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외교권 박탈과 통감부 설치 등 주요 내용을 담은 을사늑약(乙巳條約)을 근거하여 대한제국을 40여 년 간 통치한 일본은 1960년 말에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 된다. 그 당시 대한민국은 6.25전후라 세계에서 최하위 빈민국에 속했다. 일본에서 볼 때 대한민국은 게임이 되지 않는 상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대한민국을 경쟁상대로 간주한다. 합리적이며 객관적인 입장에서 보면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다. 왜 선진국 일본은 대한민국을 두려워할까? 그 진실을 파헤쳐보자.
일본건국신화는 단군사와 가라국 김수로왕 이야기의 내용과 구조가 동일하다는 것은 일본고대사학자들도 인정하는 바다. 와세다대학 사학과 미즈노 유(水野 裕)교수는 이렇게 주장한다. ‘일왕실의 신체(神體)라는 삼신기(三神器: 거울, 옥, 검)는 한반도에서 건너온 도래인들의 신보였다고 본다. 옥과 거울과 칼이라는 신보를 천황이 갖춤으로써 비로소 주권의 표상인 삼신기가 성립되었다. 일본 고대왕조는 도래인들에 의하여 성립되었다’(天皇家 秘密 1977)
미국동양미술사학자 요한 카터 고베일(John Carter Goveil 1912-1996)은 이렇게 언급한다.‘일본역사왜곡은 1300여 년 전 쓰인 첫 역사책에서 처음으로 일어났다’‘일본역사가들은 369년 부여족의 왜(倭)정벌이래 700년까지 한국이 정치 문화적으로 일본을 전적으로 지배했다는 사실을 완전히 감추어버렸다.’미국 컬럼비아대학 개리 레디어드(Gari Ledyard)교수도 이렇게 단정한다.‘부여 기마족이 369-505년 동안, 곧 제15대 오진(應神)천황 때부터 제26대 게이타이(繼體)천황 때까지 130여 년 간 야마토를 정복하여 통치했다’
미국 켈리포니아 대학 제러드 다이마몬드(Jared Diamond)교수는 과학전문지 ‘디스커버리’(1988년 6월 호)에 기고한 ‘일본인의 뿌리’라는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밝힌다.‘현재 일본은 유전학적으로나 골상학적으로나 한국 이민족의 후예임이 분명하다. 한반도 이주인들이 청동기문화를 전래하여 일본의 신석기에 해당하는 조문시대를 마감하고 야요이시대가 열리고, 고대 국가 아스카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제15대 오진(應神)일왕(천황)과 제16대 닌토쿠(仁德) 일왕(천황)부자가 세운 가와치(河內)왕조는 구다라국(百濟國)출신이 최초로 세운 왜(倭)의 고대국가다. 백제의 최전성기를 이끈 13대 근초고왕(近肖古王 ?~375 재위 340-375)은 왜왕에게 칠지도를 하사하고, 진모진이라는 재봉사를 보내 오진일왕과 닌토쿠일왕 부자가 백제 옷을 입게 한다. 뿐만 아니라 아직기(阿直岐)와 왕인(와니 Wani 王仁)박사(博士)를 파견하여 일본에게 선진문물을 전한다.
왕인은 오진일왕의 초청을 받고 ‘논어’10권, ‘천자문’1권을 가지고 왜왕실로 건너간다. 왕인은 해박한 지식으로 오진일왕의 제4왕자 오사자키태자에게 글을 가르치고, 군신들에는 경사(經史)를 가르친다. 오진일왕의 서거 뒤 3년째 되던 해에는 왕인이 오사자키 태자를 닌토쿠일왕으로 즉위케 한다. 도쿄 우에노공원에 1939년 왕인박사기념비가 있다. 일본인들이 한국을 찾아 유일하게 참배하는 곳이 바로 전남 영암군 왕인 유적지다. 매년 왕인 문화축제 기간 중 수천여명의 일본인 관광객이 왕인 유적지를 참배하러 온다. 이들에게 있어 백제가 낳은 박사 왕인은 아스카(飛鳥)문화의 비조(鼻祖)로 일본 문화를 꽃피운 역사적 거인이자 학문의 스승인 것이다.'
