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제26대 왕이자, 대한제국 제1대 황제인 고종(高宗, 재위 1863∼1907, 1852-1919)은 9남 4녀를 두었으나 3남 1녀만 성인이 된다. 그 가운데 의친왕(義親王: ‘의왕, 義王’ 또는 ‘의화군, 義和君’이라고 불림) 이강(李堈, 1877-1955)이 있다.
의친왕은 고종의 다섯째 아들로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純宗, 재위 1907-1910, 1874-1926)의 이복동생이며, 어머니는 귀인(貴人) 장씨(張氏: 평양기생과 왕의 시중과 호위를 담당하던 종의 신분인 대전별감사이에서 태어난 궁인인데 의친왕을 낳은 이후에 명성황후의 미움을 받아 궐 밖으로 축출되어 궐 밖에서 살다가 명성황후의 사후인 1900년에야 숙원, 1906년에야 귀인으로 추증됨)이다.
의친왕은 천수를 누리며 14명의 공식적인 부인들에게서만 12남 9녀의 자손을 보았고, 자동차(미국의 오버 랜드) 드라이브를 즐기면서 풍류 적인 생활을 즐기며 알코올로 세월을 보냈다고 하여, 그의 항일투쟁을 폄훼하는 군상들이 있는데, 필자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근거하여 의친왕의 배일(排日)정신을 높게 산다.
첫째, 순종황제는 후손이 아예 없었고 영친왕(英親王) 이은(李垠, 1897-1970)의 아들 이구(李玖, 1931-2005)는 후손 없이 사망했고, 덕혜옹주(德惠翁主, 1912-1989)의 외동딸 소 마사에(종정혜, 宗正惠, 1932-1956)도 후손 없이 생을 마감했는데 (1956년 야마나시 현의 고마가타케 산에 자살하러 간다는 유서를 남기고 사라져, 자살로 추정), 유독 의친왕에게서 대한제국황실의 가계가 이어져 왔기 때문에, 의친왕의 여성편력은 세종수준이라고 보면 되고, 당시 왕권이 강화된 세계역사가 보여 주듯 의친왕의 여성관에 대해서 의문부호를 붙여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사족(蛇足)을 붙인다면 조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1820-1898)이 왕족에서 살아남아 자신의 아들을 왕으로 만들기 위해 천하장안(千河張安)이라 불리는 시정의 무뢰한들과 어울려 지내거나 안동김씨 가문을 찾아다니며 구걸도 서슴지 않아 궁도령(宮道令)이라는 비웃음을 산 것처럼, 의친왕도 자신의 독립활동을 일제가 눈치 못 채지 못 하기 위한 호신책(護身策)으로 음주가무에 주력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의친왕의 차남 이우(李鍝, 1912-1945)가 일본여성과의 결혼을 거부하거나 창씨개명을 거절하는 등의 강한 민족의식은 부전자전(父傳子傳)유형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추후 이우의 민족사관에 대해서도 고찰해보겠다.
셋째, 의친왕이 특파 대사로 1895년에서 1896년 동안 6개국, 곧 당시 서구열강인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이탈리아, 오스트리아를 방문하여, 국제정세에 대한 안목을 가졌다고 추정하기 때문이다.
넷째, 1899년에서 1905년 동안의 미국유학생활 동안 자유를 만끽하며 독립운동가인 김규식(金奎植, 1881-1950)과 안창호(安昌浩, 1878-1938) 등과의 접촉을 통해 한반도의 독립의 중요성을 깨달았다고 추정하기 때문이다.
이강공(公)은 1891년 의화군(義和君)에 봉해지고, 1894년 보빙대사(報聘大使)로 도일하여 일제의 청일전쟁 승리를 자축하는 연회에 참석하며, 이듬해 6개국 특파대사(特派大使)로 영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을 차례로 방문하고 1896년 귀국한다. 4년 후 1899년 미국에 유학하며 1900년 8월에 의친왕(義親王)으로 봉해지고, 미국의 선진문물을 모두 경험한 뒤, 을사늑약이 체결된 해(1905.11.17)인 1905년 4월 귀국하여 그해 대한제국 육군 부장, 적십자사총재가 된다.
