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와 정의의 나라/철학 이야기

권위(authority)와 권위주의(authoritarianism)

아우구스티누스 2011. 10. 12. 17:29

          권위(authority)와 권위주의(authoritarianism)

 

 

    내년에 우리는 지도자를 선택해야 한다. 주위를 살펴보면 분단의 한반도, 영토문제와 역사서술 등으로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중국과 일본, 공산주의의 원천지인 구소련의 후예인 러시아, 모두가 만만치 않는 상대들이다. 국내적으로는 수직선적인 명령형의 지도자가 아니라, 이해상충으로 말 많은 집단의 다양한 그물코를 조정할 줄 알며, 쌈질 잦은 국회를 국익과 국민사랑의 정치로 선도할 수 있음은 물론 동기윤리(Gesinnungsethik)와 책임윤리(Verantwortungsethik)를 갖춘 지도자가 등장할 때가 되었다.

 

    지도자에겐 '권위'(authority)가 붙는다. 그런데 그걸 어떻게 행사하느냐에 따라서 ‘권위’있는 지도자 아니면 '권위의'(authoritarianism) 지도자로 판명난다. 그렇다고 ‘권위’와 ‘권위주의’를 무 자르듯이 이분법논의로 규정할 수 없다. 강도의 차이지만 개발도상국뿐만 아니라 구미선진국과 한국에도 두 요소가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전적 정의를 한다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권위’는 합법적인 절차를 거쳐 정당성을 획득한 ‘권력’(power)으로 수평적인 관계에서 사람들로부터 신뢰를 얻어 자발적인 순종을 끌어내는 힘을 의미한다면,‘권위주의’는 수직적인 위계질서아래서 일방적이고 강제적으로 지배와 복종의 관계를 강요하는 것을 말한다. ‘권위’는 평등한 사회를 지향하며 서로간의 의사소통을 중요시하여 비판을 허용하는데 반해,‘권위주의’는 불평등한 신분제사회와 종적지배관계를 지향하며, 인습적인 가치에 완고하게 집착하고, 자신에 대한 비판에 대해 격렬하게 저항하며, 강한 자에겐 굴종하고 약자에겐 군림하는 자세를 취한다. 대개 권위주의자들은 실패하거나 좋지 못한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지기 보단 희생양을 만들거나 아랫사람이나 약자에게 전가한다. 권위주의의 한 형태로 전근대사회의 가부장제, 신정정치, 현대사회의 파시즘, 전체주의, 폐쇄적 민족주의 등을 들 수 있다.

 

    정치철학자 액톤경(Lord Acton)은 이렇게 말한다.“모든 권력은 부패하기 마련이고 절대적인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하기 마련이다.”(All power tends to corrupt and absolute power corrupts absolutely.) 물론 이 말은 교황의 절대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뉴턴(Isaac Newton, 1643 또는 1642-1727)의 운동법칙의 제2법칙은‘가속도법칙’이다. 일단 가속도가 붙으면 조절하기가 쉽지 않다. 권력도 마찬가지다. 이승만의 장기집권야욕은 박정희의 영구집권야망을 위한 유신체제로 이어지고 그의 의부 형제인 전두환과 노태우의 무단정치로 이어졌다. 그래서 노태우정부이후를 각각 ‘문민정부’, ‘국민정부’, ‘참여정부’등으로 부르고 있으며, 견제와 균형을 위한 시스템, 곧 삼권분립이 정상적으로 운용되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교사상에서 유래한다.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은 유대교의 '유일신론'(monotheism)이라기보다는‘삼위일체’(Trinitas)하느님이다. “성부, 성자와 성령은 삼위로 존재하지만 본질은 한 하느님”이시라는 것이다. 성부하느님 단독으로 섭리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자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하느님과 더불어 서로 회의하시며 역사를 주관하신다.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이 보여주시는 사회적인 관계유비(analogia relationis)가 21세기 지도자가 따라야 할 모형이다.

