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세에 초대 총리(1885. 12. 22-1888. 4. 30. 3년 4개월), 51세에 2차 5대 총리(1892. 8. 8-1896. 8. 31. 4년 1개월), 57세에 3차 7대 총리(1898. 1. 12-1898. 6. 30. 6개월), 59세에 4차 10대 총리(1900. 10. 19-1901. 5. 10. 7개월) 등 도합 8년 6개월(2720일)을 총리를 지내고, 64세 때인 1905년 초대조선통감을 지낸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伊藤博文, 1841-1909)는 대한제국에 을사늑약(乙巳勒約)을 강요하고 헤이그특사사건을 빌미로 조선 제26대 왕이자, 대한제국 제1대 황제인 고종(高宗, 재위 1863-1907, 1852-1919)을 강제로 퇴위 시키며 조선병탄(倂呑)의 기초 공작을 수행한 원흉(元兇)으로서 1909년 10월 26일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던 독립군 조직 대한제국 의군 참모중장 겸 특파 독립대장 안중근(安重根, 1871-1910)으로부터 15가지 죄목으로 헤이룽장성(흑룡강성 黑龍江省, 黑龙江省) 성도(省都) 하얼빈(합이빈哈爾濱)에서 저격당하며, 사후 메이지왕(명치왕明治王, 1852-1912)으로부터 충정군(忠貞君)에 추봉된 자다.
공교롭게도 70년 후 1979년 10월26일에 당시 대한민국의 대통령 박정희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살해된다.
사실 안중근 참모중장은 인간 이토가 아니라 동양평화를 위해서 일본군국주의의 심장을 향해 다시 태어나라고 총알세례를 퍼부은 것이다.
그런데 조선과 중국으로부터 왕따 당해 변방국에 불과했던 일본을 당시 서구열강과 맞장 뜨는 국가로 만든 사람이 이토다. 그자가 등장하자 일본은 1879년에 조선과 일본본토를 연결하는 중계무역으로 번성했던 독립된 류큐(琉球)왕국인 오키나와(1879년 일본 메이지정부에 의해 강제로 오키나와현으로 편입되었고, 당시 미 태평양군 사령관인 맥아더가 오키나와를 중국을 견제하는 ‘천연 방어진’이라고 평가하며 27년간의 미군정통치를 거치고, 1972년 다시 일본이 돈으로 오키나와를 사와 일본영토로 편입시킴)를 강점하고, 청일전쟁(1894년 6월-1895년 4월)에서 승리하여 아시아 최강을 증명한 후, 1895년에 타이완마저 점령하고, 10년 후엔 러일전쟁(1904-1905)에서 당시 서구열강에 속한 러시아를 격파한 후 서구열강과 동급으로 인정받는 문명대국으로 등장하여, 오늘날 일본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런 사실을 감안하여 이토의 실상과 허상에 대해 살펴봄으로써 21세기 한반도와 차기 대통령에 대한 진단과 그 해법에 대해 생각해보자.
1. 인품
(1)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승부사
이토는 어릴 때 약골(?: 젊어서는 몸이 빼빼 말라 호리병이라 불림)이었으나 친구와의 놀이에서 이길 가능성이 없을 경우엔 친구의 몸에 위해를 가해서라도 이기는 악착스런 근성과 영악스러운 기개가 있어 골목대장 노릇을 했다고 한다.
이런 냉혈적인 기질과 잔혹한 성격은 후일 일본에서의 고메이(孝明, 1831-1867)왕을 비롯해 정적(政敵)살인 및 영국공사관방화사건, 대한제국의 명성황후(明成皇后, 1851-1895)의 시해사건(1895년의 을미사변乙未事變 당시 총리), 1905년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대포를 남산에 배치하여 경복궁을 겨누고 군대로 대궐을 에워싼 뒤 고종황제와 대신들을 협박하여 강제로 체결한 을사늑약(乙巳勒約), 1907년의 고종황제(高宗皇帝, 재위 1863-1907, 1852-1919)의 강제퇴위의 관련 등에서 나타난다.
대한민국 내에서 안중근 참모중장의 이토의 저격사건이 없었더라면 ‘조일병탄’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넋 빠진 언어를 토해내는 쪼다들이 많이 있는데, 이자들은 거의 다섯 부류에 해당된다,
첫째, 악질친일세력과 일제사생아의 후손들
둘째, 뉴라이트역사관을 지닌 자들
셋째, 개구라로 가득 찬 일본논문이나 학설 또는 자료 등을 보고, 새로운 학설인 것처럼 국내에서 뻥치는 고등 사기꾼들(특히 올드 보이들)
넷째, 일본유학하거나 사업하면서 일본에 중독된 자들
다섯째, 일본으로부터 쩐 받아 처먹거나 섹스 등의 향응을 받은 짐승 이하의 작자들
일제의 ‘조일병탄’작업은 오랜 세월동안 한반도에서 도래한 사람들, 특히 백제계 일본인들의 무의식 속에서 내재된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의 르상티망 (ressentiment)을 실현한 것이다.
663년 백강전투(白江戰鬪; 일본어 白村江の戦い 백촌강의 전투)후의 백제완전멸망, 1592-1598의 ‘임진전쟁’(壬辰戰爭), 1597년의 ‘정유전쟁’(丁酉 戰爭)을 거치면서 요시다 쇼인(길전송음, 吉田松陰, 1830-1859)의 쇼카손주쿠(송하촌숙, 松下村塾)와 ‘유수록’(幽囚錄)에서 정한론(征韓論) 및 대동아공영론(大東亞共榮論) 그리고 태평양전쟁 등이 무르익고, 요시다의 제자들(이 가운데 이토가 제일 출세했음)은 이 작업을 완수한다.
(2) 호색한
이토는 가족에 대한 책임감이 없고 사생활이 문란하다고 고백한다.
“나는 원래부터 과욕이며 저축이라는 것을 모른다. 화려한 집에서 살고 싶어 하는 마음도 없거니와 많은 재산을 모을 생각도 없다. 단지 공무를 집행하고 시간이 남으면 유일한 취미란 기생들과 노는 것이 제일이다.”
이토가 초대조선통감으로 오게 된 것도 속설에 의하면 기생 때문이었다고 한다.
“남자는 배꼽 밑으로 인격이 없다”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고 전해지는 이토의 오입질과 유곽(遊廓)제도에 대한 이야기는 무진장(無盡藏)하는데 지면관계상 생략하지만, 대한민국의 현대사의 지도자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쳐 대한민국은 성문란으로 곤욕을 치르고 있다.
(3) 안하무인
메이지왕은 자신의 부친 고메이(孝明, 1831-1867)왕의 살해에 가담하고 자신보다 11년 대선배인 이토에게 완전히 쫄아서, 이토가 금연구역인 궁중 내에서도 궐련을 물고 다닐 정도로 안하무인(眼下無人)으로 행동하지만, 그저 바라보기만 했을 뿐이다.
메이지왕은 측근신하였던 사사키 다카유키(佐々木 高行)에게 이토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다음과 같이 밝힌다.
“이토와 같은 인물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이토는 기고만장하여 유럽에는 비스마르크가 있고, 청나라에는 이홍장이 있으며 일본에는 이토 히로부미가 있다는 식이었다.”
이또는 자랑스럽게 말한다.
“술이 취하면 나는 미녀의 무릎을 베고 쉰다. 술이 깨면 나는 권력의 고삐를 힘차게 잡아 쥔다.”
(4) 동양의 비스마르크
이토는 측근에게 “난 지금 당장 정치가 그만 둬도, 영어교사 정도는 할 수 있다”고 말하거나, 동료 정치가들에게 직접 번역한 영미신문 발췌본을 돌리기도 했을 정도로 영어를 잘 했다고 한다.
이처럼 이토는 영어에 능통하여 서구열강의 문물과 당시 세계정세를 잘 알뿐만 아니라 서구열강의 문화와 생활양식을 무척이나 좋아해 독일의 프로이센(독어 Preußen; 영어 프러시아 (Prussia)의 총리로 ‘철혈정책’(鐵血政策; 독어 Blut und Eisen Politik; 영어 the blood and iron policy)으로 독일을 통일한 오토 폰 비스마르크(Otto Eduard Leopold von Bismarck, 1815-1898)의 정치사상을 모델로 하여 약탈병탄의 군국주의의 길을 걷는데 첫 번째 희생국가가 대한제국이었다.
게다가 이토가 비스마르크의 광팬이라 비스마르크를 흉내 내며 콧수염을 기르고 항상 궐련을 입에 물고 다니는 헤비 스모커였고,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메이지왕을 무시하고 금연구역인 궁중 내를 활보할 정도로 안하무인성격인데, 망국으로 치닫는 대한제국의 고종황제 정도는 우습게 여길 정도였음을 감지할 수 있다.
2. 비천한 신분
이토는 한반도 도래(渡來)인이 많이 살던 조슈한(장주번, 長州藩: 일제 때 육군을 장악; 현재의 ‘야마구치현, 山口県, 山口縣, 산구현’)에서 처절할 정도로 빈궁(貧窮)한 하야시 주조(임십장林十藏)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토의 본명은 하야시 리스케(‘도시스케’라고도 읽는데 ‘리스케’가 올바른 발음?; 임이조林利助) 또는 하야시 인데 하야시에서 이토로 바뀌게 된 이유에 대해 많은 속설이 존재하지만 3가지 설만 소개한다.
첫째, 이토가 7세 때(또는 13세 때) 하급 무사 집안인 이토가(伊藤家)에 입양돼 성이 이토가 되었다.
둘째, 이토의 아버지가 하기한(추번萩藩)의 무사 집안인 미즈이(水井, 뒤에 伊藤로 바꿈)가(家)의 양자가 되어서 이또가 되었다.
셋째, 이토의 아버지가 조슈한의 주겐(中間: 무가의 고용인)계급인 이토 다케베에(이등무병위伊藤武兵衛)의 양자가 되면서 성을 하야시에서 이토(이등伊藤)로 바꾸고, 이토 역시 양 할아버지의 성을 따서 이토로 성을 바꾼다. 후에 이토 다케베에가 아시가루(족경足軽: 평시에는 막일에 종사하고, 전시에는 병졸이 되는 최하급 무사) 신분을 얻게 되자 이토도 무사 신분을 얻게 된다.
