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와 정의의 나라/역사 이야기

내전(內戰)과 외전(外戰)으로 본 대한제국쇠망

아우구스티누스 2010. 9. 17. 11:14

 

    교회의 역사가 순교의 역사인 것처럼, 아이러니컬하게도 인류의 역사도 전쟁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고대세계로 방향을 돌릴 필요 없이 지난 20세기에 일어난 세계 제1, 2차 대전(1차:1914-1918; 2차:1039-1945)과 최근에 일어난 일련의 사태를 바라보아도 이 말이 틀리지 않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 or Augustine of Hippo 354-430)이후 그리스도교에서는 거룩한 사명을 띤 전쟁이나 그리스도교의 이념에 의하여 수행하는 전쟁을 ’성전‘(聖戰, 거룩한 전쟁, HOLY WAR)이라 부르며 전쟁의 당위성을 인정한다. ’성전‘ 이란 용어는 20세기 초 쉬발리에(Schwally)가 처음 사용한 용어이며, 무슬림에서는 ’지하드‘(Jihad)라고도 한다.

 

    최첨단의 과학이성의 세례를 받은 현대인이 평화를 사랑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합리적인 사고의 21세기인들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이종격투기, 곧 권투, 레슬링, 씨름, 유도 등 각종 무술로 무장한 선수들이 싸우는 경기와 같은 원시적 폭력에 취한다. 뿐만 아니라 스페인 국기(國技)의 한 가지에 속하는 투우(bull-fight)에 사람들은 열광한다. 인간에게 생명과 죽음이 공존 하는 것이 냉철한 이성으로 해결할 수 없듯이, 평화의사랑과 전쟁의 갈망이 공존하고 있음은 또 하나의 해결할 수 없는 모순을 보여준다. 이것이 인생의 부조리(不條理)다.

 

    전쟁은 예술의 한 자궁(子宮)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인류는 전쟁을 통해서 예술작품을 구현했기 때문이다. 트로이전쟁을 다룬 호메로스(헬라어 ̔ Όμηρος Homeros, 라틴어 Homerus, 독어, 영어 Homer)의 ‘일리아드(독 어 Iliade or Ilias, 영어 The Iliad)와‘오디세이’(헬라어 Οδύσσεια Odysseia, 라틴어 Odyssea, 독어 Odyssee, 영어 the Odyssey), 1929년 제1차 세계대전의 전장에서의 체험을 소재로 한 에리히 레마르크(Erich Maria Remarque 1898-1970)의 ‘서부전선 이상 없다’(Im Westen nichts Neues), 1929년 제1차 세계대전의 허무함과 고전적인 비련을 테마로 한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Miller Hemingway 1899-1961)의 ‘무기여 잘 있거라’(A Farewell to Arms), 제2차 세계대전 후 프랑스 파리를 배경으로 한 시몬 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의 자전적 장편소설‘타인의 피’(他人의 피), 그리고 1940년 스페인 내란을 배경으로 미국 청년 로버트 조단을 주인공으로 한 헤밍웨이의 최대의 장편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For Whom the Bell Tolls) 등이 태어났다.

 

    전쟁은 또한 문화와 문명의 발전을 가져온다. 로마와 페니키아의 식민시 카르타고(라틴어 Carthago, 영어 Carthage)와의 전쟁인 포에니전쟁(라틴어 Bella Punica, 영어 Punic Wars, 포에니 ‘poeni’라는 말은 라틴어로 ‘Poenicus’이고 '페니키아인'을 가리키며, BC 3세기 중엽에서 BC 2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전후(前後) 3차에 걸쳐 있었던 고대의 세계적 전쟁)을 통해서 도시국가 로마가 거대제국으로 발전한다. 십자군전쟁(十字軍 라틴어 croisade, 영어 crusades 11세기 말-13세기 말)은 그리스와 로마 예술, 철학, 과학 등이 서유럽과 동방에 전해지고, 서유럽은 이슬람사상을 받아들여 르네상스의 발판이 된다. 백년전쟁(百年戰爭 Hundred Years' War 1337-1453)은 중세봉건 사회가 막을 내리고 중앙집권화된 절대왕정이 들어서기 시작한다. 청일전쟁(淸日戰爭 The First Sino-Japanese War 1894년 6월-1895년 4월)과 러일전쟁(the Russo-Japanese War 1904-1905)을 통해서 일본은 패권국가로 등장하며, 한국전쟁(the Korean War 1950년 6월 25일-1953년 7월 27일) 또는 ‘6. 25전쟁’(六二五戰爭 the Korean Conflict)을 통해서 태평양전쟁(太平洋戰爭 the Pacific War 1941-1945)에서 패한 일본은 세계경제2위국으로 진입한다. 대한민국은 베트남전쟁(the Vietnam War 1960-1975년)을 통해서 선진국으로 들어선다.

