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와 정의의 나라/신학 이야기

사카모토 료마의 철학에서 고찰한 21세기 한반도와 차기 대통령에 대한 진단과 그 해법!

아우구스티누스 2016. 9. 19. 17:32


사카모토 료마(판본용마, 坂本龍馬, 1835-1867)는 일본역사소설의 황금기를 열어 국민작가가 되었고, 일본역사소설을 완성시킨 소설가 시바 료타로(사마료태랑; 司馬遼太郞, 1923-1996)에 의해서 일본의 절정기인 1970년대에 메이지 근대사의 영웅으로 등장하며 신일본인 캐릭터가 된다.

 

시바 료타로가 역사적 료마에 기초를 하되, 상상력을 동원해 료마의 캐릭터를 극적으로 재구성하여 탄생시킨 장편소설(19626월부터 19665월까지 신문에 연재된 글로, 이후 8권으로 완간된 역사소설)‘료마가 간다’(竜馬がゆく), 1966)는 포스트구조주의의 대표적인 철학자 프랑스의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인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 1929-2007)의 용어로 말하면 시뮬라크르’(라틴어 simulacrum; 프랑스어 simulacre)이고 부정적인 언어로 말하면 ’, 곧 역사적 료마와는 매우 다른 근대일본의 길을 연 영웅으로 각색한 료마라고 보면 된다.

 

료마에 관한 얘기는 일본의 문학, 영화, 텔레비전, 만화, 애니메이션 등 문화 전반뿐만 아니라 신문과 방송 등의 언론매체들은 료마에 관한 유물이나 사적, 기록 같은 것들을 주기적으로 발굴하며 기사화한다. 지난 5월에는 료마가 마지막까지 갖고 있던 진검(眞劍)이 세상에 알려져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뻥으로 가득 찬 시바 료타로의료마가 간다라는 책을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은 유년시절 접한 후 일본의 명문고입학을 그만두고 미국 유학길에 올랐으며, 인생에 위기가 닥칠 때마다 이 책을 읽었다고 한다.

 

그래서 필자는 현대 분석심리학의 창시자인 칼 구스타브 융 (Carl Gustav Jung, 1875-1961)의 용어, 가쓰 가이슈와의 만남, 메이지유신의 핵, 18663월의사쓰마-조슈 동맹’(‘삿죠, 薩長 동맹’, ‘살마-장주 동맹’, ‘薩摩-長州 同盟)186711월의타이세이호칸’(대정봉환, 大政奉還)관점에서 료마를 조명하며 21세기 한반도와 차기 대통령에 대한 진단과 그 해법을 제시하고자 한다.

 

료마가 성공시킨사쓰마-조슈 동맹타이세이호칸의 두 사건은 료마 자신이 암살되고 나서 10개월 뒤 도쿠가와 바쿠후(덕천막부, 德川幕府)체제를 종식시키고 1868년의 메이지유신(명치유신, 明治維新)을 통해 일본을 일왕중심의 중앙집권적 근대국가로 재탄생케 하여 료마로 하여금 메이지유신의 1등 공신으로 자리 잡게 하며, 그 덕분으로 료마는 현재 일본에서 국민적 영웅으로 널리 추앙 받고 있다.

 

1. 칼 융의 분석심리학의 이론

 

료마는 투견(鬪犬, 개싸움)이 융성한 도사견(토사견)의 도시로, 현재의 시코쿠(사국, 四國)남부 고치현(高知縣)에 해당하는 도사현(토좌번, 土佐藩)의 죠닌향사(정인향사, 町人鄕士: 상인이면서 무사)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강하고 끈질긴 도사견처럼 료마에게는 칼을 버리고 총, 대포, 군함으로 서구열강을 상대해야 한다고 주장할 만큼 강한 남성적인아니무스’(animus)기질이 있음과 동시에 당시 서구문화를 받아들여 시대를 앞서간 핫 트랜드 캐릭터로 일본 역사상 처음으로 결혼을 기념해 신혼여행을 떠나며 사진 찍기를 좋아 할 만큼 섬세하며 매력적인 여성적인아니마’(Anima)적 기질도 있다.

