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와 정의의 나라/신학 이야기

명성황후시해사건을 통해서 고찰한 대한민국의 뉴라이트역사관에 대한 단상(斷想)!

아우구스티누스 2016. 10. 18. 16:29

필자가 명성황후시해사건(明成皇后弑害事件; 을미사변乙未事變)을 재조명하는 목적과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이 사건으로 아관파천(俄館播遷, 1896.2.-1897. 2.)의 수모가 있었지만, 고종은 원구단에서 황제즉위식을 갖고, 시해당한 ‘민비’를 ‘명성황후’로 책봉추존하며(시해당한지 2년 만에 국장으로 치러지고 1897년 11월 22일 명성황후의 유해는 청량리 홍릉에 안장됨), 태극전에서 ‘대한제국’(大韓帝國)이라는 국호를 반포하고 연호를 ‘광무’(光武)로 정하며, 한반도가 자유와 독립의 주체적인 국가임을 전 세계에 선언하였기 때문이다.

 

둘째, 명성황후(明成皇后, 1851-1895)가 일제에게 시해당하지 않았다면 대한제국은 일제의 먹이감으로 전락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사실은 명성황후가 위대한 여성 정치가이자 동양의 최고의 여걸임을 보여준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 1894-1895년 청일전쟁을 거치면서 조선정치에 깊이 개입하고 들어온 일제를 명성황후는 영특하게 전략적으로 그리고 외교적으로 러시아를 동원하여 조선에서 축출하고자 하자, 일제는 입에 거품을 물고 후안무치한 음모를 세운다. 그것은 일명 ‘여우사냥’으로 불린 명성황후의 시해시도다. 일제는 자신들이 조선의 국권을 침탈하는 데 가장 방해요소로 조선 제26대 왕이자, 대한제국 제1대 황제인 고종(高宗, 재위 1863-1907, 1852-1919)이나 그 측근세력이 아니라 명성황후를 지목하고 제거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영국의 여행가, 작가, 지리학자인 비숍(Isabella Bird Bishop, 1832-1904)은 19세기 말 4차례(1894-1897년 사이)에 걸쳐 조선을 현지답사하며 체험을 기술한 여행기록문‘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Korea and Her Neighbours, 1898)의 저자로 유명한데, 비숍여사는 명성황후를 알현한 후 황후에 대한 인상을 이렇게 기록한다.

 

“황후는 가냘프고 미인이었다...눈은 차고 날카로워서 훌륭한 지성의 소유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명석하고 야심적이며 책략에도 능할 뿐 아니라 매우 매혹적이고 여러 가지 면에서 매우 사랑스러운 여인이었다.”

 

서울 새문안교회와 조선성교서회(기독교서회의 전신)를 세움은 물론 기독청년회(YMCA)를 조직하였고 경신학교에 대학부를 개설, 연희전문학교(연세대학교의 전신)로 발전시킨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한국명 원두우元杜尤, 1859-1916)의 부인이자 명성황후의 어의였던 릴리어스 호튼 언더우드(Lillias Horton Underwood, 1851-1921)는 ‘조선견문록’(Old Korea)에서 이렇게 술회한다.

 

“황후의 지식은 주로 중국에서 얻은 것이었지만 세계 강대국과 그 정부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황후는 나에게 많은 질문을 던졌고 자기가 들은 것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황후는 섬세한 감각을 가진 유능한 외교관이었고 반대세력의 허를 찌르는 데 능했다...황후는 일본을 반대했고 애국적이었으며 조선의 이익을 위해 몸을 바치고 있었다...황후는 아시아의 그 어떤 왕후보다도 그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여인이었다.”

 

서재필(徐載弼, 1864-1951)은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김옥균의 지략은 역사적인 것이었소. 박영효와 홍영식과 서광범 또한 그에 뒤지지 않는 재사들이었지요.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그들에다 나까지 넣어 다섯 사람의 기지와 계략을 모으면 세상에 못할 일이 없다고까지 일컬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다섯 사람이 함께 왕비 앞에 나가면 으레 그녀에게 기선을 잡혀서 머리를 긁적거리며 물러나오기 마련이었지요. 왕비는 실로 당할 길 없는 지략과 재략을 지닌 걸물이었소.”

 

고종이 직접 지은 ‘명성황후 행록(行錄)’은 이렇게 기술되어 있다.


“경서와 역사를 널리 알고 옛 규례에 익숙하여 나를 도와주고 안을 다스리는 데 유익한 것이 많았다. 사변에 대처해서는 정상적인 방도와 임시변통을 잘 배합했다...일찍이 왕비가 말한 것마다 모두 들어맞았다.”

  

셋째, 1909년 10월 26일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던 독립군 조직 대한제국 의군 참모중장 겸 특파 독립대장 안중근(安重根, 1871-1910)은 죄악 15개 조 중 첫 번째로 명성황후 살해를 들면서 헤이룽장성(흑룡강성 黑龍江省, 黑龙江省) 성도(省都) 하얼빈(합이빈哈爾濱)에서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伊藤博文, 1841-1909)를 저격했기 때문이다.

 

넷째, 백범 김구(白凡 金九, 1876-1949)도 안중근장군처럼 을미사변으로 충격을 받고 국모의 원한을 갚았기 때문이다.

 

백범은 20세인 1896년 2월 황해도 치하포(鴟河浦) 주막에서 변복((變服: 남이 알아보지 못하도록 평소와 다르게 옷을 차려입음)한 일본인 쓰치다 조스케(土田讓亮)을 만난다. 백범은 변복한 것을 이상하게 여겨 이는 필시 국모를 시해한 삼포오루(三浦梧樓) 놈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의 일당일 것이라고 생각하며 일본인이 차고 있던 칼을 빼앗아 그자를 찔러 죽이고 그자의 시체를 강에 버린다.‘국모의 원수를 갚으려고 이 왜놈을 죽였노라’라는 내용의 글과 함께 ‘해주백운방기동 김창수(海州白雲坊基洞 金昌洙)’라는 서명까지 한 후에 이 포고문을 길가에 붙이고 유유히 고향으로 돌아온다.

 

의혈청년 백범은 당해 5월 집에서 은신중 체포되어 해주감옥에 수감되고, 7월 인천 감리영(監理營)에 이감되었으며, 다음해인 1897년 사형이 확정된다. 사형집행 직전 고종황제가 인천감옥에 직접 전화를 걸어 청년 김구에 대한 사형집행을 중지시킨다. 이는 전화가 개통 된지 사흘째 되는 날이다.