 

    파괴는 건설이란 말이 있듯이, 전쟁은 파괴와 건설을 가져다준다. 파괴와 건설은 인간의 몸에 공존하는 삶과 죽음처럼 모순적이며 부조리하지만, 인간의 이성을 뛰어넘는 역사의 완성을 실현하는 도구다. 그러면 조선왕조의 전쟁에 대한 자세를 통해 그 멸망의 원인을 상고해보고자 한다.

 

    고려 제32대 국왕 우왕(禑王 1365년-1389, 재위 1374년-1388)은‘고려사’에는 제31대 왕 공민왕(恭愍王 1330-1374, 재위 1351-1374)때 승려 출신의 개혁 정치가 신돈(辛旽 ?-137)의 아들로 기술되어있다. 최영(崔瑩 1316-1388)장군은 자신의 서녀를 우왕의 비로 들여보내고 1388년에는 문하시중의 지위에까지 오른다. 명나라가 옛날 원이 차지하였던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자리에 철령위(鐵嶺衛)라는 통치기관을 세우겠다고 통고하자, 최영장군은 이성계(李成桂1335-1408)와 조민수(曺敏修 ?-1390)를 파견하여 명나라의 요동지방을 징벌하도록 한다. 최영은 건국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명나라가 내정의 불안정으로 아직은 전쟁에 전력을 다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이 기회에 요동까지 쳐들어가자는 주장을 폈던 것이다.

 

    그런데 이성계는 4불가론을 제시한다.“예로부터 작은 나라는 큰 나라를 섬겨야하는 법입니다. 어찌 작은 나라인 고려가 큰 나라인 명을 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지금은 농사철입니다. 군사를 동원하면 농사는 누가 짓겠습니까? 게다가 장마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칼은 녹슬고 전염병이 돌 터인데 어떻게 전쟁을 하겠습니까? 그리고 군사를 북쪽에 집결시키면 남쪽에서 쳐들어오는 왜구는 어찌 막으려 하십니까?”

 

    최영장군의 보호를 받고 있던 우왕은 최영의 요동정벌에 동의하지만, 최영이 자신의 곁을 떠나는 것은 원치 않는다. 우왕은 최영을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로 삼아 평양에 나아가 독전하게 하고 조민수를 좌군도통사, 이성계를 우군도통사로 삼아 정벌군을 이끌고 출정하게 한다. 우왕의 명을 받아 최영이 이성계에게 군대를 내어준 것은 고양이에게 생선전을 내준 것과 진배없다. 명나라를 치기 위해 북쪽으로 가던 이성계는 압록강 하류 위화도(威化島)에서 장마를 만나 섬에 갇히게 되고 군대를 그 이상 전진시킬 수 없게 되자 여러 차례 회군의사를 고려조정에 아뢴다. 그러나 우왕과 최영은 이성계의 회군을 허락하지 않는다. 1388년(우왕 14) 음력 5월 애초에 원치 않는 전쟁 길에 올랐던 이성계는 왕명을 거역하고 결국 군대를 회군시킨다. 이것이 바로 고려와 최영의 운명을 완전히 침몰시킨 위화도 회군(威化島回軍)사건이다.

 

    우왕의 명을 거역하고 군대를 돌린 이성계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는 쿠데타 외에 다른 길이 없었다. 신진 사대부와 신흥 무장 세력들로부터 신망을 얻고 있던 이성계는 그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결국 개경(개성‘開城’의 다른 이름)으로 들어와 무력시위 후 정권을 탈취한다. 돌연한 사태 변화에 최영은 급히 평양에서 개경으로 돌아와 회군해오는 이성계의 군대와 싸우려 하였으나, 이미 대부분의 군을 이성계의 요동정벌군에 내어준 상황에서 최영은 속수무책이었다. 결국 최영이 보호하던 우왕은 강화도로 쫓겨났고 최영은 고봉현으로 유배된다. 이후 최영은 합포로 옮겨졌다가 결국 개경으로 다시 압송되어 참형된다. 최영이 죽은 뒤 4년 후 1392년 이성계는 조선을 개창하고 그로부터 4년 후에는 최영에게 무민(武愍)이라는 시호를 내린다.

