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와 정의의 나라/신학 이야기

‘조선 최초의 기독교 순교자 백홍준의 노끈성경은 자유와 새명(부활)을 탄생시켰다’ YouTube!!!

아우구스티누스 2021. 1. 21. 05:58

1. 역사적 배경

 

조선과 중국명나라, 청나라는 사행제도(使行制度)를 통해서 문서전달하는 동시에, 조공과 책봉체제를 통해서 동북아시아 국제질서와 외교의례를 세웠다. 조선과 중국은 일본을 정상국가로 보지 않고, 이 체제에서 제외시켰는데, 오히려 일본은 동북아시아에서의 왕따를 중국으로부터 자유독립한 주체적인 국가였다고 해석하는 역사조작을 하고 있다.

 

(1) 관무역(官貿易), 또는 공무역(公貿易)

 

1) 조공이란 단어대신 예물교환이란 단어로 대체해야 함

 

조공이란 단어에는 주권국가와 위성국가의 냄새가 짙게 풍겨 나오기 때문에 물물교환이란 단어를 사용해야 한다. 그러면 그 이유에 대해서 말하겠다.

 

조공의 한자어에서 공()은 바칠 이란 의미가 담겨있는 동시에 조공체제의 기원은 주()나라 때 제후가 공물(貢物; 토산품)을 가지고 정기적으로 천자(天子)를 배알하여 군신의 예를 행하던 제도이고, 중국이 이를 전근대 동아시아의 국제 관계에 적용한 것이기 때문이다.

 

당시 조공의 내용을 보면 중국의 역사왜곡을 엿볼 수 있다.

 

조공은 물물교환의 자본주의의 맹아(萌芽)이다. 그러면 그것에 대해 살펴보자.

 

조선은 중국이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필마(匹馬: 한 필의 말), 인삼, 피물(皮物: 짐승의 가죽. 또는 그것으로 만든 물건으로 호피虎皮범의 털가죽 또는 녹비鹿皮사슴의 가죽, 포자布子삼실로 짠 삼베麻布마포, 가는 삼실로 짠 매우 고운 各色細麻布각색세마포, 쌀 등의 예물을 가져간다. 특히 포자는 수분을 빨리 흡수 및 배출하고 자외선을 차단하며 곰팡이를 억제하는 항균성과 항독성이 있어 중국에선 대환영이다.

 

중국은 답례품으로 조선이 필요로 하는 채단(綵緞: 청색과 홍색의 비단), 자기, 약재, 서적 등을 내놓는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사 기술에서 중국황제에게 바침의 헌상(獻上), 중국황제가 조선왕에게 수여한다는 하사(下賜), 상사(賞賜), 사여(賜與)라는 노예의 단어가 사라져야 한다.

 

그런 이유의 또 하나의 실례를 들어보면 필자의 견해가 타당함을 인식할 것이다.

 

중국 명나라는 조공을 3년에 한 번만 하는 삼년일공(三年一貢)으로 제한했는데, 이것은 강대국과 약소국과의 관계에서 보면 안되고, 당시 성리학사상, 곧 인()의 차원에서 살펴 보야 한다.

 

예컨대, 조선이 1억 원 치의 예물을 중국에 내놓으면, 중국은 깍쟁이처럼 몸을 사리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도 1억 원 이상의 답례품을 내놓아야 성리학사상에 입각한 동북아국제질서가 유지됨을 인식하기 때문에 경제적 손실이 적지 않다. 중국이 중앙아시아를 비롯해 유럽국가에서 수입한 문화기술, 곧 고급정보를 조선에게 전수해준다는 것은 아주 힘든 선택이었다.

 

답례품에 대한 부담과 문화기술의 해외유출을 꺼려해, 중국은 삼년일공을 주장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조선에서는 경제이익과 선진문물을 얻기 위해 오히려 1년에 3번 하는 연삼공(年三貢)을 하겠다고 했지만, 그 내용을 보면 그 이상하여, 중국과 연대를 강화하는 동시에 경제적 및 정치적 이득을 극대화했다.

