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와 정의의 나라/신학 이야기

후쿠자와 유기치의 철학에서 고찰한 21세기 한반도와 차기 대통령에 대한 진단과 그 해법!

아우구스티누스 2016. 9. 26. 13:13

일본사에 무관심하거나 피상적으로 아는 일본인일 경우 전국시대를 좋아하지만, 일본사를 탐독한 일본일 경우 일본 근대사를 좋아하며, 일본 근대사를 어리숙하게 아는 일본일 경우 사카모토 료마(판본용마, 坂本龍馬, 1835-1867)를 칭송하지만, 일본사를 좋아하며 정통한 일본일 경우 후쿠자와 유키치(복택유길, 福澤諭吉 1835-1901)를 높이 평가한다고 한다.


‘일본의 볼테르’, ‘무위무관(無位無官)의 재야사학자’, ‘메이지 정부의 스승’, ‘일본 근대화의 총체적인 스승’, ‘천부인권론자’, ‘시민적 자유주의자’, ‘일본에도 민주주의 사상이 있었다는 근거로 이상화된 인물’,‘술꾼’이라는 화려한 단어로 덧 입혀진 후쿠자와 유기치는 19세기 일본의 최고의 학자이자 교육가이자 언론인이다. 그는 한국이나 중국에서 청일전쟁을 ‘문명과 야만의 전쟁’으로 간주하며 제국주의 이데올로기를 신봉하는 국가이기주의자, 과격 극단적 민족주의자라고 비판받지만, 한국 최고액권인 만원권의 주인공이 세종대왕이라면 일본 최고액권인 만엔권의 주인공 자리는 반세기 이상 차지할 정도로 그는 일본인들에게 ‘국부’(國父)다. 그 이전 지폐속의 인물은 쇼토쿠타이시(성덕태자, 聖徳太子, 574-622)다.

 

필자는 일본의 논문을 비롯해 모든 출판물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신라의 삼국통일에 악감정과 망국의 슬픔을 품은 백제의 망명지식인이 국수주의적 사관(史觀)에서 자신들의 입맛대로 가공한 712년의 고지키(고사기, 古事記: 고대 일본의 신화·전설 및 사적을 기술), 720년의 ‘니혼쇼키’(일본서기, 日本書紀)처럼 일본의 모든 출판물은 포스트구조주의의 대표적인 철학자 프랑스의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인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 1929-2007)의 용어로 말하면 ‘시뮬라크르’(라틴어 simulacrum; 프랑스어 simulacre), ‘하이퍼리앨리티’(hyper-reality)이고 부정적인 언어로 말하면 ‘뻥’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기(詐欺)에 앞장 선 사람으로 일본역사소설의 황금기를 열어 국민작가가 되었고, 일본역사소설을 완성시킨 소설가 시바 료타로(사마료태랑; 司馬遼太郞, 1923-1996), 추후 뒤에서 언급하게 될 마루야마 마사오(환산진남丸山眞男, 1914-1996) 등을 들 수 있다.


후쿠자와는“작은 야만국인 조선은 우리의 속국이 되는 것을 기뻐해야 한다”며 ‘다츠아뉴오’(탈아입구, 脫亞入歐)를 외친 야만 선구자다.

 

그러면 군국주의주창자인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伊藤博文, 1841-1909)의 정치적 라이벌인 후쿠자와 유기치의 사상의 실상과 허상을 설펴봄으로써 21세기 한반도와 차기 대통령에 대한 진단과 그 해법을 제시하고자 한다.

 

1. 가정환경에서 비롯된 투사현상과 희생양 만들기

 

후쿠자와는 규슈(구주, 九州) 오사카 도지마(堂島)에 있는 나카쓰 현(중진번, 中津藩: 오늘날의 오이타大分 현)의 하급사무라이집안에서 2남3녀 중 막내로 태어나 1836년에 아버지를 여윈다.

 

아버지는 성리학에 관심이 많았지만 보잘 것 없는 가문에서 태어나 나카Tm 현에서 하는 일은 회계담당 겸 창고담당이었고, 형 역시 저명한 성리학자이지만 꽃을 피우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죽는다. 후쿠자와는 아버지와 형의 죽음을 보고 실력이 있어도 성공할 수 없는 사회제도, 곧 유교사상의 산물인 봉건제도, 신분제도 그리고 문벌제도 등의 차별주의에 대해 강한 증오감을 품으며 타파해야 한다는 신념을 품는다.

 

현대 분석심리학의 창시자인 칼 구스타브 융(Carl Gustav Jung, 1875-1961)의 용어인 ‘투사(projection: 주체가 자신 속에 존재하는 생각, 감정, 표상, 소망 등을 자신으로부터 떼어내 그것들을 외부 세계나 타인에게 이전시켜 그 곳에 존재하는 것처럼 만드는 심리적 작용을 말함)현상’과 욕망의 삼각형 이론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문학평론가 르네 지라르(Rene Girard, 1923-2015)의 ‘희생양’이론이 후쿠자와의 사상과 융합하여 무의식세계 깊숙이 똬리를 틀고 있다.

 

그는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내가 성장한) 나카쓰라는 마을에서 나를 가장 불행하게 한 것은 관직과 신분상의 억눌림이었다. 공식적인 경우 뿐 만 아니라 개인적인 만남에서, 또는 어린이들 세계에서조차 높고 낮음의 구별은 뚜렷이 규정되었다. 우리와 같은 낮은 사무라이 집안 출신 어린이들은 높은 사무라이 집안 출신 어린이들에게 공손하게 말해야 했지만 이들은 늘 우리에게 오만한 언사를 쓴다.”


“학교에서 나는 가장 우수한 학생이었고 어떤 어린이도 그 곳에서는 나를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교실 바깥에서 그들은 나보다 윗 계급으로서의 위엄을 보였다. 그러나 나는 육체적인 힘에서조차 조금도 처지지 않는다고 확신했다. 나는 어린아이였지만 이 모든 면에서 불만을 아니 가질 수 없었다.”

 

이런 사상이 이렇게 진화한다.


1885년 3월 16일자‘파괴는 건축의 시작이다’라는 제목으로 지지신보(시사신보, 時事新報: ‘산케이, 産經신문’의 전신)의 후쿠지와의 담론


“중국과 조선은 우리 일본에게 일체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 서양 문명인의 눈으로 본다면, 삼국의 영토가 서로 접해 있기 때문에 중국과 조선처럼 우리 일본을 평가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러므로 우리 일본은 오늘의 발전을 도모하는 데 있어서 이웃 나라의 개명(開明)을 기다려 함께 아시아를 번영시킬 만큼 여유롭지 못하다. 오히려 우리는 아시아 국가들에서 벗어나 우리의 운명을 서구의 문명국가와 함께 하는 것이 낫다. 중국청나라와 조선 역시도 이웃나라라고 해서 특별히 봐줄 것이 아니라 서양인들이 이들과 접촉하는 방식에 따라 대우하면 될 것이다. 나쁜 친구와 친하게 되면 악명(惡名)을 피할 길이 없다. 터럭만큼도 도움이 안 되는 나쁜 친구(惡友)와 친해져서 함께 악명을 뒤집어 쓸 이유가 없다. 우리는 마음으로부터 아시아 동방의 나쁜 친구들을 멀리해야 한다.”

 

‘후쿠자와 유키치 자서전’(복옹자전, 福翁自傳, 1899)의 고백

 

“일본은 메이지유신으로 모든 봉건적 특권을 폐지하고, 청일전쟁에서 중국을 제압했다. 이로써 일본은 세계열강 대열에 끼이게 되었다. 이런 것들이 내 삶을 완성시켰다.”


2. 서구열강의 속성 파악

 

(1) 한학-란가쿠-영학

 

후쿠자와는 신분의 표상인 칼을 버리고 붓을 택하며, 1847년 12세부터 한학(漢學)을 배운다. 1853년 18세 때 미국의 동인도(東印度)함대사령장관 페리(Matthew C. Perry, 1794-1858) 제독이 당시 일본 배의 경우 아무리 커도 10m를 넘기지 못한데 반해 쇠로 만들어진 것은 물론, 30m 길이에다 증기 동력을 갖춘 전천후 함대(구로후네, 黑船, 흑선)를 이끌고 에도 앞바다에 나타나 개항을 압박한 다음 해인 1854년 19세 때 후쿠자와는 형의 권유로 나가사키(장기, 長崎)에 유학하여 난학자 오가타 고안(서방홍암, 緖方洪庵)의 데키주쿠(적숙, 適塾)에서 란가쿠(난학, 蘭學: 당시 네덜란드는 ‘화란, 和蘭’이나 ‘아란타, 阿蘭陀’ : 로 표기했기 때문에 에도시대에 네덜란드에서 전래된 지식을 연구한 학문을 말하고, 서양의 학문, 곧 ‘양학, 洋学’은 란가쿠 이후에 들어온 영국과 프랑스 학문을 가리킴)을 배운다. 1858년 23세 때 도쿄의 에도(江戶)에 네덜란드어 어학교(語學校)인 란가쿠주쿠(난학숙, 蘭學塾)인 일소학숙(一小家塾, 게이오기주쿠의 전신)을 개설하여 학생들을 가르치고, 이듬해 1859년 쿠로후네 사건의 진원지이자 미국인들의 거류지가 된 요코하마(横浜: 1859년의 미일수호통상조약에 따라 개항장이 됨)를 방문하며 네덜란드는 이류 국가에 불과하고 미국과 영국이 세계 최강이란 사실을 깨닫고 크게 충격을 받는다. 그로부터 후쿠자와는 영어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란카쿠를 접고 영어를 독학하는 한편 이 란카쿠주쿠를 영학(英學)주쿠로 바꾼다.