일본 왕실 사당 내 백제의 제26대 군주 성왕(聖王 ?-554년, 재위 523-554)신주를 모신 사당, '히라노신사‘(平野神社)가 있다. 일본은 왜 백제의 왕을 모시는가? 백제 성왕은 720년 편찬한 '니혼슈키'(日本書紀)에서 성명왕(聖明王)으로 기록되었다. 그리고 후에 흥명천황, 긴메이 덴노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백제 25대 무령왕(武寧王 462-523, 재위 501-523)의 친 아들로 무령왕과 함께 백제의 영주(英主)라 일컽는다. 일본으로 건너가 불교를 포교한 백제 성왕은 불교문화와 더불어 일본의 왕권을 유지하는 데 힘쓴다. 일본의 왕실은 제 15대 오진(應神)왕(천황) 이후, 백제계에 의해 계승된 것이다. 야마토(和)성씨는 백제 무령왕의 왕성(王姓)이다.
성왕은 부왕 무령왕의 안정된 왕권을 바탕으로 강력한 중앙집권정책을 실시하였다. 538년 웅진(熊津 충남공주)에서 사비성(泗泌城 충남부여)으로 천도하고, 국호도 국방영토인 이전의 수도한성회복을 위한 북진을 상징하는‘남부여’(南夫餘)로 새로 칭하고, 왕족을 ‘부여씨’로, 왕도를 ‘사비성’(부여)으로 천도하는 등 부여의 전통성을 빌려 단결을 도모한다.
성왕이 서거하자 태자인 맏아들 부여창(夫餘昌)이 즉위하여 26대 위덕왕(525-598 재위 554-598)이 된다. 위덕왕은 동생인 혜(惠)왕자를 왜나라에 사신으로 보내 성왕의 서거를 알린다. 또 위덕왕은 부왕인 성왕을 흠모하여 불상을 만들게 되었는데, 그것이 구세관음상(救世觀音像)이다. 성덕태자의 전신(前身)이 성왕의 유상(遺像)이다.
2010년도에 1천400년 전 백제성왕이 신라의 복병에 의해 피살되자 대만을 거쳐 일본으로 건너가 당시 백제의 우수한 문화예술을 그곳에 전래한 백제 성왕의 셋째 왕자 임성태자의 일본 후손들이 익산 서동축제에 참가하기 위해 익산을 방문해 석왕동 쌍릉(백제 무왕이 묻힌 곳으로 추정)을 참배했다. 임성태자 45대 후손인 오우치 기미오(70), 오우치 다카코(大內孝子.66)씨 부부는 이날 서동축제 명예홍보 대사자격으로 오우치 문화탐방회 회원 30여명과 함께 익산을 찾았다.
그래서 충청남도 부여군은 해상왕국 대백제의 후예로서 자긍심 및 숭조사상을 고취하며 옛 백제의 왕도, 국제도시 사비성의 이미지 제고와 역사문화관광 도시 부여의 입지를 구축하고자 그리고 성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군 보건소 앞 로터리에 성왕 동상을 건립한다.
일본 왕실(도쿄 황거의 궁중 삼전)에서 해마다 11월23일 초저녁에 거행하는 왕실 제사인 ‘니나메사이’(新嘗祭, 鎭魂の儀)에는 일왕(천황)이 직접 제주로서 왕실의 궁중삼전(賢所皇靈殿神殿)의 제사 전당에 참석하며, 여기서 백제신 신주(神主)를 모셔오는 축문인 ‘가라카미’(韓神)를 낭창하는데 그 내용이 결정적이다.‘미시마'(三島) 무명 어깨에 걸치고“나 한신(韓信)은 한(韓)을 모셔오노라, 한(韓)을, 한(韓)을 모셔오노라”는 것이 축문의 첫머리 부분인데, 우에다 마사아키 교토대학 사학과 교수는 “일본 왕실 궁중 제사에서 모시는 한신(韓信)은 ‘백제신’”이라고 밝힌다(‘神樂の命脈’ 1969).