 

조선에선 음력으로 한 해의 첫째 달인 정월 초하루의 하정사(賀正使), 명황제의 생일축하의 성절사(聖節使), 황태자의 생일축하의 천추사(千秋使), 음력 11월 동짓달의 동지사(冬支使), 은혜를 베풀었을 때 이를 보답하기 위해 파견한 사은사(謝恩使), 중국에 청할 일이 있을 때의 주청사(奏請使), 중국 황실에 경사(새 황제의 등극, 왕이나 왕비의 덕을 칭송하여 올리는 존호尊號, 황태자, 황후 등의 책립의 존시尊諡, 외적의 토평討平무력으로 쳐서 평정함 등)가 났을 때의 진하사(陳賀使),중국에 상고(喪故)가 있을 때의 진위사(陳慰使), 중국에 국상(國喪)이 났을 때의 진향사(進香使) 등의 사신편에 예물을 보내고 답례품을 받아왔다.

 

이와 같이 중국식용어의 조공무역(朝貢貿易)은 일방적인 상납이나 착취가 아니라 공식적인 물물교환 형식의 정부주도형 무역이라 관무역(官貿易), 또는 공무역(公貿易)이라고 불렀고, 성리학 차원에서 이루어진 동북아시아 국제질서며 외교의례다. 당시 에스파냐나 잉글랜도도 이런 질서를 따랐지만, 당시 일본은 실상은 동아시아에서 외교가의 아웃사이더이고 왕따였다. 일제강점기 때 일제는 자기들의 왕따를 자주성의 역사라고 말하고, 조선을 속국이나 서구식의 식민지 프레임인 식민지사관으로 덧칠한다.

 

2) 사행(使行)의 구성원

 

첫째, 3사신(三使臣)

 

3사신은 사행의 우두머리인 정사(正使; 상사上使), 부사(副使), 서장관(書狀官)으로 구성되었는데, 서장관은 임시 벼슬인 기록관으로 귀환한 뒤 문견단자(聞見單子)를 왕에게 올리고, 왕의 재가를 받아 이를 승정원(承政院: 국왕의 비서기관)에 보내 등록하였다. 뿐만 아니라 일행을 감찰하고 도강(도하渡河: 강을 건넘) 할 때에 일행의 인마”(人馬: 사람과 말), ‘복태’(卜駄: 말에 실은 짐바리)를 점검하기도 하는 행대어사(行臺御史/행대行臺: 임시로 겸한 사헌부司憲府의 관직. 삼사三司는 사헌부司憲府 백관<(百官; 모든 벼슬아치>에 대한 감찰, 탄핵, 사간원司諫院국왕에 대한 간쟁諫諍<임금에게 옳지 않거나 잘못된 일을 고치도록 간절하게 말함>을 맡아보던 관아, 홍문관弘文館궁중의 경서 및 문서 따위를 관리하고 임금의 자문에 응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아>를 겸했다.

 

둘째, 종사관(從事官)

 

종사관은 대부분 역관으로 구성되었는데, 역관은 통역관이면서 외교관이었고, 외국 현지사정을 탐지하는 정보원인 동시에 양국 간의 문물을 교류하는 중간자, 무역상이었으며, 문화인이자 골동품 감식가였다. 역관들은 평소에 조선정부로부터 월급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사신을 따라 중국에 갈 때 한몫 챙겨, 거부가 된 역관들이 많다.

 

셋째, 자제군관(子弟軍官)

 

자제군관이란 한자어(아들 ’, 아우 ’ , 군사 ’, 벼슬 ’)과 보여주듯이, 외국에 보내는 사신의 아들이나 동생 또는 조카 등을 군관으로 임명하여, 견문을 쌓도록 한 제도다.

