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카스기 신사쿠(고삼진작高杉晋作, 1839-1867)를 소개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일본 총리 아베 신조(안배진삼安倍 晋三, 1954-)가 존경하는 역사 인물의 계보를 보면, 요시다 쇼인(길전송음吉田松陰, 1830-1859)-다카스기 신사쿠-기시 노부스케(안신개岸信介, 1896-1987: 아베의 외조부로 A급 전범 용의자이나 증거 불충분으로 불기소 석방 처리되어 제56, 57대 총리를 역임)로 이어지는 혼슈(본주本州) 남서쪽, 한반도 도래(渡來)인이 많이 살던 조슈한(장주번, 長州藩: 일제때 육군을 장악; 현재의 ‘야마구치현, 山口県, 山口縣, 산구현’) 인맥이기 때문이다.
둘째, 아베의 이름 신조(진삼晋三) 가운데 신(晋)은 부친 아베 신타로(안배진태랑安倍晋太郞, 1924-1991: 농림수산장관, 내무장관, 외무장관, 자민당 간사장 역임)의 신(晋)자에서 유래한 것인데, 다카수기 신사쿠(고삼진작高杉晋作)의 신(晋)에서 전수한 것이라고 설명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필자가 볼 땐 아베가 뻥까고 있거나 아니면 아베 할아버지가 다카수기를 존경하는 마음에서 자신의 아들 신타로에게 신(晋)자를 선물했고, 신타로도 동일한 심정에서 자신의 아들 신조에게 신(晋)자를 선사한 것으로 추정한다.
왜냐하면 일본부모는 아버지가 이름을 지어주며, 핏줄을 맹약하는 의미에서 자신의 이름자 하나를 아들에게 주기 때문이고, 더욱이 아베가 장성한 후 이름을 변경했다는 시도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아베 3대가 다카수기를 존경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혼슈(본주本州) 야마구치현(산구현山口県, 山口縣)에 있는 항구도시 시모노세키(하관下關)에서는‘晉作 우동’, ‘晉作 모치(떡)’라고 쓰인 간판까지 심심찮게 눈에 띈다고 한다.
셋째, 다카스기는 대한제국의 원흉(元兇)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伊藤博文, 1841-1909)가 존경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넷째, 다카스기는 도쿠가와 바쿠후(덕천막부德川幕府)에 결정타를 가해 그 숨통을 사실상 끊어 버리고 메이지정부탄생의 1등 공신으로 야마구치 현의 간몬해협(관문해협關門海峡)에 면한 상공업, 항구도시인 시모노세키(하관下關)에서 가장 사랑받는 역사인물이자 고향인 하기(추萩)에 그의 동상이 있고, 야스쿠니신사 (정국신사靖國神社)에 묻혔기 때문이다.
다섯째, 다카스기하면 조선의 정여립(鄭汝立, 1546-1589)이 오버랩되기 때문이다. 사실 두 사람은 많은 점에서 차이점이 있지만, 열혈아, 풍운아라는 공통점이 있다.
1. 인품
이토는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로 다카스기 신사쿠와 규슈(구주, 九州) 최남단 사쓰마한(살마번, 薩摩藩: 일제때 해군을 장악; 현재의 ‘가고시마 현, 鹿兒島藩, 녹아도번’) 출신의 오쿠보 도시미치(대구보리통,大久保利通, 1830-1878)를 들면서, 전자는 움직이면 우레 같고 어떠한 일이든지 시작하면 풍우 같으며(이토가 도교안東行庵동행암의 다카스기의 비문에 새긴 글), 직감적으로 행동하는 사나이였으며, 오쿠보는 냉철했고 논리적이며 현실 정치가였다고 평가한다.
한마디로 다카스기는 직언직행 방약무인(直言直行 傍若無人)한 우뇌형인물이고, 오쿠보는 실리적인 좌뇌형 인물이라고 보면 된다. 두 사람을 좋아한 이토는 죄뇌형과 우뇌형의 배합이 잘 된 자라고 사료된다.
