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의 관계철학
성리학(性理學)의 윤리도덕사상을 통치철학으로 삼은 조선왕조가 오백년 이상 한반도를 지배하고, 마이클 샌델(Michael J. Sandel, 1953-)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 (Justice: What's the Right Thing to Do?)라는 책이 100만부 팔릴 정도로‘정의’(Justice)의 붐이 열화(熱火)와 같이 일어나자, 결국 MB정부도 이 추세(趨勢, trend, tendency, drift)에 떠밀리려 '정의'(Justice)를 위한 정책을 펼치지만, 대한민국의 삶의 보고서엔 부정부패의 나라로 드러났다. MB 스스로도 이것이 우리의 자화상이라고 언급했다.
사실 샌델(Michael J. Sandel)교수의 '정의‘(Justice)에 대한 열광은 전 세계에서 대한민국에서만 볼 수 있는 진기한 현상이다. 부정부패와 부조리로 얼룩진 사회에 대한 저항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다른 한편 저자 샌델(Michael J. Sandel)이 하버드대학교수라는 브랜드에 열광하는 한국인의 지적허영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불 수 있다. 대한민국은 정의(Justice)를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정의(Justice)라는 이념에만 열광하기 때문에 지금도 부정부패와 부조리로 얼룩져있다. 정의(Justice)는 배우는 것이 아니라 실천하는 것이다.
조선왕조는 윤리도덕을 실천하려고 하기 보단, 백성을 통치하는 수단으로 삼아서, 상식자체가 박물관에 있는 골동품, 곧 화석화된 이념으로 변질되고, 조선지배층은 부정부패와 부조리의 늪 속에 푹 빠져 허우적거리다가, 일제의 먹잇감으로 전락한다. 21세기 한반도는 어떠한가? 윤리도덕을 실천덕목화하기 보단 지적지식으로만 향유하려고 하지 않는지, 반성할 시기가 되었다. 이제 유학(儒學)의 관계철학을 통해서 그 이유를 살펴보자.
I. 유학(儒學)의 다양한 모습
송대(宋代) 이전의 고대의 공맹(孔孟)의 교훈을 집대성한 것이 ‘전통유학’(傳統儒學)이고, 한당시대(漢唐時代)에선‘훈고학’(訓詁學)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사서오경(四書五經: 대학, 논어, 맹자, 중용의 4서와 시경, 서경, 주역, 예기, 춘추의 5경) 같은 유교경서의 고증과 해석을 연구하는 학문이라 그렇게 불렀으며, 12세기에 남송의 주희(朱熹 또는 朱子, 1130-1200)가 ‘전통유학’(傳統儒學)을 근거하여 노불사상(老佛思想)을 가미한 ‘성즉리’(性卽理: 性이 理다)사상을 축약하여 성리학(性理學: 본성‘性’과 이치‘理’에 관한 학문)이라고 하며, 주희(朱熹 또는 朱子)이름을 따서 주자학(朱子學), 전통유학(傳統儒學)을 발전시켰다고 ‘신유학’(新儒學, Neo-Confucianism)이라고 한다. 시대사상의 명칭으로는 송명유학(宋明儒學), 송학(宋學), 명학(明學)이라고도 불린다.
성리학(性理學)에 의하면 하늘의 이치(天卽理)이면서도 동시에 인간의 본성(性卽理)에도 내재하는 ‘이’(理)는 인의예지(仁義禮智)로 나타나며, 이것의 도(道)를 현실세계에 실현하여 구현하는 것이 유가적인 유토피아 대동세계(大同世界)다.‘이’(理)가 인간의 형상을 하고 나타난 것이 군자(君子) 또는 성인(聖人)이다.
조선왕조에 와서 성리학(性理學)은 지배이데올로기가 된다. 사단칠정(四端七情)에 대한 연구로 퇴계이황(退溪李滉, 1501-1570)의‘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과 율곡이이(栗谷李珥, 1536-1584)의 ‘이통기국설’(理通氣局說), ‘기발이승설’(氣發理乘說) 등이 조선의 창조적인 성리학(性理學)의 태동에 이바지하지만, 전자는 주리론(主理論)의 영남학파, 후자는 주기론(主氣論)의 기호학파로 자리 잡는다. 조선 중기 제11대 왕 중종(中宗, 1488-1544, 재위 1506-1544), 제13대 왕 명종(明宗, 1534-1567, 재위 1545-1567), 제14대 왕 선조(宣祖, 1552-1608, 재위 1567-1608) 때 문신으로 우좌영의정을 지낸 이준경(李浚慶, 1499-1572)은 서거직전 붕당(朋黨)이 있을 것이니 이를 타파하여야 한다는 내용의 유소(遺疏: 죽음을 앞두고 임금에게 올리는 상소)를 올려 율곡이이(栗谷李珥), 서애유성룡(西厓 柳成龍, 1542-1607) 등 신진사류(新進士類)의 규탄을 받았으나, 불과 3년 뒤인 1575년에 동서분당(東西分黨)이 일어난다. 이준경(李浚慶)의 예언대로 퇴계이황(退溪李滉)과 율곡이이(栗谷李珥)의 학설은 조선분열과 쇠망의 원인을 제공한다.
