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와 정의의 나라/역사 이야기

열린사상과 닫힌사상에서 본 대한제국쇠망

아우구스티누스 2010. 9. 14. 18:52

      20세기를 통째로 살다 간 오스트리아 태생의 영국의 과학 철학자 Karl Raimund Popper(1902-1994)와 프랑스의 생철학자 베르그송(Henri-Louis Bergson 1859-1941)의 ‘닫힌사회’(morale ferm'ee)와 ‘열린사회’(morale ouverte), ‘열린도덕’과 ‘닫힌도덕’의 사상에서 그 용어를 차용하여, 열린 사상과 닫힌 사상에서 대한제국쇠망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로마가톨릭교회는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2세기의 그리스 수학자, 천문학자, 지리학자, 천동설 주창자인 프톨레마이오스(라틴어 Claudius Ptolemaeus)의 우주관에 입각하여 집필한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or Thomas d'Aquino 1225-1274)의‘신학대전’(신학총론 Summa Theologia)을 가톨릭교회의 공식학설로 인정했다. 로마교회는 아퀴나스신학사상에 근거하여 중세봉건사회구조를 모방하여 교회제도, 곧 성직자중심의 교회관을 수립하여, 교회통일을 강조했다.

 

      교회통일을 위해 성서의 자유로운 해석을 금지하였음은 물론 라틴어성서인 불가타(라틴어 Versio Latina Vulgata, 영어 Vulgate)만을 인정했다. 그런데 라틴어를 구사하는 사람은 소수의 성직자들뿐이었고, 사제들조차 불가타 성서를 해독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라틴어에 대해 무지한 민중을 위해 성화나 아이콘을 통해 성서의 내용을 알기 쉽게 했다. 조선왕조에서도 이런 경향이 있었다. 68세의 퇴계이황(1501-1570)은 17세의 선조(1552-1608, 재위 1567-1608)가 성리학을 쉽게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 곧 중국의 요임금과 순임금과 공자와 같은 성인이 되도록 하기위해, 성리학내용을 열개의 그림으로 나타낸 책인 성학십도(聖學十圖)를 바쳤다.

 

     로마가톨릭교회는 성서의 다양한 해석을 허용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교황은 로마황제권력을 제압하기도 하고 제압당하기도 하며 합체되어 갔다. 이것이 정통사상으로 발전되어갔고, 다른 사상은 허용되지 않았다. 단일한 사상에서는 자유의 기운이 생기지 않고, 자유의 기풍은 오로지 다사쟁론(多思爭論)에서만 존재한다. 여러 가지 가치가 다양하게 분화해서 서로 경합하는데서 생기는 과정에서 나오는 역동적인 것이 안정이라면, 그렇지 않는 것은 정체(停滯 stagnation)를 의미한다. 로마가톨릭교회는 정체되었다. 이런 현상은 21세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서유럽에서 가톨릭장녀인 프랑스를 제외하고 선진국으로 존재하는 나라가 있는가? 가톨릭이 국교인 오스트리아는 명목상 선진국으로 명성만 있지, 그 내용은 빈약하다. 옛날 영광을 누린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의 현 위치는 어떠한가? 그리고 그들의 식민지지배를 받았던 남미는 어떠한가? 뿐만 아니라 아시아에서의 가톨릭의 나라로 여겨지는 필리핀의 현 위상은 어떠한가?

 

     정체는 쇠망의 길을 걷는다. 그 쇠망이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의 종교개혁으로 이어졌다. 루터의 독일어 성서번역(1534)으로 말미암아 모든 나라마다 자국 언어로 성서번역이 이루어졌다. 이것은 금속활자를 발명해 인쇄술을 혁신시킨 요하네스 구텐베르크(Johannes Gutenberg, 1397-1468)의구텐베르크 성서’(또는 42행성서 1450)의 출판으로 대중에게 성서보급이 촉진되었다. 더욱이 다양한 성서읽기는 획일적인 성서해석을 해온 로마가톨릭의 그릇된 가르침이 밝혀졌다. 교황이나 고위직 성직자에게 의존해오던 성서읽기, 그들에게 좌지우지(左之右之)되던 구원은 문명이 진보되지 않았던 시절, 문맹자가 많았던 시기, 사람들의 조우가 어려웠던 시절에는 적합했지만, 21세기처럼 인터넷의 혁명으로 전 세계가 하나가 된 시대에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성령은 자유의 영이시기 때문에 사상의 자유토론이 필요하다.

