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도교가 주도적으로 3.1혁명의 리드하려고 했지만, 당시 조선지도층의 호응을 받지 못하자, 기독교(천주교가 아님. 천주교는 일제의 사생아이며, 현재에도 매국노짓거리를 하는 백해무익한 집단)에게 호소하여, 기독교가 주체(남강 이승훈 장로 그리고 조선 최초의 검사를 지내고 우남 이승만 정부시절 부통령을 역임한 송암 함태영 남대문교회교역자)로 3.1혁명을 이끌었다. 그러면 3.1혁명의 기원과 기독교의 애국정신을 살펴보자.
1. 미국의 먼로주의
오스트리아 외상1809-1820, 재상宰相; 수상1821-1830, 메테르니히Klemens Wenzel Lothar Fürst von Metternich-Winneburg zu Beilstein, 1773-1859)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éon Bonaparte, 프랑스 제1제국의 황제1804-1814년, 1815, 1769-1821)의 나폴레옹전쟁(1803-1815)의 결과 이후 유럽 질서 재편, 곧 왕정이 몰락한 곳에 다시 왕정을 부활시키고, 자유주의, 민족주의 운동에 대한 반대를 위해 1814년 9월-1815년 6월‘빈(독어 Wien; 영어 Vienna: 오스트리아 제국의 수도이자 근 천년 동안 신성로마제국의 수도) 회의’(비에나 회의; 독어 Wiener Kongress; 영어 Congress of Vienna, 1814.9.-1815.6)를 개최한다. 유럽의 구질서가 회복되면서 유럽 열강들은 과거의 식민지를 되찾으려 했다. 바로 이때 미국은 1823년 12월 2일 제5대 대통령 제임스 먼로(James Monroe, 재위 1817-25, 1758-1831)의 먼로주의(먼로독트린, 먼로선언, 미국고립주의; Monroe Doctrine)를 선언하며 유럽 열강의 아메리카 개입에 쐐기를 박는다.
당시 나폴레옹의 상황에 대해 살펴보자.
1814년 4월 16일 체결된 퐁텐블로 조약(Treaty of Fontainebleau; 프랑스어 Traité de Fontainebleau; 퐁텐블로는 파리 근교의 도시로 역대 프랑스 왕의 궁전과 숲으로 유명함)에 의해 4월 20일, 나폴레옹은 퐁텐블로 성에서 출발하여 이탈리아 토스카나주(이탈리아어 Regione Toscana; 영어 Tuscany Region)의 섬, 곧 지중해의 엘바 섬(이탈리아어 Isola d'Elba; 영어 The Island of Elba)으로 가고, 1815년에 나폴레옹은 엘바 섬을 탈출하여 파리로 돌아와, 1815년 6월 18일 벨기에 워털루 인근에서 벌어진 워털루 전투(영어 Battle of Waterloo; 프랑스어:Bataille de Waterloo)에서 패배로 95일천하로 종결되고, 1815년 10월 영국정부는 나폴레옹을 자신의 해외영토인, 남대서양의 한가운데에 있는 세인트헬레나(Saint Helena)에 유폐시키고, 아일랜드계 영국인 허드슨 로 경(Sir Hudson Lowe, 1769-1844) 세인트헬레나 섬의 총독은 나폴레옹에게 상상을 초월하는 가혹행위를 자행하였으며, 나폴레옹이 병이 들자 그가 치료를 받지 못하도록 주치의를 영국으로 강제귀국 시킨다. 그런 혹독한 상황 속 에서도 나폴레옹은 체스와 영어 공부에 매진하는 동시에 수행원에게 구술 필기시킨 방대한 회상록을 남긴다. 1821년 5월 5일, 오후 5시 49분에 세상을 떠나고, 그의 유해는 1840년 5월에 영국의 동의를 얻어 프랑스에 반환되었으며, 현재 파리의 앵발리드에 안치되어 있다.
다음의 글은 미국의 먼로주의를 잘 보여준다.
“아메리카대륙은 자유와 독립의 원칙에 따라 앞으로는 유럽의 어느 강대국도 이를 미래의 식민지화 대상으로 간주할 수 없다.”
“우리의 권리가 침탈당하고 심각하게 위협받을 때만 우리는 우리가 당한 피해에 분노하고 우리의 방위를 위해 준비할 것이다.”
그런데 먼로주의가 휴지조각으로 변하는 상황이 돌발한다.
제1차 세계 대전(1914.7-1918.11)에서 미국의 전통적인 고립주의 외교 노선인‘먼로주의’에 따라 미국은 유럽에서 벌어지는 일에 개입하지 않으며,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만튀르크 제국을 중심으로 한 동맹국이나 영국, 프랑스, 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연합국 양측에 전쟁 물자를 팔며 중립을 지키다가, 독일의 잠수함 공격을 받고 난 후인 미국은 1917년 4월 참전을 결정한다. 미국의 참전으로 전세가 연합국의 승리로 굳어져가자 당시 대통령 토머스 우드로 윌슨(Thomas Woodrow Wilson, 1913-1921, 1856-1924)은 제1차 세계대전(World War I, 1914.7.28.-1918.11.11) 종전을 앞두고 1918년 1월 미국 의회에서 연두 교서를 통해 새로운 전후 질서의 14개 조항(The Fourteen Points) 원칙을 제안한 가운데서‘민족자결주의’(Principle of National Self-determination)가 부각된다.