후쿠자와는 한학(漢學)을 통해서 유학을 배우고, 란가쿠를 통해서 네덜란드학문을, 영학을 통해 미국을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의 구미선진국의 학문을 배운다.

 

(2) 사회진화론에 입각한 제국주의를 지향하는 구미열강탐방

 

1860-1867년에는 후쿠자와는 바쿠후(막부, 幕府)에 출사하여 번역 업무 담당 관리로 일한다. 이 기간에 네 번에 걸쳐 바쿠후의 해외사절단의 일원으로 미국과 유럽을 시찰하는 기회를 얻는다.

 

첫 번째인 1860년에 후쿠자와는 해리스조약(1858년 7월29일 초대 미국영사인 Townsend Harris와 도쿠가와 바쿠후의 이이 나오스케井伊直弼가 체결한 조약) 비준을 위하여 미국으로 가는 바쿠후소속 조사시찰단의 일원으로 미국에 6개월간 방문하고 영어 사전을 가져와 일본 최초의 일영사전을 편찬한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우리를 맞은 분들은 근대 산업의 본보기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열중하였다. 아직 도시 사이를 뻗는 철도도 없고 전등도 사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전보 시설과 갈바니(Galvani,Luigi) 의 전기 도금 기술은 이미 사용되고 있었다. 그때 우리들은 제당 공장으로 안내되어 제당 원리에 대한 아주 자세한 설명을 들었다. 내가 확신하건대 우리를 맞은 분들은 아주 새로운 것들을 보여주어 우리가 놀라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새로운 것들이란, 적어도 나에게는 아무 것도 없었다. ․․․오가타 학교에 입학한 이래 나는 줄곧 그러한 과학적인 원리만을 배워왔었다.”

 

갈바니(Luigi Galva´ni, Luigi Aloisio Galva’ni, 1737-1798)는 의학자 생리학, ․물리학자로 이탈리아 볼로냐(Bologna)에서 태어났다. 볼로냐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이 대학의 해부학교수를 지냈다. 1780-1791년 해부실험중 개구리의 다리근육이 기전기(起電機)의 방전에 부응하여 경련을 일으키는 것을 발견하고, 그 현상을 연구한 결과 이것이 전기와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갈바니 전기라고 칭하여진 새로운 종류의 전기 발생을 보고하고, 전기학 사상에 특필되는 업적을 남기며, 전기생리학, 전자기학(電磁氣學), 전기화학 발전의 계기가 된다.

 

두 번째인 1862년에 후쿠자와는 바쿠후의 통역담당 외교관자격으로 유럽을 1년간 방문한다.

 

세 번째인 1863년에 후쿠자와는 영국 만국박람회를 참석하고 러시아를 방문한다.

 

네 번째인 1867년에 후쿠자와는 다시 6개월간 미국을 방문한다.

 

후쿠자와는 서구열강의 탐방을 통해 이들의 핵심사상이 제국주의, 곧 영국의 스펜서(Herbert Spencer, 1820-1903)가 제창한 사회진화론(社會進化論, social Darwinism)에 의한 땅따먹기임을 간파한다. 국가 간 평등이 만국공법에 입각한 상호존중에 의거하기보다는, 힘으로 강대국이 약소국을 지배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현실을 목도하면서 강한 깨달음을 얻는다. 후쿠자와는‘부국강병’에 의한 과격한 국권확장론자가 된다.


후쿠지와는 대한제국과 중국청나라를 비롯한 아시아는 미개한 나라이기 때문에 아시아를 떠나 그 당시 첨단과학기술과 왕성한 경제력을 자랑하는 선진유럽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다쓰아뉴오’(탈아입구, 脫亞入口: 일본으로 하여금 정체된 아시아국가에서 벗어나 개명된 유럽에 편입), 곧 서구열강제국주의노선의 참여를 선언하며, 그 실현방편으로 상업과 전쟁을 제시한다.


그 후 ‘다쓰아뉴오’는 청일전쟁의 탈아입문, 러일전쟁의 탈아완결,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탈아입미(脫亞入美), 1970-80년대의 입아입미(入亞入美), 1990년 냉전후의 입미(入美), 2008년의 입중입미(入中入美), 2010년의 친미입아(親美入亞)로 진화한다..


3. 사상스승들

 

(1) 헨리 토머스 버클(Henry Thomas Buckle, 1821-1862)의 ‘영국문명사 1권’(History of Civilization on England I, 1857)


버클은 매일 7마일을 걸으며, 7시간을 독서로 보내고, 빵과 과일로만 점심을 먹고, 19개 언어에 능통한 당대 최고의 체스 선수이다. 그는 역사자체를 과학으로 본 실증주의적 역사가로, 통계학적 관점에서 역사를 기술한 과학사의 아버지(the Father of Scientific History)라고 불린다. 그는 인간 내면의 가치에 대한 성찰 없이 인간의 행동이 물리의 세계를 지배하는 법칙처럼 고정적인 규칙을 따른다고 보며 역사의 진행도 기계적인 작용으로 보고, 자연과학의 규범을 역사학에 적용시켜 ‘영국문명사’를 집필한다.


후쿠지와는 버클에게서 지리나 풍토의 요인을 특히 중시하는 일종의 지리적 유물론의 역사관을 배운다.


(2) 프랑수아 기조(Francois P. G. Guizot, 1787-1874)의‘유럽 문명사’(General History of Civilization in Europe, 1828, 3권)


기조는 부친이 프랑스혁명 중에 처형되는 고통을 겪지만, 영국 주재 대사와 외무장관을 역임하고 수상자리까지 오르며 은퇴 후 오로지 저술과 연구에 힘을 쏟으며 비유럽문명과의 과감한 비교를 통해 유럽문명의 우위성에 대해 집필한다.


기조의 문명 개념은 우선 두 가지 요소, 즉 사회의 발전과 인간 자체의 진보로 구성된다. 기조는 타문명과 달리 유럽문명이 왕정, 귀족정, 민주정 등의 다양한 사회적 원리들의 상호 경쟁을 통해 역설적으로 역동성과 풍요로움 가운데 진보와 자유의 원리를 발전하면서 근대에 이르렀기 때문에 보편적인 인류

문명의 궁극적인 미래를 예언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한다.


후쿠지와는 기조의 비교문명론에 입각해서 조선과 중국에 대한 일본의 우위성에 대해 논한다.


(3)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1806-1873)의‘자유론’(On Liberty, 1859), ‘대의정부론’(Considerations on Representative Government, 1861),‘공리주의’(Utilitarianism, 1863),‘여성의 예속’(The Subjection of Women, 1869)

 

사회주의의 시조가 칼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 1818-1883)라면, 밀은 현대 자유주의의 시조라고 할 수 있다(근대 자유주의의 시조는 ‘존 로크John Locke 1632-1704’임).

 

‘자유론’은 왕과 지배계층을 위한 국가를 시민을 위한 국가로 이행(移行)시킨 저술이다. 밀은‘사상과 토론의 자유’를 강조하며, 특정한 사상만이 진리라는 독단을 배격하고, 회의주의적 인식론에 입각하여 진리는 결코 확언할 수 없으며 강요할 수도 없기 때문에 언론과 사상의 자유는 최대한 보장되어야 하며, 국가는 타인에게 해를 미치지 않는 한 개인의 삶의 방식에 개입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대의정부론’은 비례대표제, 선호이전식 투표제, 참정권 확대 등의 의회와 투표제도의 개혁을 다룬다. 민주주의는 만인의 평등이라는 루소의 직접 민주주의에 대한 옹호에 맞서는 대의 민주주의의 사상적 근거를 제시한다.

 

“신념을 가진 한 사람의 힘은 이익만을 좇는 아흔아홉 명의 힘과 맞먹는 사회적 힘이다”(One person with a belief is a social power equal to ninety-nine who have only interests.)

 

‘공리주의’는 영국의 철학자, 경제학자로서 공리주의(최대다수의 최대행복; the greatest good for the greatest number of people)의 창시자인 제러미 벤담(Jeremy Bentham, 1748-1832)의 양적 공리주의와 구분되는 질적 공리주의 사상을 발전시켜 “만족한 돼지보다는 불만족한 인간이 낫고, 만족한 바보보다 불만족한 소크라테스가 되는 것이 더 낫다. 바보나 돼지가 다른 의견을 가진다면 이는 오로지 자기 입장으로만 문제를 이해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인간이나 소크라테스는 문제의 양쪽의 입장을 다 이해한다”(It is better to be a human dissatisfied than a pig satisfied; better to be Socrates dissatisfied than a fool satisfied. And if the fool, or the pig, are of a different opinion, it is because they only know their own side of the question. The other party to the comparison knows both sides.)라는 속담을 낳는다.