 

    칼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 에밀 뒤르켕(Emile Durkheim, 1858-1917)과 함께 현대 사회과학의 창시자로 평가되고 있음은 물론‘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의 정신’(Die Protestantische Ethik und der Geist des Kapitalismus 1905, The Protestant Ethic and the Spirit of Capitalism, tr. by Parson, T., New York: Charles Scribner's Sons. 1958)의 저자로 유명한 막스 베버(Max Weber, 1864-1920)는 '권위유형'(Types of Authority)을 집단 외적인 것으로 ‘카리스마적 권위’(charismatic authority)와 전근대사회의‘전통적 권위’(traditional authority), 집단 내적인 것으로 근대사회의‘합리적-법적 권위’(rational-legal authority)로 분류한다. 베버의 정치철학은 ‘신념윤리’와 ‘책임윤리’의 변증법적 결합이다, 그는 따라서 ‘신념윤리’와 ‘책임윤리’를 갖춘 카리스마적인 지도자와 그 리더쉽을 잘 발휘할 수 있도록 국민과 국가가 합법적으로 인정한‘정당’의 역할을 강조한다. 그런데 베버의 ‘권위유형’의 구분은 19세기말과 20세기 초 독일의 상황에서 나온 정치사상이라 한마디로 평가하면 구닥다리다. 이젠 새로운 ‘권위유형’을 생각해 볼 때다.

 

    새로운 ‘권위유형‘엔‘지도력’이 있다. ‘지도력’은 ‘리더쉽’(Leadership)과 ‘헤드쉽’(Headship)으로 구분한다. ‘리더쉽’은 ‘권위’, ‘헤드쉽’은 ‘권위주의’를 뜻한다고 할 수 있다. ‘리더쉽’이라는 배에는 지도자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함께 타고 있어, 태풍이 몰아닥칠 때 지도자는 배에 탄 사람들과 운명을 같이 하지만, ‘헤드쉽’이라는 배에는 지도자는 없고 승객들만 타고 있어서 태풍이 몰아닥치면 지도자는 승객들과 운명을 같이 하지 않고 혼자 안전한 곳으로 도망간다. 일반적으로 대한민국의 지도자들은‘리더쉽’보단 ‘헤드쉽’을 추구한 지도자들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필자는 해리 트루먼(Harry S. Truman, 1884-1972, 즉위 1945-1953) 미국 제 33대 대통령을 통해서 새로운‘리더쉽’을 상고해 볼 까 한다.

 

    트루먼은 미국민과 세계인을 세 번 놀라게 한다.

 

    첫째, 1922년부터 1934년까지 판사로 재직하다가 1934년 미주리 주 상원의원으로 워싱턴정계에 등장하더니 1944년 다른 두 엘리트후보간의 경쟁 틈에 뜻밖의 부통령이 되고, 1945년 프랭클린 루스벨트대통령(Franklin Delano Roosevelt, 1882-1945)의 뇌일혈로 인한 갑작스런 서거로 부통령에 취임한지 82일 만에 대통령직을 이어받고 처칠(Winston Leonard Spencer Churchill, 1874-1965)이나 스탈린(Iosif Vissarionovich Stalin, 1878-1953)과 맞수를 두며 세계대전을 치러낸다.

 

    트루먼은“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The buck stops here)는 당찬 결단력으로 나치독일의 항복을 받아낸다. 1945년 7월 22일 트루먼 , 처칠 영국 총리, 스탈린 소련 대원수가 독일베를린 교외의 ‘포츠담회담’(Potsdam Conference)에서 1943년의 ‘카이로선언’(Cairo Declaration) 이행을 확인하고, 대일항복촉구선언을 발표하며 한반도의 독립을 약속한다. 트루먼은 세계 최초로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8월 9일 나가사키에 사상 첫 원자폭탄투하를 명령하고, 1945. 8. 15. 일본의 제124대 왕 히로히토(裕仁, 1901-1989)로부터 항복을 받아낸다. 일본이 원폭투하이전에 ‘포츠담선언’(Potsdam Declaration)을 받아들여 항복했다면 소련의 참전명분이 없어져 한국은 미군정통치를 거쳐 통일되었을 것이다. 일본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민족이다.