그러면 고종황제 자녀로서 당시 조선 황족 중에서 유일하게 항일투쟁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진, 배일정신을 가진 인물로 평가되는 의친왕에 대해 살펴보자.
1. 손병희와 만남과 봉황각
1910년 조일병탄 뒤에는 항일독립투사들과 접촉하던 중 1911년 봄에 의친왕은 천도교(동학) 제3세 교조이자 독립운동가 의암(義庵) 손병희(孫秉熙, 1861-1922)를 극비리에 (서울특별시 강북구) 우이동 골짜기에서 만나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방도를 모색하며, 이어서 8월에 손병희가 우이동을 다시 방문하여 주변의 땅 3만평을 매입하고, 1912년 6월 19일 천도교의 신앙생활을 뿌리내리게 하는 한편, 1910년 경술국치 이후 10년 안에 나라를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보국안민(輔國安民)을 내세우고 천도교 지도자들에게 역사의식을 심어주며 일제에 빼앗긴 주권을 되찾기 위하여 항일독립운동을 이끌 천도교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한 목적으로 호랑이가 출몰할 정도로 인적이 한적한 곳에 봉황각(鳳凰閣: 천도교 교조 ‘최제우, 崔濟愚’가 남긴 시문에 자주 나오는 봉황이라는 낱말을 딴 것으로, ‘의창수도원, 義彰修道院’이라고도 불림)을 세우는데, 봉황각은 사실 3.1 운동의 발상지로 민족의 성지다. 3.1운동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15명이 이곳에서 배출되었기 때문이다. 봉황각은 1969년 9월 18일 서울특별시유형문화재 제2호로 지정되고, 천도교에서 관리한다.
1919년 2월 22일 의암은 봉황각에서 이렇게 천도교 지도자들에게 교훈한다.
“우리가 만세를 부른다고 당장 독립되는 것은 아니요. 그러나 겨레의 가슴에 독립정신을 일깨워 주어야 하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꼭 만세를 불러야 하겠소”
2. 대동단과 독립선언서
의친왕은 1919년 일진회(一進會) 평의장으로 송병준 등과 친일 활동에 주력하다가 일제에 의해 일진회가 해체되자, 목숨의 위험을 감지한 후 3.1운동에 참가하며 상하이에서 백범(白凡) 김구(金九, 1876-1949)를 만나 독립운동을 의논하고 서울에 돌아와 종교, 사회단체 , 부인회, 유림회(儒林會) 등 각계각층을 망라한 항일단체 대동단(大同團)을 조직하여 김가진(金嘉鎭, 1846-1922: 1910년 조일병탄 후 일제가 수여한 남작男爵의 작위를 받았다가 그 뒤 즉시 반납하고, 3.1 독립운동에 참여하며 대한민국임시정부 고문으로 활약)을 총재에 추대하고, 임시정부와 연락하며 독립운동에 투신한 전협(全協, 1878-1927: 대동단의 주요 활동 중 하나가 의친왕을 상하이의 망명을 추진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시켜 ‘수령, 首領’으로 추대하고 제2차 독립선언을 발표해 국내외의 여론을 고취시키고, 독립운동을 촉진시키려는 것인데, 의친왕의 상하이탈출 실패로 일본 관헌에게 체포되어 10년 선고를 받고 복역하다가 1927년 11월 9일 병보석으로 풀려나 ‘김탁, 金鐸’ 병원에서 치료 중, 곧 이틀 뒤 서거하고, 1982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됨)을 비롯해 대동단의 주요멤버인 최익환(崔益煥, 1889-1959: 1968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됨) 등과 협의해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로의 탈출하여 상하이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심하며, 독립 선언서를 작성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보낸다.