 

‘여성의 예속’에서 밀은 여성의 무능함이 당시의 의미 없는 여성 교육에서 비롯되었음을 논증하며, 여성도 능력이 있음을 보여준 인물로는 잔 다르크와 엘리자베스 1세를 예로 들면서, 여성 참정권을 주장하여, 당시의 남성 정치인들과 사상가들에게 많은 조롱과 모욕을 당한다.

 

(4) 막스 베버(Max Weber, 1864-1920)의 ‘소명으로서의 정치’(Politik als Beruf, 1919)

 

‘소명으로서의 정치’는 1919년 1월 독일 뮌헨대 진보학생단체 ‘자유학생연합’이 주최한 ‘직업으로서의 정신노동’에서 베버가 한 강연을 엮은, 정치 철학의 고전이다.

 

독일의 사회과학자이자 사상가인 베버는 이 저서에서 정치인이 갖춰야 할 자질로 ‘열정’, ‘책임감’, ‘균형 감각’을 꼽는다.‘열정’은 비창조적인 흥분 즉 개인적 자기도취와 구분되는 ‘대의에 대한 뜨거운 확신’이고‘책임감’은 합법적 폭력 행사권이라는 수단을 위험하고 파괴적으로 휘두르지 않게 하는 덕목이며,‘균형감각’은 일종의 거리감이다. 더불어 그는 정치인의 신념 윤리와 책임 윤리, 특히 책임 윤리를 강조한다.

 

(5) 알렉시스 토크빌(Alexis-Charles-Henri Maurice Clérel de Tocqueville 1805-1859)의 ‘미국의 민주주의’(프랑스어 De la démocratie en Amérique; 영어 Democracy in America, 제1권, 1835, 제2권, 1840)

 

프랑스의 진보적 대귀족(할아버지 말레제레브가 루이 16세를 변호하다가 로베스피에르의 칼날 아래 처형되면서 친척들이 줄줄이 피의 숙청을 당한 귀족집안) 정치학자이자 정치가이며 역사가인 토크빌은 1831년 정부의 명을 따라 미국의 감옥제도를 연구하기 위해 미국을 시찰한다. 그 해 5월 뉴욕에 도착해 미국 전역을 9개월간 여행하면서 감옥뿐 아니라 미국의 경제, 독특한 정치제도 등 미국 사회의 모든 면에 대한 기록을 남긴다. 그런 가운데‘미국의 민주주의’가 탄생하는데 당시 미국 제 7대 대통령 앤드류 잭슨(Andrew Jackson, 재위 1829-1837, 1767-1845)정부의 국정을 분석하여 보고한 글이라고 할 수 있으며, 키워드는 ‘상속법’, ‘균등한 교육’, ‘민주주의’, ‘평등’ 그리고 ‘자유’다.

 

프랑스 사회와는 달리 미국 사회에서는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사회적 평등이 이루어져 누구나 평등한 권리를 행사하며, 신분에 따른 차별이 없고, 공익을 위해 봉사하며 헌신하는 것을 보고 토크빌은 미국 찬미론자가 된다.

 

신분적 차별이 없는 새로운 이념이 지배하고 있는 미국에서의 정치 제도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토크빌은 미국의 민주주의의 성공 요인을 법률과 관습에서 찾고, 특히 법률보다는 관습의 영향이 더 크게 작용했다고 분석하며, 미국 시민들의 정치 참여가 활발한 가장 큰 원인으로 많은 수의 신문사를 꼽는다.


토크빌은 미국 사회가 프랑스 사회보다 민주적인 이유를 미국의 활성화된 지방자치, 자발적인 결사체, 배심원제도 등에서 찾는다.

 

그런 가운데 토크빌은 미국사회에 잠재되어 있는 민주주의 적대요소로서 노예제도에 대한 남북갈등,인디언과 흑인의 인종차별 문제 등을 거론하면서 미국의 사회문제를 떠나,자유의 자발적 포기,평등에 대한 열망,다수의 횡포,로비문화와 정경유착 등 여러 민주주의 국가들에서 나타날 일반적 문제점들에 관해서도 우려한다.

 

(6) 영국의 철학자이며 사회학자인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 1820-1903)의 사회진화론(social Darwinism)

 

스펜서는‘적자생존’(適者生存, survival of the fittest)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이다. 일본은 강자적자(適者)가 되어야만 한다는 것으로 해석하여 군국주의의 길을 걷는다. 조선에선 사회진화론에 의해 강자에 대한 패배를 불가피한 숙명으로 보고 그 저항의욕을 약화시키는 패배주의가 싹튼다.

후쿠자와는 계몽적 진보사관 및 상대주의와 실용주의를 문명론의 핵심으로 삼는다.

 

4. 저서에 나타난 후쿠자와의 사상


그가 남긴 수많은 저작과 번역은 당대 일본 지식인과 대중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회의(會議), 연설(演說), 자유(自由), 권리(權利) 등의 일본식 한자어는 그가 번역해 들여온 단어들이다. ‘후쿠자와 삼부작’이라고 불리는 ‘서양사정’(西洋事情, 1866-1870), ‘학문의 권유’(學問のすすめ, 1872-1876), ‘문명론의 개략’(文明論之槪略, 1875)은 지금까지도 일본인의 필독서로 꼽힌다. 그러면 그의 명저를 고찰해보자.


(1) ‘서양사정’


바쿠후를 압박해 오는 서양 세력, 존왕양이(尊王攘夷: 왕을 높이고, 오랑캐를 배척)와 천황을 중심에 둔 바쿠후(막부, 幕府)타도파와 바쿠후를 지키려는 측과의 대결 상황에서 후쿠자와는 ‘서양사정’의 저서를 통해 많은 부분에서 서구열강의 서적을 인용하며 서구열강의 역사, 제도, 국정을 비롯하여 문명사회에 공존하는 문물이나 사회상, 보편적인 삶의 모습, 곧 신문, 병원, 도서관, 자유와 자주사상 , 미국의 독립선언 등을 소개하며 인간의 권리를 중심으로 한 문명사회의 현상 등을 해설하면서 아시아적인 것은 버리고 서구열강의 모든 것은 다 받아들이자고 주장한다. 이 저서는 당시 일본 사람들에게 서양세계를 알리는 입문서가 되는 동시에 조선의 개화파들에게도 심오한 영향을 미친다.


유길준(兪吉濬, 1856-1914)은 후쿠자와의 ‘서양사정’을 모델로 ‘서유견문’(西遊見聞)을 집필하여 후쿠자와의 도움으로 1895년에 후쿠자와가 창설한 도쿄 교순사(交詢社)라는 출판사에서 ‘서유견문’을 발행한다. 유길준이 26세 때부터 27세 때까지 후쿠자와가 경영하던 게이오기주쿠(게이오의숙, 경응의숙, 慶應義塾)에 유학해, 후쿠자와와 인연을 가진 바 있어서 출판이 가능했다.

 

‘서유견문’은 갑오개혁(甲午改革: 갑오경장甲午更張이라고도 불리며, 1894년 7월 초부터 1896년 2월 초까지 약 19개월간 3차에 걸쳐 추진된 일련의 개혁운동)의 사상적 배경이 되었을 뿐 아니라 조선계몽사상 형성에 영향을 주었으며 국문학이나 신소설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친다.

 

(2) ‘학문의 권장’(1872)

 

후쿠자와는 ‘학문의 권장’과‘문명론의 개론’에서 일본인의 특징으로 ‘원망’(resentiment)을 제시한다. 이것은 강자에 대한 분노와 복수심이기 때문에 자기향상이 없는 끌어내기 평등주의를 의미한다.

 

1)‘학문의 권장’의 서론은 이렇게 시작한다.

 

“하늘은 사람 위에 사람을 만들지 않고, 사람 밑에 사람을 만들지 않는다. 그러나 현자우자(賢者愚者), 부자빈자, 신분이 높은 자와 낮은 자가 생긴다. 이는 배우느냐 안 배우느냐의 차이에 달렸다.”

 

이 담론은 독립적이며 평등한 인간사상을 강변하지만 천부인권의 인간평등은 근대화된 개인에게만 해당될 뿐이다.

 

2)‘일신독립(一身獨立)하여 일국독립(一國獨立)한다’는 언설은 일본의 계몽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일신독립’은 다른 이에게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학문과 실업에 힘써 자신을 책임져야 한다는 뜻인데, 이것은 개인의 근대화를 의미한다. 시민적 자유를 향유하는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개인의 형성이 선행해야 하지 그렇지 않고 무지하고 게으른 시민은 정부의 압제를 초래하고 국력을 약화시켜 외국의 침략을 불러일으키게 되어 국가의 독립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후쿠자와는 시민과 국가의 관계는 상하관계가 아니라 시민이 주인이고 국가는 대리자로서 서로가 대등하며 국법에 의해 서로의 권리 존중하고 의무를 이행해야하는 계약관계임을 설파하고 있다.