 

    자유 가운데에서의 통일은 정체가 아니라 안정을 의미한다. 프로테스탄트의 자유원리는 각국을 번영의 길을 이끌고 있다. 전 세계의 빅브라더로 자처하는 미국, 19세기의 ‘팍스 브리타니카’(Pax Britannica)의 영광의 시대를 연 영국, 루터교를 국교로 하고 있는 북유럽(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 칼뱅(불어 Jean Calvin, 라틴어 Joannes Calvinus, 영어 John Calvin 1509-1564)이 통치하여 다스렸던 스위스, 네덜란드, 아시아의 대한민국, 이들 나라들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이들은 선진국이다.

 

   그러면 대한제국에 대해서 살펴보자. 조선왕조는 성리학(性理學) 위에 세워진 나라다.

 

   조선왕조의 성리학은 완전무결한 사상체계이자 정치이론이라고 주장하니, 다른 학문이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 조선후기 노론의 영수, 주자(朱子 1130-1200)지상주의자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과 주자상대주의자 남인 백호(白湖) 윤휴(尹鑴 1617-1680)와의 송대의 유학자 주자해석에 대한 토론은 이런 배경을 제공해준다.

 

   윤휴는 종래의 주자의 해석방법을 배격하고 ‘중용’(中庸), ‘대학’(大學), ‘효경’(孝經) 등 경전을 독자적으로 해석하여 장구(章句)와 주(註)를 수정, 당시 학계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반면에 송시열은 안질과 각질도 주자가 앓던 병이라 좋아했고, 약혼한 손녀가 죽는 것도 주자와 같다고 할 정도였다고 여길 정도로 주자절대주의자였다. 송자대전(宋子大全)연보는 이렇게 기술되어 있다.“윤휴가 중용주를 고치자 송시열이 가서 엄히 책망하니, 윤휴가 ‘경전의 오묘한 뜻을 주자만이 알고 어찌 우리들은 모른다 말이야‘라고 말하므로 송시열은 노하여 돌아왔다. 또 편지로 그는 책망하여 뉘우치기를 바랐으나 윤휴가 끝내 승복하지 않았으므로 송시열은 드디어 그를 끊어버렸다.”

 

   송시열에게는 사서(四書)자체보다는 사서에 대한 주자의 해석이 더 중요했다. 주자의 해석을 윤휴가 개작한 것을 죄사할 수 없었다. 송시열은 이렇게 주장한다. “하늘이 공자를 이어 주자를 냈음은 진실로 만세의 도통(道統)을 위한 것이다. 주자 이후로는 일리만세도통‘一理萬世道統’‘밝혀지지 않은 것이 없고, 일서一書도 명확해지지 않은 것이 없는데, 윤휴가 감히 자신의 견해를 내세워 가슴 속의 억지를 늘어놓으니, 윤휴는 진실로 사문난적(斯文亂賊)이다’

 

   송시열은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1482-1519)의 지치주의(至治主義)의 이념,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의 변통론(變通論), 사계(沙溪)김장생(金長生 1548~1631)의 예학(禮學) 등 기호학파(畿湖學派)의 학통을 충실히 계승하여,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의 이원론적(二元論的)인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배격하고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지지하였고, 사단칠정(四端七情)이 모두 이(理)라 하여 일원론적(一元論的) 사상을 발전시켰으며 예론(禮論)에도 밝았다. 송시열은 이황이나 이이는 비판할 수 있어도 주희는 비판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철저한 모화사상(慕華思想)이다.

