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는 대한제국병탄시 왜 자국과 관련된 한반도의 상고사와 고대사를 비롯한 모든 문서를 철저하게 잔혹하게 불태우고 김수로를 시조로 모시는 김해김씨의 족보를 압수했는가? 미국은 영국에서 박해받은 청교도들이 세운나라이지만, 미영의 두 나라의 공조로 세계리더역할 하고 있다. 그런데 백제의 후예 일본은 쪼잔한 방법으로 문제를 푼다. 이들은 경제대국답지 않게 한반도의 백제의 역사를 자신들의 고대사로 둔갑해 날조한다.
그러면 그 배경에 대해서 상고해보자.
첫째, 자학사관(自虐史觀 view of history of self-torment)으로부터의 탈피다. 일본은 신라에서 패배해 망명한 백제계로 이루어진 나라임을 오랜 세월동안 잊지 않고, 일본의 우월감을 부각시키고 대한제국의 열등감을 강조하기 위해 중국의 천황을 모방해 일왕제(천황제)를 가공해 만들어낸다. 일왕에 조공할 국가가 필요한데, 그 국가를 대한제국으로 지목해 식민지화하고 백제멸망의 원수를 갚는다.
19세기 중엽 미국의 전함이 두려워 개항했던 일본은 영국에서 배를 사들이고 조선기술을 배우고, 미영의 전폭적인 지지로 그 배를 가지고 청일전쟁, 그리고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여 조선을 병탄한다. 그 다음에는 중국 대륙을 침략하고, 동남아 일대와 미국 하와이 진주만을 공격한다. 이런 것은 대한민국이 경제적으로 일본을 앞지르지 않으면 선린(善隣 neighbourly friendship)관계는 영원히 이룰 수 없음을 보여준다.
둘째, 일본의 후쿠자와 유기치(福澤諭吉, ふくざわゆきち, 1835-1901)의 아시아를 벗어나 유럽에 편입하자는 ‘다쓰아뉴오’(脫亞入歐)를 실현하기 위함이다.
미국 인류학계의 대표적인 여성학자 루스 베네딕트(Ruth Benedict 1887-1948)는 자신의 저서‘국화와 칼’(The Chrysanthemum and the Sword, 1946)에서 ‘국화’는 ‘다테마에’(建前), ‘칼’은 ‘혼네’(本音)라고 기술한다. 그러면서 죄의 문화’(guilt culture)와‘수치의 문화’(shame culture)로 구분하며, 일본은 수치의 문화에 속해 공개적으로 사과를 하지 않는다고 아름답게 표현했는데, 이런 분류법은 잘 못 된 것이다. 오히려 일본국민은 아시아인과는 달리 특수하고 우월한 민족, 앵글로섹슨족에 가까운 선진국형 사람이라는 인상을 세계인에게 심어주어 호감도를 높이고 있다. 중상과 모략에 뛰어나고 목적달성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소음인 혈액형 A형으로 대부분 구성된 일본인은 강자에게는 약하고 약자에게는 한없이 강한 인간 말종이다.
그래서 일본은‘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俯說)이라는 이데올로기를 날조해 한반도를 침략해 대한제국을 병탄병합한다. 임나일본부설폐기는 한반도 침략 정당화 핵심논리 스스로 철회이며,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조선합병때 과거 역사를 회복한다는 명분의 철회를 의미한다. 그래서 일본은 삼척동자도 다 날조된 것이라고 여기는 ‘임나일본부설’을 지금도 고집하는데, 그 근거로 보통 네 가지를 든다.
I. 720년 편찬한 ‘니혼슈키’(日本書紀)다.
진구황후(진구코고 神功皇后 170-270)가 왜군과 함께 369년 한반도에 건너와 7국(國)과 4읍(邑)을 점령하였고, 그 뒤 ‘임나’(任那)에 일본부가 설치되었으며, 562년 신라에 의해 멸망되었다고 한다. 곧 일본은 369년부터 562년까지 약 200년간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으며 중심기관이 가야(伽倻)에 설치한‘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라는 것이다. 임나任那)는 가야(伽倻)를 의미하는데, ‘가야일본부‘라고 하지 않는다. 벌써 사기(詐欺)의 냄새가 짙게 풍겨온다.
