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J.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 조선이름 탁마준托馬浚 또는 최란헌崔蘭軒, 1840-1866)는 1840년 9월, 영국 웨일즈(Wales) 지방 라야다(Rhayada)에서 회중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토마스는 1859년 런던대학교 뉴 칼리지(New College)에서 대학 과정과 신학 과정을 마쳤다. 언어에 천재적인 재질을 갖고 있던 토마스는 목회보다는 선교에 뜻을 두고, 목사 안수를 받자마자, 런던선교회 선교사(a Welsh Protestant Christian missionary who served with the London Missionary Society, LMS. 런던선교회는 1795년에 회중파가 주도적으로 창설)로 파송을 받고 갓 결혼한 부인 캐롤라인 고트프리(Caroline Godfrey)와 함께 23세 때인 1863년 7월21일 중국으로 떠나 그 해 가을 상해에 도착한다. 캐롤라인이 1864년 3월에 아기를 유산하다가 세상을 떠난다. 토마스 선교사는 아내가 임종할 때 같이 있지 못했던 것에 대해 매우 애달파한다. 아내가 서거하던 시간, 그는 상해에서 런던 선교회 대표였던 무어헤드(W. Muirhead) 선교사의 집에 방을 빌려 쓰고 있었고, 여름을 대비해 시원한 집을 구하려 동향의 웨일스 회중교회출신 그리피쓰 존(Griffith John, 1831-1912: 런던선교회에서 파송한 중국선교의 개척자로 킹 제임스 성경을 중국어로 번역) 선교사를 만나러 난징을 방문하고 있었다.
아내를 잃은 슬픔에다, 현지 런던 선교회 책임자들과의 불협화음으로 토마스 선교사는 1864년 12월 선교사 직을 사임하고 산둥성(山東省산동성) 지푸 세관에 취직한다. 그 곳에서 그는 스코틀랜드 출신 알렉산더 윌리엄슨(Alexander Williamson, 1829-1890: 런던 선교회 파송 선교사로 7년 동안 사역하다가, 건강문제로 1858 스코틀랜드에 요양하다가, 1863년 스코틀랜드 국제성경협회the National Bible Society of Scotland의 첫 선교사로 중국에 간다. 1867년 윌리엄슨 선교사는 조선과 중국 청나라 국경지대에서 조선상인들에게 크리스천 서적을 판매한다. 1869년 런던 선교회에서 파송된 자신의 동생 제임스 윌리엄슨James Williamson이 살해되자, 그 해 잉글랜드로 돌아온다. 1871년 중국에 대한 서적으로 글라스 고우 대학교에서 법박사학위를 받는다. 1871, 1883년 the NBSS 파송을 받고 중국으로 건너간다. 1874년 스코틀랜드 연합장로선교the Scottish United Presbyterian Mission 파송 선교사로 사역한다. 1883년 건강문제로 스코틀랜드로 귀국한다. 요양 중에 그는 ‘중국에 대한 책과 팸플릿의 협회the Book and Tract Society for China<1887년 the Society for Diffusion of Christian and General Knowledge among the Chinese or the “Christian Literature Society for China로 변경>’을 발견하고, 중국으로 다시 건너간다. 1886년 아내 이사벨 Isabelle이 상하이에서 서거하고, 자신도 4년 후 하늘나라에 간다. 그의 자녀들이 부친의 유지를 받들어 중국에 관한 글을 집필) 선교사를 만나, 그의 조언을 듣고, 조선에 가져갈 성경을 건네줄 것이라고 약속하자, 선교에 대한 열정을 다시 불태우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토마스 선교사는 우연히 조선에서 천주교 박해를 피해 산둥성(山東省산동성)으로 피난 온 천주교 신자 두 사람, 김자평(金子平, 1789-1868)과 최선일을 만난다. 그들에게서 한국 천주교회 박해의 소식을 들은 그는 김자평을 지속적으로 만나면서 조선어를 배우기 시작하며, 조선선교의 꿈을 꾸기 시작한다. 그는 일단 세관에 사표를 내고 조선 선교의 기회를 엿본다. 조선 선교여행은 스코틀랜드 성경공회의 대리인 사역자로 가는 것이고 이를 위해 최소한의 여행 경비와 한문 성경과 전도지를 제공받은 것이었다. 토마스는 그 동안 세관의 통역 일을 보면서 그에 대한 보수를 받아, 어느 정도의 돈은 모아둔 상태였기 때문에 윌리암슨이 사례비를 제공하려했으나 완곡히 거절하고, 조선선교를 위해 자비량 사역자가 된다.