 

    소련은 180일 이내에 일본과의 전쟁에 들어감을 승인 받고 1945년 8월 9일 작전개시하자 1945년 8월 10일 일본은 ‘포츠담선언’을 수락할 용의가 있다고 미국에 통보한다. 미국의 최전방부대가 오끼나와에 있어 빠른 시일 안에 한반도에 상륙할 수 없는 상태에서 소련군이 대거 한반도로 진격하고, 일본이 소련군의 홋까이도오 상륙을 막기 위해 항복한 상황에서 챨스 본스틸대령과 딘 러스크 대령이 30분 만에 지도를 보고 위도 38선을 분할선으로 잡는다. 그래서 미국에 의해서 급히 그어진 38선이 존재한다. 미국은 소련이 자기들의 제안을 선선히 받아들인 데 놀라고, 소련은 위도가 그토록 후하게 남쪽으로 내려간 데 놀랐다고 한다. 이것이 분단이라는 민족의 비극이자, 자유, 정의, 번영, 건강, 행복, 평등, 평화가 활짝 꽃 피운 민주주의 남한의 행운이기도 하는 이중적인 속성을 지닌다.

 

    트루먼은 1947년 3월의‘트루먼 독트린’(Truman Doctrine: 반소반공세계외교정책)과 ‘마셜플랜’(Marshall Plan: 정식명칭은 ‘유럽부흥계획’European Recovery Program으로 1948-1952년까지 미국이 서유럽16개 나라와 일본에 행한 대원조계획을 말한다. 처음 구상을 발표한 미국무장관 G. C. Marshall이름을 따서 ‘마셜플랜’으로 통칭한다)을 추진하며 강력한 ‘리더쉽’을 발휘하여 미국영향력을 세계에 행사할 근거를 마련한다. 트루먼은 역사적인 결정 앞에서 꾸물거리지 않았고, 한반도의 운명을 결정지은 한국전참전결정은 백미(白眉)고, 6.25전쟁에서 트루먼의 진가가 드러난다.

 

    둘째 1948년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의 존 듀이후보에 밀리다가 예상을 뒤엎고 역전승을 거두어 재선에 성공한다. 시카고트리뷴은 “공화당 후보 듀이, 트루먼에 승리하다”라는 역사적 오보를 냈을 정도로 트루먼은 고전(苦戰)했다. 트루먼의 재선은 한반도에겐 행운이었다.

 

    중국이 공산화되고, 소련이 핵폭탄을 갖게 되자, 미국은 6.25 전쟁 일어나기 1년 전, 한반도를 지킬 수 없고 지킬 가치도 없다고 판단하여, 한국에서 주한미군을 철수한다. 그리고 6.25가 발발한다. 1950년 6월24일 트루먼은 주말을 고향, 미주리주 인디펜던스에서 보내고 있었다. 밤 9시쯤 잠자리에 들려는 대통령을 찾는 전화가 걸려온다. 딘 애치슨(Dean Gooderham Acheson, 1893-1971) 국무장관이 메릴랜드에 있는 집에서 건 전화다. 딘 애치슨 국무장관이“각하, 매우 심각한 소식입니다. 북한군이 남한을 전면적으로 공격했습니다. 무초 대사의 보고에 따르면 그 전에 있었던 총격전과는 다른 본격적인 공격입니다. 유엔 사무총장에게 안보리 소집을 요청했습니다.” 보고하자 트루먼 대통령은 이렇게 내뱉는다. “딘,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새끼들을 막아야 합니다.”(Dean, we've got to stop the sons of bitches, no matter what.). 이처럼 오늘날 대한민국이 있게 된 것은 트루먼의 직선적이며 간단명료한 결단력있는 명령에서 나왔다. 한미동맹을 맺기 이전의 일이다. 트루먼은 미국역사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국의 이익과 무관한 나라에 대해 최초로 파병을 결정한 것이다,

 

    중공군이 38선 이남까지 밀려내려 오자, 맥아더(Douglas Mac Arthur, 1880-1964)는 "원폭을 쓰든지, 중공을 공격하지 않으면 한국을 지킬 수 없다. 차라리 한국을 포기, 일본을 지키는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고, 영국 노동당의 애틀리(Clement Richard Attlee, 1883-1967) 수상은 워싱턴으로 날아와 트루먼에게 한국을 포기하고 미군을 철수시켜 유럽 방어에 투입하자고 압박한다. 이 제의에 대하여 트루먼은 이렇게 거절한다.“우리는 한국에 머물 것이고 싸울 것입니다. 다른 나라들이 도와주면 좋습니다. 도와주지 않아도 우리는 어떻든 싸울 것입니다. 우리가 한국을 버리면 우리를 믿고 함께 용감하게 싸웠던 한국인들은 모두 살해될 것입니다. 우리는 곤경에 처한 친구를 버리는 나라가 아닙니다.”