 

그러면 명성황후시해사건에 대해 살펴보자.

 

1. 고종의 비로 택함 받은 이유

 

황후는 조선의 제19대 왕 숙종(肅宗, 재위 1674-1720, 1661-1720)을 두고 장희빈(張禧嬪, 1659-1701)과 삼각관계를 겨루었던 왕비, 인현왕후(仁顯王后, 1667-1701)를 배출한 민씨가(閔氏家)이고 황후의 아버지 민치록(閔致祿, 1799-1858)은 인현왕후의 아버지였던 민유중(閔維重,1630-1687)의 5대손이고 영의정에 추증된다.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1820-1898)의 아내, 여흥부대부인민씨(驪興府大夫人閔氏, 1818-1897)는 황후의 아버지 민치록의 양자로 들어간 민승호(閔升鎬, 1830-1874)의 누나라는 혈통관계 때문에 둘째아들 고종의 비로 황후를 적극적으로 대원군에게 추천하자, 안동김씨 등의 외척세도에 질린 대원군은 부친 없고 남자 형제 없는, 몰락한 친정을 둔 왕비나 외척이 권력을 행사하는 세도정치에 무관한 동시에 자신의 영향력을 마음껏 미칠 수 있다고 판단하여 승낙한다.

 

그런데 명성황후는 후에 탁월한 정치 감각과 국제정세에 대한 안목으로 고종보다도 더 주목받은 동양의 호걸이자 여장부로 이름을 떨친다.

 

2. 대원군과 대립하는 당찬 며느리

 

고종은 1863년 11세에 왕이 됐으나, 조선 제 25대 왕 철종(哲宗, 재위 1849-1863, 1831-1863)의 3년 상이 아직 끝나지 않은 기간이었기 때문에 가례(家禮)를 올릴 수 없었다. 철종 신주(神主: 죽은 사람의 위패)를 종묘(宗廟: 조선시대 역대의 왕과 왕비 및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왕가의 사당)에 부묘(祔廟: 삼년상이 지난 뒤에 그 신주를 종묘에 모심)한 직후인 15세 때인 1866년(고종 3년) 3월에 16세의 여흥 민씨 민치록의 딸과 가례를 올린다.

 

고종은 황후와 혼례를 치를 무렵 상궁 출신의 궁인 이씨를 매우 총애하여 가까이 두고 정작 황후는 냉대한다. 궁인 이씨가 아들 완화군(完和君)을 낳자 대원군은 안동 김씨가 등으로 많이 시달려서 외척의 힘이 없는 궁인의 자식인 완화군을 세자로 책봉하려고 계획한다. 이때부터 민비는 분개하며 불만을 갖고 대원군과 대립하기 시작한다.

 

고종의 사랑을 회복한 황후는 아들을 두 명이나 낳지만 모두 요절하고 그 과정에서 대원군의 원자에 대한 무리한 약 처방으로 대원군과 더욱 대립한다.

 

황후는 대원군의 힘을 빼려고 양 오빠이긴 하지만 21세차이가 나 아버지처럼 모시는 (실제로는 대원군의 처남인) 민승호를 필두로 대원군의 형 이최응(李最應), 대원군의 큰아들 재면(載冕: 고종의 맏형), 대원군에 의해 정계에서 밀려난 안동김씨 세력과 대원군이 권력을 잡게 해주었지만 결국 반목하게 된 풍양 조씨 세력까지 끌어들여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며 친인척을 정치 전면에 내세운다.

 

조선이 쇠망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세도정치를 드는 학자들이 많기 때문에 황후도 이것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지만, 21세기의 대한민국도 혈연, 지연, 학연, 뉴미디어의 연줄문화에 기초한 부정부피부조리의 근원인 마피아사단의 존재로 시끄럽기 때문에 그리 비난만 받을 일이 아니라고 사료된다.

 

황후 나이 23세 때인 1874년 이조참의를 거쳐, 호조참판에 임명되고, 형조 , 병조판서를 지낸 민승호는 한 수령(守令)이 보낸 선물로 위장한 폭탄이 장치된 우송 소포를 풀다가 어머니와 부자가 함께 참사하는 비운을 맞이한다.

 

황후는 대원군 쪽 소행으로 파악하고 분노한다. 민승호가 아들 없이 사망한 후 황후는 민태호(閔台鎬, 1834-1884) 아들 민영익(閔泳翊, 1860-1914년)을 양자로 들였는데, 이후 민영익은 황후의 핵심 정치 세력으로 성장한다.

 

마침내 1873년 고종과 황후는 유림의 거두로 위정척사론(衛正斥邪論: 문자적으로 바른 것을 지키고 옳지 못한 것을 물리친다는 사상인데, 정학正學인 성리학과 정도正道인 성리학적 질서를 수호하고, 성리학 이외의 모든 종교와 사상을 이단적인 사학邪學으로 규정하여 배격하는 운동)의 사상적 지주이자 실천적 활동가였던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 1833-1906)을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하고, 1873년 대원군의 실정과 정책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게 하여 이를 계기로 고종 친정(親政)을 선포하게 함과 동시에 황후 중심의 세력으로 정권을 구축한 뒤, 대원군을 10년간의 권좌에서 축출한다.


3.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1876년(고종 13)에 맺어진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 조약의 정식 명칭은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이며, 강화조약江華條約 또는 병자수호조약丙子修好條約이라고도 불림)으로 인해 일본과 구미제국과의 교섭통상관계가 이루어지면서 고종과 황후 측의 척족(戚族: 친척)을 중심으로 하는 개화파와 대원군을 중심으로 하는 수구파의 반목이 점차 심해지며, 1882년 신식군대에 대한 구식군대의 불만이 표출된 임오군란(壬午軍亂)이 터진다.

 

1881년 일본의 후원으로 신식군대 별기군(別技軍)을 창설하고 이듬해에는 구식군대인 훈련도감 용호(龍虎), 금위(禁衛), 어영(御營), 총융(摠戎)의 5영(營)을 무위영(武衛營), 장어영(壯禦營)의 2영으로 군제 개혁이 단행되자 구 5영소속 군병들의 불만이 고조되는 가운데 별기군이 군료(軍料)와 보급에서 좋은 대우를 받는 데 비해 무위영과 장어영 2영의 군졸들은 13달 동안 군료를 받지 못해 불만이 높았던 차에 겨우 한 달 치의 군료를 받게 된다. 그런데 그것마저 선혜청(宣惠廳) 고지기(관아의 창고를 지키는 사람)의 농간으로 말수가 턱없이 부족한데다 겨와 모래가 반 넘어 섞여 있어, 이에 격분한 구식군대군졸들이 고지기를 때려 부상을 입히고 선혜청 당상(堂上) 및 병조판서 민겸호(閔謙鎬)의 집으로 몰려가 저택을 파괴하고 폭동을 일으킨다.

