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대륙은 조선시대 평양신학교를 중심으로 한 선교활동으로 미국과는 달리 장로교세가 강하다. 장로교의 분열 때마다 대한대륙은 고난의 역사의 길을 걸었다.
1952년 신사참배로 고신분립의 아픔을 겪었다. 1953년 성경관 때문에 예장과 기장의 분열을 감내해야 했다. 1959년 WCC가입문제로 합동과 통합이 나누어지고, 천주교세력들이 기독교에 숨어들어와 이간질하는 사탄의 분열정책으로 대한대륙의 기독교는 거의 초토화되는 고통을 겪고 있다.
그러면 에큐메니컬 운동(ecumenism), WCC(세계교회협의회) 부흥시대에 추양(秋陽) 한경직(韓景職, 1902-2000)이 장단을 맞추었는데, 그것에 대해 살펴보자.
1. 연합과 화해의 사도?
(1) 실향민
추양 한경직은 이상형 사관(구세군, 서울시경철청 경목실 총무, 대외사업 총무, 한미우호협회 사무총장)에게 다음과 같이 자신의 속내를 밝힌다.
“이상형사관님, 내가 생전에 이루지 못한 소원이 두 가지가 있는데 남북의 평화통일과 한국교회를 하나로 연합하는 일입니다. 통일문제는 하나님께서 때가되면 이루시겠지만 전국교회를 하나로 연합하게 하는 일은 신신묵 목사님과 이상형 사관님이 수고하면 가능하리라 믿습니다. 한국교회가 연합하여 일치를 이루고 그 힘을 구조적으로 모으기만 한다면 한국교회가 지금보다 더 크고 놀라운 역사를 일궈낼 수 있을 터인데...전국교회를 하나로 연합하는 이 중차대한 일을 위해 수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필자도 추양의 심정에 동의한다.
(2) 웨스트민스터신학교창설
성경본문에 근거한 신앙(a text-oriented faith)에 기초한 웨스트민스터신학교(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가 추양이 프린스턴(1927.9-1929.5 ) 신학석사학위취득 후 2개월 후인 7월 18일 개교하고, 아이러니컬하게도 대공황(Great Depression, 1929-1939)이 일어난 시기와 겹친다.
추양은 뉴저지 주의 프린스턴신학교(Princeton Theological Seminary, PTS: 1812년 세워진 미국 장로교 신학교로 미국장로교Presbyterian Church USA, PCUSA산하 교육기관으로 성경관문제로 1929.7.18.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분리)의 분열을 보고, 연합과 화해의 중요성을 깨닫는다. 필자도 추양과 맥을 같이 한다.
(3) 빌리 그레이엄(William Franklin Graham Jr., 혹은 Billy Graham,, 1918-2018)의 사상
그레이엄은 오럴 로버츠(Oral Roberts, 1918~2009), 팻 로버트슨(Pat Robertson, 1930-),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1929-1968),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와 깊은 교제를 가졌고, 대한민국에선 한경직을 비롯해 김장환, 조용기와 절친의 관계를 유지했다.
이런 인간관계에서 보았듯이 그레이엄은 다원주의자, 보편구원론을 지향한다. 그러면 그 이유에 대해 상고해보자.
첫째. 1967년 그레이엄은 벨몬트 수도원의 예수회 대학(학장 존 오트겐 주교)으로부터 명예박사 학위를 받을 만큼 친 오컬트 바티칸 주의자다.
둘째, 그레이엄은 복음전파 후 결신자를 초청할 때, 정통복음주의기독교의 교회로 안내하는 것이 아니라 천주교 신자들은 자신들이 다니던 성당에 계속 머물게 하는 조치를 취해, 결신자 카드를 오컬트 바티칸에게 넘겨줌으로써, 오컬트 바티칸세력들은 그가 참된 에큐메니즘의 정신을 보여주었다고 대 환호하며, 1972년 그에게 오컬트 카톨릭 국제 프란시스 명예상을 수여했다.
셋째, 영국도 그레이엄의 친화적인 오컬트 바티칸주의을 응원하기 위해, 2002년 2월 ‘기사’ 작위를 수여했다.