이것은 이미 블라디미르 레닌(Vladimir Lenin, 1870-1924)과 제1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동시에 20세기 자유주의의 상징이자 복지국가 영국의 창설자인 영국 수상 데이비드 로이드조지(David Lloyd George, 1st Earl Lloyd-George of Dwyfor, OM, 재위 1916-1922, 1863-1945: 영국 역사상 처음으로 웨일스어를 모국어로, 영어를 제2 언어로 사용해, 웨일스 지방에서 가장 존경하는 지도자. 1919년 5월 24일 조선독립을 위해 프랑스 파리 평화회의에 파견된 김규식 외무총장 겸 전권대사는 ‘Republic of Korea’라는 국호를 최초로 사용한 독립 청원 서한을 로이드조지 영국 수상 앞으로 보냈고, 이 서류는 5월 30일 영국 정부가 접수한 것으로 돼 있음)가 언급한 것이지만, 윌슨 대통령 연설에서 열매를 맺는다. 민족자결주의는 각 민족이 자신의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으며, 이 권리는 다른 민족의 간섭을 받을 수 없다는 내용이다.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는 패전국인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만투르크 제국 등의 식민지와 점령지에만 적용되고, 전승국의 식민지와 점령지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4번이나 대통령직에 오른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 재위 1933-1945, 1882-1945.4.12)의 주장으로 민족자결의 원칙이 1941년 대서양헌장에 삽입된다.
2. 파리강화회의
제1차 세계 대전이 종료된 후 새로운 전후 질서를 구축하기 위한 1919.1.18.-1920.1.21.의 파리강화회의(The Paris Peace Conference)의 주요 결과는 독일 제국과 연합국 사이 맺은 베르사유 조약(영어 Treaty of Versailles; 프랑스어 Traité de Versailles; 독어 Friedensvertrag von Versailles)체결(1919년 6월 28일 11시 11분에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에서 서명하고, 1920년 1월 10일 공포)이었고, 이것은 국제 연맹(영어 League of Nations; 프랑스어 Société des Nations: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인 1920년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우드로 윌슨의 제안으로 만들어진 국제 기구였지만, 미국은 상원의 베르사유 조약 비준 동의 거부로 참여하지 않았고, 영국, 프랑스, 일본, 이탈리아 왕국 4개국이 상임이사국이 되었지만, 제2차 세계 대전을 억제하는 데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고, 1945년 10월 24일의 유엔United Nations, UN 창설로 해체됨)탄생 규정을 포함하는 긍정적인 요소와 더불어 독일 제재에 관한 규정이 담겨있기 때문에 독일에게 굴욕감을 주고, 독일에 대한 광범위한 보복조치에 대한 기반이 되었음은 물론 제2차 세계대전의 원인을 제공한다.
3. 조선의 반응
(1) 파리강화회의에 조선 대표단 파견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의 특사이자 주중 미국대사(1920.3.22.-1921.7.2) 내정자 찰스 크레인(Charles R. Crane, 1869~1958)이 1918년 11월 중국 상하이(프랑스 조계)의 칼튼 카페에 와서 “파리강화회의는 피압박 민족들이 해방을 도모하는 데 최적의 기회”라는 요지의 강연을 한다. 마침 그 자리에 초청받은 기독교 교역자, 카이저수염의 32세 몽양(夢陽: 태양이 떠오르는 꿈을 꾸고 낳았다고 해 호를 삼음) 여운형(呂運亨, 1886-1947)은 크레인이 중국 청나라의 처지를 동정하고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되는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해 피압박 상황을 설명하라는 권면을 듣고는 윌슨의 특사 찰스 크레인과 개인면담을 가진 뒤 파리강화회의가 조선독립운동의 절호의 기회가 될 것이라 판단한다.
몽양은 장덕수(張德秀, 1894-1947)를 만나 상황을 설명하고, 윌슨 대통령에게 보낼 편지와 청원서를 작성해 찰스 크레인에게 부탁한다. 그 후 동년 12월 반일의 언론인으로 차이나 위클리 리뷰(China Weekly Review)의 창립자이자 중국에 대한 최초의 미국 정치 고문 토머스 F. F. 밀러드(Thomas Franklin Fairfax Millard , 1868-1942)에게도 파리강화회의에 전해 달라며 같은 내용의 청원서를 보낸다.
그리고 여운형은 1918년 11월 28일 24세의 장덕수 등과 함께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을 결성하고, 1919년 4월에 서병호(徐丙浩, 1885-1972), 백범(白凡) 김구(金九, 1876-1949),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 1892-1950) 등이 가담해 활동하지만, 대한민국국호를 가진 상하이임시정부가 1919년 4월 11일에 창설되자 신한청년단은 1922년 자진 해산한다.
상하이 신한청년단이 허베이성(河北省하북성) 톈진(天津천진)에 머물던 기독교 장로 우사(尤史) 김규식(金奎植, 교명敎名은 요한Johann, 1881-1950)을 상하이로 초청해 신한청년당 대표로 파리에 파견한다. 우사는 1919년 2월 1일 중국 상하이를 떠나 때를 맞춰 1919년 3월 13일 파리에 도착한다. 4월 13일 상하이임시정부는 우사를 외무총장 겸 전권대사로 임명하여, 신한청년단 대표 김규식의 신분이 업그레이드된다.
여운형과 우사는 일제의 방해로 일제의 폭압적 통치 상황 등을 소개하고 조일합방 폐지와 대한민국주권 승인을 요구하기 위한 파리강회에 참가하지 못할 것을 대비해, 조선 문제에 무관심한 유럽 언론들의 주목을 끌기 위해, 조선과 도쿄 내에서의 3.1혁명을 위한 밀사파견을 제의한다.