기호학파는 구백제문화권의 서인으로, 영남학파는 동인으로 나뉜다. 이후 서인은 다시 노론과 소론으로, 동인은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는데, 퇴계이황(退溪李滉)으로 대표되는 영남좌도학파(강좌학파 江左學派: 신라와 가야 통합이전의 신라문화권)의 남인과 남명조식(南冥曺植, 1501-1572)으로 대표되는 영남우도학파(강우학파 江右學派: 가야문화권)의 북인으로 구분된다. 전자는 성리학(性理學)의 이론적인 탐구에 중점을 두었다면, 후자는 성리학(性理學)의 실천적인 접근에 중점을 두었다. 역성혁명(易姓革命)으로 조선을 세운 이성계(李成桂)와 그 지배층은 자신들의 출신지역인들이 자기들의 통치를 거역하여 혁명을 일으킬까봐 두려워서 함경도와 평안남북도 등 이북출신을 차별한다. 그래서 고구려 문화권을 대표할 수 있는 성리학(性理學)은 태동하지 못한다. 이는 광활한 대륙을 호령하던 초강대국 고구려의 웅장한 기상인 호국사상과 상무정신(尙武精神)의 살신성인사상(殺身成仁思想)이 부재한 문약(文弱, literary indulgence to the neglect of military arts)시대의 쇠망의 길로 조선이 이미 걷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조선사대부는 성리학(性理學)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근거로 자신들은 ‘이’(理)로, 조선백성은 ‘기’(氣)로 구분하여,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관념적인 이(理)가 구체적인 삶인 기(氣)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한다. 이는 지배층들이 글 좀 읽는다고 우쭐대며, 성리학의 근본정신인 윤리도덕은 지키지 않고, 자신들의 지배원리를 확립하기 위한 형식적인 예(禮)만 강조하여 문맹에 가까운 백성들을 억압하고 약탈하는 조선바리사이파(Pharisees)이었다. 극소수를 제외하곤 거의 다 탁상공론(卓上空論, armchair argument, ineffective useless talk)만 일삼다가 가난의 질곡에서 벗어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기들 스스로가 자정능력(自淨能力, self purification capacity)을 상실하여 부정부패와 부조리의 세계 속에서 갈팡질팡하다(to be at a loss)가 조선왕조는 일제의 노예국가가 전락한다. 실천이 없는 조선왕조지배이데올로기를 옹호하는 지식은 그저 악의 도구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준다.
II. 닫힌 관계
‘전통유학’(傳統儒學)은‘관계 맺기’ 기술을 가르친다. 그 대표적인 것이 삼강오륜(三綱五倫)이다.
삼강(三綱, the three fundamental principles in human relations)은 유교의 도덕에서 기본이 되는 세 가지 강령. 곧 ‘군위신강’(君爲臣綱: 신하는 임금을 섬기는 것이 근본임), ‘부위자강’(父爲子綱: 아들은 아버지를 섬기는 것이 근본임), ‘부위부강’(夫爲婦綱: 아내는 남편을 섬기는 것이 근본임)을 일컫는다. 이것은 글자 그대로 임금과 신하,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 사이를 인격적인 수평관계가 아니라 주종관계의 수직관계로 고착화시켜 합법적으로 아랫사람을 물건취급하며 짓밟고 수탈해도 좋다는 단계로 몰고 간다.
다섯 가지의 인륜인 오륜(五倫)은 오상(五常) 또는 오전(五典)이라고도 한다. 이는 ‘맹자’(孟子)에 나오는‘군신유의’(君臣有義: 임금과 신하의 도리는 의리에 있음), ‘부자유친’(父子有親: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도는 친애에 있음),‘부부유별’(夫婦有別: 부부사이에는 서로 침범하지 못할 인륜의 구별이 있음). ‘장유유서’(長幼有序: 어른과 어린이 사이에는 차례와 질서가 있음), ‘붕우유신’(朋友有信: 벗의 도리는 믿음에 있음)이다.