그러던 중 25세 때인 1865년 9월 그는 김자평과 동료인 조선인과 선주인 중국인 우웬타이(于文泰)와 함께 중국의 정크(Junk; 범선)를 타고 많은 양의 한문성경을 가지고 조선의 서해안으로 떠난다. 그는 황해도 연안 백령도(지난 천안함 침몰지점)를 거쳐 창린도에 도착하여, 약 두 달 반을 머물면서 섬사람들에게 한문성경을 나누어 주는 한편, 조선어를 배우면서 열심히 선교한 후 중국으로 돌아간다.
조선선교의 기회를 다시 찾고 있던 토마스 선교사는 때마침 미국 상선인 제너럴셔먼(General Sherman) 호가 무역을 위해 조선으로 떠난다는 소식을 접한다. 26세 때인 1866년 8월, 그는 이 배의 통역 겸 안내자로 동승하여 조선으로 다시 향한다. 제너럴셔먼 호가 대동강 상류로 거슬러 평양성으로 항진해 그 곳에 머물자, 평양 감영(監營)의 문정관(問情官: 외국의 배가 처음으로 항구에 들어왔을 때나 외국인이 표류하여 왔을 때 그 사정을 알아보는 일 따위를 맡아 하던 임시 벼슬아치)이 등선하여, 목적지, 항해의 목적 등을 묻자, 토마스 선교사는 서툰 조선말로 통역을 한다. 문정관들은 우리나라는 외국과의 무역은 국법으로 금지되어 있으므로 퇴각하라고 명한다. 그러나 제너럴셔먼 호는 이를 무시하고 강 깊이 항진을 계속한다.
제너럴셔먼호는 무역선답지 않게 중무장을 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문정관 중군(中軍: 조선 때, 각 군영의 대장이나 절도사, 통제사 등에 버금가던 장수) 이현익(李玄益)을 억류하고 강압적인 자세를 보인다. 이렇게 되자 강변의 병졸들과 성민들이 물러가라고 고함을 치면서, 돌을 던지고 활과 화승포를 쏘기 시작한다. 제너럴셔먼 호에서도 소총과 대포로 응사(應射)를 시작한다. 이런 와중에 홍수로 불었던 대동강 물이 줄어들고, 1866년 9월4일 서해의 썰물 때가 되자 강물이 급격히 줄어 제너럴셔먼 호는 강의 진흙바닥에 좌초되어, 설상가상으로 쑥섬(대동강에는 상류에서 하류쪽으로 릉라도, 양각도, 쑥섬, 두루섬의 순서로 섬들이 자리 잡고 있음)에 갇히게 된다.
그 다음 날 9월 5일 평양감사(監司; 관찰사) 박규수(朴珪壽)의 명에 따라 군은 상류에서 유황을 뿌린 잡목들을 실은 거룻배(돛이 없는 작은 배) 여러 척을 연결하고 불을 붙여 셔만 호를 향하여 떠내 보내고, 불붙은 거룻배들이 제너럴셔먼 호에 닿자 불타기 시작한다. 박규수는 명령을 내려, 조선군들로 하여금 화살과 총포를 총동원하여 거대한 외양선을 벌집처럼 만들어 버린다. 선원들은 어쩔 수 없이 강으로 뛰어 내려 강변으로 헤엄쳐 나오고, 대기하고 있던 조선병졸들이 뭍에 오르는 선원들을 닥치는 대로 칼로 쳐 죽인다.
토마스 선교사도 더 이상 배에 있을 수 없어, 성경 몇 권을 품고 강으로 뛰어 내려 헤엄쳐 나온다. 강변에 이른 토마스 목사를 평양 중군 이현익 휘하의 관군으로, 6척 장신에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센 무관 박춘권(朴春權, 1839-1920)이 칼로 쳐 죽인다. 이로써 토마스 선교사는 조선 초기 선교 역사에서 최초의, 그리고 유일한 기독교 선교사의 순교자가 된다. 토마스 선교사는 품고 온 성경을 강변 여기저기에 뿌린다. 자기를 죽이려는 박춘권에게도 한 권을 주나 받지 않자 그대로 모래사장에 던지고, 순교의 길에 들어선다.
