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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초의 권서 김청송의 신앙일대기는 오컬트 바티칸의 성경난도질을 단죄한다’ YouTube!!!

아우구스티누스 2021. 1. 13. 10:28

김청송은 서간도 한인촌 출신으로 영신환을 판매하는 약장사였는데, 존 로스(John Ross, 罗约翰나약한, 1842-1915) 선교사의 번역팀에 참여해 식자공으로 사역하다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1898이양자교회를 태동케 해, 이 교회가 모교회가 되어 만주전역을 복음화 하는 대승리의 역사를 이끌어낸 장본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동안 한국교회사에서 주요하게 다루지 않은 김청송에 대해 살펴보자.

 

1. 역사적 배경

 

서론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김청송이는 서간도출신이다. 먼저 서간도 역사 그리고 김청송이가 인적이 끊긴 그곳에서 거주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살펴보자.

 

(1) 후금과 청나라

 

명은 여진을 만주 최북방의 야인여진(野人女眞), 헤이룽장성의 해서여진(海西女眞), 지린성의 건주 여진(建洲女眞), 의 세 집단으로 구분하여 통치했다.

 

건주여진 출신 누르하치(재위 1616-1626, 1559-1626, 멧돼지 가죽이라는 뜻을 가진 누허치奴可齊에서 유래)가 여진족의 각 부족을 통일하고 1616년 후금(後金, 1616-1636)을 건립함과 동시에 스스로 만주한(滿洲汗/; ; ; -고조선 때의 군장君長)이라고 불렀다가, 1635년에 태종(홍타이지皇太極황태극, 재위 1626-1643)이 여진인(女眞人)을 만주인(滿洲人)으로 개칭한 뒤, 만주가 족명(族名)에서 지명(地名)으로 바뀌어 전해 내려왔다.

 

(2) 간도(間島젠다오)의 기원

 

누르하치가 1625년 수도를 랴오닝성(요녕성)의 랴오양(遼陽요양, 1625-1636)에서 랴오닝성(요녕성)의 선양(심양=펑텐=봉천/1634년에는 만주어 묵던盛京성경으로 개칭)으로 옮기고, 후금의 제2대 한()이자, 청 제국(1636-1912)의 창업 군주 태종 홍타이지(후금 1626-1636, 청 제국 1636-1643 , 1592-1643)1636, 국호를 후금에서 청()으로 바꾸고, 병자호란(1636.12.28.-1637.2.24.: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조선은 금나라를 배척하는 정책을 내세우자 1627년 후금 조선을 침략한, 정묘호란 때 맺은 형제지국兄弟之國의 대등한 양국관계를 군신지의君臣之義로 고칠 것을 요구)을 일으킨다.

 

병자호란 뒤에 청나라 측이 만주를 성역화하기 위해 이 지역을 봉금지역(封禁地域)으로 정하고 청국인이나 조선인 모두의 입주를 금지하는 공간지대로 남아 청나라와 조선 사이에 놓인 섬()’이라는 데서 유래한다. 이와 함께 조선 후기에 우리 농민들이 이 지역을 새로 개간한 땅이라는 뜻에서 간도’(墾島)라고 부르고, 또 조선의 정북(正北)과 정동(正東) 사이에 위치한 방향인 간방(艮方: 팔방의 하나. 정동과 정북 사이의 방위를 중심으로 한 45° 각도의 안의 방위)에 있는 땅이라 하여 간도’(艮島)라고도 호칭한다. 3대 황제 순치제(順治帝, 재위 1643-1661 1638-1661)1644년 허베이성(河北省하북성)의 베이징(北京북경)으로 천도하며, 간도의 봉금령은 강화되고, 1875년에 봉금령이 폐지된다.

 

이런 사실에서 보면 만주 전체가 간도임을 알 수 있다.

 

만주(滿洲)=중국 둥베이삼성(東北三省동북삼성)=헤이룽장성(黑龍江省흑룡강성-성도省都: 하얼빈哈尔滨합이빈), 지린성(吉林省길림성-성도省都: 창춘長春장춘), 랴오닝성(遼寧省요녕성-성도省都: 선양沈阳심양=옛 지명의 펑톈奉天봉천)

 

간도는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 등 국가가 건립되고 한국인들이 거주했기 때문에, 만주는 사실상 당시 조선의 땅이고. 1778흠정만주원류고’(欽定滿洲源流考)는 청제국이 신라계가 세운 국가임을 증언했기 때문에, 청제국은 자신들의 모국인 조선과의 영토분쟁에서 벗어나기 위해, 간도의 봉금령을 내렸던 것으로 사료된다.

