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이 현립대 대학원 특임교수 안병직은 일제의 식민지배로 대한제국의 근대화가 이루어졌다면서 이렇게 주장한다. '남한은 해양세인 미국의 헤게모니하에 놓인 결과, 오늘날에서 보는 바와 같은 경제적 번영과 민주주의를 실현하였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북한은 소련과 중국이라는 대륙세의 영향하에 놓인 결과, 전근대사회 로 회귀하여 정치적으로는 신정(神政)이 지배하고 경제적으로는 기아와 질병이 만연하게 되었다.'
안병직은 국내에 있을 때는 한반도의 자주와 자유와 독립을 주장하다가, 일본으로 가더니 좌뇌형 소음인 혈액형 A형의 논리로 전향한다. 현재 쪽바리로부터 장학금이나 연구비를 받고 쪽바리의 논리를 선전하는 배알도 줏대로 없는 태음인 한반도유령들이 거리를 배회하고 있다.
안병직의 논리의 모순에 대해 살펴보자.
첫째, 형식적으로 논리에 맞지 않는 귀납법형태를 모방한 주장이다. 구미열강이 아프리카에서 흑인들을 데리고 와서 노예로 혹사시켜놓고, 현재 미국 오바마 대통령까지 배출했으니, 결과로 볼 때 노예제도는 잘 한 일이 아니냐고 반문하는 것이다. 19세기, 20세기 초 구미열강이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식민지 삼아 지배했는데, 21세기 와서 보면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문화와 문명을 업그레이드 시켰기 때문에, 열강의 제국주의는 정당하다는 논리와 같다.
둘째, 대한제국의 자유와 독립을 근거해서 논하기 보다는 노예국가로 전락한 상태를 전제하여 말하는 것이다. 세계에서 전쟁하지도 않고 그냥 송두리째 나라를 넘겨준 민족은 대한제국 지배층뿐이외는 없다. 그러면 을사오적을 비롯한 친일파에 대해서 논해야 하는데, 그런 것은 상관없이 결과만 가지고 논하고 있다.
대한제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치신 안중근님과 유관순님을 비롯한 열사 선조들에게 송구스럽기 그지없다. 안병직 같은 쓰레기 인간들이 대한민국의 지도층에 있다는 사실이 부끄럽다.
그러면 대한제국이 왜 쇠망했는가에 대해 상고해보자.
역사상 세계를 지배했던 나라는 한결 같이 바다를 지배했다. 그러면 지중해와 대서양에 대한 유럽의 판도(版圖)에 살펴보자.
‘포에니전쟁’(라틴어 Bella Punica, 영어 Punic Wars)은 당시 지중해에 패권을 잡은 페니키아(헬라어 φοινίκη, 라틴어 Phoenice, 영어 Phoenicia, 지금 시리아, 레바논, 이스라엘 지방에 있던 고대왕국)의 식민도시국가, 해상무역 도시국가 카르타고(라틴어 Carthago, 영어 Cartage)와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한 신흥 강대국 로마(헬라어 ̔ Ρώμη Hrome, 라틴어 Roma, 영어 Rome, 현재 Tunisia)의 이해관계가 충돌하여, BC 3세기 중엽에서 BC 2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119년 동안 세 차례의 걸쳐 일어난 고대의 세계적 전쟁이다. 곧 헬레니즘 세계의 강자와 새로이 떠오르는 로마와의 충돌이다. 로마는 결국 세 번의 전쟁에서 모두 승리하여 지중해세계에서 패권국이 되고, 지중해제해권(Roman Sea-Power)을 장악할 수 있었기에 찬란한 문화를 기초한 제국(帝國)으로 성장하며 '팍스 로마나' (Pax Romana)시대를 연다. 이처럼 로마제국은 강력한 해군력 위에서 세워진 것이다.