일단 파리에 도착한 우사는 파리 9구 샤토됭 거리 38번지의 7층 석조건물에 파리강화회의 한국민대표관과 한국통신국을 설치하고 활동을 시작한다. 현재 이 건물 입구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파리위원부 청사 1919-1920’이라는 안내판이 부착돼 있다.
한국통신국은 조선독립의 정당성을 알리기 위해 4월 26일부터 5월 말까지 편지 형식의 ‘회람’을 8차례에 걸쳐 발간해, 강화회의 각국 대표단과 공관, 언론사, 정치인, 학자들에게 전달한 동시에 5월 24일에는 강화회의 의장 조르주 클레망소에게 임정 대통령 이승만 명의의 서한을 보내 임정과 김규식의 외교활동 승인을 요청한다.
일제의 치밀한 방해로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지 못하지만, 조선 문제에 대한 국제사회의 이목을 끄는데 성공한다.
(2) 조선 밀사 파견
참판 김희격(金喜格)은 구한말 부패한 조정에 깊은 회의를 느껴 가산을 정리하여 식솔을 거닐고, 황해도 장연군(長淵郡)장연군 대구면(大救面‘큰 구원’/대구광역시大邱廣域市의 구는 언덕, 구릉, 무덤‘구邱’임) 송천리(松川理; 소래마을)에 낙향해, 버려져있던 들판을 모두 사들이고, 아들 김성섬이가 주체가 되어 이웃마을 사람들을 일꾼으로 사들여 1년여의 기간을 들여 개척케 해, 옥토로 바꾼 동시에 99칸 집을 마련하며, 손자손녀에게 유모를 딸리게 할 정도로 거부가 된다.
만석꾼 대지주가 된 김성섬과 둘째 부인 안성은(34세에 미망인)에서 태어난 3녀 김순애(金淳愛, 1889-1976)와 형부 서병호 등이 국내에 잠입하며, 3.1혁명을 진작시킨다.
김순애 선생은 송천학교(소래보통학교)를 마치고 상경하여 새문안교회를 다니면서 정신여학교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수학하였다. 정신여학교를 졸업한 뒤, 21세 때인 1910년 부산 초량소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일제의 조선역사 교육 금지 조치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하숙집에서 민족정신을 일깨우고자 학생들에게 조선역사와 지리를 몰래 가르쳤는데, 이것이 일인 교사에게 발각되어 신변의 위협을 느낀다.
당시 제중원 의사로 근무하고 있던 오빠 김필순(金弼淳, 1878-1919)도 1911년의‘105인 사건’(百五人事件)으로 일경의 감시를 받고 있었으므로 1912년 같이 지린성(吉林省길림성)의 퉁화현(通化縣통화현)으로 망명한다. 1915년 9월에는 장쑤성(江蘇省강소성)성도(省都) 난징(南京남경: 남쪽의 수도/뤄양洛陽낙양을 중심으로 지은 이름)으로 옮겨 중화명덕여자학원(中華明德女子學院)에서 수학하던 중, 형부 서병호, 오빠 김필순 등의 소개로 김규식을 만난다. 오빠 김필순과 김규식은 막역한 사이라, 1918년 12월말 난징의 어느 선교사 댁에서 혼인을 맺는다.
김순애 선생에 대한 이야기는 부부독립운동가편에서 자세히 다루기로 하고, 여기에선 조선최초의 검사를 지내고, 훗날 우남 이승만 정부시절 부통령으로 역임하게 될 남대문교회 교역자 송암(松岩) 함태영(咸台永, 1873-1964)과의 만남에 대해서만 기술하겠다.
김순애, 김규식 부부는 장쑤성(江蘇省강소성)의 상하이(上海상해) 이주하여, 1918년 8월 중국 상하이에서 여운형(呂運亨), 서병호(徐丙浩), 김철(金澈), 조소앙(趙素昻), 조동호(趙東祜) 등이 조직한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에 가입하여 이사(理事)로 선임되어 활동하면서, 부군인 김규식과 더불어 독립운동에 뛰어든다.
남편 김규식이 출국한 뒤, 김순애 선생은 파리강화회의 대성공을 위해 1919년 2월 형부 서병호 등과 함께 배편으로 비밀리에 잠입한다. 부산에 도착한 후 부산에서 조카 김마리아를 만난다.
김 선생은 한성으로 올라가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이갑성(李甲成, 1889-1981) 집사가 재직 중이던 제중원은 기독교 신자들을 중심으로 3.1 운동준비자들이 연락을 취하는 장소로 사용되고 있었는데, 이곳에서 함태영(咸台永) 교역자를 만나 조선대표의 파리강화회의 파견 소식을 전달하고 국내의 독립운동 봉기를 촉구한다.
함태영 교역자는 남강(南岡) 이승훈(李昇薰, 1864-1930) 장로 그리고 이갑성 집사와 함께 3.1혁명을 추진하는데 깊숙이 관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딸 같은 김순애 선생에게 기독교, 천도교, 불교 등 종교계를 중심으로 거족적인 독립선언대회가 추진되고 있음을 알려준다. 그 때 김 선생은 국내의 3.1운동에 동참하려 하였으나, 함태영 교역자가 “그러다 잘못되면 파리에 가 있는 김규식의 사기에 영향을 미칠 것이고, 그러면 민족의 대업 완수에 지장이 있을 것이다”라고 설득해, 김 선생은 1919년 2월 28일 중국 여자로 변장하고 열차편으로 평양을 거쳐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건너간다.