 

(3) 서간도와 북간도(동간도)

 

서간도와 북간도의 구분은 일제강점기 때 조선 스스로가 자신을 비하시켜 만들어낸 허상일 뿐만 아니라 1712(숙종 38)의 백두산정계비(白頭山定界碑)서쪽은 압록강, 동쪽은 토문강(土門江)을 경계로 국경을 정함의 토문강의 위치에 대한 청제국의 덫에 걸려서 나온 구분이다.

 

그러면 토문강의 위치에 대해서 살펴보자.

 

토문강은 백두산(白頭山: 산머리<산꼭대기>1년 중 8개월이 눈으로 덮여 있는데다가 흰색의 부석浮石<속돌: 분출된 용암이 갑자기 식어서 된 다공질多孔質의 가벼운 돌>들이 얹혀 있어서 흰 머리 산이라는 뜻; 중국어 창바이산長白山장백산)의 천지(天池)에서 발원하여 북쪽 지린성(吉林省길림성)의 지린 시(吉林길림)를 거쳐 동쪽 헤이룽장성(黑龍江省흑룡강성)의 성도(省都) 하얼빈(哈尔滨합이빈)으로 관류하는 쑹화장(松花江송화강: 강을 다스리는 신 하백河伯이 살았던 강이자 고조선, 부여, 발해의 영토로, 하백의 딸 유화와 천제의 아들 해모수에서 태어난 주몽의 어별성교魚鱉成橋/이나 로 대체할 수 있음’, 곧 분석심리학의 창시자 칼 G. Carl Gustav Jung, 1875-1961집단무의식; 개인의 경험을 넘은 선천적 구조의 보편적 무의식; 독어Das kollektive Unbewusste; 영어 collective unconscious’를 배태하고 있는 세계사적인 사건)과 합류하고, 쑹화장은 중국청나라와 러시아와의 국경인 아무르강(러시아어의 아무르 강; 중국어의 헤이룽장黑龍江흑룡강)과 합수한다.

 

압록강 북부지역, 토문강(土門江)의 왼쪽이 서간도 그리고 두만강 북부지역, 토문강의 오른쪽을 동간도(북간도)로 편의상 구분하여 부른다.

 

서간도의 주요지역으로 랴오닝성(遼寧省요녕성)의 단둥(丹東단동: 고려문高麗門의 소재지로 신의주와 경계), 지린성(吉林省길림성)의 지안(集安집안: 고구려 수도로 광개토대왕비와 장수왕릉의 소재지로 자강도의 만포시滿浦市와 경계), 지린성의 린장(臨江임강: 자강도의 중강과 경계), 지린성의 창바이(長白장백: 중국에서 유일한 조선족 자치현으로 양강도의 도청 혜산시와 경계) 등을 들 수 있다.

 

동간도는 토문강의 동쪽지역이기 때문에 생긴 단어이고, 두만강북부지역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북간도라고 불린다. 주요지역으로 현재의 지린성(吉林省길림성)의 옌볜(延邊연변)조선족자치주(연변조선족자치주延邊朝鮮族自治州의 주도: 옌지延吉연길)의 룽징(龍井용정)을 들 수 있다. 특히 대한민국에서 동간도(북간도)하면 룽징이란 단어가 떠오를 정도다. 그 이유는 세 가지 차원에서 비롯된 것이다.

 

첫째, 독립운동의 산실

 

비암산의 소나무 정자 일송정(윤해영尹海榮, 1909-1956의 작시, 천주교 가정에서 태어난 조두남趙斗南, 1912-1984의 작곡의 가곡 선구자先驅者의 가사로 매우 유명해짐)과 하이란 강(海蘭江해란강)은 한국인의 가슴을 적신다.

 

둘째, 시인 윤동주(尹東柱, 1917-1945)의 고향

 

윤동주 시인은 룽징시 명동촌에서 출생하여 명동학교에서 수학하고, 평양 숭실중학교와 서울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에 건너가 1942년 교토 도시샤다이가쿠(同志社大学)에 입학 1943년 항일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후쿠오카 형무소(福岡刑務所)에 투옥, 100여 편의 시를 남기고 27세의 나이에 옥중에서 요절하였다.

 

젊은 나이의 죽음과 사후에 출간된 그의 시집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룽징은 한국인의 정신적이며 정서적인 고향이 되었다.