 

이런아니무스아니마가 융합발전하여 조화와 화합을 중요시하는 성격으로 자리 잡는다. 다음과 같은 실례가 이를 잘 입증한다.

 

도사는 상급 사무라이와 하급 사무라이의 벽이 심한 곳이다. 예를 들면 나막신인 게다(下馱)는 신분을 상징하며 상급 사무라이만이 신을 수 있어서 죠닌향사 집안인 료마는 중하급 정도 신분에 불과해 게다가 아니라, 짚신을 신어야 했다. 그는 신분차별을 타파하기 위해 타지방으로 다니면서 서구열강에 대한 간접적인 지식을 접하고 사업가의 길을 걸으며 게다와는 격이 다른 구두를 즐겨 신는다.

 

그리고 료마는 일본 최초의 국제 비즈니스맨으로 조화와 타협의 성품도 간직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료마는 1868년 메이지유신 이전인 18671115일 친구인 나카오카 신타로(中岡愼太郞)와 함께 교토(경도, 京都)의 도사현(토좌번, 土佐藩)을 후원하던 상인 신스케의 상점 가와라마치(河原町) 오우미야(近江屋) 2(허름한 간장 판매소 2층 건물)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중 바쿠후의 순찰대의 습격을 받아 료마는 머리에 칼을 맞아 32살의 나이로 사망하고 나카오카는 중상을 입고 이틀 뒤 사망한다.

 

오우미야사건으로 알려진 료마의 암살을 둘러싼 억측과 소문이 무성하고 현재까지도 암살자가 베일 속에 가려져 있으며, 1955년 개봉된 영화 ‘6인의 암살자’,‘일본전후 문학의 기수라 불린 오오카 쇼헤이(大岡昇平, 1909-1988)쇼몬키’(장문기, 將門記) 등은 료마의 일대기를 신비화하고 있다.

 

이런 료마의 인간적인 매력 때문에 일본은 료마에게 열광한다.

 

2. 가쓰 가이슈와의 만남

 

1842년 난징(南京)조약 이후 중국이 외세에 반식민지로 전락했다는 소문이 나돌던 가운데 료마의 나이 18세 때인 185363일 미국의 동인도(東印度) 함대사령장관 페리(Matthew C. Perry, 1794-1858) 제독이 당시 일본 배의 경우 아무리 커도 10m를 넘기지 못한데 반해 쇠로 만들어진 것은 물론, 30m 길이에다 증기 동력을 갖춘 전천후 함대(구로후네, 黑船, 흑선)를 이끌고 에도(강호, 江戸: ‘도쿠가와 바쿠후, 德川幕府가 있던 곳으로 현재의 도쿄) 앞바다에 나타나 개항을 압박하자, 중국에 이어 일본이 서양의 식민지가 될 것이란 소문이 퍼져나가면서 열도 전체가 패닉 상태에 빠진다.

 

에도시대(강호시대, 江戶時代, 1603-1867)의 무신정권인 바쿠후(막부, 幕府)에 의해 데지마(출도, 出島: 나가사키에 건설된 인공섬)를 통한 네덜란드와의 무역, 류큐(유구琉球; 오키나와)를 통한 조선과 중국과의 무역을 제외하고는 외국과의 교역은 엄격하게 제한하였는데, 1854년 도쿠가와 바쿠후가 미국에 문호를 개방하게 되면서 영국, 러시아, 네덜란드, 프랑스와의 대외 무역이 활발해지기 시작한다.

 

그런데 바쿠후가 외국과 체결한 굴욕 조항으로 인해 상당 부분에서 불평등 조약이 합의되자, 일본 내에서 반() 바쿠후 정서가 커지기 시작하면서 조슈한(장주번, 長州藩: 일제때 육군을 장악; 현재의 야마구치현, 山口県, 山口縣, 산구현’)과 규슈 최남단 사쓰마한(살마번, 薩摩藩: 일제때 해군을 장악; 현재의 가고시마 현, 鹿兒島藩, 녹아도번’)을 비롯한 여러 지방 번국(藩國)에서 존왕양이(尊王攘夷: 천황은 받들고 서양을 배척하자는 사상) 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이런 시대적 환경에서 사카모토 료마에게 영향을 준 인물이 있는데, 그는 에도시대 말기부터 메이지시대에 활동한 고위 관료 가쓰 가이슈(승해주, 勝海舟, 1823-1899: 본명은 가쓰 요시쿠니 勝義邦이며 관직에 오른 이후에는 아와노카미安房守’, 메이지 유신후에는 가쓰 야스요시勝安芳로 개명한다. 가쓰는 자신의 누이와 결혼하여 처남매부간이 된 사쿠마 쇼잔에게서 받은 海舟書屋에서 따온 것임).