세문안교회와 남대문교회는 3.1혁명의 센터다. 여기에선 남대문교회 함태영 교역자와 이갑성 집사가 3.1운동에 깊게 관여하기 때문에, 이갑성 집사에 대해서 간략하게 논하고자 한다.
이갑성 집사가 3.1혁명 하루 전날인 2월 28일 저녁 제중원의학교 교장인 알리버 R. 에이비슨(Oliver R. Avison, 조선이름 어비신魚丕信, 1860-1956)의 초청으로 제중원의학교에서 세균학과 위생학 교수로 청빙된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Frank William Schofield, 조선명 석호필石虎弼로 개명, 1889-1970) 박사(21세 때인 1910년 대학 2학년 때 소아마비<왼쪽팔과 오른쪽 다리의 마비>를 앓아 평생 지팡이를 짚게 되었음에도 전과목 A의 수석 우등생으로 토론토 대학교, 온타리오 수의과대학졸업)를 찾아가 독립선언문을 보여주며, 독립선언문의 사본을 영어로 번역해 최대한 빨리 미국 백악관에 보내줄 것을 요청한 동시에 오후에 파고다공원에서 대규모 학생 시위가 있을 예정이니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한다. 그래서 스코필드 박사는 3.1혁명이 일어나기 직전 3.1혁명에 대해 미리 알았던 유일한 외국인이다. 이갑성씨 집사의 의뢰에 따라 스코필드 박사는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만세시위를 하는 민중들과 일본의 시위자에 대한 탄압을 사진으로 찍고, 글로 적어 해외에 알렸다.
뿐만 아니라 스코필드 박사는 1919년 4월 15일의 경기도 화성 제암리 일제 만행현장을 찾아 사진으로 남겼다.
일제는 제암리가 3.1혁명의 근거지임을 알고, 주민들을 교회에 가둔 후 23명을 불태워 죽인 사건이 발생한다. 일제의 만행 소식을 들은 스코필드 박사는 1919년 4월 18일 한성 제중원에서 수원역까지 열차를 타고 와서, 소아마비를 앓아서 한쪽 팔다리가 불편했지만, 자전거를 이용해 제암리 현장을 방문하다. 제암리 잿더미 현장을 보고, 일제의 만행에 대한 분노로 떨리는 손으로 촬영한 후 잔학 행위에 대해 보고서를 작성한다. 스코필드 박사가 찍은 사진 필름과 글은 1919년 미국 기독교연합회에서 발행한 ‘한국의 상황’(The Korean Situation), 상해 밀사 정환범(鄭桓範)을 통해 상해 임시정부에도 전해져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 3.1혁명 영문 화보집 ‘한국독립운동’(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에 실리다. 게다가 사진은 1919년 7월17일 미국 국무부장관에게 보내진 보고서에도 첨부되고,‘제암리의 대학살’(The Massacre of Chai-Amm-Ni)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는 중국 상해에서 발행되던 영자신문 ‘상하이 가제트’(The Shanghai Gazette)에도 실린다.
제암리 3.1혁명 순국기념관의 입구에는 스코필드 박사 모습의 특이한 동상과 자전거가 있다.
(3) 2.8독립선언과 김마리아
만석꾼 대지주 김성섬과 첫째 부인에서 태어난 장남 김윤방(金允邦)은 김몽은(金蒙恩)과 결혼하여 세 딸을 두었는데, 막내인 셋째 딸의 이름을 직접 지어주었는데, 그 딸이 김마리아(金瑪利亞, 1891-1944)다.
큰 딸 김함라는 정신여학교 출신으로 광주 수피아 여고 전시인 수피아 여학교(미국 남장로교에서 1985년 파송한 유진 벨Eugene Bell, 배유지, 1868-1925 선교사가 1908년에 설립) 교사였는데, 1908년 J. S. 게일(James Scarth Gale, 조선어 이름 奇一기일, 1863-1937) 선교사의 주례로 서울 연동교회에서 평양신학교 최초의 조선인 신약학 교수로 임명되고, 귀국 후 박사학위 논문을 유니언 신학교에 제출한 후, 1929년 조선인으로 최초의 신약학 전공, 신학박사학위를 취득한 남궁혁(南宮爀, 1881-6·25전쟁 당시 납북) 박사와 결혼했다.
둘째 딸 김미염(金美艶)은 현재 연세대학교 의대의 전신인 제중원의학교 6회 졸업생 방합신(方合信)과 혼인하였다. 방합신은 환자들을 진료하는 과정에서 한의학의 효용성을 발견하고, 그는 약물 치료, 즉 내과 질환에 대한 치료에서는 한의학이 서양 의학보다 우월한 효과를 보인다고 생각하며, 한의학발전과 부흥을 주장하였다.
막내 마리아는 아버지가 설립한 소래보통학교를 고모, 언니들과 같이 다니면서 4년 만인 12세 때인 1903년에 졸업하고, 어머니를 도와 가사를 돌보았다. 14세 때인 1905년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삼형제 중에 위로 둘은 못하더라도 끝으로 마리아는 기어코 외국까지 유학을 시키라”고 친지들에게 당부한 유언에 따라 1906년 한성에 올라와 삼촌집에 거한다. 삼촌 김윤오(金允伍, 또는 김용순金容淳, 1853-?)와 김필순(金弼淳, 1878-1919)이 운영하던 ‘김형제상회’는 항일운동의 연락거점 역할을 하던 곳이다.