 

조선의 실학자 연암 박지원(燕巖 朴趾源, 1737-1805)1780(정조 4) 5월 삼종형(三從兄: 팔촌 형)인 금성위(錦城尉) 정사(正使) 박명원(朴明源, 1725-1790)이 청나라 건륭황제(1711-1799)의 칠순연(七旬宴)을 축하하기 위해 자제군관의 신분으로 사행길에 동행하여, 북학론을 개진한 역작 기행문 열하일기’(熱河日記)를 발표하며, 그동안 오랑캐로만 치부하였던 청나라의 경제적, 문화적 발전상을 이용후생(利用厚生)관점에서 소개하고, 진보적인 개혁사상, 실학사상입장에서 조선지배층의 주자학적 심성론의 틀을 비판한다.

 

(2) 사무역(私貿易)

 

국가가 주도하지 않고 역관이나 상인들 사이에서 행해지던 무역으로 민간무역이라고 한다.

 

조선후기 존재했던 4대 상인집단이 사무역 주체였다.

 

1) 중국 청나라와 무역 활동을 하던 평안북도 의주상인(만상灣商)

 

만상에서 만(bay)은 바다가 육지 쪽으로 들어와 있는 형태의 지형을 말하는데, 압록강이 의주 쪽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의주를 만으로 대체한 것이다. 걸프(gulf)bay보다 크다.

 

이와 반대로 바다 쪽으로 좁고 길게 뻗어 있는 육지의 끝 부분을 곶(cape, headland)이라고 하는데, 그 실례로 희망봉(The Cape of Good Hope)을 들 수 있다. 희망봉은 대서양과 인도양이 만나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대서양 해변에 있는 암석으로 이루어진 곶이다. 일반적으로 희망봉이 아프리카의 최남단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사실이 아니다. 최남단 지역은 희망봉에서 동남쪽으로 150km 떨어진 곳에 있는, 바늘이라는 의미를 가진 아굴라스 곶(Cape Agulhas)이다.

 

1488년 포르투갈인 바르톨로메우 디아스(Bartolomeu Dias, 1451?-1500/바돌로매; 그리스어 ΒαρθολομαοςBartholomaîos; 리틴어 Bartholomaeus; 영어 Bartholomew=나다나엘; 히브리어 נְתַנְאֵל ; 그리스어 ΝαθαναήλNathanaḗl; 영어 Nathanael)이 폭풍을 만나 발견하여 폭풍의 곶(포르투갈어 Cabo Tormentoso; 영어 Cape of Storms)이라고 명명하였으나, 후에 포르투갈의 전성기를 이룩한 주앙 2(João II, 1481-1495, 1455-1495)는 디아스가 개척한 항로가 인도 항로 개척의 기점으로 부와 황금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확신하며,‘희망의 곶으로 개명한다. 후에 주앙 2세의 사촌 마누엘 1(Manuel I, 재위 1495-1521, 1469-1521) 통치시절 바스쿠 다 가마(Vasco da Gama, 1469?-1524)1497-99, 1502-03, 15243월의 3차례에 걸친 인도 항로의 개척으로 희망의 곶이 입증된다. 1500년 페드루 알바르스 카브랄(Pedro Álvares Cabral, 1468?-1520)가 인도항해 중에 폭풍을 만나 브라질에 표착하고, 1494년의 토르데시야스 조약(스페인어 Tratado de Tordesillas; 영어 Treaty of Tordesillas: 주앙 2세의 주도로 149467일 에스파냐의 작은 마을인 토르데시야스Tordesillas에서 아프리카 서쪽 끝 카보베르데; 포르투갈어 Cabo Verde; 영어 Cape Verde섬으로부터 1800KM까지 선을 그어, 곧 대서양에 세로로 선을 그어 동쪽의 브라질, 한국, 일본, 중국은 포르투갈, 서쪽은 에스파냐의 식민지로 인정하는 토르데시야스 조약; 스페인어 Tratado de Tordesillas; 영어 Treaty of Tordesillas에 의해 브라질은 포르투갈령이 되어, 포르투갈은 해상제국이 된다. 1506년에는 교황 율리오 2; 라틴어 Iulius PP. II; 이탈리아어 Papa Giulio II; 영어 Pope Julius II, 재위 1503-1513, 1443-1513이 이 조약을 재가)에 의해 브라질은 포르투갈령이 된다.

