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와 정의의 나라/신학 이야기

‘오컬트 바티칸 프란체스코 교도 문재인과 그 정부의 불안과 공포(하이데거 중심으로)’ YouTube!!!

아우구스티누스 2021. 9. 23. 07:34

가을을 여물게 하는 비와 함께 우리에게 한가위가 다가왔습니다. 인내의 산물인 햇과일과 햇곡식에 풍성함을 느낍니다. 환하게 떠오르는 보름 달 대신 대지의 더러움을 씻어버리는 비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시사해주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역사와 사실의 조작된 거짓세계를 진실의 세계로 바꾸라는 강력한 메시지입니다. 우리 모두 드루킹 여론조작과 4.15부정선거를 낱낱이 들추어내어 천주교도 문재인 정부를 심판하고, 자유민주공화국, 자유시장경제, 건전하며 건강한 복지국가로 회복시켜야 합니다.

 

지난 번 YouTube에 올린천주교도 문재인 정부의 디스토피아 정체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참조하시면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2020114일에 올린 제15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통해서 본 기독교도 참조하면 마르틴 하이데거 사상을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사실을 감안하며 강의하겠다.

 

1. 하이데거의 사상이 어려운 이유

 

(1) 사상편력

 

독일의 실존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와 논리실증주의와 언어철학의 선구자 비트겐슈타인(Ludwig Josef Johann Wittgenstein, 1889-1951)과 동일한 해 독일 남서부에 있는 주 바덴뷔르템베르크(Land Baden-Württemberg: 주도 Stuttgart) 메스키르히(Meßkirch)에서 프리드리히 하이데거(Friedrich Heidegger)와 요한나(Johanna Kempf)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부친은 제1차 바티칸공의회(라틴어 Concilium Vaticanum Primum; 영어 First Vatican Council, 1869-1870)를 지지하는 메스키르히 교회의 성당지기(sexton)였다. 가난해서 하이데거의 부모는 자신의 아들을 대학교에 보낼 수 없었다. 메스키르히 본당의 주임신부 콘라트 그뢰버의 주선으로 하이데거는 김나지움에 입학해 20세 때인 1909년 졸업하며 예수회 신학교(Jesuit seminary)에 들어가지만 정신신체증(a psychosomatic heart condition) 때문에 14일 만에 그만두고(사실 그는 선수 못지않은 스키 전문가), 1909바덴뷔르템베르크알베르트 루트비히 프라이부르크 대학교(독어 Albert-Ludwigs-Universität Freiburg; 영어 the University of Freiburg) 신학부에 입학하여 신학 공부를 하다가, 2년 후 인1911년 철학으로 전공을 바꿔 24세인 1914년에 아서 쉬나이더(Arthur Schneider)교수의 지도로 심리주의(psychologism)주제 논문을 작성해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한다. 1916년 하이데거는 하인리히 리케르트(Heinrich Rickert)의 지도로 둔스 스코투스 하빌리타치온(Habilitation: 교수자격부여제도로, 하빌리타치온 과정을 마치면 사강사Privatdozent라는 칭호가 주어짐)(a habilitation thesis on Duns Scotus)을 완성한다.

 

하이데거는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야간 강의를 맡았는데, 이때에 수강생 중 한 명인 엘프리데 페트리(Elfride Petri)와 만나 사귀게 되고, 1917년 결혼에 이른다. 1917321일 천주교식으로 결혼식을 거행하고, 1주일 후 페트리 부모님 면전에서 기독교식으로 결혼을 올렸다. 그의 부인은 천주교도가 아니라 기독교인이다. 그는 부인에게감사하다유언을 전하며, 전집 서문에 아내에게 바친다라는 글을 남겼다.

 

장년기에는 기독교에 관심을 지녔으며, 그 후에는 그리스종교에로 기울어졌고, 다신교 그리스철학의 영향을 받아 신들이라고 복수형으로 사용했다.

 

77세 때인 1966923일 독일의 대표적인 시사 주간지슈피겔’(the German news magazine Der Spiegel)과의 인터뷰에서 루돌프 아우크스타인과 게오르크 볼프(Rudolf Augstein and Georg Wolff)로부터 철학이 궁핍한 시대에 수여할 실천적 지혜를 요구받자, 하이데거는 절망하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동시에 두 손바닥을 보이면서“(다신 가운데서) 오직 하나의 신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독어 Nur noch ein Gott kann uns retten; 영어 Only a God Can Save Us)고 고백했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서거하기 전 2, 3개월 동안 기자이자 프라이부르크 대학 교수였던 베른하르트 벨테 천주교 사제(Bernhard Welte, a Catholic priest, Freiburg University professor and earlier correspondent)를 만나, 자신의 임종에 대해 준비하고, 천주교식으로 장례를 치렀다.