김윤오 삼촌은 나이차이가 큰, 아들과 같은 백범(白) 김구(金九, 1876-1949),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 1878-1938)와 막역한 사이였고, 1906년 구국계몽운동단체인 서우학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총무로 활동할 정도로 애국자였다.
삼촌의 외동 딸 세라(구약의 사라Sarah)는 정신여학교 1회 졸업생으로 1906년 3월 22일 호러스 G.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조선명 元杜尤원두우, 1859-1916) 선교사 집에서 언더우드 선교사의 주례로 연세대학교 의대의 전신인 제중원의학교 3회 졸업생인 의사 고명우(高明宇, 1883-1950?)와 혼인했다. 고명우는 후일 미국에서 유학하고, 세브란스 병원 의사로, 그리고 남대문교회 장로로 봉사했다. 세라의 딸이 서울여자대학교를 설립한 고황경(高凰京, 1909-2000) 박사다.
김필순 삼촌은 현재 연세대학교 의대의 전신인 제중원의학교 제1회 졸업생이다. 삼춘은 의학도로서 병실 및 외래에서 보조역할을 했고 많은 책을 번역하였을 뿐 아니라, 수년간 병원의 경영에 관해서도 상세한 지식과 경험을 쌓는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이미 졸업 전에 저학년 학생들의 강의도 담당하였다. 당시 올리버 R. 에이비슨(Oliver R. Avison, 조선이름 어비신魚丕信, 1860-1956) 원장은 그의 능력을 인정해 장차 제중원의 책임을 맡고 조선의 의학을 이끌어야 할 재목으로 키우고 있었다.
재학 중에 김필순 삼촌은 황성기독교청년회와 상동교회를 번갈아 왕래하면서 구국운동가로 활동하였다.
삼촌은 도산 안창호(安昌浩)와 결의형제를 맺고 1907년 신민회가 조직될 때, 그 회원이 된다. 졸업 후 삼촌은 제중원에 재직하면서 자신의 집을 독립운동가들의 협의장소로 제공한다.
김마리아는 10대부터 고모와 함께 애국사상의 세례를 흠뻑 받으며, 애국처녀로 성장한다.
김마리아는 1906년 최초의 사립 여성 교육기관으로 이화여자고등학교와 이화여자대학교의 전신인 이화학당(梨花學堂: 기독교 감리교회 선교사 메리 스크랜튼Mary Fletcher Benton Scranton, 1832-1909, 조선명 시란돈施蘭敦이 1886년에 설립. 고종이 첫 여학교의 이름을 ‘이화梨花,배꽃’로 지어주었다. 배꽃은 당시 황실을 상징하였는데, 이 꽃은 여성의 올바른 태도와 순결과 명랑을 상징)에 입학했다가 교파 관계(敎派關係)로 곧 정신여자고등학교의 전신인 연동여학교(1887년 6월 미국 북장로회 애니 엘러스 벙커Dr. Annie Ellers Bunker, 1860-1938 선교사가 고종이 하사한 중구 정동(貞洞) 28번지 주택에 정동여학당을 창립하며 초대교장1887-1888을 역임했고, 1895년 10월 20일 종로구 연지동으로 교사校舍의 건물을 옮기고, 연동여학교로 개칭, 1903년 연동여자중학교로 개칭. 1907년 제1회 졸업생 11명을 배출했다. 1909년 구한국 학부學部로부터 인가를 받아 사립정신여학교로 또 다시 개칭하고, 1910년 세브란스Louis H. Severance의 도움으로 정신 여학교 본과 건물을 건립했다. 신사 참배 거부로 교장이 해직되며 1945년에 폐교되었다. 해방 이후 1947년 5월 복교됨)로 전학한다. 이 학교에서 마리아는 기독교사상에 입문하게 되고 신앙심이 깊어져 17세 때인 1908년 세례를 받는다. 19세 때인 1910년에 정신여학교를 4회로 수석졸업하고, 그 뒤 3년 동안 큰 언니인 김함라가 근무하고 있던 광주의 수피아여자고등학교의 전신인 수피아여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고, 1913년에는 은사들의 추천으로 다시 서울로 올라와 모교인 정신여학교에서 교편(수학선생)을 잡았다. 이듬해인 23세 때인 1914년 정신여학교의 미국인 루이스(Margo Lee Lewis, 조선명 손진주, 1912-1939, 1885-: 23세 때인 1908년 미네소타 종합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마운트 홀리오크 대학에서 천문학을 공부하면서 동양선교에 뜻을 두었다. 1910년 8월 1일 조선에 선교사로 도착한 루이스는 1911년부터 정신여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1912년 교장이 되었다. 그녀는 결혼도 하지 않고 1939년까지 젊음과 정열을 정신을 위하여 바쳤음) 교장의 추천과 재정지원(사비)을 받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다.
김마리아는 고등과(당시 전문학교, 영문학 전공) 3년을 수학하고, 1919년 3월에 졸업이 예정되어 있었을 당시 2.8독립선언이 대두된다.