 

가쓰는 27세가 되던 1850년에 아카사카(적판, 赤坂)에서 사설학교를 세워 란가쿠(난학, 蘭學), 네덜란드어, 서양 군사학을 가르치며 병기연구에 몰두한다. 1853년 미국의 페리(Matthew Calbraith Perry, 1794-1858) 제독의 내항을 계기로, 1854년 페리 제독과 일미화친조약을 체결한 아베 마사히로(阿部正弘, 1819-1857)가 시국에 대한 의견 공모전을 내놓자, 가쓰는 무역을 통한 이익 창출로 국방비를 충당하자고 주장한 해방의견서’(海防意見書)를 제출하여 바쿠후에 중용된다.

 

1855년에 가이슈는 아베 마사히로가 나가사키(장기, 長崎: 1571년 포르투갈과 무역을 시작함으로써 무역항이 되었고, 뒤이어 이곳에 그리스도교가 뿌리를 내리고 영국·네덜란드와도 교역을 하게 되었으나, 1641년 그리스도교 금교禁敎와 통상수교거부정책으로 인해 외국 무역이 금지되지만, 포교활동을 하지 않은 조선과 중국과 네덜란드는 예외가 되어 개국 때까지 무역을 계속함으로써 일본이 유럽의 문화를 받아들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194589일 히로시마廣島에 이어 2번째로 원자폭탄이 투하된 도시)에 창설한 해군사관학교, 곧 일본 최초의 군사학교인 가이군젠슈쇼(해군전습소, 海軍傳習所)가 개설되자 전습생 감독이 되고, 이때 그는 네덜란드어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전습생과 네덜란드인 교관의 연락을 담당하며, 네덜란드인 교관으로부터 세계정세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얻게 된다.

 

서양식 군사기술의 도입에 소극적이었던 다이로(대로, 大老: 비상시 바쿠후의 최고의 역직, 役職) 이이 나오스케(井伊直弼, 1815-1860)는 가이군젠슈쇼가 에도에서 먼 곳에 있어 유지하기에 재정적 부담이 커지자, 1859년에 이를 폐쇄시키고, 에도 쓰키지에 있던 강무소 내에 군함교수소(軍艦教授所)를 열고, 후에 군함조련소로 개칭하며, 바쿠후 해군 교육의 핵심 시설로 삼는다. 교수진은 서방군사고문단이 아니라 나가사키 해군전습소 졸업생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는데, 이 때 가쓰 가이슈도 교수로 참여한다.

 

18606, 가쓰는 바쿠후가 미일수호통상조약을 맺자 비준서 교환을 위한 특사 자격으로 바쿠후가 건조한 최초의 목조 서양식 군함인 칸린마루(함림환, 咸臨丸) 증기범선의 함장으로 태평양을 건너 미국으로 간다. 칸린마루에는 가쓰 이외에 에도, 메이지 시대의 계몽 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1835-1901) 등이 탑승한다.

 

비준서 교환을 무사히 마무리한 공로를 인정받아 가이슈는 1862년에 해군 요직인 군함봉행(軍艦奉行: 해군을 총괄하고 군함의 제작, 구매 및 제작 기술자 육성 등을 관할)이 된다. 이때 그는 고베(신호, 神戶)부근은 닻이 모래 속으로 들어가기 쉽고 수심도 깊어 커다란 배를 정박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항이기에, 일본의 해외 무역 거점으로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1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徳川家茂, 1846-1866)를 오사카만(대판만, 大阪湾)으로 안내하여 해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등 그를 설득하고, 결국 일본 제3위의 무역항인 고베(신호, 神戶)에 군함조련소를 만드는 일에 성공한다.

