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중국의 선진문헌(先秦文獻: 秦은 중국 주나라 때 제후국의 하나였다가 중국 최초로 통일을 완성한 국가B. C. 221-B. C. 206이기 때문에 B. C. 221년 이전문헌)인 ‘논어’(論語) , ‘상서’(尙書: 중국 전통 산문의 근원), ‘죽서기년’(竹书紀年: 중국 고대 초에서 하 ·은 ·주를 거쳐 위의 양왕襄王재위 B. C. 334-B. C. 319 때까지를 편년체로 엮은 역사서) 등은 약간 신뢰하나, 한(漢)나라 이후의 기록이나 문서 또는 책이나 논문 등은 전혀 신뢰하지 않는다.
대한민국의 중빠들은 중국 전한시대의 역사가 사마천(司馬遷, B. C. 145?-B. C. 86?)의 ‘사기’(史記), 중국 후한시대의 역사가 반고(班固, 32-92)가 저술한 기전체의 역사서로 ‘사기’와 더불어 중국 사학사상(史學史上) 대표적인 저작인‘한서’(漢書), 중국의 상고사를 기록한 ‘상서대전’(尙書大典) 등에 열광하는데, 필자는 이 모든 것이 쌩구라로 가득 찬, 중화중심사상이기 때문에 전혀 신뢰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필자는 일본의 모든 문서나 자료 또는 책이나 논문 등은 100%신뢰하지 않는다.
그러면 그 실례를 들어보겠다.
쓰다 소키치(진전좌우길津田 左右吉, 1873-1961), 이나바 이와키치(도엽암길稲葉 岩吉, 1876-1940) 등의 일제 학자들은 랑케(Leopold von Ranke, 1795-1886)실증사관을 빌미로 다음과 같이 한국역사를 정의한다.
“한강이북에는 중국 식민지인 한사군이 있었고. 한반도 남부에는 일본의 식민지인 임나일본부가 존재했다.”
한반도는 상고시대엔 중국의 식민지, 고대엔 일본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조일병탄작업은 합법적인 성격을 지녔다고 항변하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중국이나 일본기록물을 참조할 때 한반도에 유리한 것만 차용하거나 이용하고 불리한 것은 단호히 거부한다.
이제 독자들도 눈치 챘을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서구열강을 비롯해 중러일의 모든 역사서들은 포스트구조주의의 대표적인 철학자 프랑스의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인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 1929-2007)의 용어로 말하면 ‘시뮬라크르’(라틴어 simulacrum; 프랑스어 simulacre), ‘하이퍼 리얼리티’(Hyper-Reality)이고 부정적인 언어로 말하면 사기((詐欺)라고 보면 된다.
그러면 소설화된 공상소설‘위만조선’(衛滿朝鮮, B. C. 194-B. C. 108) 또는 ‘위씨조선’(衛氏朝鮮)의 실상과 허상에 대해 살펴보자.
위만(衛滿)은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 재위 B. C. 202-B. C. 195, B. C. 266/247?-B. C. 195) 당시 변방 연(燕)나라의 장수다. 그의 상전인 연나라 왕 노관(盧綰)은 한나라의 고조 유방의 죽마고우이자 개국공신이다. 얼마 후 한고조가 주위의 제후들을 시기하여 제거하기 시작하자 B. C. 195년 연왕 노관은 미연에 화를 면하려고 흉노 쪽으로 도망하고 연은 한나라 군대에 점령당하게 되어 큰 혼란에 빠지게 된다.
연나라의 위만은 상투를 틀고 조선 옷을 입고(魋結蠻夷服) 변장하여 1천여 명 무리를 이끌고 패수(浿水)를 건너서 조선(朝鮮)에 들어와 조선왕 준(準)에게 고공지(故空地)의 수비를 하겠다고 말한다.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패수’와 ‘조선’의 위치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한나라 이후의 중국 모든 문헌들은 쌩구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상식적인 차원에서‘행간(속뜻)읽기’(to read between the lines)를 적용하고 한반도에 유리한 것만 이용하거나 차용하고 불리한 것은 단호히 거부하면 된다.
그러면 ‘조선’의 위치에 대해 살펴보자.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 조선총독부가 한국역사를 일제의 통치목적에 부합되도록 편찬하기 위해 설치한 단체인데, 1916년 1월 중추원 산하 조선반도사편찬위원회로 발족하여 1922년 12월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찬위원회로 바뀜)의 시다바리들이나 뉴라이트역사관은 ‘조선’의 위치를 한반도내로 규정한다.