이베리아 반도에 위치한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의해 15-16세기의 ‘대항해시대’,‘지리상의 발견의 시대’가 개시된다. 두 나라가 동쪽 신항로의 개척에 나선 것은 인도, 중국 등이 원산지였던 향신료 때문이다. 당시 향신료는 같은 무게의 금값보다 비쌌다. 뿐만 아니라 이전에 연이은 십자군의 실패로, 함께 이슬람세력을 격파해줄 기독교 세력을 갈구하던 때에, 동아프리카나 아시아 어딘가에 거대하고 강대하며 풍요로운 기독교 왕국이 존재한다는 이야기가 12세기에서 17세기까지 유럽에서 유포되었다. 관대하며 덕을 갖춘 용맹스런 사제왕(주교) 요한(Prester John, Presbyter John, John the Elder)이라는 동방의 가톨릭 군주는 네스토리우스파의 그리스도인으로 아기예수를 방문한 세 동방박사 가운데 한명의 후손이며, 엄청난 부를 보유하고 있고, 청춘의 샘을 비롯한 온갖 신기한 것들로 가득 차 있으며, 그의 왕국은 에덴동산에 맞닿아 있다고 한다. 그런데 사제왕 요한과 같은 허구는 기망(欺妄)을 초래하는 유사종교적 코드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원(元)제국을 방문했던 마르코 폴로(Marco Polo 1254-1324)가 베네치아와 제노바 전쟁에 말려들어 포로로 잡혀 제노바 감옥에 투옥되었다. 이 옥중에서 이야기 작가인 루스티켈로에게 동방에서 보고 들은 것을 필록(筆錄)한 '동방견문록' ( Ⅱ milione, Travels of Marco Polo)이 아시아에 대한 관심을 더욱 고조시켰기 때문이다.
포르투갈의 해외팽창정책은 엔리케(포르투칼어 D. Henrique O Navegador, 프랑스어 D. Henri, 이탈리아어 D. Enrico, 독일어 D. Heine Henrique, 영어 Prince Henry the Navigator1394-1460)왕자에 의해 추진된다. 1488년에는 바르톨로뮤 디아스((Bartholomeu Diaz 1450-1500)가 아프리카 남단의 희망봉(喜望峰 아프리칸스어 Kaap die Goeie Hoop, 네덜란드어 Kaap de Goede Hoop, 영어 Cape of Good Hope)을 돌아와 대항해시대의 서막을 연다. 현재 희망봉은 남아공에 있는 케이프타운이다.
1492년 4월 17일 스페인 이사벨1세(Isabel I 1451-1504)는 이탈리아 제노바 출신의 평민이었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 이탈리아어 Cristoforo Colombo, 에스파냐어 크리스토발 콜론 1451?-1506)와 산타페 협정을 체결하고, 콜럼버스를 해군 제독에 임명하여, 콜럼버스의 해양탐사를 지원하게 된다. 콜럼버스는 죽을 때까지 그의 발견지가 신대륙임을 알지 못한다.
1492년 콜롬버스의 신대륙 발견에 앞서 스페인은 새로 발견될 땅에 대한 소유권을 인정받기 위해 교황의 중재를 요청한다. 교황 알렉산드로 6세(그리스어 Alexandros VI, 라틴어, 영어 Alexander VI 재위 1492-1503)는 인테르 코에테라(Inter Coetera)칙서를 통해 카보 베르드(Cabo Verde)제도의 서쪽 100레구아 지점에 가상선을 설정하여, 서쪽에서 발견되는 땅은 스페인에게, 동쪽에서 발견되는 땅은 포르투갈에게 소유권을 인정한다고 선언하여, 스페인은 아메리카 대륙의 모든 땅에 대한 지배권을 보장받게 된다. 그러나 포르투갈이 이에 강력히 반발하여 1494년 교황 알렉산드로 6세(그리스어 Alexandros VI, 라틴어, 영어 Alexander VI 재위 1492-1503)는 토르데시야스조약(Treaty of Tordesillas)을 제정한다. 아프리카 서쪽 끝 카보베르데섬으로부터 1800Km까지 선을 그어(대서양에 세로로 선을 금) 동쪽(브라질, 한국, 일본, 중국)은 포르투갈, 서쪽은 에스파냐의 식민지로 인정한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 1451?-1506)가 에스파냐 이사벨라 I세의 지원을 받아 ‘인도’(실제로는 서인도제도)를 발견했다는 소식에 충격을 받은 포르투갈은 포르투갈인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 1469?-1524)를 후원하여, 1498년 5월 18일 그로 하여금 아프리카의 남단 희망봉(The Cape of Good Hope)을 돌아서 인도까지 항해한 최초의 인물이 되게 한다. 그러나 인도인들은 바스코 다 가마를 인도 식민지배를 가져온 장본인이라고 비판한다.