이토는 사실‘하야시’(임林)성 때문에 그리고 21세기 용어로 말하면 한국인들의 집성촌인 조슈한 출신, 게다가 한복을 즐겨 입으며 조선의 문화를 칭송 하는 등의 이유를 들어 백제계 일본인으로 간주된다. 이토는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성을 바꾸지 않으면 입에 풀칠하기조차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여 당시 야만의 일본을 근대화된 문명대국, 서구열강과 맞장 뜨는 나라로 만든 입지전적(立志傳的)인 인물이다.
3. 쇼카손주쿠 수학과 메이지유신주인공들과의 만남과 테러활동
16세인 1857년 이토는 구루하라 료조(래원양장來原良藏)來原良藏]의 주선으로 요시다 쇼인(길전송음吉田松陰, 1830-1859)의 쇼카손주쿠(송하촌숙松下村塾)에서 수학(修學)하며 부국강병(富國强兵; national prosperity and military power)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으면서 존왕양이(尊王攘夷; Revere the King, Expel the Barbarians)사상에 입각하여 바쿠후타도(토막討幕)와 천황의 직할 통치론을 수용하며, 자신보다 8세 많은 기도 다카요시(목호효윤木戶孝允, 1833-1877), 5세 많은 이노우에 분타(정상문다井上聞多, 후에 이노우에 가오루, 정상형井上馨로 개명, 1836-1915), 3세 많은 야마카다 아리토모(산현유붕山縣有朋, 1838-1922)의 똘마니 노릇을 하며 친숙한 선후배관계를 맺으며 후에 이들의 협조와 후원으로 대성공한다.
후에 기도는 사쓰마한(살마번薩摩藩: 일제 때 해군을 장악; 현재의 ‘가고시마 현鹿兒島藩녹아도번’)의 사이고 다카모리(서향융성西鄕隆盛, 1828-1877), 오쿠보 도시미치(대구보리통大久保利通, 1830-1878)와 함께 메이지유신을 성공시킨 이른바 ‘메이지유신 3걸’의 한 사람이 된다.
이노우에는 1863년 이토와 함께 영국에 유학하고 돌아와 바쿠후타도운동에 힘쓰며, 1876년 특명전권 부변리대신(副辨理大臣)이 되어 변리대신 구로다 기요타카(흑전청륭黑田淸隆)와 함께 내한하여, 조선정부에 운요호(雲揚號)사건에 대한 책임을 추궁하여 조일수호조약(朝日修好條約, 1876)을 체결하고, 1884년 전권대사로 다시 내한하여, 갑신정변(甲申政變, 1884: 김옥균을 비롯한 급진개화파가 개화사상을 바탕으로 중국청나라의 속방화정책에 저항하여 조선의 완전 자주독립과 자주 근대화를 추구하여 일으킨 정변)처리를 위한 한성조약(漢城條約, 1884)을 체결하며, 청일전쟁(淸日戰爭) 때인 1894-1895년 조선공사를 지낸다.
야마카다는 일제육군의 창설자로 1882년 메이지 천황의 이름으로 ‘황군’의 복무규율을 규정한 군인칙유(軍人勅諭)를 선포하며, 3대 총리로 재직할 때인 1890년 군국주의적인 교육관을 규정한 교육칙어(教育ニ関スル勅語)를 1890년 메이지 천황의 이름으로 반포하고, 주권선(主權線)과 이익선(利益線)에 입각한 일본의 전쟁개념을 선언하며, 청일전쟁에선 제1군사령관, 러일전쟁에선 참모총장으로 지휘한다.
1859년 이토는 자신의 스승인 요시다가 처형된 이후 자신보다 2세 위인 다카스기 신사쿠(고삼진작高杉晋作, 1839-1867)가 조직한 미다테구미(禦楯組)라는 조직의 조직원으로서 여러 테러활동에 가담한다.
실례를 들면 다음과 같다.
첫째, 1862년 다카스기가 이끈 10명의 영국공사단 습격단에 가담해서 이노우에 가오루와 함께 방화하는 역할을 맡음
둘째, 1863년 2월 바쿠후의 밀정인 우노 도카이 암살에 공범으로 가담
셋째, 일왕폐위의 전례를 알아봐 달라는 바쿠후의 자문에 응한 것으로 여겨지던 국학자 하나와 지로(장차랑墻次郞)와 그의 문하생 가토 고지로(화갑차랑畵甲次郞)를 살해
그리고 이토는 존왕양이 활동의 로를 인정받아 기도의 시종으로서 준무사(準士雇)로 한 단계 신분 상승을 한다.
4. 영국유학과 개화사상과 바쿠후의 타도
이토는 나이 22세인 1863년 5월 이노우에가 조슈한에 영국 유학을 건의하여 유학생 5명 중 한 명으로 선발되어 동년 5월말 이노우에를 비롯해 엔도 킨스케(遠藤謹助) 등 이른바 조슈한 5걸이라 불리는 청년 지사들과 함께 영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영국 런던대학교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University College London, Univ. of London)에 입학하여 화학(훗날 미국 예일 대학교에서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수여받음)을 전공하며 화학자인 알렉산더 윌리엄슨 런던 대학교 교수의 저택에서 하숙하면서 그는 영어와 영국식 예의범절의 지도를 받는다. 런던에서 영어 공부와 함께 박물관과 성곽을 방문하고. 해군 시설, 공장 등을 견학하여 견문을 넓힌다. 그는 유교의 대의명분론에 입각한 ‘존왕양이론’의 옹호자였으나 영국 유학 중 영국과 일본의 너무 압도적인 국력의 차이를 목격하고 ‘양이’를 버리고 개국론으로 사상을 전환하게 된다.
1년간 영국의 신문물을 견학하고 익히는 가운데 자국인 일본 내에서 서구열강에 대한 개항 이후 금과 원료 등이 대량으로 유출되면서 커다란 경제적 손실이 발생하자 에도 바쿠후의 개항정책에 대한 비판이 거세게 일어나고, 일왕 고메이(孝明, 1831-1867)도 바쿠후에 ‘양이’정책의 실행을 요구하는 칙서를 보내오자, 조슈한(장주번, 長州藩: 일제 때 육군을 장악; 현재의 ‘야마구치현, 山口県, 山口縣, 산구현’)이 총대를 메고 간몬해협(관문해협關門海峡) 봉쇄에 나서자 미국,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의 서구 열강이 이에 저항하는‘시모노세키전쟁’(하관전쟁下關戰爭; 시모노세키의 옛 지명을 따서 ‘바칸전쟁馬關戰爭’이라고도 부름; 1863. 7. 20.-동년 8. 14. 전투를 ‘시모노세키사건下關事件’, 1864. 9. 5.- 동년 9. 6.의 전투를 ‘시모노세키전쟁’이라고 구별)이 발발하자 이노우에와 함께 1864년 6월에 귀국하여 전쟁을 중재하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영국유학경험과 영국으로 가는 길에 들린 상하이에서 아편전쟁 이후의 중국의 실태를 실감하고, 영국에서 가졌던 개화사상을 다시 한 번 확인한다.
그리고 자신이 창설한 기병대를 이끌고 바쿠후타도의 선봉장역할을 하는 다카스기의 거병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다음과 같이 당시의 심경을 피력한다.
“내 인생에서 유일하게 자랑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이 때 가장 먼저 다카스기에게 달려온 것이다”
5. 이와쿠라 시세쓰단과 특명전권대사 미구회람실기
이토는 메이지유신 이후에 이토 히로부미로 개명하고, 영어의 능통을 인정받아 조슈한의 유력자로 정계에 입문하며, 1870년에는 화폐와 은행 제도를 조사하기 위하여 미국에 파견된다.
이토는 이와쿠라 시세쓰단(암창사절단岩倉使節団 또는 12개국 구미시찰단: 당시 46세의 특명전권대사인 이와쿠라 토모미岩倉具視의 이름을 따서 이와쿠라 시세쓰단이라고 부르며, 공식 사절단 47명을 포함해 수행원과 유학생까지 포함해 107명에 달하고, 기간은 1871년 12월 23일-1873년 9월13일 일까지, 곧 1년9개월28일)의 일원, 전권부사(全權副使) 자격(30세 공부대보 工部大輔직의 이토를 포함한 4명 가운데 유신 3걸인 조슈한 출신의‘38세 참의参議직의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 또는 옛 이름 가쓰라 고고로桂小五邮’, 사쓰마한 출신의‘41세 대장경大蔵卿직의 오쿠보 토시미치大久保利通’그리고 ‘32세 외무소보外務少輔직의 야마구치 나오요시山口尚芳’)으로 서양열강을 시찰한다.
메이지유신 이전 일본은 한반도로부터 선진문물을 전수받은 오랑케나라였음은 물론 한반도와 중국대륙으로부터 철저히 왕따 당하고 그로 인해 동아시아 질서에 편입되지 못하는 불운의 시대를 겪지만, 유럽의 항해시대가 개막되자, 당시 세계 최강인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의 남만학(南蠻學 또는 만학蠻學), 네덜란드의 란가쿠(난학蘭學: 당시 네덜란드는 ‘화란和蘭’이나 ‘아란타阿蘭陀’로 표기했기 때문에 에도시대에 네덜란드에서 전래된 지식을 연구한 학문을 말하고, 서양의 학문, 곧 ‘양학, 洋学’은 란가쿠 이후에 들어온 영국과 프랑스 학문을 가리킴)을 접하는 행운을 누린다.
임진전쟁 발발 10년 전인 1582년엔 가톨릭 소년 사절 4명이 로마 교황을 알현하고 돌아오며, 동양 최초의 구텐베르크 인쇄기도 이때 일본에 들어온다. 1613년 하세쿠라 쓰네나가(支倉 常長, 1571-1622)는 에도 초기 센다이한(선번태번仙台藩)의 영주(번주藩主)인 다이묘(대명大名, 지방 영주) 다테 마사무네(이달정종伊達政宗, 1567-1636)의 명으로 에스파냐인인 프란시스코회 선교사 루이스 소테로(Luis Sotelo)를 정사로 자신은 부사가 되어, 게이초(慶長) 유럽 파견 사절단 180여명을 이끌고 로마에 도착해 로마시민증과 작위를 수여 받고 돌아온다.
