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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남(雩南)이승만 전 대통령의 국부칭호와 동상건립에 대한 단상(斷想)

아우구스티누스 2011. 4. 24. 20:01

    우남(雩南)이승만 전 대통령의 국부칭호와 동상건립에 대한 단상(斷想)

 

    4월 24일 주간조선과 조선일보는 “광화문광장엔 '대한민국'이 없다” 라는 글을 동시에 게재한다. 영국, 미국, 프랑스, 캐나다, 중국 등을 소개하면서 이승만 전 대통령을 국부(Founding Father)로, 박정희 전 대통령을 근대화 아버지로 삼으려고 안절부절 못한다. 그렇다면 과연 종일파와 종미파의 조중동 등의 언론과 MB정부의 견해가 타당한가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여기에선 이승만 전 대통령의 국부칭호와 동상건립에 대해서 언급하고자 한다.

 

    이승만 전 대통령에게 국부의 칭호를 수여하거나 동상을 건립하려면 다음과 같은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첫째, 넬슨(Horatio Nelson)이나 처칠(Winston Leonard Churchill)은 타국의 도움 없이 영국을 주체적으로 적군으로부터 조국을 방어해, 트라팔가광장(Traflagar Square)에 넬슨(Nelson)해군제독동상이, 팔리아멘트광장(Parliament Square)에 처칠(Churchill)동상이 세워졌다.

 

    그런데 이승만 전 대통령은 6.25전쟁 때 스스로 국가를 방어한 것이 아니라 유엔의 도움을 빌렸다. 뿐만 아니라 이승만 정권은 6. 25동란 때 서울사수를 다짐하겠다고 국민에게 선언하고선 자기들은 생명을 유지하려고 비밀리에 도망가면서 북한군이 더 이상 남하하지 못하도록 한강다리를 폭파시킨다. 그래서 피난을 가지 못한 많은 서울시민들은 공산치하에서 고통당했음은 물론 이들 가운데 많은 각계 지도자들과 인재들이 북으로 납치되어서 인물손실이 엄청나다. 이 때문에 후에 빨갱이문제로 고난을 당하는 집안들이 속출한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넬슨(Nelson)이나 처칠(Churchill)처럼 목숨 걸고 대한민국이나 국민을 사랑한 사람은 아니었다.

 

    둘째, 미국독립을 위해 직접 전쟁에 참여하고 대통령의 3선 연임을 반대한 워싱턴(George Washington) 전 대통령이나 중국을 위해 대총통자리까지 포기한 쑨원(孫文)처럼 이승만 전 대통령은 민주주의정착을 위한 자기희생이 없었다.

 

    서재필 박사는 이승만 전 대통령을 가리켜 “독립운동보다 한평생 대통령운동을 한 사람”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물론 YS도 중학교 때부터 “대통령이 되겠다“라는 모토를 벽에 써 붙였을 정도로 대통령직에 집요했고, DJ도 정적들로부터 ‘대통령병’ 환자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대통령직에 목숨 걸었고, 정계로부터 은퇴하겠다고 국민들에게 선언해놓고도 스스로 그 말을 뒤집어 버리고 대통령이 되었다. 그래서 모정치인도 두 번이나 대통령선거에서 낙선되어 정치계의 은퇴를 선언했지만, DJ전철을 밟으며 추한 노욕(老慾)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승만도 YS와 DJ처럼 대통령병환자라고 해도 무방하다. 이승만의 부친은 어린 아들에게 태종의 큰 아들인 양녕대군의 16대손이라는 선민의식을 심어준다. 이승만은 집안 족보의 영향으로 태조의 셋째 아들 세종의 후손이 조선을 망국으로 이끌었다는 사실을 언짢게 여겨, 효령대군의 후손 이기붕을 후계자로 점찍고, 그 아들인 강석을 양자로 삼는다(후에 이기붕 일가의 비극적인 자살로 이어짐). 뿐만 아니라 이승만의 모친은 큰 용이 하늘에서 날아와 자신의 가슴으로 뛰어들었다는 태몽이야기를 어린 아들에게 끊임없이 들려주며, 승룡(承龍)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용’(왕)을 계승한다‘, 곧 ’왕이 된다‘는 의미다. 그런데 역학을 통해 사주팔자를 분석하니 늦게 왕이 될 운세여서 ‘늦게 왕을 계승한다’는 뜻의 승만(承晩)으로 개명한다.