 

이런 사상에 입각하여 후쿠자와는 메이지정부의 군국주의에 저항하여 정부의 등용요청을 사양하고 교육, 언론활동, 저술에 몰두하며 부국강병과 자유주의를 설파한다.

 

이 저서는 일본의 성인남녀 모두를 개국론자로 바꿔보겠다'라는 의지를 갖고 저술한 것이다. 외국과의 자유로운 교제를 개방하고, 상하 신분 질서를 비판하면서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는 계몽사상을 일본인 전부에 심어주어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인간을 창출함으로써, 일본의 독립의 발판을 확보하겠다는 것이다.

후쿠자와는 근대화되지 않는 개인이나 국가를 조롱한다. 당시 구미열강을 제외한 모든 나라와 국민은 후쿠자와의 입장에서 보면 짐승무리나 벌레에 불과하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도 국민을 ‘개’, ‘돼지’로 보는 사람들이 즐비하니 이것에 대해 놀랄 필요 없다.


(3) ‘문명론의 개략’(1875)

 

서문의“마치 한 몸으로 두 인생을 사는 것과 같고, 한 사람에 두 몸이 있는 것과 같다”라는 담론은 도쿠가와 바쿠후의 체제하에서의 폐쇄적인 사고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서양문명의 이론을 후쿠자와는 프랑수아 기조의 ‘유럽문명사’, 토머스 버클의 ‘영국문명사’, 존 스튜어트 밀의 ‘공리주의’, ‘자유론’, ‘부인론’ , ‘대의정치론’, 막스 베버의 ‘직업으로서의 정치’ 등을 기초하여 기표의 영역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당시 일본의 문화와 사상의 맥락 속에서 변용하였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언설은 또한 어떻게 “정부는 있어도 국민은 없다”던 당시 일본을 개인주의, 남녀평등, 대의정치 등 서구적 이념이나 가치로 재무장한 ‘국민국가’로 만들 수 있을까, 그리고 서양제국과 대등한 주권국가로 만들 수 있을까 하는 것에 대한 고민을 보여준다.

 

23세 때인 1937년에 도쿄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후 26세 때인 1940년에 도쿄제국대 법학부 조교수, 36세 때인 1950년에 교수, 60세 때인 1974년에 명예교수가 되었으며, 1973년에는 프린스턴 대학과 하버드 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수여받고 그 후 일본학술원(學士院) 회원, 영국학술원 외국인 회원이 되었으며, 프린스턴 대학 고등연구소 연구원을 지내기도 한 마루야마 마사오(환산진남丸山眞男, 1914-1996)는‘근대일본의 사상사적 방법의 형성’(近代日本における思想史的方法の形成, 1961)에서 위의 담론을 인용하며 “개국이란 결코 과거로부터 배울 수 없는 미지의 경험이기에 문명의 기초이론을 구축한다는 것은 실로 그(후쿠자와)에게 전대미문의 실험”이었다고 평하면서, 이것이야말로 후쿠자와의 ‘방법적 자각’의 기초를 이루는 인식이라고 했다.

 

후쿠자와는 동양을 ‘덕성의 세계’로 서양을 ‘지식의 세계’로 범주화하며, 덕성은 위선이 싹트는 장소라고 보고 그 대표적인 사상체계가 유교라고 진단한다. 그 이유는 자유로운 사유는 철저히 봉쇄당하여 무조건 유교의 경전 숭배가 강요되어 그것이 군주를 숭배하는 지배-복종의 수직적 정치체제를 만들고, 결국 덕치(德治)란 곧 윗사람의 아랫사람에 대한 시혜에 불과한데 이건 허위의 체제를 유지하려는 미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후쿠자와는 동양적 사유의‘야만’을 끊고 서양근대의‘문명’을 시급히 건설해야 한다고 강변한다. 그렇지 않으면 일본은 영국의 제국주의의 침탈에 인도처럼 식민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후쿠자와는‘문명’이란 자연과 사물, 그리고 인간과 사회에 대한 의심을 통해 지식을 획득하고 발전해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정의한 후 한 사람의 지식은 여럿의 지식에 비할 바가 아니므로, 시끄러운 논의와 토론은 문명을 위한 필수적 요소이며 이를 통해 문명은 끝없이 발전해가기 때문에 일본은 서양의 지식세계로 돌입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창한다.

 

후쿠자와는 또한 문명의 단계를 야만, 반개, 문명의 3단계로 구분하며, 야만은 아프리카와 오스트레일리아, 반개는 아시아, 문명국은 유럽과 미국으로 분류한다. 이것에 근거하여 후쿠자와는‘다쓰아뉴오’(탈아입구, 脫亞入口)를 주창하며, 당시 일본인에게 선민(選民)의식을 심어주고 아시아 멸시의 근거를 마련한다.

 

“목적을 정하고 문명으로 나아가는 길 뿐이다...중략...그 목적이란 무엇인가...중략...독립을 보전하는 것이다. 그 독립을 보전하는 법은 문명 외에 달리 없다.”는 담론은‘문명’과 ‘독립’은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문명개화’와 ‘독립자존’을 표방한 ‘문명론의 개략’은 획일주의의 전체주의적 군사문화로 찌든 대한민국에 주요한 지침서라고 사료된다.

 

4. 대학과 신문창설

 

이미 ‘서구열강의 속성 파악의 한학-란가쿠-영학’에서 언급했듯이 후쿠자와는 1858년 도쿄의 에도(江戶)에 네덜란드어 어학교인 란가쿠주쿠(난학숙, 蘭學塾)인 일소학숙(一小家塾, 게이오기주쿠의 전신)을 개설하여 학생들을 가르쳤고, 이듬해 1859년 나가사키(장기, 長崎)를 방문했다가 영어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영어를 독학하는 한편 이 란가쿠주쿠를 영학(英學)주쿠로 바꾼다. 1868년 영학(英學)주쿠를 신센자(新錢座)로 이전하면서 당시의 연호를 따서 게이오기주쿠(게이오의숙, 경응의숙, 慶應義塾)로 개칭하였는데, 게이오기주쿠는 훗날 게이오기주쿠대학의 기원이 된다. 이후 그는 교육 활동에 전념한다.

 

고이즈미 준이치로(소천순일랑小泉純一郎, 1942-) 전 총리, 하시모토 류타로(교본용태랑橋本 龍太郎, 1937-2006)년 전 총리, 오자와 이치로(소택일랑小沢一郎, 1942-) 전 민주당간사장이 게이오 대학 출신이다.

 

후쿠자와는 1882년 산케이(産經)신문의 전신인 지지신포(시사신보時事新報)를 발행하면서 언론가로 등장한다.

 

5. 김옥균과의 만남(갑신정변)과 탈아론

 

‘문명론의 개략’(1875)은 조선의 개화사상에 큰 영향을 끼치며, 1881년부터 김옥균(金玉均, 1851-1894)을 비롯해 유길준(兪吉濬, 1856-1914), 박영효(朴泳孝, 1861-1939), 서재필(徐載弼, 1864-1951), 윤치호(尹致昊, 1866-1945) 등은 일본을 방문하면서 후쿠자와를 만나면서 그의 광팬이 된다.

 

특히 1881년 3월 6일 김옥균은 후쿠자와와 면담을 하며 조선독립에 협력을 의뢰하자 서로 강렬하게 끌린다.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 일본식 군제 도입과 민씨정권에 대한 반항으로 일어난 구식군대의 병란)이 발발하자 후쿠자와는 요코하마 정금 은행에서 17만원의 대출금을 얻어 조선 측 배상금의 일부를 대신 납부해준다.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 김옥균을 비롯한 급진개화파가 개화사상을 바탕으로 중국청나라의 속방화정책에 저항하여 조선의 완전 자주독립과 자주 근대화를 추구하여 일으킨 정변) 당시 후쿠자와는 프랑스 공사의 함대에 일본 자유당의 민병대 청년들을 보내, 김옥균 일파를 지원하려고 했지만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의 반대로 무산되고 중국청국의 개입으로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난다.

 

갑신정변의 주동자인 김옥균의 생부 김병태는 천안 감옥에서 10년 동안 모진 옥고를 겪다가 교수형을 당하고, 김옥균의 모친 송씨, 자신의 부인과 누님은 음독자살했으며, 동생 김각균은 대구에서 체포되어 옥사했다고 한다.


조선왕조 제 25대 왕 철종(哲宗, 재위 1849-1863, 1831-1863)의 부마(영혜옹주의 남편) 박영효의 아버지 박원양은 음독자살하고, 뱍영효의 동생 박영교는 갑진정변 중에 청나라 군사에게 참살 당한다.

홍영식(洪英植, 1855-1884)의 아버지 홍순목은 영의정을 지냈으나 갑신정변 후 음독자살하고, 그의 처자와 형 홍만식도 음독자살하고 홍영식 자신은 정변 중에 청나라 군사에게 살해당한다.


서재필의 부모는 도륙당하고, 서재필의 아내는 음독자살하였으며 서재필의 두 살 난 아들은 돌봐주는 사람이 없어서 굶어 죽었다고 한다.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변수(邊樹) 등 9명은 일본으로 망명한다.