포르투갈 태생의 에스파냐(España) 항해가 페르디난드 마젤란(Ferdinand Magellan 1480-1521)은 고국인 포르투갈에서는 ‘페르낭 드 마갈량이스’(Fernão de Magalhães), 원정 후원국인 에스파냐(España)에서는 ‘페르난도 데 마가야네스’(Fernando de Magellanes)로 불리지만 보통은 영어식 철자로‘페르디난드 마젤란’으로 통일한다. 1521년 최초로 배로 남아메리카 남단에 있는 마젤란 해협을 돌아 세계 일주했다고 평가되지만, 1521년 4월 27일 마젤란은 필리핀 제도에 해안에서 원주민 간의 분쟁에 불필요하게 끼어드는 치명적인 실책을 범해 족장 라푸라푸로부터 독화살을 맞아 죽임을 당한다. 마젤란이 죽은 후 남아있던 선원들은 1522년 9월 6일, 출항 후 3년 27일 만에 출발할 당시 선박5척과 선원 270명 가운데 향료를 만재한 빅토리아호와 18명(선장들 중 Sebastian del Cano가 모든 여정을 지도)만이 다시 스페인으로 돌아와 세계 일주를 마치기 때문에, 마젤란은 인류 최초의 지구일주항해의 지휘자라고 할 수 있다. 세계 최초로 대서양과 태평양을 동시 횡단함으로써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지중해 무역에서 대서양 무역으로 전환하게 된 계기를 콜럼버스에 이어 마련 마젤란해협과 태평양, 필리핀, 마리아나제도 등을 명명한다.
1549년 가톨릭의 동양사도로 불리었던 프란시스코 자비에르(Francisco de Xavier, 1506-1552)가 포르투갈의 동양 기지였던 인도의 고아(Goa)를 출발하여 일본에 까지 포교의 발을 뻗친다. 일본 규슈지방에 입항해서 나중에 임진왜란 때 일본이 써먹는 머스켓총을 전해준다. 임진왜란 때 쳐들어왔던 일본의 고니시 라는 장군과 그의 부하들은 독실한 카톨릭 교도였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일본과 중국으로 진출한다. 일본에서는 나가사키가 그 교역항이었는데, 중국에서는 마카오가 동일한 역할을 한다.
펠리페2세(스페인어 Felipe II dHabsburgo, 영어 Philip 1527-1598, 재위 1556-1598)의 통치기간에 유럽변방의 약소국이었던 에스파냐가 절대 왕정의 절정기, 최고의 전성시대, 황금시대(The Rise of the Spanish Empire), '해가지지 않는 제국‘(the empire on which the sun never sets)을 누린다. 펠리페2세는 1571년 투르크 해군과 치른 레판토 해전(Battle of Lepanto)에서 완승을 거둔 후 지중해를 장악했다. 그는 자신의 함대를 '그란데 이 펠리치시마 아르마다'라 칭송했다. 우리말로 ‘위대하고 행운이 넘치는 무적함대(無敵艦隊 the Spanish or Invincible Armada)라는 말이다. 펠리페 2세가 1598년 암으로 서거할 무렵에, 스페인의 시대는 저물어간다.
영국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 1533-1603, 재위1558-1603)는 16세기 유럽의 절대왕정시절 에스파냐를 최강국으로 만든 왕 펠리페(필립)2세의 청혼을 거절한다. 당시 유명했던 해적 프랜시스 드레이크(Francis Drake 1545-1596)는 펠리페2세의 보물선을 약탈하지만 엘리자베스 1세는 모른 채로 일관하고, 오히려 드레이크를 1588년 하워드경(卿) 아래서 영국함대 사령관직을 맡겨 에스파냐왕 펠리페2세가 영국을 공격하기 위해 편성한 무적함대(the Spanish or Invincible Armada)를 함락시켜 대서양의 패권을 차지한다. 1492년 Columbus(1451-1506)가 신대륙을 발견한 이후 약 100년간 식민지 쟁탈권을 주도한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의 영향력이 쇠퇴되고, 영국이17세기 들어서 식민지경영의 선두국가로 발돋움하게 된다.