 

    이승만은 평소 왕손의식과 모친의 태몽과 한국인 최초의 미국 명문대학 프린스턴 박사라는 엘리트 의식이 결합되어 결국 초대 대한민국의 국회의장, 73세에 대한민국의 초대대통령으로 취임하여 2, 3대 대통령직을 역임한다. 제3대 대통령 임기 중 3.15 부정선거를 계기로 4.19 혁명이 일어나자 부정선거의 책임을 지고 대통령직에 하야하고, 미국 하와이로 망명하여 거기에서 서거한다.

 

    그런데 YS와 DJ는 이승만 전 대통령처럼 대통령직에 병적으로 집요했지만, 헌정질서를 유린하거나 인권을 탄압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민주주의 뿌리를 확고히 내렸음은 물론 인권은 구미선진국과 비슷한 수준일 정도로 향상시켰다. 이승만 전 대통령처럼 정적들을 죽이기보단 용서하고 화해하는 참다운 민주주의정치를 정착시켰다.

 

    미국의 수도 워싱턴DC(Washington, D.C.)엔 국회의사당까지의 거리인 ‘펜실베니아 애비뉴’(Pennsylvania Avenue)가 있다. 미국의 침례교 목사이자 흑인인권운동 및 권리신장운동가로 저격당한 마르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목사를 기리기 위한 ‘자유의 광장’(Freedom Plaza)이 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동상보다 민주화와 인권향상을 위해 저항한 YS와 DJ를 위한 광장을 만드는 것이 역사적으로 가치가 있다.

 

    셋째, 이승만은 1923년 3월호‘태평양잡지’에 기고한 ‘공산당의 당부당(當不當)’에서, 빈부격차를 없애는 평등주의는 당(當)하나, 재산분배, 자본가폐지, 지식계급폐지, 종교단체혁파, 국가소멸의 5가지는 부당(不當)하다는 글을 발표한다. 이것은 이승만이 미국에서 공부하며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형성된 사고체계이지, 21세기의 체계화된 공산주의개념은 아니다. 왜냐하면 1933년 옛 소련의 지원을 끌어내기 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했기 때문이다.

 

    이승만이 공산주의를 증오하게 된 것은 다음과 같은 자신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승만은 상해임시정부의 실세 안창호, 조선인 최초로 공산당을 조직하여 이미 공산당에 가입한 국무총리 이동휘, 여운형 등으로부터 배척을 당하여, 1925년 3월 대통령에서 탄핵 및 면직되는 수모를 겪는다. 그는 옛 소련으로부터 도움을 받기위해 1933년 7월 20일 모스크바 역에 도착하지만 즉시 추방되는 모욕을 당한다. 그는 1943년과 1945년 좌우연립을 둘러싼 갈등에 고통을 당하고 미 국무부의 진보적 관리들로부터 치욕을 겪는다. 미 국무부는 소련과의 협조를 위해 눈 밖에 난 이승만과 중국 국민당 지원을 받고 있다고 의심 가는 김구를 배제하라는 메시지를 육군부와 맥아더를 경유해 하지에게 전달한다. 하지는 국무부의 명령에 따라 극좌극우세력을 배제하고 중도파의 김규식과 여운형을 앞세운 좌우합작운동을 출범시킨다.

 

    이승만은 이런 개인적 체험 때문에 공산주의라면 넌더리를 치며, 일제의 치안유지법을 거의 그대로 복사하여 국가보안법을 제정하고, 이 법에 의해 반공은 대한민국의 국시(國是 permanent state policy)가 되고, 친일파에겐 면죄부를 주면서,‘반공주의=친일파=친미파’라는 공식을 만들어 낸다.

 

    넷째, 남북통일을 부정하고 남북분단을 고착화시킨다.

