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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로스와 머킨타이어 선교사는 오컬트 바티칸의 성경난도질을 단죄한다’ YouTube!!!

아우구스티누스 2021. 1. 7. 14:50

스코틀랜드 연합장로선교회(the Scottish United Presbyterian Mission)로부터 존 머킨타이어(John Macintyre, 馬勤泰마근태, 1837-1905: 로스 선교사의 누이동생 캐서린Catherine과 결혼) 1871, 머킨타이어의 처남 존 로스(John Ross, 罗约翰나약한, 1842-1915) 선교사는 1872년 중국에 파송되어, 만주와 조선선교에 주력한다.

 

머킨타이어와 로스 선교사의 사역이 겹치기 때문에 로스 선교사를 중심으로 논할까 한다.

 

1. 존 로스의 배경스케치

 

로스 선교사는 게일어(Gaelic)를 사용하는 스코틀랜드 라리키(Rarichie)에서 53녀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난다. 어렸을 때부터 이중언어(게일어와 영어)의 사용은 로스 선교사가 후에 11개 국어를 구사할 만큼 탁월한 언어능력소유자임을 증언한다. 그가 중국과 조선선교에 보여준 사역은 장남답게 주체적이며 도전적이고 책임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상을 입증한다. 그리고 그는 글라스고 대학(Glasgow University)과 에든버러 장로회 연합신학대학(United Presbyterian Divinity Hall, Edinburgh, 1865-69)을 졸업하고, 후에 만주의 관점에서 바라본, 최초의 영어판으로 외국인 선교사를 위한 책인한국의 역사’(History of Corea, 1879),‘중국 청왕조의 역사’(The Manchus, 1891)의 두 저서로 1894년 글래스고우신학대학교에서 명예신학박사학위를 받는다. 68세 때인 1910년에 그는 건강 문제로 은퇴한다.

 

2. 시대적 배경

 

1(1840-1842: 1842 난징南京남경조약체결로 홍콩香港향항 섬이 영국 수중에 넘어가고, 장쑤성江蘇省강소성의 상하이上海상해, 광둥성廣東省광동성의 성도省都 광저우廣州광주가 개방된 계기가 됨), 2(1856-1860: 1858년 청나라와 러시아, 미국, 영국, 프랑스 사이에 맺어진 톈진天津천진조약으로 외국의 특권을 규정하고 있어, 이후 불평등 조약의 근간이 되지만, 기독교 포교의 자유와 선교사 보호가 담겨있다. 1860년 청나라가 영국, 프랑스, 러시아 제국과 체결한 베이징北京북경조약엔 영국에 현재의 홍콩 중심부인 주룽을 내주고, 러시아에는 연해주沿海州를 넘겨주며, 프랑스에겐 오컬트 천주교 포교활동의 자유와 몰수한 천주교재산 반환인정) 아편전쟁(Opium Wars)으로 중국 청나라는 대영제국에 패하여, 거의 반식민지 상태에 있었고, 강화도 조약(병자수교조약, 1876.2.27.)으로 조선은 일제에게 부산, 인천과 원산을 개항해야 했었다.

 

3. 고려문에서 조선 청년들과의 조우

 

(1) 산둥성(山東省산동성)의 옌타이시(煙臺연대)->랴오닝성(遼寧省요녕성)의 잉커우(營口영구/뉴좡牛莊우장)

 