 

대원군의 밀명에 따라 구식군대군병들은 별기군 병영으로 몰려가 일본인 교련관을 죽이고, 대중과 합세하여 일본 공사관을 포위, 불을 지르고 일본순사들을 살해한다. 황후를 제거하기 위해 창덕궁 돈화문 안으로 난입한다. 그러나 32세의 황후는 대원군 부인과 무예별감(武藝別監) 홍재희(洪在羲)의 도움으로 궁녀의 옷으로 변장한 후 궁궐을 탈출해 윤태준(尹泰駿, 1839-1884: 갑신정변 때 독립당의 장사패인 윤경순尹景純에게 살해됨)의 집에 은신했다가 충주 장호원(長湖院)의 충주목사 민응식(閔應植)의 집으로 피신한다.

 

구식군대군병이 궁궐에 침입하자 고종은 대원군에게 사태 수습을 맡긴다. 대원군은 반란을 진정시키고 군제를 개편하는 등 군란의 뒷수습에 나서며 황후 생사가 불분명한 상황에서 국상(國喪)을 선포하여 황후의 존재 자체를 없애려고 한다. 이때 황후는 윤태준을 고종에게 밀파하여 자신이 건재함을 알리고 청나라 톈진(天津)에 주재하고 있던 영선사(領選使) 김윤식(金允植, 1835-1922) 등에게 통지하여 청나라의 원조를 청한다. 김윤식의 청원을 받아들인 청나라가 재빨리 군대를 파견함으로써 대원군의 재집권은 단명에 그치고 톈진으로 압송되는 수모를 당한다. 황후는 궁궐로 돌아오며 황후 중심의 정권이 다시 수립된다.

 

1882년 청나라는 조선정부에게 압력을 가하여 가장 불평등하고 많은 특권을 허용하도록 한 ‘조중상민수륙무역장정’(朝中商民水陸貿易章程)을 체결하게 하고 전문(前文)에 조선을 청국의 ‘속방’(屬邦)이라고 써넣는다.

 

동년 일본도 조선정부에 강력한 위협을 가해 주모자 처벌과 손해 배상을 내용으로 하는 ‘제물포조약’(濟物浦條約 또는 조일강화조약朝日講和條約)을 맺게 한다.

 

‘제물포조약’의 규정에 따라 사과 사절로서 박영효, 김만식 등이 수신사로, 홍영식, 서광범 등이 수행원, 그리고 군왕의 밀명을 띤 민영익, 김옥균 등 15명이 일본으로 건너간다.

 

일본외무성은 이들을 국빈 대우하며 100일간의 체제 비용을 전액 감당한다. 외무상 이노우에 가오루(이노우에 분타, 정상문다井上聞多, 후에 이노우에 가오루, 정상형井上馨로 개명, 1836-1915)는 이들을 당대의 ‘일본의 볼테르’, ‘무위무관(無位無官)의 재야사학자’, ‘메이지 정부의 스승’, ‘일본 근대화의 총체적인 스승’, ‘천부인권론자’, ‘시민적 자유주의자’, ‘일본에도 민주주의 사상이 있었다는 근거로 이상화된 인물’이라는 화려한 단어로 덧 입혀진 후쿠자와 유키치(복택유길福澤諭吉 1835-1901)에게 소개하여 조선 청년들은 그의 해박한 근대 지식을 듣고 뿅 간다.

 

이들은 일본의 계략(計略)에 빠져 완벽한 친일파로 변하며 귀국하여 일본의 힘을 빌려 개화와 정치개혁을 단행하는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일으킨다.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의 손자인 박규수(朴珪壽, 1807 -1876) 사랑방(현재 헌법재판소 자리)에서 거사를 계획한다. 1884년 김옥균(金玉均, 1851-1894)을 비롯한 박영효(朴泳孝, 1861-1939), 서재필(徐載弼, 1864-1951), 서광범(徐光範, 1859-1897), 홍영식(洪英植, 1855-1884)등의 급진개화파가 개화사상을 바탕으로 중국청나라의 속방화정책에 저항하여 조선의 완전 자주독립과 자주 근대화를 추구하여 일으킨 갑신정변이 반격에 나선 청나라 위안스카이(원세개袁世凱, 1859-1916)의 개입과 지원을 약속한 일본의 거부로 3일 만에 진압 당하여, ‘3일 천하’라고 불린다. 개화파는 일본으로 망명하고, 배일감정으로 흥분한 조선백성들은 한성부에 있는 일본 공사관을 불태우고 공사관의 서기관들과 일본 거류민을 죽인다.

 

갑신정변을 청나라군의 도움으로 진압한 황후측은 1884년 12월말 예조참판 서상우(徐相雨, 1831-1903)를 특차전권대신으로 임명하여 전권부대신 묄렌도르프(Paul George von Möllendorff, 1848-1901: 청나라 주재 독일 영사관으로 근무, 1869년 청나라의 세관리稅關吏로 전직한 뒤 리훙장李鴻章이홍장의 추천으로 한국의 통리아문統理衙門의 참의參議, 협판協辦을 역임하며 외교, 세관 업무를 본 독일의 대한 제국의 외교고문)와 함께 일본에 파견하여 다케조에 신이치로(죽첨진일랑竹添進一郞, 1842-1917) 공사를 통해 일본 측이 정변에 관여 내지는 지원한 사실을 추궁하는 한편 일본으로 망명한 김옥균, 박영효의 체포 송환을 교섭했지만, 일본정부는 오히려 정치 망명객을 송환하는 법은 없다며 맞서고, 갑신정변 직후, 일본공사관이 불타고 공사관 서기관 등이 살해당한 사실을 조선정부에 묻는 한편, 임오군란으로 살해된 일본인 거류민 40여 명에 대한 사과와 배상까지 요구한다.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伊藤博文, 1841-1909)와 함께 영국유학을 한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정상형, 이전의 이름 이노우에 분타井上聞多정상문, 1836-1915)는 1876년 특명전권 부변리대신(副辨理大臣)이 되어 변리대신 구로다 기요타카(흑전청륭黑田淸隆)와 함께 내한하여, 조선정부에 운요호(雲揚號)사건에 대한 책임을 추궁하여 강화도조약을 체결한 자인데, 그는 조약이란 평화교섭이 아니라 힘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이미 서구열강을 통해서 깨달았기 때문에 강화도조약체결시 써먹었던 얄팍한 수법대로 2개 대대의 병력과 7척의 군함을 함께 조선에 파견하고 1884년 전권대사로 외무대서기관(外務大書記官) 곤도(近藤眞鋤), 미국인 고문 스티븐스(Stevens, D. W.), 육군 중장 다카시마(高島鞆之助), 해군 소장 가바야마(樺山資紀) 등을 수원(隨員)으로 하는 교섭단과 함께 다시 내한하여, 무력으로 갑신정변처리를 위한 ‘한성조약’(漢城條約, 음력 1884, 양력 1885)을 체결하고, 청일전쟁(淸日戰爭) 때인 1894-1895년 조선공사를 지낸다.