그러면 이것이 왜 새빨간 거짓말인가를 밝혀보자.
중국대륙의 연나라에서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교통이 불편하고 주변국들을 무사히 통과하여 한반도의 단군조선에 들어가기란 불가능하다. 21세기에서도 한 명도 아닌 1,000여명의 오합지졸(烏合之卒)들이 일심동체(一心同體) 되어 움직인다는 것은 매우 힘들다.
이것만 보아도 위만이 1,000여명의 군중들을 이끌고 토낄 수 있는 곳은 연나라의 근방, 중국대륙의 ‘번조선’이라고 사료된다.
이것은 또한 단군조선이 신교(神敎)의 ‘삼신’(三神) 사상에 따라 나라의 영역을 셋으로 나누어 다스리는 ‘삼한관경제’(三韓管境制)에 의해 ‘진한’(辰韓: 현재 만주), ‘번한’(番韓: 지금의 중국 요령성 서부와 하북성 북부를 비롯한 산동성에서 양자강 유역까지 동부 지역)과 ‘마한’(馬韓: 현재 한반도)로 구성되어 있다가 제22대 색불루단군(索弗蔞檀君)이 만주의 ‘진조선’(‘신조선’의 이두어로 이전의 진한이며 수도는 아사달, 지금의 하얼빈으로 추정), 중국대륙의 ‘번조선’(‘불조선’의 이두어고 이전의 번한이며 수도는 안덕향, 현재 하북성 당산시 인근으로 추정), 한반도의 ‘막조선’(‘말조선’의 이두어로 이전의 마한이며 수도는 백아, 지금의 평양)으로 국호를 바꾸었다는 역사담론을 입증한다.
‘북삼한’(北三韓)이 몰락한 뒤 단군조선백성들이 한반도의 한강 이남으로 내려와 신라, 가야, 백제의 전신인 ‘진한’과 ‘번한’, ‘마한’을 세운다. 이것이 ‘남삼한’(南三韓)이다.
단군조선의 ‘삼신사상’, ‘삼한관경제’는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의 흔적들’(vestigia trinitatis)로 아주 중요한 신학사상이다. 이것에 대해선 지면관계상 나중에 살펴보겠다.
위만이 만주의 ‘진조선’이나 한반도의 ‘막조선’에 간 것이 아니라 중국 대륙에 있던 ‘번조선’에 들어가 준왕(準王: 해모수에 의해 번조선 왕으로 임명된 기비의 아들 기준)에게 투항한 것이다.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지리서이자 신화집인‘산해경’(山海經: 산경山經 5권, 해경海經 8권, 대황경大荒經 4권, 해내경海內經 1권, 도합 18권)의 ‘해내경’에는 “동해 안쪽의(東海之內) 북해(발해) 모퉁이에(北海之隅) 이름을 조선이라고 일컫는 국가가 있다(有國名曰朝鮮)”라는 기록이 있다.
이는 중국의 ‘동쪽 바다(발해, 황해, 동중국해)’ 중에서도 ‘북쪽 바다(발해)’의 모퉁이에 나라 이름을 ‘조선(朝鮮)’이라고 하는 나라가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말이다.
전국시대 제(齊)에 모인 사상가들이 관중(管仲, ?~B. C. 645)에게 청탁하여 편찬한, 제자백가(諸子百家)사상이 종합된‘관자’(管子)의 ‘규도’편 제78은 단군조선에 대해 이렇게 서술한다.
“환공이 진귀한 물건으로 화폐를 만드는 방안을 관중에게 묻는다. 관중은 음산의 연민(옥과 비슷한 귀한 돌), 연나라 자산의 백금, 여수와 한수의 황금, 강양에서 나는 구슬, 명산에서 나는 증청(장생불사한다는 선약), 변산의 옥, 발조선(發朝鮮)의 문피(호랑이 가죽)를 예로 든다”
위의 담론은‘발조선’과 중국 제(齊)나라 사이에는 교역이 널리 행해졌음을 보여주고 ‘발조선’의 수출품 가운데 특히 문피가 유명했던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지리관계상‘발조선’은 중국대륙에 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사실‘발조선’은 ‘불조선’(이두어로 번조선)의 전음(轉音)이다.