한편, 당시 네덜란드는 에스파냐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독실한 가톨릭교도 펠리페 2세는 네덜란드에서 급속히 퍼지는 칼뱅파에 대해 심한 박해를 가했다. 탄압을 견디지 못한 네덜란드는 1568년부터 에스파냐를 상대로 독립전쟁을 전개한다. 네덜란드는 영국모직물을 수입하는 곳이라 네덜란드는 영국의 도움을 받아 1581년 에스파냐로부터 독립선언을 하고, 1648년 베스트팔리아조약(the Peace of Westphalia)을 통해 국제적으로 독립을 인정받는다. 네덜란드 연방 공화국(the Republic of the Seven United Netherlands)의 초대 총독에 오른 오라니에공 빌렘(Prins van Oranje Willem)은 영어로 오렌지 공(Prince of Orange)으로 읽힌다. 여기서 나온 오렌지가 현재 네덜란드 대표팀의 상징이 된다. 네덜란드는 1602년 동인도회사(The Dutch East India Company)를 설립해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일본과 해상교역을 했고, 인도네시아 등에 해외영토를 확보한다. 특히 일본진출은 에도막부(The Edo Shogunate)로부터 서양제국 중에서 유일하게 통상허락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일본에서는 ‘난학’(the Dutch Studies)이 부흥한다.
영국 엘리자베스1세는 1600년 인도에 동인도회사(the British East India Company)를 창설하여 조직적으로 동양에로의 진출을 개시하였다. 게다가 암보이나 사건은 네덜란드와의 관계를 끊고 영국으로 하여금 더욱 더 인도 진출에 매진케 하였다. 1783년 개최된 파리 회의에서 미국의 독립이 결정된 후 영국은 인도를 점령하였다. 잉글랜드 제해권(制海權)의 초석을 놓아, 영국이17세기 들어서 식민지경영의 선두국가로 발돋움하게 된다.
이처럼 엘리자베스의 해상권장악은 대영제국의 세계평화시대’, 곧 빅토리아시대의 ‘팍스 브리타니카’(Pax Britinanica)영광의 시대로 이끈다. 빅토리아시대에서는 산업혁명에 의한 자본주의, 의회정치에 의한 민주주의, 선진과학 그리고 그리스도교 전파가 절정에 이른다. 영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관이 형성된다. 영국에서 가까이 있는 서아시아는 근동(Near East), 서남아시아는 중동(Middle East), 한국, 일본, 중국은 극동(Far East)에 속한다.
그러면 한반도는 어떤 정책노선을 지향했는가를 살펴보자.
백제는 백가제해(百家濟海)에서 나온 말 그대로, 고대 삼국 중 가장 활발한 해상활동을 펼쳐 동북아교류의 허브로 우뚝 선다. 바다를 통한 국가적 역량의 확대는 백제의 역사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기록에 나타난 백제의 첫 이름은 백제(伯濟)인데 '으뜸이 되는 나루터'라는 의미이다. 또한 백제의 시조 온조는 처음 한강변에 나라를 세울 때 열명 신하(十臣)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나라이름을 십제(十濟)라 하였다. 그리고 서해 쪽으로 갔던 형 비류의 세력을 합하여 나라이름을 백제(百濟)로 고쳐 새롭게 출발하였다. 이러한 백제(伯濟 1)-십제(十濟 10)-백제(百濟 100)로의 이름 변화는 으뜸나루터→열개 나루터→백개의 나루터를 아우른 나라라는 뜻으로 서해안 해상포구를 장악해 성장한 해양국가 백제의 성격을 잘 나타내고 있다.
태안반도((泰安半島: 서산, 당진)는 해양대국 백제의 국제무역항이다. 국보 84호 우리나라 최초의 마애불(磨崖佛), 서산 마애3존불은 인암(印岩)이라 불리는 커다란 바위에 조성된 것으로 새로운 불상양식인 마애불로서 북위와 동위의 마애불의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이 양식은 7세기 이후 신라에 전해져 경주 단석산(斷石山) 마애불, 군위3존불(제2석굴암), 경주 석굴암(石窟庵) 등이 조성된다. 이처럼 백제는 고구려와의 갈등을 피하기 위해 해양을 통해서 중국과의 교통을 가졌다.
