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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고종황제(高宗皇帝) 독살과 그 결과

아우구스티누스 2011. 10. 18. 17:31

          일제의 고종황제(高宗皇帝) 독살과 그 결과

 

    1895년 을미사변(乙未事變: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1919년의 고종황제(高宗皇帝, 1852-1919, 재위 1863-1907)의 독살사건은 일제의 주도면밀(周到綿密)한 계략(計略)아래 일제의 시다바리(したばたらき)를 자처한 조선인의 적극적인 가담에 의해 이루어졌음이 밝혀졌다. 두 사건은 세계역사에서 볼 수 없을 만큼 희대의 살인마 일본의 윤리도덕의식부재와 완전히 타락한 쪽발이의 부패성을 보여준다. 이런 치욕적인 역사적 사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36년의 노예생활을 ‘근대화수혜’라고 떠벌이는 얼빠진 한국인들이 너무 많다. 한반도에서 이들과 공존한다는 사실자체가 부끄러울 뿐이다. 필자는 먼저 일제가 고종의 독살사건에 직접 관여했는가에 대해 살펴보고, 구제불능 일제의 전적인 부패상(Total Depravity)을 밝혀내며, 그 결과와 우리의 각오에 대해서 논할까 한다.

 

                         I. 조선학자와 독립운동가의 견해

 

    1919년 1월 21일 덕수궁 함녕전에서 고종황제가 승하(昇遐, death of king)했다. 조선총독부는 고종황제의 붕어(崩御, demise)원인을 뇌출혈로 발표한다. 그러면서 고종황제의 사인(死因, cause of death)에 대한 소문이 난무한다. 그러면 대표적인 조선학자와 독립운동가의 견해를 들어보자.

 

    (1) 독립운동가 선우훈(鮮于燻, 1892-1961)은 광복 이후에 쓴 ‘사외비사’(史外秘史: 덕수궁의 비밀)에서 고종의 7촌 조카인 이지용의 증언을 근거하여 이렇게 서술한다. “고종황제는 독립운동자금으로 쓰려던 황실소유의 금괴 85만 냥을 12개의 항아리에 나눠 황실재정담당자 이용익을 시켜 비밀 장소에 매장했고, 장소가 그려진 보물지도를 이지용에게 맡기고 탈출하기 직전에 정보가 샌 탓에 일제의 사주를 받은 시종관 한상학(韓相鶴)과 이완용(李完用, 1858-1926)에 의해 독살 당했다.”사실 한상학과 이완용은 사돈지간이다.

 

    (2) 1907년 삼한갑족(三韓甲族) 명문세가(名門世家) 후손으로 독립운동가인 우당 이회영(友堂 李會榮, 1867-1932)은 고종황제에게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Hague Peace Conference)에 밀사를 파견해 1905년의 ‘을사늑약’ 체결의 부당성과 불법성을 알리라고 권면했지만, 실패로 돌아간다. 1919년 노벨평화상을 받은 제28대 미국 대통령 윌슨(Thomas Woodrow Wilson, 1856-1924)이 1918년 1월 8일에 선언한‘14개조 평화원칙’의 말미의“세력이 강하든 약하든 관계없이 모든 민족과 국가에 정의가 실현되어야 합니다. 그들 모두가 자유와 안전을 동등하게 보장받으며, 더불어 살아갈 권리를 갖고 있습니다.”라는 ‘민족자결주의’(民族自決主義, National Self-Determination) 제창에 자극되어 국내외에서 독립기운이 활발해지자, 우당은 오세창(吳世昌),·한용운(韓龍雲), 이상재(李商在) 등과 밀의한 뒤, 고종의 국외망명을 계획하고, 시종 이교영(李喬永)을 통해 고종에게 승낙을 얻은 뒤 김가진 등과도 비밀리에 연락하여 고종의 중국 망명을 도모하여 러시아에 망명정부를 세우려고 했지만, 1919년 1월 고종의 갑작스러운 서거로 뜻을 이루지 못한다. 그래서 고종이 중국으로 망명을 시도하려다 발각돼 독살 당했다는 소문이 나돈다.