준왕은 위만을 믿고 박사(博士: 지방 장관직)를 삼아 서변 백 리의 땅을 봉하여 준다. 그러나 위만은 유망인(流亡人)을 통솔하고 그들과 결탁하여 자기 세력을 기른 다음, B. C 195-180년 사이에 준왕에게 사람을 보내어 거짓으로 한나라 병사가 십도로 쳐들어오니 들어가 왕을 호위하겠다고 하여 갑자기 군사를 몰아 준왕을 쳐서 나라를 빼앗고, 스스로 조선왕(朝鮮王)이라고 하였고, 도읍은 이전의 ‘번조선’과 마찬가지로 왕검성(王儉城 또는 왕험성王險城이라고 부름)으로 정한다.
이때 준왕은 위만에게 쫓겨 측근 신하만을 거느리고 뱃길로 한반도 남쪽(전라북도 익산이나 경기도 광주 경안이나 충청남도 직산으로 추정)의 진국(辰國)을 중심으로 세력기반을 형성하여 진국(辰國)의 왕이 되고 스스로 한왕(韓王)으로 칭하였거나 또는 진왕(辰王)에게 격파당해 소멸된 것으로 추정한다. 후에 마한, 변한, 진한의 ‘남삼한’(南三韓)의 기원이 된다.
위만정권은 나중에 위만의 손자 우거(右渠)가 한 무제에게 망하는 B. C. 108년까지 약 90년간 존속하며 철기문화를 주도한다.
그런데 고려 25대 왕, 충렬왕 (忠烈王, 1236-1308) 때의 보각국사 일연(一然, 1206-1289)이 중국의 원나라의 강세 때문에 당대에 고려에 있던 고조선사료를 전혀 참고하지 않은 채 거짓투성이인 중국문헌만 참조하여 기록한‘삼국유사’에서 ‘위만조선’이라 부르기 때문에 일제는 이것을 근거하여 ‘위만조선’에서 조선역사가 시작됐다고 조작하고, 게다가 ‘위만조선’의 위치가 본래 ‘번조선’이 있던 중국의 요령성 서쪽이 아니라 한반도의 평양 이북이라고 못 박음으로써, 한반도기원은 위만조선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중국의 식민지였고, 고대엔 임나일본부의 지배를 받아 일본의 속국이었기 때문에, 일본이 조선을 병탄작업하는 역사의 순리라고 뻥을 까는데, 이런 역사담론에 홀랑 속아 넘어간 어리석은 자들이 즐비하다.
위만정권은 지리상으로 한나라와 주위의 예(濊), 변진(弁辰), 진국(辰國)과 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어 조공로 및 무역로를 차단하며 중계무역으로 짭짤하게 재미를 보는 동시에 흉노(匈奴)와 동맹을 맺어 중국의 한나라와 맞장 뜰 수 있기 때문에, 전한의 제7대 황제 한무제(漢武帝, 재위 B. C. 141- B. C. 87, B. C. 156-B. C. 87: 한고조 유방의 도교를 버리고 동중서董仲舒를 기용하여 유교를 국교화 하고 흉노를 토벌하며 세계제국으로 지향)는 사신 섭하(涉何)를 보내어 조공로 및 무역로 주변에 얼쩡거리지 말라고 위만정권을 협박하지만, 이들은 한무제의 명령을 거부하고 섭하를 죽인다.
‘사기’(史記)의 ‘조선전’은 이렇게 기술한다.
천자(天子: 무제)는 죄인들을 모집하여 조선을 칠 준비를 하며 B. C. 109년 가을에 이르러 육해로를 통하여 침략을 개시한다. 양복(楊僕)이 보하이 해(渤海)를 거쳐 왕검성(王儉城)으로 쳐들어가는 수로군을 맡고, 좌장군(左將軍) 순체(筍彘)는 요동으로 출발하여 패수(浿水)에 이르는 육로군을 지휘한다.
중국 전한의 선제(宣帝, 재위 B. C. 74-B. C. 49) 때에 편찬된‘염철론’(鹽鐵論)의‘주진편’(誅秦篇: B. C. 81년 전한조정에서 있었던 논쟁을 기록한 책)은 이렇게 기록되었다.
“진(秦)이 이미 천하통일한 후에 동으로 패수(沛水)를 넘어 조선을 멸망시켰다”
이런 역사적 담론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단군조선이 중국대륙의 ‘번조선’, 만주의 ‘진조선’, 한반도의 ‘막조선’으로 구성되었음을 증언하며, 위만정권이 ‘번조선’에 속했음을 입증하기도 한다.