백제인들은 선진조선술로 해양선을 만들고 중국이 발명한 나침반을 사용하여 항해술을 발전시켜 동남아시아 교역로, 곧 탐라(제주도)-북규슈-오키나아-대만-흑치국(필리핀군도)-인도차이나반도(부남국: 캄보디아)의 해상실크로드를 개척한다. 1929년 10월 도굴꾼들이 허난성 낙양 북망산에 소재한 묘광을 파헤쳤는데, 거기서 흑치상지의 묘지석이 발견되었는데, 백제 멸망 후 부흥운동을 펼친 흑치상지(630`~689년)라는 백제 장군이다. 거기서는 백제의 잃어버린 고대사를 밝혀주는 보물 같은 글귀들이 쏟아져 나왔다. 중국학자들이 묘지석을 해석한 결과 흑치씨(黑齒氏)는 그 선조가 부여씨인데 흑치(黑齒)에 봉해졌으므로 자손이 그것을 성씨로 삼았다고 했고, 흑치는 동남아시아 지역의 필리핀 군도를 가리키는 지명이다. 여기서 백제가 부여씨의 왕족 중 누군가를 흑치(필리핀)에 봉했다는 것은, 흑치가 백제 해상실크로드의 한 거점이었음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베트남의 메콩강에 떠다니는‘판옥선’은 백제의 해양선진문화의 전수결과임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고구려와의 전쟁을 불사하면서 서남해안-요동반도-발해-산둥반도-남경의 교역로도 개척하여 동아시아해상교역의 중심지가 된다. 백제는 중국 동북부지역에 백제군을 두어 지배했고, 열도에 야마도(大和倭)의 분국(分國)을 두어 통치했다. 650년에 왜가 제작한 대형 선박 2척의 이름은 「구다라선(百濟船))이다.
이처럼 백제는 동방의 로마제국이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면서, 역사는 강자 편에서 기록되기 때문에, 해양제국 백제의 역할이 축소 왜곡된다. 신라계 김부식이 저술한 ‘삼국사기’는 백제에 대한 평가가 짜다. 그런데 무령왕릉, 백제금동향로, 몽촌토성, 풍납토성 등 유물유적 발굴과 함께 격증하는 문헌자료 연구로 해양대국백제의 정체가 확연히 드러내고 있다.
백제계 후손인 일본은 해양의 중요성을 자각하고 해양영토확장의 선구자가 되어 선진국에 들어선다. 독도문제와 동해표기 등 도 이런 정책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해결되기 어렵다. 그리고 독도문제는 미국의 이익에 달렸다. 한국을 배제한 미일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 때, 독도에 대해 유권해석을 일부러 내리지 않았다. 미국의 정책대로 움직이는 나라의 손을 들어주기 위함이다. 일본은 혹시나 해서 미국의 정책대로 움직이는 노예국가역할을 잘 수행한다. 그리고 일본은 동쪽에서는 러시아와 북방 영토 분쟁을 벌이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센가쿠 열도(중국명 : 釣魚島)를 둘러싸고 중국, 대만, 홍콩으로부터 규탄의 대상이 되어있다.
통일신라에 해양사상이 충만했을 때 장보고(張保皐, ?-846)는 동북아의 해상권을 확보했다. 일찍이 당나라 서주(徐州)에 건너가 무령군소장(武寧君小將)이 되었으나, 신라에서 잡혀간 노비(奴婢)의 비참한 처우에 분개하여 사직하고 귀국한다. 당시 서남해안에서는 당의 해적들이 신라인을 노략질하여 노비로 팔거나 무역선을 약탈하는 경우가 빈번했다. 장보고는 흥덕왕에게 간청한다.“중국을 두루 돌아보니 우리나라 사람으로 도적들에게 잡혀와 노비가 된 사람이 많았습니다. 청해에 진영을 설치하여 도적들이 사람들을 붙잡아가지 못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말에 감동한 흥덕왕은 828년(흥덕왕 3)에 해적들의 인신매매를 근절시키기 위해 장보고로 하여금 1만의 군사로 해로의 요충지 청해(淸海: 완도)에 진(鎭), 곧 군영(軍營)을 설치케 한다. 장보고는 청해진대사(淸海鎭大使)가 되자 휘하 수병을 훈련시켜 서남해안의 해적을 완전 소탕하고, 뛰어난 조선기술을 활용하여 840년(文聖王 2)일본에 무역사절을, 당나라에 견당매물사(遣唐賣物使)와 함께 교관선(交關船)이라는 무역선을 보내어 삼각무역을 펼친다.