2. 고향
다카스기는 혼슈(본주本州) 서쪽, 한반도 도래(渡來)인이 많이 살던 조슈한(장주번, 長州藩: 일제 때 육군을 장악; 현재의 ‘야마구치현, 山口県, 山口縣, 산구현’) 벽촌 하기(추萩)의 중상급 사무라이집안 출신으로 요시다 쇼인(길전송음吉田松陰, 1830-1859)과 동향인이다.
3. 천연두와 종두법
다카스기는 10세 때 천연두에 걸려 위독 상태에 빠지나 옆집에 사는, 22살이 되던 1865년에 일본 최초로 종두법(種痘法: 천연두의 예방접종인데 천연두는 두창痘瘡, 손님마마媽媽, 포창疱瘡, 호역戶疫 등 많은 병명으로 불림)을 시행했던 조슈한의 한의(번의藩醫)이며 난학자(蘭學者: 네덜란드 중심의 서양 학문을 배운 학자)인 아오키 슈스케(청목주필青木周弼)와 동생인 아오키 겐조(청목연장青木研藏) 형제의 치료로 목숨을 건지나 살짝 곰보가 된다. 요시다 쇼인도 살짝 곰보다.
그러면 두 명의(名醫)에 대해 살펴보자.
다카스기의 옛집이 소재한 키쿠야요코초(菊屋橫丁) 주변은 에도시대(강호시대江戶時代) 사무라이 집들이 남아 있어 조카마치(성하정城下町: 성 아래에 있는 마을, 성하마을)라고 불린다. 다카스기 옛집의 이웃집이 위에서 명의(名醫) 아오키 슈스케, 겐조 형제의 옛집이다.
아오키는 한(번藩)의 한슈(번주藩主영주)인 다이묘(대명大名) 모리 다카치카(모이경친毛利敬親, 재위 1837-1869: 가난했던 조슈한을 풍요롭게 하여 메이지유신을 이룩하는 계기를 만든 인물)의 주치의, 겐조는 모리의 아들 사다히로(정광定廣)의 주치의로 재직하다 후일 메이지왕(명치왕明治王, 1852-1912)의 주치의가 된다.
역시 의사인 겐조의 아들 슈조(주周)는 조슈한 출신의 제3대(1889-1891), 제9대(1898-1900) 일본 내각총리대신 야마가타 아리토모(산현유붕山縣有朋, 1838-1922)내각과 규슈(구주, 九州) 최남단 사쓰마한(살마번, 薩摩藩: 일제때 해군을 장악; 현재의 ‘가고시마 현, 鹿兒島藩, 녹아도번’)출신의 제4, 6대 일본 내각총리대신 마쓰카타 마사요시(松方正義, 1835-1924)내각에서 외무대신으로 기용된다.
4. 검술과 결혼
다카스기는 관영학교인 한코우(번교藩校: 무사의 자녀들의 학교) 메린칸(명륜관明倫館) 등에 다니지만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12세 무렵부터 검술을 연마해 20세 전후에 유생신음류(柳生新陰流)의 면허(免許)를 개전(皆傳)한 검의 고수(高手)가 된다.
그리고 21세 때인 1860년 1월, 다카스기는 양친의 권유로 고향에서 최고 미인으로 소문난, 한시(번사藩士: 각한에 소속된 사무라이와 그 구성원) 에몬이노우에 헤에몬(대조 250석)의 차녀 마사(아雅)와 결혼한다.
5. 요시다 쇼인의 쇼카손주쿠
다카스기는 18세 때인 1857년 동향인 요시다의 쇼카손주쿠(송하촌숙松下村塾)에 입숙(入塾)해 요시다 쇼인의 가장 총애하는 제자가 되어 ‘존왕양이’(尊王攘夷: 일왕은 받들고 서양을 배척하자는 사상)와 부국강병(富國强兵; national prosperity and military power)사상의 옹호자가 된다.