 

    트루먼과 맥아더와의 일화를 살펴보자. 트루먼은 맥아더와 회담하기 위해 맥아더 사령부를 방문한다. 맥아더는 일부러 대통령을 영접하러 비행기장에 나가지 않는다.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맥아더는 고졸 농부출신인 트루먼에게 우월감을 갖는다. 대통령전용 에어포스원은 비행장 상공을 수차례 선회한다. 맥아더의 승리다. 맥아더는 대통령에게 거수경례하지 않은 처음이자 마지막 장군이다. 그런데 후에 트루먼은 자기의 명령에 불복종하는 유엔 총사령관 맥아더 원수를 해임시킴으로써 문민정치의 신화를 남긴다. 맥아더의 제안을 따라 중국을 친다면, 소련이 중국 편에 개입할 것이고, 핵을 쓰는 제3차 세계대전으로 확대될 것이 뻔해 트루먼은 반대한 것이다. 트루먼과의 불화로 군복을 벗은 노병 맥아더가 1951년 4월 19일 미국 워싱톤 D.C. 상하야원합동회의장 퇴역식에서 미군군가(軍歌)의 후렴구를 인용한 연설은 52년 군생활을 갈음하는 명언으로 회자되고 있다.“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Old soldiers never die: They just fade away.)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우리에겐 사실상 맥아더원수보다 트루먼대통령 동상이 필요하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맥아더는 전쟁을 지휘하면서도 한 번도 한반도에서 잔 적이 없다. 안락한 도쿄에 앉아서 한반도 지도를 상대하여 전쟁을 지휘했던 것이다. 그래서 하늘은 그보다 그의 부관을 지낸 아이젠하어(Dwight David Eisenhower, 1890-1969, 즉위 1953-1961)를 트루먼 후임, 곧 제34대 미 대통령으로 선택한다.

 

    셋째, 퇴임후의 기행이다. 트루먼은 전용기대신 열차를 이용하며 고향으로 내려가는 동안 일반승객들과 허물없이 어울리면서 전임대통령으로서의 위엄보단 인간적인 면을 내세워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경호원도 물리치고 연금도 사양하여 트루먼은 회고록을 써서 생계를 유지하는데, 그가 집필한 회고록은 훗날 대통령의 회고록 남기기의 효시가 된다. 뿐만 아니라 어릴 때부터 독서력이 왕성했던 트루먼을 위한 도서관건립은 그 뒤 대통령 도서관 건립의 유행을 낳는다.

 

    트루먼은 제2차세계대전을 종식시켰지만 일본에 떨어뜨린 원자폭탄 탓에 ‘엿먹인 해리’(Give'em Hell Haryy)라는 악명이 따라 붙었다. 게다가 맥아더원수는 연합군 최고사령관이름으로 공식서명서를 발표한다. “양민학살행위...무모한 짓”이라며 트루먼을 전범인양 몰아세운다.

 

    그러나 트루먼이 결정적인 순간마다 용기 있는 결정을 내렸기 때문에, 곧 진정한 미국 대통령의‘권위’가 무엇인가를 보여주었기 때문에 175cm 채 안 되는 작은 체구 탓에 ‘리틀 맨’(little man)로 불렸던 그는 이제 '작은 거인'(little big man)으로 역사에 남아있고, 역대 대통령 가운데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유능한 대통령으로 꼽힌다. 이런 배경엔 그의 독서력을 들 수 있다. 그는 시력이 나빠 사관학교에 진학하지 못할 만큼 어렸을 때부터 책을 엄청나게 읽었다고 한다. 그는 또한 국가관이 뚜렷하여 시력검사표를 외워 미주리 주 소위 방위대에 임관하고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포병으로 프랑스에서 근무하다가 대위로 제대했다. 그래서 트루먼은 고졸출신으로 미국의 학원식 로스쿨이 낳은 최대의 인물이 되었다.

 

    내년에 대한민국에도, 트루먼 미 대통령처럼, 남북통일을 이룩하고 일본으로부터 대마도를 되찾을 뿐만 아니라 독도문제에 대해서 일본으로 하여금 입 벙긋하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하고 중국으로부터도 간도를 되찾을 수 있는 지혜롭고, 기개있으며 결단력있는 지도자가 등장하였으면 한다. 참된 ‘권위’의 등장을 대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