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와 정의의 나라/철학 이야기

라오츠(老子)의 관계철학

아우구스티누스 2011. 7. 31. 13:35

                                    라오츠(老子)의 관계철학

 

    라오츠(老子)의 ‘도덕경’(道德經)의 요약이라 할 수 있는 25장은 ‘스스로 그러함의 철학’(philosophy of what -is-so-of-itself)를 다루고 있다. 그 내용을 보면 이렇다.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스스로 그러함을 본받는다."(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

 

    이 문장은 우주와 인간 세계의 기본적인 구성 요소이면서 그 변화의 동인(動因)으로 작용하는 천지인(天地人)의 삼재사상(三才思想)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 사상은 스위스의 정신병의사, 분석심리학자(analytical psychologist) 융(Carl Gustav Jung, 1875-1961)의 집단무의식원형(archetype of collective unconscious idea), 보편무의식(collective unconsciousness), 객관적 정신(objective psyche)에 해당되며,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의 흔적(라틴어 Vestigium Trinitatis, 영어 The Track or Trace or Vestige of Trinity)이라고 할 수 있다.

 

    삼재사상(三才思想)은 서구의 이원론적 세계관인 존재론(ontology), 곧 세계의 모든 존재들을 독일 계몽철학의 서장을 연 철학자, 수학자, 자연과학자, 법학자, 신학자, 언어학자, 역사가인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von Leibniz, 1646-1716)의 철학유고(哲學遺稿) ‘모나드론‘ (Monadologia 1720) 또는 ’단자론’(單子論)처럼 개별적, 고립적으로 보고, 자신은 주체이고 상대방은 마음대로 지배약탈해도 되는 객체 또는 물건으로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인격적으로 인정하고 대화하며 상호 보완적 의존성 아래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보는 유기체적 세계관(organic world view) 또는 전일적(全一的)세계관(holistic world view)이다.

 

    이 사상은 불교의 공사상(空思想), 불이사상(不二思想)과 화엄사상(華嚴思想)과 유사할 뿐만 아니라 양자역학(quantum mechanics)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리고 이 사상은 서구의 이원론사상으로 인한 현대의 인간소외 및 환경 문제에 대한 해법을 제시한다. 그것은 하늘과 땅과 인간이 하나가 되어 상호 교감하며 사는 것이다.

 

    그러면 라오츠(老子)의 삼재사상(三才思想), 관계철학에 대해서 살펴보자.

 

                                    I. 인도(人道)

 

    ‘인법지’(人法地)의 뜻은 ‘사람은 땅을 본받는다.’는 말이다.

 

    ‘생각하며 꼿꼿이 걷는 존재’의 탄생이 인류의 시작이다. 인간은 걸음으로 두 손을 해방시켜 도구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고, 도구의 사용은 두뇌용량의 증대와 지능향상은 물론 사고와 소통의 능력향상으로 이어져, 마침내 문명을 만들었다. 그래서 인간은 호모 에렉투스(直立人間, Homo Erectus)에서 호모 파버(공작하는 인간, Homo Faber), 호모 사피엔스(이성적 인간, Homo Sapiens)로 발전하여, 언어를 사용하고, 도덕적 종교적 능력 등을 구비한 인간다움(인간성)을 형성하였다.

 

    길을 가는 것은 도(道)를 닦는 것이다. 예수는 고독하게 홀로 걸으며 성부 하느님과 대화하고, 제자들과 함께 걸으면서 가르침을 전했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것이 신약성서다. 공츠(孔子, BC 551-BC 479)와 석가모니(釋迦牟尼, BC 563?-BC 483?)도 평생을 걸으며, 제자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논어와 법어를 남겼다. 라오츠(老子)와 주앙츠(莊子, BC 369-BC 289?)의 철학도 무위(無爲)와 ‘소요철학’(逍遙哲學)이다.