그런데 요시다의 출신성분이 하급(下級) 사무라이 출신에다 요시다가 존왕양이의 신봉자라 다카스기의 조부와 부친은 다카스기가 쇼카손주쿠에 다니는 것에 반대한다. 그래서 다카스기는 집안 어른의 눈을 피해 밤중에 쇼카손주쿠에 다닐 정도로 요시다의 사상에 푹 빠진다.
6. 중국청조견학과 ‘유청오록’
다카스기의 나이 23세 때인 1862년 5월 바쿠후(막부幕府)는 중국청조(淸朝)의 상하이(상해上海)에 무역의 거점을 설치하기 위해 조슈한의 추천으로 다카스기를 파견한다. 다카스기는 배편으로 상하이에 도착해 3개월간 청나라의 내전(內戰)과 서구열강의 동향을 살피면서 그들의 선진문물제도와 기계설비등을 시찰한다.
당시 청조는 아편 전쟁(1840-42) 이후 쇠퇴기에 들어선 청조를 타도하기 위해 일어난 ‘태평천국의 난’((太平天國之亂, 1851-1864)으로 혼란스러웠다.
광둥(광동廣東)의 그리스도인 홍수전(洪秀全, 1813-1864)과 농민반란군은 태평천국(1851-1864)을 세워‘멸만흥한’(滅滿興漢: 만주족 왕조인 청나라를 타도하고, 한족의 국가를 부흥하자는 것으로 배만흥한排滿興漢으로도 불림)의 기치와 함께 토지균분, 조세경감, 남녀평등 등을 구호로 내걸며 사상, 종교, 정치, 사회전반의 개혁을 요구하며 일으켜서, 그것을 ‘장발적(長髮賊)의 난’, ‘월비(粤匪)의 난’, ‘발역(髮逆)의 난’ 이라고도 한다.
그런 와중에 다카스기는 다음과 같은 광경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한다.
1842년 8월 아편전쟁의 종결을 위하여 영국과 청나라가 체결한 최초의 불평등 강화조약인 난징조약(남경조약南京條約 또는 장닝조약江寧條約)에 따라 청조는 홍콩을 영국에 할양할 뿐만 아니라 광저우(광주廣州), 샤먼(하문廈門), 푸저우(복주福州), 닝보(영파寧波), 상하이(상해上海) 등 5항(港)을 개항할 수밖에 없었고, 서구열강은 이곳에 영사관을 설치하는 동시에 성곽과 같은 웅장한 상관(商館: 규모가 큰 무역을 경업하는 무역센터로 특히 경영주가 외국인인 무역센터를 이름)을 세우며 상선(商船; merchant ship: 상업상의 목적에 사용되는 선박으로 여객선, 화물선, 화객선 등을 일컬음), 군함 수백 척을 정박시켜 치외법권(治外法權)을 누리면서 무역의 이익을 탐하고 있었다.
다카스기가 상하이 체제 중 기록한 일기인‘유청오록’(遊淸五錄)은 서구열강에 의한 일본의 식민지화에 대한 다카스기의 염려와 통탄이 녹아 있다.
“중국인은 외국인의 노예가 되었다. 우리 일본도 이와 같이 되지 않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우리 일본도 바쿠후의 허약(虛弱)외교로 인해 이미 중국청조의 전철을 밟고 있다”
다카스기는 자신의 고향 조슈한(일제의 육군을 지배)이 해상권장악에서 최대 라이벌인 사쓰마한(일제의 해군을 지배)에게 상당히 밀리고 있음을 인식한다.
당시 조슈한은 구식(舊式) 범선 군함 2척밖에 보유하지 못한데 반해 사쓰마한은 상하이 일대에서 세계를 상대로 밀무역을 이미 개시했고, 장래에는 사쓰마한으부터 구미로 건너가는 항로를 개설할 계획이라는 정보까지 입수하며 매우 초조해한다.
그 애처로운 초조함은 그대로 다카스기의 행동을 촉발시킨다.