 

    위화도회군은 대륙을 향한 조선민족의 비전을 좌절시키는 행위다. 건국 초기 명은 허약했고, 원은 쇠약해져서 북으로 쫓겨 간 상태였다. 고려군이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진격했다면 요동은 회복되었을 것이다. 최영은 요동정벌을 하려고 할 때 5만 명의 병력을 동원했다. 이성계는 함경도 영흥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장성했다. 태어날 당시 영흥은 원나라의 통치하에 있었고, 이성계가 만 29세 때야 비로소 고려의 영토가 되었다. 이성계는 고려어, 몽골어, 여진어 3개 언어에 능통하며, 이민족의 피가 흐른다고 추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경정치인들의 모략과 중상의 바람막이를 해준 생명의 은인이며 제2의 어버이인 최영을 죽인다.

 

    이성계의 4불가론을 통해서 조선왕조는 영토확장에 전혀 관심 없을 뿐만 아니라 세계를 호령하겠다는 야심이라곤 눈코만큼도 없는 전형적인 위성국가(衛星國家 satellite country)로 전락할 DNA를 잉태하고 있음을 내외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중국 북송시대의 학자로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중 한 사람인 소순(蘇洵)은 이렇게 말한다.“국가는 한 사람으로 인해서 흥할 수도 있고 한사람으로 인해서 망할 수도 있다.”

 

    대한민국현대사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전두환(全斗煥 1931-)은 5·18광주민주화운동을 강제로 진압하고 정권을 장악한 뒤 제12대 대통으로 취임한다. 비합법적으로 대통령직에 올랐기 때문에, 이전의 조선왕조의 역대 왕이 중국의 승인을 받은 것처럼, 빅 브라더(Big Brother)미국의 인증서가 필요했다. 레이건(Ronald Wilson Ragan 1911-2004)은 미국 제40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자마자 대한민국의 이런 사실을 간파하고, 맨 먼저 서유럽의 총리가 아니라 전두환을 초청하지만, 몇 분간(통역까지 감안하면 대략 15여분)의 면담만 나누며, 전두환으로부터 한반도 핵 포기각서를 받아내고, 미국의 경제적 이익을 위한 조치들을 취한다. 전두환은 전씨 가문의 영광을 위하여 박정희 전 대통령이 추진한 한국군의 자주국방을 위한 현대화 프로그램을 기꺼이 폐지하고, 미국의 경제를 위해 대한민국이 희생하겠다고 적극적으로 나선다. 참으로 희한한 대한국민의 기질이다. 공과 사를 전혀 구분하지 못하고, 사를 위해 공을 희생시키는, 이런 태도는 전 세계에서 대한민국이 유일하다. 조선왕조도 공사구분을 못해 노예국가로 전락했는데, 현대사에도 예외가 아니다. 지금 이명박정부를 비롯해 모든 단체장들이 공사구분을 못하는 노예근성의 DNA를 가지고 있음을 매스컴을 통해 심심치 않게 듣고 있다.    

 

    타국가를 계획적으로 공격하여 사람들을 죽인 적이 한 번도 없는 조선왕조지배층은 자기 민족은 가차 없이 죽인다. 이것은 전 세계에서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외전(外戰)은 한 번도 시행한 적은 없지만, 내전(內戰)에는 일가견(一家見) 있음이 네 차례의 사화를 통해서 알 수 있다. 훈구세력인 관학파와 사학파의 투쟁과 갈등이 그것이다. 사림파는 동인과 서인, 동인은 남인과 북인으로,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나누어져 붕당정치의 선구자가 된다.