장보고의 세력은 국제적으로 극히 번성하여 중국에 유학한 일본 불교 천태종의 중흥조인 엔닌(圓仁)은 그에게 정중한 편지를 써서 귀국할 때의 뱃길을 부탁하기도 한다. 엔닌은 자신의 여행기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서 당나라를 여행할 당시 장보고의 도움을 받아 고국으로 돌아갔던 인연을 소개하며 “평소에 받들어 모시지 못했으나, 오랫동안 고결한 풍모를 들었습니다. 엎드려 우러러 흠모함이 더해갑니다.”라는 편지를 남겨 장보고에 대한 존경을 드러내기도 한다. 또한 장보고는 무역활동을 통해 확보한 경제력을 배경으로 중국의 산둥 성(山東省) 원덩 현(文登縣) 츠산춘(赤山村)에 법화원(法華院)이라는 절을 세운다. 이곳에는 500석을 수확하는 장전(莊田)이 속해 있었는데, 많은 승려가 머물며 정기적으로 법회를 열었고, 청해진과의 연락기관 구실도 한다.
이처럼 장보고는 청해진을 중심으로 재일신라인 사회와 재당신라인 사회를 연결하는 무역망을 구축하고, 이러한 중계무역을 통해 엄청난 부를 축적한다. 장보고는 유력한 신흥귀족이자 강력한 해상세력으로 성장한다. 청해진은 9세기 당대 최고의 국제 무역항이 되고, 장보고는 해상왕국의 건설자 국제적인 인물로 알려진다.
중국의 ‘신당서’(新唐書), 일본의 ‘일본후기’(日本後紀), ‘속일본기(續日本紀)’, ‘속일본후기’(續日本後紀)에 기록된 장보고에 대한 업적은, 한반도의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의 내용보다 훨씬 상세하다. 뿐만 아니라 장보고를 기리기 위해 일본은 천태종의 시조를 모신 교토의 적산서원에 활을 든 장보고의 영정을 모시고 있고, 중국 산둥반도 영성시의 적산법화원에서도 장보고의 영정을 찾을 수 있다. 이것은 한반도지배층들이 야성이 없는 지성만 강조하는 문약(文弱 effeminacy)한 인간형이라 상무(尙武 militarism)정신이 투철한 인물을 배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8세기의 신라인 혜초(慧超 704-787)도 국제적인 인물임을 보여준다. 그의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은 인도 순례기로, 동천국, 서천국, 남천국, 북천국, 중천국으로 나뉘어져있다. 혜초는 720년 당나라 장안을 떠나 동남쪽 해안의 광주로 가서 723년 배를 타고 인도로 향하여, 갠지스강 근처의 불교유적지를 순례하는 것으로 인도여행을 시작하여 728년 당나라 장안으로 돌아온다. 혜초의 의 ‘왕오천축국전’은 1908년 프랑스 탐험가 동양학자 펠리오(P. Pelliot, 1878~1945)의 중국 간쑤성(甘肅省)의 둔황(敦煌) 석굴 발견과 1909년 중국인 나진옥(羅振玉)의 손을 거쳐, 1915년 일본인 다카쿠스 준지로(高楠順次郞)의 노력으로 세상에 알려진다. 고대의 동서 교섭사(交涉史) 연구에 귀중한 사료로 평가되고 있다.
고려태조 왕건(太祖, 877-943, 재위 918-943)은 예성강, 임진강 유역 해상무역을 하던 가문에서 태어나 입신한 인물이다. 해상세력이 고려건국의 주체가 된 것이다. 예성강(禮成江)하구의 벽란도(碧瀾渡)는 당시 세계적인 국제무역항이었다. 고려 전기의 대외무역은 송(宋)을 비롯하여 요(遼), 금(金), 왜(倭)등 주변 나라와 행해지고 있었으며 멀리 대식국(大食國 아라비아)과도 교역할 만큼 교역의 대상이 광범위했다. 각국의 해상선단이 개경의 문호인 예성강 하구의 벽란도를 중심으로 몰려옴으로써, 벽란도는 국제무역항으로 번창했다.
그리고 벽란도에는 외국의 상인이나 사신들이 머무는 벽란정(碧瀾亭)이라는 건물이 있었는데, 이곳을 드나드는 아라비아, 페르시아 상인과 동남아 사신을 통해 고려라는 이름이 ‘코리아‘(Corea)라는 발음으로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고려수도 개경에는 이슬람의 사원 모스크가 ‘예궁’(禮宮)으로 세워지기 까지 했다.
상행위 뿐 아니라 중국의 사신이 올 때에도 우벽란정(右碧瀾亭)에 조서(詔書)를 안치하고, 좌벽란정(左碧瀾亭)에서 사신을 대접하였으며, 이곳에서 개경까지는 동서로 도로를 만들어 놓는 등 외교에 있어서도 아주 중요한 곳이었다. 더욱이 1376년 최무선은 이곳 벽란도를 찾아 원나라 사람 이원에게 염초를 제작하는 방법을 배워, 화약을 제조하는 데 성공하였다.