 

    아리스토텔레스(Άριστοτέλης, 라틴어, 그리스어, 독어 Aristoteles, 영어 Aristotle, B. C. 384-322)는 리케이온(그리스어 Lykeion, 라틴어 Lyceum or Lycium)이라는 철학 학원의 숲 속의 산책길(peripatos)을 제자들과 함께 걷고 논의를 펼치며 철학을 가르쳤기 때문에 그를 추종하는 자들을 산책길의 이름을 따서 소요학파(逍遙學派, peripatetic school)라고 부른다.

 

    프랑스의 계몽사상가, 철학자, 사회학자, 미학자, 교육론자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1778)는 숲을 산책하고 나서 “철학의 첫 스승은 우리의 발이다”라고 하며, ‘고백록’(Confessions)에서 "나는 걸을 때만 명상에 잠길 수 있다. 걸음을 멈추면 생각도 멈춘다. 나의 마음은 언제나 나의 다리와 함께 작동한다."고 술회한다. 그는 ‘에밀’(Emile ou de l'education, 1762)에서 “도착하기만을 원한다면 달려가면 된다. 그러나 여행을 하고 싶을 때는 걸어서 가야 한다”고 특유의 걷기 미학을 펼친다. 그는 프랑스와 유럽을 도보로 여행하며‘고독한 보행자의 상념’(1778년)을 썼다. 루소(Rousseau)에 의하면 걷기의 리듬은 사유의 리듬을 낳는다고 본다.

 

     독일의 비판 철학의 창시자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는 시간관념이 철저하여서, 하루도 어김없이 정해진 시각에 산책에 나섰기 때문에, 고향 쾨니히스베르크(Königsberg, 오늘날 러시아의 Kaliningrad)시민들이 산책하는 칸트를 보고 시계의 시각을 맞췄다고 한다. 그런 그가 루소(Rousseau)의 ‘에밀’(Emile ou de l'education)을 읽느라 단 한 번 산책 시간을 어겼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전도된 플라톤주의’(Umgedrehter Platonismus), ‘디오니소스적 긍정의 철학’(Philosophie des dionysischen Ja),‘생철학’(Philosophie Des Leben, Lebensphilosophie)의 시조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는 문학과 음악, 산책으로 소일하다, 마침내 1881년 질스마리아의 실바플라니 호숫가의 숲속을 거닐고 있을 때 하나의 사유가 비둘기처럼 조용하게 찾아온다. 그래서‘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독어 Also sprach Zarathustra, 영어 Thus Spoke Zarathustra , 1883-1884)가 탄생한다. 니체(Nietzsche)는 고대 페르시아의 예언자로서 ‘조로아스터교’(拜火敎)의 창시자였던 차라투스트라(Zarathustra)의 입을 빌려 자신의 사유를 펼친다. 차라투스트라(Zarathustra)는 조로아스터(그리스어 Zoroaster)의 페르시아식 이름이다.

 

    조선의 청담 이중환(淸潭 李重煥 1690-1752)은 30여년의 방랑생활 동안 전라도와 평안도를 제외한 한반도전역을 두루 답사하고, 최초의 인문지리서‘택리지’(擇里志: 八域志)를 남긴다. 이 저서는 지리(地理: 지리적 환경), 생리(生利: 경제적 환경), 인심(人心: 문화적 환경), 산수(山水: 자연적 환경)의 관점에서 조선8도를 논하며, 조선후기의 정치부패 및 사상의 진부함에 대해 다룬다.

 

    조선의 실학자 연암 박지원(燕巖 朴趾源, 1737-1805)은 1780년(정조 4) 5월 삼종형(三從兄)인 금성위(錦城尉) 정사(正使) 박명원(朴明源, 1725-1790)이 청나라 건륭황제(1711-1799)의 칠순연(七旬宴)을 축하하기 위해 파견되는 진하사 겸 사은사(進賀使兼謝恩使)가 되어 청나라에 갈 때, 박명원(朴明源)의 개인 수행원 자격으로 사행길에 동행한다. 6월 24일에 길을 떠나 10월에 돌아오는 장장 6개월에 걸친 스릴과 서스펜스 넘치는 모험의 대장정이다. 그 당시 ‘열하’(熱河: 현재 중국 허베이성 청더·河北省 承德)는 건륭황제가 피서지인 이궁(離宮, 별궁)을 건설하면서 북경에 버금가는 청나라의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다. 박지원(朴趾源)은 사행기간동안 청국의 학자를 비롯해 몽골과 티베트 사람의 학문과 문화를 접하며 충격을 받고, 돌아온다.