 

    조선 중기 중종, 명종, 선조 때의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문신 이준경(李浚慶 1499-1572)은 조선 제14대 왕 선조(宣祖 1552-1608, 재위 1567-1608) 때 영의정을 지낸 인물이다. 이준경은 퇴계 이황(退溪李滉 1501-1570)과 율곡 이이(栗谷李珥 1536-1584)의 인간됨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 한다. 이준경은 선조의 학문연마를 위해 여러 차례에 걸쳐 관직의 후배이기도 했던 이황을 초빙했으나 이황은 한양에 잠시 머물다가 곧장 고향으로 내려가기를 반복한다. 이에 이준경은 이황의 이 같은 행태를 ‘산새’(산금 山禽)에 비유한다. 게다가 이준경은 선조 5년 세상을 떠나며 선조에게 남긴 유서에서 당쟁의 조짐이 있다며 사실상 이이를 지목한다. 이이와 서애 유성룡(西厓 柳成龍 1542~1607) 등의 신진 사류의 비난을 받는다.

 

    그런데 이준경 서거 3년 후 1575년에 동서분당(東西分黨)이 일어난다. 이황은 남인의 정신적 뿌리가 되고 이이는 서인의 사상적 지주가 된다. 특히 1623년 서인일파가 제15대 왕 광해군(光海君 1575-1641, 재위 1608-1623)및 대북파(大北派)를 몰아내고 능양군(綾陽君) 종(倧: 인조)을 왕으로 옹립한 사건인 인조반정(仁祖反正)이후 서인의 세상이 200년 이상 계속되면서 조선 최고의 정승으로까지 당대에 추앙받았던 이준경이라는 이름은 역사 속에서 사라진다. 이들 노론세력은 조선왕조말까지 정권을 잡고 일본과 일전을 치르지 않은채 아주 평화롭게 적극적으로 조선왕조를 일본에 푼돈 받고 넘긴다. 이런 유형의 민족이 세상에 또 있을까? 

 

    조선 제22대 왕 정조(正祖 1752-1800, 재위 1776-1800)를 세종에 버금가는 성군으로 칭송하며 정조대왕으로 부르는데, 이것도 오해와 오역이다. 냉정하게 평가하면, 숙종이후부터 조선왕조는 일본에 뒤지기 시작한다. 이것은 학계에서도 인정한다. 우리는 흔히 영조와 정조의 통치시대를 조선왕조시대의 최고의 부흥시대로 해석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한반도에서만 통용되는 해석이다. 영조와 정조시대의 중국과 일본의 역사를 살펴보면 조선왕조가 얼마나 미개의 문명의 시대인가를 체험할 것이다. 아마 수치감과 모멸감이 몰려올 것이다.

 

    그리고 정조가 타살을 당했건 자연사이건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학문을 사랑하고 실학사상으로 무장한 성군이라는 사람이 자신이 죽으면 자기가 추진한 개혁작업이 어떻게 될 것인가 알았을 텐데, '왜 후계자조차 세심하게 철저하게 준비하지 않았는가? '이다. 이것은 세종대왕에도 적용된다.

 

    정조 뒤를 이은 순조(純祖 1790-1834, 재위 1800-1834)가 11세로 제23대 왕으로 등극한다. 순조의 아들 헌종(憲宗 1827-1849, 재위 1834-1849)은 8세로 제24대 왕으로 즉위한다. 헌종에게 아들이 없자 강화도에서 3대째 농사만을 짓고 살던, 무식하기 짝이 없는 어리석은 19세의 청년이 제 25대 왕 철종(哲宗 1831-1863, 재위 1849-1863)으로 등극한다. 철종이어 흥선군 이하응 둘째 아들 명복이 12세 나이로 제26대 왕 고종(高宗 1852-1919, 재위 1863-1907)으로 즉위한다. 초등학교 수준의 어린애들과 무식한 농사꾼 19세 청년이 왕으로 등극하였으니 조선왕조는 필히 내전으로 멸망할 나라임을 적나라(赤裸裸)하게 보여주고 있다. 사실 순조 때는 영의정이며 순조의 장인이었던 김조순을 중심으로 안동김씨가, 헌종 때는 헌종의 외조부인 조만영을 중심으로 풍양조씨가, 철종 때는 철종 장인인 김문근을 중심으로 안동 김씨가 세도정치를 펼쳤고, 고종 때는 여흥민씨의 세도정치와 대원군인 이하응의 세도정치와 쇄국정치로 조선왕정이 피로 얼룩진다.