자연스럽게 패수도 중국대륙에 있다고 증언한다.
중국의 기록에 한방 간 중빠들은 대한민국정부로부터 연구비를 타먹고, 그저 실증사관이라는 명목아래 중국의 이익을 대변하려고 패수의 위치에 대해서도 대동강설, 청천강설, 압록강설, 요하설, 혼하설(渾河說), 대릉하설, 난하설 등 여러 학설을 흘리며, 국민들이 볼 때 무진장 연구한 것처럼 보이려고 위장하고 있다.
‘사기’(史記)는 “한나라가 요동의 옛 국경 요새를 수복하여 패수에 이르러 경계를 삼고 연에 소속시켰다”라고 기술한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위만이 무리 1,000여명을 모아서 동쪽으로 달아나 요새를 나가 패수(浿水)를 건넜다”, 그리고 중국의 강과 수계(水系: 강이나 하천의 본류와 그에 딸린 모든 지류)를 간략히 기록한 책인‘수경’(水經)의 기록, 곧“패수는 낙랑군 누방현에서 흘러나와 동남쪽으로 흐르다가 패현을 지나서 동쪽으로 흘러서 바다로 들어간다”(浿水出乐浪镂方县,东南过临浿县,东入于海), 후한(後漢 또는 동한(東漢), B. C. 202-220년 때 경학자(經學者: 공자의 사상을 중심으로 사서오경을 연구하는 사람) 허신(許愼, B. C.58?-B. C.147?)의 ‘설문해자’(說文解字: 한자의 형形, 의義, 음을 체계적으로 해설한 최초의 자전字典)의 기술, 곧“패수는 루방에서 나와 동쪽에서 바다로 들어간다”(浿水出镂方,东入海) 등의 역사적 기술은 패수가 요동의 요새에서 동쪽으로 건너는 강임을 증언하면서 동시에 동북쪽에서 서남쪽으로 흐르는 압록강이나 청천강 그리고 동쪽에서 발원하여 서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 대동강은 패수가 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패수위치가 중국대륙의 ‘번조선’근처에 있음을 증언한다.
‘위만정권’은 한의 대군과 맞서 1년 가까이 버틸 수 있을 정도로 철기문화와 이를 기반으로 한 군사력이 강하였다. 1년 넘도록 결판나지 않자, 한 무제는 우거 정권의 내부 사람들을 이간시키는 방법으로 우거를 죽이고 전쟁을 끝낸다. 우거를 죽이는 데 공을 세운 번조선의 신하 다섯 명은 중국 산둥성 일대 제후로 임명된다.
우거가 죽은 B. C. 108년 동명왕(東明王)은 졸본부여의 왕으로 즉위하여 한 무제의 군대를 막아낸다. 격노한 한무제는 패전의 책임을 물어 육군사령관 ‘순체’와 수군사령관 ‘양복’ 그리고 무제의 사신 ‘위산’과 태수 ‘공손수’ 4인을 모두 기시(棄市: 공개장소에서 참수·교수형을 집행하여, 시체를 길거리에 버리는 고대 중국의 형벌)로 처형한다.
한나라가 결국 전쟁에서 완전히 참패했는데, ‘번조선’에 식민지 한사군이 설치됐다고 하는 것은 붓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동명왕은 22년 후 북부여를 접수하고, 북부여의 5대 ‘고두막단군’으로 즉위하여 27년을 더 통치한다. 그리고 6대 고무서단군이 재위 2년 만에 죽고, B. C. 58년 고무서단군의 사위 ‘고주몽’이 22세에 고구려를 개국하게 된다.
중국은 기자조선을, 일본은 위만조선을 주장하며, 위만조선의 위치를 요서지역이 아니라 한반도의 평양이북으로 규정하여 조선을 중국의 식민지화하는데, 위에서 언급했듯이 ‘단군조선’의 국통을 정식으로 계승한 나라는 ‘북부여’다.
‘위만정권’에 대해 좀 더 정확히 알려고 하면 ‘북부여’와 ‘고구려’ 관계에 대한 심도있는 역사연구가 진행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지금처럼 중국기록에 올인 하는 중빠들이 있는 한 ‘위만정권’의 허구성을 밝히지 못한다.
성서는 자유와 독립의 중요성에 대해 이렇게 선언한다.
“1.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셔서 우리는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마음을 굳게 먹고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공동번역. 갈라디아서 5:1)
“32.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개역한글. 요한복음 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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