오컬트 바티칸 교주 요한 23세(라틴어 Ioannes PP. XXIII; 이탈리아어 Papa Giovanni XXIII; 영어 Pope John XXIII, 재위 1958-1963, 1881-1963)부터 요한 바오로 2세(John Paul II, 재위 1978-2005, 1920-2005)까지 모두 만났는데, 특히나 요한 바오로 2세와 절친 관계를 유지했다.
1970년대 그레이엄은 동구 공산권의 선교 대회를 개최할 때에 기독교가 인구의 1%도 안 되는 천주교 국가인 폴란드에서도 초청을 받았다. 처음엔 입국이 거절당했지만, 당시 폴란드 카롤 유제프 보이티와(Karol Józef Wojtyła) 추기경(후에 요한 바오로 2세가 됨)이 그레이엄 입국을 도와주었다고 하는데, 그것은 보이티와 추기경의 세련되며 노련한 정치력에서 나온 것이다.
그레이엄의 반공주의의 선교활동은 공산주의 국가 폴란드를 먼 훗날 자유민주주의국가로 전환하는 초석이 될 것이고, 이미 천주교국가가 된 폴란드가 그레이엄의 선교로 기독교국가로 될 확률이 거의 제로로 보았던 것이다.
그레이엄은 2년 후배의 보이티와 추기경의 태도를 기독교에 대한 관대와 화해의 제스처로 생각하며, 천주교에 대해서 깊은 호감을 갖는 계기가 된다.
1989년 두 사람은 특별 개인 면담을 가졌는데, 그레이엄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진술한다.
“대화를 나누던 중 잠시 정적이 흘렀습니다. 갑자기 요한바오로 2세께서 팔을 뻗어 제 외투 옷깃을 잡으시더니 저를 당신 코앞까지 끌어당기고는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잘 들으세요, 목사님. 우리는 형제입니다.’”
‘우리는 형제입니다’라는 이 한 마디로 그레이엄은 철저한 오컬트 바티칸주의자가 되었고, 그 후로 정통복음주의기독교는 초토화되었다.
2. 애국사상과 복음주의사도?
(1) 3.1혁명
추양은 평안남도 평원군 공덕면 간리(20여 가구의 자작마을)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기 7년 전인 1895년에 미북장로교 선교사 새뮤얼 오스틴 모펫(Samuel[sǽmjuəl] Austin Moffet, 조선이름 마포삼열馬布三悅, ‘삼열’은 세 가지 ‘기쁨’을 의미, 1864-1939)이 한석진(韓錫晋, 1868-1939), 김두형 두 조사와 마을 청년들과 함께 돌배밭 위에 자작교회(순안현 자작리라는 일제 강점 전의 지명에서 유래)를 세운다. 그 교회를 세울 때 한 목사의 종조부(할아버지의 동생)가 설립자 중의 하나였다고 한다.
한경직 소년은 자작교회의 우용진 전도사의 헌신적인 전도와 봉사 그리고 교육 사업에 큰 감화를 받는다. 한경직은 오산학교를 졸업한 후 평양부근 남산고을 교회에서 경영하는 영성학교의 교사로 초빙을 받을 때, 우용진 교역자를 찾아가 상의하고, 부임하는 것이 좋겠다는 우 교역자의 의견을 따라 영성학교에 부임한다.
한경직은 교회에서 경영하는 진광(眞光)소학교(1912-1916)에 들어갔는데, 거기에서 홍기두 선생님을 만난다. 홍 선생님은 도산 안창호 선생이 하는 평양 대성학교에서 공부하다가 학교가 폐지될 때까지 다니던 분으로 한경직 소년에게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과 최광옥의 아들 최이락을 친히 데려다가 1907년 12월 남강(南崗) 이승훈(李昇薰, 1864-1930: 41세 때인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시기에 평양의 만민공동회에서 자신보다 14세 연하인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 1878-1938의 연설에 감명을 받고, 독립운동과 민족의 교육을 위해 헌신, 봉사한다. 46세 때인 1910년 장로교 신자가 되었으며, 52세 때인 1916년 장로로 선출됨) 장로가 평안북도 정주에 세운, 민족교육의 온상인 오산학교(五山學校)에 입학시키는 스승의 사랑에 감복한다. 오산학교에 입학해 첫 시간에 예배드리고 일주일에 두 시간씩 성경공부를 한다(1916-1919).
오산학교에서 한경직 학생은 조선민족의 스승 두 분을 만나는 행운을 갖는다.