다카스기는 상하이에서 귀국해 나가사키(장기長崎)에 도착하자마자 조슈한의 수뇌부의 허락도 받지 않고 네덜란드의 무기상이 매도하려 했던 증기선을 매입하기 위한 계약을 독단으로 감행하려하지만, 조슈한은 그 구매계약을 추인하지 않을뿐더러 조슈한 내에서 다카스기의 독단에 대한 비난이 거세지자 네덜란드 측도 이 상담을 포기한다.
7. 양위활동, 키헤이타이창설과 바쿠후타도결의
다카스기는 에도(강호江戶: 현재 도쿄)에서 조슈한의 동지들에게 상하이에서 느낀 위기감을 전하며 다음과 같이 테러활동을 시작한다.
1862년 12월 12일 다카스기가 주동이 되어 구사카 겐즈이(久坂玄瑞,1840-1864: 쇼인의 여동생 후미와 결혼), 이노우에 분타(정상문다井上聞多, 후에 이노우에 가오루, 정상형井上馨로 개명, 1836-1915)와 이토 슌스케(伊藤俊輔: 후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이등박문으로 개명, 1841-1909) 등은 시나가와(品川) 고텐야마(御殿山)에 건설 중이던 영국공사관에 잠입해 방화한다.
그리고 다카스기는 다음과 같은 사건을 접하고 번청(藩廳)에 게릴라 전법의 민병(民兵)조직인 키헤이타이(기병대奇兵隊)창설을 건의해 실행한다.
구사카의 지휘 하에 조슈한의 양이파(洋夷派: 양이는 서양오랑캐라는 뜻으로, 서양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로 서구열강을 반대하는 세력)들은 시모노세키 고묘지 광명사에 본영을 설치한 후 1863년 5월11일 새벽 2시 미국 상선 펨브로크 호(Pembroke)를 향해 포격을 감행하자, 펨브로크 호는 스요나다로 도주한다. 십 여일이 지나자 조슈한은 통보함 키엔샹 호(Kien-Chang), 네덜란드 동양 함대 소속의 메두사 호(Medusa)을 향해 무차별 포격을 가한다. 이 시기의 미국은 남북 전쟁 중에 있었고, 대부분의 군함은 본국에 있었기 때문에 유일하게 남아있던 미국 군함 와이오밍 호(Wyoming)가 6월 1일 보복 공격을 가해 보복의 전과를 올린다.
그러자 며칠 지나지 않아 프랑스 군함 2척, 세미라미스(Semiramis)와 탕크레드(Tancrede)도 보복을 위해 시모노세키 해협에 진입해 맹렬한 포격을 가한 후 해군 육전대(陸戰隊)를 상륙시켜 해안 포대들을 점거파괴하고, 민가(民家)도 방화하자 조슈한의 사무라이들이 이에 맞싸웠으나 패퇴하고 만다.
미국과 프랑스 함대의 공격으로 뼈아픈 패배를 당하고서야 조슈한은 서양의 군사력이 만만치 않음을 알게 된다. 다카스기는 쇼인의 ‘초망굴기’(草莽崛起: 민초를 궐기시켜 바쿠후를 타도하라)를 떠올리고 사무라이 계급만 무기를 소유하고 군사훈련을 받을 수 있도록 했던 바쿠후의 방침을 정면으로 무시하며 신분을 가리지 않고 전투력 위주로 대원을 선발, 편성하여 ‘기헤이타이’(기병대奇兵隊: 말을 타는 기병騎兵이 아니다. 신개념의 기습 부대다. 사무라이 계급뿐만 아니라 농민, 상인, 공인, 스모 선수, 심지어는 불교 승려까지도 군대에 가입시켰다. 모든 국민이 국가의 부름에 전쟁에 나선 군대다. 메이지 정부의 국민개병제國民皆兵制 모델이다. 다카스기의 기병대 휘하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미우라 고로三浦梧樓 등이 있음)를 창설해 총독에 취임하면서, 양이운동을 접고 바쿠후타도(도막倒幕)로 선회한다. 기병대에 이어 유격대(遊擊隊), 어순대(御盾隊), 집의대(集義隊), 역사대(力士隊) 등 민병대가 조직되어 총병력은 2000여 명에 이른다.