일본 제50대 간무(桓武 재위 781-806)의 어머니는 백제 제25대 무령왕(武寧王 462-523, 재위 501-523)의 직계 후손인 야마토노니카사(和新笠) 황태후이다. 간무왕은 서기794년에 헤이안경(平安京: 교토)으로 천도했을 때, 왕궁(헤이안궁) 경내의 남과 북 두 곳에다 한 곳씩 한국신을 모신 사당을 세운 것도 주목할 만하다. 즉 왕궁 안의 북쪽에는 가라카미노야시로(韓神社 가라진자, 백제신 사당), 남쪽에는 소노카미노야시로(園神社 소노진자, 신라신 사당)를 세웠다. 이처럼‘가라카미노 마쓰리’는 백제신에 대한 제사를 의미한다. ‘가라카미’는 ‘가라'(가야)의 신의 신, 한신(韓神)이다. 이런 사실은 일본 황실이 ’가라‘(가야)에서 온 ’가라족‘(가야족)임을 입증한다.
‘에도바쿠후’ 제1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1542-1616)는 자신의 선조가 백제계 간무왕의 직계 후손 세이와 겐지(淸和源氏)라는 왕족 가문(‘신찬성씨록’ 815)이라고 밝혔다. 그러므로 17세기 초에 등장한 에도바쿠후 정권은 백제 왕족들의 왕실 무가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일본 궁내성은 일왕(천황)가의 고분을 사유재산이라고 하며 발굴을 거부한다. 설령 발굴된다 할지라도 유물을 공적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이것은 일왕실(황실)이 백제계의 혈통임을 증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감춘다고 해서 그것이 비밀로 묻어지는 것이 아니다. 역사와 유물은 거짓말하지 않는다.
1998년 10월 김대중 대통령의 일본 국빈 방문 중 열린 공식 만찬에서 일본의 아키히토(明仁)왕이 읽은 만찬사의 일부분이다. '나 자신과 관련해 간무(桓武)천황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후손(和新笠)이라고 '속일본기‘(續日本紀)에 적혀 있어 한국과의 연(緣)을 느낀다'고 고백했다. 이러한 아키히토 왕의 고백은 일본왕실이 바로 가야계에서 백제계로 교체된 백제황실이라는 의미가 된다.
660년 백제 멸망 후, 백제유민들은 혈연국인 왜국의 군사(수만명) 지원을 받아 백제부흥운동을 일으킨다. 당시에 의자왕 여동생인 일본 37대 사이메이여왕(濟明女王)은 본국 백제를 되찾기 위해 군선을 건조하고 탐라국에 참전을 요구하고 왜병을 사비성에 파견하지만 지도층의 내분으로 결국 실패하고 만다. 백제의자왕과 같은 항렬의 종형제간인 텐치(天智 626-671, 재위 661-671)가 38대왕이 되고, 국호를 제15대 오진(應神)왕의 왜(倭: 가야계 중심)에서 일본(日本: 해뜨는 본국, 백제계 중심)으로 고친다.