한 분은 위에서 언급한 1911년의 ‘105인 사건’(百五人事件)으로 옥중에 있다가 출옥한 남강 이승훈 장로다.
‘105인 사건’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안중근(安重根, 1879-1910: 안정근安定根, 1885-1949에게 198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됨, 안공근安恭根, 1889-1940에게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됨-임시정부의 주석 선거 전일 백범(중국어도 능통하지 못해 안공근이 대행)은 자신이 주석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박창일, 김돌수 하수인을 시켜 자신보다 대호응을 받고 있는 안공근을 비밀리에 살해하여 시신을 각 떠 상자에 넣고 무거운 돌덩어리를 매달아 물속에 집어넣음으로써, 감쪽같이 동지들과 조선백성을 속였다. 안공근의 큰 아들 안우생安偶生, 필명 Elpin, 1907–1991는 백범의 대외담당비서로 일하면서, 백범이 자신의 부친을 살해한 것을 알고 충격을 받고, 1948년 남북연석회의 때 안중근 유해발굴 촉구를 위해 김구 선생과 북한을 방문했다가 북한에 남음) 토마스의 사촌 아우(안중근보다 15일 출생이 늦음)인 안명근(安明根, 1879-1927) 야고보가 1910년 12월에 서간도에 무관학교 설립을 위한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면서, 프랑스인 니콜라 조셉 마리 빌렘(Nicolas Joseph Marie Willhelm, 1860-1938, 파리외방전교회, 조선명 홍석구) 신부를 찾아가, 1916-1918 동안 일본의 제18대 내각총리대신을 지낸 초대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内 正毅, 1852-1919) 암살하겠다고 고해성사를 하니까, 그 내용을 종현 성당(현재 명동성당) 뮈텔 주교(Gustave-Charles-Marie Mutel, 세례명 아우구스티노, 조선이름 민덕효閔德孝, 1880-1885, 1885 귀국, 대주교1926-1933, 1890-1932, 1854-1933)에게 서신을 통해 알리고, 조선 가톨릭교구장이던 프랑스인 뮈텔는 4년 동안 해결치 못한 성당의 부지 문제를 종결시키기 위해, 안명근의 고해성사의 내용이 담긴 비밀 편지를 아카시 장군에게 전달한다. 조선 총독부는 1907년 초에 안창호 이동녕 이승훈 등이 조직한 항일단체, 비밀결사였던 신민회(新民會)를 해체하고 기독교계 항일세력을 통제하기 위해 시도한 축출작업을 말한다.
또 한 분은 고당(古堂) 조만식(曺晩植, 1883-1950: 22세 때인 1905년에 평양 장대현 교회에 출석하였고, 1913년 3월 30살의 나이에 메이지 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학교 교사로 근무하다가, 37세 때인 1920년 10월 오산학교 교장 직에 취임한다. 38세 때인 1921년 평양 YMCA청년회 총무가 되고, 산정현교회의 장로에 선출되며, 1936년 14세 연하의 제자인 소양蘇羊 주기철朱基徹, 1897-1944 목사를 담임목사로 청빙한다. 1946년 1월 평양 고려호텔에 감금된 뒤 6.25전쟁 중 공산군의 세력에 의해 살해됨) 교장선생이다.
고당은 조선인의 정체성과 그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내기 위해 항상 말총으로 갓을 쓰고 검은 두루마기를 입고 다니고,
저녁 때마다 오산학교에 있는 큰 호수 호숫가를 학생들과 함께 구보하면서 애국가를 불렀다고 한다.
한경직 학생은 학생과 나라를 사랑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실천적이며 희생적인 모범을 보여준 고당 교장님의 삶의 자세에 큰 영향을 받고, 그것이 후에 한 목사의 목회철학에 반영된다.
오산학교를 1년 월반하여 1919년에 졸업하는데, 3.1혁명이 일어난 직후 일제는 민족주의 사상이 강한 오산에 불을 질러 ‘졸업식 없는 졸업’을 하게 된다. 추양은 조선이 배출한 최고의 애국자 남강과 고당을 만나며 오산학교를 다녔지만, 3.1혁명에 대한 추양의 활동이나 태도가 부재하다.
(2) 신사참배
평양신학교 선교사를 비롯해 국내의 선교사님들은 평양신학교 교수 죽산(竹山) 박형룡(朴亨龍, 1897-1978) 박사와 평양 산정현교회(1936-1944) 주기철(朱基徹, 1897-1944) 목사에게 신사참배여부에 대해 질문하고, 평양신학교폐교를 결정한다.