 

셋째, 오컬트 바티칸의 노예 기장과 한신대의 주역

 

장공(長空) 김재준(金在俊, 1901-1987)은 신앙연륜이 매우 짧고, 성경지식이 부족한 상태에 유학했고, 그 기간도 짧을 뿐만 아니라 정통신학사상보다는 오컬트 바티칸의 독초를 먹고 귀국했다. 그가 받은 석사학위는 당시 조선시대에선 그 위력을 발휘할지 모르지만, 21세기 관점에서 보면 영어도 서툰 조선유학생에게 조선복음화를 위해 선물로 준 것에 불과하다. 장공은 그런 알량한 실력을 갖고 조선에 들어와 성경난도질에 앞장서다가, 풍부한 일반학문의 지식과 성숙한 성경지식 그리고 미국유학기간에 수학한 정통신학에 기초한 기독교 변증가요 독립 운동가이자 애국자인 죽산(竹山) 박형룡(朴亨龍, 1897-1978) 박사의 테스트에 걸려, 평양신학교교수직을 구하지 못해, 1936.8-1939년 동안 캐나다장로교계열 룽징 은진중학교(恩眞中學校) 교목과 성경교사를 하며, 그 곳에서 당시 학생회장이었던 강원용, 2학년생 안병무, 문동환 등을 만난다. 당시 문익환과 윤동주는 학교를 떠났지만, 문익환을 비롯해 이들이 후에 장공의 제자로서 기장과 한신대에서 주요역할을 한다.

 

1883(고종 20)에 청나라와 국경에 대한 분쟁이 발생했는데 청나라 측에서는 토문강을 두만강으로 여겨 북간도 지역을 청나라 땅이라고 주장하였고, 1909년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청나라로 부터 만주철도부설권을 획득하면서 간도지역을 청나라 땅이라고 불법적으로 인정해버려, 우리는 간도, 곧 만주전체를 잃었고, 지금은 대한민국에서 똬리를 틀고 있는 중국의 노예학자들 때문에, 한국인들은 모두 꿀 먹은 벙어리요 침 먹은 지네가 되었다.

 

(4) 1882.6.9.의 임오군란(壬午軍亂)

 

1876.2.27. 조선이 일제에게 부산, 인천과 원산 개항, 치외법권 인정 등의 내용이 담긴 강화도조약(조일수호조규<條規-조문條文의 규정>; 병자수호조약), 1882.5.22 조미수호통상조약(Treaty of Peace, Amity, Commerce and Navigation, United StatesKorea Treaty)으로 인해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1821-1898)이 취한 쇄국정책이 무너지고, 개화파와 남인계열의 수구파의 대립이 날카롭게 일어나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고종(高宗, 26대 왕 재위 1864-1897,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 재위 1897-1907, 1852-1919)의 친정으로 정권을 내놓은 대원군은 척족(戚族; 척속戚屬: 성이 다른 일가)인 민씨 일파를 내치고 다시 집권할 기회를 엿보고 있는 중이었다.

 

이런 시기에 임오군란(1882.6.9)이 일어난다. 그러면 임오군란에 대해서 살펴보자.

 

1881년 민영환(閔泳煥, 1861-1905: 190511월 을사늑약체결에 반대하여 자결)의 부친, 민겸호(閔謙鎬, 1838-1882: 흥선대원군의 처남, 고종의 외삼촌)가 선혜청(宣惠廳: 대동미大同米, 대동목<현물로 바치던 공물貢物을 쌀로 통일해서 바치게 하던 대동법大同法에 따라 쌀 대신 거두던 포목> 따위의 출납을 맡아보던 관청) 당상(현재의 국세청장; 堂上: 당상관은 조정에서 정사를 볼 때 붉은 관복을 입고 대청<임금에게 아뢸 일을 의논하던 곳>에 올라가의자에 앉아 왕과 중대사를 논의하는 신분이 높은 관료를 가리키는 데서 나온 용어로, 정책 결정에 참여하고 정치적 책임을 갖는 정 3품 상 이상의 자리이며,‘떼어 놓은 당상堂上이란 단어가 유래할 정도로 권세 있는 자리이다. 이 속담의 의미는 당상관 자리를 누군가를 위해 따로 떼어 놓았다는 뜻으로 어떤 일의 결과가 변동 없이 확실하게 정해졌다는 뜻임) 겸 병조판서(현재 국방부장관)로 재직 중인 18814월 일본 육군소위 호리모도(堀本禮造)를 초빙해 신식군대인 별기군(別技軍)을 창설한다.

