신페이조직 및 징병제 도입에 앞장섰던 야마가타가 지휘하게 된다.

 

4. 군인훈계와 군인칙유선포


네덜란드 유학 중 프리메이슨에 가입한 일본 계몽사상가이자 서양학문도입의 선구자인 니시 아마네(서주西 周, 1829-1897)는 1870년 메이지 정부의 병부성에 들어가 무용, 성실, 천황에 대한 충성을 담은 ‘군인훈계’(軍人訓戒)와 ‘황군’의 복무규율을 규정한 ‘군인칙유’(軍人勅諭)작성에 관여한다. 야마가타는 1878년 ‘군인훈계’를 발표하고, 1882년 메이지왕(명치왕明治王, 재위 1867-1912, 1852-1912)의 이름으로‘군인칙유’를 선포하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일본 황군의 정신적 지침이 되게 한다.


5. 정치입문


야마가타는 동향인 조슈한 출신인 가쓰라 다로(계태랑桂太郞, 1848-1913) 내각과 데라우치 마사타케(사내정의寺內正毅, 1852-1919)내각을 성립시킴으로써 정계군부에 이토를 능가하는 영향력을 행사한다.

가쓰라는 청일전쟁(1894년 6월-1895년 4월) 때 일본군 제3사단장으로 최전선에서 싸웠고, 1901년 6월부터 제11,13,15대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하며, 영일동맹을 맺고 러일전쟁(1904-1905)을 감행하며, 1905년 가쓰라 태프트의 밀약을 맺고 1910년 조일병탄을 완성한다.


데라우치는 1882년 프랑스에 유학하는 간인노미야 히타시 황자의 수행원으로 프랑스에 주재무관으로 파견된다. 귀국 후 1887년 일본 육군사관학교 교장을 시작으로 일본 육군교육 총감, 일본 육군대학 총장, 일본군 육군참모차장에 까지 오르고, 1901년 제1차 가쓰라 내각의 육군대신에 임명된다.


데라우치는 보신센소(무진전쟁戊辰戰爭: 1868년부터 1869년 사이에 바쿠후의 세력과 메이지정부에 정치권력을 반환하기를 요구하는 사쓰마한과 조슈한을 중심으로 한 메이지 정부의 군대와의 싸움), 세이난센소, 청일전쟁, 러일전쟁 등에서의 공적으로 1907년 자작(子爵)의 작위를 받고 육군 대장까지 승진한다. 1910년 5월부터는 조선에서 제3대 통감을 겸임하며 이완용(李完用) 친일내각으로부터 경찰권을 이양 받아 헌병, 경찰을 동원한 삼엄한 공포분위기 속에서 조일병탄을 시킨 후 1916년 10월 14일까지 초대 조선총독이 되어 강력한 무단(武斷)식민정책을 편다(그중 하나로 헌병 경찰 제도를 창시하여 105인 사건을 일으켜 윤치호, 이승훈 등 조선의 많은 지식인을 체포한다. 이러한 공적으로 1911년 4월 백작으로 승진). 1916년 6월 24일, 군에서는 육군원수로 승진하고(장남 데라우치 히사이치도 육군원수가 됨), 1916년 10월-1918년 제18대 내각총리대신을 지낸다.


(1) 내무장관: 경찰제도현대화


1882년 정치에 입문하여 1883년 제1차 이토 히로부미 내각의 내무장관(1883-1889)이 되어 지방자치단체를 설립하고 경찰제도를 현대화한다.


(2) 내각총리대신: 교육칙어, 주권선과 이익선


일본의회제도체제아래 최초의 내각총리대신(1889-1891 제3대 총리, 1898-1900 제9대 총리)를 지내며 육군대장에 승진한다.


1) 1890년 10월에 메이지왕의 이름으로 천황 절대주의와 군국주의를 고취하는‘교육에 관한 칙어(교육칙어)’를 반포한다. 일본은 전쟁에 패하고 3년 뒤 이 ‘교육칙어’를 군국주의 교육을 조장한다는 등의 이유로 폐지하는데, 대한민국의 박정희(朴正熙, 1917-1979: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제5, 6, 7, 8, 9대 대통령역임) 전 대통령이 이것을 선호한다는 하여 구설수(口舌數)에 오른다.