18723월 존 로스는 연합장로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은 후 곧 바로 스튜어트(M. A. Stuart)와 결혼한 다음, 18728월 중국 산둥성(山東省산동성)의 옌타이시(煙臺연대: 서양 열강에 개방된 항구 중의 하나였고, 조계지<거류지: 주로 개항장에 외국인이 자유로이 통상 거주하며 치외법권을 누릴 수 있도록 설정한 구역>로 사용되기도 하여 즈푸芝罘 섬 때문에 체푸Chefoo로 서양 열강에 알려졌고, 조선에선 지푸로 명명)에 도착하고, 로스는 스코틀랜드성경공회(The National Bible Society of Scotland, NBSS-현재 the Scottish Bible Society) 중국 지부 총무 알렉산더 윌리엄슨(Alexander Williamson, 1829-1890: 런던 선교회 파송 선교사로 7년 동안 사역하다가, 건강문제로 1858 스코틀랜드에 요양하다가, 1863The NBSS의 첫 선교사로 중국에 간다. 1867년 윌리엄슨 선교사는 조선과 중국 청나라 국경지대에서 조선 상인들에게 기독교 서적을 판매한다. 1869년 런던 선교회에서 파송된 자신의 동생 제임스 윌리엄슨James Williamson이 살해되자, 그 해 잉글랜드로 건너간다. 1871년 중국에 대한 서적으로 글라스 고우 대학교에서 법 박사학위를 받는다. 1871, 1883The NBSS 파송을 받고 중국으로 건너간다. 1874년 스코틀랜드 연합장로선교The Scottish United Presbyterian Mission 파송 선교사로 사역한다. 1883년 건강문제로 스코틀랜드로 귀국한다. 요양 중에 그는 중국에 대한 책과 팸플릿의 협회the Book and Tract Society for China<1887the Society for Diffusion of Christian and General Knowledge among the Chinese or the “Christian Literature Society for China로 변경>’을 발견하고, 중국으로 다시 건너간다. 1886년 아내 이사벨 Isabelle이 상하이에서 서거하고, 자신도 4년 후 하늘나라에 간다. 그의 자녀들이 부친의 유지를 받들어 중국에 관한 글을 집필) 선교사로부터 로버트 J.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 1840-1866) 선교사가 조선선교를 위해 평양 대동강에서 순교한 소식을 듣게 된다. 조선선교 열의에 감동받은 로스는 조선에 복음을 전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윌리엄슨의 권고에 따라 187210월 임신한 아내와 함께 랴오닝성(遼寧省요녕성)의 잉커우(營口영구) 뉴좡(牛莊우장)로 옮기며 본격적으로 만주(滿洲)사역을 개시하는 동시에 조선사역을 겨냥한다.

 

만주는 일명 중국 둥베이삼성(東北三省동북삼성)이라고 하며 3개의 성, 곧 헤이룽장성(龍江省흑룡강성-성도省都: 하얼빈哈尔滨합이빈), 지린성(吉林省길림성-성도省都: 창춘長春장춘), 랴오닝성(遼寧省요녕성-성도省都: 선양沈阳심양=옛 지명의 펑톈奉天봉천)을 말한다.

 

(2) 아내의 서거와 사역준비

 

18732월 말 로스 아내 스튜어트(M. A. Stuart)가 아들 드럼몬드(Drummond)를 출산한 지, 한 달 후 세상을 떠난다(만주의 겨울은 혹독했다. 한겨울 최저기온은 영하 40도에 육박했고 그나마 추위가 조금 풀려야 영하 20도를 맴돌았다. 이전에 겪어보지 못한 추위와 위생불결로 로스의 부인은 건강을 잃어 세상을 떠남). 로스는 아들을 위해 누이동생 캐서린(Catherine)을 중국으로 초청하고, 존 머킨타이어(John Macintyre, 1837-1905) 선교사는 로스의 누이동생과 결혼하여 처남매제의 관계를 형성한다. 이런 분위기로 아내의 죽음을 극복하고, 로스 선교사는 중국어와 만주어를 익히는 동시에 중국서적을 통해 중국문화와 풍습 등을 배우며, 조선선교를 염두 해둔다.

 

(3) 고려문(高麗門)과 조선 청년과의 만남

 

국경 검문소가 있던 고려문(高麗門)은 현재 랴오닝성(遼寧省요녕성-성도省都: 선양沈阳심양=옛 지명의 펑톈奉天봉천)의 단둥(丹東단동)시 펑청(鳳城봉성)에 있는 곳으로, 중국청나라와 조선의 국경지역으로 양국 사이의 합법적인 교역이 이루졌기 때문에, 그곳에는 의주의 관리들이 파견되어 상주하는 별정소(別定所)가 있었다. 목책(울짱; 울타리)을 둘러친 국경경비 시설이 있었다고 해서 책문(柵門), 변경에 있는 문이라 해서 변문(邊門), 또는 1636년 병자호란 때 잡혀간 조선인들이 살았다고 해서 고려문(高麗門)이라고 부른다. 고려문은 1년에 네 번, 곧 음력 3, 8, 9, 12월에 열린다.