 

    그는 북학론을 개진한 역작 기행문 ‘열하일기’(熱河日記)를 발표하며, 그동안 오랑캐로만 치부하였던 청나라의 경제적, 문화적 발전상을 이용후생(利用厚生)관점에서 소개하고, 진보적인 개혁사상, 실학사상입장에서 조선지배층의 주자학적 심성론의 틀을 비판한다. 청나라가 만주족이 세운 오랑캐라 하더라도 조선보다 앞선 기술과 문명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대명의리(大明義理)에 기초한 북벌론의 허구성을 지적한다. 경제부를 업신여기는 사농공상의 신분제도가 과연 타당한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며 허상이나 관념에 매여 있기보다는 실상과 현실에 기초하여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다. 그래서일까? 후에 중국청나라견문록은 조선의 제22대왕 정조(正祖, 1752-1800, 재위기간1776-1800)의 문체반정(文體反正)정책의 주표적이 된다.

 

    프랑스의 사상가, 모랄리스트, 문학자 몽테뉴(Michel Eyquem de Montaigne 1533-1592)는 인간의 사유가 두뇌의 전유물이 아니라 전적으로 육체적인 컨디션에 따라 다듬어지고 정리되는 지적 결과물이라고 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걸음을 내디딜 때 발에 있는 26개의 뼈와 1백 개가 넘는 인대, 근육 그리고 힘줄과 신경이 유기적으로 운동한다. 따라서 사유는 뒤얽힌 혈관, 섬유, 정맥 힘줄을 타고 의식까지 전진한다.”“앉아 있으면 사유는 잠들어버린다. 흔들어놓지 않으면 정신은 움직이지 않는다. 갑작스레 떠오른 생각이나 직관은 몸속의 신경, 근육, 장기와 밀접한 영향을 주고받는다.”

 

    프랑스의 동물학자, 식물학자, 생물학자인 이브 파칼레는 걸어서 세계를 일주한 걷는 음유시인이다. 그는 스스로를 '야생의 오솔길을 잠시 산책하는 향기 도둑'이라고 하며, 자신의 저서 ‘걷는 행복’(Le Bonheur en marchant)에서 걷기 예찬론을 펼친다. 그는 근대철학의 아버지, 데카르트(프랑스어 René Descartes, 라틴어 Renatus Cartesius, 1596-1650)의 저서‘방법서설’ 제4부와 ‘철학의 원리‘ 제1부의 7에서 나오는 유명한 명제“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프랑스어 Je pense, donc je suis, 라틴어 Cogito ergo sum, 독어 Ich denke, also Ich bin, 영어 I think, therefore I am)의 의식의 독립선언을 다음과 같이 패러디(parody)한다.“나는 걷는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틴어 Ambulo, ergo sum, 영어 I walk, therefore I am).

 

    걷기는 무엇보다도 건강에 유익하다. 의성(醫聖) 허준(許浚, 1539-1615)은 ‘동의보감’(東醫寶鑑)에서 좋은 약을 먹는 것보다 좋은 음식이 낫고, 좋은 음식보다 걷기가 더 낫다고 설파한다. 21세기의 대한민국에도 생각하고 느끼는 걷기를 통해 건강을 도모하는 신인류 문화건강족 ‘호모 워커스’(Homo Walkers)가 탄생한다.