 

1453년 비잔틴제국을 몰락시키며 유럽과 아시아의 길목을 막아버린 오스만투르크에 비싼 통행세와 관세를 물지 않고도 유럽인들은 중국의 비단과 인도의 향신료, 면제품을 마음껏 들여온다.

 

2) 개성을 거점으로 국내에서 활동하던 개성상인(송상松商/918-1392고려의 수도 개성開城=개경開京=송악松岳’=송도松都=송경松京)

 

3) 조선 최초의 유통전문가 경강상인(京江商人 또는 경상京商)

 

경강은 현재 광진구 광장동 한강변에 있었던 광나루에서 양화진(마포구 합정동 지역의 나루터로 미국북장로교 파송 선교사 존 헤런John W. Heron, 조선명 蕙論혜론, 1856-1890이 최초로 양화진의 외국인선교사묘헌에 안장), 현재 한남동 도선장 부근의 한강도(漢江渡; 한강나루라는 뜻으로 한강진이라고 부름)까지의 한양 남부를 끼고 흐르는 부분을 말한다. 이곳이 경강상인의 근거지로서 상업기지가 된다.

 

경강상인의 주요업무는 정부의 세곡(稅穀: 조세로 바치는 곡식)과 양반층의 소작료의 운반이다.

 

뿐만 아니라 경강상인은 직접 선박을 이용해 지방의 생산지에 가서 상품을 구입하고 그것을 경강 연변으로 운반해, 시전상인(시전巿廛은 시장 거리에 있었던 큰 가게를 의미하고, 시전상인은 나라에서 허가받은 장사꾼인데 독점으로 장사)에게 매도하거나 직접 수요자에게 판매하는 등의 매매 활동실시하여 부를 챙겼다.

 

4) 부산 동래의 상인(내상萊商): 현재 부산의 왜관(倭館: 왜인倭人이 통상하던 장소)과 대마도를 통해 은, 구리, 동남아시아물품을 거래한다.

 

송상은 내상과 만상으로 연결되는 일종의 국제 중계무역을 하였다. 인삼을 가진 송상은 내상을 통해 일본의 은과 바꾸고, 그 은을 가지고 만상을 통해 중국 청나라와의 무역으로 연결하였다. 만상은 사행 때마다 은과 인삼을 가지고 인맥을 통해 사신 일행에 끼어가서 랴오닝성(遼寧省요녕성-성도省都: 선양沈阳심양=옛 지명의 펑톈奉天봉천)의 단둥(丹東단동)에 있는 고려문(高麗門)의 국경 검문소에서 중국 청나라 상인과 교역하였다. 고려문에서 조선과 중국 사이의 합법적인 교역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곳에는 의주의 관리들이 파견되어 상주하는 별정소(別定所)가 있었다. 목책(울짱; 울타리)을 둘러친 국경경비 시설이 있었다고 해서 책문(柵門), 변경에 있는 문이라 해서 변문(邊門), 또는 1636년 병자호란 때 잡혀간 조선인들이 살았다고 해서 고려문(高麗門)이라고 부른다. 고려문은 1년에 네 번, 곧 음력 3, 8, 9, 12월에 열린다.

 

2. 백홍준(白鴻俊, 1848-1893)의 부친과의 만남과 백홍준의 세례

 

존 로스(John Ross, 罗约翰나약한, 1842-1915) 선교사는 스코틀랜드 연합장로선교회(the Scottish United Presbyterian Mission)에서 파송 받아, 18728월 중국 산둥성(山東省산동성)의 옌타이시(煙臺연대: 서양 열강에 개방된 항구 중의 하나였고, 조계지<거류지: 주로 개항장에 외국인이 자유로이 통상 거주하며 치외법권을 누릴 수 있도록 설정한 구역>로 사용되기도 하여 즈푸芝罘 섬 때문에 체푸Chefoo로 서양 열강에 알려졌고, 조선에선 지푸로 명명)에 도착하고, 로스는 스코틀랜드성경공회(The National Bible Society of Scotland, NBSS-현재 the Scottish Bible Society) 중국 지부 총무 알렉산더 윌리엄슨(Alexander Williamson, 1829-1890)의 조선선교의 권면에 따라 준비를 하던 중, 1874109, 조선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고려문으로 이동한다. 그곳에서 그는 조선인 상인들을 만나 한문성경을 팔면서 전도를 시도했지만, 그가 만난 조선인들은 복음보다 기계로 짠 영국산 섬유면제품인 양목(洋木)에 관심이 더 많았다.