 

    김구와 김규식은 남북협상을 통해 통일정부를 수립하려는 꿈에 사로잡혀, 북한에 남북협상을 제의한다. 두 사람은 1948년 4월 사전에 북측과 아무런 협의조차 없이 일방적으로 개최하는 평양회담 참석하고, 대한민국 정부수립에 반대한다는 ‘4. 30 공동성명’에 서명하여 이승만 정부를 인정하지 않는 결과를 초래한다. 두 김씨의 태도도 지혜롭다고 볼 수는 없지만, 이승만은 남한단독정부를 수립함으로써 분단의 주도자, 통일을 저해한 사람으로 낙인찍힌다.

 

    미국의 수도 워싱턴DC(Washington, D. C.)의 '펜실베니아 애비뉴’(Pennsylvania Avenue)엔 미국의 남북전쟁(American Civil War 또는 Civil War 1861-1865)에서 승리하여 연방국가를 이룩하고 그 결과로 노예해방을 이끌어낸 제16대 링컨(Abraham Lincoln)대통령을 기리기 위한 ‘링컨 기념관’(Lincoln Memorial)이 있다. 이처럼 이승만 전 대통령은 링컨 미 대통령처럼 남북통일을 위해 열정적으로 몸 바치고, 민주주의 정착이나 인권향상에 기여했는가? 오히려 거꾸로 정치를 펼쳤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안다.

 

    다섯째, 이승만 전 대통령을 국부라고 칭하면 역사단절이 생기고, 헌법전문에 기술된 ‘3.1운동정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 그리고 ‘4.19정신’을 부정한다. 이 세 정신은 훗날 헌정질서를 유린하고 인권탄압 하던 정권에 대한 국민의 불복종운동으로 이어져 민주화와 인권향상을 이루는 결정적인 정신에너지를 제공하기 때문에 한반도 역사에서 제일 중요한 사건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역사계승을 공고하게 해야 한다.

 

    삼국시대->삼한 및 삼국통일->고려->조선->1897년(광무 원년) 10월 12일부터 1910년(융희 4년) 8월 29일의 14년간의 대한제국(大韓帝國 The Greater Korean Empire)->1919년부터 45년까지 중국 땅에 있었던 대한민국임시정부(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Republic of Korea)->대한민국(大韓民國 The Republic of Korea)

 

    여섯째, 이승만정권의 친일파 등용과 선호 때문에 국부라는 칭호를 수여하고 동상을 세우면 ‘신종 종일파’에게 잘못된 사인을 준다.

 

    미국이 한반도를 일본의 노예국가로 넘기고, 그 후에도 그런 정책을 유지하기 위해 친일파를 선호하여 이승만정권에게 압력을 가하여 친일파청산을 못하도록 한다. 그리고 이승만도 자신에게 쩐도 지지세력도 없고 해서 일제와 적극적으로 협력하여 부를 쌓고 노예교육을 받은 대학출신을 등용하여 쩐을 챙기고, 친일파들을 아무런 조건 없이 용서해주고 자기의 지지 세력으로 만든다. 이러한 대한민국정체성훼손은 살인마 김정일체제만큼이나 심각하며, 이것은 역사가 영원히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이승만 전 대통령과 동시대의 사람(이대통령보다 15년 연하인) 프랑스의 드골(CharlesMarie Joseph De Gaulle)대통령과의 차이점이다. 프랑스엔 개선문(Arc de Truumphe)에서 콩코르드광장(Place de la Concorde)에 이르는 '엘리제들판‘이라는 샹젤리제(Avenue des Champs-Elysee)거리가 있고, 개선문(Arc de Truumphe) 둘레엔 드골(De Gaulle)의 동상이 있다.

 

    왜 드골(De Gaulle)동상이 세워졌을까?