 

    (3) 1910년 한일병탄 이후에 태백산, 곧 백두산이 있는 나라의 국민으로 나라를 잃고 일본의 노예가 된 것이 슬퍼 미쳐서 돌아다니는 노예라 하여 자신을 ‘태백광노’(太白狂奴), 나라를 잃고도 살아있는 것이 부끄럽다고 하여 ‘무치생’(無恥生)의 필명을 사용했던 백암 박은식(白巖 朴殷植, 1859-1925)은 1925년 3월 이승만의 대통령 면직으로 상해임시정부의 제2대 대통령으로 선출될 정도로 위대한 독립운동가로서 대동교(大同敎)를 창건한 인물이다. 백암에게‘국사’는 독립운동으로서의 하나의 방법론이었기 때문에‘한국통사’(韓國痛史, 1915)와 ‘한국독립운동지혈사’(寒國獨立運動之血史 上下編, 1920)를 집필한다.

 

    ‘한국통사’는 ‘통한(痛恨)의 역사’ 곧 ‘부끄러움의 역사’라는 뜻이며, 한국독립운동의 역사를 피의 역사로 보는‘한국독립운동지혈사’(寒國獨立運動之血史 上下編)의 밑거름이다. 그는 ‘한국통사’ 서언에서 이렇게 말한다,“발해의 역사를 아우른 고려가 북으로 발전하지 못한 것은 발해의 역사를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나라는 멸망하더라도 역사는 결코 없어질 수 없다’고 했으니, 나라가 형체(形體: 겉모양)라면 역사는 정신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나라의 형체는 허물어지고 말았지만 정신은 살아남아야 할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나는 역사를 쓴다. 정신이 존속하여 멸망하지 않으면 형체는 부활할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갑자년 이후의 50년사에 불과할 뿐이니 어찌 족히 우리 4천년 역사 전부의 정신을 전할 수 있겠는가.”“일제에 나라를 뺏긴 한국, 그 망국사를 아무도 기록하지 않고 내버려 둔다면 발해가 그 역사를 잃어버리고 민족과 영토까지 잃어버린 쓰라린 그 전철을 다시 밟는 것과 같다”“그렇기 때문에 나는 국혼(國魂)을 간직하고 광복을 확신하기 위해 이 통사를 쓴다.”

 

    ‘한국독립운동지혈사’의 저서에서 백암은 고종의 독살사건을 이렇게 전한다.“광화문 앞 전수학교 담에는 ‘저들은 파리평화회의를 두려워하여 우리황제를 독살하였다’는 내용의 글이 붙여졌다.”

 

    (4) 좌옹 윤치호(佐翁 尹致昊, 1865-1945)는 1881년 17세에 어윤중을 수행하여 일본에 갔다가 2년간 중등 교육을 받은 것을 시작으로 1884년부터 상하이의 중서서원(中西書院)에서 3년 6개월, 1888년부터 미국 밴더빌트 대학과 에모리 대학에서 5년간 대학 교육을 받아, 중국어, 일어, 영어에 능통하고, 강대국의 속성, 국제정세에 밝은 유학파 지식인이다. 그는 1897년 서재필(徐載弼)·이상재(李商在) 등과 독립협회에 가입하였고, 1898년 2월 부회장에 선출되었다. 서재필이 미국으로 추방되자 같은 해 8월 독립협회회장에 취임하여 독립협회를 이끌며 국권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뿐만 아니라 좌옹은 고종황제를 설득하여 만민공동회의(萬民共同會)를 개최하기로 허락받지만 좌옹을 대통령으로 하는 대한공화국을 설립한다는 설이 퍼지자 위기를 느낀 고종황제가 독립협회 임원을 체포하고 만민공동회를 강제 해산시킨다.