 

임진왜란을 계기로 수도를 방어하는 훈련도감(訓鍊都監), 어영청(御營廳), 금위영(禁衛營) 그리고 한양의 외곽 지역을 방어하는 총융청(摠戎廳), 수어청(守禦廳)의 오군영(五軍營)을 무위영(武衛營), 장어영(壯禦營)2영으로 축소의 결과 대량해고가 발생한 동시에 2영내에서의 옛 군영 출신 병사와 별기군 소속 병사 간의 차별대우와 더불어, 13달 동안 봉급미를 받지 못한 구식군인들의 불만이 높던 차에, 선혜청이 한 달 치의 봉급미를 준다고 하여, 선혜청에 구식군인들이 모여든다. 그런데 선혜청 고지기(관아의 창고를 보살피고 지키던 사람으로 현재의 국세청 과장이나 계장)의 농간으로 봉급미의 태반이 물에 불어 썩은 쌀이었거나 돌이 섞여 있었으며 정량마저 모자랐다. 이에 격분한 구식군인들이 고지기를 때려 부상을 입히고 선혜청 민겸호의 집으로 몰려가 민겸호의 하인들과 실랑이 끝에 하인들을 때려죽이고, 민겸호까지 살해하고, 저택을 파괴하며 폭동을 일으킨다.

 

난병들은 이것으로도 자신들의 분노를 가라앉히지 못하자, 대원군에게 진정하기 위해 운현궁(雲峴宮)으로 몰려와 애소(哀訴: 슬프게 하소연함)한다.

 

대원군은 겉으로는 난병을 달랬지만, 한편으로는 심복인 허욱(許煜)을 군병으로 변장케 하고 그들을 지휘케 한다. 그리하여 난병의 불평은 대원군과 연결되어 민씨 및 일본 세력의 배척운동으로 확대된다.

 

난병들은 별기군 병영으로 몰려가 일본인 교련관 호리모도(堀本禮造)를 죽이고, 민간인들과 합세하여 일본 공사관(서대문 밖 청수관)을 포위, 불을 지르고 일본순사 등 13명의 일인을 살해한다. 하나부사(花房義質) 공사 등 공관원들은 모두 인천으로 도망가, 1882612일 영국 측량선 플라잉피시호(The Flying Fish)에 구조되어 15일 나가사키(長崎)에 도착한다.

 

이튿날 분노로 가득찬 군민은 대원군의 밀명에 따라 영돈령부사 이최응(李最應) 등을 살해하고, 명성황후(明成太皇后, 재위 1866-1895, 1851-1895)를 제거하기 위해 창덕궁 돈화문 안으로 난입한다.

 

20065, 숙종 때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제월당 송규렴(宋奎濂)의 후손이 대전광역시 향토사료관에 기탁한 유물 가운데 임오군란 당시 명성황후 피난길에 동행하면서 황후의 행적을 기록한 임오유월일기(壬午六月日記)1882613일부터 81일 명성황후의 환궁하기까지의 날씨, 동정, 환후(병환), 관련 인물들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오류의 역사를 바로잡아야 한다.

 

여기에선 명성황후의 행적의 명암에 대해서 간략하게 밝히겠다.

 

첫째, 이수정의 기독교입문으로 인한 미국선교사의 내한

 

1882610일 이수정(李樹廷, 1842-1886)은 자신은 농부로 변장하고, 명성황후는 궁녀의 옷을 입혀 궁녀로 변장시켜, 지게에 거름이 나가는 것처럼 꾸며 궁궐에서 빠져나와 광나루를 건너 충주까지 무사히 피신시켰다. 그 공을 인정받아 188210월 고종의 허락 하에 비수행원으로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으로 지칭)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기독교를 접하며, 18852월 국한문 혼용 마가복음 번역본인신약 마가젼 복음셔 언땵’(하나님을 천주天主번역. 언땵라고 한 것은 유교와 불교 계통 서적의 한글역을 언땵라고 했음)을 미국성서공회의 지원을 받아 출간하며, 미국선교사의 내한을 주장해, 미국선교사가 조선에 입국한다.

 

이수정의 행적에 대해선 후의 강의시간에 논하겠다.