이 선언은 1919년 2월 8일 일본 도쿄에서 조선 유학생들이 조선의 독립을 선언한 사건으로 여운형이 장덕수를 도쿄에 파견하여 최팔용(崔八鏞)과 이광수 등을 움직여 2.8독립선언서를 이끌고, 김규식의 파견여비를 모금하였으며, 그리고 김규식의 지시에 따라 조소앙(趙素昻, 1887-1958: 임시정부를 1919년 8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개최되는 국제사회당대회에 참석하여 임시정부의 승인을 얻어내, 훗날 대한민국의 기원을 갖게 한다. 임시의정원을 만들고, 10조 헌장<임시헌장>을 썼으며,‘대한민국’이란 국호를 창안한다. 1948년 헌법의 기본 사상이 1941년 조소앙이 기초한 건국강령에 근거한다. 조소앙의 대표적 사상은 삼균주의三均主義다. 삼균이란 균정권, 균이권, 균학권을 말하는데, 곧 균등한 정치, 균등한 경제, 균등한 교육이 국가 발전의 이념이 되어야 한다는 것임)이 동경에 파견되어 유학생들을 지도하여 이루어진다.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 1892-1950)가 원문을 쓰고 영문으로 번역을 하였다.
2.8독립선언을 준비하던 송계백과 백관수가 김마리아를 찾아와 여학생들도 운동 준비에 참여할 것을 권유한다. 김마리아는 이러한 권유에 따라 여자 유학생들에게서 성금을 거두어 준비 자금에 보태는 등 적극적으로 황애덕(황에스터黃愛施德) 등과 동참한다. 함박눈이 내리던 1919년 2월 8일 조선 유학생들은 이광수가 기초를 세운 독립선언문과 결의문을 낭독한 뒤 거리행진을 벌이다가 일본 경찰에 두들겨 맞으며 연행된다.
조선 여자 유학생 친목회장이기도 했던 김마리아는 2.8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조선청년독립당 대표 11명, 모두 남학생이고 여학생이 없음에 부끄러워한다.
김마리아는 조국독립운동을 조선으로 확대해야겠다고 굳게 결심하며, 졸업을 한 달 남겨둔 시점에서, 조국광복을 위해 졸업을 포기하고(일본학교 측에서 1920년 3월 김마리아에게 졸업증서를 우편으로 보냄), 2.8독립선언문 10여 장을 미농지(美濃紙: 일본 종이의 하나. 닥나무 껍질로 만드는데 썩 얇고 질기며 깨끗함)에 복사(또는 베낌) 하여 일본 황족같이 기모노차림으로 그것을 기모노 넓은 오비(허리띠)에 숨기고 차경신(車敬信) 등과 1919년 2월 15부산으로 귀국한다.
당시 주위 친구들이 적발될 경우 살아남기 어려운 위험천만한 임무여서 모두 말렸고, 갈 경우 졸업하고 가라고 했지만, 김마리아는 ‘나라가 없는데 졸업장이 무슨 소용이냐’‘내게 이 사명은 졸업장을 따는 것 보다 훨씬 중요하고 값진 일이다. 여성이라 검열과 수색이 덜 할 테니 내가 조국으로 가져가 전파하겠다”고 당당히 나선 것이다.
그리고 부산에서 상하이 신한청년당에서 국내의 독립운동을 촉구하기 위해 밀사로 파견한 둘째 고모부 서병호와 셋째 고모인 김순애를 만난다.
김마리아는 먼저 대구에 가서 기독교계 인사들에게 2.8독립선언의 소식을 전했으며 큰언니 김함라와 막내 고모 김필례가 교사로 근무하고 있는 광주 수피아 여학교를 찾아가, 김필례 남편인, 고모부 최영욱(崔泳旭, 1891-1950: 1912년 제중원 의학교를 졸업하였다. 1926년에 미국 조지아주 애틀란타 시에 위치한 에모리 대학교Emory University in Atlanta, Georgia에서 박사학위를 받아 영어가 유창해 1945년 9월 2일 미군정 주둔 후 최초의 전라남도 부지사, 1946년에는 전라남도지사를 역임하였다. 1950년 6.25 전쟁 중 조선인민군에 체포되어 광주형무소에 투옥됐다가 학살됨)이 운영하는 광주 서석의원에서 독립선언문을 수백부나 복사하여 수피아 여학교를 중심으로 배포하였다.
당시 김필례 고모집 상황은 아주 심각하였다. 광주에서 3.1운동이 발발했을 때에는 김필례의 시숙(아주버니: 남편 이복형)으로 전국의 나병환자들의 아버지라고 불리던 최흥종(崔興琮, 1880-1966: 평양신학교 졸업) 목사가 서울에서 3.1운동에 연루되어 체포되어 3년형을 언도받은 상황이었기에, 일경의 극심한 취조와 조사를 받아야 했다. 남편 최영욱은 혹독한 문초를 받은 끝에 무혐의로 풀려났다. 그런데 1919년 3월 25일 김필례 고모의 첫째 아들 재화가 태어났는데, 뇌막염에 걸려 첫돌을 지나지도 못한 채 광주기독병원에서 죽자, 이 일에 충격을 받은 고모부 최영욱은 미국 유학을 떠난다.
한편 김마리아는 한성으로 올라와 2.8독립선언문을 들고 천도교 본부를 비롯해, 정신여학교와 이화학당을 중심으로 교사와 학생들의 협력을 요청하였으며 마지막으로 황해도 봉산과 신천 등지를 돌면서 독립운동에 참여할 것을 독려하였다. 김마리아가 전국으로 전한 2.8독립선언서는 3.1혁명을 촉발하게 한 기폭제가 됐다.