 

    좌옹은 1911년 테라우치 총독 암살 계획에 가담한 혐의, 105인 사건으로 6년형을 선고받는다. 1913년 10월에 아버지 윤웅렬1840-1911)로부터 승계한 남작 작위를 박탈당하고, 심한 고문에 못 이겨, 1915년에 전향을 선언한다. 좌옹은 친일 전향을 조건으로 1915년 2월 13일 특사로 출감하며, 출소한 이후 조선총독부 일간지인 매일신보(每日申報, 1915. 3. 14)에 일본 제국주의를 찬양하고, 1943년 11월 18일 중일전쟁에 청년들이 자원입대할 것을 호소한다. 그는 이 공로로 1945년 2월 일본제국의회의 칙선 귀족원의원을 지낸다,

 

    좌옹은 1883년부터 1943년에 이르는 60년간 대부분 영어로 쓴 방대한 일기에서 자신이 일본의 개노릇을 한 것을 변명하며, 최남선이나 이광수가 친일파로 불리는 것을 강하게 비판한다. 그러나 해방 후 반민특위의 출두명령을 받고 자결한다. 그 이유는 영어로 쓴 좌옹일기에 잘 나와 있다. “이 세계의 낙원인 일본에서 평생 살았으면 좋겠다.”“만약 내가 마음대로 내 고국을 선택할 수 있다면, 나는 일본을 선택할 것이다. 오, 축복받은 일본이여! 동방의 낙원이여!”(1893년 11월 1일).

 

    그리고 좌옹의 일기엔 고종황제의 시신을 직접 본 명성황후의 사촌동생 민영달(閔泳達)이 중추원 참의 한진창(韓鎭昌)에게 한 말을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건강하던 고종황제가 식혜를 마신지 30분도 안 돼 심한 경련을 일으키며 죽어갔고, 시신의 팔다리가 1-2일 만에 크게 부어올라 황제의 한복바지를 벗기 위해 옷을 찢어야 했으며, 이가 모두 빠져있고 혀는 닳아 없어졌으며, 30cm 정도의 검은 줄이 목에서 복부까지 길게 나 있었고, 승하 직후 궁녀 2명이 의문사 했다.”(1919년 2월 11일)

 

             II. 선교사 마티 윌콕스 노블(Mattie Wilcox Noble, 1872-1956)의 일기

 

    1892년부터 1934년까지 42년간 남편과 함께 선교사로 조선에서 근무했던 미국 감리교의 노블의 일기엔 이렇게 기록되어있다. “오늘 오전에 돌아가신 전 황제(고종)가 사실은 일본정부의 사주에 의하여 살해된 것이라는 전단이 온 거리에 뿌려졌다”(1919년 3월 1일).

 

                    III. 구라토미 유자부로(倉富勇三郞, 1853-1948)의 일기

 

    법제국장관(1913-1916)을 역임하고, 1919년 당시 일본궁내성(宮內省)의 제실(帝室)회계심사국 장관이었던 구라토미 유자부로는 3대 조선통감, 초대조선총독(1910-1916)이자 일본총리대신(1916-1918)을 지낸 데라우치 마사타계(寺內正毅, 1852-1919)와 비우호적 관계이어서, 그의 고종의 독살사건과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까발린다.

 

    데라우치는 당시 제2대조선총독이자 자신의 심복인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 好道, 1850-1924)에게 중대한 밀명을 내린다.“고종황제로 하여금 제1차 세계대전 청산을 위한 국제회의인 파리강화회에 대한제국의 독립청원시도를 하지 말도록 하는 동시에 1905년의 11월의 보호조약이 유효였다는 것을 확인하는 문서를 요구하고 이를 거부할 땐 독살하라.”데라우치는, 고종황제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주창의 계기로 간도와 상하이 등의 항일독립운동세력을 규합하는 구심점 역할을 할까봐 우려해 고종독살을 지시한 것이다.