 

1) 백홍준(白鴻俊, 1848-1893)

 

1874109, 조선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로스 선교사는 고려문으로 이동한다. 그곳에서 그는 조선인 상인들을 만나 한문성경을 팔면서 전도를 시도했지만, 그가 만난 조선인들은 복음보다 기계로 짠 영국산 섬유면제품인 양목(洋木)에 관심이 더 많았다.

 

평안북도 압록강 강변 마을 의주 출신으로 한문과 만주어에 능통한 50대 조선인 상인 백씨(중국 청나라와 무역 활동을 하던 의주상인<만상灣商, 유만柳灣 또는 만고灣賈>은 개성을 거점으로 활동하던 개성상인<송상松商>, 한강을 끼고 경기, 충청 일대에서 활약한 한양의 상인<경강상인京江商人 또는 경상京商>, 일제와 교역한 부산 동래의 래상萊商과 더불어 조선후기 4대 상인집단의 하나)도 중국상인들이 주로 거래하고 있던 영국산 옥양목(玉洋木)을 자신이 조선에 유통시키면 큰돈을 벌 것으로 생각해 존 로스 선교사를 만난다. 존 로스 선교사는 옥양목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양초로 백씨의 관심을 끈 뒤 중국어신약성경과 자신의 선배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중국 선교의 개척자 윌리엄 찰머스 번즈(William Chalmers Burns, 賓爲霖빈위림, 1815-1868: 스코틀랜드 던Dun에서 태어나 애버딘 대학과 글래스고 대학<신학>에서 공부하였다. 일생을 사도 바울처럼 결혼도 하지 않고, 1846년에 스코틀랜드 장로교 본부 파송선교사로 중국을 향하며, 광둥성廣東省광동성 홍콩香港향항에 도착하여 중국어공부에 전념한 후에 광둥에서 선교하며 존 번연John Bunyan, 1628-1688천로역정Pilgrim Progress, 1678’의 중국어 번역과 동시에 찬송가도 번역하여 찬송가집을 제작하는 등의 사역한 후, 동료 영 선교사의 부인이 출산을 하다가 세상을 떠나자, 충격에 빠진 영 선교사를 위로하기 위해 스코틀랜드로 돌아왔지만, 영 선교사가 한 달 만에 서거하고, 자신이 사역했던 중국의 성도들이 애타게 자신의 귀환을 원한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중국으로 향한다. 40세 때인 1855년 그는 장쑤성江蘇省강소성의 상하이上海상해를 중심으로 하여 돛단배를 타고 강을 오르내리며 선교를 하던 중 23세의 잉글랜드 요크셔Yorkshire출신으로 중국 내지 선교회의 창설자인 제임스 허드슨 테일러James Hudson Taylor, 1832-1905를 만나 7개월간을 동역한다. 당시 테일러 선교사는 중국의 오컬트 천주교 선교사들처럼 중국옷을 입고 변발을 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선교사역에 도움이 되는 것을 알고, 번즈 선교사도 테일러의 방식을 택한다. 번즈 선교사는 테일러 선교사에게 살아있는 신학교였을 정도로 테일러에게 영향을 끼침)가 번역한 ‘천로역정을 건네준다.

 

백씨가 두 권을 책을 집으로 가져오자, 자신의 아들 백홍준(白鴻俊, 1848-1894)은 그 책을 통해 기독교를 접하고, 만주로 가서 머킨타이어와 로스 선교사에게 기독교교리와 더불어 서구 과학을 배우고, 1879년 여름 친구들(이응찬李應贊, 이성하李成夏, 김진기)과 함께 머킨타이어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고, 이들은 조선 최초의 세례교인이 된다.

 

백홍준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는 다음 강의시간에 하겠다.