8. 시모노세키전쟁과 강화협상
1864년 7월 금문(禁門)의 변(變)이후(황궁의 수호직을 맡은 사쓰마한-아이즈会津한의 두 연합군에게 조슈한군대는 패주) 서구열강에 대한 개항 이후 금과 원료 등이 대량으로 유출되면서 커다란 경제적 손실이 발생하자 에도 바쿠후의 개항정책에 대한 비판이 거세게 일어나고, 일왕 고메이(孝明, 1831-1867)도 바쿠후에 ‘양이’정책의 실행을 요구하는 칙서를 보내오자, 조슈한(장주번, 長州藩: 일제 때 육군을 장악; 현재의 ‘야마구치현, 山口県, 山口縣, 산구현’)이 총대를 메고 간몬해협(관문해협關門海峡) 봉쇄에 나서자 미국,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의 서구 열강이 이에 저항하는‘시모노세키전쟁’(하관전쟁下關戰爭; 시모노세키의 옛 지명을 따서 ‘바칸전쟁馬關戰爭’이라고도 부름; 1863. 7. 20.-동년 8. 14. 전투를 ‘시모노세키사건下關事件’, 1864. 9. 5.- 동년 9. 6.의 전투를 ‘시모노세키전쟁’이라고 구별)에서 조슈한이 패하자, 절에서 근신 중이던 25세의 다카스키는 영국유학에서 귀국한 자신보다 2세 연하인 23세의 이토를 통역으로 대동하고 강화협상 대표로 나간다.
영국의 해군 오거 레오폴드 쿠퍼 제독은 중국청조의 홍콩처럼 시모노세키의 시의 남단에 있는 섬인 히코시마(언도彦島) 할양을 요구하자, 다카스키는 아편전쟁과 홍콩의 교훈을 절감하고 있어 일언지하에 거절하자 쿠퍼제독은 다카스키의 배짱에 탄복해 5개의 요구사항(외국 선박의 자유로운 통행 보장, 외국 선박에 필요한 물자 공급, 포대 철거, 배상금 300만 달러 지불, 긴급 상황에서의 외국 선박의 시모노세키 입항 허가)으로 대신한다.
이 때 이토는 제국주의자 영국을 상대하는 다카스키에서 한 수 배워 그것을 그대로 대한제국과 중국청조에 적용한다.
9. 바쿠후타도실행, ‘사쓰마-조슈 동맹’그리고 죽음
다카스기는 1854년 12월 공산사(功山寺)‘가이텐’(회천回天) 거병(조슈한내 쿠데타)를 주도하고, 1865년 1월 13일, 3월에 기헤이타이를 출동시켜 사무라이로만 이루어진 바쿠후군을 격파하고 26세의 나이로 조슈한의 주된 정치, 군사 지도자가 된다. 조슈한의 바쿠후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는 것을 본 사쓰마 한은 그동안 반목했던 조슈한과 손을 잡을 준비를 한다.
1866년 3월 사카모토 료마(판본용마, 坂本龍馬, 1835-1867)의 치밀한 외교와 막후 중재로 바쿠후를 타도(토막, 討幕)하는 데에 협력하는 6개 조항의 정치적·군사적 동맹을 체결한‘사쓰마-조슈 동맹’(‘삿죠, 薩長 동맹’, ‘살마-장주 동맹’, ‘薩摩-長州 同盟)이 이루어져 존왕 대 쇼군(將軍), 양이 대 개항, 중앙정부 바쿠후 대 한(번藩)의 영주 다이묘(大名). 세력과 이념의 전쟁이 종결되고 메이지유신(명치明治維新유신)정부가 세워진다.
‘사쓰마-조슈 동맹’이후 1866년 5월 바쿠후는 조슈 정벌에 나선다. 해군총독 다카스기는 고쿠라(소창小倉城) 전투에서 1000명의 기병대로 2만의 바쿠후군을 물리친다. 이것은 바쿠후시대 몰락을 재촉하는 일대 사건이다.