 

    마침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 일본총리가 2011년 10월 18일 방한 할 때 '대례의궤' (大禮儀軌: 오대산사고본) 등 궁내청 소장 도서 3종 5책을 반환한다고 한다. '대례의궤'는 고종이 1897년 10월 12일 환구단에서 황제즉위식을 갖고 다음날 조선최초의 자주적 국가인 대한제국을 선포한 과정을 담은 것이다. 이것은 고종황제가 일왕과 청나라황제와 동급임을 전 세계에 선언한 것이다. 이처럼 고종황제의 주권의식과 자주의식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일제가 고종황제를 독살한 이유가 분명하다.

 

    하세가와가 고종황제에게 데라우치의 뜻을 전달했지만, 예상대로 고종황제는 이를 강하게 거부한다. 그러자 데라우치는 한일합병 뒤 자작(子爵)작위를 받은 일제의 하수인 민병석(閔丙奭)과 윤덕영(尹德榮)에게 독살지시를 내린다. 이들은 대한제국이 독립하면 자신들은 일제의 하수인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드러날까 봐 적극적으로 고종황제독살사건에 가담한다. 쪽바리가 되고자 했던 일제 하수인 송병준(宋秉畯)은 고종황제의 독살의 정보를 구라토미에게 전달한다. 일제의 꼬봉 민병석과 윤덕영에 의해 고종황제는 1919년 1월 21일 독살된다.

 

            IV. 가혜(佳惠) 이방자(李方子, 리 마사코, 1901-1989)여사의 수기((手記)

 

    고종과 엄귀비(순헌황귀비엄씨, 1854-1911) 사이에서 태어난 영친왕 이은(英親王 李垠1897-1970)의 비 이방자여사의 수기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궁정 전의인 안모씨가 일본정부로부터 뇌물과 협박을 받고 태황제(太皇帝: 순종황제로부터 태황제라는 칭호를 받지만 실권이 없는 허위虛位)를 독살하였다. 일본인들이 태황제를 독살한 것은 마마께서 또 다시 파리강화회의에 대신들을 보내려 했기 때문이다.” 영친왕은 일본황실로부터 귀족 대우받으며 육군사관학교를 거쳐 제1항공군사령관(육군중장)지위까지 오른 인물로, 아버지처럼 따르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를 안중근님이 저격하자, 이를 매우 슬퍼하며 석 달 동안 상복을 벗지 않을 만큼 철두철미 쪽바리였다.

 

                           V. 일제에 적극적으로 협조한 시다바리들

 

    고종황제의 독살사건에 비추어 볼 때 대한제국의 쇠망은 일제의 시다바리들의 적극적인 협조로 기인한 것이다.

 

    즉각 합병론자인 데라우치가 1910년 7월 2일 제3대 통감으로 부임하자 노론의 당수 이완용은 신소설작가이자 신연극운동의 선구자인 비서 이인직(李人稙, 1862-1916)을 8월 4일 밤 11시에 통감부 외사국장 고마쓰에게 보내 합방협상에 나서게 한다. 이인직은 한밤중에 통감부의 외사국장 고마쓰를 찾아가 “귀하 나라를 섬기면 우리에게 어떻게 해주시겠습니까?”하고 묻는다. 고마쓰는 이렇게 대답한다.“귀족명을 만들어서 계속 귀족으로 대우하고 막대한 은사금으로 나라 팔아먹은 대가를 지불할 것이다.” 이인직은 감격하며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중국을 섬겨왔는데 이제 일본으로 바꾸는 것입니다.”사실 이인직이 쓴 신소설(장편소설)의 효시라고 하는‘혈(血)의 누(淚)’(1906)는 청일전쟁 때 청나라 군사가 조선처녀 옥련을 겁탈하려는 것을 일본군이 구해준다며, 일제의 침략행위를 미화한 소설이다.