의친왕은 1919년 11월 일제 경찰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밤중을 이용하여 인사동(仁寺洞) 궁궐을 빠져 나와 세검정(洗劍亭)에서 대동단의 선정활동 책임자로서 각종문서를 인쇄 배포하고 청년단 조직을 이끌며 조직 확대에 힘쓰고 있는 정남용(鄭南用, 1896-1921: 일명 ‘정필성, 鄭必成’, ‘홍우식, 洪宇植’으로도 불리며 의친왕의 상하이탈출 실패로 5년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옥중에서 순국하여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됨)과 상의한 끝에 상복 차림을 하고, 정남용을 동반하여 3등 차편으로 평양을 거쳐 신의주에서 압록강철교를 건너 만주 안둥(安東: 현 랴오닝성 단둥)까지 갔으나 의친왕이 자택에서 사라지자 일제경찰은 대대적인 체포 작전을 전개하며 의친왕의 얼굴을 알고 있던 요네야마 경무에게 발각되어 강제로 국내로 송환된다. 의친왕의 망명실패로 국내 항일 조직이었던 대동단 조직도 큰 타격을 입고 의친왕은 망명에 실패한 이후 12년간 창덕궁에서 감금 상태로 지내며, 여러 번 일본정부로부터 도일을 강요받았으나 끝까지 도일(渡日)하지 않으며 항일의 기개를 굽히지 않는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의친왕이 1919년 대동단의 김가진, 전협, 최익환 등과 상의하여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독립선언서를 보냈는데, 동년 11월 20일 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에 실린다. 의친왕의 부모에 대한 효성, 조국의 자유와 독립, 세계의 평화정신을 살펴보자.
“일본이 매국 간신들을 이용하여 우리나라를 합병하고 내 부왕(父王)과 모후(母后)를 살해한 것이오 결코 부왕께서 병합을 긍허(肯許)하신 게 아니다. 나는 한국인의 1인인즉 차라리 독립된 우리나라의 한 평민이 될지언정 일본의 황족되기를 불원하는 바이니 임시정부가 설립된 당지에 가서 광복을 위해 만(萬)의 일(一)이라도 보조하려 한다. 이 결심은 오직 부모의 원수를 갚기 위함과 조국의 독립 및 세계의 평화를 위함에서이다.”
3. 군무도독부와 무력독립투쟁
1919년 늦가을 의친왕이 최진동(崔振東, ?-1945: 1963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단장, 單章’이 추서됨) 장군과 가진 연통(連通/聯通)은 의친왕이 일제를 몰아내려면 무력독립투쟁의 중요성을 인식했음을 보여준다.
그 이유는 최장군이 1919년 독립운동단체인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 ‘도독부, 都督府’ 또는 ‘독군부, 督軍府’라고도 불림)를 만주 왕청현 봉의동(汪淸縣鳳義洞)에서 편성하여, 홍범도(洪範圖, 1868-1943: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됨)의 대한독립군과 연합하여 활발한 국내진입작전을 전개하였음은 물론 1920년 안무(安武, 1883-1924: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됨)의 국민회군, 홍범도의 대한독립군과 연합사령부(사령관 최진동, 부관 안무, 연대장 홍범도, 제1중대장 ‘이천오, 李千五’, 제2중대장 ‘강상모, 姜尙模’, 제3중대장 ‘강시범, 姜時範’, 제4중대장 ‘조권식.曺權植’)를 구성함으로써 1천명을 상회하는 병력을 가지고 1920년 봄부터 주로 갑산, 강계 등 압록강 대안(對岸) 함경북도지방의 일본군을 공격하여 커다란 전과를 올렸으며, 6월에는 추격하여 오는 일본군을 봉오동에서 섬멸하는 대전과를 올렸기 때문이다.
의친왕은 1939년 최진동 장군이 아들을 얻자 족자를 보냈는데, 이 족자 사이에 항일독립운동에 관련한 밀서를 같이 보내기도 한다.