 

    제1차 세계대전 영웅, 80대 중반, 친(親)나치파인 앙리페탱(Henri Philippe Benoni Omer Joseph) 원수(元帥)는 매국노 이완용처럼 히틀러에게 항복하여, 1940년 6월 21일에 히틀러와 휴전협정에 나서 프랑스 본국의 5분의 3, 곧 북부를 독일 점령지구에 위임하고, 남은 남부 5분의 2, 알제리와 모로코를 관할하며, 비시(Vichy)에 주재한, 나치 독일의 괴뢰 국가와 다름없는 비시정부(Gouvernement de Vichy 1940-1942)의 국가수반이 되어 2년 동안 통치한다.1942년 봄부터는 피에르 라발(Pierre Laval)이 총리로 취임하여 나치의 타당성을 선전하지만, 1942년 11월에 독일이 전격적으로 비시정부(Gouvernement de Vichy)관할 지역까지 점령해 버리고, 페탱(Pétain)은 1944년 8월부터 독일에 압송되어 억류되어 있다가 종전 1945년 4월 조국으로 돌아온다. 1944년 라발(Laval)은 독일의 보호를 받기 위해 동쪽으로 달아났다가 8월말 미군에 항복하고, 프랑스로 송환된다.

 

    비시정권(Régime de Vichy)의 나치정부에 대한 항복을 비판하면서 임시정부를 세운 드골(De Gaulle)은 한 때 자신의 직속상관이었던 페탱(Pétain)수반과 총리라발(Pierre Laval)에게 사형선고를 내린다. 페탱(Pétain)은 제1차 세계대전시 베르됭전투(Battle of Verdun)에서 세운 공이 있다는 정상이 참작 돼 사형에서 감형되어 대서양에 떠 있는 외로운 섬, 일드외 요새감옥에서 종신형으로 지내다가 1951년 7월 23일에 죽고, 라발(Laval)은 총살당한다. 이어 드골(De Gaulle)은 나치에 협력한 언론사 700여 곳을 폐간하고 언론인 등 9천여 명을 재판 없이 즉결 처분한다. 왜냐하면 변명과 해명은 들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나치청산은 지금도 계속 된다. 이것이 똘레랑스(tolerantia, 관용)의 나라라는 프랑스가 민족반역자를 처리하는 기준이다.

 

    친일파청산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반도는 구구한 변명과 해명이 계속된다. 이것이 한반도와 프랑스와의 국가관의 차이점이다. 혹자는 프랑스의 나치점령기간은 4년에 불과 하지만 한반도는 36년이란 긴 세월이라고 변명한다. 그런데 박은식선생님은 이런 한반도의 노예기질을 미리 예측하셨다. 선생님은 태백산(백두산)이 있는 나라의 국민으로 나라를 잃고 일본의 노예가 된 것이 슬퍼 미쳐서 돌아다니는 노예를 뜻하는 '태백광노'(太白狂奴)를 호로 삼고,‘한국통사’(韓國痛史)를 쓰셨다. ‘통사’(痛史)에서 ‘통’(痛)은 통할 ‘통’(通)이 아니라 아플 ‘통’(痛)이다. ‘일제의 노예가 된 대한제국의 뼈아픈 역사’라는 의미다.

 

    박은식선생님은 이 저서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일제에 나라를 뺏긴 한국, 그 망국사를 아무도 기록하지 않고 내버려 둔다면 발해가 그 역사를 잃어버리고 민족과 영토까지 잃어버린 쓰라린 그 전철을 다시 밟는 것과 같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국혼(國魂)을 간직하고 광복을 확신하기 위해 이 통사(痛史)를 쓴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국혼’(國魂)과 ‘광복의 확신’이다. 이 두 단어, ‘국혼’(國魂)과 ‘광복의 확신’을 가진 사람들은 일제에 협력하지 않음은 물론 좌절하지 않았다.‘국혼’(國魂)과 ‘광복의 확신’이 없었기에 절망하여 일제에 협력한 것이다.

 

    대한민국이 경제선진국으로 진입했다고 해서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이 민주화를 이룬 업적이나 정신을 훼손하는 말까지 한다. 예를 들어 “민주주의가 밥 먹여주느냐?”그렇다. 민주화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여전히 심각하지만 부정부패가 어느 정도 사라져 국민에게 그 혜택이 골고루 돌아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아시아에선 최초로 민주화를 이루었고, 이것이 일본과의 커다란 차이점이기 때문에 구미선진국에서 제대로 대접을 받고, 아시아와 제3세계가 부러워하는 아이콘국가가 되었다.