 

    매국노 이완용은 열이틀 후인 1910년 8월 16일 일본의 호우 피해를 위문한다는 핑계로 데라우치를 방문해 30분 만에 매국 협상을 마무리 짓는다. 이완용은 데라우치 통감에게 “고종의 지위는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묻는다. 데라우치는 “왕으로 봉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자 이완용은 “대공(大公: 국왕과 공작 사이)으로 하면 어떠냐?”고 되레 고종을 격하시킨다. 데라우치는 오히려 ‘구래(舊來)의 칭호인 국왕으로 하는 것이 낫다’고 답한다. 그 후 대한제국은 불과 일주일 후인 8월 22일 사실상 멸망한다.

 

    총독부는 일진회에 15만원, 대한협회에 6만원, 이완용 개인에겐 14만 회원을 가진 일진회와 동일한 15만원을 건네준다. 일제는 이완용수단이 일진회보다 한 수 위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처럼 조선을 푼돈 받고 넘겨준 이완용을 비롯한 76명의 일제꼬봉들은 일제로부터 훈장과 작위를 받는다. 왕족으론 대원군의 조카와 순종의 장인이 있고, 당인(黨人) 64명 가운데, 북인은 2명, 소론은 6명, 노론은 56명이다. 남인은 단 한명도 없다.

 

    우리는 이완용과 이인직의 두 사람에게서 조선역사인식을 읽을 수 있다. 사실 이완용은 1910년 한일강제병탄 후 16년 후인 1926년, 이인직은 6년 후인 1916년에 사망한다. 겨우 6년, 16년의 삶을 호강스럽게 살려고 매국노 짓을 일삼은 것이다. 조선시대의 주류 노론은 뙈놈이 되고자 했음은 물론 짱꼴라 시각으로 조선역사를 바라보았고, 시대가 바뀌자 노론 당수 이완용과 그의 비서 이인직은 쪽발이가 되기를 소원했을 뿐만 아니라 일제의 시각으로 대한제국역사를 바라본 것이다. 결국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이후의 조선의 지배층 노론은 노예형인간이었다. 이에 반해 남인은 일제의 엉터리로 작성된 문서와 일제의 하수인 노론들의 협조로 일제로 넘어간 대한제국의 회복을 위해 국내에서 뿐만 아니라 중국과 러시아 등 국외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벌인 주인형인간이다.

 

                                VI. 고종황제독살사건의 결과

 

    대한제국의 지배층 주류들은 자신들이 모시고 있던 고종황제를 독살하거나 명성황후(明成皇后, 1851-1895)를 시해하는데 일제의 하수인 노릇을 했다. 그런데 일제가 주도한 대한제국의 광무황제(光武皇帝) 독살사건은 불행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왔다. 이 사건으로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고, 3.1운동영향은 국내외적으로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국외적으로 중국 현대탄생의 전환점이라는 1919년 5.4운동의 시작에 영향을 주었고, 국내적으로는 한반도의 국호(國號)결정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동년 4월 10일 오후 10시 중국 상해에서 임시정부 첫 의정원(21세기의 국회)이 밤을 새우며 국호를 결정하기 위해 토론했다. 신석우(申錫雨, 1894-1953)가‘대한민국’이란 명칭을 제안하자, 여운형(呂運亨, 1886-1947)은 대한(大韓)이란 말은 조선왕조말엽 잠깐 쓰다가 망한 이름이니 부활시킬 필요가 없다고 대꾸한다. 신석우는 대한으로 망했으니 대한으로 흥하자고 설득한다. 결국 표결에 부치기로 했고, 참석 인원 29명이 투표에 참가해 다수결로‘대한민국’국호가 채택되었다. 황제의 나라인 ‘대한제국’(1897)이 국민의 나라인 ‘대한민국’(1919)이 된 것이다. ‘제’와 ‘민’의 글자 하나의 차이가 주는 의미는 엄청나다. 그래서 헌법에 임시정부가 대한민국의 공식정부로 기록된 것이다.