 

‘한성조약’이후 일본은 조선에서 청나라와 대등한 세력을 유지할 수 있는 위치에 오른다.

 

1886년 3월 이토 히로부미는 갑신정변문제를 해결하고자 전권대사로 청국에 파견되어 한족 출신의 직예총독(直隸總督) 겸 북양대신(北洋大臣)으로 청나라의 외교, 군사, 경제대권을 한 몸에 장악한 대외정책의 실질적인 결정권자 리훙장(이홍장李鴻章, 1823-1901)과 ‘톈진조약’(천진조약天津條約, 1858년 6월,)을 체결하여 큰 수확을 얻는다.

 

그 이유는 ‘톈진조약’에“조선에서 청일 양국 군대는 동시 철수하고, 동시에 파병한다.”는 내용이 담겨있어, 1894년 청일전쟁의 구실이 되기 때문이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발생하자 조선정부는 청나라에게 원군을 요청하고 이에 일본군대는 ‘텐진조약’에 의거해 군대를 조선에 파병할 명분을 얻는다. 일본은 갑신정변 후 청에게 빼앗긴 조선에 대한 정치적 주도권을 되찾기 위해 청과의 전쟁을 목적으로 군대를 파병한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의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한다.

 

4. 명성황후시해사건(明成皇后弑害事件; 을미사변乙未事變)

 

(1) 원인

 

1) 직접적인 원인

 

청나라는 자국의 수도 베이징(북경北京)의 안전을 위해 조선이 타국에 지배되어서는 안 된다는 순망치한(脣亡齒寒)의 외교노선을 지향하고 있었고, 러시아는 시베리아철도건설을 통한 동아시아진출 외교노선을 수행하기 위해 만주의 안정과 한반도의 영토보전이 필요한 입장임을 일본은 인식하고 조선을 확보하기 위해 청국과는 물론, 러시아와도 일전을 치러야 한다고 생각하며 대책을 세운다.

 

동학농민운동(1894. 4)과 갑오개혁(甲午改革, 1984. 7-1896. 2)을 통하여 조선 내정에 관여하게 된 일본은 청일전쟁(1894.6-1895.4)에 승리한 뒤 1895년 4월 중국과 맺은 ‘시모노세키조약’(하관조약下關條約)으로 중국의 랴오둥반도(요동반도遼東半島), 타이완, 조선에 대한 간섭권을 얻자 러시아는 일본의 목표가 자국의 시베리아횡단철도에 향해져 있음을 깨닫고 일본의 세력확장을 제동하기 위해, 불독을 끌어들여 랴오둥반도를 청국에 반환할 것을 요구한, 이른바 삼국간섭(三國干涉, 1895.4.23)을 단행한다.

 

그동안 일본의 강압하에 내정개혁을 추진한 조선정부는 황후주도로 러시아를 이용하여 일제를 한반도에서 몰아내려는 이이제이식(以夷制夷式: 오랑캐를 이용하여 다른 오랑캐를 통제하고 제압하는 외교정책) ‘인아거일책’(引俄拒日策)을 추진한다. 황후는 러시아공사 K.베베르(Karl I. W○ber; 韋貝)와 제휴하고 친일세력을 제거하기 시작한다.

 

이에 친일세력인 박영효(朴泳孝, 1861-1939)는 1895년 7월 황후시해 음모를 계획하였다가 발각되어 일본으로 달아나고 친일파는 세력을 상실한다. 이미 8월에 민영환(閔泳煥)을 주미전권공사(駐美全權公使)로 등용한 동시에, 이범진(李範晋), 이완용(李完用) 등의 친러파를 기용하여, 제3차 김홍집(金弘集, 1842-1896: 조선왕조의 마지막 영의정이자 대한제국 초대 총리대신)내각이 성립되어, 친미, 친러세력이 정국주도권을 갖는다. 게다가 주한일본공사 이노우에 가오루가 조선정부에 약속한 증여금 300만 원을 일본정부가 제공하지 않자, 조선정계에서는 배일세력(排日勢力: 일본을 배척하려는 세력)이 증가한다.

 

일본은 청일전쟁 직후 전력을 소모한 상태에서 러시아를 상대할 준비가 갖춰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러시아를 직접 상대하지 않고 조선 문제를 처리하는 방법을 모색하며 반일세력의 핵심이자 러시아와의 연결고리인 황후제거방법을 계획하고, 이것이 성공하면 조선인들이 일본에 대한 두려움을 가져 일본에 대한 저항의욕이 완전히 꺾이는 심리전적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판단한다.

 

일본은 황후시해목적으로 이노우가 추천하고 이토가 승인한, 조슈한(장주번, 長州藩: 일제때 육군을 장악; 현재의 ‘야마구치현, 山口県, 山口縣, 산구현’)출신으로서 외교에 문외한인 육군중장 출신의 예비역 장성 미우라 고로(삼포오루三浦梧樓, 1846-1926)를 주한일본공사로 파견한다. 조선정부는 일본의 강압에 따라 제정한 신제도를 구제도로 복구하고, 일본인 교관이 훈련시킨 2개 대대의 훈련대도 해산하고자 한다. 미우라는 황후가 다 된 밥에 콧물 떨어뜨리고 있다고 분개하면서 자칫 다된 밥을 날로 먹으려는 러시아에게 조선을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우려로 황후시해라는 전대미문만행을 계획한다.

 

2) 간접적인 원인


1868년의 메이지유신(명치유신明治維新) 이후 1880년대 일본에서는 서구열강의 대책에 대해 두 개의 노선이 거론된다. 그것은 ‘탈아론’(脫亞論)과 ‘흥아론’(興亞論)이다.