 

    21세기에 이런 위대한 정신적 가치를 훼손시키는 신종 종일파가 등장한다. 이들은 역사정신이나 국가관이 없는 또라이 집단이다. 그저 일본에서 교환교수를 지내면서 쩐이나 받아 처먹거나, 장학금을 받고 박사학위 받은 자나 학생들 또는 정치가 등이 시바 료타로(しば りょうたろう 司馬遼太郞)가‘언덕위의 구름’(坂の上の雲 1968)이라는 소설을 통해 일본의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명목아래 군국주의의 침략정책을 교묘하게 감추기 위해 만들어낸 ‘해양세력과 대륙세력간의 충돌’ 또는 ‘자본주의대 공산주의와의 투쟁’이라는 역사관을 그대로 따른다. 이런 역사관은 일본이 세계 제2위 경제대국으로 진입하던 시기와 맞물려서 나온 것이다. 이것은 또한 미국이 일본을 위해 한반도를 노예국가로 넘겨주고 분단시킨 죄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서 만들어낸 가공된 역사관이다.

 

    중국이 공산당 일당독재에 의한 일사불란한 경제개발로 G2로 우뚝 올라섰고, 미국의 최대채권국이 되었으며, 기축통화(基軸通貨, basic currency, key currency)인 달러도 미국다음으로 많이 갖고 있다. 곧 바로 미국을 추격해 패권국가로 들어설 날이 멀지않았다고 예측할 뿐만 아니라 한반도가 통일되면 한반도종단철도(Trans Korea Railroad), 시베리아횡단철도(Trans Siberia Railroad) 그리고 유라시아철도(Eurasia Railroad) 등이 건설되면 한반도는, 특히 부산은 세계무역의 중심지가 되기 때문에 이 이론은 이제 설자리를 잃었다. 뿐만 아니라 미국과 중국의 표면적 정치관계를 보면 서로 갈등을 일으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면적 경제관계를 보면 상부상조하는 동반자관계라는 것은 세상이 다 안다.

 

    일본이 아시아 국가를 침략해 식민지화한 범죄, 후쿠자와 유기치(ふくざわゆきち, 福澤諭吉)의 ‘다쓰아뉴오’(脫亞入歐)사상 그리고 미국이 일본을 아시아의 영국이라고 추켜 준 것 때문에, 일본이 아시아로 영원히 돌아올 수 없게 되자, 그 문제를 한반도를 통해 해결하려고 하는데, 역사관이나 국가관 없이 쉽게 잊고 용서하는 즉흥적이며 감정적인 우뇌형의 종일파들은 이런 새로운 국제정치질서를 파악하지 못하고, 일본의 죄악을 고스란히 뒤집어써 다른 아시아국가와 원수관계를 맺으려고 한다. 뿐만 아니라 한일군사관계를 맺으면, 영국이 군사적으로 아르헨티나(Argentina)의 포클랜드제도(에스파냐어 Islas Malvinas, 영어 Falkland Islands)를 소유한 것처럼, 일본은 군사적으로 독도를 점령할 것이다. 그런데도 막연히 설마라는 안전 불감증에 사로잡힌 우뇌형의 신종 종일파들 때문에 골치 덩어리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미국이 한반도에게 지은 죄를 참회하지 않기 위해 속으론 중국과 러시아와 친하게 지내면서 겉으로 갈등의 관계로 보여주기 위해 명목상 ‘해양세력과 대륙세력간의 충돌’이라는 정치적 수사법을 사용해왔는데, 그것조차 깨닫지 못하는, 초등학교수준도 못 미치는 정치꾼들이나 그것을 액면 그대로 믿고 추종하는 종일파와 종미파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종 종일파들은 이완용(근대화기수)->이승만(국부)->박정희(근대화의 아버지)라는 해괴한 공식을 만들어낸다. 이것은 요즘 유행하고 있는 유머, 곧 키 작은 사람은 키가 자랄지 모르니 일본 후쿠시마원전에서 방출된 방사능비를 맞으라고 한다는 말이 적용된다. 그 유래는 매스컴에서 떠드는 이야기에서 나왔다. 옛 체르노빌(Chernobyl) 원전폭발 사고로 체르노빌(Chernobyl)은 유령도시가 되었는데, 그 주변에서 1m 크기의 지렁이, 5m 크기의 메기와 같은 돌연변이가 나타났다고 한다. 일본의 잔인한 노예생활을 근대화라고 주장하는 종일파의 역사관은 바로 방사능의 비를 맞은 기형아(돌연변이)의 역사관에 불과하다.