 

    한 명의 죽음은 비극이요, 백만 명의 죽음은 통계이다."라는 신념아래 스탈린(Stalin, 1878-1953)은 폭압폭정을 한 희대의 살인마다. 일제의 36년 식민지배는 스탈린보다 더 혹독했다. 그 시기를 '근대화시혜기'라고 하면, 스탈린처럼 우리민족이 당한 모든 고통과 수모를 통계로 계산한다는 의미다. 그래서 이전에 전한(前漢)시대의 역사가이며 사기(史記)의 저자인 사마천(司馬遷, BC 145 ?-BC 86 ?)도 "죽음은 때로는 태산보다 무겁고 때로는 새털보다 가볍다 "고 표현했다. '얼'이 죽은 '겉모습'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그러나 '얼'이 살아있으면 언젠가 ‘겉모습’은 부활한다. 민족정기를 손상시키는 역사서술을 해서는 안된다. 한반도의 근현대사는 대한제국을 지키려고 했던 고종황제의 주권론고수, 3.1운동, 임시정부활동과 독립운동전개사로 재정립해야 한다.

 

    그리고 2010년 8월 24일부터 26일까지 3일간 열린 동북아역사재단의 ‘한일강제병합 100주년 재조명 국제학술대회’리셉션에서 무샤코지 긴히데 오사카 경법대 아시아태평양연구센터소장은 ‘식민주의 범죄와 인식을 위하여-한일강제병합의 교훈’을 발표하고 “식민주의 범죄는 ‘반평화범죄’와 ‘반인도적 범죄’ 에 모두 해당하는 전형적인 범죄로 인식돼야 한다”며 “이런 의미에서 일본인들이 한국의 식민지화를 정당화하려는 것은 현명하지 않은 시도”라고 지적한다. 이와 같이 일본의 양심 있는 학자들은 일제의 36년의 한바도의 침략과 약탈은 국제범죄라고 인식한다. 더욱이 국제형사재판소(ICC)도 2010년 5월 식민주의를 국제범죄로 규정했다. 그래서 우리는 일본을 고발해야 한다.

 

                                         VII. 나가는 말

 

    우린 대한민국을 모국(motherland) 또는 조국(fatherland)이라고 부른다. 전자는 여성성(feminity)을 강조하고, 후자는 남성성(masculinity)을 강조한다. 그래서 대한민국은 국내에선 홍익인간의 여성성(자유, 사랑, 평등, 정의, 평화 등)을, 국외적으론 지난날의 노예국가로 전락하지 않도록 부국강병에 의한 힘의 남성성(패권주의)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순서를 뒤바꾸어 타국가나 타국민을 희생시키지 않고, 우리 국민을 억압하거나 희생시키면 그것은 근친상간을 범하는 것이다. 영어에 ‘son of bitch’라는 말이 있다. 인간이 최초로 근친상간의 금지(incest taboo)의 상징으로 타부화 시킨 단어다. 왜냐하면 개들은 대낮에도 사람들 보는 앞에서 인간의 타부를 깨뜨리고 부끄러운 줄 모르고 그 짓을 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국무부 외교전문(電文) 25만 건을 폭로한 ‘위키리크스’(Wikileaks)의 ‘한국편’엔, 문맥을 보면 외교적인 언사(言辭)를 사용한 흔적이 간혹 있지만, 대체적으로 미국의 이익을 위해 공공연하게 대한민국과 국민을 희생시키는 언담(言談)이다. 이런 매국노, 스파이들이 너무 많다. 그리고 쪽바리의 시각으로 우리의 근현대사를 재단하여 일제의 36년의 노예생활은 ‘근대화수혜’라고 떠들며, 일제의 성노예로 짓밟힌 우리의 어머니와 누이의 비참한 삶을 자발적인 행동으로 해석하고, 심지어 독도도 쪽발이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개만도 못한 자들이 즐비(櫛比)하다. 게다가 살인마 김정일 체제를 공공연하게 찬양하는 ‘좀비’(Zombie)들의 목소리가 너무 크다. 이런‘암흑의 고깃덩어리’에게 예의를 갖춰 개의 자격을 부여해 이렇게 외쳐본다.‘sons of bitch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