 

갑신정변이 실패하자 당일 후쿠자와는 식음을 전폐하고, 아까운 인재들을 잃었다며 대성통곡한다.

 

이는 갑신정변에 후쿠자와가 깊이 관여했기 때문이다. 실제 후쿠자와를 통해 무기를 조달한 이노우에 가쿠고로는 이렇게 증언한다. “김옥균, 박영효 등 일파의 거사는 당초부터 선생이 관여하고 듣고 계신 바이다. 선생은 단지 그 대본의 작자임에 그치지 않고 스스로 나서서 배우를 선택하고 배우를 가르치고 또한 필요한 도구를 갖추는 등 만반의 수단을 강구한 사실이 있다”그런데 후에 후쿠자와는 이를 부인한다.

 

후쿠자와는 개화파인사들에게 가한 연좌제는 비인도적 전근대적 형벌이며 조선은 낙후된 나라보고 비분강개하여 1884년 12월 ‘조선독립당의 처형’(朝鮮独立党の処刑)이라는 글을 ‘시사신보’에 싣는다.

 

"인간 사바세계(裟婆世界)의 지옥이 조선의 경성(京城, 서울)에 출현했다. 나는 이 나라를 보고 야만인이라 평하기보다 요마악귀(妖魔惡鬼)의 지옥국(地獄國)이라 평하고자 한다.”

 

1885년 3월 16일 후쿠자와는 ‘시사신보’에 ‘탈아론’을 발표한다. ‘탈아론’은 ‘탈아입구’적 우월감과 융합되면서 후일 ‘대동아 공영권’이라는 기형아를 만든다. 그러면 후쿠자와의 ‘탈아론’을 일별해보자.

 

“세계교통은 편리해져서 서양문명의 바람이 동쪽으로 점점 불어와 이르는 곳마다 풀과 나무도 이 바람에 휘말리지 않는 것이 없다. 생각하건대 서양의 인물, 고금에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하지만 그 거동이 옛날에는 느렸으나 이제 와서는 활발해지고 있다. 이는 단순히 교통의 이기(利器)를 이용해 기세를 타고 있기 때문일 뿐이다. 그러므로 현재 동양에 있는 나라 사람들은 이 서양문명의 동점(東漸) 기세에 놀라 이를 어떻게든 막을 각오가 되어 있다면 그럴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있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의 세계정세를 살펴볼 때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세파에 밀려 문명의 바다에 함께 뜨고 내리면서 더불어 문명의 파도를 타고 고락을 함께 할 수밖에 없다. 문명은 곧 홍역의 유행과도 같다. 현재 도쿄(東京)의 홍역은 서쪽 나가사키(長崎)로부터 동진(東進)해서 봄기운과 함께 갈수록 만연하고 있다. 이런 시기를 맞아 이 유행병의 해악을 막으려 해도 과연 막을 방법이 있을까. 결코 그럴 수단은 없다. 그저 해로울 뿐인 유행병이라 하더라도 그 기세에 놀라지 말아야 할 일이다. 하물며 이해상반이 따르고, 항상 이익이 많은 문명에 있어서랴. 단지 이것을 그냥 막지 않는 데 그칠 일이 아니라 그것이 만연하도록 힘써 돕고 국민으로 하여금 빨리 그 바람을 쐬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지혜로운 사람들이 할 일이다. 서양문명이 일본에 들어온 것은 가에이(嘉永)개국에서 시작되었다. 국민들은 마침내 그것을 취해야 할 필요를 깨닫고 점차 활발하게 받아들이게 되었지만 진보의 길에 걸림돌이 되는 고풍노대(古風老大)한 정부가 가로누워 있어 이를 어찌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근대문명은 일본의 낡은 구각(舊殼)과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구투(舊套)를 벗으려면 동시에 정부도 갈아치울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곧 문명바람을 막아 그 반입을 금지할 것인가, 그리하면 일본은 독립할 수 없다. 왜냐하면 세계문명의 기세가 동양 고도(孤島)를 홀로 잠자도록 내버려두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 일본의 지사들은 국가를 중히 여기고 정부를 가볍게 보는 대의에 기초하여, 또 다행히 황실의 신성존엄에 의뢰하여 마침내 구 정부를 무너뜨리고 신 정부를 수립하였다. 따라서 조야(朝野) 구별 없이 모두 서양 근대문명을 받아들여 오로지 일본의 낡은 틀을 벗는 것뿐만 아니라, 아시아 전체를 하나의 축으로 하여 주의(主義)로 내세워야 할 것이다. 주의로 하기 위해서는 오직 ‘탈아(脫亞)’라는 두 글자에 있을 뿐이다. 우리 일본의 국토는 아시아 동쪽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 국민정신은 이미 아시아의 고루(固陋)함을 벗고 서양문명을 따르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 불행한 일은 이웃에 있는 나라이다. 하나는 중국이고 또 하나는 조선이다. 이 두 나라는 국민도 고래 아시아 류(流)의 정교풍속(政敎風俗) 아래 자라온 배경은 우리 일본 국민과 다르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 인종의 유래가 다른 것일까, 아니면 같은 모양의 정교풍속 속에 살면서도 유전교육(遺傳敎育)의 취지가 같지 않은 점일까. 일․지(支)․한(韓) 삼국을 비교하여 중국과 조선의 서로 닮은 상황은 조선과 중국이 일본보다 가깝고 이 두 나라 사람들은 한편이 되어 나라에 관해 고쳐 나아가는 길을 알지 못한다. 교통 편리한 세상에 문명의 사물을 못 듣거나 못 보았을 턱이 없는데도 마음을 움직이지 않고 고풍구습에 연연한 정은 백년 천년의 옛날과 다름이 없다. 이 문명 일신(日新)의 활극장(活劇場)에 교육은 유교주의를 부르짖어 인의예지(仁義禮智)만을 칭송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외견상 허식에 구애되어 진리, 원리를 가르치지 않고 도덕마저 땅에 떨어져 지독한 불염치(不廉恥)가 극에 달해도 거만하게 자기반성의 빛이 없다. 우리들이 이 두 나라를 보면 지금처럼 서양문명이 동쪽으로 밀려들고 있는 때에 독립할 수 있는 길은 없다. 다행히 그 나라에 지사들이 나와 우리의 유신 때처럼 큰일을 꾀한다면 다르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수년 안에 망하여 국토는 세계문명 제국이 분할하게 되리라는 예상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홍역과 같은 문명개화를 맞으면서도 조선과 중국 두 나라는 그 전염의 순리에 역행하여 무리하게 이를 피하기 위해 방안에 틀어박혀 공기를 차단하고 질식 상태에 빠져드는 상황을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수레와 수레바퀴, 입술과 이빨 관계인 이웃 나라는 서로 도움이 되는 것이 보통의 예이다. 그렇지만 지금의 중국․조선은 일본에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서양문명인의 눈에는 세 나라가 지리적으로 가까이 있어 동일하게 보고 중국과 조선을 평가하는 데도 일본과 같이한다. 중국과 조선 정부가 전제(專制)정치를 행하고 법률에 따르지 않으면 일본 또한 무법 국가가 아닌가 하고 의심하여 중국과 조선의 인사(人事), 과학을 모르니까 일본도 음양오행의 나라라고 생각한다. 중국인의 비굴함과 수치를 모르므로 일본인의 의협심도 함께 매도당하고, 조선의 형벌이 참혹하면 일본인도 무정하다고 단정해 버린다. 이를 마을에 비유하면 한 마을 한 고을이 어리석게 무법(無法) 잔혹(殘酷)할 때는 설령 그 마을 안의 한 가족이 정당한 일을 해도 다른 많은 사람들의 잘못에 가려 묻혀버리는 이치와 다르지 않다. 그 영향이 간접적으로 우리들의 외교에 장애가 되는 일이 적지 않다. 일본의 일대 불행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오늘의 꿈을 펴기 위해 이웃 나라의 개명(開明)을 기다려 함께 아시아를 일으킬 시간이 없다. 오히려 그 대열에서 벗어나 서양과 진퇴를 같이하여 중국․조선을 접수해야 한다. 접수 방법도 인접 국가라는 이유만으로 사정을 헤아려 줄 수 없으며 반드시 서양인이 접하는 풍에 따라 처분해야 할 뿐이다. 나쁜 친구를 친하게 하는 자와 함께 악명을 피할 수 없다. 우리가 마음으로부터 아시아 동방의 나쁜 친구를 사절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1885년 8월에는 ‘조선 인민을 위하여 조선 왕국의 멸망을 기원한다(朝鮮人民のために其国の滅亡を賀す)’며 조선 정부를 규탄한다.

 

“인민의 생명도, 재산도 지켜주지 못하고, 독립 국가의 자존심도 지켜주지 않는 그런 나라는 오히려 망해 버리는 것이 인민을 구제하는 길이다.”

