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와 정의의 나라/신학 이야기

쌩 구라의 ‘기자동래설’에 깜빡 간 대한민국의 중빠들의 역사관에 대한 단상(斷想)!

아우구스티누스 2016. 10. 12. 13:14

쓰다 소키치(진전좌우길津田 左右吉, 1873-1961), 이나바 이와키치(도엽암길稲葉 岩吉, 1876-1940) 등의 일제 학자들은 랑케(Leopold von Ranke, 1795-1886)실증사관을 빌미로 다음과 같이 한국역사를 정의한다.


“한강이북에는 중국 식민지인 한사군이 있었고. 한반도 남부에는 일본의 식민지인 임나일본부가 존재했다.”


한반도는 상고시대엔 중국의 식민지, 고대엔 일본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조일병탄작업은 합법적인 성격을 지녔다고 항변하는 것이다.


사실 랑케의 실증사관이란 것은 강대국이 자신의 입장에서 자료나 문서 또는 책 등을 편집하거나 짜깁기해서 내놓은 역사를 참조하라는 것이기 때문에, 말만 실증사관이지, 강대국의 땅먹기의 사회진화론의 논리에 수긍하라는 것이다.

 

독일에 유학 가 랑케의 역사관을 전수받은 일제 사학자들도 19세기 말 서구열강의 식민지건설의 사회진화론의 실증사학의미를 깨닫고 쌩구라로 가득 찬 712년의 ‘고지키’(고사기, 古事記: 고대 일본의 신화·전설 및 사적을 기술), 720년의 ‘니혼쇼키’(일본서기, 日本書紀)와 이것에 근거한 진구황후(신공황후神功皇后)의 삼한정벌과 임나일본부를 정설로 굳히기 위해서 이것을 전혀 다루지 않는 김부식(金富軾, 1075-1151)의 삼국사기(三國史記)의 초기기록의 불신론을 제기하는 동시에 일연(一然, 1206-1289)의 삼국유사(三國遺事)의 단군담론은 허구적이라고 쌍 나팔 불며 자신들의 조일병탄작업을 합리화 한다.

 

뒤늦게 중국도 일제의 역사관을 깨닫고 전한시대의 역사가 사마천(司馬遷, B. C. 145?-B. C. 86?)의 ‘사기’(史記)를 비롯해 중국 후한시대의 역사가 반고(班固, 32~92)가 저술한 기전체의 역사서로 ‘사기’와 더불어 중국 사학사상(史學史上) 대표적인 저작인‘한서’(漢書) 등의 고대문헌이나 역사서가 중화사상에 근거하여 주변 이민족을 오랑캐나라로 조롱하며 이민족의 시조를 모두 중국의 고대 성현으로 기록하고, 이민족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것은 모두 자신들이 승리한 것으로 둔갑시키며, 국가의 지형도 두루뭉술하게 기록하여 대륙전체를 중국이 지배하고 관리한 것으로 기술한 역사담론을 정설로 굳히기 위해서 역사공정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러한 중국과 일본의 역사는 포스트구조주의의 대표적인 철학자 프랑스의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인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 1929-2007)의 용어로 말하면 ‘시뮬라크르’(라틴어 simulacrum; 프랑스어 simulacre)이고 부정적인 언어로 말하면 ‘뻥’이다.

 

그런데 한반도의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도 한반도의 상고사를 중심으로 기술한 것이 아니라 모두 중국의 고대문헌에 기초하여 서술했기 때문에, 온전한 역사서라고 볼 수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애달프고 가슴 저리는 것은 중국과 일본엔 거짓투성이의 상고사가 엄청난데 반해, 한반도의 상고사는 중국과 일본에게 강탈당하고 소각당해 달랑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기록한 일부분만 남아 있다.

 

중국의‘사기’(史記)‘한서’(漢書), 일본의 ‘고지키’(고사기, 古事記)‘니혼쇼키’(일본서기)보다 훨씬 올바르고 정확하게 기술된 ‘환단고기’(桓檀古記)는 찬밥신세다.

 

대한민국은 스스로 중국과 일본 역사의 노예국가라고 고백하며 사는 참으로 희한한 나라다.

 

그러면 쌩구라로 가득 찬 ‘기자조선’(箕子朝鮮),‘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의 실상과 허상에 대해 살펴보자.