삼강(三綱)은 수직관계도덕에 대해, 오륜(五倫)은‘장유유서’(長幼有序)를 제외하곤 수평관계도덕에 대해 논하고 있지만, 원시형주나라체제를 모방하는 성리학(性理學)노예사상은 조선왕조지배층의 집권강화를 위한 지배통치이데올로기로 철저히 바뀐다. 이는 극기복례(克己復禮)고 할 때 극복해야 할 것은 하극상의 주체이고, 돌아가야 할 예(禮)는 주나라의 전통적인 질서와 문화이기 때문이다. 공츠(孔子)의 정명사상(正名思想: 각자의 지위를 바르게 한다는 의미로 이름의 뜻과 실제가 같도록 바로잡아야 한다는 주장)도 그렇다.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君君臣臣 父父子子 논어12:11)(君君臣臣父父子子)는 것은 이미 정해진 각자의 신분과 지위를 넘어서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피지배자인 백성의 주체성과 개성의 인격을 무시하고 획일화된 물건으로 전락시켜 지배자에게 예속시키는 것이다.
이처럼 윤리도덕의 실천덕목(實踐德目)이 정치이데올로기로 탈바꿈되어 수평관계는 사라지고 오직 수직적이고 종속 지배적관계만 강조되어 조선사회는 폐쇄적인 사회가 된다. 조선은 수직문화강조로 국내적으로 닫힌 사회를 지향함은 물론 대외적으로 한족(漢族)이 몽골족의 원(元, 1271-1368)나라를 멸망시키고 세운 통일왕조, 중국의 명나라(明, 1368-1644)만 상대하고, 만주족 누르하치(努爾哈赤)가 세운 정복왕조(征服王朝)로서, 중국 최후의 통일왕조, 대청제국(大淸帝國, 1636-1912)은 오랑캐가 세웠다고 하대(下待)한다. 동북아시아의 타국가들은 인정하지 않는데 조선 스스로가 소중화(小中華)라는 자가당착(自家撞着, self-contradiction)에 빠지며, 그 나마 달랑 국제외교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청(淸)나라조차 300년가량 상대하지 않아 선진문물을 받아들이지 못할뿐더러 국제정세에 눈이 어두운, 21세기의 북한체제와 거의 흡사한 외골수형의 고립국가가 되어, 결국 쇠망하고 만다.
그런데 미국천문학자 퍼시벌 로웰(Percival Lawrence Lowell, 1855-1916)은 외눈박이의 정체한 조선을‘고요한 아침의 나라’(Chosun, The Land of the Morning Calm, 1885)로 긍정 평가한다. “날마다 태양이 평화롭고 아름답게 떠올라 지상의 산과 들을 골고루 비추며, 동화 속 궁전처럼...”뿐만 아니라 1909년 출판된 시집 ‘기탄잘리’(Gitanjali: 神에게 바치는 頌歌라는 의미)로 1913년 아시아인으로는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인도의 시성(詩聖) 라빈드라나드 타고르(Rabindranath Tagore, 1861-1941)는 조선을‘동방의 등불’(A Lamp of the East-Korea)이라고 찬탄(讚歎, admiration)한다.“일찍이 아세아의 황금시기에/빛나는 등촉(燈燭)의 하나인 코리아/그 등불 한 번 다시 켜지는 날에/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마음엔 두려움이 없고/머리는 높이 쳐들 린 곳/지식은 자유스럽고/좁다란 담 벽으로 세계가 조각조각 갈라지지 않는 곳/진실의 깊음 속에서 말씀이 솟아나는 곳/끊임없는 노력이 완성을 향해 판을 벌리는 곳/지성의 맑은 흐름이/ 굳어진 습관의 모래벌판에 길 잃지 않는 곳/무한히 퍼져나가는 생각과 행동으로/우리들의 마음이 인도되는 곳/그러한 자유의 천당으로/나의 마음의 조국/코리아여 깨어나소서“
두 외국인의 경탄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성리학사상(性理學思想)은 마르틴 부버(Martin Buber, 1878-1965)의 ‘나와 너(Ich-Du)의 관계'(The I-Thou relationship)가 아니라 상대방을 물건 주무르듯이 내 마음대로 처리하는 인격이 배제된‘나와 그것(Ich-Es)의 관계'(I-It relationship)를 지향한다.