 

   이처럼 송시열은 다른 사상은 말할 것도 없이 주자학에 대한 해석에서 남인의 사상도 철저하게 배격했다. 이런 사상은 조선왕조의 통치를 위한 것이지 조선민중을 위한 것이 아니다.

 

    조선왕조는 성리학 이외에는 아무런 사상을 인정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중국이 청나라에 의해 통치될 때에는 청나라를 오랑케나라라고 깔보며 스스로 소중화국임을 자처했다. 오직 중국과만 외교관계를 가졌는데, 그나마 청나라마저 멀리 하니 닫힌 사상 속에 갇혀있는 은둔의 나라가 되어 세계의 정세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도무지 알 수 없음은 물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실제로 유학이 지향하는 사상은 주나라왕정체제이다. 말이 주나라이지,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로 복귀다. 문명이 전혀 발달되지 않는 촌락을 연상하면 된다. 미래의 발전된 문명화된 나라, 문화의 나라, 개방된 나라, 전 세계가 서로 교통하는 나라가 아니라 그저 순박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어 통치자가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과거지향적인 촌락이다. 성리학은 과거지향의 학문, 진보를 막는 폐쇄된 학문, 과학하고는 전혀 관계없는 미개의 학문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이런 입장에서 보면 조선왕조는 21세기 북한의 김정일 체제와 흡사하다고 할 수 있다. 북한은 중국을 비롯해 소수의 공산주의 나라와 외교관계를 갖고, 이전의 소련이나 중국의 공산주의 노선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김씨 왕정체제를 가진 신석기(구석기)시대의 나라 또는 고대국가라고 할 수 있다. 세계와 은둔하면 은둔할수록 더 좋아하는 비정상적인 나라다. 이는 세계의 관심으로부터 벗어나면 김정일위원장은 자의적(恣意的)으로 통치할 수 있고, 자신의 아들을 후계자로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는 또한 미국 펜실베이니아에 정착한 ’아미쉬‘(Amish)집단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아미쉬‘파는 재침례파(Anabaptists)로서 정통 그리스도교에 속하지 않는다. ’아미쉬‘파는 네덜란드 출신 메노 시몬스(Menno Simons 1496-1511)의 평화주의를 지지하며 형성한 ’메노나이트‘(Mennonite)의 분파다. 메노나이트와 아미시파의 분열의 원인은 단추였다. 단추는 끈보다 편리하기 때문에 장식품으로 사용해도 된다는 의견과 크리스천의 경건성을 해치는 요망한 단추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의 대립이었다. 그것이 결국 교파분열로 이어졌다. 복음의 본질에서 한참 멀어진 소모적 논쟁으로 분열되었다.‘아미쉬‘파는 스위스의 종교개혁가인 암만(Jacob Ammann)에 의해서 창립되었는데, 교회의 순결을 이데올로기화하여 세상의 문명과 문화를 등지며 살고 있다. 비폭력, 무저항, 평화주의를 주장하여 어떤 명분의 전쟁도 반대하며 군복무를 거부한다. 이런 사실은 조선인의 사상과 성격과 부합한다고 생각된다.

 

    그러면 일본은 어떠한가가?

 

    1488년 포르투갈의 항해자 바르톨로메우 디아스(Bartolomeu Dias 1450?-1500)의 희망봉(喜 또는 希望峰 Cape of Good Hope, 현재의 Capetown)발견1492년 이탈리아 출신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 1451-1506.5.21)의 항해로 생긴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세력분야 확정을 조정하기 위하여 1494년 교황 알렉산드로 6세(Alexander VI 1431-1503, 재위 1492-1503)의 토르데시야스조약(Treaty of Tordesillas) ,곧 아프리카 서쪽 끝 카보베르데섬으로부터 1800Km까지 선을 그어(대서양에 세로로 선을 금) 동쪽(브라질, 한국, 일본, 중국)은 포르투갈, 서쪽은 에스파냐의 식민지로 인정했다. 그래서 1540년 프로테스탄트의 종교개혁을 제거하고 교황권위에 순복하는 반동종교개혁(Counter Reformation)으로 이그나티우스(이냐시오) 데 로욜라(Ignatius de Loyola)와 함께 예수회(Jesuits, The Society of Jesus)를 창설한 프란시스코 사비에르(Francisco Xavier)가 1542년 포교활동을 위해 인도를 거쳐 일본(1549년)으로 건너왔다.