 

    그리고 걷기는 죽음의 연습이기 때문에 홀로 걸어야 한다. 둘 이상 함께 걸으면 그것은 산책이 아니라 소풍이다.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 1817-1862)는 ‘걷기’에서 이렇게 증언한다. “확신하거니와 내가 만약 산책의 동반자를 찾는다면 나는 자연과 하나가 되어 교감하는 어떤 내실함을 포기하는 것이 된다. 사람들과 어울리고자 하는 취미는 자연을 멀리함을 뜻한다. 그렇게 되면 산책함으로써 얻게 되는 것 저 심오하고 신비한 그 무엇과도 작별이다. ”

 

    뿐만 아니라 아파트내의 화분과 도시건물옥상이나 공터 등 도시의 자투리 공간을 활용해 농작물을 키우거나 합심해 공공텃밭을 경작하는 도시농업은 물론 근교에 토지를 구매해 하우스농사를 짓는 등 친환경 도시 텃밭을 가꾸는 사람들이 급증하고 있다. 이것은 식물의 성장과 수확과정 등의 생태계교육을 통해 도시인들에게 생명의 소중함과 감수성을 길러주어 상호성(reciprocity), 관계성(relationship), 조화(harmony) 등의 공존의 중요성을 깨닫게 한다. 게다가 식물은 음이온을 방출하고 부유하는 유해물질과 이산화탄소를 흡수하는 공기정화효과를 제공한다. 친환경농산물, 곧 유기농산물(organic agricultural product)은 유전자변형식품에 대한 우려를 없애주어 정신적 및 육체적 건강에 유익을 준다. 그래서 농업(agriculture)과 오락(entertainment)이 결합된 ‘에그리태인먼트’(agritainmnent)라는 신조어가 급부상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라오츠(老子)의 ‘인법지’(人法地)=‘호모 에렉투스’(直立人間, Homo Erectus)=‘호모 워커스’(걷는 인간, Homo Walkers)=‘에그리태인먼트’(agritainmnent)라는 공식이 성립된다.

 

                                 II. 지도(地道)

 

    ‘지법천’(地法天)의 뜻은 ‘땅은 하늘을 본받는다.’는 의미이다.

 

    서구의 이원론적인 존재론(存在論, ontology)은 갈등과 대립, 투쟁과 전쟁을 불러일으키지만, 천재지변이 발생하면 과학적이며 합리적으로 그 이유와 원인을 분석하여 대비한다. 한반도엔 지난 7월 27이후‘물폭탄’으로 피해지역이 속출했다. 이번 경우는 100여 년 만에 일어난 사건이라 통계학적으로 예측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원인은 온난화현상과 한반도가 아열대지역으로 재편성된 데서 기인한 것이라 진단한다. 기상예보의 엉터리, 하수관시설부족, 산사태에 대한 안이한 대처 등의 탓으로만 돌리수가 없다. 자연의 위력 앞에 인간의 왜소함을 처절히 느끼는 비애의 시간이다. 이번 일로 생태계가 우리의 삶에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닫고, 아열대지역에 대한 재난대비를 과학적으로 재점검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한반도의 천지인(天地人)의 삼재사상(三才思想)은 천재지변에 대한 서구의 과학사상보다 한발 앞선다. 하늘과 땅과 인간이 하나가 되어 상호 교감하여 산다고 여기기 때문에, 천재지변이 일어나면 인간행위를 되돌아보며 참회의 과정을 겪는다. 세계최고의 계몽군주, 불세출(不世出)의 영웅(the hero of the century) 조선왕조 제4대 세종대왕(世宗大王, 1397-1450, 재위 1418~1450)은 천재지변이 일어나면 “과인이 정치를 잘못해서 우주의 질서가 어긋났기 때문”이라며 반성하는 뜻에서 반찬을 줄이고 음악을 듣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초가삼간을 지어 그 속에서 생활했다. 세종은 말한다. “천재지변이 일어나고 일어나지 않음은 인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이나, 재난을 당한 백성들을 구제하고 조치를 취하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다. 마음으로 전력을 다하라.”