 

둘째, 을사오적 이근택

 

충주출생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 1865-1919)은 학무대신 이완용,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과 함께 을사오적 중 하나이며, 임오군란 때 충주로 피신한 명성황후에게 싱싱한 생선을 진상함으로써 눈에 들어 발탁된다. 후에 군부대신이 되어 일제군 사령관인 하세가와와 결의형제하고 이토 히로부미와는 부자의 의를 맺을 정도로 일제사생아로 전락한다.

 

셋째, 무녀 박창렬

 

명성황후는 충주 장호원(長湖院: 현재 충북 음성군 감곡면 왕장리)의 충주목사 민응식(閔應植, 1844-?)의 집(현재 매괴성당과 매괴여자고등학교)으로 피신하던 중 미색(美色)과 신통력을 겸비한 무녀 박창렬을 만나게 되었는데, 명성황후는 무녀에게 환궁날짜를 묻고, 무녀는 팔월 보름쯤이면 궁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해준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무녀의 말대로 188281일 영의정 이하 대신들과 청군의 호위를 받으며 창덕궁으로 되돌아오고, 명성황후는 자신의 앞날을 예언해 주었던 무녀를 최고의 예언가로 믿고 늘 가까이 두고 상의하게 되었으며 그녀에게 진령군(眞靈君)이라는 군호(君號)를 내리며 언니라고 부른다. 이후 진령군은 요즘말로 명성황후의 비선실세가 되어 온갖 악행을 저지르고, 명성황후의 비운과 조선멸망을 앞당기는 암초가 된다.

 

넷째, 서간도로 도피

 

임오군란에 참여했던 구식군대출신들과 양반계급의 조선인들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가솔을 이끌고 고구려의 옛 수도 지안(집안)의 깊은 산골짝이로 망명한다.

 

매약상 김청송은 망명가들과 그 후손들이 거주하는 지안 출신이다.

 

2. 존 로스(John Ross, 罗约翰나약한, 1842-1915) 선교사와 김청송과의 만남

 

김청송은 영신환을 판매하지만, 수입이 넉넉지 못하여 가족의 보탬도 되지 못 할뿐만 아니라, 자신도 만주지역에서 생활고로 허덕거리다가 주위에서 조선인 식자공(활자를 원고대로 조판하는 사람)을 구한다는 소식을 듣고 로스 선교사를 찾아간다.

 

로스 선교사는 김청송의 첫 인상이 마음에 들지 않아 고민한다. 2명의 기독교 중국인 인쇄공이 있지만, 조선어번역을 위해선 조선어를 사용하는 식자공이 필요해, 할 수 없이 1881년 김청송을 식자공으로 채용한다. 김청송은 말이 어눌하고 일하는 속도가 느렸지만, 성실하고 정확했다.

 

3. 식자를 통한 신학훈련: 1881년의예수셩교문답’, ‘예수셩교요령’, 1882년의예수셩교 누가복음젼셔

 

(1) 1881년 기독교교리

 

188110월 발행한예수셩교문답’(세례 신청자를 위한 요리要理 문답서로서, 스코틀랜드연합장로교회가 사용하던 교리서를 조선인에게 맞게 수정한 것임), ‘예수셩교요령’(신약성경의 주요 내용을 요약한 것으로서 기독교의 입문서)을 식자한다. 처음에는 무덤덤한 태도로 대하다, 식자과정에서 글자 하나하나를 자세히 보면서 김청송은 기독교 교리에 관심을 가지며, 두 소책자가 인쇄완료되는 10월쯤에, 김청송은 기독교에 눈을 뜬다.

 

(2) 1882년 성경

 

1882.3. 24. 발행한예수셩교 누가복음젼셔’(누가복음: 최초의 서북 방언으로 번역)를 식자할 때 틈틈이 김청송은누가복음의 용어와 문장이 무슨 뜻인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중국 인쇄공들에게 묻기 시작한다. 그들은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김청송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변한다.

 

3. 자청한 세례와 권서

 

김청송은 식자하면서 성삼위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깨닫고, 기적을 창출한다. 그는 로스 선교사를 찾아가 세례를 요청하고, 로스 선교사는 첫 인상의 김청송 답지 않게 해박한 기독교의 신앙이해에 탄복하며, 18823월 경 로스 선교사는 김청송에게 세례를 준다. 그 후 김청송은 삭자공의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로스 선교사에게 권서(勸書; 賣書人매서인)로 임명해달고 자청해 최초의 조선인 권서가 된다.