13세기 후반 고려와 연합군을 만들어 일본정벌에 나섰던 원나라(몽고)전함은 바다에서 돌풍을 만나 모두 깨졌으나 고려전함은 대부분 무사하였다고 한다. 이 영향이 21세기에 대한민국이 조선분야에서 세계를 선도하게 했다. 고려는 해상강국이었고 국제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했다. 고려는 열린 사회였다. 해상 무역 활동을 활발히 벌인 고려는 새로운 문화와 다른 나라 사람들을 편견 없이 받아들였다. 960년 고려 광종 때 이르러 황제국을 선포했다. 송나라와 어깨를 겨눌 만큼 힘도 커진데다가 자부심도 생겼다는 의미다.
그러면 조선은 어떠했는가?
신유사옥(1801 순조 1) 때 신지도(薪智島)를 거쳐 흑산도(黑山島)로 유배되어 거기서 저술한 정약전(丁若銓 1758-1816)의 ‘자산어보’(현산어보 玆山魚譜)는 흑산도 근해에 자생하는 227종의 수산생물을 어류(魚類), 패류(貝類), 조류(藻類), 해금(海禽), 충수류(蟲獸類) 등으로 분류하여 손수 관찰 조사한 내용을 상세히 기록한 수산생물관련 백과사전으로, 실학기의 명저로 꼽힌다. 자산(玆山)은 흑산도의 흑산(黑山)을 대신한 말이다. 유배되어 탄생된 '자산어보'만이 조선의 해양정책의 부끄러움을 달래준다.
조선은 명나라만 교류하기로 하고 책봉된 노예국가인지라 태종 때부터 공도(空島)정책과 해금(海禁)정책을 외교정책으로 채택했다. 공도정책이란 사람들이 섬에서 살지 못하도록 법으로 정하여 허가 없이 섬에서 살게 되면 처벌하는 것이며, 해금정책이란 바다활동을 원칙적으로 금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배를 타고 10리 이상 나가면 왕토(국토)를 벗어난 것으로 간주해 참형에 처했다. 부왕영향으로 세종대왕도 초기 전함폐지를 주장하고, 군사력을 증강해 두면 적들이 먼저 공격해 올 것이라고 하기 까지 할정도였다. 수군은 가장 비천한 직책으로 천민과 죄수들이 주로 바다에 나갔으며, 바다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뱃놈이라고 멸시해 부르면서 딸도 주지 않았다. 이런 시대에 성웅 이순신제독이 있었다는 사실은 하늘의 축복이다.
백제, 고려 때 왕성했던 해상대국정책은 사라지고 오직 중국명나라, 대륙과의 외교라는 폐쇄적인 정책을 오백여 년 간 진심으로 열성적으로 추진한다. 그리고 조선왕조지배층이 내건 공고정책과 해금정책은 자신들의 왕조에 저항하는 반체제세력의 진원지를 초토화 하기 위한 것이다. 해양포기정책의 산물은 결국 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이어지고, 대한제국의 쇠망으로 이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양통상론과 해양진출론을 주장한 사람들이 있었지만, 이들의 제안은 정책에 반영되지 않았다.
토정(土亭) 이지함(李之函 1517-78)의 학풍과 사상은 개방성과 다양성을 특징으로 한다. 의(義)와 이(利)를 대립적인 것으로 이해하지 않고 백성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성인도 원칙을 버리고 권도(權道) 즉 임시변통책을 펼 수 있다고 밝혔다. 국부의 증대와 민생에 유용한 것이라면 어떤 산업도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해양자원의 적극적인 개발과 국제무역까지 주창했다. 그의 혁신적인 사회경제 사상이 조선 후기 북학사상의 원류가 된다. 이지함이 제시했던 부국과 해외통상론을 가장 적극적으로 수용한 학자는 18세기 후반의 북학파 학자 박제가다.