그런데 매우 유감스럽게 1992넌 6월 18일, 한경직은 그레이엄의 추천으로 영국계 미국인 실업가인 템플턴(John Templeton)이 노벨상에 종교 부문이 없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1972년에 제정한, 종교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템플턴상’(The Templeton Prize)을 받는데, 그 수상기념 축하예배의 인사말에서 이렇게 자신의 신사참배에 대해 진술한다.
“먼저 나는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나는 신사참배를 했습니다. 이런 죄인을 하나님이 사랑하고 축복해 주셔서 한국교회를 위해 일하도록 이 상을 주셨습니다.”
사실 ‘템플턴상’의 첫 번째 수상자가 테레사(Theresa/Agnes Gonxha Bojaxhiu)수녀라 할 정도로, ‘템플턴상’은 정통복음주의기독교의 상이 아니라 범 오컬트 바티칸주의의 상에 불과하다.
3. 성경관과 신학사상?
죽산(竹山) 박형룡(朴亨龍, 1897-1978)의 신학수학기간은 5년이다. 프린스턴신학교에서 신학사와 신학석사학위를 취득하고(1923-1926), 1927년 9월-1929(30세-32세) 동안 켄터키주 루이빌에 있는 남 침례교 신학교(The South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 SBTS, in Louisville, Kentucky: 1859년에 설립)에 입학해 박사과정을 마친다. 평양신학교 교수로 근무하고 있던 죽산은 1932년 봄 남 침례교 신학교으로부터 기독교 변증학(자연과학으로부터의 반(反)기독교적 유추Anti-Christian Inferences from Natural Science)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한다.
이에 반해 추양의 신학수학기간은 1년 반에 불과하다. 그는 프린스턴신학에서 신학학사 학위 없이 신학석사 학위만 취득한다(1927.9-1929.5)
죽산의 신앙과 신학사상이 성숙하였다면, 추양은 다소 미성숙한 상태임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추양은 자신의 설익은 신앙과 신학사상 때문에 미국에서 일어난 전통오순절운동(classical pentecostalism)의 성령의 역사에 대해 평생 입을 닫는다.
오산학교에서 추양은 일제의 압제로부터 조선의 해방과 민족의 부흥을 위해선 현대과학을 배워야 한다는 교훈을 받고, 자신에게 수학적 재능이 있어, 과학자가 되려고, 오산학교 졸업 후 1년 뒤 평안남도 평양숭실대학(1922-1925: 1897-1925숭실대학, 1925-1938숭실전문학교, 1954-1971숭실대학, 1971-1987숭전대학교, 1987-현재 숭실대학교로 이름이 변경)의 인문, 과학, 농업 등 세 과에서 과학 분야를 선택한다. 숭실대학에서 한경직은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로 1907년 ‘평양대부흥회’ 당시 부흥회의 설교자이며 인도자였던 윌리엄 N. 블레어(William Newton Blair, 조선어 방위량邦緯良, 1876-1970)의 조교를 지내면서 학자금을 마련한다.
3학년 여름방학 때 블레어 선교사를 도와 책을 번역하기 위해 선교사들의 휴가지인 황해도 구미포에 가 서너 달 지내는 동안 어느 날 저녁에 혼자 바닷가를 거닐던 중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너는 장래에 이런 것도 저런 것도 할 수 있겠지만, 너는 온전히 나에게 몸을 바쳐서 복음을 위해 살아라.”
추양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소명을 실천하기 위해, 과학(이과)보다는 신학을 배워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인문계로 전환하려고 블레어 선교사에게 자신의 포부를 밝혔지만, 3학년까지 올라와서 그럴 순 없다고 하며 미국유학을 권면한다. 블레어 선교사는 자신의 고향 캔자스 주(State of Kansas)의 장로교 계열 학교인 미국 엠포리아(The College of Emporia: 1882년 설립)대학에서 인문과학을 배우면 된다고 설득해, 한경직은 이과를 졸업한다.
블레어 선교사는 미국 캔자스 주 샐리나(Salina, Kansas)에서 출생하여, 캔사스 주 토페카(Topeka, Kansas)에서 머물다가 71세 때인 1947년 은퇴할 정도로 자신의 고향 캔자스 주를 사랑한 사람이다. 추양의 아들 한혜원도 엠포리아 대학을 졸업하고 목회자가 된다.