그리고 에도 바쿠후는 1860년에 미국 파견 사절단을, 1862년에 제1차 유럽 파견 사절단과 1863년에 제2차 유럽 파견 사절단을 보낸 바 있다.
이처럼 일본은 이미 당대 최강의 국가를 상대하면 선진문물을 배워왔다.
그러면 이와쿠라 시세쓰단에 대해 살펴보자.
이 사절단의 목적은 첫째, 개항하면서 무력에 눌려 미국과 영국 그리고 유럽 제국과 맺은 불평등조항을 동아시아의‘화이질서’(華夷秩序: 중국의 입장에서 중국이 주도하는 국제 관계)의 프레임이 아닌 미국의 국제법학자이며, 외교관인 헨리 휘톤 (Henry Wheaton, 1785-1848)이 1836년에 집필한‘국제법 원리’(Elements of International Law)에 기초한‘만국공법’(헨리 휘톤이라는 미국인이 1836년에 쓴 당시의 국제법 해설서)의 취지에 맞게 바꾸는 게 1차 목표였고, 두 번째는 서구열강의 선진문물을 습득하여 일본 근대화를 촉진하는 일이었는데, 첫 번째 임무는 서구열강의 저항에 부딪쳐 제대로 해보지도 못하고, 두 번째 임무만 수행한다. 직접 서구열강의 정치, 외교, 법률, 군사, 경제 등 다양한 신문물을 접하며 많은 국정을 비교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 동시에 동행한 유학생도 귀국 후 정치, 경제, 과학, 교육,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하여 일본의 문명개화에 크게 공헌한다.
오쿠보 도시미치는 훗날 초대 내무경이 되고(사쓰마한薩摩藩 출신이면서도 사쓰마 반란을 진압하고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를 제거한 일로 사쓰마 사무라이들에게 배신자로 낙인찍혀 1878년 황궁으로 향하는 길에서 암살당했음), 기도 다카요는 훗날 제2대 문부경, 이토 히로부는 훗날 총리대신이 되면서 메이지정부를 이끌어 서구열강과 맞장 뜨는 국가로 업그레이드 시킨다.
함께 도항한 유학생 가운데 나카에 초민(中江兆民)은 자유민주운동의 지도자가 되고, 가네코 겐타로(金子堅太郎)는 러일전쟁의 강화 조약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며, 쓰다 우메코(津田梅子)는 일본의 여성 교육 환경 개선에 공헌한다.
통역으로 참여한 니지마조(新島襄, 1843-1890)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 도시샤 여학교의 간호학과 학생들을 이끌고 종군 간호사로 참여한 니지마 야에(新島八重, 본명은 야마모토 야에코山本八重子, 1845-1932: 첫 남편 가와사키 쇼노스케가 폐렴으로 사망한 뒤 1876년 재혼하고 니지마 조가 1890년에 갑자기 사망하자 그의 뒤를 이어 도시샤 여학교를 이끔)의 두 번째 남편으로 도시샤 대학의 전신인 도시샤 영학교(同志社英學校)의 자매 학교인 도시샤 여학교를 설립한다. 쓰다 우메코(津田梅子), 아야마 스테마츠(大山捨松), 우류 시게코(瓜生繁子) 3명의 여성도 사절단에 동행하여 각 분야에서 사회에 공헌한다.
무엇보다도 커다란 수확은 러시아는 반(半) 문명국가임을 인식하는 동시에 소국이었다가 대국으로 성장한 독일의 프로이센이 유럽의 중심으로 부상했듯이 일본도 아시아의 맹주로 떠오를 수 있다고 자신감을 갖고, 프로이센에 열공하는 것이다. 프로이센의 철혈재상 비스마르크로부터 약육강식의 세계관을 배운다.
사절단이 비스마르크에게 프로이센이 강대국으로 성장하게 된 비결을 묻자 비스마르크는 이렇게 말한다.
“현재 세계 각국은 겉으로는 평화롭게 교류를 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대국은 소국을 얕보고 있으며 강국은 약국을 업신여기고 있다. 만국공법이 전 세계 각국의 권익을 보호해 준다고는 하지만 실상은 강국에게 유리한 것이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약소국이 그 주권을 지켜내는 것은 힘들다. 하지만 프로이센은 국력을 키워 대국과 대등한 위치에 설 수 있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국민들이 애국심과 오랜 노력으로 이제 그 꿈을 조금씩 이루고 있다”
비스마르크의 담론은 사절단 모두에게 성서의 진리로 확고하게 자리 잡는다.
근대화를 이룬 국가만이 문명국가로 평등한 대우를 받고 그렇지 못한 야만성과 반문명성의 국가들은 노예국가로 전락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자각하고 일제는‘강한 국력만이 살 길’이라는 국가적 신념으로 제국주의의 길을 선택한다. 그리고 프로이센이 위로부터 개혁하여 통일을 이루었고 뒤늦게 산업혁명을 추진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본과 유사한 입장임을 확인하며 비스마르크의 언설을 금과옥조 (金科玉條)로 여기며, 일제는 첫 번째 희생양으로 조선을 선택한다.
그러면 사절단이 유럽으로부터 배운 내용을 살펴보자.
첫째, 미국과 영국의 교훈
사절단은 1871년 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 샌프란시스코에 안착한 다음 철도를 통해 로키산맥을 넘고 미시시피 대평원과 시카고를 지나 1872년 1월21일 워싱턴에 도착한 후 피츠버그의 제철소를 견학한다.
영국을 방문한 사절단은 리버풀의 조선소와 글라스고의 제철 공장 등을 보고 감명을 받으며 미국과 영국으로부터 철도와 통신, 조선 및 제철기술을 배운다.
사절단의 귀국후 메이지정부는, 철도는 석탄, 철, 철강 등 중공업을 부흥시키는 견인차역할을 한다는 것을 깨닫고 영국으로부터 외채 100만 파운드를 빌려, 그 가운데 30만 파운드를 1870년 3월부터 철도 건설에 투자하여 제1호 기차를 1871년 제작하고 1872년 9월 도쿄의 신바시(신교新橋)와 요코하마(횡빈横浜) 구간 29km를 운행하고, 2년 뒤인 1874년에는 오사카-고베(대판大阪-신호神戶), 1877년에는 오사카와 교토(경도京都)사이에도 철도를 건설한다.
태평양전쟁당시 일본 해군 연합함대 사령관으로 1941년 12월 7일 진주만공격(眞珠灣攻擊, Attack on Pearl Harbor)의 책임자로 유명한 야마모토 이로소쿠(산본오십육山本 五十六, 1884-1943)는 자서전에서 1919년 미국에서 유학생활 중 경험, 곧 피츠버그를 갔을 때 하루 종일 자동차를 타고가도 제철소 굴뚝 연기만 보였다는 경험을 소개하면서 미국의 경제력과 제철능력 등을 고려할 때 일본은 미국을 이길 수 없다고 미국과의 전쟁을 반대하지만, 결국 1943년 미국 전투기에 격추되어 태평양전쟁 중에 사망한다.
둘째, 영국의 교훈
일제는 당시 세계 최고로 평가받던 영국해군을 모델로 해군조직을 지향하며, 영국 고문단을 초청하는 동시에 학생들을 영국에 파견하여 일본의 군함을 영국과 프랑의 조선소에서 제작하도록 한다.
셋째, 프랑스의 교훈
메이지 정부는 육군을 개선하기 위하여 나폴레옹1세(Napoleon I, Napoleon Bonaparte, 1769-1821)의 육군을 모델로 하여 두 차례(1872-1880, 1884)에 걸쳐 군사사절단을 일본에 초청하여, 프랑스의 육군체제를 기반으로 1873년 전국적으로 징병 실시를 통해 서양식 군대를 창설하고 군사학교와 무기고를 세운다.
1870년부터 1871년까지 프로이센과 프랑스가 에스파냐 국왕의 선출 문제를 둘러싸고 벌인 전쟁, 곧 프로이센프랑스전쟁(Preussen-France戰爭; 독불전쟁; 보불전쟁)에서 프로이센이 크게 이기며 독일통일을 이루는 것을 보고,
1886에는 프로이센 육군을 모델로 군사 제도와 조직을 개편하는데, 이것은 대한제국에 엄청난 영향을 끼쳐 지난 20세기 대한민국의 중고등학생복에 그 영향이 남아있을 정도였다.
넷째, 독일의 프로이센의 교훈
독일헌법과 법제도를 모델로 하여 메이지헌법이 태어나고,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프로이센 육군을 모델로 하여 일제의 육군이 창설된다.
다섯째, 독일 및 기타 유럽국가의 교훈
일제는 독일, 이탈리아 네덜란드 등 유럽의 각국으로부터 건축기술을 배운다.
1914년 독일 건축가 프란츠 발츠아와 일본인 타츠노 킨고(진야금오辰野 金吾)는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역(1984년)을 모델로 도쿄역을 건축하고, 도쿄역을 설계한 일본인의 제자인 쯔카모토 야스시(총본정塚本 靖)가 1925년 경성역(京城驛; 서울역)을 완공한다.
1995년과 1996년 사이에 철거된 중앙청(구 조선총독부) 건물은 다음과 같은 사람들이 참여하여 완공된다.
1912년부터 1914년까지 기초설계를 한 독일인 건축가 게오르크 데 랄란데, 이후 청사의 설계를 완성한 일본인 건축가 노무라 이치로, 구니에다 히로시 등의 수고로 르네상스 양식에 바로크양식과 네오르네상스 양식을 융합하여 1926년 완공된다.
1945년부터 2012년까지 서울시청으로 사용되다가 현재 서울도서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경성부청(京城府廳) 신청사(新廳舍)도 일본인들이 르네상스 양식으로 설계하여 1925년 기공하고 1926년 9월에 준공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사절단의 공헌은 장기간의 시찰을 방대한 기록으로 남긴데 있다.
대사수행 구메 구니다케(久米邦武: 도쿄제국대학과 와세다대학의 사학과 교수를 역임)는 방문보고서인 ‘미구회람실기’(米欧回覧実記)를 편찬해, ‘특명전권대사 미구회람실기’(米歐回覽實記, 5권)제목으로 발행한다.