이렇듯 토마스 선교사의 선교는 복음선포 보다는 성경배포였다. 그러면 토마스 선교사가 전해준 성경이 어떠한 열매를 맺었는가에 대해 살펴보자.
1. 장대현 교회와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
당시 제너럴셔먼 호를 구경하러 대동강변으로 나왔던 12세 소년 최치량(崔致良)은 토마스 선교사가 흩뿌린 한문성경 세 권을 주워 갖고 있다가 그것이 금서라는 사실을 알고, 세 권을 평양의 영문주사(營門主事; 사형집행장인) 박영식(朴永植)에게 준다. 박영식은 한문성경을 보고 종이의 질이 매우 좋아 도배지로 사용하면 좋겠다는 생각하며, 자신의 집으로 와, 성경으로 자기 집 벽은 물론 방바닥과 천장까지 완벽하게 도배한다.
1891년 37세가 된 최치량은 안주 널다리골에 있는 박영식의 집을 매입해 여관을 경영한다. 1890년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로 내한한 새뮤얼 오스틴 모펫(Samuel Austin Moffet, 조선이름 마포삼열馬布三悅, 1864-1939) 선교사가 세 차례 조선국내 선교여행 후, 1893년 평양에서의 선교사역을 결정하며, 한석진(1907년 6월 20일에 길선주, 서경조, 방기창, 한석진, 양전백, 이기풍, 송인서 등 7명이 1기로 졸업을 하고, 이들은 1907년 9월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개최된 조선예수교장로회 제1회 독노회-<1907년 9월 17일 조직된 조선예수교장로회 대한로회의 약칭>-에서 조선인으로 처음으로 목사가 됨)과 같이 우연히 이 여관에 머물었는데, 한석진으로부터 벽지가 온통 성경 말씀으로 도배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란다. 곧 바로 모펫 선교사는 이 여관주인 최치량과 다른 조선인들에게 복음을 전한다. 여관의 원주인 박영식도 이 이야기를 듣고 복음을 접한다.
1893년 모팻 선교사는 그 동네의 29명과 함께 널다리골의 여관을 예배의 처소로 사용하며, 이곳이 평양 최초의 기독교,‘안주(安州) 널다리골 교회’로, 그 후 교회이름이 ‘평양중앙교회’(평양중심에 있는 교회라는 뜻으로 중앙교회 또는 평양에서 제일먼저 세워진 교회라는 뜻으로 평양제일교회라고도 불림)로, 또 다시 ‘장대현교회’(章臺峴敎會: 1903년에 73칸짜리 조선고유의 건축 양식으로 봉헌한 큰 예배당으로 건축하면서 교회 이름을 그 지명을 쫓아 장대현교회로 변경하고, 그 장대현교회에서 남문외교회, 서문외교회, 사창골교회, 산정현교회, 연화동교회, 명촌교회가 나옴)로 개칭하고, 이곳에서 1907년 1월 한국 교회 사상 가장 빛나는 사건인 평양 대부흥운동이 일어난다.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은 1903년 원산 집회 이래로 계속해서 일어나던 신앙운동의 절정이었다.
1903년 8월 30일 캐나다의 의사이자 미국 감리교 목사 로버트 A. 하디(Robert Alexander Hardie, 하리영河鯉永, 1865-1949: 캐나다 온타리오에서 출생하여 토론토대학 의과대학에 재학 중 열풍처럼 번지고 있던 ‘대학생 선교 자원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를 접하는 동시에 토론토 YMCA에서 조선에서 온, 캐나다 출신 제임스 S. 게일James Scarth Gale, 조선어 이름 奇一, 1863-1937선교사의 간증을 듣고, 1890년 봄 대학을 졸업한 후 토론토대학교 학생 기독교청년회YMCA 파송으로 조선에 왔다. 그러나 1896년 6월 선교비가 중단되어 잠시 귀국하였다가 2년 후인 1898년 5월 미국 남감리회 선교부 소속으로 다시 조선에 와, 1900년 10월 남감리회 중국연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09년부터 서울의 감리교 협성성경학교<현 감리교신학대학교> 교장이 되어 23년 간 목회자 양성에 주력하며,‘신약총론, 1918’과 ‘구약총론, 1921’ 등 20여 권의 저서와 1백여 편의 논문을 발표하고, 1923년 이후 조선예수교서회>현 대한기독교서회> 총무 겸 ‘기독신보’ 발행인으로 문서 선교 활동에 매진하다가 1935년 4월 정년 은퇴하고 미국으로 돌아가, 1949년 미시건주 랜싱에서 별세)의 원산감리교회에서 열린 주일에서 하였던 ‘괴롭고 창피한’(painful and humiliating) 자백(조선을 사랑하지 못한 마음, 자신의 능력을 의지한 것을 공개적으로 자복)에 의한 ‘원산부흥운동’에서 출발한다. 하디 선교사의 진심어린 고백이 회개의 불을 붙였고, 다른 사람의 회개가 뒤따른다.