한편 추양은 남강 이승훈의 장로의 추천으로 윤치호(尹致昊, 1865-1945) 선생의 재정지원(미화 100불)으로 24세 때인 1926년 미국유학을 떠난다. 미국에서 한경직은 엠포리아대학에서 1년 간 신학을 공부하기 위한 준비로 철학, 심리학 등의 인문학을 공부하고, 문학사 학위를 취득한다. 추양이 미국에서 일어난 전통오순절운동(classical pentecostalism)의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 알았다면, 그 곳에서 신학공부를 했어야 했는데, 신학지식부재로 1년만 기거하고 프린스턴신학교로 떠난다.
그러면 오순절운동에 대해 간단하게 살펴보자.
찰스 F. 파햄(Charles Fox Parham, 1873-1929)은 23세 때 1896년 12월 31일 퀘이커 신도인 사라(Sarah Thistlewaite, the daughter of a Quaker)와 결혼한 후, 캔사스 주 토페카(Topeka, Kansas)에 ‘베델치료본부’(the Bethel Healing Home)를 세우고 사도신앙잡지(the Apostolic Faith magazine)를 발행했다. 파햄은 1900년 10월 토페카에 베델성경대학(Bethel Bible College at Topeka in October 1900)을 설립한다. 1900년 12월 31일의 베델성경대학의 송년 예배 후 1901년 1월 1일 20세기 벽두(劈頭) 오전 11시에 애그네스 오즈만(Agnes N. Ozman, 1870-1937)이라는 여학생이 사회를 맡은 교장 파햄에게 안수를 요청한다. 그가 안수하자 오즈만에게 평생 배워보지 못한 중국어 방언아 터져 3일 동안이나 말한다. 이것을 계기로 파햄 목사는 베델성경대학의 문을 닫고 미국전역을 순회 전도하는 전도단을 구성하여 집회한다.
파햄 목사는 ‘오순절의 아버지’(the Father of Pentecostalism)라고 불리며, 세상을 향해 “성령 세례의 증거는 방언을 말하는 것”(Speaking in tongues was the sign of receiving the baptism in the Holy Spirit. The baptism of the Holy Spirit is evidenced by speaking in tongues. glossolalia with the baptism in the Holy Spirit)이라고 선포하고, 사람들의 몸을 치유하며, 귀신을 축출하는 사역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한다.
그는 1906년 휴스턴 텍사스(Huston, Texas)에 성경학교(Bible school)를 설립했는데, 학생들 가운데, 노예의 아들로서 한쪽 눈을 보지 못하고 얼굴에 천연두 자국이 있었던 한 흑인 목사 윌리엄 조지프 시무어(William Joseph Seymour, 1870-1922)가 1905년 하반기 파햄 목사에게서 한 달간 공부를 한다. 당시 흑인과 백인을 차별하는 그러한 사회였기 때문에 그들과 함께 교실에서 공부를 하지 못하고 문밖에서 앉아서 공부한다.
그 후 1906년 시무어 목사는 켈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Los Angeles, California)로 건너가 그 곳의 북 보니 브래가 214번지(214 North Bonnie Brae Street in Los Angeles)의 가정집(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오순절 운동의 성지가 됨) 기도회에 참석하여, 성령세례와 방언교리를 전파하는데, 일단의 사람들이 성령세례를 받고 방언을 하면서, 이것이 ‘애주사가부흥’(the Azusa Street Revival)의 기원이 된다.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규모가 커져 시무어 목사는 1906년 4월9일 로스앤젤레스의 애주사가(Azusa Street) 312번지에 한 낡은 교회 건물에서 ‘사도적 신앙 선교회’(Apostolic Faith Mission)를 설립한다. 방언과 입신과 진동과 같은 현상을 가시적인 성령세례, 성령강림(outpouring of the Spirit)의 증거로 제시하며, 잡지 ‘사도적 신앙’(The Apostolic Faith)에 이 경험을 싣는다. 애주사거리부흥, 애주사거리선교는 하나님의 성회, 하나님의 교회, 국제 순복음교회, 국제연합 오순절교회 등으로 성장한다(Vinson Synan. The Holiness-Pentecostal Movement in the United States. Grand Rapids. Mich.: Eerdmans. 1971/Steve Durasoff. Bright Wind of the Spirit: Pentecostalism Today. Englewood Cliffs. NJ.: Prectice-Hall. 1972).