 

1. 선진문헌의 기자

 

선진문헌(先秦文獻: 秦은 중국 주나라 때 제후국의 하나였다가 중국 최초로 통일을 완성한 국가B. C. 221-B. C. 206이기 때문에 B. C. 221년 이전문헌)인 ‘논어’(論語) , ‘상서’(尙書: 중국 전통 산문의 근원), ‘죽서기년’(竹书紀年: 중국 고대 초에서 하 ·은 ·주를 거쳐 위의 양왕襄王재위 B. C. 334-B. C. 319 때까지를 편년체로 엮은 역사서) 등에는 기자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고 있으나 기자가 조선 땅으로 가서 지배자가 되었다는 서술은 보이지 않는다.

 

‘논어’는, 기자는 은나라(상나라)왕조의 말기 미자(微子), 비간(比干)과 더불어 3인의 현인 중 한 사람으로 폭군 주왕(紂王)의 무도(無道: 도리에 벗어남)를 간언(諫言: 왕에게 옳지 못하거나 잘못된 일을 고치도록 하는 말)하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미친척하며 종(奴)이 되었다고 기술한다.

 

‘상서’에서는 주왕에게 간하다가 감옥에 갇힌 기자가 무왕에 의해 풀려났으며, 무왕은 은나라를 멸하고 천하를 차지한 뒤 13년에 기자를 찾아가 세상을 다스리는 큰 법인 홍범(洪範)을 배웠다고 하면서, 홍범구주(洪範九疇)의 내용을 기술한다.

 

‘죽서기년’에는 기자가 은나라의 마지막왕인 제신(帝辛: 紂王)에 의해 감옥에 갇혔으며, 은나라의 멸망 후 주나라 무왕(武王) 16년에 기자가 주나라 왕실에 조근(朝覲: 황제를 배알하는 것)했다고 전한다.

 

2. 한나라 이후의 기자

 

그러나 한(漢)나라 이후의 기록에서부터 기자가 조선에 봉해졌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중국 최초로 통일을 완성한 단기간의 국가(B. C. 221-B. C. 206)인 진(秦)에 이어 중국의 통일 왕조(B. C. 202-A. D. 220)인 한나라에서 비로소 국가개념과 영토개념이 어렴풋이나마 자각되고 중화사상에 입각해서 주변의 이민족은 오랑캐라고 폄훼하면서 주변국을 식민지화하려는 고대제국주의국가로 변모하고, 주변국을 완전히 씹어댄다.

 

중국의 상고사를 기록한 ‘상서대전’(尙書大典)은 기자가 조선으로 갔다는 사실을 전하는 최초의 문헌이다. 그런데 ‘서경’(書經)이 소실되자 전한의 제5대 황제 문제(文帝, 재위 B. C. 180-B. C. 157, B. C. 202-B. C. 157)가 신하를 복생(伏生)에게 보내어 복생이 구술한 것을 기록한 것이다. 상서대전은 중화사상에 입각해서 한민족역사를 그 출발부터 중국사에 예속된 것으로 만들기 위해 ‘기자동래설’을 소설화했는데, 그 뻥을 들어보자.

 

“주 나라 무왕은 은(殷)을 정벌한 후에 기자를 풀어 주었다. 기자는 주나라에 의해 풀려난 치욕을 참을 수 없어 조선으로 도망했다. 무왕이 이를 듣고 그를 조선후에 봉하였다. 기자는 이미 주나라의 봉함을 받았기 때문에 신하의 예가 없을 수 없어 (무왕) 13년에 내조하였는데 무왕은 그에게 홍범에 대해서 물어보았다”(武王勝殷, 繼公子祿父, 釋箕子之囚, 箕子不忍爲周之釋, 走之朝鮮. 武王聞之, 因以朝鮮封之. 箕子旣受周之封, 不得無臣禮, 故於十三祀來朝, 武王因其朝而間鴻範. 尙書大傳 卷2 殷傅)

 

그러면 위 담론이 소설화 된 이유에 대해 살펴보자.

 

위의‘상서’가 언급한 바와 같이 주왕이 직접 기자를 찾아가 세상을 다스리는 큰 법인 홍범(洪範)을 배웠다고 하는데 반해,‘상서대전’의 언설은 기자가 주왕을 찾아와서 홍범을 전했다고 한다. 서로 모순될 뿐만 아니라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기자가 황하유역과 한반도의 단군조선 사이에는 황량하고 광대한 지역이 가로놓여 있음은 물론 그곳에는 많은 종족들이 거주하고 있어 기자가 쉽게 왕래할 수 없고, 단군조선에는 당시 토착정치세력이 있었는데 일개 망명객에 불과한 기자가 이를 복속시킬 수 없고, 주나라는 그 무렵 황하 유역에 한정되었으므로 단군조선 땅에 기자를 봉할 수도 없다. 맹자도 “하후 은나라 주나라가 융성했을 때의 강역도 일천리가 넘지 않았다”고 말한다.