 

전자는 갑신정변에 적극 개입했던 후쿠자와 유기치가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난 지 100일 만인 1885년 3월 16일 ‘지지신보’(시사신보時事新報: ‘산케이, 産經신문’의 전신)사설을 통해 발표한 주장이다.

 

“...주의로 하기 위해서는 오직 ‘탈아’(脫亞)라는 두 글자에 있을 뿐이다. 우리 일본의 국토는 아시아 동쪽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 국민정신은 이미 아시아의 고루(固陋)함을 벗고 서양문명을 따르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 불행한 일은 이웃에 있는 나라이다. 하나는 중국이고 또 하나는 조선이다...(중략)...중국과 조선은 우리 일본에게 일체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 서양 문명인의 눈으로 본다면, 삼국의 영토가 서로 접해 있기 때문에 중국과 조선처럼 우리 일본을 평가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러므로 우리 일본은 오늘의 발전을 도모하는 데 있어서 이웃 나라의 개명(開明)을 기다려 함께 아시아를 번영시킬 만큼 여유롭지 못하다. 오히려 우리는 아시아 국가들에서 벗어나 우리의 운명을 서구의 문명국가와 함께 하는 것이 낫다. 중국청나라와 조선 역시도 이웃나라라고 해서 특별히 봐줄 것이 아니라 서양인들이 이들과 접촉하는 방식에 따라 대우하면 될 것이다. 나쁜 친구와 친하게 되면 악명(惡名)을 피할 길이 없다. 터럭만큼도 도움이 안 되는 나쁜 친구(惡友)와 친해져서 함께 악명을 뒤집어 쓸 이유가 없다. 우리는 마음으로부터 아시아 동방의 나쁜 친구들을 멀리해야 한다.”

 

이 사상은 일본의 선민(選民)의식과 아시아 멸시와 침략약탈병탄의 근거인‘탈아입구’(脫亞入歐)로 변질된다.

 

후자는 도쿠가와 바쿠후에서 해군봉행(장관), 메이지 정부에서 초대 해군경을 역임해 ‘근대 일본해군의 아버지’로 불리고, 메이지유신을 성사시킨 사카모토 료마(판본용마坂本龍馬, 1835-1867)의 스승이기도 한 가쓰 가이슈(승해주勝海舟, 1823-1899: 본명은 ‘가쓰 요시쿠니 勝義邦’이며 관직에 오른 이후에는 ‘아와노카미安房守’, 메이지 유신후에는 ‘가쓰 야스요시勝安芳’로 개명한다. 가쓰는 자신의 누이와 결혼하여 처남매부간이 된 사쿠마 쇼잔에게서 받은 ‘海舟書屋’에서 따온 것임), 일본의 민간 국가주의 운동의 창시적 존재이자 1879년 정치 결사 단체인 고요샤(향양사向陽社: 1881년 겐요샤玄洋社현양사로 개명)를 결성하여 동양문명의 고결함을 내세우며 아시아주의를 주창하는 동시에 일본의 대외팽창정책을 위한 러일전쟁 개전론을 주장한 도야마 미쓰루(頭山 満, 1855-1944) 등이 조청일 3국이 공동 근대화를 통한 연대를 하되 일본을 맹주로 대동단결하여 서구 열강을 아시아에서 물리쳐 부흥시키자는 이데올로기이다.

 

특히 가쓰는 조선에 대해 매우 호의적이다. 그는“조선은 비록 지금은 약소국이나 과거에는 일본에 문명의 종자를 전파한 스승이다”고 말하면서, 대원군을 청나라의 리훙장(이홍장李鴻章, 1823-1901)과 동급의 인물로, 조선을 일본과 어깨를 나란히 할 나라로 만들 인물로 평가한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이 두 사상은 변질되어‘탈아론’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제국주의적 식민주의와 연결되고 한중일 3국의 연대와 근대화로 서구에 대항하자는‘삼화주의’(三和主義)인‘흥아론’은 아시아주의적 대륙침략론으로 바뀐다.

 

일본정부는 갑신정변실패 후 일본으로 망명한 김옥균을 더 이상 이용할 가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조일관계의 장애물로 보고, 홋카이도(북해도北海道)나 ‘태평양의 고도(孤島)’인 오가사와라(소립원小笠原)제도 (1862년에 일본이 점령했고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미국이 점령, 1968년까지 통치)같은 벽지로 유배 보내기에 급급했고, 명성황후는 자객을 보내 김옥균의 목숨을 노리는 그런 상황에서도 김옥균은 ‘흥아론’의 매력에 빠져 갑신정변을 진압한 리훙장과 담판해 청나라의 조선간섭을 중지시키고, 러시아의 남하에 대비해 한중일이 대등한 연합을 만들어야 한다고 계획한다.

 

1894년 3월 그는 리홍장과의 담판을 짓기 위해 주변 만류를 뿌리치고 ‘동양의 루소’나카에 조민(중강조민中江兆民, 본명은 도쿠스케篤介이며, 兆民이란 억조億兆의 백성이라는 의미로 쓴 필명인데 대중의 입장에 서겠다는 자세를 의미, 1847-1901)과 도야마 미쓰루의 배웅을 받으며 조선인 최초로 프랑스에 유학하여 법률을 공부한 홍종우(洪鍾宇, 1854-?)의 안내를 받아 상하이(상해上海)로 향한다.

 

홍종우는 1893년(고종 30) 프랑스 유학을 마치고 귀국 도중 일본에 들러, 당시 갑신정변에 실패하고 일본에 망명해 있던 김옥균과 박영효를 암살하러 온 이일직(李逸稙)을 만나 그의 사주를 받고 개화파의 일원으로 가장하여, 경제적으로 궁핍하게 지내던 김옥균에게 접근하여 일본에서의 부채를 상환해 주고 상해로 가는 배삯까지 부담하는 동시에 중국에서의 활동자금으로서 5,000원짜리 수표까지 제공하는 등 선심술책으로 안심시키고 동행한다.

 

1894년 3월 28일 상하이 미국 조계(租界)내의 일본호텔 동화양행(同和洋行)에 투숙한 김옥균을 권총으로 살해하고 그곳의 경찰에 붙잡히지만, 청나라는 조선정부의 환심을 사려고 홍종우를 석방시킨다. 그는 동년 4월 13일 청나라군함 위정호(威靖號)의 호송을 받으면서 김옥균의 시신을 가지고 양화진(楊花津)으로 귀국한다. 황후는 김옥규의 시신을 부관참시(剖棺斬屍: 죽은 뒤에 큰 죄가 드러난 사람에게 내려진 극형. 무덤을 파고 관을 꺼내어 시체를 베거나 목을 잘라 거리에 내걸음)해 양화진에 효수(梟首: 죄인의 목을 베어 높은 곳에 매달아 놓던 형벌)한다. 홍종우는 김옥균 암살의 공으로 고종과 민씨척족정권으로부터 홍문관교리직을 제수받고 서울에 사택(舍宅)까지 하사받아 세도를 누린다.