그러나 다카스기는 사카모토 료마의 운명을 따라 메이지유신정부수립을 보지 못하고 28세의 나이인 1867년 5월 17일 폐결핵으로 사망한다. 이후 기헤이타이는 다카스기보다 1세 연상이지만 그의 부하였던 야마가타 아리토모(산현유붕山縣有朋, 1838-1922)가 지휘하고, 일본제국육군이 설립됨에 따라 1870년 기헤이타이는 해체된다.
10. 도교안과 공산사
(1)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의 도교안(東行庵)
다카스기 사후 기병대 군감이었던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기병대의 본거지와 가까운 산기슭에 암자를 짓고 무린암(無鄰庵)이라 칭하고, 1867년 다카스기의 유언으로 다카스기의 유해를 이곳에 매장한다.
무린암이 도교안(동행암東行庵)으로 이름이 바뀌게 된 사연은 이러하다.
도교(東行)는 다카스기의 아호(雅號)다. 다카스기의 애인이었던 유곽출신 오우노(おうの)가 삭발하고 곡매처니(谷梅處尼)란 법명의 여승이 되자, 야마가타는 1869년 무린암을 오우노에게 기증한다. 오우노는 다카스기의 아호를 본따 도교안으로 이름 짓고 1909년 죽기 전까지 40년간 다카스기의 묘(묘비 높이 61cm, 폭 24cm)를 지키며 명복을 빈다.
비문엔 이토 히로부미의 글이 새겨져 있다.“움직이면 번개(雷電), 일어서면 비바람(風雨)”
도교안의 다카스기 동상은 2014년 3월에 제막되었고, 동상 받침돌(높이1.5m, 폭 2m)에 아베의 휘호 명판이 새겨졌다.‘高杉晋作像 內閣總理大臣 安倍晋三’(고삼진작상 내각총리대신 안배진삼). 동년 7월 아베는 이곳을 찾아 신사쿠 동상과 묘소를 참배하고 새로운 정치적 구상을 한다.
아베의 외조부로 제56, 57대 총리를 역임한 기시 노부스케(안신개岸信介, 1896~1987)의 명판‘회천의거’(回天義擧)도 있다.
다카스기의 시비(詩碑)엔 이런 구절이 새겨져 있다.
‘將立回天回運策’(바야흐로 회천회운의 대책을 세운다, 1864년 가을)
나오키상(일본의 소설가 나오키 산쥬고直木三十五의 대중문학의 선구적인 업적을 기려 기쿠치간菊池寬의 발의로 1935년 분게이슌주文藝春秋에서 대중문예의 신진작가에게 주기 위해 제정한 상) 수상 역사 작가 후루카와 가오루(길천훈古川薰)가 새긴 도교안 추모비의 내용은 이렇다.
‘꿈속의 넋이 홀로 난다’(몽혼독비夢魂 獨飛)
일본역사소설의 황금기를 열어 국민작가가 되었고, 일본역사소설을 완성시킨 소설가 시바 료타로(사마료태랑; 司馬遼太郞, 1923-1996)의 추모문학비 는 이런 글이 새겨져 있다.
‘조슈는 기병대의 나라’.
(2) 공산사
시모노세키의 공산사(功山寺) 불전 옆에 1967년 세워진, 말을 타고 출병하는 모습의 다카스기 동상이 있다. 받침돌 명판엔 ‘채찍을 휘두르니 메이지 유신’(일편회천명치유신一鞭回天 明治維新)이 새겨져 있다. 천하 형세를 바꾼 곳이라고 해서‘유신 회천(回天)의 거병지’로 기린다.
11. 평가와 교훈
(1) 평가
그동안 메이지유신지도자들에 대해 평가를 제기했기 때문에 중복되는 부분도 많아 여기에선 한 줄로 비평하겠다.
다카스기는 메이지 유신의 원훈(元勳)이지만 한국인에겐 원흉(元兇)이다.