 

    세종(世宗)은 이처럼 모든 천재지변이 혹시 자신의 잘못 때문은 아닌가 생각하면서 참회의 기회로 삼고, 조선지배층이 사치와 방종에 빠지지 않고, 인륜과 도덕을 우주질서 및 인간심성과 통일적으로 해석하여 정치철학의 이론을 제공한 성리학사상에 입각한 정치를 하도록 채찍질한다. 그는 노비, 양민 구분 없이 그 생명은 모두 하늘이 자신에게 맡긴 존재인데 어찌 감히 그들을 섬기고 보살피는 데 소홀함이 있을 수 있겠는가 했다. 하늘이 늘 지켜보고 있기 때문에 자신은 백성을 보살필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처럼 세종(世宗)은 백성을 천민(天民)이라 하여 하늘이 자신에게 위임한 존재들이라고 여긴다. 이것은 프랑스의 종교개혁가 칼뱅(Jean Calvin, 1509-1564)의 좌우명‘하나님 앞에서’(Coram Deo)의 사상과 흡사하다. 덴마크의 소크라테스이며 실존주의의 선구자로 루터교 교회의 성인 달력에서 교사로서 11월 11일에 기념되고 있는 키르케고르(덴마크어 Sören Aabye Kierkegaard, 1813-55)는 타자(他者)와 대치(代置)할 수 없는 자기 독자(獨自, individuality)의 실존(Exsitenz)을 외치면서, 실존(Exsitenz)이란 신 앞에 홀로 선 단독자(der Éinzelne)라는 종교적 실존(Exsitenz ist vor Gott)을 제시했다. 세종은 이미 자신을 ‘하늘 앞에서 홀로 선 통치자‘(Der Éinzelne, der Herrscher vor dem Himmel)라고 여겼기 때문에, 키르케고르(덴마크어 Sören Aabye Kierkegaard)보다 앞선 위대한 실존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세종사상은 ' 하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린다.'는 대천리물(代天理物)의 이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사상은 주자학적 정치사상에서 왕권의 근원과 그 정당성 특히 그 전제성을 설명하는 기본명제다.

 

    그래서 라오츠(老子)의 ‘지법천’(地法天)=천지인(天地人)의 삼재사상(三才思想)=생태철학(生態哲學, Ecological philosophy)=환경철학 (環境哲學, Environmental philosophy)이라는 공식이 성립된다.

 

                                 III. 천도(天道)

 

    ‘천법도’(天法道)의 의미는 ‘하늘은 도를 본받는다.’는 뜻이다.

 

    동양의 천(天)에 대한 인식의 변화는 상제(上帝)로부터 시작하여 천명(天命)을 거쳐 천도(天道)로 전환되며, 이 과정에서 천(天)의 주권적이고 인격적인 성격은 이법(理法, principles and rules)적이고 원리적이며 이념적인 성격으로 변화된다. 그것이 이(理)와 기(氣)다. 이것에 대해선 이미 ‘유학의 관계철학’에 대해서 논했기 때문에 그 글을 참조하기 바란다.

 

    서구에선 천(天)에 대한 과학적인 사상이 발전하여 후에 동양을 지배하는 담론구조로 변한다.

 

    17세기의 자연철학자, 수리 물리학자, 신학자, 연금술사, 작위를 받은 신사, 조폐국(Royal Mint)의 책임자, 왕립학회의 회장, 아이작 뉴턴(Isaac Newton, 1642 or 1643-1727)은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수학하고 있을 때, 그 지역에 페스트가 돌기 시작하자, 23세 때인 1665년 어머니가 계시는 켄싱턴의 집으로 돌아간다. 어느 날 집 앞뜰에 앉아서 사과나무에서 사과 하나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중력을 발견한다. 그는 1687년‘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Philosophiae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 줄여서 Principia)에서 이것을 만유인력의 법칙(law of universal gravity)라고 규명한다. 중세의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세계관(the Aristotelian world view), 곧 천상의 자연법칙과 지상의 자연법칙의 이원론이 뉴턴의 법칙을 통해 하나로 통합된다. 그 결과 신의 대리인을 자처하는 왕과 그리스도교의 성직자의 권위, 곧 구질서가 타파되고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기치로 한 계몽주의사상과 결합하여 신분제가 뿌리 채 흔들린다.