 

자부심과 애국심이 강한 홍종우는 개화파와 달리 유교적 전통과 군주인 왕의 권위를 중요하게 생각하여 1898년 황국협회(皇國協會)에 가담한 뒤 2,000여명의 보부상(褓負商)을 동원해 독립협회가 개최한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습격하는 등 독립협회활동저지에 앞장서고, 1898년 말에 독립협회가 해체되자 조선정부의 의정부총무국장으로 임명된다. 그러나 민씨척족인 민종묵의 소행을 비판한 것이 문제가 되어 이후 제주목사로 좌천된다.

 

한편 일본정부는 언론을 통해 부관참시를 한 조선왕조의 조처를 ‘전근대적인 야만’이라고 비난할 뿐만 아니라 김옥균 암살을 방조한 청나라도 한통속이라고 규탄한다. 그 때문에 일본내에서는 야만적인 조선과 청나라와의 관계를 끊고 서구 제국주의에 합류하자는 후쿠자와의 탈아론이 힘을 얻게 된다.

 

뿐만 아니라 ‘흥아론’을 지지하던 도야마 미쓰루의 현양사 등의 과격한 우파단체들도 ‘김옥균 복수’를 외치며 조선과 청나라에 적극 개입할 것을 주장한다.

 

그래서 명성황후시해사건이 발생한다.

 

(2) 진행

 

미우라 일본공사는 일본인을 흥선대원군의 호위병으로 들어가게 해 궁궐츨입이 쉽도록 해놓고 훈련대의 우범선(禹範善), 이두황(李斗璜), 이진호(李軫鎬) 등 3대대장과 전 군부협판(軍部協辦) 이주회(李周會)를 매수한다.

 

1895년 8월 20일(양력 10월 8일) 새벽 5시경 암호명 ‘여우사냥’작전이 시작되며 사건이 탄로 날 경우 배후조정자로 삼기 위해 황후와 관계가 좋지 않은 흥선대원군을 가마에 태워 궁궐 문을 열게 한 후 일본 낭인들은 광화문을 지나 경복궁으로 들이닥쳐 궁궐 뒤편의 왕비 침실인 건청궁 안의 옥호루(玉壺樓)에 난입하여 태자비의 복부를 가격한다. 태자비는 이후 병상에 누워 지내다가 세상을 떠나고, 왕태자는 머리채를 잡히는 등 치욕적인 사건이 일어난다. 시간이 지나 낭인들은 황후를 발견하곤 황후를 수차례 칼로 난자하고, 인근 녹산에서 시신에 석유를 뿌려 불사른 뒤에 경회루에 재를 뿌린다.

 

(3) 결과

 

1) 황후시해가담자 무죄로 석방

 

황후시해현장에는 고종과 황태자, 미국인 교관 다이(William McEntyre Dye, 茶伊) 대령, 러시아인으로서 독립문, 러시아공사관, 경운궁의 정관헌, 제물포의 여러 양관을 설계한 건축기사 아파나시 세레딘 사바틴(Середин-Cабатин, 士巴津, A. J. Scredin Sabatine) Sabatin), 그 외 많은 조선인이 참혹한 현장을 낱낱이 목격하여, 사건의 전말이 국내는 물론 국제적으로도 자세히 알려지자 흥선대원군과 조선궁궐수비대가 범인이라 거짓말을 한 일본은 사건 처리 방안으로서 미우라공사를 해임하고, 고무라(小村)를 판리공사(辦理公使)로 임명한다. 한편 미우라 등 관계자 48명을 히로시마(廣島) 감옥에 구치하고, 형식적으로 관련혐의자에 대한 취조를 하지만, 결국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전원 석방시킨다(1896.1.20).

 

을미사변에 참여했던 한성신보 주필 구니토모 시게아키의 외손자 카와노 타츠미와 이에이리 케이코가 한국을 방문해 사죄하지만 일본정부는 현재까지 공식적인 사과를 하지 않고 있다.

 

2) 쿠시다 신사에 보관된 히젠도

 

1908년 을미사변에서 황후의 침전에 침입한 세 사람 중 한사람인 토오 가츠아키(등승현藤勝顯)는 사건이후에 양심에 가책을 느껴 당시 명성황후를 절명(絶命)시킨 칼 히젠도(비전도肥前刀)를 사찰에 맡기려했으나 사람을 죽여 살기가 너무 짙은 칼을 절에서 받아들일 수 없다 하여 후쿠오카에 있는 쿠시다(즐전櫛田) 신사에 보관시킨다.

 

히젠도는 16세기 에도시대 다다요시(충길忠吉)란 장인에 의해 만들어진 칼로 전쟁용 무기가 아닌 애초에 살상용으로 만들어진 길이 120㎝, 칼날 90㎝의 칼이다. 나무로 만든 칼집에는 토오 가츠아키가 직접 새겨 넣은‘늙은 여우를 단칼에 찔렀다’(일순전광자노호一瞬電光刺老狐)라는 문구가 그대로 있다.

 

히젠도는 명성황후시해를 저지른 일제가 조폭국가, 깡패나라임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3) 고종의 아관파천과 대한제국

 

일본의 위협과 을미개혁(단발령 등 갑오개혁)에 성난 백성들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비밀리에 세자와 함께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俄館播遷, 1896.2.-1897. 2.)을 단행하고, 이에 친일 내각은 실각하고 김홍집은 황후를 시해한 친일파로 몰려 군중들에게 피살된다.

 

1897년 2월 20일, 고종은 러시아의 영향에서 벗어나라는 내외의 압력에 따라 러시아 공관을 떠나 경복궁이 아닌 경운궁(慶運宮: 지금의 덕수궁)으로 환궁을 단행한다.

 

고종은 독립협회의 진언을 받아들여 환궁한 해 10월 12일(음력 9월 17일) 새벽 4시에서 6시 사이에 황제즉위식을 원구단에서 갖고, 낮 12시에 시해당한 비를 ‘명성황후’로 책봉추존하며, 10월 13일 아침 황제는 황후의 빈전에 제사를 드리고(시해당한지 2년 만에 국장으로 치러지고 1897년 11월 22일 명성황후의 유해는 청량리 홍릉에 안장됨) 오전 8시에 태극전에 나아가 ‘대한제국’(大韓帝國)이라는 국호를 반포하고 연호를 ‘광무’(光武)로 정한다.