 

    이런 내전은 현대역사에도 계속된다. 1950년 6.25전쟁, 1960년 4.19혁명(四一九革命 또는 4.19의거), 1961년 5.16군사정변( 또는 군사쿠테타), 1980년 5월 광주민중항쟁 등이 그것이다. 타국에는 한 번도 총을 겨누지 못한 권력자들은 자신의 핏줄에게는 무자비하게 총칼을 갈긴다. 노사투쟁이나 여야정책토론을 보면 화해와 타협을 위한 것이 아니라 타국과 전쟁 치르듯 한다. 이것을 보고 역동적인 민주주의의 선구자라고 외신들은 전한다고 하는데 오역같다.

 

    그런데 문제는 외전, 곧 제1, 2차세계대전을 일으킨 민족이 21세기를 좌지우지(左之右之)하는 선진국이라는 사실이다. 일반적으로 악인은 패망의 길로 가는것이 정상이지만 세상의 이치는 상식을 깨뜨린다. 이런 상황에서 선진국과 후진국을 규명하자면, 외전을 적극적으로 진취적으로 끊임없이 감행하는 민족은 선진국에 진입하고, 외전을 두려워하는 민족은 식민지국가로 잔존한다. 내전은 어느 민족이건 내재하는 본질적인 문제이지만, 외전은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는, 곧 용감하며 전투적인 백성만이 감행할 수 있는 특수한 사건에 속한다.

 

    아쉽지만, 조선왕조의 지배층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다. 다음의 실례는 이런 사실을 입증한다. 선조 25년인 1592년 4월 13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백년간 지속되어 온 전국시대를 통일 한 후, 불평세력의 관심을 밖으로 돌리고, 그들에게 토지를 주기위해, ‘명나라를 칠 터이니 길을 빌려 달라’(征明假道 또는 假道入明)는 구실로 조선을 침략한다. 임진년에 왜놈이 난리를 일으켰다 해서 임진왜란이라고 한다. 1592년 6월 선조는 압록강 변에서 명나라를 향해 울부짖는다. “제발 조선을 합병해 주옵소서...저를 살려준다면 한수 이남을 떼어주겠습니다.” 왜군의 포로가 된 선조의 큰 아들 임해군은 함경북도 회령 두만강 변에서 왜군 장수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 加藤淸正 1562~1611)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살려달라고 애원을 힌다.

 

    조선왕조지배층들은 가문의 영광, 자기의 당파에만 관심이 있고, 정정당당하게 문제를 처리하기 보다는, 꼼수, 곧 모략과 투서로 문제를 처리하는데 선수들이기 때문에 전쟁자체를 두려워한다. 니체가 말한대로 노예민족이다. 이것은 다시 한번 곰곰히 생각해볼 문제다. 대한민국이 미국과 동맹국으로서 미국이 요청하면 기꺼이 군사력을 지원해주지만, 미국을 비롯한 나토회원국가들처럼 전쟁을 감행하기 보다는 소극적으로 평화를 위한 다는 목적아래 건설사업이나 교육사업 등에 참여한다는 조건을 내세우고 파병한다. 사실 이런 것들은 군인보다 민간인이 오히려 더 잘할 수 있는 분야이다. 대한민국국군은 오히려 미군과 함께 적극적으로 전쟁에 참여하여 예전의 대한제국이 아님을 전세계에 보여주어야 하는데, 특히 일본과 중국이 대한민국을 만만하게 보지 않도록 해야하는데, 도리어 전쟁을 두려워하는 민족이라고 세계인들에게 공포하는 호구노릇을 하고 있다. 저런 나라는 전쟁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또 쳐들어가면 전쟁하지 않고 그냥 통채로 나라를 내주는 노예민족임을 만방에 알리고 있다. 정말 이해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민족이다.

 

    군대의 존재목적은 국토와 국민의 안전을 지키고 전쟁하는 데 있다. 전쟁을 기피하거나 두러워하면 군대의 존재목적이 없어질 뿐만 아니라 국가를 통치하는 대통령도 필요없다. 최근의 천안함사건의 처리과정만 봐도 그렇다. 자기 백성 수십명이 죽었는데, 즉시 북한을 공격하지 않고  유엔안보리에 회부한 그 자체가 세계 국가들로부터 비웃음을 사고 있다. 아마 자기 가정이나 가문의 사람이 죽었다면 난리부르스를 추었을 것이고, 그 범인들을 끝까지 색출해 죽였을 것이다. 힘없는 민중의 자녀들이 죽었기 때문에 지배충은 자신들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전쟁을 피하고 도덕적이며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평화적인 사람인양 비겁하게 꼼수를 두고 있다. 