 

    일본은 16세기에 세계 최강의 에스파냐와 포르투갈로부터 선진기술과 문화를 배웠다. 이것을 남만학(南蠻學) 또는 만학(蠻學)이라고 한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 선봉장이었던 무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1558-1600)는 대표적인 천주교도 영주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는 그의 사위인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와 함께 1만 8,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제1진으로 조선으로 쳐들어왔고, 1597년 정유재란 때 다시 조선으로 쳐들어온 인물이다. 그것도 외국신부의 축복기도를 받고서 말이다. 당대의 최신식 조총을 가지고 시대에 뒤떨어진 칼과 활로 무장한 반문명의 군사력을 갖춘 조선을 쳐들어왔다. 일본의 조총의 위력 앞에서 조선인들은 혼비백산했다. 조선의 성웅 이순신제독이 없었다면 조선의 운명은 어찌되었을까?

           

    에도(현재 도쿄)시대(도쿠가와 막부)에 신흥세력으로 부상한 상인층을 중심으로 주로 (에스파냐와 포르투칼과 달리 선교활동을 하지 않았던) 네덜란드와의 교역을 통해서 그리고 1609년 네덜란드 연합동인도회사와 공식적 무역통상 약정을 맺고 서양의 의학과 과학지식을 받아들였다. 이를 난학(蘭學)이라 하고, 서양의 기술서적을 연구하는 이들을 난학자라고 한다. 일본의 근대화에 대한 각성은 이들 난학자들에 의해 싹트기 시작한다. 난학은 일본 근대화의 초석을 놓는 학문으로 발전한다. 스기타 겐파쿠, 마에노 료타쿠 등이 네덜란드 의학서를 번역하고 이를 바탕으로 한 ‘해체신서’(해부학서)를 내기도 했다. 난학은 서양의 과학문물을 받아들이는 데 거부감을 줄였을 뿐 아니라, 한편으로 서양의 과학문물을 받아들이는 창구가 됐다. 이후 일본은 급격히 서구문물을 받아들였고, 이에 힘입어 1868년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이라는 새 정치체제를 완비하고 오늘날의 형태로 만드는 기틀을 잡았다. 그 당시 네덜란드는 세계 최강의 나라였다.

 

    1853년 7월 8일 미국 13대 대통령 필모아(1850~1853재임)의 친서를 휴대한 미국동인도함대 사령관 페리해군제독이 ‘구로후네’(흑선 黑船) 4척을 이끌고 나타나 日本의 개항을 요구한다. 막부관리들이 거부하자 페리는 "국서를 받아드리지 않으면 군대를 이끌고 에도로 가서 쇼군(將軍)을 직접 만나겠다."고 강경한 태도를 보이자 막부 관리는 이에 놀라 국서를 받는다. 페리는 내년 초 다시 올 때까지 회답을 바란다고 말하고 떠난다. 1년의 기한을 주고 돌아간 페리 제독은 약속대로 1년 뒤인 1854년 이번에는 8척의 '구로후네'를 거느리고 왔다. 미일수호조약(가나가와)이 체결된다. 페리제독이 일본에 개항을 요구했을 당시 네덜란드어 통역을 사용했다고 한다. 그래서 당시 사용한 문서를 보면 페리 제독의 이름이 네덜란드 식 발음인 '페르리(한자로는 피리彼理)'로 표기되었다고 한다. 1854년 미일 화친조약에 이어 1858년에는 미국을 비롯하여 영국, 러시아, 네덜란드, 프랑스와 통상조약을 체결한다.