 

    그래서 뉴턴(Isaac Newton)의 묘비에는 영국의 시인, 비평가 알렉산더 포프(Alexander Pope, 1688-1744)의 헌시(獻詩)가 다음과 같이 새겨져있다.“자연과 자연법칙은 어둠에 묻혀 있었다. 신께서 ‘뉴턴이 있어라.’하시매 모든 것이 밝아졌다." (Nature and Nature's laws lay hid in night: God said, "Let Newton be!" and all was light).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은 1915년 완성한 ‘일반상대성이론’(General Theory of Relativity)을 통해 뉴턴(Isaac Newton)의 중력법칙(the law of gravity)을 다음과 같이 수정한다. 유리구슬을 고무막에 올려놓으면 고무막이 늘어지는 것처럼, 시공간에 질량이 있으면 그 때문에 주변의 시공간이 휘어지고 그 때 끌려온 물체의 속도가 느리면 물체는 완전히 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적당한 속도면 주위를 돈다. 지구가 태양주위를 도는 것은 태양의 휘어진 중력장(중력이 작용하고 있는 지구주위의 공간)에서 적당한 속도를 갖기 때문이다. 물체의 속도가 빠르면 휘었다가 금세 빠져 나올 수 있다.

 

    독일의 물리학자이며 1932년 노벨물리학수상자인 하이젠베르크(Werner Karl Heisenberg 1901-1976)의 '불확정성의 원리'(uncertainty principle, 1926년)는 양자역학(quantum mechanics)의 핵심 기본원리다. 불확정성의 원리(uncertainty principle)에 의하면 소립자(elementary particle: 물질구조는 분자→원자→원자핵→소립자라는 계층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소립자는 더 이상 나눌 수 없다고 생각되는 입자다)의 위치와 속도(운동량)는 동시에 측정할 수 없고 단지 확률과 통계를 통해서만 알 수 있으며, 입자성과 파동성이 서로 공존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원자핵 속의 소립자는 스스로 충돌해서 입자가 문득 없어졌다가 나타난다. 입자가 나타날 땐 ‘색’(色)이고, 입자가 소멸되면 ‘공’(空)이다. 이것이 ‘색즉시공공즉시색’(色卽示空空卽示色)이다.

 

    힉스입자(Higgs boson or Higgs Particle)는 원자보다 작은 소립자로 이론적으로만 존재하며 1964년 이 입자의 존재를 주장한 영국 물리학자 피터 힉스(Peter .W. Higgs)의 이름에서 유래한다. 물리학 표준모형에서 발견되지 않은 마지막 입자라 일명 ‘신(神)의 입자’(God Particle)라고도 불린다.‘신(神)의 입자’(God Particle)라는 말은 새로운 종류의 중성미자(neutrino: 입자물리학의 중심 이론인 표준 모형에 의하면 우주를 구성하는 기본 물질인 소립자는 중입자, 경입자, 그리고 중간자 등 3가지 입자군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소립자는 경입자에 속하는 소립자의 하나다)를 발견한 공로로 1988년 노벨상을 수상한 미국의 물리학자 레온 레더만(Leon Lederman)이 1993년에 집필한 저서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힉스입자(Higgs boson or Higgs Particle)가 발견되면 기원전 600년 고대그리스 최초의 철학자, 7현인(七賢人)의 제1인자이며 밀레토스학파(Milesian school)의 시조, 서양 철학의 아버지 탈레스(Thales, BC 624?-BC 546?)가 “만물의 근원은 물”이라는 일원설(monogenesis)을 선언한 이래 “세상은 무엇으로 만들어졌을까?”라는 의문이 풀린다.

 

    하늘의 천체는 제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고 자신의 길(道)을 가기 때문에 우주의 대격변이 일어나지 않는다. 명왕성(그리스어 Πλούτων, Pluton, 라틴어, 영어, 독어 Pluto)의 명칭은 로마 신화의 명계(冥界, 저승)의 신, 그리스 신화의 하데스(그리스어 ̔́ ́αδης, Hades, 히브리어 Sheol)의 신에서 기원한다. 명왕성(Pluto)은 자신의 이름인 죽음의 세계가 암시하듯이 자신의 임무를 다하고 인간이 퇴직하듯이 사라졌다. 이런 사실은 우주의 신비로움을 더해준다.