 

    더욱이 천안함 사고 때 지휘계통에 있던 한국군의 장군들은 아군의 배가 폭파되고 전우들이 죽었는데도, 전혀 북한을 공격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것은 확대전이 될까봐 그런 조치를 취했다고 하는데, 그것은 다 변명이다. 대한민국 군대는 전쟁을 두려워하는 허수아비 집단임이 드러났다. 군대는 비생산직에 속하는 소비하는 집단이다. 군대존재의 목적인 전쟁자체를 두려워하면 이런 소비집단은 해체시켜야 한다. 국민혈세만 빨아먹는 룸펜에 불과하다. 천안함사건처리과정을 보면 대한민국의 군대는 부패하여 무능력한 집단이라는 자괴지심(自愧之心 sense of shame)이 든다. 이번 기회에 다 물갈이 해야한다. 강직하고 용감하여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고 국가를 사랑하는 사람이 군대의 지휘자가 되어야 한다. 미군이 주둔하고 있을 때 이들로부터 최첨단 전쟁의 노하우를 확보해야 하는데, 천안암사건을 통해 그렇지 않음이 드러났다. 그리고 천안함사건을 책임지겠다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이명박 대통령을 비롯해 국무총리, 감사원장, 국정원장, 국무위원들 다수 등은 병역의무조차 수행하지않는 전형적인 21세기의 이완용의 집단이다. 그래도 대한민국국민은 이런 무리들을 사랑하고 격려한다. 다른 나라에서 볼 수 없는 일이 한반도에서 일어나고 있다.  

 

    네덜란드와 벨기에는 원래 하나의 통일된나라다. 네덜란드는 프로테스탄트를 선택하고, 벨기에는 가톨릭을 선택해서, 두 나라가 종교문제 때문에 갈라진다. 남한과 북한도 동일한 유형이다. 남한은 자유민주주의를 택했고, 북한은 이전의 공산국가에서도 볼 수 없는 김일성과 김정일, 곧 김씨일가의 독재체제를 택했다. 사상적으로 보면 북한은 남이다. 형이학적인 면에서만 동포다. 같은 피를 나눈 형제라도 사상이 맞지 않으면, 서로 왕래하지 않고 남남처럼 지낸다. 그래서 이웃 사촌이 왕래하지 않은 친척보다 좋다는 속담이 생긴 것이다. 공교롭게도 북한인민도 노예근성에 찌든 민족이다. 이전의 공산국가인 동유럽이나 소련의 경우 민중들이 한결같이 독재에 항거 하거나, 공산국가의 어둠을 폭로하는 작가들이 있었지만, 북한은 전혀 그렇지 않다. 자유라는 단어도 모르지만, 생존만 하면 그것으로 족하게 생각하는 듯하다. 이런 사실에서 보면 한반도민족은 자유 있는 삶보다는 생물학적인 삶만을 추구하는, 노예근성으로 똘똘 뭉쳐있는 족속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노예민족에서 해방하려면 대한민국은 북한을 선제공격해서 납북통일의 과업을 완수하고, 일본처럼 중국과 대등한 관계를 가져야 한다. 북한을 선제공격하는 이유는 북한의 산발적인 도발로 남한사람이 희생되고, 불안한 정세 때문에 남한의 신용등급이 떨어져 경제적으로 막대한 타격을 입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정일과 그 측근들 그리고 북한사람의 희생은 불가피하다. 김정일은 자신만 편안하고 대대로 자기 자손들이 수령자리에 오르면 그것으로 만족하는 자다. 북한주민에 대한 애정은 눈꼽만큼 도 없는 인민의 피만 빨아먹는 흡혈귀이다. 그런 독재자는 죽음자체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국지전쟁(limited warfare)만 일으키지, 전면전쟁(all-out war)은 감행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남한이 선제공격해 통일을 선도해야 한다. 선제공격은 북한을 동북4성으로 간주하는 중국지도층에 대한 메세지이기도 하다. 자주적이며 확고한 통일관이 서 있어야 주변국으로부터 대한민국은 대한제국과 다르다는 인식이 생긴다. 이스라엘은 2,000년 동안 나라가 없었지만, 어느 누구도 이들을 노예민족이라고 업신여기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스라엘백성들은 팔레스타인에 자신의 조국을 세우고, 위협하는 주변국가들에 대해 적극적이며 진취적으로 그리고 폭력적으로 전쟁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1895년(고종 32)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가 주동이 되어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시해하고 일본세력 강화를 획책한 정변, 곧 을미사변(乙未事變)이후 친일내각에 포위되어 독살의 공포 속에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고종은 일본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1895년 2월 11일(고종 32년) 러시아공관(아관)으로 처소를 옮기는 조치(파천)를 감행한다. 이것을 ‘아관파천’이라고 한다. 고종은 독립협회를 비롯해서 조선민중들의 요구를 수용하여 경복궁으로 돌아와, 청나라처럼 황제즉위식을 갖고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연호를 ‘광무’(光武: 문보다 무를 빛냄)로 한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광무'다. 고종도 대한제국말에 '무'의 중요성을 깨달은 것이다. '펜이 무보다 강한 것'이라는 속담은 거짓된 것이고 '무덕(武德)이 성리학의 덕보다 강하다'는 사실이 진리임을 뼈저리게 체감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헬라어 Άριστοτέλης, 라틴어, 헬라어, 독어 Aristoteles, 영어 Aristotle; B. C. 384-322)는 ‘니코마코스 윤리학’(헬라어 Ethika Nikomacheia, 영어 Nichomachean Ethics)에서 전장에서의 용기를 ‘가장 숭고한 용기’로 이해하면서 전사(戰死)를 ‘숭고한 죽음’으로 본다(3:5~9).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 106-43 B. C)도 의무론(De Officiis)에서 적에 대한 관용과 의로운 태도 등을 촉구하면서도 “생존과 평화를 위해서라도 야만족과의 전쟁을 해야 한다”고 못 박는다(1:34~41).