 

이러한 활동을 기반으로 가이슈는 1차 조슈 정벌 전에 메이지유신을 성공으로 이끈 유신삼걸 중 사람인 사쓰마한(살마번, 薩摩藩: 일제 때 해군을 장악; 현재의 가고시마 현, 鹿兒島藩, 녹아도번’) 출신의 사이고 다카모리(서향융성, 西鄕隆盛, 1828-1877)와 처음으로 회견하며, 사이고 다카모리에게 미국에 비하여 일본이 얼마나 나약한지를 설명하며, 사쓰마 번은 공무합체파(公武合体派, 조정과 바쿠후가 힘을 합쳐 정치를 쇄신하자는 입장)에서 벗어나 조슈한(장주번, 長州藩: 일제 때 육군을 장악; 현재의 야마구치현, 山口県, 山口縣, 산구현’)과 연합하여 바쿠후를 타도하고 새로운 정부를 세워야 한다는 생각을 피력한다. 바쿠후의 신하였던 가쓰에게서 바쿠후타도의 이야기가 나오자 사이고 다카모리는 놀랐다고 한다. 이후 사쓰마한은 표면적으로는 공무합체의 태도를 보였지만 바쿠후타도로 기운다.

 

1862년 말 료마는 근대적 해군을 창설한 인물로, 1867년에대일본연해약도를 제작하며, 1868년 일왕파(明治派; 신정부파)와 도쿠가와 바쿠후가 무력으로 대치한 상황에서 중개역할을 맡아, 에도바쿠후의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 1837-1913)를 자신의 비전론(非戰論: 전쟁을 반대하는 의견이나 이론)으로 설득하고 일왕파의 사이고 다카모리와 협상하여 무력충돌 없이 일왕파가 에도에 입성하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운 가쓰를 만나 크게 감화 받아 문하생이 된다. 가쓰는 료마에게 사이고 다카모리를 소개해 준다.

 

1859년에 나가사키 가이군젠슈쇼가 폐쇄되자, 네덜란드인 강사는 본국으로 돌아가고, 바쿠후 해군은 외국인 교관으로부터 본격적인 훈련을 받지 못하자 군함봉행 직책에 있던 가쓰는 료마를 사신으로 파견해 에치젠 국(월전국, 越前国)의 제16대 후쿠이현(복정현, 福井県) 번주(蕃主)였던 마쓰다이라 슌가쿠(송평춘악, 松平春嶽, 1828-1890)에게서 천냥을 빌려 1864년에 고베에 해군훈련소(神戶海軍訓練所)를 세운다. 료마는 해군조련소의 우두머리(熟頭)가 되어 후진을 양성하면서 해원대 대장(海援隊 隊長)이 된다. ‘고베해군훈련소를 통해 해군력이야말로 국력의 원천이라고 믿는다. 1년 후 18655고배해군훈련소는 해체된다.

 

사실 이전에 료마는 포병학교에 들어가 포술을 배우며 비로소 서양과 일본의 군사력의 차이를 실감하게 되고, 미국 선진 문물에 자극 받은 료마는 근대화에 눈뜨게 된다. 1853년 미국의 페리(Matthew Calbraith Perry, 1794-1858)제독이 이끌고 온 대형군함들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고베해군훈련소가 해산되자 료마는 사이고의 배려로 사쓰마한의 보호와 원조로 동지들과 함께 나가사키(장기, 長崎)의 가메야마에 일본최초의 주식회사라 할 수 있는 사설 해군무역회사인 가메야마샤추’(귀산사중, 亀山社中)를 설립하여, 무역, 투자, 수입, 출판, 간척, 교육, 증기기관차 기술 개발, 우편, 무기수입 등 거의 모든 사업에 손을 대며, 모든 직원의 월급을 차등 없이 동일하게 지불할 만큼 세련된 기업가로 변신한다.

 

료마는카이엔타이’(해원대, 海援隊)라는 무역상사를 설립했는데, ‘가메야마샤추와 거의 동일한 목적을 위해 진행하였고, 스폰서가 사쓰마현이 아니라 도사현이라는 것이 차이점이다.