 

2) 이응찬(李應贊, ?-1883)

 

1876227일의 강화도조약으로 조선 문호개방 소식을 들은 로스는 18764월 다시 고려문을 찾았고, 평안북도 의주에서 온 청년 이응찬(李應贊, ?-1883)을 만나 조선어 어학교사로 고용한다. 당시 이응찬은 소가죽과 한약재 그리고 홍삼을 싣고 압록강을 건너 의주 건너편 단둥(丹東단동) 고려문으로 가다가 풍랑을 만나 배가 파선되고, 겨우 목숨만 건져 중국 단동 근방으로 떠밀려온다. 이제 그는 모든 것을 잃어 무일푼의 거지나 다름없다. 그는 동료 상인을 따라 선양(沈阳심양=옛 지명의 펑톈奉天봉천)에서 하릴없이 할 일 없이 지내고 있을 때 중국인을 통해 로스 선교사가 조선어 어학교사를 구한다는 소식을 듣고, 밤에 로스 선교사 사택을 찾아가, 조선에서 기독교를 금하고 있기 때문에, 비밀조건으로 하여 로스 선교사의 어학교사가 된 것이다.

 

1877년 로스는 이응찬과 함께 최초의 한글 띄어쓰기와 가로쓰기가 도입된조선어 첫걸음’(Corean Primer: 영어로 기록된 최초의 어학 교재)을 발간했는데, 이 책은 훗날 조선선교사들과 무역업자를 위한 교재의 역할을 담당한다. 평안북도 의주 출신 이응찬의 영향으로 이 저서엔 평안도 사투리가 사용되었다.

 

로스 선교사는 만주의 관점에서 바라본, 최초의 영어판으로 외국인 선교사를 위한 책인한국의 역사’(History of Corea, 1879)를 발행한다.

 

이응찬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는 다음 강의시간에 하겠다.

 

3) 서상륜(徐相崙, 1848-1926)

 

소래교회와 새문안교회, 연동교회, 승동교회를 설립한 서상륜(徐相崙, 1848-1926: 서경석徐京錫, 1948- 목사의 증조이지만, 실제로는 서상륜의 동생 서경조목사의 증손자) 평안북도 의주 출생으로 나이 14새 때 콜레라가 유행하여 갑자기 아버지를 잃었고, 닷새 후에 어머니마저 여의어 형제가 졸지에 고아가 된다. 그 때부터 서상륜은 방탕하게 살면서 재산을 탕진하고, 그렇게 탕진한 재산을 만회하기 위해 30세 때인 1878년 동생 상우(相佑; 景祚경조, 1852-1938: 조선 최초의 장로가 되고, 뒤에 평양신학교 제1회 졸업생으로 목사가 되어 새문안교회에서 사역)를 데리고 랴오닝성(遼寧省요녕성) 성도(省都) 선양(심양沈阳; 옛 지명의 펑톈奉天봉천)을 거쳐 우장(牛莊)까지 갔다가 장티푸스에 걸려 사경을 헤맨다.

 

머킨타이어 선교사를 가까이 하던 의주 친구들(백홍준白鴻俊, 이응찬李應贊, 이성하李成夏, 김진기金鎭基 등은 1879년 맥킨타이어 선교사에게 세례 받음) 덕분에 서상륜은 머킨타이어 선교사 사택으로 인도되어, 아일랜드 출신의 의료선교사 헌터(Joseph M. Hunter)의 치료를 받는다. 맥킨타이어 선교사가 날마다 병원에 찾아와 지극한 정성으로 서상륜을 간호한다. 밤이고 낮이고 그의 곁을 떠나지 않고 정성껏 돌보고 위로해 주면서 예수를 믿으라고 하며, 한문성경읽기를 권한다. 서상륜은 병이 나으면 예수를 믿겠다고 약속했으며, 의사의 정성어린 치료 끝에 그의 병은 완쾌되며, 존 로스선교사와 더불어 성경번역을 한다.

 

서상륜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는 다음 강의시간에 하겠다.

 

4. 성경번역

 

(1) 후원: 스코틀랜드성경공회(The National Bible Society of Scotland, NBSS-현재 the Scottish Bible Society)와 영국해외선교성경단체(The British and Foreign Bible Society, BFBS)

 

(2) 장소: 1876년 존 로스 선교사가 창립한 심양동관교회(瀋陽 東關 敎會) 옆 건물이 존 로스 선교사와 조선청년들이 번역 작업을 진행한 곳으로 현재성경 번역 유적지로 지정되어 있다.