진구황후는 제14대 쥬아이(仲哀) 천황의 비(妃)이고 제15대 오진(應神)일왕의 어머니다. 그녀는 31세에서 100세까지 섭정했는데, 여자의 몸으로 무려 70여년을 섭정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엉뚱하게 태자(오진 일왕)가 고희의 나이(69세)에 이르러서 즉위하는 볼썽사나운 일이 벌어진다. 그리고 제15대 오진(應神)일왕(천황)과 제16대 닌토쿠(仁德) 일왕(천황)부자가 세운 야마토(大和)왕조는 구다라국(百濟國)출신이 최초로 세운 왜(倭)의 최초의 통일 고대국가다. 이노우에 미쓰싸다(井上光貞) 교수도 ‘오우천황은 4세기 중엽 이후 일본의 정복자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상한 일은 진구황후의 업적은 백제 제13대 근초고왕(近肖古王 ?-375 재위 340-375)의 업적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기록상으로 본다면, 이 시기 즉 4세기에 고구려와 신라, 가야를 모두 경략한 왕은 근초고왕 이외에는 없다. 이것은 야마토(大和) 왕조를 연 사람은 근초고왕임을 보여준다.
근초고왕은 백제 역사상 가장 넓은 땅을 차지했으며, 백제가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도록 만든 위대한 왕으로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에 비길 만한 정복군주로 평가받고 있다. 도읍을 한산(지금의 서울)으로 옮겨 한성이라 불렀다. 근초고왕의 영토확장의 업적을 보자.
첫째, 마한정벌
369년 익산으로 옮긴 마한을 정벌하여 전라남도 해안까지 영토를 확장하였다.
둘째, 가야정벌
가야 7국을 병합하여 가야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하였다. 당시 가야정복을 담당한 백제장군은 목라근자였는데 그 후손이 왜로 건너가자 ‘일본서기’에서는 마치 왜가 가야를 정벌하여 ‘임나일본부’를 설치한 것처럼 잘못 기술하게 되었다.
셋째, 고구려정벌
북쪽으로는 평양 근처까지 진격하여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
이처럼 일본은 근초고왕의 업적을 진구황후의 업적으로 위장하고, 중국의 삼국지 위지왜인전(魏志倭人傳)에 기록된 히미코(卑彌呼 비미호 卑彌呼 175?-248)가 진구황후으로 둔갑시켜 실존인물인 것처럼 사기 친다. 히미코는 삼국사기 신라본기 아달라 이사금조에 등장하는 야마타이코쿠의 여왕이다. 신라본기에는 왜의 여왕이라고만 기록되어 있다. “그 나라는 본래 남자를 왕으로 삼았는데, 70~80년을 지나 왜국이 어지러워져서 몇 해 동안이나 서로 싸우다가 이윽고 함께 한 여자를 왕으로 삼으니, 이름이 히미코이다.”(삼국지, 위지왜인전).무엇보다도 먼저 히미코는 진구황후와는 달리 정복군주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그리고 이 시기 한반도는 백제의 제8대 고이왕(古爾王, ?~286, 재위 234-286)의 시대에 해당된다.
‘니혼슈키’(日本書紀)에 의하면 진구황후 49년에 진구황후가 백제 명장 모쿠라곤시(목라근자 木羅斤資)와 왜에서 온 장군 아라다와께(荒田別) 등을 보내 탁순국(卓淳國: 대구?)에 모여 신라를 격파한 후, 남가라(南加羅: 김해), 비자현(比自炫: 창녕), 녹국(㖨國: 경산), 안라(安羅: 함안), 다라(多羅: 합천), 탁순(卓淳: 대구?), 가라(加羅) 등의 7개국을 평정하고 군사를 돌려 서쪽으로 고해진(古奚津: 강진?)과 남만(南蠻)인 치미다례(忱彌多禮: 제주도)를 정벌하여 백제의 제 13대 근초고왕(近肖古王)의 맏아들인 제14대 근구수왕(近仇首王 ?~384, 재위 375-384)을 도왔다고 한다. 그리고 비리(比利 : 완산), 벽중(辟中 : 김제) 등의 4읍도 이에 항복하였고 한다. 그리고 이 땅들을 백제왕에게 주었다고 한다.