구메는 “먼저 깨달은 사람은 그것을 후진에게 전하며 선각자는 후배를 깨닫게 함으로써 점점 진화하는데, 이것을 이름 지어서 진보라고 한다”고 하여, 서구의 문명발전단계설을 전적으로 지지한다.
6. 정한론
정한론(征韓論)은 에도 바쿠후 말기에서 메이지 초기에 일제가 외친 조선 침략론을 가리킨다.
21세기 대한민국 내에서 이토의 죽음이 일본의 조일병탄을 가속화했고, 무단통치를 불러왔다는 주장을 펴며 대한제국 의군 참모중장 겸 특파 독립대장 안중근의 위대한 애국애족행위를 조롱하는 일본 스파이들과 시다바리들이 즐비한데, 그것은 아주 잘못된 견해다.
위에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663년 백강전투(白江戰鬪; 일본어 白村江の戦い 백촌강의 전투)후의 백제완전멸망, 1592-1598의 ‘임진전쟁’(壬辰戰爭), 1597년의 ‘정유전쟁’(丁酉 戰爭)을 거치면서 요시다 쇼인(길전송음, 吉田松陰, 1830-1859)의 쇼카손주쿠(송하촌숙, 松下村塾)와 ‘유수록’(幽囚錄)에서 정한론(征韓論) 및 대동아공영론(大東亞共榮論) 그리고 태평양전쟁 등이 무르익어 오다가, 요시다의 제자들(이 가운데 이토가 제일 출세했음)은 프로이센의 비스마르크의 정치사상인 정글법칙에 입각해 서구열강들이 식민지에서 했던 비문명적이고 억압적인 지배를 휘두르며 완수한다.
일제는 처음부터 자신들이 당했던 1853년 미국의 동인도(東印度)함대사령장관 페리(Matthew C. Perry, 1794-1858) 제독의 5척의 함대(구로후네, 黑船, 흑선) 사건을 운요호사건을 통해 조선에 그대로 써먹고 후에는 강압적으로 조일병탄을 수행한다.
이런 사실에 근거해 볼 때 조일병탄작업의 시기조절에 대해 메이지정부 내에서 갈등이 일어난 것이지, 무단파(武斷派)와 문치파(文治派)의 구분은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독자들은 인식해야 한다.
그러면 조선정벌시기를 놓고 갈등하며 대립하는 메이지정부의 속살을 들어보자.
이토일행이 구미시찰을 마치고 돌아오자 메이지정부는 정한론으로 대분열을 맞는다.
‘메이지유신 3걸’의 한 사람인 사쓰마한(살마번薩摩藩: 일제때 해군을 장악; 현재의 ‘가고시마 현, 鹿兒島藩, 녹아도번’) 출신의 사이고 다카모리(서향융성西鄕隆盛, 1828-1877)를 비롯해 사카모토 료마(판본용마坂本龍馬, 1835-1867)와 동향인 도사한(토좌번土佐藩)출신의 이타가키 다이스케(판원퇴조板垣退助, 1837-1919), 사가한(좌하번佐賀藩) 출신의 에토 신페이(강등신江藤新, 1834-1874) 등이 정한론을 주장하자 귀국한 사절단, 곧‘메이지유신 3걸’의 두 사람, 사쓰마한 출신의 오쿠보 도시미치(대구보리통,大久保利通, 1830-1878)와 조슈한(장주번,長州藩: 일제때 육군을 장악; 현재의 ‘야마구치현山口県, 山口縣산구현’) 출신의 기도 다카요시(목호효윤木戶孝允, 1833-1877)를 비롯해 교토(경도京都) 출신의 이와쿠라 도모미(암창구시岩倉具視, 1825-1884), 이토는 시기상조라며 조선정벌시기를 늦추자고 반대의견을 표명한다.
사절단이 정한논쟁에서 승리한 후 오쿠보가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기도가 오쿠보의 정책에 반발하며 사임하자, 이토는 1875년 1월 오사카에서 오쿠보와 기도의 만남을 주선한다. 이토는 오쿠보를 비롯한 여러 선배 정치가들로부터 재차 두터운 신임을 얻으며 정치적 실력자로 부상한다.
7. 톈진조약체결, 초대내각총리대신, 최초의 헌법의 초안 마련과 양원제의회확립
1877년, 1878년에 이른바 유신삼걸로 불리던 사이고, 오쿠보, 기도가 모두 사망하면서 이토는 정권의 중심이 된다.
이토는 37세인 1878년 5월에 오쿠보의 후임으로 내무성(内務省; Home Ministry))의 나이무쿄(내무경內務卿)가 되며 오쿠보의 근대화정책을 이어간다.
1882년 이토는 메이지정부의 헌법제정을 위해 유럽에 건너가서 1883년 8월 귀국 할 때까지 1년 6개월 머무르며 헌법모델을 연구한다.
그러는 가운데 1884년 조선에서 일어난 갑신정변(甲申政變: 김옥균을 비롯한 급진개화파가 개화사상을 바탕으로 중국청나라의 속방화정책에 저항하여 조선의 완전 자주독립과 자주 근대화를 추구하여 일으킨 정변)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이토는 전권대사로 청국에 파견되어 1885년에 청일 양국군대의 철병을 약속한 톈진조약(천진조약天津條約)을 체결하고, 동년 44세 나이로 내각제도를 창설하여 스스로 초대내각총리대신이 되어 헌법 및 황실전범의 초안을 완성하고, 1888년 5월 8일에는 헌법 초안을 심의할 일왕의 정치자문기관으로 추밀원(樞密院)이 신설되자 총리를 사임하고 초대 의장이 된다.
이토는 영국의 입헌군주제의 형식을 취하면서 바쿠후(막부幕府)시대의 영주(번주藩主)인 다이묘(대명大名, 지방 영주)의 호족들과 전통적인 귀족들의 힘이 막강해 이들을 달래며 메이지정부의 통제 하에 두기 위해서 공작, 후작, 백작, 자작, 남작의 귀족제도를 두고 귀족의원으로 구성된 귀족원(상원), 백성들의 대표자로 구성 돤 중의원제도, 곧 양원제를 도입하여 민권과 귀족정치의 균형과 상호견제를 구상한다.
이토 스스로 1890년 양원제 의회가 수립되자 초대 귀족원의 의장으로 취임해 이런 정책을 직접 통솔하며 프랑스와 독일의 법제를 혼합하되 일본의 전통적인 천황숭배정신을 근대 서구열강의 정치제도와 결합한 헌법과 법을 제정한다.
천황 신성화를 법제화함으로써 천황은 신이요 일본은 천손의 자손이므로 주변의 어떤 민족보다도 위대하며 일본을 위해 다른 민족이나 인종이 희생하는 게 당연하다는 이데올로기가 창출된다.
1889년 2월 11일 공포되며 1890년에 시행된 천황중심의 군국주의의 메이지헌법(대일본제국헌법, 일본제국헌법, 제국헌법)은 일본으로 하여금 서구열강의 약탈적인 제국주의의 길로 지향하도록 한다.
이토는 헌법제정 공로로 욱일동화대수장(旭日桐花大綬章)을 받는다.
8. 대한제국과의 관계
이토는 1892년 2월, 추밀원 의장을 그만두고, 8월에 두 번째 총리대신 자리에 오른다.
메이지정부는 서구열강이 일본을 문명국으로 대접할 때까지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서구열강의 제도를 그대로 답습한다. 서구열강이 인정하는 문명국이란 전쟁을 주도하는 국가를 의미한다.
이토는 영국과 미국의 긴밀한 협조아래 청일전쟁에서 승리해 전권대사로서 1895년 4월 17일 시모노세키조약(하관조약下關條約; 중국식 표기로 마관조약馬關條約이라고도 불림)을 맺어 중국청나라로부터 일본의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는 동시에 당시 일본전체예산의 몇 배에 해당되는 배상금 2억 냥을 받아 산업화의 기초를 닦고, 전쟁의 의미를 제대로 인식하고 난 후엔 타국의 침략약탈에 의한 부국강병을 가속화한다.
청일전쟁의 전후처리가 마무리되자 논공행상에서 이토는 황족을 제외하고는 사상 처음으로 ‘대훈위국화대수장’(大勳位菊花大綬章)을 받는다.
청일전쟁에서 중국청나라를 조선에서 떼어놓았는데 러시아가 대한제국의 명성황후와 결탁하고 고종황제정부는 일본의 강압적인 내정개혁에 반대하자 이토는 일본공사를 자신과 동향인 조슈한 출신 육군 중장 미우라 고로(삼포오루, 三浦梧樓, 1846-1926)로 교체하고, 미우라는 명성황후 살해를 주도하며 그 시신을 불태운다.
일제육군의 창설자로 1882년 메이지 천황의 이름으로 ‘황군’의 복무규율을 규정한 군인칙유(軍人勅諭)를 선포하며, 3대 총리로 재직할 때인 1890년 군국주의적인 교육관을 규정한 교육칙어(教育ニ関スル勅語)를 1890년 메이지 천황의 이름으로 반포하고, 주권선(主權線)과 이익선(利益線)에 입각한 일본의 전쟁개념을 선언하며,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시 주요역할을 한 야마카다 아리토모(산현유붕山縣有朋, 1838-1922)와의 불화로 이토는 두 번째 총리대신의 자리에서 물러난다. 1898년 1월에 이토는 다시 총리대신이 되지만 이번에도 야마가타의 모략에 의해서 겨우 반년 만에 다시 무너진다.
1900년 9월 입헌정우회를 조직하고 스스로 그 총재 자리에 오르고, 후에 다시 총리대신을 맡다가 1901년 5월에 다시 총사직한다.
그리고 이토는 러시아와의 외교관계에 무게중심을 둔데 반해 가쓰라 다로(계태랑桂太郞, 1848-1913: 1901년 6월부터 제11,13,15대 내각 총리대신을 역임하며, 1905년의 가쓰라 태프트의 밀약의 주인공) 내각은 야마가타 계열의 문무관료 세력의 지원으로 영국과 동맹을 통해 러시아를 견제하고 대한제국과 만주의 침략을 계획하던 중 1902년 영일동맹이 결성된다.