 

(3) 인쇄

 

1881년 상하이에서 인쇄기를 구입하여 심양동관교회의 선교부의 문광서원에 설치하고 조선인 번역자들에 의해 준비된 목활자(木活字: 나무활자)를 일본 주재 스코틀랜드성경공회 총무 릴리 선교사에게 보내어 4만자의 연활자(鉛活字: (납으로 만든 활자)를 만들어서 그해 우장을 거쳐 심양으로 가져왔다.

 

(3) 성경번역

 

1) 한글 쪽 복음

 

1882.3. 24.‘수셩교누가복음젼셔’( 누가복음: 최초의 서북 방언으로 번역)->1882.5.12 ‘예수성교 요한복음전서’(서북말 판과 한성말 판 )->1883 마가복음과 사도행전 ->1884. 마태복음->1885. 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2) 1887년 신약성경완간(최초 한글 성경)

 

예수성교전서’(예수聖敎全書, 1887)=‘로스역본’(Ross Version)

 

5. 종합

 

조선 청년들이 중국어 신약(1852, 대표역본)을 보면서 조선어로 번역하면, 로스와 머킨타이어 선교사는 그 조선어 번역문을 그리스어 개역과 영어 개역과 대조하면서 검토하고 수정하는 방식으로 번역하였다. 아쉬운 점은 킹 제임스 성경을 사용하지 않는 듯하다.

 

신명 번역의 경우, 로스는 이렇게 기록했다. “한국인에게 ‘heaven’하ᄂᆞᆯ’(hanal)이고, Lord 혹은 prince’(nim)이다. ‘hananim’은 어느 곳에서든 위에서 다스리시는 분이고, 지상에서 가장 높은 분이라고 조선인들이 알고 있는 낱말이다.”

 

후에 제임스 S. 게일(James Scarth Gale, 조선어 이름 奇一, 1863-1937) 선교사가 1911성경전서출판기념사에서하나님성호 주장하고, 참가한 모든 사람들이 동의한다.

 

정식으로 서양 선교사들이 조선에 들어오기 이전에 그리고 조선정부가 선교허락(1898) 이전에 이미 로스와 머킨타이어 선교사의 신약성경번역(한글성경)이 들어와, 성경 스스로가 기독교인과 교회를 창출해 하나님말씀임을 증언했고. 신명도 일반은총의 영역의 하느님’(엘로힘)이 아니라 특별 은총의 하나님’(여호와)으로 표기되어, 구원의 역사를 이루고 있다.

 

이와 반면 오컬트 바티칸은 이런 하나님말씀을 성경비평이라는 어휘를 동원하여 성경을 난도질하며, 정통복음주의기독교와 성도를 말살시키고 있음은 물론 성경난도질을 잘 하는 자들을 대석학이라고 치켜세워 신학교도 분열위기를 겪고 있다. 오컬트 바티칸은 신성모독죄를 범하고 있음은 물론 번듯한 성당건물과 사제가 없으면 오컬트 천주교 신도가 생기지 않는다. 천주교 신도도 거의 성경을 읽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의식(미사)과 성직자복의 세련된 이미지에 호감을 느껴 출석하고 있을 뿐이다.

 

명예 교황’(emeritus pope)에 추대된 교황 베네딕토 16(라틴어 Benedictus PP. XVI; 이탈리아어 Papa Benedetto XVI; 영어 Pope Benedict XVI, , 본명 Joseph Aloisius Ratzinger, 재위2005.4.24.-2013.2.27., 1927-)도 성직에 입문한 동기가 성경을 읽고 회심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가 5살 무렵 꽃을 뿌리며 뮌헨 대교구장이었던 추기경의 방문을 환영한 아이들 무리에 끼어 당시 추기경 특유의 의복을 본 후로 그 의복을 입고 싶어 오컬트 성직자의 길을 걷기로 했다는 것이다.

 

오컬트 바티칸의 교주 그레고리오 12(라틴어 Gregorius PP. XII; 이탈리아어 Papa Gregorio XII; 영어 Pope Gregory XII, 재위 1406.11.30.-1415.7.4., 1325-1417)는 분열(1378-1417)을 교주의 분열(1378-1417)을 종식시키기 위해 스스로 교주직위에서 물러난 거와는 달리, 베네딕토 16세 에게는 교주에 대한 사명감이 없기 때문에 그 직을 중도 사퇴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