 

   이로 인해 막부(幕府)는 무너졌지만 일본이라는 국가의 입장에선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근대화에 성공하는 메이지 유신의 출발이 된다. 이것이 양학(洋學) 또는 서학(西學)의 시작이다. 미일수호조약으로 메이지시대 일본 근대화의 기수로 ‘일본의 벤저민 프랭클린’이라고 불리는 후쿠자와 유키치(1835-1901)를 비롯하여 11명의 개화파인사들이 10년간이나 미국을 유학한다. 그리고 견유사라는 사절단이 유럽을 돌아다니면서 각 나라의 좋은 점들을 받아들인다. 프랑스로부터 문화를, 독일(당시엔 프로이센)로부터 정치 사회 군사제도를 배운다.

 

   1868년 메이지유신(明治維新)으로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가 성립하였고, 정치적으로는 입헌정치가 개시되었으며, 사회문화적으로는 근대화가 추진되었다. 또, 국제적으로는 제국주의 국가가 되어 천황제적 절대주의를 국가구조의 전분야에 실현시키게 되었다. 유신을 이룩한 일본은 미국과 영국의 협조와 지시에 힘입어, 1894년 청일전쟁을 일으킨다. 청일전쟁의 승리를 통해 대국이라고 섬겼던 청나라의 왜소함을 깨닫고 일본은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깨닫을며 아시아전체를 미개국으로 폄훼한다. 1904년의 러일전쟁의 승리를 통해 백인들도 별 볼 일 없는 종자라는 것을 깨닫고 태평양전쟁으로 확전한다.

 

    조선왕조는 열강의 반식민지상태였던 중국의 청나라와 단일사상인 비실용적이며 폐쇄적인 도덕과 윤리만 강조하는 성리학사상에만 의존해서 쇠망하는데 반해, 일본은 당대의 최고의 강국, 곧 에스파냐, 포루트칼,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으로부터 열린사상, 곧 과학기술과 사회진화론과 우생학 등을 배워 성리학이 과거지향적인 비문명화의 학문, 곧 미개학문이라는 것을 깨닫고 서양열강의 제국주의 노선을 그대로 모방해서 성공한 다. 특히 미국이라는 훌륭한 스승을 만난 것이 일본의 행운이었다. 국제정세에 몽매한 조선왕조는 스승인 미국의 가르침으로 국제정세에 눈 뜬 일본의 노예국가로 전략한 것이다. 열린사상이 닫힌 사상을 잡아먹은 것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대한제국과 다르다. 대한민국은 최첨단 과학기술과 인터넷시대를 선도하면서 다양한 당대의 세계최고의 사상을 수용하고 펼치며, 그것들을 위한 자유로운 토론의 장이 (지나치게 우려할 정도로) 많다. 지난 20세기의 대한제국의 상황과 비교해보면 상전벽해(桑田碧海 V\violent changes in nature)를 체감한다. 대한민국은 개방의 사회요 열린 사회가 되었다. 이젠 대한민국 어느 곳에서나 전세계의 정보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 만반(萬般)의 준비를 갖출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세계 모든 국가와 단번에 교통하고 소통하며 한반도라는 물리적인 지리를 뛰어넘어 전 세계를 아우르고 있다. 이민이나 유학 또는 경제활동이나 외교활동 등으로 전 세계에 한국인이 거주하고 있다. 이전처럼 세계화에 눈을 뜨지 못했던 몽매로부터 벗어나 세계를 대한민국가족으로 품고 있다. 대한민국이 세계요 세계가 곧 대한민국이 된 것이다. 더욱 고무적인 일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입에서 한국을 찬탄하는 소리가 그치질 않는다는 사실이다. 세계최강의 미국이 대한민국을 인정했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축복이다. 그래서 대한민국의 번영과 부흥은 영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