1901, 1906년의 오순절운동이 1907년의 조선평양대부흥회로 이어지며, 그 부흥회를 인도하며 설교한 사람이 블레어 선교사인데, 추양은 이런 신학적배경에 대한 지식도 부재한 초년생에 불과했다. 그가 캔자스 주에서 학문을 했더라면 신앙과 신학에서 탁월한 공헌을 했을 것이다.
4. 사랑과 화평의 사도?
추양은 아빙돈 주석사건에 연루되고, 평양신학교신학사상과 대조적인 조선신학교에 관계해, 죽산 박형룡 박사와는 같이 갈 수 없는 처지가 된다. 두 사람은 사랑과 화평의 사도라기보다는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의‘권력에의 의지’(독어 Der Wille zur Macht; 영어 The Will to Power)로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러면 먼저 1935년에 일어난 아빙돈 주석사건에 대해 살펴보자.
1930년에 미국 감리교회 출판국이었던 아빙돈(Abingdon) 출판사는 미국의 다양한 교단의 66명의 학자들로 하여금 성경고고학과 성경 비평학에 기초한 저술한‘아빙돈 성경 주석’(The Abingdon Bible Commentary)을 간행한다. 조선 감리교회 교육국 총무였던 유형기(柳灐基, 1897-1989. 평안북도 영변 출생으로 한성 배재학당을 거쳐서 평양의 숭실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 유학하여 아오아마학원에서 수학한 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1923년 오하이오 웨슬리안 대학교 문학부를 졸업하고, 1926년과 1927년에는 보스턴 대학교 대학원과 하버드 대학교 대학원을 각각 졸업한다. 미국 유학 중 이화학당 출신의 유명한 신여성으로 유관순의 스승이기도 했던 신준려와 만나 결혼. 1948년에는 재건된 감리교신학대학교 제9대 교장에 취임해 1953년까지 재직)는 조선 선교 50주년의 기념을 위해 미국의‘아빙돈 성경 주석’을 출판하기 위해 번역위원 52명 학자들을 초청하여, 자신의 주도로 1934년 12월에 신생사(新生社)에서 출판한다.
그러자 1907년 장로교가 배출한 최초의 한국인 목사 7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한국의 사도 바울이라고 일컫는 길선주(吉善宙, 1869-1935) 목사가 이 주석의 집필자 대부분이 자유주의 신학자이고 그 내용도 현대주의 성경해석 원리를 따르는 자유주의사상이 지배적이기 때문에, 이 사상이 장로교회 안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평양신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던 박형룡 박사도 이 주석이 고등비평의 원칙을 따르므로 성경을 파괴적으로 해석하며 계시의 역사를 종교적 진화의 편견으로 분석하고 있다고 단정한다. 결국 장로교회는 1935년 9월에 열린 제24회 총회에서 아빙돈 주석은 장로교 교리에 위배되는 점이 많아, 구독을 금지하고, 여기에 참여한 장로교 학자들, 곧 채필근, 한경직, 송창근, 김재준에게 공개적인 사과를 결의한다. 이로 인해 감리교회와 장로교회의 신학적 대립이 표면화한다.
검사 죽산과 피고인 추양과의 만남은 미래를 보여준다.
둘째, 1938년 평양신학교가 신사참배로 자진해 폐교하자, 평양신학교 교수였던 죽산은 1938-1942동안 일본 도쿄로 건너가 성경주석 편찬에 매진한 반면, 1940년 4월 19일 경성부 종로구 인사동 승동교회 내에 조선신학교(조선신학교–>한국신학대학–>한신대학교)를 설립되면서, 추양을 비롯해 성경비평가인 송창근(宋昌根, 1898-1951), 김재준(金在俊, 1901-1987), (韓景職, 1902-2000) 등이 동참한다. 이 삼총사가 평양신학교 교수진에 참여하지 못한 한을 풀며 죽산의 그늘에서 벗어난다.
그런데 조선에서 죽산이 부재한 신학교존재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파워게임으로 죽산과 추양은 각자의 길로 간다.
5. 무소유 사도?