1905년 안식년 휴가를 마친 후 하디는 1906년 8월 평양에서 선교사연합사경회를 인도하였는데, 거기 참석했던 윌리엄 N. 블레어(William Newton Blair, 조선어 방위량邦緯良, 1876-1970: 1907년 ‘평양대부흥회’ 당시 부흥회의 설교자이며 인도자)와 그레이엄 리((Lee Graham, 李吉咸이길함, 1861-1916: 1892-1912동안 새뮤얼 오스틴 모펫Samuel Austin Moffet, 조선이름 마포삼열馬布三悅, ‘삼열’은 세 가지 ‘기쁨’을 의미, 1864-1939 선교사와 함께 평양선교사역을 열며, 장대현교회를 개척하여 모펫 선교사와 함께 공동담임하고, 평양과 황해도에 많은 교회를 설립한, 발로 뛴 선교사로 1907년 장대현교회의 대부흥을 견인) 등 장로교 선교사들이 ‘성령 충만’을 경험한다. 그리고 1906년 9월 하워드 애그뉴 존스톤(Howard Agnew Johnston)의 한성사경회 이후, 1907년 평양 장대현교회의 대부흥으로 이어진다. 러일전쟁(1904년)과 을사5조약 체결(1905년)로 인한 민족적 위기 상황이었지만, 조선인은 기독교신앙으로 대승리의 역사를 장식한다.
1907년 평양 장대현교회의 대부흥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집회의 참석자들 뿐 만이 아니라 집회의 인도자들(서양 선교사, 한국 교회 지도자)의 공중(公衆) 앞에서 공개적인‘죄고백’이었고, 개인들의 구원(치유)를 뛰어넘어, 구체적으로 자신들의 죄에 대한 응보를 실천하여, 사회구원을 지향하여, 평양은 동양의 예루살렘(Jerusalem of the East)이라고 불리며 기독교 중심지가 된다.
한편, 무관 박춘권은 당시 자기 칼을 맞고 죽어가는 토마스 선교사가 건네주는 책을 받지 않았으나,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 이후, 한문성경 한권을 주워 집으로 가져가, 성경을 읽고 감명을 받고 자신이 저지른 살해에 대해 깊은 고심을 한다. 30여년이 지난 1899년 박춘권은 평양신학교(1901-1938)의 교장(1907-1924)으로 은퇴할 때까지 1000교회와 3백여 학교가 설립되며, 평양을 한국의 예루살렘과 학문의 중심지로 변화시킨 새뮤얼 오스틴 모펫(Samue Austin Moffet, 조선이름 마포삼열馬布三悅, 1864-1939)에게 죄를 고백하고 세례를 받는다. 몇 해 뒤에는 당시 교회의 최고 직분인 안주(安州) 널다리교회 영수(領袖: 장로교에서, 조직이 아직 완전하지 못한 교회를 인도하는 직분. 또는 그런 사람)가 되어 남은 생애를 기독교 전도와 선교에 바친다.