토정이란 마포 강변에 지은 허름한 '흙으로 만든 정자'이다. 밤에는 그 속에서 자고, 낮에는 지붕을 정자삼아 글을 읽었다 한다. 생애의 대부분을 마포 강변의 흙담 움막집에서 청빈하게 지내 토정이라는 호가 붙었다. 당시 마포는 지방의 산물과 서울의 시장이 최초로 만나는 상업과 유통의 중심지로, 그는 여기서 마포의 상인들과 어울리며 장사에 관한 살아있는 지식을 배우고, 한편으로는 고향 앞바다의 무인도에 들어가 박을 재배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토정은 이름 있는 선비로서 천거를 받아 포천 현감(1573)과 아산 현감(1578) 직을 제수 받게 된다. 이 때 토정은 실용정신과 백성본위의 정치를 하고자 애썼다. 토정은 포천현감 시절엔 상소를 올려‘땅과 바다는 백 가지 재용의 창고’라며 국토 자원개발을 주장하고 국제 무역을 통해 국부를 증대시키자는 ‘국부론’을 제기한다. 토정은 포천 땅이 척박하여 곡식이 턱없이 부족하자 전라도 만경현의 양초라는 곳을 임시로 포천에 소속시켜 이곳에서 물고기를 잡아 곡식과 바꿀 수 있도록 해줄 것을 청하거나, 황해도 풍천부 초도(椒島)의 염전을 임시로 포천에 소속시켜 소금을 구워 곡식과 바꿀 수 있게 요청하는 등 아이디어를 내기도 했다. 선조 임금이 받아들여주지 않자 토정은 사임한다.
그러나 토정은 1578년(선조 11)에 다시 아산현감으로 다시 등용되었다. 그는 백성들 스스로 양민의 신분에서 벗어나 유랑민이 되게 만들었던 군역법을 개혁하기 위해 군적을 정리하고, 현대적 개념의 빈민구제기관인 걸인청(乞人廳)을 설립하였다. 걸인청은 걸인들에게 단지 묵고 잘 곳을 제공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스스로 자립할 수 있도록 교육시키고, 그가 직접 관리감독까지 하여 노약자와 굶주린 사람들을 구호하였다. 그리고 직접 걸인들을 데리고 나가 시장에서 장사하는 방법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봉건사회에서 근대적인 복지시설을 만든 것이다. 지역 특산물인 숭어는 임금께 오리는 것인데, 각종 부조리를 양산하게 되자 양식장을 없애고 농토로 만들어 버렸다. 왕에 대한 대역죄가 될 수도 있는 일이다. 하지만 토정은 아산현감 부임 3개월 만에 돌연세상을 떠나게 된다. 그의 나이 62세에 역질에 걸려 서거한다.
18세기 서얼출신 북학파(北學派)의 거장 박제가(朴齊家 1750-1805)는 중국 청나라의 선진 문물을 본받아 생산 기술을 향상시키고, 통상무역을 통하여 이용후생(利用厚生)을 실현할 것을 역설하였다.“고려 때는 송나라 상선이 해마다 왔으나 조선은 400년 동안 중국 상선이 한 척도 오지 않았다”고 언급했다. 그러나 정조는 박제가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처럼 조선왕조는 첫 출발 부터 단추를 잘 못 끼었다. 아사아의 맹주 명나라의 정책에 응하려고 한반도의 해양제국정책을 헌신 버리듯 벗어버리고, 새신을 신었지만 발이 맞지 않았다. 명나라를 이은 청나라는 아시아에서 호랑이었지만, 세계사의 문맥에서 볼 때 이빨 빠진 후진국이었는데, 조선왕조는 그 청나라와도 교류하지도 않고, 이미 없어진 명나라를 신주 모시듯 하다가 쇠망의 길로 들어섰다. 지역적인 위치 때문에 그렇다고 변명할 수도 있겠지만, 전 세계에서 단 한 나라(일본을 포함해 두 나라)와 하고만 오백여년동안 교류했다는 것은 한국민족의 특이한 DNA를 보여준다. 이런 DNA는 북한을 통해 알 수 있다. 오직 중국(러시아 포함해 두 나라)만 상대하다가 원시시대를 유지하고 있지 않는가?
다행히 21세기의 선진대한민국은 전 세계를 경제, 정치와 문화영토화 하여, 구미의 해양문명과 중러의 대륙문명의 이분법 구조도 파괴한다. 하나의 세계가 대한민국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이전엔 비행기가 발명되지 않아서 선박에 의한 무역을 강조했지만, 이젠 육지, 바다, 하늘에 의한 수송이 가능하게 되었다. 선진대한민국의 미래는 밝고 희망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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