 

21세기 관점에서 살펴보면 99%의 시민을 무시하고 1%의 기득권을 위해 존재하는 국가는 존재할 이유가 없듯이, 오직 조선왕실과 양반층의 기득권만 존중받고, 조선백성은 하대 받는 국가도 존속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문제는 그 조선왕조가 조선백성에 의해서 무너지고 조선백성에 의해서 새로운 나라가 형성되면 금상첨화인데, 그것이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했다는 데에 문제점이 있고, 이것 때문에 후쿠자와는 한국인으로부터 욕을 진탕 먹고 있다.

 

1894년 12월 서재필, 유길준, 윤치호 등이 신문도입취지를 후쿠자와에게 설명하자, 후쿠자와는 자신의 시사신보사의 시찰, 견학을 허락하고 신문 인쇄기와 활자, 우수한 성능의 타자기와 잉크, 종이 등의 구매에도 도움을 준다. 그는 또한 ‘조선인을 교육시키는 데 가장 유용한 도구는 한글’이라는 점을 간파하고 ‘조선은 국한문 혼용(混用)을 해야 한다’고 강력히 추천한다. 사재를 털어 한글 활자 주조 비용도 지원한다. 국한문 혼용은 ‘한성순보’의 후신인 ‘한성주보’에서 이루어진다. 그는 조선 최초의 근대신문 한성순보의 간행에도 후견인 역할을 하며 수제자 이노우에 가쿠고로(井上角五郞)를 조선에 기술고문으로 파견한다.

 

그리고 후쿠자와는 청일전쟁(淸日戰爭, 1894-1895)이 일어나자 ‘시사신보’에 공개적으로 중국을 비판한다. “중국인은 장구벌레, 개돼지, 거지, 오합산적이다.”

 

6. 평가

 

(1) 일본 내에서의 평가

 

23세 때인 1937년에 도쿄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후 26세 때인 1940년에 도쿄제국대 법학부 조교수, 36세 때인 1950년에 교수, 60세 때인 1974년에 명예교수가 되었고, 1973년에는 프린스턴 대학과 하버드 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수여받았다. 그 후 일본학술원(學士院) 회원, 영국학술원 외국인 회원이 되었으며, 프린스턴 대학 고등연구소 연구원을 지내기도 한 마루야마 마사오(환산진남丸山眞男, 1914-1996)는 천황제를 옹호하고 전쟁동원에도 가담했으나, 패전 뒤 이와나미 쇼텐(암파서점岩波書店)의‘세카이’(세계世界)지에‘초국가주의의 논리와 심리’(1946, 5월호)라는 논문을 실어 일본 지성계에 혜성처럼 등장하여 ‘초국가주의’(ultra nationalism)를 맹렬히 비판하고 일본군국주의를 심층 분석하여 일본 사회와 지식인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준다.

 

마루야마는‘초국가주의’의 문제점을 일본제국의 통치 원리가 중립에 기초한 공익 추구가 아니라 시민사회의 모든 가치를 천황제를 이용해 ‘천황=지고(至高)한 선’이라는 것을 독점화하며 보편화했다는 데 있다고 본다.

 

이듬해인 1947년 6월에‘일본 파시즘의 사상과 행동’이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한 후 명성을 얻으며 반전 평화운동에 앞장선 ‘실천하는 비판적 지성’, ‘진보적 지식인’, ‘계몽의 기수’, ‘사상계의 덴노(天皇)’가 되면서 마루야마는 1875년에 출간된 후쿠자와의‘문명론의 개략’을 1978년부터 1981년까지 읽은 후 그것에 대해 강의형식으로 해설을 붙인 일종의 주석서인‘문명론의 개략을 읽는다’(文明論之概略を読む, 上中下, 岩波新書, 1986)라는 저서를 발간해 후쿠자와를 신격화한다.

 

마루야마는 서문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이 책은 후쿠자와 유키치의 주저 ‘문명론의 개략’(1875년 초간)을 텍스트로 삼아 그 전문에 입각해 장을 따라가면서 해설을 시도한 것이다. 후쿠자와에 대해 아주 신랄한 평가를 내리는 사람도 1875년에 출간된 이 책이 후쿠자와의 최고 걸작 가운데 하나이며, 또 후쿠자와의 정신적 기력과 사색력이 가장 충실했던 시기의 산물이라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 나 개인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허용된다면, 나는 제2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이 책을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반복해서 애독했으며, 또 근대 일본의 정치와 사회를 고찰하는 데 이 책만큼 정신적인 양식이 되어준 일본인에 의한 저작은 없었다는 점을 말해두고 싶다. 가타카나 용어가 범람하고 생각보다 내용이 없는 난해한 ‘사상’이 유행하는 듯한 현재 일본에서, 평범한 진리를 비범하게 말한 ‘문명론의 개략’이 나의 보잘것없는 해설이 인연이 되어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독자들에 의해 읽히기를 바란다.”

 

마루야마는 후쿠자와의 ‘탈아론’을 다음과 같이 변호한다.

 

그는 ‘탈아입구’를 ‘탈아’와 ‘입구’로 나눈다. 후쿠자와에게 있어서 ‘탈아’는 시대상황에 따라 바뀔 수 있는 시사론인 반면 ‘입구’는 원리론이라는 것이다. 그는 후쿠자와가 지향하는 것은 ‘서구열강의 국가 시스템’을 도입하자는 ‘입구’에 있는 것으로 본다.

마루야마는 후쿠자와의‘문명론의 개략’을“에도시대 유학자들이 많이 남기고 있는 것과 같은 경전 주석서처럼 만들고 싶다”고 밝히며, 그는 후쿠자와를‘학계의 천황’이라고 호칭하며‘후쿠자와 마니아(후쿠자와 호레)’임을 자처한다.

 

마루야마와는 달리 ‘저변(底邊)민중’의 시각에서 '민중사상사'의 작업에 천착해온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 야스카와 쥬노스케(안천수지보安川壽之輔, 1935-)는 자신의 저서 ‘일본 근대교육의 사상구조’,‘후쿠자와 유기치의 아시아 침략사상을 묻는다’(2000), ‘마루야마 마사오가 만들어낸 후쿠자와 유기치라는 신화’(2003), ‘후쿠자와 유키치와 마루야마 마사오’(2003), ‘후쿠자와 유키치의 전쟁론과 천황제론’(2006), ‘후쿠자와 유기치의 교육론과 여성론’(2013)등을 통해 인위적으로 미화된 후쿠자와를 ‘아시아 침략의 선동가’라고 비판하며 그의 신화와 허상을 벗긴다.

 

첫 번째 저서는 35세 때인 1970년 ‘후쿠자와 전집’ 21권에 대한 철저한 내재적이고 실증적인 분석을 통해 학계의 내로라하는 선학들의 작위적이고 자의적인 자료 인용과 해석에 의한 값싼 정치주의적 후쿠자와론을 비판한 연구 결과물이다.

 

특히 두 번째 저서를 읽은 독자는 1만 엔 권의 붙박이 인물인 후쿠자와를 끌어내리자는 운동을 전개할 정도로 센세이션을 일으킨다. 전 일본 펜클럽회장 우메하라 다케시를 비롯한 많은 지성인의 반응은 일본을 일깨우는 책으로 크게 칭찬한다.


야스카와는 후쿠자와가 조선과 중국청나라에 내뱉은 비하 발언을 다음과 같이 열거한다(두 번째 저서).

 

“조선 침략의 목적은 일본이익을 보호하는 것이며 남을 위한 게 아니라 일본을 위한 것이다.”“조선국은 사지가 마비되어 스스로 움직이는 능력이 없는 병자와 같다.” “대만인은 오합지졸 좀 도둑떼” “청국병사는 돼지꼬랑지 새끼”“조선과 중국 이 두 나라는 진보의 길을 모르고 구습에 연연하며 도덕마저 땅에 떨어진데다가 잔혹, 몰염치는 극에 달하고 거기에 오만방자하다.” “조선은 본래 논할 가치가 없다. 우리가 목표로 하는 당면의 적은 지나(중국)이기 때문에 우선 병사를 파견해 경성에 주둔 중인 지나 병사를 몰살하고 바다와 육지로 대거 지나에 진입해 곧바로 북경성을 함락시켜라.” “눈에 띄는 것은 노획물밖에 없다. 온 북경을 뒤져 금은보화를 긁어모으고 관민 가릴 것 없이 아무것도 남기지 말고 빠뜨리지 말고 ‘창창 되놈’들의 옷가지라도 벗겨 가져와라.”


야스카와는 이런 아시아 멸시발언으로 말미암아 일본군이 숱한 전쟁에서 저지른 행위에 대한 죄의식을 마비시키게 원인이 되었다고 지적한다.

 

야스카와는 책을 마무리하면서 일본의 시민에게 다음과 같이 간곡히 호소한다.

 

“지금 일본은 전쟁으로 지샌 어두운 쇼와 시대를 털어내지 못하고 역사의 시계바늘을 메이지 시대로 돌려놓은 채 그릇된 스승님 후쿠자와 모델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

 

“밝은 메이지 시대의 큰 스승으로 추앙받는 후쿠자와야말로 전쟁으로 얼룩진 쇼와 시대를 끌어낸 장본인임을 깨닫고, 일본인들은 과거의 집단 최면에서 벗어난 상태에서 아시아 평화를 말해야 한다.”