 

당시 산업혁명의 대성공으로 영국은 대영제국(British Empire), 1815-1914의 팍스 브리타니카’(Pax Britannica)시대를 향유했기 때문에 조선의 의주상인들은 로스 선교사가 입은 최고의 옷감을 수입하여 조선에 유통시키면 큰돈을 벌 것이라는 생각에 여념이 없었던 것이다.

 

한문과 만주어에 능통한 50대 의주상인 백씨가 존 로스 선교사를 찾아오자, 로스 선교사는 옥양목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양초로 백씨의 관심을 끈 뒤 중국어신약성경과 자신의 선배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중국 선교의 개척자 윌리엄 찰머스 번즈(William Chalmers Burns, 賓爲霖빈위림, 1815-1868)가 중국어로 번역한천로역정’(天路歷程; 존 번연John Bunyan, 1628-1688‘Pilgrim Progress, 1678)을 건네준다.

 

백씨는 두 권을 집으로 가져와, 자신의 아들 백홍준(白鴻俊, 1848-1894)에게 건네주고, 백홍준은 전도자나 선교사의 도움 없이 독학으로 그것들을 통해 기독교를 접하며, 구원을 비롯한 기독교교리에 대한 앎의 열망으로 가득 차, 걸어서 중국 랴오닝성(遼寧省요녕성)의 성도(省都) 선양(沈阳심양=옛 지명의 펑톈奉天봉천)에 있는 존 머킨타이어(John Macintyre, 馬勤泰마근태, 1837-1905), 로스 선교사를 찾아간다. 기독교교리와 더불어 서구 과학을 배우고, 31세 때인 1879년 여름 친구들(이응찬李應贊, 이성하李成夏, 김진기)과 함께 머킨타이어 선교사로부터 1876년에 창립된 심양동관교회(瀋陽東關敎會)에서 세례를 받고(18795월부터 18815월까지 2년에 걸친 로스의 휴가 기간), 이들은 조선 최초의 세례교인이 된다.

 

3. 백홍준의 권서의 직임과 전도

 

35세 때인 1883년 백홍준은 로스 선교사로부터 권서(勸書)의 직임을 받자, 고향 의주에 선교본거지를 세우고 복음서들을 반입하여 보급하기로 한다.

 

39세 때인 1887년 처음으로 완역된 예수셩교젼셔’(예수聖敎全書, 1887)가 출판되었을 때 로스 선교사에게서 10권의 성경을 받은 백홍준은 안전하게 고려문의 통과를 위해서, 성경책을 뜯어 한 장씩 말아가지고 노끈을 만들었다. 그런 후 그는 낡은 종이들을 사서 그 노끈으로 묶고 또 묶어서 마치 고지(古紙)장사로 위장하여 무사히 관문을 넘거나 노끈을 꼬아 봇짐의 멜빵을 만들어 관문을 넘는다. 의주에 돌아온 그는 노끈성경을 정성껏 풀어서 다시 책으로 만들어 평안도 일대를 돌아다니며, 팔고 복음을 전했다.

 

4. 조선 최초의 예배

 

35세 때인 1883년 백홍준은 로스 선교사로부터 권서(勸書)의 직임을 임명받은 후 16명의 성도와 함께 의주의 자기 집에서 비밀히 예배를 드리게 되었는데, 21세기 차원에서의 교회의 모습은 아니지만 조선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기독교인들의 첫 번째 예배다. 이 때 주일에 세 번 예배드리고 삼일 기도회를 갖기로 한 결정이 그 뒤 한국교회의 전통으로 자리 잡고, 이것을 성전(聖傳)이라고 하는데, 일종의 판례(precedents)의 성격을 갖기 때문에, 성경의 권위 아래에서 실시되어야 한다.