 

이와 같이 그는 천주교->기독교->그리스종교->천주교라는 종교여행을 했지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하고, 철학을 통해 희미하게 인식했던 신과 내세를 생각하며 천주교장례식을 선택한 것이다.

 

(2) 하이데거는 선불교를 서양에 소개한 재가 불교학자 스즈키 다이세츠(鈴木大拙, 1870-1966)의 저서를 읽고 많은 영향을 받는다. 다이세츠는 미국 동북부에 소재한 8개의 명문대학 아이비리그(Ivy league), 곧 코넬, 컬럼비아, 예일, 프린스턴, 하버드, 다트머스, 브라운, 펜실베이니아 대학에서 선불교를 전하며, 청교도정신을 약화시킨다.

 

스즈키 순류(鈴木俊降, 1904-1971)도 미국 불교의 조사(祖師)라고 인정받을 정도로 불교포교에 대성공했다.

 

하이데거는 노자의 사상과 선불교를 자신의 철학사상으로 삼았는데, 자신의 사상의 기원을 다른 철학자들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자신도 모르는 언어를 창조(신조어; 독어 Neologismus; 영어 neologism=newνέοnéo+wordλόγοςlógos)해서 자신뿐만 아니라 독자들도 하이데거사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하이데거의 종교관은 종교백화점이라고 할 정도로 다양해서 더욱 그렇다.

 

2. 존재

 

하이데거는 서양 철학사는 존재자(das Seiende)만 다룬 존재망각’(Seinsvergessenheit; 영어 Forgetfulness of Being)의 역사라고 주장하며 존재(das Sein)를 내세운다. 그리고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즐거운 학문’(독어 Die fröhliche Wissenschaft, 1882; 영역 The Gay Science or The Joyful Wisdom’)108, 125, 343 연에서 신의 죽음을 선언해서 하이데거는 신을 존재라는 단어로 대체한다.

 

(1) 전기사상인 존재와 시간(독어 Sein und Zeit, 1927; 영역 Being and Time)은 비존재(非存在)인 죽음이 현존재의 본질이라고 주장한다.

 

현존재는 죽음에 이르는 존재’(독어 Sein-zum-Tode; 영어Being-toward-death).

 

(2) 산업혁명과 과학기술을 비판하기 위해서 태어난 후기사상의진리의 본질에 관하여’(Vom Wesen der Wahrheit, 1930년 저작, 1943년 출판; 영역 On the Essence of Truth)는 과학기술(도구적 이성, 기술적 이성)의 모든 것의 도구화로 존재인 고유성’(독어 Eigenschaft; 영어 property)이 상실되었다고 선언한다.

 

예컨대, 장미꽃은 때(그리스어 ΚαιρόςKairos)가 되면 자기 전개한다. 이것이 고유성이고 노자의 무위’(無爲)이며 불교의 여여’(如如; tathatā: so so).

 

3.‘세계 내 존재’(世界內存在; 독어 In-der-Welt-Sein; 영어 Being-in-the-world)

 

인간은 세계 내 존재인데, 이것이 피투성’(被投性; 독어 Geworfenheit; 영어 being thrown into the world, or thrownness)이다. 두 가지 유형의 실존의 양상이 있다.

 

(1) 일상적 현존재의 비본래의 실존의 양상은 퇴락(頹落; 독어 Verfallen; 영어 falling)이다.

 

비본래의 실존은 잡담(독어 das Gerede; 영어 gossip or chatter), 호기심(die Neugier; 영어 curiosity), 애매성(독어 die Zweideutigkeit; 영어 ambiguity or obscurity)에서 자기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고 다만 공중(독어 Öffentlichkeit; 영어 publicity)에 유혹되어서 자기의 실존가능성을 평균화 하는 사람으로서의 존재방식이다.

 

이런 사람은 비본래의 자기’(독어 uneigentliches Selbst; 영어 inauthentic individual) 또는 세간인’(世間人; das Man-3인칭 부정대명사로 소유격 eines 간접목적격 einem, 직접목적격 einen/독어의 사람을 뜻하는 der Mann <e>s/ Männer, der Mensch en/en이 아님)이라고 한다.

 

(3) 기투(企投; 독어 Entwurf; 영어 Projection)

 

퇴락의 삶을 멀리하고, 양심의 소리(독어 Gewissensruf; 영어 the call of conscience)를 들으며 자신의 존재가 근원적으로 무()임을 철저하게 감내하며, 죽음에로의 선구(Das Vorlaufen zum Tode; 영어 forerunning into death)하며, 이런 사람을 현존재(독어 Da-sein; 영어 Being There or human existence. being that is there in its world)라며 일컬으며, 그는 죽음에로의 선구자(독어 das vorlaufende Sein zum Tode)로 본래적 자기(독어 eigentliches Selbst; 영어 authentic individual).