‘니혼슈키’(日本書紀)의 진구황후에 대한 기록은 날조의 냄새가 짙게 배어있다.
첫째, 진구황후 9년에 이미 정복하여 복속한 신라를 49년에 왜 다시 또 정벌했는지 의아스럽다.
둘째, 야마토지역에서 어떻게 제주도를 남만으로 부를 수 있는 가다.
셋째, 열도의 나라에서 대군(大軍)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려면 뛰어난 항해술이 필요하고, 대군을 동원할 행정체계가 갖추어야 하는데, 그것에 대한 기록은 없고, 설령 기록이 있다 하더라도 그 시대의 열도상황으로 어려운 일이다.
넷째, 어렵게 이긴 전쟁의 결과물을 고스란히 남의 나라(백제)에 조건 없이 넘겨주었다는 사실은 쓴 웃음만 자아낸다.
다섯째, 진구황후가 해산달에 아이를 밴 여자의 몸으로 돌을 집어 허리에 차고 아이가 나오지 않도록 했다’는 기록은 21세기 최첨단 의학도 해결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한반도를 정벌하기도 하였다는 의미인데 비논리적이다.
여섯째, 임나일본부란 명칭은 6세기 전반에 해당하는 한반도의 기록에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일곱째,‘임나’라고 부르는 곳은 고대 한반도의 가야 지역을 해당하는데, 일제가 수십 년 동안 그 지역을 조사 발굴했지만, 왜의 한반도에 지배에 대한 유물이나 유적이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다.
이것은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파렴치한 소음인 혈액형 A형으로 대부분 구성된 일본인의 기질을 보여준다. 스에마쓰 야스카즈는 ‘임나흥망사’(1949년)를 씀으로 진구황후의 임나일본부설의 골격을 완성한다. 특히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1830-1859)은 진구황후를 벽장 속의 신화에서 현실세계로 끌어내어,‘정한론’(征韓論)을 외친다.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진구황후를 실재의 인물로 추앙했으나, 자신들의 목적을 성취하자, 세계대전 이후 역사적 사실성을 부정하며 달리 해석한다. 임나일본부설폐기는 한반도 침략 정당화 핵심논리 스스로 철회이며,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대한제국병참 때 과거 역사를 회복한다는 명분의 철회를 의미하기 때문에 달리 해석한다. 상황에 따라 잘 변신하는 것은 혈액형 A형 소음인의 특징이다.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변형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첫째,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의‘기마민족 정복왕조설’즉 ‘기마민족설’인데, 이 설도 간교의 극치를 보여준다. 북방 부여계 기마민족에 의해 한반도 남부에 탄생한 한-왜 연합세력이 일본에 진출해 고대왕권을 수립한 이후에도 원래의 근거지였던 한반도 남부 지역에서 영향력을 유지했다고 한다. 이것은 일본이 한반도에 식민지를 건설할 정도로 자국의 고대사회가 발전하였다는 논리다. 결국 에가미의 ‘기마민족설’은 일제 식민사관이 제기한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해주는 학설에 불과하다.
둘째, 일본이 궁여지책(窮餘之策 the last resort)으로 내놓은 처방이 외교사절설(外交使節說)이다. 선사시대부터 가야지역과 일본열도의 활발한 교류를 들어, 가야지역에 일부의 왜인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하게 되었고 이러한 왜인들을 통제하는 행정기관이 임나일본부였다는 '가야의 왜(倭)'설이나 왜의 식민지 지배기관이 아니라 가야에 파견된 왜의 사신들이라는 것이다. 얼마나 쪼잔한 변명인가?