한반도와 인연을 끊고 백제사를 일본열도중심사관에 입각하여 ‘고지기’(古事記), ‘니혼슈키’(日本書紀)를 기록한다. 그 목적은 일본의 초대 왕 이후 모든 왕들을 하늘신의 아들로 묘사하여 일본왕에게 신성(神聖)함을 부여해서 국민통치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한 것임과 동시에 한반도의 멸시사상이다. 백제계의 일본왕의 신라에 대한 뿌리 깊은 증오심이 왜곡된 정사 기록을 남긴다. 이것은 열등감에서 비롯된 것으로 사기극이다.‘고지기’(古事記)는 712년 제 40대 덴무(天武)일왕이 왕가가 자체적으로 보존할 장서로 구다라국(百濟國)에서 망명한 학자들을 시켜서 편찬한 것이다. 니혼슈키(日本書紀)는 720년 편찬한 것이다. ‘쇼쿠니혼기’(續日本記)는 백제황실차원에서 사실적으로 기록한 역사서다. 그리고 ’니호코키‘(日本後記)가 있다
제50대 간무(환무 재위 781-806)왕 때는, 일본과 한(韓)민족은 같은 민족이라는 ‘한일 동족론’이 적힌 고문서를 모두 불태워 버린다. 간무는 본국(백제)과 단절하는 정책을 편다. 그러나 그는 백제인을 고관요직에 많이 등용하고 기존의 백제문화 토대 위에서 새롭고 자주적인 나라, 일본을 만들어나가는 정책을 대부분 매듭짓는다. 옛 족보를 불태운 간무는 ‘내 생모가 무령왕 후손’임을 자랑스레 밝히려 했지만, 부계 조상(=의자왕)에 대해서는 오히려 말을 아꼈다. 그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것은 백제가 무령왕(25대)-성왕(26대)때 찬란했던 문화대국이었는데, 의자왕(31대)때 멸망하였기 때문이다.
간무는 794년, 헤이안(平安京: 교토)에 도읍지를 옮겨 헤이안 시대를 연다. 신생국 일본은 헤이안에서 8-19세기(1860년대 메이지 이전)까지 1천 년 간 사실상의 수도가 되어, 왕도(王都)와 막부(幕府: 무사정권) 문화를 펼쳐나간다. 일본은 헤이안 시대 초기부터 비로소 고대 백제사로부터 독립된, 일본국 특유의 문화를 펼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일본은 최초로 몽고와 고려의 연합군으로부터 대대적인 외국침략을 두 번(1274, 1281) 당한다. 일본은 몽골의 침입에 앉아서 꼼짝없이 당하게 되었는데, 거센 바람이 불어 큐슈에 거의 닿은 몽골군의 배를 뒤집어버린다. 대륙에서 거침없던 몽골군이지만 바람을 맞고 바다에 서 있자니 어질어질 한다. 몇 번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일단 철수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못했고 몽골 또한 퇴락의 길을 걷는다. 그것이 유명한 '가미카제'(kamikaze 神風)다.
그런데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とよとみのひでよし 1537-1598)는 몽고와 고려의 연합군의 두 번 침략을 잊지 않는다. 그는 정명가도(征明假道)에 저항하는 조선왕조와 대결하여 임진왜란(1592 선조25년)과 정유왜란(1597 선조30년)을 일으킨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예수회신부에게 그리고 명나라 이여송은 마테오리치(Matteo Ricci 1552-1610)에게 전쟁의 자문을 구한다. 임진왜란 때 최초로 포루투칼 출신 신부인 그레고리오 데 세스뻬데스(Gregorio de Cespedes)가 조선 땅을 밟는다. 그는 스페인 사람으로 1593년 12월 27일 (임진왜란때) 웅천포를 거쳐서 왔다가 1년 정도 머물다가 일본으로 건너간다. 1653년 8월 제주에 도착한 하멜(Hendrik Hamel 1630-1692)보다도 60년이 앞서서 우리나라에 도착한 최초의 서양인이다. 이것을 21세기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일본입장에서 보면 몽고와 조선으로부터 당한 굴욕을 복수하는 것이고, 일본의 선교사 편에서 보면 복음전파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일본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메이지유신(明治維新, めいじいしん, 영어 Meiji Restoration, 1868년 1월 3일 -1889년)을 단행한다. 1868년 일왕(천왕)의 에도(도쿄)입성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세운 에도바쿠후는 265년 만에 멸망하고, 일(천)왕중심의 중앙집권제가 실시된다. 1869년 에도를 도쿄로 고치고 연호를 메이지(明治)로 변경한다.