 

3. ‘사쓰마-조슈 동맹

 

1865629, 료마는 친구이자 자신과 함께 암살당한 나카오카 신타로(中岡愼太郞)와 함께 사쓰마한 저택에서 사이고 다카모리와 만나, 사쓰마한의 명의(名義: 문서상의 권한과 책임이 있는 개인이나 기관의 이름)로 조슈한이 군함과 무기를 구입하도록 협조해달고 의뢰하는데, 사이고는 조슈한의 군량미조달을 조건으로 승낙한다.

 

료마는 가메야마샤추에 구매 주선을 지시하고 동년 8월 조슈한의 이토 슌스케(伊藤俊輔: 이토 히로부미의 메이지유신 전까지의 이름)가 나가사키에서 무역업을 통해 일본 근대화에 커다란 공적을 쌓으며 일본 최대의 서양 무기 구매창구역할을 한 영국 상인 토머스 B. 글로버(Thomas B. Glover: Glover상회는 아편 전쟁의 원인이 되기도 했던 영국의자딘 매디슨 상회, Jardine Matheson Co’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었는데, Glover의 직함이 매디슨 상회 나가사키 대리인이었음)으로부터 총기 7,300정을 92,400량에 사들인다.

 

사이고의 요청으로 료마는 조슈한을 방문해 군량미 조달을 의뢰해 조슈한이 500섬을 공급키로 합의하고, 조슈한은 동년 1018일 글로버에게 군함을 37,500량에 매입한다. 이처럼 조슈한은 군사력 근대화를 완성을 지향한다.

 

이런 배경에서 료마는 18663월 일본 에도시대 후기 서로 적대관계에 있던 최대 세력, 곧 원래 바쿠후를 지지하던 온건파 개혁의 중심인 규슈(구주, 九州) 최남단 사쓰마한(살마번, 薩摩藩: 일제때 해군을 장악; 현재의 가고시마 현, 鹿兒島藩, 녹아도번’)과 반()바쿠후 세력의 중심으로, 무력을 통한 천황제 옹립을 주창한 혼슈(본주, 本州) 서쪽, 한반도 도래(渡來)인이 많이 살던 조슈한(장주번, 長州藩: 일제때 육군을 장악; 현재의 야마구치현, 山口県, 山口縣, 산구현’)을 설득하여 물과 기름의 앙숙관계의 원한을 떨어내고 바쿠후(막부, 幕府)를 타도(토막, 討幕)하는 데에 협력하는 6개 조항의 정치적·군사적 동맹을 체결한사쓰마-조슈 동맹’(‘삿죠, 薩長 동맹’, ‘살마-장주 동맹’, ‘薩摩-長州 同盟)을 통해 일왕에게 전권을 양도하는 메이지 유신의 기폭제를 마련한다.

 

4. ‘타이세이호칸

 

료마는 바쿠후를 타도 한 뒤 1867(게이오 3)에 일본의 신국가체제의 기본 방침인 센츄우 핫사쿠’(선중팔책, 船中八策: 도쿄로 가는 배 안에서 구상한 8가지 방책으로 대정봉환, 상하의정국 설치, 인재 등용과 관제 개혁, 외교혁신, 법전의 제정, 해군 확충, 천황 직속 군대설치, 폐제 개혁으로 구성되어있음)을 제안하여 근대일본의 국가적 기틀을 마련한다.

 

료마는 사쓰마-조슈동맹군을 이끌고 교토로 진격하여, 교토에서 바쿠후 휘하의 군대와 대치한다. 료마는 바쿠후의 제15대 마지막 쇼군인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 재위 1866-1867, 1837-1913))에게 도쿠가와 가문 중심의 봉건연방제 계획의 타협안을 제시하고, 요시노부는 도쿠가와 가문을 보존하고, 미래의 신정부에 참여할 것을 기대하며 이 제안을 받아들여 18671014일 메이지일왕(明治日王, 1852-1912)에게대정위임론’(大政委任論, 대정=정권: ‘조정과 바쿠후의 일치’, 즉 공무합체의 일환으로 바쿠후정치의 통치권을 일왕으로부터 위임받음)의 반환을 신청하고 그 다음날 일왕이 이를 받아들인다. 이것이 타이세이호칸’(대정봉환, 大政奉還)이다.