 

이것은 또한 단군조선이 신교(神敎)의 ‘삼신’(三神) 사상에 따라 나라의 영역을 셋으로 나누어 다스리는 ‘삼한관경제’(三韓管境制)에 의해 진한(辰韓: 현재 만주), 번한(番韓: 지금의 중국 요령성 서부와 하북성 북부를 비롯한 산동성에서 양자강 유역까지 동부 지역)과 마한(馬韓: 현재 한반도)로 구성되어 있다가 제22대 색불루단군(索弗蔞檀君)이 진조선, 번조선, 막조선으로 국호를 바꾸었다는 역사담론을 입증한다.

 

‘북삼한’(北三韓)이 몰락한 뒤 단군조선백성들이 한반도의 한강 이남으로 내려와 신라, 가야, 백제의 전신인 진한과 번한, 마한을 세운다. 이것이 ‘남삼한’(南三韓)이다.

 

단군조선의 ‘삼신사상’, ‘삼한관경제’는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의 흔적들’(vestigia trinitatis)로 아주 중요한 신학사상이다. 이것에 대해선 지면관계상 후에 살펴보겠다.

 

기자가 주 무왕에게 설명한 ‘홍범구주’(洪範九疇: 홍범은 대법大法을 말하고, 구주는 9개 조條를 말하는 것으로, 즉 9개 조항의 큰 법이라는 뜻임)는 바로 단군조선의 2대 부루단군(扶婁檀君)이 태자 때 순임금의 사공(司空) 우(禹)에게 전한 ‘황제중경’(黃帝中經)과 ‘오행치수’(五行治水)이다. 우는 이것으로 홍수문제를 해결하여 하왕조(夏王朝)를 개창(開創: 새로 세움)한다.

 

당나라의 사학자 사마정(司馬貞, 679-732)은 자신이 집필한 사기 주석서인 ‘사기색은’(史記索隱)에서 “기자의 묘가 하남성 몽현(蒙縣: 현재의 상구현商邱縣)에 있다”고 주장한다. 조선의 백과사전파라 할 수 있는 실학자 이규경((李圭景, 1788-1863)은 자신이 편찬한 백과사전적인 내용을 담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중국에만 기자묘가 세 군데 있는데 어떻게 평양에 기자묘가 있는가”라고 비판한다.

 

이런 사실을 감안할 때 주왕이 기자를 찾아 간 곳은 중국대륙에 있었던 번조선이라고 보면 된다.

 

중국 전한시대의 역사가 사마천(司馬遷, B. C. 145?-B. C. 86?)의 ‘사기’(史記)의 ‘송미자 세가’(宋微子世家)는 “무왕이 은(殷)을 멸하고 기자를 방문하여 안민(安民)의 도(道)를 묻고 그를 조선후에 봉했다(봉기자어조선封箕子於朝鮮)”고 전한다.

 

그런데 기자를 제후로 책봉하였지만 ‘주나라의 신하로 삼지는 않았다’(而不臣也)라는 글이 바로 나온다. 앞뒤 모순된 말을 하고 있기 때문에 ‘기자동래설’은 뻥임을 증언하는 동시에 기자가 조선왕에 봉했다면 당연히 ‘사기’의 ‘본기’에 기록할 엄청난 사건인데, ‘송미자세가’에 진술되었기 때문에 ‘기자동래설’은 사기(詐欺; fraud, cheat)라고 보면 된다.

 

기자가 고국을 떠나 이웃나라인 번조선으로 망명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 단군조선이 존재해 왔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처럼‘기자동래설’은 중국이‘한민족사가 상고시대부터 중국사에 예속됐다’는 것을 전 세계에 주장하려고 날조한 대표적인 역사왜곡 사례다.

 

허구적인‘기자동래설’은 다음과 같은 기가 막힌 고등사기꾼의 역사담론을 낳는다.