일본은 서구열강의 발전에 압도되고 문명론에 세뇌되어 불평등조약의 수모를 참으며 노심초사 문명개화를 위해 노력하던 중 영일동맹을 맺음으로써 자신들은 영국과 같은 최선진의 문명인이 되는 듯한 착각에 빠지고, 착각은 우월감을 조장해 조선을 비롯한 대륙침략을 부채질한다.
그런데 독일 프러시아의 빌헬름 2세(Wilhelm II, 재위 1888-1918, 1859-1941)는 청일전쟁 후 일본을 경계하는 ‘황화론’(黃禍論; 독어 Gelbe Gefahr; 영어 Yellow Peril, Yellow Terror: 황색인종이 유럽 문명에 대하여 위협을 준다고 규정하여 황색인종을 세계의 활동무대에서 몰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던 정치론)을 주장하며 러시아를 부추겨 극동에서의 세력을 확장케 하여 영국과 대립하게 함으로써 영국을 극동에 묶어두고 자신들은 어부지리를 얻어 아프리카 식민지정책을 수행하는 노선을 취한다. 영국은 이에 대해 극동에서 자신들을 대신해 러시아를 견제할 대리인으로 일본을 선택한다.
일본은 조선, 만주의 식민지 지배를 놓고 러시아와의 전쟁을 수행하며,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서구열강으로부터 일류국가중 하나로 인정받는다.
가쓰라는 조선을 접수하기 위해 조선과 외교관계를 맺고 있는 열강의 묵인이 필요해 열강의 승인을 받는데 총력을 집중한다. 그는 1905년 7월 27일 신흥강국 미국과 태프트·가쓰라밀약(The Katsura-Taft Agreement)을 체결하여 필리핀은 미국이 먹고, 대한제국은 일본이 접수한다는 묵인을 받고, 8월 12일에는 영국과 제2차영일동맹을 체결하여 양해를 얻는다.
게다가 이토는 가쓰라의 승인아래 미국으로부터 조선의 지배를 한 번 더 확인받을 필요가 있어서 심복 가네코 겐타로(金子堅太郞: 이와쿠라 시세쓰단의 일원으로 미국유학생활 중 하버드에서 ‘시어도어 루스벨트대통령Theodore Roosevelt 재임기간 1901-1909, 1858-1919’를 만나 친구로 삼음)를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보내 문명국인 일본이 야만국인 조선의 접수를 인정하는 내용인 포츠머스조약(Treaty of Portsmouth)을 1905년 9월 5일 체결케 하고, 루스벨트는 이 조약으로 러일전쟁을 중재함으로써 1906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다.
가쓰라는 1905년 11월 추밀원장 이토를 고종 위문 특파대사(特派大使) 자격으로 대한제국에 파견하여 ‘을사늑약’(乙巳勒約)을 체결케 한다.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이완용, 권중현의 5명의‘을사오적’(乙巳五賊)이 태어난다. 이토는 ‘을사늑약’에 따라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내정을 장악하며 동년 12월에 대한제국에 통감부(統監部)를 설치하여 1906년 3월 초대 통감의 자리에 오른다.
고종은 을사늑약이 체결된 지 4일 뒤인 22일 미국에 체재중인 황실고문 호머 헐버트(Homer B. Hulbert, 1863-1949)에게 “짐은 총칼의 위협과 강요 아래 최근 양국 사이에 체결된 이른바 보호조약이 무효임을 선언한다. 짐은 이에 동의한 적도 없고 금후에도 결코 아니할 것이다. 이 뜻을 미국정부에 전달하기 바란다.”라고 통보하며 이를 만방에 선포하라고 명령한다.
이 사실이 세계 각국에 알려지면서 이듬해 1월 13일 ‘런던타임즈’지가 이토의 협박과 강압으로 조약이 체결된 사정을 상세히 보도하였으며, 프랑스 공법학자 레이도 프랑스 잡지 ‘국제공법’ 1906년 2월호에 쓴 특별 기고에서 이 조약의 무효를 주장한다.
이토는 1907년 을사오적을 중심으로 한 친일 내각을 구성하도록 하고,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세계에 알리고 이를 파기하고자 헤이그특사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킨다. 1907년 9월 고종을 강제 퇴위시킨 공로를 인정받아 이완용에게 가장 높은 작위인 공작을 수여한다.
이토는 1909년 6월 대한제국의 통감을 사임하고 추밀원 의장이 되어 표면적인 목적은 철도 및 경제 현안 논의였으나, 실질적으로 러시아로부터 대한제국의 지배권을 인정받는 대신 만주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을 인정하는 내용의 협의에 대해 러시아정부의 실력자인 재무상 블라디미르 코콥초프(Vladimir Kokovtsov, 1853-1943)와 회담하기 위해 만주 하얼빈(합이빈哈爾濱)을 방문하는 계획을 세운다.
이토는 일본의 근대화의 기초를 닦고, 총리시절 청일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일본 국내에서 뿐만 아니라 외국에서도 명망이 높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만주 행보는 열강의 언론으로부터 많은 조명을 받게 된다. 이때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던 독립군 조직 대한제국 의군 참모중장 겸 특파 독립대장(安重根, 1871-1910)도 신문을 보고 이토가 하얼빈에 온다는 정보를 입수하게 된다.
하얼빈 주재 일본 총영사 가와카미가 이토를 환영하는 일본인을 검문하지 말아달라고 러시아 당국에 요청하자 러시아 병사들은 동양인을 일본인으로 생각해 검문하지 않는다. 10월 26일 안장군은 일본인으로 오인한 러시아 헌병들에게 검문을 받지 않고 하얼빈역에서도 취재기자라며 일본 경찰을 따돌리고 15가지 조항을 들어 코콥초프와 함께 의장대를 사열하는 이토를 동양의 평화를 해치는 원흉으로 규정하여 총탄세례를 퍼붓는다. 흉부 등 급소에 세 발을 맞은 이토는 이송 중 과다출혈로 사망한다.
9. 평가
(1) 일본 내에서의 평가
이토는 40여 년간 장관, 총리(초대, 제5대, 제7대, 제10대), 전권대사, 정당(입헌정우회) 총재, 추밀원 의장(초대, 제3대, 제8대, 제10대) 등 정부 요직을 두루 거치며 일본 근대사의 주역으로 활동하며, 조선통감부 초대 통감으로 조선병탄의 기초를 구축한다. 미국, 영국, 러시아, 청나라와의 협상에 전권대사로 참여해 외교의 틀을 짜고, 메이지헌법(1889)의 초안 작성과 양원제(兩院制) 의회의 확립(1890)에 기여 등으로 일본에선 영웅 대접받는다.
그래서 이토는 1963년부터 1984년도까지 21년간 일본 1000엔권 지폐 도안인물로 자리 잡다가 1984년 이후 한국 및 중국과 경제교류가 늘어나면서 이 두 나라를 의식해 그 뒤 일본의 소설가, 평론가, 영문학자로 한일양(韓日洋)의 학문에 정통한 나쓰메 소세키(하목수석夏目漱石, 본명 긴노스케金之助, 1867-1916)가 그려진 지폐를 2004년까지 발행하다가, 현재는 독사 및 사독(蛇毒) 그리고 매독균 스피로헤타 팔리다의 연구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일본의 세균학자로 도쿄의 우에노온시공원(상야은사공원上野恩賜公園)에 동상이 건립되고, 고향인 후쿠시마현(복도현福島県)에 기념관이 세워질 정도로 ‘일본의 슈바이처’로 추앙받는 인물인 노구치 히데요(야구영세野口英世, 1876-1928)가 그려진 지폐를 사용한다.
그리고 생가 앞뜰에 도자기로 빚어 세워진 ‘이토 히로부미’상이 있다.
(2) 대한제국 의군 참모중장 겸 특파 독립대장 안중근의 평가
서론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안중근 의사가 개인 이토를 저격한 것이 아니라 천륜과 인륜을 저버린 일제군국주의의 심장을 향해 다시 태어나라고 총알세례를 퍼부은 것이다. 안장군이 재판정에서 밝힌 이토를 사살한 15가지 조항은 이를 증언한다.
1)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2) 고종황제를 강제로 폐위한 죄
3) 5조약과 7조약을 강제로 맺게 한 죄
4) 무고한 한국인들을 학살한 죄
5) 대한제국의 정권을 빼앗은 죄
6) 철도, 광산, 산림 등을 강제로 빼앗은 죄
7) 제일 은행권 지폐를 강제로 사용하게 한 죄
8)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시킨 죄
9) 조선인들 교육을 방해한 죄
10) 조선 유학생들의 유학을 방해한 죄
11) 국어, 역사책등 교과서를 모조리 불태워 버린 죄
12) 조선인이 일본인들의 보호를 받고 있다고 세계에 거짓말을 퍼트린 죄
13) 대한제국과 일본 사이에 경쟁이 쉬지 않고 싸움이 일어나는데 태평한 것처럼 천황에게 거짓보고를 올린 죄
14) 동양(아시아)의 평화를 깨트린 죄
15) 현 일본 천황(메이지 천황)의 아버지 태황제(고메이 천황)을 죽인 죄
그리고 안중근 특파독립대장의 ‘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 1910년 2월 14일 사형을 언도받자, 안 의사는 이를 집필하기 위해 사형집행 날짜를 한 달쯤 늦추도록 연기해 달라고 재판부에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이 때문에 원래 집필을 구상했던 ‘서문’, ‘전감’, ‘현상’, ‘복선’, ‘문답’ 가운데 중국 뤼순감옥에서 1910년 2-3월 동안 ‘서문’과 ‘전감1’ 만 작성되었고, 나머지 ‘현상 2’, ‘복선 3’, ‘문답’은 목차만 제시된 미완성의 논책임; ‘뤼순旅順여순’감옥은 최대 2000명까지 수용했던 동아시아 최대의 감옥으로 신채호 등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투옥했던 곳임)은 이토의 정치사상과 일제의 군국주의를 단죄한다. 그러면 그 내용을 간략하게 일별해보자.