 

    전쟁을 두려워하는 민족은 노예민족이요 노예국가다. 대한민국국민의 혁명적인 성격개조가 일어나야 한다. 용기있는 백성이 되어야 한다. 전쟁을 감행하는데 두려워하지 않으면 자유국민이요, 전쟁을 두려워하면 노예국민이다. 전쟁을 회피하거나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지유를 위해서는 성웅 이순신제독이나 안중근님처럼 또는 유관순열사처럼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한다. 지금은 평화의 시대인 듯하지만, 인간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부국강병을 가속화시켜야 한다.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는 그리스도교 구약성서 요엘4장 1-11절도 국방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1보라, 내가 유다와 예루살렘의 운명을 되돌려줄 날, 2모든 나라들을 여호사밧 골짜기로 불러모으고 그리로 끌고 내려가 다스리리라. 나의 유산, 나의 백성 이스라엘을 뭇 민족 가운데 흩어버리고 그 땅을 나누어가졌는데 어찌 그냥 두랴. 3내 백성은 제비뽑아서 소년들은 화대로 팔아먹고 소녀들은 술값으로 팔아먹었다. 4띠로와 시돈의 인간들아, 전 불레셋 지역에 사는 자들아, 너희는 나에게 어떻게 하려는 것이냐? 너희는 나에게 무슨 보복이라도 하려는 것이냐? 너희가 나에게 보복하려고 달려든다면, 내 편에서 지체 없이 당장 너희에게 보복하리라. 5너희는 은과 금, 그 밖에 귀한 보물들을 나에게서 빼앗아다가 너희 신전에 갖다두었다. 6너희는 유다 백성과 예루살렘 성민들을 그리스인들에게 팔아먹었고, 국경 너머 멀리로 끌어갔다. 7너희는 내 백성은 팔아먹었지만, 내가 이제 내 백성을 거기에서 불러낼 것이다. 너희가 내 백성을 다루었듯이, 나도 너희를 다루리라. 8너희는 너희 아들 딸을 유다인에게 팔게 되리라. 유다인들은 그들을 스바인들에게 팔아 넘길 것이다. 야훼께서 하신 말씀이시다. 9너희는 뭇 민족을 불러 전쟁을 선포하여라. 장사들을 불러모으고 군인들을 총동원하여 쳐 올라오너라. 10보습을 쳐서 칼을 만들고 낫을 쳐서 창을 만들어라. 나약한 자들까지 '나는 용사다!' 하고 외쳐라. 11그리고 빨리 오너라. 사방에 있는 민족들은 모두 그리로 모여라. 야훼여, 당신의 용사들을 보내주소서."(공동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