 

중국 후한시대의 역사가 반고(班固, 32-92)가 저술한 기전체의 역사서로 ‘사기’와 더불어 중국 사학사상(史學史上) 대표적인 저작인‘한서’(漢書)의 ‘지리지’(地理志)와 ‘삼국지’(三國志: 중국의 위, 촉, 오 3국의 정사正史인데 완전히 허구적임)는 기자를 당시 최첨단 문화문명을 조선에 전수한 도덕군자로 날조한다.

 

“은나라가 쇠하매 기자가 조선에 가서 예의(禮儀)와 전잠(田蠶)과 직조(織造)를 가르쳐 주었더니, 낙랑조선민(樂浪朝鮮民) 사회에는 팔조금법(八條禁法)란 법금(法禁)이 행하여졌다”(한서)

  

“옛날에 기자가 조선으로 가서 8조의 법을 만들어 가르치니 문을 닫고 사는 집이나 도둑질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 40여세 후손인 조선후(朝鮮侯) 준(准)이 왕을 칭하였다”(昔 箕子旣適朝鮮 作八條之敎以敎之 無門戶之閉而民不爲盜 其後四十餘世 朝鮮侯准 僭號稱王. 三國志 魏書 東夷傳 濊)

 

중국 후한(後漢) 말기의 사상가 왕부(王符)는‘잠부론’(潛夫論)도 다음과 같이 공상소설을 내놓는다.

 

“주나라 선왕(宣王) 때 한후(韓侯)가 있었는데, 연(燕)나라 근처에 있었다. 그후 한의 서쪽에서도 성(姓)을 한(韓)이라 하더니 위만(衛滿)에게 망하여 해중으로 옮겨갔다(...立姓韓 爲衛滿所伐 還居海中)”

 

여기에서 위만에게 망한 것은 준(準)왕이니,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인 준(準)의 성(姓)은 한씨(韓氏)임이 명백하며, 단군조선왕조의 성은 따라서 기씨가 아니라 한씨이고, 중국인이 아니라 한인(韓人)인이라고 역설한다.

 

대한민국에 이 허황된 담론에 혹(惑) 하는 사람들이 많다.

 

3. 고려왕조 및 조선왕조의 기자

 

완전히 허구적인 기자의 미화이야기 전파로 말미암아 고려시대에 이르면서 유교가 통치 이데올로기로 자리 잡는 동시에 기자에 대한 숭배심이 확대되기 시작한다.

 

(1) 고려왕조의 기자

 

고려 때 송나라 사신이 “그대 나라에 기자箕子의 묘가 어디 있는가”라고 묻자, 아무도 대답하지 못한다. 그 후 고려 제15대 왕 숙종(肅宗, 재위 1095-1105, 1054-1105) 예부상서 정문(鄭文, 1051-1106)이 무주고총(無主古塚: 자손이나 거두어 주는 사람이 없는 옛 무덤)을 하나 찾아 임금께 청하여 서경(평양)에 가짜 기자묘(箕子墓)와 기자사당을 만들고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제사를 지낸다. 1178년(명종 8)에는 기자묘에 유향전(油香田) 50결이 배당된다.

 

고려 숙종 때부터 한반도역사는 완전히 뻥으로 가득 찬‘기자동래설’때문에 중국의 노예역사로 완전히 변질된다.

 

그러면 그 실례를 계속 들어보자.

 

‘삼국사기’는 다음과 같이 기자를 조선건국자로 칭송한다.

 

“해동에 국가가 있은 지 오래되었는데 기자가 주나라 왕실로부터 봉작을 받으면서 시작되었다”(‘三國史記’年表)

 

‘삼국유사’는 다음과 같이 기자를 당대 선진문물을 전수한 문화문명인으로 미화한다.

 

기자가 건너오자 원래 조선의 군주였던 단군이 기자를 피해 장당경으로 옮겨 간다. 기자는 평양에 도읍을 두고 8조의 법금을 베풀어 나라를 다스렸다. 또한 정전제(井田制)를 실시하고 농사짓는 법과 누에치는 법을 가르쳐 백성들이 기뻐한다.

 

고려시대의 문신으로 가리이씨의 시조인 이승휴(李承休)는 1287년(충렬왕 13) 중국과 한반도의 역사를 칠언시와 오언시로 엮은 서사시인‘제왕운기’(帝王韻紀)에서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의 계승의식을 체계화한다.

 

그는‘제왕운기’에서 민족적 독자성과 유구성의 표상을 위해 전조선(前朝鮮)의 시조로 단군을 , 문명화의 상징(소중화)을 위해 후조선(後朝鮮)의 시조로 기자를 나란히 노래한다.