 

    이젠 지난 60, 70년대의 허황된 이데올로기에서 깨어나라, 종미파와 종일파여! 그리고 살인마 김정일정권을 무조건 추종하는 종북파여, 허무한 역사관을 벗어던져라!

 

    그러면 이승만 전 대통령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덩샤오핑(鄧小平)은 마오쩌뚱(毛澤東)에 대해 '공칠과삼'(功七過三)으로 평가하고, 마오쩌뚱(毛澤東)의 과오 속에는 내 과오도 포함돼 있어, 과오는 내가 고치면 된다고 했다. 필자는 현대사를 기술할 때, 이승만 전 대통령을 비롯해서 모든 대통령에 대해 '공팔과이'(功八過二)로 평가하고, 공(功)은 분석적이며 체계적으로 아주 상세하게 기록하고, 과(過)는 두 세 줄로 간략하게 기록하는 혁명적이며 긍정적이고 주체적이며 능동적인 역사기술변화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위대한 업적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첫째, 미대통령과 맞짱뜨며 계산적이고 현실적인 용미주의(用美主義)를 추구하였다.

 

    일반적으로 아는 바와 달리 이승만 전 대통령은 미국정부로부터 줄곧 왕따 당했다. 당시의 대한민국은 아프리카국가보다 더 가난한 나라였다. 최빈국의 나라 대통령이 국익을 지키기 위해 세계 최강 제34대 미 대통령 아이젠하어(Dwight David Eisenhower)와 맞짱 뜨면서 1954년 11월 18일 한미방위조약을 체결해 한반도가 더 이상 일본의 노예국가로 전락하는 것을 막았음은 물론 자유주의 국가로 발전해가는 데 역대 어느 대통령도 할 수 없는 위대한 공헌을 했다. 그리고 6. 25전쟁 와중에 원자력발전소 건설을 강행하여 21세기의 선진원자력발전강대국가 대한민국이 존재하게 했다.

 

    둘째, 국제정세에 대한 혜안이 탁월했다.

 

    이승만은 장면(張勉)을 단장으로 하고 로버트 올리버(Robert T. Oliver)와 박사를 고문으로 하는 대표단을 유엔에 파견해 대한민국의 승인을 받는다. 이때 김구와 김규식도 국가승인을 막기 위해 별도의 대표단을 파리 유엔 총회에 파견할 준비를 했다가 막판에 대표단장인 김규식이 출발을 거부함으로써 대표단 파견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유엔의 국가승인은 6.25전쟁 때 그 효력이 발생한다. 유엔군의 신속한 파병이 그것이다.

 

    1910년 6월 프린스턴에서 윌슨총장으로부터 박사학위를 받은 논문의 제목‘미국의 영향을 받은 중립’(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s)’도 이승만 전 대통령의 국제정치감각의 탁월함을 보여준다. 이 학위논문은 1912년 우수논문으로 대학출판부에서 출간된다.

 

    셋째,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쳤다.

 

    평화선 선포(1952)로 독도문제를 해결한 사건은 21세기의 일본의 졸렬한 행동을 미리 예상한 위대한 사건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한일협정과정에서 일본수뇌부와 피 튀기는 투쟁을 하면서 국익을 최대한 이끌어낸다. 결국 제35대 미국 대통령 케네디((John F. Kennedy | John Fitzgerald Kennedy)도 일본에게 대한민국의 정부의 의견을 반영하라고 설득하여, 이것을 기초하여 박정희정부시절 1965년 한일기본조약(한일협정 Treaty on Basic Relations between Japan and the Republic of Korea)이 체결된다.