“현시대의 세계는 ‘약육강식’의 시대이다. 동서로 나누어진 세계에서 각국이 서로 경쟁하고 ‘약육강식’을 정당화하면서 침략을 일삼는 것은 서양이 만들어 낸 생활방식이다.
동양은 서양의 침략을 받기 이전에는 학문과 덕치를 중시하고 자기 나라만 조심해 지켰을 뿐이지 서양을 침략할 사상은 없었다. 러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대의명분으로서 ‘동양평화를 유지하고 대한제국의 독립을 공고히 한다.’는 것을 내세웠다.
당시는 서세동점시대였으므로, 이것은 대의를 얻은 것이었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것은 일본이 강했기 때문이 아니라, 대한제국과 청국 양국 국민이 일본의 선전 명분을 믿고 일본군을 지원했기 때문이었다. 러일전쟁은 한국과 청국을 전쟁마당으로 했기 때문에 이 요인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대한제국과 청나라 양국 국민은 옛 원한을 접어두고 일본군에게 운수, 도로, 철도건설, 정탐 등에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일본이 선전포고문에서 ‘동양평화’유지와 ‘대한제국독립’ 공고화를 약속했으므로 그 대의가 청천백일 같이 밝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자, 바로 ‘동양평화’ 유지와 ‘대한제국독립’ 공고화의 약속을 지키지 않고 도리어 대한제국의 국권을 빼앗아서 대한제국 국민과 원수가 되었다. 이에 대한제국 국민들은 일본에게 속은 것을 깨닫고 의병을 일으켜 일본과 ‘독립전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일본은 군대를 파견해 이미 수만의 의병과 수백의 의병장을 학살하였다. 그러나 대한제국 국민들은 국권을 완전히 회복할 때까지 결사적으로 일본과 싸웠다. 청국은 일본이 한국을 침략한 다음에는 만주와 중국 관내를 차례로 침략할 것이라고 생각해 경계와 대책 수립에 부심하였다.
일본이 대한제국의 국권을 박탈하고 만주와 청국에 야욕을 가졌기 때문에 동양평화가 깨지게 된 것이다. 이제 동양평화를 실현하고 일본이 자존하는 길은 우선 대한제국의 국권을 되돌려 주고, 만주와 청국에 대한 침략야욕을 버리는 것이다.
그러한 후에 독립한 대한제국, 청국, 일본의 동양3국이 일심협력해서 서양세력의 침략을 방어하며, 한 걸음 더 나아가서는 동양3국이 서로 화합해 개화 진보하면서 동양평화와 세계평화를 위해 진력하는 것이다.“
‘동양평화론’에서 또한 안 의사는 한중일 3국간의 상설기구인 동양평화회의를 극동의 분쟁지인 요동반도의 뤼순에 조직해 기타 아시아 국가가 참여하는 회의로 발전시키고, 동북아 3국 공동은행 설립, 동북아 3국 공동평화군 창설 등의 구체적인 구상도 밝힌다. 이는 유럽연합(EU) 형태의 한중일 평화체제 구상론으로 100년이라는 시간을 앞선 것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박은식(朴殷植, 1859-1925)의 ‘한국통사’(韓國痛史, 1915)에 따르면 안장군은 뤼순감옥에 수감된 뒤 숱한 글씨를 200여 점을 썼다고 하는데 현재 확인된 것은 50여 점이다. 옥중에서 남긴 글씨도 이토의 정치사상과 일제의 군국주의를 단죄한다. 그러면 그 내용을 간략하게 일별해보자.
***칠언절구의 자작시
“암담한 동양의 대세를 생각해보니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기개있는 남아가 편안하게 눈을 감을 수가 없구나, 게다가 아직 동양 평화의 시국을 이루지 못한 것이 더욱 개탄스럽기만 한데, 이미 야욕에 눈이 멀어 정략 즉 침략정책을 버리지 못하는 일본이 오히려 불쌍하다”(동양대세사묘현유지남아기안면화국미성유강개정략불개진가련東洋大勢思杳玄有志男兒豈安眠和局未成猶慷慨政略不改眞可憐)
***왼쪽에 “경술삼월(庚戌三月) 여순옥중(旅順獄中) 대한국인(大韓國人) 안중근서(安重根書)”라고 묵으로 쓴 글씨와 왼손 장인(掌印, 손바닥으로 찍은 도장)이 찍혀 있는 유묵
“동양을 보존하기를 바란다면 우선 침략정책을 버려야 한다. 때가 지나고 기회를 잃으면 후회한들 무엇하랴!”(욕보동양선개정략시과실기추회하급, 欲保東洋先改政略時過失機追悔何及)
다음은 안장군의 행위가 옳고 이토의 정치사상과 일제의 군국주의가 그릇되었음을 단죄한다.
1) 미조부치 다카오(구연효웅溝淵孝雄) 검찰관의 조사
미조붙이 검찰관: (체구가 작고 단단한 30대 사내로 안경을 썼음) 나는 일본국 관동도독부 여순구 검찰관이다. 지금부터 그대를 신문할 것이니 솔직한 답변을 바란다.
안장군: 일본 검찰관이 무슨 자격으로 나를 신문하는가? 나는 대한제국 군인이다. 나를 신문할 수 있는 것은 대한제국이나 국제공법재판소뿐이다(안장군은 미조부치 검찰관의 신문을 거부한다)
검찰관: 대한제국 사법권은 일본이 대신하고 있다.
안장군: 그것은 일본인들의 생각일 뿐이다. 일본이 우리의 사법권을 탈취하지 않았는가?
검찰관: 나와 논쟁할 생각하지 마라. 그대가 신문에 협조하면 최대한 정중하게 대우해주겠다. 어차피 재판은 한다. 그대가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고 해도 재판이 진행될 것이다. 그대가 조사에 협조하면 나는 그대에게 정당한 견해를 밝힐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 그대의 진실이 조작되기를 바라는가?
안장군: 미조부치 검찰관의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허락한다. 그의 말대로 안장군이 이토를 사살한 진실이 오도되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검찰관: 이름은?
안장군: 어려서 이름은 안응칠, 지금은 안중근이라 부른다.
검찰관: 국적이 어디인가?
안장군: 대한제국이다.
검찰관: 직업은 무엇인가?
안장군: (잠시 생각에 잠기고 미조부치 검찰관이 기록을 멈추고 그를 쳐다본다) 대한제국 의국 참모중장 겸 특파 독립대장이다.
검찰관: 범행의 동기는 무엇인가?
안장군: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토의 15가지 죄상을 낱낱이 열거하여(위에서 언급한 내용 참조) 미조부치 검찰관을 경악하게한다.
검찰관: (미조부치 검찰관이 감격하여) 그대가 진술하는 말을 들으니 참으로 동양의 의사(義士)라고 할 수 있다. 그대는 국사범이니 절대로 사형당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안장군: 내가 죽고 사는 것은 논할 필요가 없다. 일본은 이토와 같은 대륙 침략주의자들 때문에 옳지 못한 정략으로 이웃 나라를 침범하여 화를 자초하고 있다. 이는 일본이 멸망하는 길을 재촉하는 것이니 검찰관은 속히 천황에게 고하여 바로 잡으라. 안장군은 당당하게 선언하고 지하 감옥으로 걸어 들어간다.
2) 마나베 재판장의 공판과 영국신문의 반응
1910년 2월 7일 오전 7시 공판에서 마나베 재판장이 최후진술을 하라고 말g하자 안장군은 이렇게 항변한다.
“...이번 거사는 나 개인의 자격으로 한 것이 아니라고 거듭 말했기 때문에 충분히 이해가 되었을 것이며, 국제 관계를 심리하면서 재판관을 위시하여 통역과 변호사까지 일본인들만으로 구성해 재판을 한다는 것은 잘못이다. 한국의 변호사도 있고, 내 동생도 와 있기 때문에 이들도 참여시키는 것이 옳다. 그러므로 이 재판은 심히 부당하게 진행되고 있다...(중략)...검찰관과 변호사의 논고나 변론의 요지를 들으면 이토 히로부미의 정책은 완전무결하며, 거기에 대해 내가 오해하고 있다는데 이는 진실이 아니다. 나는 이토 히로부미의 정책을 충분히 알고 있다.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통감으로 조선에 주재하면서 추진한 정책에 대해 상세하게 말하지 않았으나 이제 그 대요를 말하려고 한다. 1905년 5개조의 조약이 체결되었는데, 이는 소위 일본이 조선을 보호한다는 조약이다. 조선이 언제 일본의 보호를 원했는가. 이토 히로부미는 대한제국의 황제를 비롯하여 일본의 보호를 원한 사람이 없는데도 조선의 희망에 따라 조약을 체결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이 가증스럽고 교활한 자의 책동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 조약을 반대하기 위해 많은 우국지사들이 자결하고 의병이 일어났다. 조선이 희망한 것이라면 무엇 때문에 의병이 일어나겠는가. 그 후 이토 히로부미는 다시 조선에 와서 궁중에 침입하여 칼을 들고 대한제국 황제를 협박하여 정미7조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마침내 황제를 무력으로 폐위시켰다. 이것이 동양 평화를 위한다는 이토 히로부미가 한 일인데, 과연 조선의 은인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토 히로부미가 파렴치한 범죄자라는 것은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조선의 세 살짜리 아이도 안다. 이 때문에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일본은 군대를 동원하여 진압하면서 조선인 10만 명을 학살 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영웅이 아니라 간웅이며 침략자다.”
마나베 재판장이 진술을 계속할 것인가 하고 묻자, 안장군은 호연지기의 모습으로 이렇게 진술한다.
“좀 더 있다. 이번 사건은 결코 실수했거나 잘못한 것이 아니다. 개인적인 원한이 아니라 대한제국 의병으로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했으므로 나는 전쟁에 나가 싸우다가 포로로 잡힌 것이다. 나를 만국공법에 따라 대우하고 처리해주기를 희망한다. 이 재판은 무효다.”
마나베 재판장이 심리 종결을 선언하자 영국의 신문 ‘더 그래픽’의 찰스 모리머 기자는 장문의 기사와 함께 재판의 사진을 싣는다.