 

이런 역사기술은 대몽항쟁기에 고양된 민족의식(원나라에서 해방)을 살리면서 원나라의 부마국이 된 고려의 상황(원나라의 노예)을 고려해서, 곧 중국중심의 세계질서에 순응해야 하는 정치현실에서 나온 것으로 본다.

 

고려 제 27대 왕 충숙왕(忠肅王, 재위 1313-1330, 복위 1332-1339, 1294-1339) 12년인 1325년에 평양에 세워진 기자사당과 고려 제31대 왕 공민왕(恭愍王, 재위 1351-1374, 1330-1374) 5년인 1356년의 기사당중수는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대변한다.

 

(2) 조선왕조의 기자

 

종국엔 한(漢)나라판의 ‘역사공정’의 결과로 조선시대에 기자광풍이 분다.

 

중국 청조의 명칭 기원은 이렇다. 생여진(生女眞) 완안부(完顔部)의 추장 아구다(阿骨打)가 거란족이 세운 요(遼)의 지배를 거부하고 자립하여 제위(帝位)에 올라, 국호를 금(金)이라 칭하고, 금나라(1115-1234) 태조(재위 1115-1123)가 된다. 금나라는 1234년에 몽골, 남송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멸망한다. 1616년 여진족의 한 부족인 건주여진(建州女眞) 누르하치(努爾哈赤, 재위 1616-1626, 1559-1626)가 여진족을 통합하여 후금(後金)을 세우고, 1636년 태종 때 국호를 대청으로 개칭한 중국 최후의 통일왕조(1636-1912)가 개막된다.

 

그런데 조선왕조는 이런 예를 갖추지 않는다.

 

단군왕검께서 세운 나라이름과 같은 국호를 쓰려면 서로 구분하기 위해 후손되는 자가 당연히 후조선(後朝鮮)으로 했어야 마땅한데(중국명나라에서 인증한 것임) 조선이라고 명한다.

그리고 조선의 위정자들은 500여 년 동안 쌩구라의‘기자동래설’에 완전히 속아 넘어가 조선을 기자를 계승한 나라로, 중화의 충실한 외변(外邊)으로 자처한다.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은 조선건국의 기본강령을 논한 규범체계서인‘조선경국전’(朝鮮徑國典, 1394)에서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의 국호 사용을 제시한다.

 

“우리나라는 국호가 일정하지 않았다...(고구려·백제·신라·고려 등은) 모두 한 지방을 몰래 차지하여 중국의 명령도 없이 스스로 국호를 세우고 서로 침탈만 일삼았으니, 비록 그 국호가 있다 해도 쓸 것이 못 된다. 오직 기자만은 주나라 무왕의 명령을 받아 조선후에 봉해졌다...(명나라 천자가 ‘조선’이라는 국호를 권고하시니)...이는 아마도 주나라 무왕이 기자에게 명했던 것을 전하여 권한 것이니, 그 이름이 이미 정당하고 말은 순하다”

 

조선 태조 때의 문신 권근(權近, 1352-1409)이 명나라 사신으로 갔다가 황제의 명을 받고 지은 응제시에 손자 권람(權擥, 1416-1465)이 주석을 붙인 책인‘응제시주’(應製詩註), ‘동국세년가’(東國歲年歌) 등도 기자를 미화한다.


하륜(河崙, 1348-1416), 권근, 이첨(李詹, 1345-1405) 등이 편찬한 ‘동국사략’(東國史略)에서 기자조선, 위만조선, 한사군, 이부(二府), 삼한, 삼국의 순으로 서술해 조선시대에 들어와 처음으로 고대사의 체계를 수립하여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이라는 왕조가 확고하게 자리 잡는다.

 

세종에서 성종대까지 무려 6명의 왕을 모신 조선전기의 대표적인 학자인 서거정(徐居正, 1420-1488)등이 편년체(編年體)로 편찬한 단군조선에서 삼국까지의 역사서인‘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는“단군이 조선을 개국했지만 기자가 오기 전 아사달로 들어가 산신이 됐다”고 기자를 칭송하며, 서거정 등이 왕명을 받고 단군조선부터 고려 말까지의 역사를 편찬한‘동국통감’(東國通鑑, 56권 28책)은 기자조선과 그 후계자인 마한과 신라 등을 높이고 단군조선, 고구려, 백제, 발해, 고려의 위치를 낮춘다.