 

    넷째, 농지개혁으로 선진경제국의 주춧돌을 놓았다

 

    농지개혁이 지주가 많았던 한민당 때문에 지연되자, 이전에 사회주의자였던 조봉암을 농림부장관으로 세워서 농지개혁을 추진하여 6. 25전쟁 이전 마무리한다. 6. 25 때 지주와 종의 이분법이 철폐되어 농민들은 공산당에 가담하지 않고, 스스로 가지고 있는 논밭을 경작해 경제발전의 주춧돌이 된다. 아시아나 제3세계국가가 선진국으로 입문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가 지주와 종으로 구분된 이분법의 농지문제 때문이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많은 과오(過誤)를 범했지만 동시에 역대 어느 대통령도 할 수 없는 위대한 업적도 쌓았기 때문에 국부로 추대하거나 동상을 세우는 일은 허용되지 않더라도 위대한 초대외교대통령으로 인정해야 한다.

 

    그러면 광화문광장은 어떻게 해야 대한민국의 상징이 될까?

 

    첫째, 동상세우는 목적은 그 사람을 기리기보다는 그 정신을 기리는데 있다. 그런데 종일파와 종미파는 자신들의 지난 치부를 숨기려고 특정인을 기리려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

 

    런던중심가 트라팔가광장(Trafalgar Square) 중앙에 넬슨(Horatio Nelson)상(像)올 올려놓은 기념주(柱)가 있다. 에딘버러(Edinburgh)에도 넬슨동상이 있다. 거기에는 가슴을 뭉클케 하며 눈물을 핑 돌게 하는 명문이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여기에 우리 에딘버러시민이 넬슨동상을 세우는 것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더구나 살아생전의 그의 영광을 기리기 위해서도 아니다. 오직 국가가 의무를 요구할 때 죽음으로써 그 임무를 다하는 삶을 내 자식들에게 가르쳐준, 그 교훈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 세운다.“

 

    넬슨(Nelson)동상이 세워진 목적은 자국민에게‘노블레스 오블리즈’(Noblesse Oblige)정신을 교훈하기 위한 것이다. 이 정신 때문에 이튼스쿨(Eton School)은 제1, 2차 세계대전에 참가해 죽은 졸업생이 5천명에 이르며 그들의 시신이 그 교정에 묻혀있다. 그래서 영국은 지난 300년 동안 전쟁에 한 번도 져 본일 이 없다.

 

    이런 사실에 입각하여 볼 때 죽기를 각오하면 살 것이고, 살고자 한다면 죽을 것이라는‘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則生 必生則死)의 정신으로 조선백성을 사랑하고 조선을 위해 희생한 성웅, 충무공이순신제독상이나 평화시와 전쟁시를 구분할 줄 알고 애민정신의 극치였던 훈민정음을 창제한 세종대왕상은 아주 알맞다. 그렇지 않다면 매국노 일제의 노예 이완용과는 달리 한반도의 주체성과 주인정신을 세계에 알린 안중근님과 유관순님의 동상도 생각해볼만 하다.

 

    둘째, 프랑스개선문(Arc de Truumphe) 바닥에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무병용사들의 무덤이 있고, 미국의 ‘펜실베니아 애비뉴’(Pennsylvania Avenue)엔 ‘한국전쟁전몰자 위령공원’과 ‘베트남전쟁전몰자 위령공원’이 조성되어 있기 때문에, 광화문광장에도 4.19혁명으로 숨진 열사들과 6.25전쟁으로 희생당한 무병용사들의 무덤이나 공원을 조성하는 것도 괜찮다고 본다.

 

    셋째, 대한민국의 현대사는 민주화와 산업화가 동시에 성취된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위대한, 행복한 나라이기 때문에 어느 특정인보단 역대 대통령들을 기념하는 기념관을 세우는 것도 괜찮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