 

5. 새문안교회설립과 초대장로

 

조선정부는 미국 북장로교 선교회의 호러스 G.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조선명 원두우元杜尤, 1859-1916) 선교사와 미국 북 감리회의 선교사 H. G.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 조선명 아편설라亞篇薛羅, 1858-1902)가 입국(188545일 부활절에 조선의 인천항구에 도착)한 지 13년만의 18986월 윌리엄 L. 스왈른(William L. Swallen, 조선명 소안련蘇安論, 1865-1954: 이기풍李基豊, 1865-1942와 김익두金益斗, 1874-1950을 회심시킴) 선교사에게 인전교사’(因傳敎事, 전도에 관한 일)를 허락하는 호조(護照; 일종의 여행증명서)를 발행하여 최초로 선교사역을 허락한다.

 

그런데 1887927(1887년 처음으로예수셩교젼셔/예수聖敎全書가 출판) 화요일 저녁, 호러스 G.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조선명 원두우元杜尤, 1859-1916) 선교사는 조선정부의 경고에 아랑곳하지 않고 서울 정동에 위치한 자신의 사랑채에서 조선인 서상륜, 백홍준 등 세례교인 14(서상륜과 백홍준이 전도한 열매)과 스코틀랜드 출신 존 로스(John Ross, 罗约翰나약한, 1842-1915) 선교사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조선을 방문하여, 참석한 가운데 첫 예배를 드리며, 백홍준과 서상륜의 두 사람을 장로로 세움으로써, 조선 최초의 장로교 교단(통합) 조직교회의 정동교회(현재 새문안교회)가 설립된다.

 

헨리 G.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 조선어명 아편설라亞篇薛羅1858-1902)18851011일에 정동에 있는 자신의 사택에서 조선인 감리교 신자들과 함께 예배를 한 것을 정동제일교회의 시초로 삼고 있다.

 

정동교회는 장로교단, 정동제일교회는 감리교단에 속하기 때문에 주의해서 사용해야 한다.

 

6. 조사

 

42세 때인 1890년 백 장로는 새문안교회 성경학교를 수료한 후 북장로교 선교부 관서지역 조사가 되어, 44세 때인 1892년부터 선교사들과 함께 의주와 평양에서 사경회를 열고 복음을 전했다.

 

(1) 의주 성도의 세례

 

백홍준 조사는 한성에 상경할 때마다 언더우드 목사를 찾아가 의주에 와서 예비 신자들에게 세례를 베풀어 달라고 간청한다.

 

언더우드 목사는 30세 때인 1889년 자신보다 8년 연상인 38세의 북장로교 선교사 릴리어스 호르튼(Lillias Horton, 1851-1921: 188837세 때 내한하여 언더우드 학당의 영어교사로 사역하며, 1889년부터 1895.10.8. 을미사변乙未事變 때까지 명성황후의 시의侍醫를 지냄) 여의사와 결혼하고, 결혼을 구실로 하여 의주까지의 신혼여행의 허락을 조선정부로부터 받는다.

 

언더우드 목사는 의주로 올라와 세례받기를 희망하는 100여명 예비신자가 있는 것을 보고 감격하며, 세례문답을 거친 후 백홍준 일가 등 33명을 선발하여 선교금지의 국법 때문에 이들과 함께 배를 타고 압록강의 한 가운데로 가서 압록강 물로 세례예식을 베푸는조선의 요단강 세례를 연출한다.

 

(2) 20대 청년 한석진을 조선기독교의 지도자로 만듦

 

백홍준 조사는 자신보다 20세 연하인 동향인 한석진(韓錫晋, 1868-1939)을 전도하여, 1891년 새뮤얼 오스틴 모펫(Samuel Austin Moffet, 조선이름 마포삼열馬布三悅, 1864-1939) 선교사가 의주에 들렸을 때 김정호, 김석례 등과 함께 세례를 받도록 인도한다.