 

5. 평가

 

(1) 일본의 평가

 

사진기까지 휴대하고 왕후시해의 현장에 ‘출동’하였던 한성신보사(서울의 일본신문사) 기자 고바야카와 히데오(小早川秀雄)의 기록은 명성황후가 위대한 지략정치가임을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청일전쟁을 도발한 의도에서 보거나 거액의 전비를 쓰고 자국의 청년들을 희생시킨 점에 비춰 본다면, 또한 동양장래의 평화와 일본제국의 영원한 안위를 생각한다면, 러시아세력의 신장을 방임할 수 없었던 것이니...오로지 비상한 수단으로 한러 관계를 차단하는 것 외에 방법이 없었다. 즉 러시아와 왕실이 굳게 악수하며 서로 호응하고 온갖 음모를 다함에는 일도양단(一刀兩斷)!...환언하면 왕실의 중심이요, 대표적 인물인 명성황후를 제거하여 러시아로 하여금 결탁할 당사자를 상실케 하는 이외에 다른 좋은 대책이 없다는 것이다. 만일에 명성황후를 궁중에서 제거한다면 베베르 같은 자가 누구를 통해 한국의 상하를 조종할 수 있겠는가...조선의 정치활동가 중에도 그 지략과 수완이 명성황후의 위에 있는 자가 없었으니 명성황후는 실로 당대무쌍의 뛰어난 인물이었다” (‘민후조락사건’).

 

(2) 외국인의 평가

 

주한영국영사 힐리어(Walter C. Hillier)는 사건의 현장을 이렇게 보고한다(1895.10.11)

 

“건청궁의 앞뒷문을 통해 일본군의 엄호하에 침입한 민간인 복장의 일본인들은 한 무리의(조선군 복장을 한)군인들과 함께 일본군 장교와 사병들이 경비를 서 주었다. 그들은 곧바로 황제와 황후의 처소로 돌진하여 몇몇은 황제와 황태자의 측근들을 붙잡았고, 다른 자들은 황후의 침실로 향하였다. 이 때 궁내에 있던 궁내부대신 이경직(李耕稙)은 서둘러 황후에게 급보를 전하였고, 황후와 궁녀들이 잠자리에서 뛰쳐나와 숨으려던 순간이었다. 그 때 흉도들이 달려 들어오자 이경직은 황후를 보호하기 위해 두 팔을 벌려 가로막았다. 흉도들 중 하나가 황후를 찾아내기 위해 황후의 사진을 손에 지니고 있었던 데다, 그의 그러한 행동은 오히려 흉도들에게(왕후를 알아보게 하는) 용이한 단서가 되었다. 이경직은 내려친 칼날에 양팔목을 잘려 중상을 입고 쓰러져 피를 흘리며 죽었다. 황후는 뜰 아래로 뛰쳐나갔지만 곧 붙잡혀 넘어뜨려졌다. 그 뒤 흉도들은 황후의 가슴을 짓밟으며 일본도를 휘둘러 거듭 내려 쳤다. 실수가 없도록 확실히 해치우기 위해 그들은 황후와 용모가 비슷한 몇몇 궁녀들까지 함께 살해하였다. 그 때 황후의 의녀(女侍醫)가(가까스로 용기를 내어) 앞으로 나아가 손수건으로 황후의 얼굴을 가려 주었다. 한 둘의 시신이 숲에서 불태워 지고, 나머지는 궁궐밖으로 옮겨가 처리되었다”(‘주한영국영사의 보고문’).

 

상해에서 서양의 선교사들이 발간한 ‘북화첩보’(北華捷報; The North China Herald)는 이렇게 보도한다.

 

“사건의 주모자는 이노우에이며, 미우라가 조선공사로 임명될 때 이미 그가 이노우에의 희생양이라는 것이 잘 알려져 있었다...이 사건은 미우라가 일본을 떠나오기 전에 계획된 것이다.”

 

명성황후시해사건의 지휘계통은 ‘이토내각(배후)->이노우에(중개역)->미우라(하수역)’이다.

 

(3)‘마지막 황손’ , 의친왕의 아들, 이석고백

 

조선 제26대 왕이자, 대한제국 제1대 황제인 고종(高宗, 재위 1863-1907, 1852-1919)의 다섯째 아들로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純宗, 재위 1907-1910, 1874-1926)의 이복동생인 의친왕(義親王, 1877-1955: ‘의왕, 義王’ 또는 ‘의화군, 義和君’이라고 불림) 이강(李堈)의 12남 9녀 중 11번째 아들(62세 부친 의친왕과 당시 후궁이었던 19세 모친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모친은 당시 창덕궁의 전화교환수였으며, 명절 때 궁에 초청받았다가 부친 눈에 들어 후궁이 되었고, 서울 종로구 혜화동에 있는 300평짜리 사가에서 지냈는데. 부친이 자주 방문해 5남매를 낳음)로 알려진 이석(1941-)은 종합편성채널 프로그램 ‘박종진의 쾌도난마’에 출연해 ‘명성황후시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충격적인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일본 낭인들이 명성황후를 시해하려 할 때 황후를 지목하고 시체를 강간한 사람이 우범선이다.”

 

“그는 을미사변 당시 훈련군 2대대장으로 명성황후 시해과정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맡았다”

 

“이후 그가 일본 여자(사카이)와 결혼해 낳은 자식이 ‘씨없는 수박’을 만든 우장춘 박사다.”

 

“일본으로 망명한 우범선은 망명 후 7년 만에 1903년 황실이 보낸 자객 고영근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였다.

 

“증조할아버지는 흥선대원군, 할아버지는 고종, 아버지는 의친왕이며 어머니는 의친왕의 마지막 후실인 홍정순 여사다”

 

“세종대왕 동상도 나를 보고 만들었다.”

 

6. 교훈

 

(1) 명성황후에 대한 평가는 살해 직후부터 오늘날까지 여러 가지로 엇갈린다. 그 가운데 악평이 황후가 측근에 민씨가를 두어 이들의 부정부패부조리만연으로 조선왕조가 망하게 됐다고 하는데, 필자는 달리 생각한다.

 

위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21세기 대한민국에서도 혈연, 지연, 학연, 뉴미디어연 등의 혈연문화에 기초한 마피아집단의 부정부피부조리로 망국으로 향하고 있다.