황해도 지역에서 여성들의 참여를 독려하던 중 김마리아는 한성에서 3.1 운동이 시작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상경하여 모교 정신여학교를 방문하였는데 학생들의 가두시위를 배후에서 조종한 혐의로 일본 형사에게 체포되었다. 28세 때인 3월 6일 김마리아는 남산 자락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 애국지사들에 대한 혹독한 고문으로 유명해 ‘왜성대’(倭城臺)로 불려가 발가벗겨진 채 거꾸로 매달려 몽둥이찜질을 당하는가 하면, 물과 고춧가루를 코에 넣고 가마에 말아서 때리고 머리를 못 쓰게 해야 이런 운동을 안 한다고 시멘트 바닥에 구둣발로 머리를 짓이기고, 선생의 오른쪽 가슴 전체를 불에 달군 인두로 지지는 등의 온갖 가혹한 고문을 당하고, 서대문형무소에서 5개월간 옥고를 치르다가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8월 5일에 석방되지만 이때 이때의 고문으로 뼛속에 고름이 차는 유양돌기염과 상악골 축농증이 생겨 평생 고문 후유증에 시달린다.
석방 후 모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여성항일운동을 북돋우고자 기존의 여러 여성 독립운동단체들을 하나로 통합하여 그 해 28세 때인 1919년 9월 모교에서 비밀리에 황에스터 등 20여 명의 여성 지도자들과 함께‘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다시 결성하고 회장으로 추대된다. 이것은 후에 김순애 고모와의 협력관계로 발전한다.
“옛말에 이르기를 나라를 내 집같이 사랑하라 하였거니와 가족으로서 제집을 사랑하지 않으면 그 집이 완전할 수 없고, 국민으로서 제 나라를 사랑하지 않으면 그 나라를 보존하기 어려운 것은 아무리 우부우부(愚夫愚婦)라 할지라도 밝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아! 우리 부인도 국민 중의 일분자이다. 국권과 인권을 회복할 목표를 향하여 전진하고 후퇴할 수 없다. 국민성 있는 부인은 용기를 분발하여 그 이상에 상통함으로써 단합을 견고히 하고 일제히 찬동하여 줄 것을 희망하는 바이다.”
1919년 9월 김마리아 선생이 작성한 대한민국애국부인회 취지서의 일부이다.
전국에 15개 지부를 두고 2천여 명의 회원을 확보했다.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 그해 11월까지 군자금 6천여 원을 상하이임시정부에 전달했다. 당시 선생이 상해임시정부의 이승만 대통령에게 쓴 편지는 지금도 독립기념관에 남아 있다.
그런데 그 해 11월 28일 한 간부의 배신으로 52명의 회원들과 함께 체포되어 대구에 있는 경상북도 경찰국으로 압송되었다.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고문 후유증이 심해 병보석으로 겨우 풀려날 수 있었다. 김마리아선생은 석방 후 서울로 올라와 세브란스병원 등지에서 치료를 받다가 조지 섀넌 맥큔(George Shannon McCune, 조선이름 윤산온 尹山溫-맥큔 또는 맥윤McCune이라는 영어발음에서 성姓을, 새넌Shannon이라는 영어발음에서 산온을 선택, 1873-1941: 평안북도 선천의 신성학교 제2대 교장, 숭실학교 교장, 숭실전문학교 교장 역임) 선교사 또는 스코필드 선교사의 도움과 김마리아 선생의 탈출을 돕기 위해 파견된 임시정부 특파원 윤응념의 활약으로 30세 때인 1921년 7월 장쑤성(江蘇省강소성) 의 상하이(上海상해)로 망명한다.
상하이에 있는 고모부 서병호의 집에서 둘째 고모인 김구례와 셋째 고모인 김순애의 보살핌을 받으며 고문 후유증을 치료하였다. 몸의 상태가 어느 정도 회복되자 장쑤성(江蘇省강소성) 성도(省都) 난징(南京남경: 남쪽의 수도/뤄양洛陽낙양을 중심으로 지은 이름) 진링대학(金陵大學금릉대학)에서 수학하였다. 이 학교는 1921-1923년 동안 죽산(竹山) 박형룡(朴亨龍, 1897-1978) 박사가 공부하며 문학사 학위를 취득한 곳이다. 진링대학에서 일본에서 못 다한 공부를 계속하면서 그는 임시정부의 입법기관인 임시의정원에서 백범 김구와 함께 황해도를 대표하는 여성 최초의 임시의정원으로 선출되어 1923년 상하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에 여성계 대표로 참석한 동시에 상하이에서도 상하이애국부인회(上海愛國婦人會) 간부와 의정원 의원 등으로 활약하면서, 김마리아 선생은 독립을 위한 실력을 기르기 위해 공부가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미국 유학길에 올라 32세 때인 1923년 6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한 후 도산 안창호의 부인 이혜련의 도움으로 미국에서 생활안정을 찾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대학에 진학하기 위한 자금을 마련한다. 김마리아 선생은 1924년 9월 미네소타주 파아크빌시에 소재한 파크대학 문학부에 입학하여 2년간 공부한다. 1927년 뉴욕에서 흥사단에 가입한다. 1928년에는 시카고로 옮겨가 시카고대학(University of Chicago) 사회학과에 입학하여 대학 도서관에 근무하며 학부과정과 연구과정을 마친 끝에 이듬해인 1929년에 석사학위를 취득한다. 1930년에는 다시 뉴욕으로 옮겨가 컬럼비아 대학교(Columbia University in the City of New York) 사범대학원과 뉴욕 비블리컬 세미너리(Biblical Seminary in New York)에서 신학을 공부한다.