 

저자는 한국어판 서문에서도 이렇게 제안한다.


“이 책의 출간을 계기로 제국주의 시대에 잘못된 ‘탈아입구’(脫亞入歐) 노선을 선택하여 아시아와 일본의 근대사에 불행한 균열과 분열을 만들어 낸 후쿠자와 유기치 사상을 극복하는 공동 연구의 제안과 함께 피해자와 가해자 역사 인식의 차이를 좁혀가 진실 된 역사적 언어를 만들어 나가자!”

이처럼 야스카와의 저서는 일본역사소설의 황금기를 열어 국민작가가 되었고, 일본역사소설을 완성시킨 소설가 시바 료타로(사마료태랑; 司馬遼太郞, 1923-1996)시의 ‘밝은 메이지’와 ‘어두운 쇼와’론을 부정하며 일본과 후쿠자와의 문제는 쇼와가 아니라 메이지 시절부터 시작됐다는 걸 책은 명쾌하게 보여준다.


야스카와는 2001년 4월 21일 일본의 대표적인 일간신문인‘아사히신문’(조일신문朝日新聞)에‘후쿠자와 유키치는 아시아 멸시를 확산시킨 사상가’라는 논설을 발표하자 다음 달 같은 지면에 히라야마 요우 시즈오카 현립대학 국제관계학부 조교수가‘후쿠자와 유키치, 아시아를 멸시 했는가?’라는 글을 게재해 반박한다. 이로써 두 학자는 ‘야스카와-히라야마 논쟁’을 벌이게 된다.

 

(2) 조선 개화기의 사상가들의 평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조선 개화기의 사상가 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泳孝), 홍영식(洪英植), 유길준(兪吉濬), 윤치호(尹致昊), 서재필(徐載弼), 서광범(徐光範) 등은 후쿠자와를 모델로 삼아 조선을 근대국가로 개혁하려고 했다.


갑신정변의 주역 김옥균은 후쿠자와를 ‘신선’이라 칭했을 정도로 존경했는데, 사실 갑신정변에 실패한 김옥균을 보호한 것도, 윤치호를 학문적으로 후원해 준 것도, 유길준의 ‘서유견문’을 출판해 준 것도 모두 후쿠자와였다.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 1892-1950)는 한발 더 나아가서 스스로 한국의 후쿠자와 유기치가 되기를 꿈꾸었다. 그는 후쿠자와의 묘지를 다녀와서 아래와 같은 글을 남겼다.

 

“태서의 신문화로써 침체한 구사상,구제도를 대(代)해야 할 줄을 확신하고 단연히 지(志)를 결(決)했으니 천(天)이 일본을 복(福)하려 하시매 여사(如斯)한 위인이다”

 

이 언설을 한 줄로 줄이면‘하늘이 일본에 복을 주기 위해 내린 위대한 인물’ 이라는 극찬이다.

 

(3) 필자의 비평

 

1) 수저론(흙수저-금수저-독수저)에 입각한 투사현상, 희생양이론과 르상티망

 

후쿠자와는 비천한 가문에서 태어나 한학에 매달리면서 유교사상의 산물인 봉건제도, 신분제도 그리고 문벌제도 등의 차별주의에 멍들며, 실력이 있었지만 흙수저에 불과했던 부친과 형의 죽음을 보고, 유교사상에 대해 강한 증오감을 품으며 타파해야 한다는 신념을 품는다.

 

그는 독학 또는 가정교육에 의한 한학연마로 쌓은 동양고전에 대한 박학을 조롱하며 그것을 뛰어넘어 란가쿠 및 영학의 능통한 외국어 실력으로 획득한 서양학문에 대한 지식 그리고 수차에 걸친 서구열강방문을 통해 얻은 견문(見聞)을 조합해 탁월한 통찰을 빚어냄으로써 흙수저에서 금수저의 신분향상을 이룬다.

 

흔히들 역경에선 모든 고난을 감내하지만, 순경에선 고난을 이기는 사람들이 거의 없듯이, 모든 것을 성취한 후쿠자와의 내면에도 다음과 같은 현상이 깊숙이 똬리를 틀고 있다.

 

칼 구스타브 융의‘투사(projection)현상’, 르네 지라르(Rene Girard, 1923-2015)의 ‘희생양이론'(scapegoat theory),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의 르상티망 (ressentiment) 등이 후쿠자와의 무의식세계를 지배하면서, 강자와 서구열강에 대한 분노와 복수심을 약자들과 약소국가에 대한 멸시로 바뀌어 지면서 ‘금수저’가 ‘독수저’로 변질된다.

‘독수저’의 첫 번째 대상이 조선과 조선백성이었다.

 

2) 인정투쟁, 욕망 그리고 모방정신과 폐쇄성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 자크 라캉(Jacques Lacan, 1901-1981), 르네 지라르(Rene Girard, 1923-2015), 악셀 호네트(Axel Honneth, 1949-),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 1949-) 등의 인정투쟁(독어 Anerkennungskampf; 영어 recognition struggle)과 ‘욕망이론’(desire theory), ‘욕망의 삼각형이론’(triangular theory of desire)이 후쿠자와를 사로잡으며 일본의 특유의 모방정신(아이토코토리, 良いとこ取り과 섬나라의 특유의 폐쇄성(이질적인 것을 배척하는 본능)이 결합하여 공격성으로 나타다.

 

인도가 영국의 제국주의에 무너지고, 중국청나라도 서구열강의 반식민지상태로 전락하자, 후쿠자와는 조선과 중국청나라보다 훨씬 뒤 떨어져있던 일본의 미래에 대해서 걱정한다.

 

일본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서 후쿠자와는 서구열강의 제국주의의 탐욕을 욕망하며 짐승나라의‘정글의 법칙’을 추종한다. 일본의 탐욕의 첫 번째 희생자가 조선이었다.

 

3) 겉 표현(다테마에, 建前)과 속마음(혼네, 本音)

 

1883년 출간된 모험소설, 아동 문학의 고전 ’보물섬’(Treasure Island) 의 영국의 작가 로버트 스티븐슨(Robert Louis Stevenson)의‘지킬박사와 하이드씨’(Dr. Jekyll And Mr. Hyde 또는 The Strange Case of Dr. Jekyll and Mr. Hyde 1886)는 인간의 이중적인 본성을 묘사한다. 과학자 ‘지킬박사’(Dr. Jekyll)는 고매한 인격의 소유자이고 ‘하이드’(Mr. Hyde)는 살인마로서 사악한 인격의 인물이다.

 

이것을 생물학적인 차원에서 설명하면 ‘지킬박사’는 생물학자이자 저널리스트인 매트 리들리 (Matt Ridley)의‘이타적 유전자’(The Origins of Virtue, 2001), ‘하이드’는 진화생물학자 및 대중과학 저술가인 리처드 도킨스(Clinton Richard Dawkins, 1941-)의 ‘이기적 유전자’(The Selfish Gene, 1976)를 대변한다.

 

이것을 일본인의 성격에 대입하면 ‘지킬박사’와 ‘이타적 유전자’는 ‘겉 표현’이고 ‘하이드’와 ‘이기적 유전자’는 ‘속마음’이다.

 

그런데 후쿠자와에게는 이렇게 두부 자르듯 이분법으로 나누어진 것이 아니라 중첩하여 나타나기 때문에 비논리적인 글(천황제도, 종교, 군국주의 등의 견해)과 위선적인 행동(인권존중사상과 멸시사상)으로 거센 비판을 받는 것이다.


4) 칼문화와 저수지문화

 

조선과 일본을 비교할 때 조선의 ‘붓문화’와 일본의 ‘칼문화’를 드는데 필자는 이에 동의하지 않지만(이미 이 것에 대해서 뉴미디어상에 글을 올림), 후쿠자와의 사상을 이해하는 차원에서 받아들인다.

 

일본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비평가이자 사상가로 현재 컬럼비아대학 객원교수인 가라타니 고진(병곡행인柄谷行人, 1941-)은 칸트의 영구평화론과 세계공화국을 지향하며 자신의 저서‘제국의 구조’에서 이 세계공화국의 가능성이 중국에 있다고 보는데, 언어유희를 한다면 이름그대로 ‘가라(거짓말; 空, 虚)타‘령에 불과하고 필자는 이 견해를 전적으로 거부하는데 최근 대한민국에서 가라타니의 의견을 수용한 듯한 인상을 주며 시진핑(習近平)에 대해 용비어천가를 부르고, 고구려시각으로 중국사를 조명하지만 중국에 대해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는 책들이 출판되고 있어 그 책들을 일별 해보니, 자기의 학문세계가 좌뇌형인 구미선진국이나 일본에게 먹히지 않자, 우뇌형인데다 인구가 13억이 넘어선 중국에서 한국계 중국인들을 비롯해 다소 열광하는 사람들이 있어, 중국 쪽으로 진출하려고 약간 아부성(?)있는 발언을 하지 않나 하는 의심의 눈길을 둔다. 지면관계상 가라타니 사상에 대해선 추후에 논하겠다.