2. 조선어 성경 탄생
토마스 목사를 죽인 박춘권의 조카 이영태(李榮泰)는 박영식의 집에 방문했다가 벽에 바른 성경을 읽고 감동하여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평양 숭실전문학교(1897-1925숭실대학->1925-1938숭실전문학교->1954-1971숭실대학-> 1971-1987숭전대학교->1987-현재 숭실대학교로 이름이 변경)에서 수학 후, 미국 남장로교회 선교사 윌리엄 데이비스 레이놀즈(William Davis Reynolds, 조선명 이눌서李訥瑞, 1867-1951: 미국 리치먼드에 있는 미국 남장로교회의 교단 신학교인 유니온 신학교Union Presbyterian Seminary in Richmond, Virginia:에서 수학하던 중 안식년을 맞아 미국에 돌아간 호러스 G.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조선명 원두우元杜尤, 1859-1916선교사가 1891년 9월 ‘전국 신학교 해외선교 연합집회Inter-Seminary Alliance for Foreign Missions’에서 조선선교에 대한 강연을 듣고 조선선교에 참여하기로 결심하며, 1892년 미국 남장로교회 선교사로 내한하여 평양신학교에서 1917-1937 어학교사 및 1924-1937 조직신학교수로 재직하며‘신학지남神學指南’의 편집인 등으로도 사역)의 조사(助事)가 되어 조선인 성경번역위원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어 구약성경을 번역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다(1900 신약, 1911 신구약).
3. 여전도회, 여자신학부 그리고 산정현교회
당시 20세였던 이신행(李信行)이라는 여성은 토마스 선교사가 던진 성경을 읽고 평양 최초의 여성신자가 되어, 1898년 2월 20일 평양 널다리골교회의 ‘여전도회설립’에 주체가 되어, 초대 회장을 지낸다. 이신행은 1923년 모펫 선교사를 설득하여 평양신학교 안에 여자신학부를 설립하고, 1931년 중국 산동성에 김순호를 최초의 여선교사로 파송한다. 이런 노력의 결실은 1957년 총회에 장로교 여자대학 설립을 건의하여 1961년 ‘서울여자대학’의 창립에 이른다.
이신행은 1906년 1월 평양 장대현교회(章臺峴敎會)에서 분립하여 평양의 닭골(鷄洞) 산정현에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 찰스 F. 번하이셀(Charles F. Bernheisel, 편하설片夏薛, 1874-1958)과 협력해 산정현교회(山亭峴敎會)를 설립하고, 그 아들 이덕환은 평양 장대현교회의 장로가 된다.
4. 평양신학교(1901-1938)
(1) 신학
모펫 선교사를 비롯해 매코믹신학교(McCormick Theological Seminary in Chicago) 출신 선교사들이 주도하여 평양신학교를 설립하였다. 당시 매코믹신학교의 신학사상은 올드 프린스턴학파(Old Princeton School: 현대부흥의 아버지이며 후에 완전주의의 본거지가 된 오벌린 대학Oberlin College을 세워 최초로 흑인을 대학생으로 받아들인 찰스 G. 피니Charles G. Finney, 1792-1875의 새 방법을 지지하는 편을 신학파New School라하고, 반대하는 편을 구학파Old School라고 하였다. 아치볼드 알렉산더Archibald Alexander, 1772-1851->찰스 하지Charles Hodge, 1797-1878->찰스 하지의 아들 아치볼드 알렉산더 하지Archibald Alexander Hodge, 1823-1886->벤저민 B. 워필드Benjamin B. Warfield, 1851-1921로 이어지는 개혁주의 신학, 즉 칼뱅주의 신학사상을 일컬음)를 지향하였다.
(2) 영성
매코믹신학교가 시카고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미국의 침례교 평신도 설교자 D. L. 무디(Dwight Lyman Moody,1837-1899)의 영향을 크게 받아서, 정통복음주의기독교사상에 입각한 1907년 장대현교회의 대부흥회를 낳았다.
5. 종합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의 제1차적인 원인은 제너럴셔먼 호 선장의 그릇된 판단에서 나온 것으로, 토마스 선교사는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선교라기보다는 단지 성경을 배포했을 뿐인데, 성경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임을 증언하여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오늘날 대한민국의 정통복음주의기독교가 탄생했다.
그런데 오컬트 바티칸은 정통복음주의기독교를 분열시키고, 그리스도인들을 미혹하기 위해서 성경비평이라는 그럴듯한 용어를 사용하며 성경난도질을 하고 있다. 디모데후서 3:15-17은 오컬트 바티칸을 단죄한다.
“15.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16.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개역한글)
그리고 디모데후서 3:16의 KJV와 NIV를 비교하면, KJV이후의 성경은 오컬트 바티칸의 산물임을 인식할 수 있다.
“16.All scripture is given by inspiration of God, and is profitable for doctrine, for reproof, for correction, for instruction in righteousness”(KJV)
“16.All Scripture is God-breathed and is useful for teaching, rebuking, correcting and training in righteousness”(N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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