조선의 외눈박이, 외통수의 성리학사상(性理學思想)과는 달리 일본엔 다양한 사상이 활짝 울긋불긋 꽃피우고, 국제사회와 열린 관계를 유지한다. 이런 일본을 만든 메이지사상가들이 많이 있지만, 여기에선 지면관계상 후쿠자와 유기치(福澤諭吉, ふくざわゆきち, 1835- 1901)에 대해서만 간략하게 언급하고자 한다.
술꾼인 그는‘일본의 볼테르’, '근대 일본의 아버지'라고 불리며, 일본 최고액권인 만엔권의 주인공이다. 그는 문명론의 개략’(文明論之槪略 1875)에서 유교는 전근대적이며 억압이고 폐쇄적이며 야만적이라는 반(反)유교 사상을 전개한다. 조선과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는 미개한 나라이기 때문에 아시아를 떠나 그 당시 첨단과학기술과 세계최강경제력을 자랑하는 선진유럽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다쓰아뉴오’(탈아입구 脫亞入歐: 아시아를 벗어나 유럽에 편입, 1885)를 주창한다. 그의 국제정세의 탁월한 안목은 다음과 같은 선언에 다 들어있다.“우리 일본은 잡아먹는 자의 대열에 끼어 문명국 사람과 더불어 그들이 쫒는 먹이를 찾아야 한다.”그는 서구열강제국주의노선의 참여를 선언하며, 그 실현방편으로 ‘상업’과 ‘전쟁’을 제시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 '학문의 권유'(1872)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하늘아래에는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 그러나 현자우자(賢者愚者), 부자빈자(富者貧者), 신분이 높은 자와 낮은 자가 생긴다. 이는 배우느냐 안 배우느냐의 차이에 달렸다.’ 그래서 그는 ‘게이오대학’을 세운다.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郎, こいずみじゅんいちろう, 1942-),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郎, はしもと りゅうたろう, 1937-2006) 전 총리, 오자와 이치로(小沢一郎, おざわいちろう, 1942-) 전 민주당간사장이 게이오 대학 출신이다.
일본은 이미 16세기에 세계 최강의 에스파냐와 포르투갈로부터 선진기술과 문화를 배운다. 이것을 남만학(南蠻學) 또는 만학(蠻學)이라고 한다. 17세기에 세계 최강의 네덜란드로부터 서양의 의학과 과학지식을 받아들인다. 이를 난학(蘭學)이라고 한다. 1854년 ‘미일화친조약’(美日和親條約, Convention of Kanagawa/Kanagawa Treaty)을 체결한다. 미국은 일본을 어린아이 또는 제자 다루듯이 일본을 지도하며 일본의 모든 사상과 제도를 미국식으로 전환시킨다. 그래서 일본은 1868년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이라는 새 정치체제를 완비하고 새로운 국가로 거듭나며 원시형주나라를 지향하는 성리학의 노예사상 때문에 국제정세에 눈 먼 대한제국을 희생삼아 경제대국으로 성장한다.
III. 공츠(孔子)의 관계철학의 허상
공츠(孔子, BC 551-BC 479)집안 3대가 아내를 내쫓았다는 고사, 곧‘공씨삼세출처’(孔氏三世出妻)가‘공자가어’(孔子家語)후서(後序)에 나온다. 공츠(孔子)의 아버지 숙량흘(叔梁 紇), 공츠(孔子)의 아들 공리(孔鯉), 손자인 자사(子思)가 하나같이 자신들의 아내를 쫓아냈다는 것이다. 공츠(孔子)는 19세 때 송나라 올관(兀官)을 아내로 맞아 1년 후 아들을 보았다. 노나라 황제가 선물로 잉어 한 마리를 보내 이름을 공리(孔鯉: 鯉는 잉어라는 의미; 字는 우두머리 물고기의 伯魚; 본명과 字가 같음)라 지었다. 그러나 공츠(孔子)는 결혼 4년 만에 요즘의 이혼과 비슷한 휴처(休妻)를 했다는 설이 있다. 예기(禮記) 단궁(檀弓)편은 그 단서를 제공한다. 모친상(喪)을 당한 공츠(孔子)의 증손자 집에서, 공리(孔鯉)의 상복 착용 여부를 묻는 대화가 나오는데, 이 기록이 백년해로에 실패한 근거로 종종 인용된다.
이와 같이 공츠(孔子)는 아내 올관(兀官)이 제사상에 육포(肉脯)를 올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현재의 이혼과 비슷한 휴처(休妻)를 하여, 결국 아내 스스로 친정으로 간다. 공츠(孔子)자신이 ‘수신제가’(修身齊家)를 하지 못했는데, 어떻게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를 이룰 수 있겠는가?‘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을 실천하지 못한 그의 사상은 언어도단(言語道斷, unspeakable)에 불과하다.