 

사쓰마-조슈동맹군은 186813일 교토왕궁에서 바쿠후폐지와 쇼군관직 및 영지몰수를 결정하는 왕정복고 대호령’ (王政復古大號令)을 기습적으로 발표한다.

 

무진년(戊辰年)1868년에 사쓰마-조슈를 중심으로 한 메이지정부의 군대가 바쿠후세력과 1869년까지 벌인 내전인 보신센소(무진전쟁, 戊辰戰爭)에서 승리하고, 또한 왕정복고와 신정부 수립에 기여했던 사쓰마한의 사이고 다카모리(서향융성, 西鄕隆盛, 1828-1877)가 반란을 일으키지만 진압된다. 일왕이 뒷방신세 8백년을 벗어나며,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통해 중앙집권국가인 근대 일본제국시대가 개막된다.

 

사쓰마-조슈 동맹타이세이호칸을 통한 천황제 확립은 료마가 아니면 그 누구도 할 수 없었던 메이지유신의 핵에 속한다.

 

5. 국가관

 

료마가 누나 오토메에게 보낸 편지 내용의 일부는 료마의 진심어린 국가관을 보여준다.

 

이 모든 일은 간사한 관리가 외국인과 내통해서 벌어졌습니다. 간사한 관리들이 기세가 등등하고 수도 많지만, 저는 다이묘 두세 명과 굳게 약속하여 동지를 모으고 에도의 동지, 하타모토(쇼군의 직속 가신), 그밖에 다른 사람들과 마음을 합쳐 간사한 관리들을 물리쳐 일본을 깨끗이 세탁해야 한다고 기원하고 있습니다. () 보통 사람처럼 쉽사리 죽지는 않을 겁니다. 내가 죽는 날은 천하에 큰일이 일어나 살아 있어도 쓸모가 없고, 사라져도 상관없는 때가 될 것입니다. 도사(土佐)의 시골뜨기도 뭐도 아닌 얼치기로 태어나 한 사람 힘으로 천하를 움직이고자 한다면, 그것은 하늘이 그렇게 시킨 것입니다. 이렇게 말해도 결코 교만해지지 않고 더욱 몸을 낮춰 개펄 속 재첩처럼 늘 코를 땅바닥에 붙이고 모래를 머리에 덮어쓰고 있으니, 부디 안심하십시오.”

 

이 서신엔 바쿠후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담겨있다. ‘간사한 관리1863년 조슈한이 조정과 바쿠후의 양이(攘夷) 방침에 따라 미국 상선을 포격했지만 미국함대의 포격을 받아 큰 타격을 입고 개항해야 했는데, 바쿠후의 관리가 미국과 내통해 미국함대가 조슈한 공격을 격퇴하도록 한 인물을 뜻한다.

 

간사한 관리제거를 통해 일본을 세탁해야 한다는 혁명적인 국가변혁에 대한 의지선언, 진인사대천명(盡 人事待 天 命)명에 입각한 천하운영관, 겸손히 인내하며 때를 기다림 등의 철학을 엿볼 수 있다.

 

1876년 조선에서 이뤄진 강화도조약은 메이지유신으로 단련된 일본 근대화의 첫 번째 외교 작품에 해당된다.

 

6. 교훈

 

료마는 일본의 첫 주식회사회장을 지내며 번 돈으로 자기에게 내재된 조화와 타협의 기질을 발휘하여사쓰마-조슈 동맹타이세이호칸을 성공적으로 완수하여 일본의 근대화를 이루었다. 그리고 료마는 그 대가로 위대한 죽음을 맞이했다. 대의(大義)의 길을 걸어간 료마, 오직 일본과 일본인을 위해 살다간 료마에 대해 지금도 일본열도는 뜨겁게 달구어져 있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현대사는 대통령의 편집증 때문에, 3.15, 1.16, 1212라는 숫자가 등장해 독재문화’,‘헌정유린과 법질서파괴문화’,‘조폭문화’,‘깡패문화’,‘오입문화’,‘기생관광문화’,‘한탕주의문화’,‘일방적 명령하달식문화’,‘획일주의적 전체주의문화’,‘악질일제찬양문화’,‘수많은 고문피해자, 간첩조작피해자, 산재사망자등을 죽이거나 장애인으로 만든 식의근대화찬양 등의 생명경시의 사탄의 문화로 얼룩져 있다.