 

이 후 한석진은 상경하여 언더우드 목사가 설립하고, 모펫이 교장으로 있는 야소교학당(耶蘇敎學堂, 1890-1893) 신학반에서 성경과 교리를 배운다. 야소교학당의 변천사를 살펴보면 그 위상을 잘 알 수 있다.

 

언더우드 학당(1886-1890, 교장 호러스 G.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조선명 원두우元杜尤, 1859-1916: 본적은 경상남도 동래군이나 부친이 관리로 집무하던 강원도 홍천군에서 태어난 우사尤史 김규식金奎植, 1881-1950부모님을 잃고, 4세의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된다. 김규식은 가가호호 구걸하고 다니다가 5세 때인 18865월 언더우드 목사 집에 찾아갔는데, 입양되어, 6세 때인 1887년부터는 언더우드가 세운 고아학교인 언더우드학당에서 서양식 근대 교육을 받고 15세 때인 1896년 학교 명칭이 변경된민노아학당을 졸업한다. 감리교 신자 필립 제이손<Philip Jaisohn‘서재필을 거꾸로 하여 필재서로 만든 다음, ‘필립Philip’으로 재서제이슨Jaisohn’으로 음역한 것으로, Jaisohn이라는 성의 철자는 미국인들도 전혀 사용하지 않는 고유한 철자 표기, 또는 필립 제이슨Philip Jason, 조선명 徐載弼서재필, 1864-1951: 워싱턴 D.C.의 컬럼비안 대학<Columbian University, 현 조지워싱턴 대학교의 전신> 재학 중인 26세 때인 1890610일 조선인 최초의 미국 시민권자가 되었다. 1894년 제임스 뷰캐넌James Buchanan, 재위 1857-61, 1791-1868 미국의 15대 대통령과 사촌 형제이자 남북전쟁 당시 철도우편국을 창설해 초대 국장을 지낸 미국 육군 대령 출신의 정치인 조지 뷰캐넌 암스트롱George Buchanan Armstrong의 딸인 뮤리엘 메리 암스트롱Muriel Mary Armstrong을 만나, 가정교사가 되고, 그녀와 결혼해 미국주류사회에 편입>의 조언에 그는 16세 때인 1897년 미국 유학을 떠난다)->야소교학당(耶蘇敎學堂, 1890-1893, 교장: 새뮤얼 오스틴 모펫(Samuel Austin Moffet, 조선이름 마포삼열馬布三悅, ‘삼열은 세 가지 기쁨을 의미, 1864-1939)->민노아학당(閔老雅學堂, 1893-1901, 1896년에 잠시 폐교, 교장 Frederick S. Miller, 조선명 민로아閔老雅, 1866-1937: 평남출신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 1878-193817세 때인 1895프레더릭 S. 밀러를 만나민노아학당에 입학해 3년 수학하며 서구문물을 접하고 장로교 성도가 된다. 24세 때인 190293일 도산은 조선의 최초의 근대서양식의료기관으로서, 후에 연세대학교건강시스템의 일부분이 될 정도로 발전한<195715일 연세대학교 이름으로 연희대학교와 통합한다> 제중원<濟衆院: 백성을 구제한다>에서 밀러목사의 주례로 이혜련영어명, 헬렌과 결혼한다. 그 이튿날 그는 교육학을 공부하기 위해 미국의 유학길에 오름)->야소교 중학교(1901-1905, 교장 James S. Gale, 1863-1937)->경신학교(儆新學校. 1905-1915, 교장 Edward H. Miller, 조선명 밀의두, 1873-1966)->연희대학 전신인 경신대학(1915-, 학장 언더우드)->1957, 연세대학교

 

한석진은 25세 때인 1893년 자신보다 4년 선배인 야소교학당 교장 모펫 선교사와 함께 평양 선교 개척자로 파송을 받는다.