 

이것은 구미선진국이나 일본처럼 공사구분이 확실한 죄뇌형의 합리주의적인 기질이나 성격이 아니라 태생자체가 공사구분이 없고 이성보다는 감성, 합리주의보단 정문화를 선호하는 우뇌형이라 어찌할 수가 없다.

 

조선왕조의 세도정치나 21세기의 대한민국의 연줄문화는 동일한 부정부패부조리의 근원이다. 이것에 대한 해법은 부정부패부조리의 마피아사단에 기생하고 있는 기득권세력 모두를 포대에 쌓아 헬기로 태평양 바다에 던져 상어의 밥이 되게 하는 수밖에 없다.

 

이를 위해선 마약과 싸우고 있는 필리핀 대통령‘로드리고 두테르테’(Rodrigo Duterte), 부정부패부조리제거에 힘쓴 대만의 장제스(장개석蔣介石, 1887-1975)나 싱가포르의 초대수상인 리콴유(이광요李光耀, 1923-2015)유형의 차기 대통령이 필요악으로 필요하다.

 

(2) 일제는 조선을 마음 놓고 씹어 삼키려고 하는데 러시아가 걸리적거리고, 러시아를 제거하자니 청일전쟁 후라 모든 것이 딸리고, 그래서 아주 편안한 상대인 친러파의 명성황후를 희생양 삼은 것이다.

 

그리고 명성황후는 어렸을 때부터 쌓은 독서로 역사지식 등이 풍부하고 자타가 인정한 당대의 최고의 여걸이자 유능한 정치가이다. 황후만 제거하면 조선왕조는 그냥 무너진다고 보았기 때문에 일제는 황후를 아주 잔인하게 살해한 것이다.

 

일제는 서구열강의 볼썽사나운 눈을 피하기 위해 명성황후시해사건에 가담한 자들 48명을 히로시마(廣島) 감옥에 구치하고, 형식적으로 관련혐의자에 대한 취조를 하며,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전원 석방시킨다.

 

사실 명성황후시해사건의 주모자들은 모두 해외유학까지 갔다 온 엘리트들인데, 이들 모두가 테러리스트가 된 것이다.

 

그런데 하늘은 명성황후시해의 죄를 히로시마에게 물어 히로시마는 하늘로부터 사망의 세례인 핵투하로 지옥의 세계로 변한다.

 

7. 나가는 말

 

일본열도는 한반도와 중국대륙으로부터 떨어져 있어서, 두 나라로부터 오랑캐나라라고 왕따를 당하다가 16세기 대항해시대를 맞이하여, 당시 세계 최강의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의 남만학(南蠻學 또는 만학蠻學), 그 후엔 ‘란가쿠’(난학蘭學), 영학(英學)으로 이어지는‘양학’(洋學), 그리고 ‘이와쿠라 시세쓰단’(암창사절단岩倉使節団 또는 12개국 구미시찰단) 등을 통해 수백 년 동안 서구열강과 교류하며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서구열강과 맞먹는 근대국가로 거듭난다.

 

이와는 달리 조선왕조는 서구열강과 교류할 수 없는 지리적 환경으로 말미암아 토인비(Arnold Joseph Toynbee, 1889~1975)의 ‘도전과 응전’의 기회가 부재한 탓에 축적된 문화는 거대하지만 시스템자체는 근대화되지 되지 못하고, 과학발전에 기초한 군대의 무력으로 강대국의 약소국에 대한 침략약탈식민지화의 자본주의, 제국주의의 국제정세도 전혀 깨닫지 못한다.

 

조선왕조와 대한제국이 부족한 면이 많이 있을지라도 한반도의 건국이념인 ‘홍익인간 이화세계’(弘益人間 理化世界)와 성리학사상의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기초하여 ‘인간존엄중심의 문화’를 견지한 반면 일제는 조폭문화, 깡패문화의 제국주의의 ‘비인격적인 문화’의 길을 걷다가, 어두운 골목길에서 전자와 후자가 만났는데, 후자가 전자를 강펀치로 날린 것이 ‘명성황후의시해사건’이요‘을사늑약’이고 ‘조일병탄’이다.

 

19세기말과 20세기 초의 선진국, 문명국이란 전쟁을 잘하는 조폭국가, 깡패국가를 의미하는데, 평화를 사랑하고 학문을 애호하는 문화국가인 조선왕조, 대한제국, 선량한 조선백성을 무능하고 부패하여 일제에게 먹혔다고 떠들어대며 ‘명성황후시해사건’을 일으킨 조폭국가, 깡패국가의 행위를 ‘근대화의 시혜’라고 주장하는 뉴라이트역사관을 지닌 노예유형들은 ‘사탄문화’의 전파자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자들은 일제강점기, 3.15, 5.16, 1212의 의‘독재문화’, ‘헌정유린과 법질서파괴문화’, ‘조폭문화’, ‘깡패문화’, ‘오입문화’, ‘기생관광문화’,‘지역차별문화’, ‘한탕주의문화’, ‘일방적 명령하달식문화’, ‘획일주의적 전체주의문화’,‘악질일제찬양문화’, 수많은 고문피해자, 간첩조작피해자, 산재사망자, 산재피해자 등을 죽이거나 장애인으로 만든식의 ‘대한민국의 근대화주장’ 등의 생명경시의‘사탄의 문화’를 체질적으로 선호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망의 문화를 펼치는 자들의 통치를 비판하시고 생명의 문화를 담당한 빛의 자녀들이 실행해야 할 정치철학을 말씀하시면서 당신의 십자가의 철학을 다음과 같이 밝히신다.


“25.예수께서는 그들을 가까이 불러놓고 ‘너희도 알다시피 세상에서는 통치자들이 백성을 강제로 지배하고 높은 사람들이 백성을 권력으로 내리누른다. 26.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사이에서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27.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한다. 28.사실은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이다.’하셨다.”(공동번역. 마태복음 20:25-28)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둠의 문화를 만들어내는 사탄의 정체를 당신의 생명의 문화, 빛의 문화와 비교하시며 다음과 같이 선언하신다.


“44.너희는 악마의 자식들이다. 그래서 너희는 그 아비의 욕망대로 하려고 한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였고 진리 쪽에 서본 적이 없다. 그에게는 진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는 거짓말을 할 때마다 제 본성을 드러낸다. 그는 정녕 거짓말쟁이이며 거짓말의 아비이기 때문이다.”(공동번역. 요한복음 8:44)


“10.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개역한글. 요한복음 10:10)


“12.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또 말씀하셨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라오는 사람은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공동번역. 요한복음 8: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