 

4. 전도 및 선교

 

18825월쯤에 김청송은 로스 선교사의 적극적인 후원아래 최초로 수백 부의 소책자 (‘예수셩교문답’, ‘예수셩교요령’) 그리고 예수셩교 누가복음젼셔예수셩교 요한복음젼셔를 짊어지고 서간도로 향한다. 보름 후 서간도에 도착한 김청송은 28개 한인촌을 돌아다니며 기독교 서적들을 값싸게 팔고, 기독교 교리를 전한다.

 

당시 한인촌 사람들은 김청송을 보고 매우 놀라워한다. 과거 어리숙하고 고지식하기만 하던 김청송이가 자신만만하고 용기 충천한 사람으로 변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인지 김청송이가 가져간 수백 부의 기독교 서적은 몇 달 만에 다 팔린다. 그 결과 많은 예비신자가 생긴다.

 

1882년 연말에 다시 심양으로 돌아온 김청송은 존 로스 선교사에게 한인들의 세례를 요청하고, 1883년 연 초 다시 수백 부의 기독교 서적을 가져가 서간도에 뿌린다. 이 결과 1882년 후반부터 1883년 전반에 서간도의 28개 한인촌에는 대량의 기독교 서적이 뿌려지고, 수백 명의 조선인들이 기독교 예비신자로 거듭난다. 한글성경의 위력이다.

 

성경번역과 출간으로 시간이 없기 때문에 로스 선교사는 김청송의 세례부탁의 방문계획을 미루는데, 지안에서 소책자와 쪽 복음성경을 접해, 기독교의 진리에 눈이 뜬 조선인들이 걸어서 로스 선교사를 방문해 세례요청과 기독교의 진리에 대해서 질문한다. 존 로스 선교사는 이에 감복해 188411월 웹스터(James Webster) 선교사와 함께 서간도 한인촌으로 가서 75(그 후 85>100명의 세례교인으로 부흥. 1882년 임오군란 때 정치적 이유로 이곳 이양자 골짜기까지 피신해 온 군인 출신 6명도 포함됨)에게 세례를 주어, 지안시 양쯔(樣子)구의 산속에 형성됐던 옛 한인촌 이양자마을입구에 1898년 최초로이양자교회’(里樣子敎會)가 자생적으로 설립됨으로, 간도의 모교회가 되고, 만주전체지역이 기독교의 복음의 역사가 진행된다.

 

5. 종합

 

정통주의(orthodoxy): ‘성경은 하나님말씀이다’(The Bible is the word of God)

 

신정통주의(neo-orthodoxy):‘성경은 하나님말씀이 된다’(The Bible becomes the Word of God)

 

순복음측에서로고스’(히브리어דָּבָרdâbâr; 그리스어 λόγοςlogos; 라틴어 verbum; 독어 das Wort; 영어 the Word)기록된 성경이고 레마’(그리스어 ῥῆμαrhêma)성령 하나님께서 감화 감동을 주는 성경구절이나 설교 또는 기도할 때 들리는 성령 하나님음성이라고 구분하는데, 이것은 그릇된 구분이다. 두 용어는 동일하게 하나님말씀을 의미한다. 구태여 구분하면 대문자 Logos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ῥῆμα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ρηματος χριστουRhematos Christou; the word of Christ, Jesus Christ’s sayings)이다.

 

순복음측의 견해의 레마가 신정통주의의 하나님말씀이다. 객관적인 성경은 하나님말씀이 아니라 주관적으로 감동받는 성경구절이 하나님말씀인 것이다.

 

자유주의(liberalism):‘성경은 하나님말씀을 포함한다’(The Bible includes the Word of God)

 

자유주의는 성경엔 하나님말씀도 있지만, 인간이 짜깁기한 언어가 있다고 보기 때문에, 고상하게 성경비평, 곧 성경난도질에 이골이 나 있다.

 

위의 성경관 입장에서 말하면, 정통주의는 참 기독교이고, 신정통주의와 자유주의는 오컬트 바티칸의 노예집단이다.

 

식자공 김청송은 완성된 성경책을 통해서가 아니라 기독교서적과 성경을 조판할 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영광을 체험했다. 그의 신앙체험은 성경이 하나님말씀임을 증언하고, 그의 전도로 세례교인들이 늘어나고, 그로 말미암아 만주에 최초로 조선인의 주체로 이양자교회가 설립되고, 이 교회가 모교회가 되어 만주전역을 기독교화, 하나님나라로 만드는 영광스런 기독교역사를 일구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오컬트 바티칸의 성경난도질은 신성모독죄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