당시 청와대 공보 비서관을 한 선우련(鮮于 煉, 1929-1997: 유신정우회 국회의원을 지냄)은 박대통령과 자신의 형님인 선우휘(鮮于 輝, 1921-1986: 1958년 육군 대령으로 예편하고 한국일보 논설위원, 조선일보 편집국장 및 기획심의실장, 주필, 논설고문을 지내며 소설가로 활동)와의‘교육칙어’관련설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임자, 아직도 (교육)칙어를 외울 줄 아나?’ 대구사범학교 출신 박정희가 선우휘한테 이렇게 묻자 경성사범학교 본과 출신인 선우휘는 ‘물론이지요’라고 하고는 먼저 외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교육칙어는 국민교육헌장보다 훨씬 길다. 선우휘가 한동안 외우면 박정희가 그 뒤 문장을 받아 외우고, 다시 선우휘가 받으면서 두 사람이 교육칙어를 끝까지 다 낭송하는 걸 봤다”


2) 주권선(主權線)과 이익선(利益線)에 입각한 일본의 전쟁개념을 선언한다. 이에 대해선 뒤에서 자세히 설명하겠다.


3)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조선에 주둔하는 제1사령관(육군대신)이 되고 1898년 원수로 승진한다.


4) 1898-1900년 내각의 절반 이상이 군 장성으로 채워진 야마가타내각을 구성하여 아시아팽창주의를 가속화시켜 나간다.


5) 1903-1909년 이토와 함께 번갈아 추밀원 의장직을 맡는다.


6) 러일전쟁때는 제1군 사령관겸 참모총장을 맡아 도쿄에서 군을 지휘하며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공작 작위를 받는다.


7) 1909년 이토가 암살되자 조슈한을 대표하는 겐로(원로元老)로서 죽을 때(1922년)까지 국정의 중추를 장악한다.


5. 주권선(主權線)과 이익선(利益線)


독일의 지리학자 프리드리히 라첼(Friedrich Ratzel, 1844–1904)과 독일 지리학자이자 지정학자(地政學者)인 카를 하우스호퍼(Karl Ernst Haushofer, 1869-1946) 등의 영향으로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는 ‘독일 민족은 영국과 프랑스처럼 생활권역을 확대해야 한다’는 게르만족의 ‘생활공간’(생활권; 독어 Lebensraum; 영어 living space)을 나치당의 정책에 도입하여 제2차 세계대전을 주도하고, 일본은 독일의 ‘생활공간’을 기초하여 1940년대의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이론을 전개하며 침략을 합리화한다.


사실 이런 이데올로기는 미국인들이 인디언을 몰아내고 멕시코를 침략한 논리였던 ‘명백한 운명론’(the ideology of Manifest Destiny, 1845)에서 기인한 것이다.


일본의 경우‘대동아공영권’은 ‘주권선’(主權線)과 ‘이익선’(利益線)의 이데올로기에서 이미 배태된 것이다. 이 사상의 기원은 다음과 같다.


1890년 아시아 최초의 의회를 개설한 일본의 야마가타 아리토모 내각총리대신은 의회연설에서 오스트리아 법학자의 이론을 원용해 ‘주권선’과 ‘이익선’ 수호를 천명하고, 이것이 일본의 국방외교정책으로 자리 잡는다.

‘주권선’은 일본열도를 의미하고, ‘이익선’은 일본의 이익과 관계되는 경계선인 한반도를 의미한다.


일본이 자신의 주권선을 수호하지 못한 것은 미국의 일방적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폭탄투하다. 두 지역의 원폭 ‘버섯’구름은 일본으로 하여금 최첨단우주산업의 필요성을 절감케 하여, 미국과 철저한 협조로 이 분야에선 현재 미국과 동등한 수준이다.


19세기 일본은 세계최강 영국과 러시아의 패권다툼에서 영국에 찰싹 붙어 영국의 이익을 대변하는 동시에 러시아가 부동항의 확보하는 차원에서 한반도를 점령하면 그 다음엔 일본열도라는 것을 인식하면서, 일본을 보호하려면 한반도가 러시아의 수중에서 들어가는 안된다는 것을 절감하고 영국과 미국의 전폭적인 지지(미영은 러일전쟁으로 두 나라를 탈진케 하여 러일이 한반도에서 패권을 누리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로 청일전쟁(1894년 6월-1895년 4월)과 러일전쟁(1904-1905)을 수행해 승리한다.


그런데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될 사실은 위에서 보듯이 당시 러일전쟁시의 러시아는 1917년 이전의 러시아이고, 러시아가 비록 1917년부터 공산화되지만, 한반도의 6.25전쟁 이전 까진 공산주의에 대해서 정통한 사람이 전혀 없었다. 당시 미국과 영국은 러시아가 아시아에서 맹주자리를 차지하지 못하도록 일본을 통해 관리했을 뿐이다.


하지만 공산주의와는 전혀 관련 없는 러시아 때문에 한반도를 빨갱이러시아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1910년 조일병탄을 했다고 소설화하는 것이 일본역사이고, 이것에 맞장구치는 작자들이 악질친일세력과 일제사생아의 후손들과 뉴라이트역사관을 가진 자들이다.