 

가라타니는 일본 문화를‘저수지 문화’로 비유하면서“일본은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인다. 그래서 하나도 안 받아들인다!”라고 일본문화를 정의한다. 모든 문화가 저수지의 물처럼 밀려와 고일 뿐 새로운 것을 창조하지 못한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이런 논리에 의하면 후쿠자와는 일본에 고유문화가 없기 때문에 서구열강의 문명문화를 스폰지처럼자 연스럽게 빨아들였을 뿐이다. 이것을 구태여 ‘칼문화’에 적용한다면 무사들은 서로 겨루다가 패하면 완전히 승복하고 상대방의 종이 된다. 그렇듯이 후쿠자와는 서구열강의 문화문명의 노예였고, 일본은 노예의 자식들이었다.

 

그런데 조선과 중국엔 ‘성리학’과 그것에 기초한 정치제체와 문화가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구열강의 문화문명을 받아들이는데 매우 주저할 수밖에 없었고, 노예인 일본이 주인인 서구열강에 대한 시기와 질투와 분노의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었던 노예의 노예 국가들이 되었다.

 

5) 이중사상

 

위에서 언급한 ‘겉 표현’과 ‘속마음’과 중첩된 내용일 수 있지만, 후쿠자와의 사상엔 밀의‘자유론’,‘대의정부론’,‘여성의 예속’, 베버의 ‘소명으로서의 정치’, 토크빌의 ‘미국의 민주주의’에 나타난 자유, 책임감, 민주주의의 고귀한 정신이 명분으로 과대 포장되어 있고, 속 알맹이는 버클의 지리적 유물론의 역사관, 기조의 비교문명론, 스펜서의 사회진화론 등의 진보사관 및 상대주의와 실용주의로 채워져 있기 때문에 그의 사상은 매우 비논리적이고 혼란스럽다.

 

그래서 겉포장만 보면 머리말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후쿠자와는 ‘천부인권론자’, ‘시민적 자유주의자’, ‘일본에도 민주주의 사상이 있었다는 근거로 이상화된 인물’로 자리매김하고, 속 내용을 보면 조폭이념, 마피아이데올로기의 입안자요 주창자로서 쌍것에 불과하다.

 

7. 교훈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후쿠자와의 사상엔 많은 문제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21세기 차기 대통령 후보자들이 명심해야 할 교훈이 담겨있다. 그러면 그것에 대해 고찰해보자.

 

(1) 부국강병

 

후쿠자와는 인도가 영국으로 넘어가고, 중국이 서구열강에게 반식민지로 전락하는 것을 보고, 일본이 서구열강의 종살이를 당하지 않으려면 상업과 전쟁, 21세기 용어로 말하면 부국강병이라는 해법을 제시하여,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서구열강과 맞먹는 국가로 자리매김했기 때문에 21세기 일본인들에게 후쿠자와는 최고의 인물로 대우 받을 수밖에 없다.

 

오늘 모일간지에서‘미디어리서치 대선 여론조사’라고 대서특필(大書特筆)했는데, 과연 이들 가운데 국군통수권자(commander in chief)자격이 있는 사람이 있는가? 단 한명도 없다. 전부 겁쟁이 무지렁이에 불과할 뿐이다. 대한민국대통령이 되려고 한다면, 미국정부나 의회에게 강력하게 끊임없이 자주국방완수와 대한민국식의 한반도통일만 지원해준다면 미국의 이익을 위해서 전심전력하겠다고 협상해야 하는데, 과연 그런 지혜와 배짱이 있는 사람이 있는가? 단 한명도 없다. 전부 대통령 편집증에 시달리는 중환자들뿐이다.

 

구약성서의 요엘 예언자는 자주국방의 당위성을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8.이제는 내가 유다 사람을 시켜서, 너희의 아들딸들을 팔겠다. 유다 사람은 너희 자녀를 먼 나라 스바 사람에게 팔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9.너희는 모든 민족에게 이렇게 선포하여라. 전쟁을 준비하여라! 용사들을 무장시켜라. 군인들을 모두 소집하여 진군을 개시하여라! 10.보습을 쳐서 칼을 만들고, 낫을 쳐서 창을 만들어라. 병약한 사람도 용사라고 외치고 나서라.”(새번역. 요엘 3:8-10)


신약성서는 자유와 독립의 중요성에 대해 이렇게 선언한다.


“1.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셔서 우리는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마음을 굳게 먹고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공동번역. 갈라디아서 5:1)


“32.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개역한글. 요한복음 8:32)

 

(2) 풍부한 독서

 

후쿠자와는 엄청난 독서력으로 혼자힘으로 서구열강의 학문에 열공한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교육가(게이오기주쿠창설), 언론인(지지신포발행), 학자(수많은 저서를 집필)로서 손색(遜色)없다.

 

미국 오바마 대통령은 올 7월 11일 미 의학협회저널(JAMA)에 8쪽짜리 논문을 게재했다고 한다.

 

그렇다고 대한민국 차기 대통령후보 모두 논문을 쓰라는 말은 아니다. 최소한도 구미지도자들과 정상회담 할 때 지적으로 밀리지 않을 만큼 지식을 소유하고 있어야 하는데 독서부재로 머리가 텅텅 비어있어서 홀대를 받는 경우가 많음을 국민들은 알고 있다.

 

그리고 통역없이 미국대통령과 자주 만남을 갖고 허심탄회(虛心坦懷)하게 대한민국이 핵을 비롯해 핵미사일, 핵잠수함 등을 소유하도록 허용하고 우주전쟁을 대비한 최첨단우주과학기술시대를 열게 해주어 북한과 대화하면서 대한민국식의 남북통일을 주도할 수 있도록 협조해준다면,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한반도정책을 미국위주로 하겠다고 진실하게 수없이 한다면 미국은 들어줄 것이다.

 

이런 인물이 차기 대통령 후보로 등장하길 대망한다.

 

(3) 거대담론(과학, 자본주의, 민주주의)

 

후쿠자와는 타국에 대해서가 아니라 일본 내에선 실용주의관점에서 서구열강의 문화문명, 곧 검증할 수 없는 유교사상보단 검증 가능한 과학을 중요시했고, 정이나 의리를 강조하는 뜬구름 잡는 식의 경제정책이 아니라 상업에 의한 경제부흥을 꾀하였고, 천황중심의 인간평등사상을 지향했다.

 

21세기에도 마찬가지로 차기 대통령은 최첨단우주과학시대개막에 의한 경제부흥과 안보다지기, 따뜻한 자본주의의 복지국가건설, 자유, 정의, 평화, 평등, 사랑 등의 하늘의 가치를 지향하는 온전한 민주주의완성을 지향해야 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망의 문화를 펼치는 자들의 통치를 비판하시고 생명의 문화를 담당한 빛의 자녀들이 실행해야 할 정치철학을 말씀하시면서 당신의 십자가의 철학을 다음과 같이 밝히신다.

 

“25.예수께서는 그들을 가까이 불러놓고 ‘너희도 알다시피 세상에서는 통치자들이 백성을 강제로 지배하고 높은 사람들이 백성을 권력으로 내리누른다. 26.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사이에서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27.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한다. 28.사실은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이다.’하셨다.”(공동번역. 마태복음 20:25-28)

성서는 이렇게 선언한다.

 

“24.인심이 후하면 더욱 부자가 되지만 인색하게 굴면 오히려 궁해진다. 25.남에게 은덕을 베풀어야 풍부해지고 남을 대접해야 저도 대접을 받는다.”(공동번역. 잠언 11:24-25)

 

“20.남 해칠 생각을 품으면 제 꾀에 넘어가지만, 함께 잘살기를 꾀하면 즐거움이 돌아온다.”(공동번역. 잠언 12:20)

 

“27.도움을 청하는 손을 뿌리치지 말고 도와줄 힘만 있으면 망설이지 마라. 28.있으면서도‘내일 줄 테니 다시 오게.’하며 이웃을 돌려보내지 마라. ”(공동번역. 잠언 3:27-28)

8. 나가는 말

 

일본은 후쿠자와의 사상을 따라서 서구열강의 제국주의 국가의 길을 걸으며 조선과 중국을 비롯해 이웃 아시아국가에게 엄청난 피해를 주었음은 물론 이젠 아시아국가로 돌아올 수 있는 기회를 완전히 놓쳤고, 그렇다고 백인들의 세계에도 끼지 못하는 어중간한 국가가 되었다.

 

미국이 없으면 일본존재는 무지렁이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서구열강의‘아류’의 일본은 메이지유신 100주년이 되는 1968년,미국과 소련에 이은 세계 3대 경제강국으로 자리를 잡았다.

 

과연 대한민국은 골드만 삭스가 예언한 것처럼 대한민국식의 한반도통일을 이루어 미국과 더불어 세계를 리드하며 ‘홍익인간 이화세계’의 이데올로기를 전할 수 있을까?

 

이 모든 것은 차기 대통령에게 달려있다. 이것을 실현할 수 있는 인물들만 차기 대통령 후보로 나서주기 바란다.


“16.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개역한글. 마태복음 1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