기념관은 사후 건립되는 것이지, 생존시에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 이유는 건립한 후, 그가 변질될 수 있기 때문이다.
추양은 평생 자기 이름으로 된 저금통장이나 집문서 등이 없음은 물론 소외된 사람들에게 모든 것을 베푼 무소유사람, 청빈한 목회자로 칭송을 받아 왔다.
그런데 이것은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추양은 영락교회를 비롯해 학교 등을 설립했기 때문에, 그가 설령 무소유자로 지낸다고 해도, 주변에서 무소유자로 두지 않는다. 비록 모든 것이 형식적으로 추양의 이름으로 등록되어 있지 않을지라도, 내용적으로 모든 것은 추양 것이다.
일반 기독교인이 추양의 무소유정신을 배운다면, 그는 자본주의사회에서 노예로 지낸다. 기독교인라면 성실근면하게 노동해, 의식주만큼은 풍부하게 챙겨서 자신과 가정을 뛰어넘어 사회와 국가에 제공하면 된다.
조선왕조의 성리학사상의 청빈사상과 법정 스님의 무소유 그리고 천주교의 가난한 신학사상 등의 그릇된 이데올로기로 대한민국에서 부자는 경멸의 대상이 되고, 가난한 자는 존중받는 비정상적인 사회가 되었다. 이제 부자가 존경받고, 가난한 자는 부끄러운 대상이 되는 건전하며 건강한 사회가 되어야 한다.
추양은 목회자를 뛰어넘어서 사회적 인격이 매우 발달된 세련된 정치인이다. 그는 무소유자 행세를 하며, 모든 것을 챙기고 간 아주 세상지혜가 밝은 사람이었다.
그의 생존 시 추양의 기념관이 세워졌다. 두 개만 소개하겠다. 두 기념관만 해도 추양의 무소유정신을 무색케 한다.
첫째, 1996년 강원도 설악동에 추양 한경직 목사 기념관이자 선교사들을 위한 휴식처, 추양하우스가 세워졌다.
둘째, 1997년 10월 10일 숭실대 한경직기념관 설립되었다.
다른 가부금은 제외하고 숭실대가 약 1백80억 원을 투입하여 2년 4개월 만에 이 기념관을 완성했다. 이 기념관은 지하 2층, 지상 3층의 연건평 4천5백74평 규모로 기념홀 및 예배실, 1천5백석의 국제회의실과 선교센타세미나실, 한국기독교박물관 유품실 성가대실 등을 갖추고 있다.
이런 대접을 받는 무소유의 삶은 진정한 기독교인의 삶이 아니다. 칼뱅 선생님의 경우, 그 분의 무덤의 존재도 모른다.
6. 복음주의자<광교회주의자
(1) 영국 성공회 내 엔 3개의 그룹이 있다. 이것을 토대로 당시 프린스턴신학교의 상황을 소개하겠다.
첫째, 저교회(low church): 정통복음주의기독교처럼 복음주의(evangelicalism)를 지향한다.
둘째, 고교회(high church): 의식주의(ritualism)의 성공회천주교(Anglo-Catholicism)를 지향한다.
셋째, 광교회(broad church): 모든 사상을 수용하는 자유주의, 광교회주의(latitudinarianism)를 지향한다.
추양이 존경했던 프린스턴 교수는 선교학을 가르쳤던 스티븐슨(Joseph Ross Stevenson, 1914-1936, 1866-1939) 교장을 비롯하여 교회사 교수 레처(T. W. Laetcher), 성서학 교수 찰스 어드만(Chanrles R. Erdman, 1866-1960), 희랍어 교수 메이천(John Gresham Machen, 1881-1937) 등이 있다.
세 사람은 광교회사람이다. 스티븐슨 교장 재직 시 1929년 프린스턴신학교의 이사회가 자유주의자들과 교리적 포괄주의자들, 곧 광교회파로 개편되자, 동년 메이천 주도로 웨스트민스터가 세워졌다.
(2) 1923년 유니온 신학교 졸업생 헨리 반 듀센(Henry P. Van Dusen, 1897-1975)과 케드릭 레이먼이 뉴욕노회에서 목사안수받기를 신청하자, 뉴욕노회가 이 두 사람의 신앙을 점검한 후, 이들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부인하는 것을 알지만, 이것에 개의치 않고, 이들을 안수해 장로교 목사로 만든다.