메이지유신시대에 정한론(征韓論)을 내세운 주요 두 인물이 있다.
첫 인물은 메이지유신과 정한론(征韓論)의 정신적 지주이며 ‘손노론’(尊王派)을 제기하여 바쿠후 타도의 불길을 당긴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1830-1859)이다. 그는‘유수록’(幽囚錄)이라는 저서를 통해 정한론과 대동아공영론(大東亞共榮論) 등을 주창하여 일본의 제국주의 팽창에 큰 영향을 끼친다. 그가 존경하는 인물은 신라를 정벌했다고 하는 허구의 여인 진구코고(神功皇后)와 도요토미 히데요시다. 2006년 9월 아베 신조(安倍晋三)전 총리(태평양전쟁의 전범이었던 기시노브스께 전 수상의 외손자, 아베신타로 전외상의 아들)는 고향(야마구치현) 선배 요시다 쇼인을 가장 존경하고, 외국 정치인으로는 윈스턴 처칠이라고 밝혔다.
요시다 쇼인의 제자들 가운데 두 제자가 대한제국과 관련된다. 그들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 와 야마가타 아리토모(1838-1922)다. 이토 히로부미는 초대 총리를 지냈고, 헌법과 내각제를 확립했고,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3대 총리로 일본군대를 근대화했다. 그의 군부 계보로는 가쓰라-태프트밀약과 포츠머스조약체결 주역인 가쓰라 다로(1848-1913), 한국병합체결과 초대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1852-1919), 그리고 2대 조선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1850-1924)가 있는데, 이들 모두는 야마구치현출신이다.
다른 인물은 일본돈 1만 앤 초상화의 주인공이며, 일본이 아시아를 벗어나 유럽과 교류해야 한다는 ‘다츠와 뉴오’(脫亞入歐)’를 주창한 후쿠자와 유기치(福澤諭吉, ふくざわゆきち, 1835- 1901)다. 그는 정한론을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우리 일본은 잡아먹는 자의 대열에 끼어 문명국 사람과 더불어 그들이 쫒는 먹이를 찾아야 한다’‘작은 야만국인 조선은 우리의 속국이 되는 것을 기뻐해야 한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일본열도의 주류세력은 한반도에서 건너간 사람들과 그 자손들인 도래인(바다 건너온 사람)의 후예다. 이들은 한반도와 중국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천명하며 자신들의 과거를 조작하고, 이 과정에서 왕년의 백제에서 파견되었던 왕들을 일왕(천황)으로 만든다. 이들은 이후 패배자였던 백제에서 탈피하려고 자신들의 원수인 신라의 후국인 대한제국을 침략한다. 이들은 조선식민지침탈과 황국신민정책 등을 정당화하기 위해 조선인과 일본인은 선조가 같다는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 또는 동조동근론(同祖同根論)의 슬로건을 내건다. 이것은 신라후예의 조선문화를 부정하고 백제문화의 우월성을 긍정하기 위함이다. 이것이 지금 한국과 일본이 견원지간처럼 된 이유다.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ふくざわゆきち, 1835-1901)의 주장 이후 150여 년 동안 서양만 흠모하고 동경했던 일본이 이제 한국과의 선린우호의 중요성을 깨닫지만 대한민국이 경제적으로 실리주의자의 일본을 앞지르지 않으면 소음인 일본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태음인 대한민국을 짓밟아 버릴 것이다. 미국 인류학계의 대표적인 여성학자 루스 베네딕트(Ruth Benedict 1887-1948)도‘국화와 칼’(The Chrysanthemum and the Sword, 1946)에서 일본인의 이런 성격에 대해 언급한다. 지금은 백제후예가 신라후예를 앞서고 있다. 분발하자.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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