 

윤두수(尹斗壽, 1533-1601)는‘기자지’(箕子志)를,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6-1584)는 ‘기자실기’(箕子實紀)를 편찬하여 기자를 칭송한다.

 

노론의 영수. 주자학의 대가로서 이이의 학통을 계승하여 기호학파의 지도자인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은 낯 뜨겁게 기자의 용비어천가를 부른다.

 

“오로지 우리 동방은 기자 이후로 이미 예의의 나라가 되었으나 지난 왕조인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도 오랑캐의 풍속이 다 변화되지는 않았고 … 기자께서 동쪽으로 오셔서 가르침을 베풀었으니 오랑캐가 바뀌어 중국인(夏)이 되었고 드디어 동쪽의 주(周)나라가 되었습니다”(숙종실록肅宗實錄 7, 9)

 

1756년(영조 32년)엔 기자묘가 있다는 평양과 한양, 전국 각 도에 기자묘를 세워 기자를 영원히 숭배하자는 상소가 등장하기도 하며, 행주 기씨, 청주 한씨, 태원 선우씨 같은 일부 가문은 기자의 후손으로 인정된다.

 

조선왕조가 무조건 중국에 올인 한 것이 아니라 제4대 왕 세종대왕(世宗大王, 재위 1418-1450, 1397-1450)은 단군조선의 주체성을 내세운다. 세종 7년인 1425년에 기자사당에 배향되었던 단군이 따로 사당을 세워 제사지내고, 국가의 제사에서 기자의 신위가 ‘조선후’(朝鮮侯)에서 ‘후조선시조’로 격상됨에 따라, 단군도 1430년 ‘조선후 단군’에서 ‘조선단군’으로, 그리고 1456년 ‘조선시조단군’으로 격상된다.

 

4. 고려왕조와 조선왕조의 기자숭배의 이유와 목적

 

구한말 서구열강의 선진문물이 들어오자 고종(高宗, 재위 1863-1907, 1852-1919)은 중국문화 자체가 반문명인 것을 알고 ‘기자동래설’과 ‘기자의 교화’를 배척하며 1897년 8월에는 연호를 광무(光武)라 고치고, 10월에는 국호를 대한제국(大韓帝國, 1897년 10월 12일부터 1910년 8월 29일)이라 칭하며 중국청조와의 인연을 완전히 끊어버리고, 왕을 황제(皇帝)라고 부르고 황제즉위식을 가짐으로써, 조선 제26대 왕이자, 대한제국 제1대 황제가 된다.

 

고려와 조선이‘기자동래설’과 ‘기자의 교화’(기자가 시·서·예·악 등을 가르쳐 중국의 문물과 삼강오륜을 알게 했고, 팔조금법으로 교화해 신의와 예절을 숭상하게 했음은 물론 전쟁을 배격하고 덕으로 다스려 이웃나라와 화평하게 했다는 등 인현仁賢의 교화)가 쌩구라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정치와 역사의 이데올로기로 채택한 것은 두 나라가 동북아시아에서 일본, 여진족 등과 같은 오랑케 국가가 아니라 중국과 나란히 하는 문명국가임을 표방하는 동시에 왕조와 백성의 안위를 위해 선택한 ‘고육지책’(苦肉之策)이다

 

이처럼 조선왕조가 중국에 올인 한 것은 일본이 19세기 말 조선왕조와 중국청조와는 달리 서구열강과 같은 문명국가임을 보여주기 위해 채택한 일제의 ‘다츠아뉴오’(탈아입구脫亞入歐)라고 보면 된다.

 

5. 나가는 말

 

구약성서의 요엘 예언자는 자주국방의 당위성을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8.이제는 내가 유다 사람을 시켜서, 너희의 아들딸들을 팔겠다. 유다 사람은 너희 자녀를 먼 나라 스바 사람에게 팔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9.너희는 모든 민족에게 이렇게 선포하여라. 전쟁을 준비하여라! 용사들을 무장시켜라. 군인들을 모두 소집하여 진군을 개시하여라! 10.보습을 쳐서 칼을 만들고, 낫을 쳐서 창을 만들어라. 병약한 사람도 용사라고 외치고 나서라.”(새번역. 요엘 3:8-10)

 

성서는 자유와 독립의 중요성에 대해 이렇게 선언한다.

 

“1.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셔서 우리는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마음을 굳게 먹고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공동번역. 갈라디아서 5:1)

 

“32.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개역한글. 요한복음 8: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