공츠(孔子)는 경제관계에도 실패한 인물이다. 공츠(孔子)와 그 제자들의 언행이 담긴 어록, 논어(論語)는 다음과 같이 입증한다.“어려서부터 가난하여 많은 기예를 익혔노라”(논어 9:6).“부유함과 귀함은 모두 바라는 것이지만, ‘나의 길’로 얻은 것이 아니라면 취하지 않는다. 반면 빈곤과 천함은 내 탓이 아닐지라도 벗어나려 애쓰지 않는다”(논어 4:5). 공츠(孔子)가 천하를 주유하다가 제자들이 영양실조로 쓰러질 지경에 이르자, 제자 자로(子路, BC 543-BC 480)가 화난 낯으로 스승 공츠(孔子)에게 질문한다.“군자도 역시 궁핍하답니까?”공츠(孔子)는 이렇게 대답한다.“군자야말로 정녕 곤궁할 줄을 알지. 소인배들은 궁핍하면 바로 넘치느니라.”(논어 15:1). 결론적으로 군자(君子)란‘달동네 체질’의 인간형을 의미한다.“군자란 가난한데 즐기는 사람이다”(논어 1:15). 이처럼 공츠(孔子)경제철학은 21세기의 선진경제국엔 적합하지 않다.
논어(論語)에 “군자(君子)는 화이부동(和而不同)하고 소인(小人)은 동이불화(同而不和)한다”는 말이 있다. 군자(君子)는 타인과 화합하되 붙어 다니지 않으며(화합하여 이해관계로 패거리를 만들지 않으며), 소인(小人)은 붙어 다니되 화합하지 못한다(이익을 위해 협력하지만 타인과 사이좋게 지내지 못한다). 그런데 국제관계나 동맹관계에서 보면 정반대다. 공츠(孔子)의 군자상(君子像)은 한반도의 성자유형국가에 속하고, 소인상(小人像)은 영웅형의 구미선진국에 속한다.
IV. 나가는 말
성리학(性理學)의 이상적 인간형인 군자(君子)나 성인(聖人)이 통치하면 유학(儒學)의 유토피아인 대동사회(大同社會), 곧 서양의 플라톤(Plato, BC 428/427-BC 348/347)의 정치철학서‘국가정체(國家政體, Politeia)의 이데아국가가 구현될 텐데, 조선왕조지배층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계몽군주 세종대왕(世宗, 1397-1450, 재위 1418-1450)과 성웅 이순신(李舜臣, 1545-1598) 제독을 제외하면 이렇다 할 인물이 없었다. 조선왕조의 정치판은 성리학(性理學)사상과는 반대로 권력과 사익을 추구하는 권신(權臣)과 간신들이 서로 비방하고 이전투구(泥田鬪狗)양상을 일으키는 장소가 되어, 결국 대한제국은 일제의 먹잇감으로 전락하고 만다.
구한말에 사육신, 생육신의 절의정신(節義精神: 절개와 의리정신으로, 부부간의 관계에서는 貞節로, 벗 간에는 信으로, 국가와의 관계에서는 忠으로 이어지는 덕목)이 애국충절의 학사(學士), 의사(義士), 열사(烈士)를 속출(續出, continuous occurrence)하게 하여 일제에 강력하게 저항케 하지만, 이들은 거의 조선지배층과는 무관한 힘없는 무지렁이 백성이었거나 권력과는 거리가 먼 야당지식인이었다. 지배층은 애민(愛民), 위민(爲民), 이민(利民)의 성리학사상(性理學思想)과는 무관한 기생충들이었다. 이들은 자기들의 지배통치를 확립하기 위해 성리학(性理學)의 형식만 지키고, 그 내용인 윤리도덕사상을 실천할 능력이 없어, 그것을 오직 백성에게만 요구한 조선바리사이파(Pharisees)이었다.
21세기에도 일본과 중국은 오스트리아 빈 출신의 미국인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Peter Ferdinand Drucker, 1909-2005)의 매니지먼트에 열광하며 그것을 연구하고 삶에 적용하여 경제부를 키우는 실제적인 사람들이라면, 대한민국은 맹자가 말했듯이 상식에 불과한 마이클 샌델(Michael J. Sandel, 1953)교수의‘정의’(Justice)에 열광하되 실천보단 지적으로만 알려고 하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대한민국이 일본과 중국보다 윤리도덕실천이 뛰어난 것도 아니다. 매니지먼트는 배워야 하지만, 상식은 선천적인 요소라 배우는 것이 아니라 실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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