 

이처럼 현존재는 단순히 현사실적이지 않고, 오히려 자기의 현사실성(現事實性; 독어 Faktizität; 영어 facticity)의 존재를 자기의 것으로 떠맡으면서 자기의 존재를 부단히 기투한다. 이것을 실존성(라틴어 existentia; 독어 die Existenz; 영어existence)이라고 한다.

 

4. 공포와 불안

 

기독교인에겐 궁극적으로 공포와 불안이 없다. 하이데거를 비롯한 실존주의철학자들이 공포와 불안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기 때문에, 일단 이들의 의견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상고해보자.

 

(1) 공포(독어 Furcht; 영어 fear): 특정 대상이 만들어내는 감정이기에 그 대상을 없애면 공포도 사라진다.

 

1) 과학기술이전엔 야수 때문에 사람들은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다. 21세기에 서울에 멧돼지가 출현하면 온통 난리다.

과학기술과 문명의 발달로 야수를 한 곳에 집합시키고, 도시를 건설했기 때문에 전 세계인이 자유와 안전한 삶을 향유한다. 일례로 21세기의 아프리카를 생각해보자. 야수들이 넘쳐나기 때문에 아프리카는 문명국가들의 입장에선 동경의 대상이 되겠지만, 막상 그것이 현실화되면 사람들은 두려움 속에서 삶을 지탱하지 못한다. 그 야수들을 안전하게 처리해야 비로소 사람들은 평심으로 돌아와 문명과 문화를 일군다.

 

그런데 오컬트 바티칸과 천주교도들은 기독교의 과학기술을 아주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본다. 바알 집단인 바티칸에 사자나 호랑이 등 맹수나 뱀 한 마리 정도만 풀어놓아도, 정상적인 삶을 영위할 수 없을 것이다. 과학기술의 혜택을 감사차원에서 생각하지 보다는 자연을 인간보다 우선시하는 사탄적인 사고, 곧 자연의 우상숭배 때문에 전 세계가 카오스세계로 진입했다.

 

문재인과 그 정부의 경우 공포의 대상은 대한민국 법원에서 심판한 드루킹 여론조작 사건과 재판과정에서 드러난 4.15부정선거 등의 많은 증거물들 이고, 이것의 결과가 광화문 차벽(재인산성)이고, 경찰국가 지향이다. 이것이 또한 디스토피아 세계임을 부정하기 어렵다.

 

(2) 불안(독어 Angst; 영어 anxiety): 불안은 정신의 자유에서 오기에 뚜렷한 대상을 전제로 하지 않고, 원인과 연결되지 않는 근본 정태성(독어 Grundbefindlichkeit; 영어 the fundamental mood or the basic mental state, the basic condition, the basic mood)이다.

 

비본래적인 실존은 퇴락적 삶을 살고 있는데 반해, 불안은 일상적 현존재에게 결단케 하여 본래적인 실존으로 이끈다.

 

문재인 정부의 불안은 노무현 전 대통령, 노회찬 전 국회의원, 박원순 전 서울시장 등의 고위공직자의 죽음에서 기인한 것이 아닌가?

 

문재인과 그 정부는 오컬트 바티칸 교주 프란체스코와 예수회의 명령을 준수하지 못하면 자신들이 타살 당할까봐 불안에 떨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5. 종합

 

문재인과 그 정부가 공포와 불안에서 해방되려면, 한 명 한 명 모두가 일평생 죽음의 공포 곧 사탄의 종노릇 하는 인류를 구원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죽음을 믿고, 다시 사신 주님의 부활을 믿음으로 영생을 얻는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면 오컬트 바티칸과 예수회가 주는 미지의 공포와 불안에서 해방되는 동시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과 행복과 기쁨의 삶을 향유 할 수 있다.

 

성경은 이렇게 증언한다.

 

“15.Then when lust hath conceived, it bringeth forth sin: and sin, when it is finished, bringeth forth death.”(KJV. James 1:15)

 

“15.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개역한글. 야고보서 1:15)

 

“5.covetousness, which is idolatry ”(KJV. Colossians 3:5)

 

“5.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개역한글. 골로새서 3:5)

 

“27.And as it is appointed unto men once to die, but after this the judgment”(KJV. Hebrews 9:27)

 

“27.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개역한글. 히브리서 9:27)

 

“14.Forasmuch then as the children are partakers of flesh and blood, he also himself likewise took part of the same; that through death he might destroy him that had the power of death, that is, the devil; 15. And deliver them who through fear of death were all their lifetime subject to bondage.”(KJV. Hebrews 2:14-15)

 

“14.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15.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개역한글. 히브리서 2:1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