미국의 동양사학자 존 코벨(1910-1996)박사는 자신의 저서 ‘부여기마민족과 倭’(김유경편역)에서 ‘일본고대사를 배우려고 일본에 가서 공부를 했을 때, 그것이 바로 한국 고대사인 것을 깨닫고 한국에 다시 유학 갈 수 밖에 없었다.”고 고백한다. 일본서기는 사서(史書)가 아니라 사서(詐書)다.
II.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의 비문을 들 수 있다.
제20대 장수왕(長壽王394-491 재위 413-491)은 414년 제19대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374-412 재위 391-412)의 큰 아들로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현(集安縣) 퉁거우(通溝)에 있는 고구려 제19대 광개토대왕릉비(廣開土大王陵碑)를 세운다. 높이 6.39m의 자연 화강암으로 된 거대한 비석이다. 1,755자의 전한(前漢) 예서(隸書)의 서풍으로 기록되어 있다.
광개토대왕비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부분은 둘째 부분의 신묘년(영락 6년, 395년)기사(辛卯年記事)에 실린 다음과 같은 부분이다.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 渡海破百殘□□□羅 以爲臣民’ □□□은 훼손된 것이다. 고작 32자 그것도 세 글자는 보이지도 않는데, 한일은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
일본 육군참모본부는 일본의 역사에 유리하도록 전후 3회에 걸쳐 비에 석회칠을 하여 비문을 가공한다. 광개토대왕릉비문 조작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 사기를 완벽하게 하기위해서 1915년경에는 중국으로부터 비를 사들여 일본으로 가져가고자 노력하기도 한다. 너무 무거워 실패했다고 한다. 일본은 백잔 다음에 3자가 빠져있는데 이를 가야와 신라가 들어간다고 보고,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임나, 신라 등을 격파하고 신민(臣民)으로 삼았다"고 해석하여, 4세기 후반 진구황후의 한반도 남부지역 정벌을 입증해주는 증거로 활용하고, 이후에는 임나일본부설로 이어진다.
그런데 6세기 중엽에는 아직 일본이라는 국명이 존재하지 않았고, 뿐만 아니라 아들이 부왕의 업적을 칭송하기 만든 비에 수치스러운 부분을 기록할 사람은 없다. 원래비의 명칭은‘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비다. 이 말은 ‘널리 국토의 경계를 넓힌 평안한 좋은 태왕의 비’라는 뜻이다. 광개토왕이 국토의 경계를 넓혔다는 것은 일본의 역해석의 오류를 지적한다. 예를 들면, 장수왕 때 남한강유역을 차지하면서 세운비가 중원고구려비(中原高句麗碑)이고, 신라의 진흥왕때 한강유역을 확보하면서 세운 비가 단양적성비와 북한산비고, 신라가 대가야를 정복하면서 세운비가 창녕비이다. 이들 모두는 승리자의 위업과 명예를 기록한 것이다.
그리고 비문의 첫 부분에 기술된 다음과 같은 내용은 일제가 비문을 조작했음을 보여준다.“왕의 은택이 하늘까지 미쳤고, 위엄은 온 세상에 떨쳤다. 나쁜 무리를 쓸어 없애자 백성이 모두 생업에 힘쓰고 편안하게 살게 되었다. 나라는 부강하고 풍족해졌으며, 온갖 곡식이 가득 익었다. 그런데 하늘이 이 백성을 불쌍히 여기지 않았나 보다. 39세에 세상을 버리고 떠나시었다.”이것은 비문이 고구려의 국력이 최고조에 달 한 때, 자신감으로 가득 찬 사회분위기와 고양된 역사의식을 담았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한학자, 역사학자, 양명학 연구의 대가, 민족주의 역사학자인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 1893-?)는 위 기사의 주어를 ‘왜’(倭)가 아닌 '고구려'로 보고, "신묘년 이래 왜가 도래하자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 백잔을 치고 신라를 구원하여 신민으로 삼았다."로 해석한다. 이 해석이 현재 주류, 비주류를 가리지 않고 한국인 역사학자 대부분의 해석이다.