(2) 교훈
1) 중국청조와 서구열강과의 관계를 통해서 절실하게 깨달은 다카스기의 부국강병사상
2) 외교
시모노세키전쟁과 강화협상에서 25세의 햇병아리이자 외교에 문외한(門外漢)인 다카스키는 제국주의 영국을 상대하면서 전혀 주눅이 들지 않고, 주체적인 자세로 임하여 히코시마(언도彦島) 할양요구를 단호히 거부하면서 다른 분야를 양보하여 커다란 국익손실을 막는다.
이토는 다카스키에서 한 수 배워 그것을 그대로 대한제국과 중국청조에 적용한다.
여기에서 대한민국정부는 국익우선을 명심해야 한다.
지난 MB정부 때 한미FTA체결시 미국 오바마 대통령의 위신을 챙겨주기 위해서 많은 부분을 양보해야 한다고 공공연히 떠드는 것을 보고 대한민국이 과연 제대로 된 국가인가 많이 생각했다.
박근혜정부도 동일한 패턴을 따르고 있다. 미국의 MD정책 때문에 한미일공조를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은 이해하지만, ‘일본군위안부합의’를 보고 ‘외화내빈’(外華內貧)의 사자성어(四字成語)가 생각나고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속담이 연상된다.
3) 군사
첫째, 쇼인의 ‘초망굴기’에 입각한 ‘기헤이타이’창설은 메이지정부의 국민개병제 모델이 되었다.
시바 료타로는 이렇게 말한다. “조슈는 무사와 서민이 하나가 되어 유신을 완수했다.”
둘째, 공산사
‘유신 회천(回天)의 거병지’‘공산사’는 인간 어뢰, 죽음의 관이라고 불리는 ‘가이텐’(회천回天: 가이텐 창안자 해군 기관학교 대위 구로키 히로시는 훈련 중에 숨지고, 세키 유키오 해군 대위는 첫 출격으로 숨진다. 당시 두 사람의 나이는 23세)과 ‘가미카제’(신풍神風: 필리핀의 항공 지휘관 오니시 다카지로 중장이 주도로 이루어졌으며, 첫 출격자는 23세세의 해군병학교 대위 세키 유키오關行男)라는 ‘지옥의 무기’의 근원지다.
결국 이 두 야만의 무기는 기적을 일으키지 못하고 ‘사탄의 군사문화’로 전락했지만, 희생자 일본군인들은 야스쿠니 신사에 군신(軍神)으로 부활하고 있다.
이런 모든 것은 부정부패부조리를 쪄든 대한민국군을 비롯해 안보단체의 대혁명적인 개혁을 요구한다. 이것에 대해선 수없이 뉴미디어상에 글을 올렸기 때문에 간략하게 말하겠다.
대한민국 내에 은밀하게 활동하고 있는 빨갱이나 김일성세습독재수령체제를 옹호하는 세력도 커다란 위험요소이지만 자주국방을 등한시 하고 부정부패부조리의 늪에 빠져서 헤엄치고 있는 대한민국군과 안보단체가 더 해악한 존재임을 인식해야 한다.
12. 나가는 말
구약성서의 요엘 예언자는 자주국방의 당위성을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8.이제는 내가 유다 사람을 시켜서, 너희의 아들딸들을 팔겠다. 유다 사람은 너희 자녀를 먼 나라 스바 사람에게 팔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9.너희는 모든 민족에게 이렇게 선포하여라. 전쟁을 준비하여라! 용사들을 무장시켜라. 군인들을 모두 소집하여 진군을 개시하여라! 10.보습을 쳐서 칼을 만들고, 낫을 쳐서 창을 만들어라. 병약한 사람도 용사라고 외치고 나서라.”(새번역. 요엘 3:8-10)
신약성서는 자유와 독립의 중요성에 대해 이렇게 선언한다.
“1.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셔서 우리는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마음을 굳게 먹고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공동번역. 갈라디아서 5:1)
“32.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개역한글. 요한복음 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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