6. 평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토는 1907년 ‘정미7조약’(丁未七條約: ‘제3차 조일협약’ 또는 ‘조일신협약’이라고 하는데 헤이그밀사사건을 계기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킨 다음, 일제가 법령제정권, 일본관리임명권, 행정권 등을 내용으로 한 7개항의 조약을 일컬음)을 체결한 후 사람을 보내 요시다의 무덤에 대한제국의 국가체제에 마지막 숨통을 조였음을 보고했다고 한다.


이런 사실은 대한제국 의군 참모중장 겸 특파 독립대장 안중근(安重根, 1871-1910)의 이토저격사건 때문에, 조일병탄이 이루어졌고, 조선에서 야마가타의 무단정치가 실현되었다고 해석하는 뉴라이트역사관을 비롯해 일본 우익의 역사관을 단죄한다.


야마가타와 이토는 요시다의 쇼카손주쿠가 배출한 문하생으로 요시다와 요시다의 스승인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 豊臣秀吉, 1536-1598)의 사상인 조일병탄을 기초 실행한 자들이다. 이 세 사람은 또한 모두 혼슈(본주, 本州) 서쪽, 한반도 도래(渡來)인이 많이 살던 조슈한(장주번, 長州藩: 일제 때 육군을 장악; 현재의 ‘야마구치현, 山口県, 山口縣, 산구현’)출신이기도 하다.


7. 교훈


(1) 야마가타는 독일의 프로이센(독어 Preußen; 영어 프러시아 Prussia)의 군대를 모델로 하여 실행한 고신페이(어친병御親兵: 황군)조직, 국민개병제(國民皆兵制)도입,‘군인훈계’(軍人訓戒)와‘군인칙유’(軍人勅諭) 등을 통해서 일제군대를 서구열강과 맞장 뜨는 근대화된 군대를 만들면서 ‘일제육군의 창설자’가 된다.

대한민국군대는 유감스럽게도 1910년대 만주에 설립되었던 독립투사 양성기관이며 명실상부한 독립운동의 요람인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1911년 6월 10일 이회영, 이시영, 이동녕, 이상룡 등이 중국 지린성吉林省 에 설립한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에서 기원한다. 해방 이후 국내로 돌아온 이시영은 1947년 2월 신흥전문학원新興專門學院을 설립하여 1949년 신흥초급대학新興初級大學으로 인가를 받고, 1960년 경희대학교로 명칭이 바뀜)나 상해임시정부에 근원을 두지 않고, 초창기에 거의 악질친일세력, 일제사생아와 그 후손들이 군 고위직을 독차지해 일본군국주의와 전체주의사상으로 쪄들었는데 그 잔재가 아직도 존재한다.


실례를 들어보자.


강창성(姜昌成, 1927-2006) 전 보안사령관이 어느 날 박정희 전 대통령의 부름을 받고 집무실에 가봤더니 박 대통령이 일본군 장교 복장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가죽 장화에 점퍼 차림으로 말채찍을 들고 있었다는 것이다.


젊었을 때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5.16으로 청와대를 접수한 분이 그런 행동을 했다니 믿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혁명적인 군개혁이 이루어져야 한다.


무엇보다도 미국에게 의존하며 미국의 구닥다리무기(‘군산복합체軍産複合體 military-industrial complex’와 최첨단우주과학 등에 기초한 MD체계확산을 통해 경제부흥과 세계경찰노릇을 하기 위해서 새로운 무기체계를 개발해야 하기 때문에 서너 달 정도만 지나기만 하면 이전 무기는 구닥다리가 됨)를 사는 이런 갑을관계의 시스템에서 벗어나, 서로 윈윈하는 단계로 발전해야 한다.


그래서 대한민국 군을 비롯한 안보집단의 부정부패부조리의 발본색원을 비롯해 핵무기, 핵미사일, 핵잠수함, 우주전쟁을 대비한 최첨단우주과학기술보유, 이스라엘군시스템도입, 해군과 공군 위주의 군개혁 등을 기초한 자주국방을 갖추어 미중러일을 완전히 배제한 채 대한민국식의 한반도통일완성은 물론 후일 중러일과도 영토전쟁에 대승리하여, 골드만 삭스가 예언한 대로 미국과 더불어 세계를 리드하며 아름다우며 위대한‘홍익인간 이화세계’를 전세계에 전파해야 한다. 이것이 대한민국이 하늘로부터 받은 소명이다. 이런 소명을 지혜롭게 배짱을 갖고 성취할 수 있는 사람만이 차기 대통령 자격이 있다.