 

    과학적으로 라오츠(老子)의‘천법도’(天法道)=힉스입자(Higgs boson or Higgs Particle)라는 공식을 생각해볼 수 있다.

 

              IV.‘스스로 그러함의 철학’(philosophy of what -is-so-ofitself)   

 

    ‘도법자연’(道法自然)의 뜻은 도(道)는 스스로(自) 그러함(然)을 본받는다는 뜻이다.

 

    자연(自然)은 명사가 아니라 1962년 영국의 리버풀에서 결성되고 1970년에 해산된 전설적인 록 그룹인 비틀즈(The Beatles)의 노래 제목 '그것은 상관치 말아‘, ’그것은 내버려 두라‘ (Let It Be)에 해당된다.

 

    길(道)은 다양하다. 사람이 다니는 길을 ‘인도’라고 하고, 철도가 다니는 길을 ‘철도’라고 하며, 비행기가 다니는 길을 ‘항로’라고 하고, 배가 다니는 길을 ‘항로’나 ’수로’라고 한다. 인간을 포함한 우주 전체가 인위적으로 각자 다른 길을 가지 않고 제 길, 진리의 길을 가고 있기 때문에, 거기엔 질서와 평화와 정의와 아름다움이 있다. 그러나 ‘도법자연’(道法自然)의 이법(理法, principles and rules)에서 벗어나면 거기엔 죽음과 전쟁, 흉(凶)과 추(醜)가 존재할 뿐이다.

 

    예컨대, 밥이나 음식이 그릇에 담겨있어 식탁에 놓여있다면 그것은 자연스러움이라는 도(道)에 따른 행위이기 때문에 보기 좋고 인간의 식욕을 북돋운다. 그런데 놀부의 부인이 흥부의 얼굴을 주걱으로 때려서 그 밥풀이 흥부의 얼굴에 묻어있다면, 그것은 자연스러움에 반하기 때문에 보기 흉하고 밥맛을 떨어지게 한다. 반찬도 마찬가지다. 김치가 그릇에 담겨있다면 먹음직스러운데, 김치의 고춧가루가 이빨에 끼어있다면 참으로 난감하다. 각자가 제 위치에서 자기 역할을 한다면 자연스럽고 그것이 도(道)다.

 

    화초나 나무 따위를 화분에 심어서 줄기나 가지를 보기 좋게 가꾸거나 또는 그렇게 가꾼 화초나 나무를 분재(盆栽, potted plant or pot-planting)라고 한다. 일본의 분재(盆栽)의 나라라고 할 정도로 잔가지에 이르기까지 철사를 감아 판에 박은 듯 한 이상적이고도 정교한 생김새를 꾸며내는 것을 특징으로 하여, 인공정원이 잘 발달되었다. 그래서 1990년 초대문화부장관을 역임한 이어령(李御寧, 1934-)은 이런 일본인의 기질과 성격에 기초하여‘축소지향의 일본인’이라는 명저를 내놓는다. 이와 달리 한반도는 나무가 자연스럽고 고목다운 운치를 풍겨야 한다고 여겨, 분재(盆栽)보다 자연 그대로를 즐기는 것을 좋아하여 인공정원이 일본처럼 발달되지 못했다. 이것은 자연스러움의 ‘도’(道)를 사랑하는 마음씨의 발로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성웅 이순신제독을 기리는 현충사나 광화문의 동상은 완전히 일본찌꺼기로 뒤덮여 있다. 현충사입구연못은 일본교토 니조조 니모마루 연못과 흡사하고, 일본 니가타현에서 수입해온 비단잉어가 살고 있다. 정원은 일본교토 니노마루정원을 그대로 모방해, 일본정원처럼 석등까지 배치되었다. 현충사 본전 앞 금송은 일왕상징인데,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70년 12월 청와대에 있던 금송을 옮겨 심었다. 안내책자엔 이런 기록이 담겨있다.“금송은 일본의 대표적 나무로 일본무사를 상징한다고 하여 많은 식물학자의 비판을 받고 있다.”구국성지엔 대한민국은 없고 ‘쪽발이’풍만 잔존한다.