김마리아 선생은 뉴욕에서 황에스터, 박인덕(朴仁德) 등 8명의 옛 동지들을 만나 근화회(槿花會; 재미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조직, 회장으로 추대되고, 황애덕이 총무를, 이선행이 서기를 맡았다. 재미 한국인의 애국정신을 북돋우고 일제의 악랄한 식민정책을 서방 국가에 널리 알렸다.
김마리아 선생은 캐나다에서 열린 수양회에서 함남 원산의 ‘마르타 윌슨 신학교’의 루이스 리 교장을 만난다. 루이시 교장은 과거 김마리아의 부친이 서거한 약혼자의 장례식을 치러준 인연이 있었기 때문에 김마리아에게 귀국하기 위한 여비를 대주면서까지 귀국할 것을 권유한다. 그 뒤 원산에 있는 마르타 윌슨신학교에서 신학강의만을 한다는 조건으로 일제는 1933년 귀국을 허락했고, 그는 귀국하자마자 곧바로 원산으로 내려가 신학교에 부임한다. 그는 이 학교에서 강론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등 지속적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34년부터는 장로교 여전도회전국연합회 회장에 올라 7-10대 회장직을 역임한다.
가수 윤형주 장로의 모친은 함흥 영생여고를 다니시다 원산 ‘마르타 윌슨 신학교’로 유학을 가, 김마리아 선생님의 제자가 되었고, 스승이 좋아하시던 찬송 ‘옳은 길 따르라 의의 길’을 즐겨 불렀다고 한다. 모친은 함흥 남북교회 전도사를 역임하시고 아버지(영문학자, 경희대학교 교수 역임 '윤영춘' 장로님)와 결혼한 뒤에는 육군사관학교 전도사역 및 북한 선교에도 참여하였고 ‘마르타 윌슨 동창회’를 통해 수십 년간 아프리카, 캄보디아, 필리핀, 인도네시아, 홍콩 등지에 선교사역을 했다고 한다.
김마리아 선생은 신학문을 배우겠다며 가출해 무작정 마르타윌슨 여자신학원을 찾아온 19세의 배학복(裵學福)의 입학보증인이 되어줌은 물론 수양딸로 맞아들였다. 배학복 권사는 인하공대 제2대 학장을 지낸 최승만(1897-1984: 25세 때인 1922년 박충애와 결혼해 3녀를 낳고, 59세 때인 1956년 배학복과 재혼)과 결혼했으며, 2000년 자신에게 배움의 길을 열어준 수양어머니 김마리아 선생의 은혜를 보답하기 위해 서울 강남구 개포동에 있는 34평의 아파트를 어머니 모교 정신여고에 기탁했다. 이전에는 사별한 남편의 저서 인세수입 등을 모은 1억 원을 ‘최승만, 배학복장학금’(인하대 2대 학장 부부)으로 전달한 바 있다
1943년 마르타 윌슨 신학원의 폐교와 함께, 김마리아 선생님에게 고문후유증이 재발하여 평양기독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다가 1944년 3월 13일 광복되기 한 해 전에 “예수여, 어서 오소서. 이 땅에”라는 말을 남기고 52세로 눈을 감는다. 김마리아의 유언에 따라 시신은 유언대로 화장하여 대동강에 뿌려졌다. 앞섶이 서로 다른 저고리 한 벌과 수저 한 벌이 김마리아 선생님이 남긴 유품의 전부다.
4. 종합
2.8 독립선언의 동지였던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 1892-1950)는 김마리아 선생의 귀국을 기념한 시‘누이야, 1933’에서 이렇게 찬미한다.
“누이야 네 가슴에 타오르는 그 사랑을
뉘게다 주랴 하오?
네 앞에 손 내민 조선을 안아주오
안아주오!
누이야 꽃 같이 곱고 힘 있고 깨끗한 몸을
뉘게다 주랴 하오?
뉘게다 주랴 하오?
네 앞에 팔 벌린 조선에 안기시오
안기시오!
누이야 청춘도 가고 사랑도 생명도 다 가는 인생이요
아니 가는 것은 영원한 조선이니
당신의 청춘과 사랑과 생명을 바치시오, 조선에!”
도산 안창호 선생은 “김마리아 같은 여성동지 10명만 있었던들 한국은 독립이 되었을 것이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참 애국여성지도자다.
김마리아 선생은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받았으며, 1998년 7월 이 달의 독립 운동가로 선정되었고, 그 후 2004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1983년에 설립된 김마리아기념사업회는 첫 사업으로, 1989년 시립공원인 보라매공원에 동상을 건립했다. 2004년에는 독립기념관에 ‘독립이 성취될 때까지는 우리 자신의 다리로 서야 하고 우리 자신의 투지로 싸워야 한다’라는 문구를 적은 어록비가 세워졌다. 1998년 11월 25일 대한보증보험(1969년 2월 설립)과 한국보증보험(1989년 11월 설립)의 합병으로 출범한 SGI서울보증은 2019년 5월 24일 창립 50주년과 3·1 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옛 정신여자고등학교가 자리했던 본사 부지(서울 종로구 김상옥로 29)에 흉상을 건립했다. 국립 서울현충원 애국지사묘역 무후선열제단에는 '혁명 여걸' 김마리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정신여자중고등학교에선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역사가 이루어졌다.
1998년 10월: 김마리아 회관(대강당) 및 김필례관 (수련관) 준공 (연면적 12,219m2)
2002년 12월: 김마리아 회관(대강당) 및 김필례관(수련관) 증축준공 (증축 연면적 4,328m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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