 

(2)‘주권선’(主權線)과 ‘이익선’(利益線)


북한은 물론 중러일은 자국을 보호하기 위해 북한은 ‘핵, 경제 병진노선’, 중국은 ‘순망치한’(脣亡齒寒), 러시아는 ‘부동항(不凍港: 겨울에 얼지 않는 항구)구축’, 일본은‘주권선’(主權線)과 ‘이익선’(利益線) 그리고‘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 등의 이데올로기를 고수하고 있고 미국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군산복합체부흥을 통한 경제부흥과 자국안보 그리고 미래의 우주전쟁을 대비한 최첨단우주과학시대주도를 위해 미사일 방어(MD)체계 확산을 지향하고 있다.


이처럼 미중러일은 한반도통일을 원하지 않고 있다. 한반도통일을 실현하려면 자주국방외에는 해답이 없다.

그런데 대한민국에는 한반도나 대한민국 내에서 전쟁이 일어나길 고대하는 언설들로 넘치며 오두방정을 떨고 있다.


‘대북 선제 타격론’, ‘김정은 암살 특수부대 만든다’,‘김정은 제거 작전’, ‘탈북권유’


사실 이런 담론은 제기할 필요없이 은밀하게 조직적으로 진행하여 김일성세습독재수령체제를 궤멸시켜야 하는데, 입으로만 항상 공공연하게 떠들어 대기 때문에 정부와 미국이 서로 짜고 국민들이 거세게 주장하는 대한민국의 자주국방선언을 잠재우고 거짓 안보위안을 주기 위한 고등사기꾼수법으로 오인할 여지를 주고 있다.


그러면 대한민국의 ‘주권선’과 ‘이익선’은 어디인가?


대한민국의 ‘주권선’은 ‘군사분계선’이고 ‘이익선’은 ‘개성공단’이다. 그런데 박근혜정부는 개성공단이 북핵소유의 진원지라고 하여, 개성공단을 없애고 무조건 대북제재에 올인하는데 중러가 협조하지 않을뿐더러 김일성세습독재수령체제는 북한동포들을 노예로 부리기 때문에 궁핍한 삶에 이골이 나서 별 효과가 없다고 구미선진국전문가들도 조언한다.


사족(蛇足)을 달면 살인마 김정은은 자신이 살려고‘핵, 경제 병진노선’을 금과옥조(金科玉條; a golden rule)로 여긴다. 이것을 깨려면 한반도에서 전면전이 일어나야 한다. 그러면 한반도는 구석기시대로 돌아가든가 아니면 세계지도나 역사책에서 영원히 사라진다.


결국 평화적인 방법으로 ‘핵, 경제 병진노선’을 깨야 하는데, 그것은 김일성세습독재수령체제의 보장이다. 미국 외에는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 국가가 없다. 그런데 미국은 MD정책과 다른 이유 때문에 한반도통일을 원하지 않는다(지면관계상 자세한 내용은 생략).

 

그래서 이전부터 대한민국대통령을 비롯해 지도자들은 미국정부나 정치가들에게 대한민국식의 한반도통일만 이루어준다면 미국의 MD정책의 선봉장(先鋒將) 역할 뿐만 아니라 미국의 이익의 대변자가 되겠다고 하며 졸라야 했고 지금도 해야 한다. 그런데 국가안보와 통일 그리고 대한민국국민과 북한동포에 대한 사랑에 대해 전혀 관심 없고 오직 자기출세와 명예만 생각하며 미국으로부터 쩐이나 향응을 받고 미국 스파이 노릇하는 전문가들만 즐비하다.


또 다른 한 가지 방법이 있다면 이전의 개성공단이다. 현금박치기 하지 말고 다른 수단을 찾으면 될 텐데 박정부는 항상 문제가 발생하면 그 원인부터 잘 조사하여 치료하고 해법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군사작전 하듯이 무조건 그 부서나 단체를 없앤다. 한마디로 어처구니없다.


8. 나가는 말


구약성서의 요엘 예언자는 자주국방의 당위성을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8.이제는 내가 유다 사람을 시켜서, 너희의 아들딸들을 팔겠다. 유다 사람은 너희 자녀를 먼 나라 스바 사람에게 팔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9.너희는 모든 민족에게 이렇게 선포하여라. 전쟁을 준비하여라! 용사들을 무장시켜라. 군인들을 모두 소집하여 진군을 개시하여라! 10.보습을 쳐서 칼을 만들고, 낫을 쳐서 창을 만들어라. 병약한 사람도 용사라고 외치고 나서라.”(새번역. 요엘 3:8-10)


신약성서는 자유와 독립의 중요성에 대해 이렇게 선언한다.


“1.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셔서 우리는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마음을 굳게 먹고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공동번역. 갈라디아서 5:1)


“32.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개역한글. 요한복음 8: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