4.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이 일제 외무대신에게 보낸 보고서
1919년 11월 24일자로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이 본국 외무대신에게 보낸 보고서는 의친왕이 3.1 운동 준비와 관련하여 손병희와 모의했다고 증언한다. 그러면 그 내용을 일별해보자.
“(이강)공은 즐겨 시정잡배와 왕래하였는데, 올 봄(今春) 독립운동의 주모자(수모, 首謨) 손병희와는 몰래 회합 모의하였고 손병희가 체포되자 공은 매우 낭패한 빛이 있었다고 한다.”
5. 경주 최 부잣집 최준
“경주 최 부잣집 300년 富의 비밀”에 따르면 12대 최부자 최준의 호 문파(汶坡)도 의친왕이 지어준 것이며, 최준이 일제강점기에도 독립자금 마련을 위해 민족기업인 백산무역주식회사(白山貿易株式會社: 총주식 2만 주 중 안희제가 2,500주, 최준이 1,800주, 안익상이 850주, 정상환이 640주, 이우식이 600주, 이종화가 560주, 허걸이 550주, 정재완이 500주, 윤현태가 400주를 소유)를 세워 안희제(安熙濟)와 운영하며 대한민국임시정부 재정부장을 맡아 독립운동 자금으로 막대한 자금을 송금해 주다가 정작 자신의 백산무역회사가 100여만 원의 부채를 급히 갚아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되자 채무를 조정하는데 의친왕이 나섰다는 것이다. 최준은 후에 재산을 모두 투자해 대구대학과 계림학숙을 세우고 최부잣집은 12대 300년의 역사를 이어오다 막을 내린다.
6. 가톨릭과 임종
의친왕은 임종하기 며칠 전, 천주교 서울대교구 가회동 성당 제3대 주임 박우철 바오로 신부로부터 ‘비오’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고 하느님 품안으로 돌아간다.
7. 평가
영화 ‘덕혜옹주’개봉을 계기로 추석 연휴기간 무료 개방된 경기 남양주시에 있는 덕혜옹주와 의친왕 묘에 수천 명이 방문한다고 한다.
왕실의 무책임함으로 왕조에 실망한 양반출신 독립운동가들은 상당수가 아나키스트로 급진화하였는데, 의친왕의 활동이 그 나마 대한제국황실의 명예를 지켜 주고 있다.
위에서 보았듯이 의친왕은 고종황제 아들로서 일제가 보장해준 ‘공’(公)의 자리와 특혜를 과감히 뿌리치고 주어진 조건과 환경을 극복하며 최대한 대한제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서 헌신하다가 간, 당시 조선 황족 중에서 유일한 인물로 평가된다.
의친왕의 자유와 독립의 열망은 다음과 같은 언설을 쏟아내는 사람들과 뉴라이트 역사관을 단죄한다.
“일본의 신사 참배는 후손이 조상을 찾아가는 것인데, 100년 전 조상이 잘못한 일이 있다고 조상이라고 부르지도 않고 참배도 하지 않겠다는 것은 패륜”, “한국이 관여하려는 것은 내정간섭”, “전두환 전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 총리보다 훨씬 중요한 천황이 머리를 숙여 사과했는데 왜 총리가 바뀔 때마다 사과하라고 하느냐”, “일본이 제철소도 지어주고 우리나라 경제 발전의 모태가 될 일들을 많이 해줬는데 피해 의식만 갖고 산다면 국익에 도움이 안 된다”,“할아버지가 일제시대에 동양척식주식회사의 고위 간부였다”,“나는 친일파”, “일본은 어머니의 나라”, “독도는 일본 땅일 수 있다”, “위안부는 돈 벌기 위해 자발적으로 선택한 매춘부다”, “일제강점기는 근대화의 시혜다”
성서는 자유와 독립의 중요성에 대해 이렇게 선언한다.
“1.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셔서 우리는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마음을 굳게 먹고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공동번역. 갈라디아서 5:1)
“32.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개역한글. 요한복음 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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