 

    뿐만 아니라 전통을 자랑하는 명산대찰의 앞마당이나 연못, 독립기념관같이 민족의 얼을 기리는 역사 유적의 정원, 경복궁의 뒤뜰에 이르기까지, 일본식 조경이 넘쳐나고 있다. 빼앗긴 들엔 봄이 왔으나, 거기 조성된 공원과 나무와 연못엔 여전히 일본잔재의 삭풍이 불고 있다.

 

    이것을 통해서 좌뇌형의 일본열도는 유위(有爲)의 문명생활을 지향하고, 우뇌형의 한반도는 무위(無爲)의 자연스러움을 선호하는 것을 알 수 있다. 한반도의 이런 기질 때문에 20세기 초 구미열강의 서구근대문명을 수용한 일본열도의 호구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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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라오츠(老子)의‘도법자연’(道法自然)=스스로 그러함=무의식적 자아의 행위=무위(無爲)=허(虛)=무아(無我)라는 공식을 생각해볼 수 있다.

 

                                        V. 나가는 말

 

    통속적으로 인류의 정신적이고 가치적인 소산을 문화라고 하는 데 반해, 물질적 기술적 소산을 문명이라고 한다. 그런데 문명의 영어 ‘시빌리제이선’(civilization)은 라틴어 ’키비스‘(라틴어 civis, 영어 citizen, 시민), ’키빌리스‘ (라틴어 civilis, 영어 civic, civil, 시민의), ’키빌리타스‘(라틴어 civilitas, 영어 civility, politeness, 예의)라는 단어에서 유래한다. 이것을 근거해 볼 때 문명이란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세련된 생활태도나 세련된 예절을 의미한다. 이 의미를 좀 더 확장하면 인류가 더 질 높은 삶을 꿈꾸며 만들어낸 인간활동의 총체다. 그래서 문명과 문화의 이분법으로 구분할 수 없고, 물질문화와 정신문화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보편적으로 역사의 전개는 야만(barbarism)→미개(savagery)→문명(civilization)으로 발전되어 왔다고 본다. 그런데 중국문명은 구(舊)세계의 이집트 문명, 수메르 문명, 미노스 문명, 중앙 아메리카의 마야 문명, 남아메리카의 안데스 문명과 함께 모체가 된 고대문명, 곧 모문명(母文明)에 속하지만, 19세기 구미열강과 일본의 문명에 뒤처져 반식민상태로 전락한다. 이 때의 문명의 기준은 봉건제 군주제에로부터 입헌군주제나 대통령제로의 전환, 강한군사력, 그리스도교, 첨단과학기술 등의 소유여부다. 이것으로 볼 때 문화와 문명의 이분법보단 물질문화와 정신문화의 공존으로 해석하는 편이 낫다.

 

    라오츠(老子)사상은 인간의 소외와 생태계문제에 대한 해법을 제시해주지만, 의식적 자아의 행위인 유위(有爲)를 부정하며, 반(反)문명, 원시사회, 야만상태를 지향하기 때문에, 구미선진국이나 재벌들의 전원생활 또는 수도승들의 삶엔 적용될 수 있지만 속도와 용이함을 강조하는 21세기 최첨단과학의 문명사회나 개발도상국엔 적합하지 않다.

 

    그리고 라오츠(老子)사상은 지나치게 무위(無爲), 무의식적인 삶을 추구하는데, 어떻게 살아있는 인간이 의식하지 않을 수가 있는가? 인간의 모든 행동은 거의 다 유위(有爲)에 속한다. 결국 무위(無爲)란 죽음 이후의 삶을 의미하거나 관념의 세계에서만 존재하는 탁상공론에 불과하다. 인간의 몸에 조건반사(有爲)와 무조건 반사(無爲)가 있듯이, 서양의 좌뇌형의 유위(有爲)와 라오츠(老子) 우뇌형의 무위(無爲), 문명과 반(反)문명, 시민의식의 사회와 원시사회의 조화, 중용의 상태유지가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