“세계적인 재판의 승리자는 안중근이다. 그는 영웅의 월계관을 쓰고 자랑스럽게 법정을 떠났다. 그의 입을 통해 이토 히로부미는 한낱 파렴치한 독재자로 전락했다.”
1910년 2월 14일 오전 10시 30분, 마나베 재판장은 안중근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3) 안장군가족에게 시신을 인도하지 않은 일제의 파렴치한 행위
안장군은 순국 당시 두 아우 정근, 공근을 면회한다. 안중근은 담담한 말로 아우들에게 유언을 받아쓰게 한다.
“내가 죽은 뒤에 내 뼈를 하얼빈 공원 옆에 묻어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면 고국으로 반장(返葬: 객지에서 죽은 이의 시신을 그가 살던 곳이나 고향으로 옮겨 장사지냄)해 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마땅히 우리나라의 국권 회복을 위해 힘을 다할 것이다. 너희는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 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안중근은 두 아우가 형의 사형 집행 전 마지막 면회임을 알고 비통해 하자 나무랐다.
"나는 티끌만한 상심도 없는데 너희가 왜 그러냐?"
그 말에 아우들도 마음을 가다듬자 차분한 목소리로 이른다.
"오직 늙으신 어머님께 효도를 다하라. 앞으로 정근은 공업에 종사하여 한국공업의 후진성을 벗어나는데 이바지해 주고, 공근은 학자가 되기를 바란다. 아들 분도를 꼭 신부로 만들어 달라."
안중근은 두 아우와 마지막 면회를 마치고 감방에 돌아온 뒤 어머니가 동생 편에 차입해준 흰 명주저고리와 검정바지로 갈아입는다. 그런 뒤 그 위에 흰 두루마기를 걸친 다음 이승에서 마지막 사진을 남긴다. 안중근은 두 간수가 양팔을 잡고 이끄는 대로 교형장으로 간다.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구리하라(栗原貞吉) 전옥이 사형집행문을 낭독한 다음 마지막 유언을 묻는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는가?”
“우리 대한국이 독립해야 동양 평화가 보존될 수 있고, 일본도 위기를 면하게 될 것이다.”
안장근의 말이 끝나자 형 집행 간수가 백지를 접어 두 눈을 가리고 그 위에 흰 수건을 둘러맨다. 그런 뒤 안장군을 부축, 계단을 오르게 하여 교수대 위에 세운다.
“잠시 기도할 시간을 달라.”
구리하라 전옥이 이를 허락하자 안장군은 교수대에서 3분 남짓 기도를 드린다. 그 기도가 끝나자 안장군의 목에 밧줄이 드리운다. 그때가 오전 10시 4분이다. 곧 흰 천이 내리고 철거덕 교수대 밑 마루가 내려가는 소리가 난다. 그로부터 15분 뒤, 뤼순감옥 전속의사가 바닥에 떨어진 안중근 의사의 절명을 확인한다.
사형 집행 후 안장군의 두 동생은 뤼순감옥 측에 안장군의 유해인도를 강력하게 요구하지만 끝내 일본은 ‘사망자의 친족이나 사체 인도를 요구하면 언제든지 이를 교부할 수 있게 한다’는 감옥법이 존재함에도 이를 들어 주지 않는다.
그 이유는 안장군의 유해가 대한제국에 환국되면 독립운동이 거세게 시작될 것을 우려하는 동시에 그의 무덤이 항일운동의 거점이 될 것을 염려하였기 때문이다.
2) 치바 도시치 가문과 다이린지
하얼빈 일본영사관에서부터 안장군을 호위하고 뤼순감옥 수감 동안 내내 간수로 복무한 일본 육군 관동도독부 소속 상등병 헌병이었던 치바 도시치(천엽칠천千葉十七, 1885-1934)와 그 가문 그리고 안중근의사의 위패를 안치하며 안중근의 추모행사를 연중행사로 치르는 일본의 혼슈(本州) 북부 미야기현(궁성현宮城県) 구리하라(율원栗原)시에 있는 다이린지(대림사大林寺) 사찰과 1981년 3월 26일 다이린지에 세워진 ‘위국헌신군인본분’(爲國獻身軍人本分)이 쓰인 ‘안중근 의사 현창비(顯彰碑)’(이 비석 뒤에는 당시 미야기현 야마모토 소이치로山本壮一郎 미야기켄宮城県 지사의 “안중근 의사의 기일忌日을 맞아 한일양국의 영원한 우호를 기념하며”라고 새겨진 현창비문이 있음)는 안중근 의사의 행위가 옳고 이토의 정치철학과 일제의 군국주의가 그릇되었음을 고발한다.
당시 24세 치바는 처음엔 안의사를 미워 했으나, 안장군의 언행은 말 그대로 국가의 운명을 걱정하고 민족의 독립과 명예를 지키기 위해 몸을 바친 청렴한 인격의 선비임을 인식하고, 안의사의 인품과 정신에 존경을 하게 되며, 대한제국 독립군과 일본군, 사형수와 감옥 간수, 가톨릭 신자와 불교도라는 장벽을 넘어 서로 존경하며 깊은 우정을 나눈다.
치바는 “이 사람이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면 훌륭한 대통령이 되겠구나!”할 수 있을 만큼 안의사에 대해 깊은 경외심을 갖는다.
안장군은 인생의 멘토로 치바와 우정을 나누며 순국 직전 치바에게
‘위국헌신군인본분’(爲國獻身軍人本分: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는 것은 군인의 본분이다; 爲國獻身軍人本分 庚戌三月 於旅順獄中 大韓國人 安重根 謹拜)라는 유묵을 전했는데 그 유묵은 일본 대림사에 보존되어 있다가 뒤에서 언급하겠지만 대한민국 안중근 의사 숭모회으로 돌아온다.
눈물로 안장군의 마지막 길을 배웅한 치바는 뤼순감옥 근무를 마치고 간수직을 퇴직하며, 고향으로 돌아온 뒤 센다이(선대仙臺)에서 철도원으로 근무하면서 자신의 집 한편에 안장군의 반명함판 사진과 이 유묵 족자를 신주처럼 모신다.
그는 그곳에서 아침저녁으로 20년간 안장군의 명복을 빌었고, 1934년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면서 아내에게 자신이 죽은 후에도 안장군의 유묵을 소중히 간직하고 자신과 안장군의 위패를 함께 모셔 조석으로 공양하라고 유언까지 남겨 그의 아내 기츠요도 남편을 따라 1965년 74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아침저녁 안장군의 사진과 유묵 앞에서 예를 드린다. 그들 부부는 후사가 없자 조카 미우라 구니꼬를 양녀삼아 이 일을 잇게 했고, 미우라는 1979년(안 의사 탄생 100주년) 이 유묵‘위국헌신군인본분’을 한국 안중근 의사 숭모회(회장 : 황인성 전 국무총리)에 기증한다.
치바 도시치의 후손 지바 세이이치는 증조부인 치바 도시치의 유지를 받들어 104년을 이어서 안중근 의사의 정신을 인생의 멘토로 평생 기리며 살고 있다. 치바 세이이치는“저의 증조부께서는 자신의 상관인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인물임에도 그의 훌륭한 인품에 반해 안중근 의사를 존경하게 됐다”고 말한다.
사형직전 마지막 소원을 묻는 질문에, 안의사는“아직 책을 못다 읽은 부분이 있으니 5분만 시간을 달라”하여 조용히 책을 읽은 다음 사형이 집행되었다는 데서 가슴 저리며 영웅 안중근의 태산을 발견한다.
안장군의 옥중서거는 1910년대를 뛰어넘어 일제강점기 내내 독립운동의 좌표가 된다.
안장군이 처형된 지 3주 뒤인 1910년 4월 국내에서 발행된 ‘근세역사’는 안장군의 출생에서부터 공판과정과 사형당하는 순간까지 안장군의 의연한 모습을 구체적으로 묘사하여 대한제국국민들에게 자주독립의 중요성을 각인시킨다.
뿐만 아니라 1910년대에만 6종의 안중근 전기가 출간되고 그의 사진과 기념 달력, 엽서가 발간되는데, 이는 대한제국이 일제의 노예국가가 아님을 세계에 선언하는 것이다.
지난 2002년 구리하라시 쿠리코마쵸의 유지들로 구성된 교양 친목 단체 사담회(史談會)가 주축이 되어 청운사(靑雲寺)사찰 입구에 안중근의사와 치바 도시치 선생의 현창공양비(顯彰供養碑)를 세웠으며, 매년 9월 1일 현창공양법요를 거행하고 있다.
3) 당시 하얼빈 역 플랫폼에서 안 의사의 총탄을 발에 맞았던 다나카 세이지로 만철이사의 회고담
“나는 당시 현장에서 10여 분간 안중근을 볼 수 있었다. 그가 총을 쏘고 나서 의연히 서 있는 모습을 보는 순간, 나는 신(神)을 보는 느낌이었다. 그것도 음산한 신이 아니라 광명처럼 밝은 신이었다. 그는 참으로 태연하고 늠름했다. 나는 그같이 훌륭한 인물을 일찍이 본 적이 없었다.”
4) 뤼순 감옥의 또다른 간수였던 마사즈미 다이헤이요산업 회장의 할아버지
마사즈미 회장은 조부가 안의사로부터 받은 유묵 ‘언충신행독경만방가행’(言忠信行篤敬蠻邦可行: 말이 성실해 믿을 만하고 행실이 돈독 경건하면 오랑캐 나라에서도 이를 따른다)을 한국에 기증했다.
5) 일본 규슈 사가현(좌하현佐賀縣) 무량사(無量寺)에 세워진 ‘안중근의사 동양평화기원비’의 비문
이토야마 여사는 안장군이 동북아의 공동 번영을 염원하며 백여 년 전 설파했던 ‘동양평화론’에 깊이 감화받고 심취하던 가운데 부녀자 모임이 있을 때마다 회원들에게 안장군의 숭고한 평화정신을 전파하고, 회원들도 점차 안장군의 생애와 사상을 숭모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마음이 합해져 결국 2011년 3월 16일 ‘동양평화기원비’를 세운다.