III. 칠지도(七支刀)
백제 13대 근초고왕(近肖古王 ?-375 재위 340-375)의 통치 때는 백제의 최전성기에 해당된다. 근초고왕은 왜왕에게 `칠지도`를 하사하였다. 칼에는 표면(앞면)에 35자, 이면(뒷면)에 27자로 총 62자의 금상감(금석문자료)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명문(銘文)의 해석을 둘러싸고 한일 역사학계에서는 서로 해석을 달리하고 있다.
근초고왕이 왜왕에게 선물 준 것을 일본은 백제왕이 진상 한 것으로 해석한다. 그런데 근초고왕은 진모진이라는 재봉사를 보내 오진일왕과 닌토쿠일왕 부자가 백제 옷을 입게 했다. 뿐만 아니라 아직기(阿直岐)와 왕인(와니 Wani 王仁)박사(博士)를 파견하여 일본에 보내어 ‘천자문’과 ‘논어’를 전해줌으로써 일본에 유학사상을 일으켰다. 이런 사실에서 보면 선진문물을 전한 백제왕이 후진국 왜왕에게 칠지도를 하사했다는 것은 삼척동자가 알고 있는데, 일본은 후진국 왜왕이 선진국 백제왕으로부터 조공을 받았다는 것이다. 백제계 일본이 신라계 후국인 대한민국에 갖고 있는 역사의 콤플렉스가 얼마나 심각한가를 알 수 있다.
IV. 중국 남북조 시대의 남조(南朝), 송(宋), 제(齊), 양(梁) 나라의 역사기록에 나오는 왜왕의 책봉기사다. 여기에는 왜국 왕부(유라쿠 천황으로 추정)가 478년 표를 보내 왜, 일본, 백제, 신라, 임나가라, 진한, 모한 등 7국 군사를 관장하는 안동대장군 왜국왕(倭百濟新羅任那秦韓慕韓 諸軍事倭國王)이란 작위를 요청하자이라는 관작(官爵)을 인정해줄 것을 요청하고, 송에서는 백제를 제외한 6국 군사를 관장하는 안동대장군이란 작위를 하사 내린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당시 중국 왕조가 내린 작위는 선심용이다. 즉 상대국과의 외교적 관례에 따라 신청자의 요구가 자국의 이익에 해가 되지 않는다면 인정하는 수준이다. 장군의 칭호도 왜왕은 고구려, 백제왕보다 항상 낮은 등급이다. 왜왕은 478년에 안동대장군이란 칭호를 받지만 백제왕은 420년에 그 보다 두 단계 높은 진동대장군을 고구려는 다시 두 단계 높은 정동대장군이란 칭호를 이미 받고 있었다.
이런 사실에서 우리는 일본이 가야계로 세워지고 백제계가 일왕이 되어 다스린 나라라는 사실이 1400여 년 동안 피맺힌 한으로 남아서 그 한을 철저히 파괴적인 방법으로 푼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일본은 창의적이지 못한 민족이라고 후쿠자와 유기치(福澤諭吉, ふくざわゆきち, 1835-1901)가 무수히 지적한 것처럼, 일본은 자국의 고대사를 백제사와 짜깁기해서 정교하게 살려낸 것이다. 한반도에서는 일제가 자신들에게 불리한 상고사와 고대사를 비롯한 사서를 불태워서 그 시대의 연구가 어려운 점이 있지만, 교통수단이 발달되지 않았던 그 시대에 왜국이 자국의 역사도 아닌데 한반도 보다 삼국에 대해 소상히 알고 있다는 점도 일본은 백제계의 후손임을 명약관화(明若觀火)하게 보여준다.
이런 일제를 배알도 줏대도 없는 태음인 한반도는 근대화의 아버지라고 칭한다. 정신 빠져도 한참 빠졌다. 그들에게 묻는다. 당신들 모국 일본으로 떠나라고. 우리는 김부식과 조선시대의 중화주의사대사관, 근대의 일제식민사관 그리고 우봉이씨 이완용의 후손과 노론자손들의 한반도식민지사관을 이태리타월로 때버기듯 깨끗이 벗겨내야 한다. 그래야 21세기의 대한민국 선진화가 이루어지고 세계를 주도해나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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