 

한석진 조사는 1893년 모펫 선교사와 함께 평안도(충주와 청주의 앞 글자를 따와 충청도의 이름이 생겼듯이 평양과 안주의 앞 글자를 따와 평안도의 이름이 생김) 안주(安州) 널다리골의 여관에 거하다가, 한석진으로부터 이 여관의 집 벽은 물론 방바닥과 천장까지 완벽하게 성경으로 도배되었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란다. 곧 바로 모펫 선교사는 이 여관주인 최치량과 다른 조선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동년 모팻 선교사는 그 동네의 29명과 함께 널다리골의 여관을 예배의 처소로 사용하며, 이곳이 평양 최초의 기독교,‘안주 널다리골 교회, 그 후 교회이름이 평양중앙교회’(평양중심에 있는 교회라는 뜻으로 중앙교회 또는 평양에서 제일먼저 세워진 교회라는 뜻으로 평양제일교회라고도 불림), 또 다시 장대현교회’(章臺峴敎會: 1903년에 73칸짜리 조선고유의 건축 양식으로 봉헌한 큰 예배당으로 건축하면서 교회 이름을 그 지명을 쫓아 장대현교회로 변경하고, 그 장대현교회에서 남문외교회, 서문외교회, 사창골교회, 산정현교회, 연화동교회, 명촌교회가 나옴)로 개칭하고, 이곳에서 19071월 한국 교회 사상 가장 빛나는 사건인 평양 대부흥운동이 일어난다.

 

한석진은 1904년 평양장로회신학교에 3학년으로 편입하여 1907620일에 길선주, 서경조, 방기창, 한석진, 양전백, 이기풍, 송인서 등 7명이 제1기로 졸업을 하고, 이들은 동년 917일 조선예수교장로회대한로회가 창립될 때 한석진은 길선주, 서경조, 방기창, 양전백, 이기풍, 송인서와 함께 장로교 최초 조선인 목사가 된다.

 

한 목사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다음 강의 시간에 하겠다.

 

7. 순교

 

백홍준 조사는 외국인에게 거부감을 갖기 보다는 오히려 친근감을 갖는 의주상인들답게 로스 선교사를 비롯해 모펫 선교사, 언더우드 선교사, 게일 선교사 등을 만나 순회전도를 주선하는 등 외국선교사들의 길잡이 구실을 하자, 관가에서는 백홍준의 행동이 조선정부에 이롭지 않음을 알고, 백 조사에 대하여 적개심을 품고 주목을 한다.

 

1892년 가을 평안감사(관찰사, 도지사) 민병석(閔炳奭)은 명성황후의 가계출신답게 백 조사를 체포, 투옥하도록 지시를 내리고, 의주에서 백 조사는 체포되어 투옥된다. 백 조사는 목에 칼(형구의 일종)을 쓰고 2년 동안 갖은 고초를 겪다가 1893년 옥중에서 순교한다. 그는 조선 최초의 기독교 순교자, 조선의 사도바울의 명예를 갖는다.

 

8. 종합

 

인간은 자연을 통해서 창조주의 하나님을, 역사를 통해서 섭리의 하나님을, 이성과 지성, 양심을 통해서 심판의 하나님을 어렴풋이 인식하지만,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체험하면서 신앙할 수 없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할 때 성령이 내주하시고, 성령 가운데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부 하나님을 찬양경배할 수 있다. 내주하시는 성령을 통해 인간은 죄와 율법과 죽음으로부터 구원, 곧 자유함을 깨닫는 동시에 부활의 생명이 수여됨에 감탄하며,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는 성령의 음성을 듣고, 성삼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며 인간과 공동체와 국가를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는 성삼위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중요하다.

 

에베소서 6:17은 이렇게 선언한다.

 

“17.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개역한글)

 

이런 의미에서 보면 성경비평, 곧 성경난도질을 잘하는 자를 대학자라고 치켜세우는 오컬트 바티칸과 그 추종세력들은 흑암의 권세자의 노예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