6) 구마모토현 기쿠치시 직원인 쓰루 게사토시
그는 한국의 안중근기념관에서 안의사의 행적과 글을 보고난 뒤 매료되어 개인적으로 안장군을 연구하며, ‘가톨릭교인 안중근’이라는 책을 출간하여 안장군이 거사를 하기까지의 인간적인 고뇌의 발자취를 기술하였다.
7) 작가인 가네시타 다쓰오도
그는 역사에 관심을 갖던 중 안장군의 매력적인 인격에 감화 받아서 안장군이 이토를 저격한 뒤 감옥에 갇히고 사형선고를 받고 순국하기까지의 과정 속에서 보여준 고결한 인품의 안장군상을 담은‘간카’(寒花)라는 공연 작품을 만들어 97년 도쿄에서 초연했는데 일본 내에 적잖은 반향을 일으켰다
8) 위안스카이
중화제국 초대 황제이면서 중화민국 총통을 지낸 위안스카이(원세개袁世凱, 1859-1916)는 “안장군은 잠자는 중국인들을 깨우쳐 준 위대한 군인”이라고 평가한다.
9) 조지훈
청록파 시인 중 한 명인 조지훈(趙芝薰, 본명은 조동탁趙東卓, 1920-1968)의 안중근 의사찬(安重根 義士讚)
“쏜 것은 권총이었지만/그 권총의 방아쇠를 잡아당긴 것은/당신의 손가락이었지만///원수의 가슴을 꿰뚫은 것은/성낸 민족의 불길이었네./온 세계를 뒤흔든 그 총소리는/노한 하늘의 벼락이었네.///의를 위해서는/목숨도 차라리 홍모(鴻毛)와 같이/가슴에 불을 품고 원수를 찾아/광야를 헤매기 얼마이던고///그 날 하얼빈 역두(驛頭)의/추상같은 소식/나뭇잎도 우수수/한때에 다 떨렸어라.///당신이 아니더면 민족의 의기를/누가 천하에 드러냈을까/당신이 아니더면 하늘의 뜻을/누가 대신하여 갚아 줬을까……….”
10. 교훈
위에서 논한 바와 같이 이토는 대한제국의 원흉(元兇)이다. 어른이 어린아이에게 배워야 할 것이 있듯이, 이토에게도 한반도와 차기 대통령에 대한 진단과 그 해법을 제공해주는 교훈이 있다. 그러면 그것에 대해 살펴보자.
(1) 국정운영목표
이토의 정치사상을 통해서 당시 메이지정부의 국정운영목표를 읽을 수 있다. 그것은 우뇌형의 대한민국처럼 추상적이며 즉흥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며 실용적이다.
이토가 당시 반문명국가인 일제를 근대화된 문명대국으로 만들기 위해 모델로 삼은 나라는 서구열강, 특히 독일의 프로이센이고, 프로이센의 비스마르크를 자기의 스승으로 삼았다.
독일의 프로이센과 비스마르크가 추구한 정치노선은 무엇인가? 그것은 귀가 아프도록 들어온 ‘부국강병’과 ‘전쟁을 통한 식민지확보’다. 한마디로 말하면 ‘약육강식의 정글의 법칙’추구다. 이토와 메이지정부는 구체적으로 첫 번째 희생 국가로 대한제국을 택하여 자기들의 식민지국가로 삼아 구미열강으로부터 선진국 대접받고 경제부도 획득하는 실용주의 노선을 걷는다.
그런데 21세기 대한민국은 추구해야 할 모델이 구미선진국이 아니라 한심스럽게도 홍콩, 싱가포르, 두바이, 스위스, 북유럽국가 등의 아주 조그마한 도시국가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모델국가가 부재하다. 최소한도 통일을 이룬 독일을 모범으로 삼아야 하는데, 전혀 독일과 기질이 맞지 않기 때문에 말만 풍성하지 본심은 아니다. 그래서 대한민국식의 한반도통일엔 원칙이 없음은 물론 이전 정부와의 일관성조차 유지하지 않고 지도자의 기질과 성격에 의한 제멋대로의 정책이라 구미선진국은 대한민국을 조롱하고 있다.
그리고 대한민국정부는 다음과 같은 아주 중요한 사실을 망각하며 뻥만 크게 까고 있다.
북한은 물론 중러일은 자국을 보호하기 위해 북한은 ‘핵, 경제 병진노선’, 중국은 ‘순망치한’(脣亡齒寒), 러시아는 ‘부동항(不凍港: 겨울에 얼지 않는 항구)구축’, 일본은‘주권선’(主權線)과 ‘이익선’(利益線) 그리고‘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 등의 이데올로기를 고수하고 있고 미국은 군산복합체(military-industrial complex)부흥을 통한 경제부흥과 자국안보 그리고 미래의 우주전쟁을 대비한 최첨단우주과학시대주도를 위해 미사일 방어(MD)체계 확산을 지향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대한민국정부는 세 가지의 교훈을 읽어야 한다.
첫째, 김일성세습독재수령체제의 살인마 김정은과 그 측근은 절대로 핵을 포기하지 않는다. 중러가 협조하지 않는 대북제재는 그 실효성에 의문부호를 수없이 붙이고 있고, 지금 오바마 정부가 임기가 거의 끝나는 막판에 그리고 오랜 세월동안 북핵진화에 무관심하다가 갑자기 ‘김정은 枯死작전’을 외치는데, 그것은 현 정권에서 대한민국에 사드배치하여 MD체제를 구축하려는 꼼수를 두고 있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둘째, 미국을 비롯해 중러일은 한반도통일을 원하지 않고 한반도영구분단을 지향하고 있음을 추정할 수 있다(러시아에 대해선 지면 관계상 추후 논하겠음).
셋째, 미중러일은 자기들의 경제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한민국이나 한반도를 전쟁터로 만들어 석기시대로 환원시키거나 세계역사나 지도상에서 없애려고 벼르고 있다는 인상을 보여주는 듯하다.
이런 국제정세를 읽고 국가를 운영해야 하는데, 차기 대권후보자들을 보면 모두 대통령 편집증을 치료하려고 자주국방기초위에 대한민국식의 한반도통일완성에 대해선 전혀 관심조차 두지 않고 누구나 말할 수 있는 개헌타령, 비핵화추진 등의 헛소리만 해대며 오두방정을 떨고 있다.
이토를 비롯해 메이지지도자들은 모두 하나의 목표, 곧 반문명국가인 일본을 서구열강이 인정하는 문명대국으로 만들기 위해 전쟁을 통한 식민지확보에 매진했는데, 대한민국정부는 물론 차기 대권후보자들 가운데 대한민국식의 통일한반도의 초석을 놓겠다는 사람이 단 한명도 없어 매우 유감이다.
(2) 동맹의 의미
이토와 메이지정부는 ‘동맹’의 의미를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그것은 전쟁을 통한 식민지확보와 경제부흥을 위한 것이다.
식민지확보와 경제부흥의 두 원칙이 맞을 때는 일제는 미국, 영국과 견고한 동맹관계를 유지하다가, 두 원칙이 빗나가자 일제는 실패할 것을 예상하면서도 무모하게 태평양전쟁을 주도했다. 하늘의 대심판으로 파멸로 끝났지만 지난 시절을 거울로 삼아 현재 아배정부는 동맹의 의미를 정확히 인식하고 미국의 MD확산정책에 적극적으로 협조하며 제3차 세계대전, 우주전쟁을 준비하고 있다.
그런데 대한민국에선‘핵무기소유’에 대해 알레르기성반응을 보이는 자들이 즐비함을 보고 필자는 아연실색(啞然失色)한다. 이자들은 거의 모두 미국이나 일본, 중국으로부터 금품, 특혜, 향응 등을 제공받는 미국스파이, 일본의 시다바리, 중국의 꼬봉으로 추정되며 그렇지 않으면 언론주목 받고 정치에 입문하려는 극단적 이지주의자들이라고 여겨진다.
이제 부터 필자는 핵무기소유에 대해 필요이상으로 강하게 저항하는 자들을 예의주시하겠다.
차기 대통령후보는 반드시 수긍할 때까지 미국의 차기대통령과 정치가들에게 대한민국식의 한반도통일을 성취시켜준다면 한반도는 미국우선정책, MD체제구축을 위해 앞장서겠다고 약속하며 졸라야 한다.
김일성세습독재수령체제의 핵 프로그램에 대한 해법은 대한민국의 자주국방완성이다. 대한민국이 핵을 비롯해 핵미사일, 핵잠수함 등을 소유하고 우주전쟁을 대비한 최첨단우주과학기술시대를 열면 북한은 물론 미중러일로부터도 강대국대접을 받음은 물론 미중러일을 배체한 채 북한과 대화하면서 대한민국식의 남북통일을 주도할 수 있고, 후일 중러일과의 영토전쟁에서도 대승할 수 있다.
11. 나가는 말
차기 대통령의 자격조건은 딱 하나다. 대한민국식의 남북통일을 이루는 것이다. 이것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자주국방완성이다.
투명하며 공정한 군산복합체(軍産複合體; military-industrial complex)육성, 최첨단우주과학시대개막 등은 안보다지기 뿐만 아니라 고급일자리창출로 경제효과를 얻음은 물론 미중러일로부터 강대국대접받는 동시에 미중러일과 더불어 5강시대를 누리며, 궁극적으로 골드만 삭스가 예언한 대로 미국과 더불어 세계를 리드하며 ‘홍익인간 이화세계’이념을 전 세계에 전파하는 위대한 한반도가 될 것이다.
구약성서의 요엘 예언자는 자주국방의 당위성을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8.이제는 내가 유다 사람을 시켜서, 너희의 아들딸들을 팔겠다. 유다 사람은 너희 자녀를 먼 나라 스바 사람에게 팔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9.너희는 모든 민족에게 이렇게 선포하여라. 전쟁을 준비하여라! 용사들을 무장시켜라. 군인들을 모두 소집하여 진군을 개시하여라! 10.보습을 쳐서 칼을 만들고, 낫을 쳐서 창을 만들어라. 병약한 사람도 용사라고 외치고 나서라.”(새번역. 요엘 3:8-10)
신약성서는 자유와 독립의 중요성에 대해 이렇게 선언한다.
“1.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셔서 우리는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마음을 굳게 먹고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공동번역. 갈라디아서 5:1)
“32.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개역한글. 요한복음 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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