 

료마가 부정부패부조리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일본의 세탁을 원하는 것처럼 대한민국을 완전히 세탁해야 하는데, 차기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고 있는 9명은 그저 대통령직을 자신과 가정이나 가문의 명예로만 생각하며 이전의 대통령처럼 대통령 편집증에 시달리고 있을 뿐이다. 대한민국과 대한국민을 위해서 목숨 걸고 자주국방을 완성해 대한민국식의 한반도통일을 해야 하는데, 타국의 일처럼 전혀 관심 없음은 물론 미국의 저격으로 죽을까봐 핵무장반대에 목숨 걸 뿐이다.

 

오직 조선왕조와 조선백성을 위해 자신을 던진 성웅 이순신 제독의 묘비명인 필생즉사 필사즉생’(必生卽死 必死卽生: 죽기로 싸우면 반드시 살고, 살려고 비겁하면 반드시 죽는다)라는 담론이 처절할 정도로 그립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제자도에 대해서 이렇게 선언하신다.

 

“34.예수께서 군중과 제자들을 한 자리에 불러놓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35.제 목숨을 살리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릴 것이다.”(공동번역. 마가복음 8:34-35)

 

7. 나가는 말

 

기존의 여당이나 야당의 후보론 한미동맹 기초위에 자주국방에 의한 대한민국식의 한반도 통일을 이루어 골드만 삭스가 예언한 대로 미국과 더불어 세계를 리드하는 위대한 대한민국, 아름다운 통일 한반도, 건강하며 행복한 한국인, 평화와 사랑이 넘치는 세계를 기대할 수 없다.

 

박근혜 정부의 국정운영은 99%국민에겐 국가의 존재가 필요 없음을 보여주고 있고, 결국 각자도생(各自圖生)의 길을 가라고 하는데, 누가 혜성같이 나타나서 대한민국국민을 사랑과 포용정신으로 보듬고 한반도통일을 이루어 환인천제(桓因天帝)환국’(桓國), 한웅천황(桓雄天皇)배달국’(倍達國), 단군왕검(壇君王儉)고조선’(古朝鮮)빛의 문화의 나라를 재현하며, ‘홍익인간정신을 전 세계에 전파하도록 할 수 없을까? 그런 인물의 등장을 강력히 대망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망의 문화를 펼치는 자들의 통치를 비판하시고 생명의 문화를 담당한 빛의 자녀들이 실행해야 할 정치철학을 말씀하시면서 당신의 십자가의 철학을 다음과 같이 밝히신다.


“25.예수께서는 그들을 가까이 불러놓고 너희도 알다시피 세상에서는 통치자들이 백성을 강제로 지배하고 높은 사람들이 백성을 권력으로 내리누른다. 26.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사이에서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27.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한다. 28.사실은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이다.’하셨다.”(공동번역. 마태복음 20:25-28)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둠의 문화를 만들어내는 사탄의 정체를 당신의 생명의 문화, 빛의 문화와 비교하시며 다음과 같이 밝히신다.


“44.너희는 악마의 자식들이다. 그래서 너희는 그 아비의 욕망대로 하려고 한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였고 진리 쪽에 서본 적이 없다. 그에게는 진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는 거짓말을 할 때마다 제 본성을 드러낸다. 그는 정녕 거짓말쟁이이며 거짓말의 아비이기 때문이다.”(공동번역. 요한복음 8:44)


“10.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개역한글. 요한복음 10:10)


“12.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또 말씀하셨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라오는 사람은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공동번역. 요한복음 8:12)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또한 당신의 제자상을 이렇게 기술하신다.

 

“14.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있는 마을은 드러나게 마련이다. 15.등불을 켜서 됫박으로 덮어두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등경 위에 얹어둔다. 그래야 집 안에 있는 사람들을 다 밝게 비출 수 있지 않겠느냐? 16.너희도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공동번역. 마태복음 5:1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