후에 반 듀센은 뉴욕 유니온 신학교 교수와 학장이 된다. 말년에 그는 뇌졸중으로 인한 언어장애로 설교 능력을 잃고 아내는 관절염으로 움직이질 못하자, 두 사람은 동반 자살(안락사)한다. 유서에 노년과 자연사에 따른 불편함을 회피하기 위해서라고 썼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추양이 존경한 스승은 저교회 신학사상 보다 광교회 신학사상을 지향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이들의 신학사상은 결국 동반 자살이라는 불명예를 안겨주었다.
7. 보편구원론
(1) WCC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용어를 통하여 교회 중심의 선교에서 세상 중심의 선교로 전환하며, 복음전도와 영혼구원, 그리고 교회 개척과 같은 전통적 선교의 패러다임, 곧 개인구원에서 벗어나 사회구원을 강조하며 정의, 평화, 인간화, 타자를 위한 교회를 선교의 주요 의제로 삼으면서 네오마르크시즘(neomarxism), 곧 오컬트 바티칸주의를 지향한다.
(2) 오컬트 바티칸의 교주 비오 12세(라틴어 Pius PP. XII; 이탈리아어 Papa Pio XII; 영어 Pope Pius XII, 재위 1939-1958, 1876-1958)로부터“토마스 아퀴나스이후 최대의 신학자”라고 격찬 받음은 물론 제2차 바티칸공의회(라틴어 Concilium Vaticanum Secundum or Concilium Vaticanum II; 영어 Vatican Council II, 1962-65) 방청인 자격으로 초청 받은 스위스의 신정통주의 신학자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는‘만인화해론’(독어 Allversöhungslehre; 영어 universal reconciliation)를 지향한다. 이 사상의 종착지는 오컬트 바티칸의 다원주의와 만인구원주의이기 때문에 비오 12세가 극찬한 것이다. 결국 바르트는 오컬트 바티칸의 노예임이 증언되었다. 추양의 통합측은 칼뱅사상에서 출애굽해 바르트 사상으로 전환해, 오컬트 바티칸주의자라고 세상에 선언했다.
(3) 몰트만(Jürgen Moltmann, 1926-)의 ‘만유 회복론’(그리스어 Αποκατάστασις πάντωνApokatastasis pantōnα; 영어 apocatastasis; 독어 Die Wiederbringung aller Dinge; 영어 the Restoration[rèstǝréiʃən] of All Things)은 알렉산드리아학파(Alexandrian school)를 대표하는 오리게네스(그리스어 ὈριγενεςOrigenes; 라틴어 Origenes; 영어 Origen, 185?-254?)의 사상인데, 이것이 바로‘만인구원론’(보편구원론; 독어 Allerlösungslehre oder Heilsuniversalismus; 영어 universalism or universal salvation)
(4) 예수회 사제 칼 라너(Karl Rahner, 1904-1984)의 ‘익명의 그리스도인’(anonymous Christian), 익명의 성령인(anonymous Spiritans)
다음과 같이 도식화할 수 있다.
‘한경직 신학=그레이엄 신학=오컬트 바티칸주의=바르트의 만인화해=몰트만의 만인구원=라너의 익명의 그리스도인’
8. 종합
(1)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땅에 들어가면 가나안 족속을 절멸시키라고 명령하신다. 이것은 하나님의 공의(순결)와 사랑(선택)의 성격을 대표한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푸시지만, 말라기 1:2-3을 인용한 로마서 9:13에서 하나님은 야곱을 사랑하시고, 에서를 미워하신다는 선택적 사랑, 주권적 사랑을 선언하셨다.
예수님께서도 12제자를 선택하셨지만, 베드로, 야고보, 요한 3인방을 가까이 하셨다.
(2) 예수님은 모든 사랑하셨지만,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서 이스라엘 백성을 억압수탈 하는 무신론자, 유대교 지도자와는 화해를 시도하지 않으셨다.
가나안 족속을 절멸시키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한 이스라엘이 후에 고난의 길을 걸은 것처럼, 추양도 혼합주의의 길을 걸어가, 지금 대한민국의 기독교는 거의 초토화상태에 있다. 뿐만 아니라 천주교 세력은 화해의 손길을 내밀면서 다른 손으론 정통복음주의기독교를 완전히 아웃시키기 위해서 개지랄을 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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