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와 정의의 나라/철학 이야기

“몸철학”에서 본 박정희 전 대통령의 허상과 실상

아우구스티누스 2011. 6. 10. 08:37

                  “몸철학”에서 본 박정희 전 대통령의 허상과 실상

 

 

    지난 오월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녹색의 초여름을 더 한층 싱그럽게 하고 한반도의 미래를 밝게 했다. 그러다가 중국으로 날아오는 황사와 일본의 후쿠시마 원전에서 방출된 핵방사능물질이 비와 섞이어 오월하늘은 인간에게 처절한 아픔을 선사하기도 했다.

 

 

    달력에서 오월을 보면 오월하늘처럼 두 가지 모습이 다가온다. 어린이날(5), 어버이날(5), 석가탄신일(10), 스승의 날(15), 성년의 날(16), 바다의 날(30) 등은 우리에게 기쁨과 감사와 사랑과 희망을 가져다준다. 이에 반해 5.16구테타, 5.18광주항쟁,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2주기(23일) 등은 우리에게 수난의 역사를 상기케 한다.

 

 

    내년 4월에 총선, 12월에 대선을 이어 치른다. 박근혜 전 대표는 부친 박정희(JH) 전 대통령의 딸, 모친육영수 여사를 빼닮은 이미지, 모친서거 이후 5년 동안 대행한 퍼스트레이디경험, 한나라당 대표 때 선거를 승리로 이끌었던 정치력 등으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더욱이 2011년 6월 9일 영국 경제일간 파이낸셜 타임스(FT)는 박 전 대표가 “한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평가한다. 이처럼 박 전 대표가 미래의 권력으로 등장할 확률이 높아지자 조중동, KBS, MBC, SBS 등을 비롯한 모든 언론, 권력기관, 정치인들 그리고 5.16세력의 후손들은 박 전 대표에게 잘 보여 떡고물을 챙기려고 박대통령(JH)에게 근대화아버지의 칭호를 수여함은 물론 동상건립을 추진하자고 용비어천가를 부른다.

 

 

    뿐만 아니라 일본으로부터 쩐 받아 처먹은 지식나부랭이들과 정치꾼들, 일본으로부터 장학금 받고 박사학위 딴 교수들이나 학생들, 친일재산 국가환수를 반대하는 친일파후손들, 조선왕조를 푼돈 받고 일본으로 넘긴 노론세력의 후손들 등의 일본의 시다바리(시타바타라키, したばたらき)들은 일제36년의 노예생활을 근대화과정이라고 합리화하기 위해 박대통령(JH)을 무조건 긍정적으로 재평가하려고 발악을 하고 있다. 이는 일제를 위해 꼬봉 노릇한 자기조상들의 치부를 은닉하기 위함이다.

 

 

    사실 박대통령(JH)은 친일파가 아니라 일본인보다 일본패망을 더 가슴아파했던, 진정한 일본인으로 신분탈색을 한 사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변신의 귀재였다. 일제가 패망하자 조선으로 돌아와 한국의 육군사관학교 2기로 들어가 한국군장교가 된다. 여순반란시 남로당에 자진 입당해 공산주의자로 활동을 하다 적발되자 ‘남로당일망타진’에 기여한 공로로 살아남은 기회주의자다. 그리고 다시 반공주의자로 변신한다. 후에 그는 육군 소장이 되고 1961년 구테타에 성공하여, 대통령(제5대에서부터 시작으로 제9대)을 역임한다. 5.16군사정부부터 시작하여 도합 18년 5개월간 철권통치를 했는데, 그것이 유신체제와 긴급조치9호로 나타나고, 끝내 자신과 같은 고향 후배이며, 같은 육사 2기생인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이 쏜 총에 맞아 운명을 달리한다.

 

 

    필자는 이런 사실을 감안하면서, 박대통령(JH)에 대한 저서가 쏟아져 나오고 그에 연구가 많이 되었기 때문에 다른 각도에서 그의 허상과 실상에 대해서 언급하고자 한다.

 

 

    인간은 육체(히브리어 bassar, 그리스어 sarx, σάρх, 라틴어caro, 독어 das Fleisch, 영어 flesh)와 정신(히브리어 ruach, 그리스어 pneuma, πνεȗμα, 라틴어 spiritus, 독어 der Geist, 영어 spirit)으로 구성된 몸(한국어 mom, 히브리는 없음, 그리스어 soma, σώµɑ, 라틴어 corpus, 독어 der Leib, 영어 body)이다. 육체는 생물학적인 면(경제), 정신은 말 그대로 이념적인 면(민주화)을 뜻한다. 그러면 몸철학에서 본 박대통령(JH)의 허상과 실상에 대해서 살펴보자.

 

 

                        I. 생물학적인 면(경제)에서 본 박정희

 

 

    1960년대 대한민국은 최대빈국에 속했다. 1인당 국민소득(GNP)은 100달러도 되지 못하여, 태국이나 필리핀에 감히 비교대상이 되지 못했음 물론 아프리카수준에도 못 미쳤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경제에 올인 할 수밖에 없었다.

 

 

    JH정부의 경제하면 떠오르는 단어가 있다. 그것은 ‘새마을운동’이다. ‘새마을운동’은 아시아와 아프리카국가의 아이콘이다. 그리고 국제금융, 거시경제정책에 대한 탁월한 연구업적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경제학자이며‘빈곤의종말’(The End of Poverty)의 저자인 제프리 삭스(Jeffrey Sachs) 교수가 ‘새마을운동’을 극찬해 세계적인 브랜드가 되었다. 그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특별자문관으로, 비영리기구인 ‘밀레니엄 프로미스’(MP, Millennium Promise)를 설립해 세계 빈곤 퇴치사업을 벌이고 있다. 그는 2010년 11월 8일 경북도청 대강당에서 이렇게 ‘새마을운동’을 평가했다.“세계 빈곤 퇴치는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이 빈곤 퇴치가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해보였기 때문입니다...오래 전 한국은 빈곤을 겪었으나 짧은 시간 안에 경제성장을 이뤘습니다. 이는 경이로운 사건입니다. 새마을운동으로 농가소득이 증대됐고 이를 바탕으로 제조업도 발전했습니다. 한국의 새마을운동이 세계의 교훈이 된 것입니다”

 

 

    1970년 4월 22일에 시작된 새마을 운동은 이스라엘의 키부츠(Kibbutz)운동을 본받은 것이다. 키부츠(Kibbutz)는 히브리어로 '집단'이라는 뜻이며, 사유재산을 인정치 않은 이스라엘의 집단농경공동체이다. 건국대 부총장 류태영박사는 동양인 최초로 이스라엘 히브리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음은 물론 이스라엘 국립 벤구리온대학교수를 역임하다가 조국 대한민국 농촌을 부흥시키려고 귀국한다. 1972년 JH는 류박사를 청와대 비서실 초대 새마을담당관에 임명한다. 류박사는 새마을 운동을 이끈 선구자로 자리 매김한다.

 

 

    새마을운동은 1970년대의 농가의 소득배가운동이었지만, 후에 범국민적 지역사회개발운동 뿐만 아니라 ‘근면-자조-협동’을 기본정신을 생활화하는 의식개혁운동으로 발전한다. 그러나 새마을운동은 이미 심훈의 저서 ‘상록수’에서 나타나듯이 애국의사(義士)나 열사(烈士) 또는 지사(志士)들의 조선왕조의 구식체제의 타파운동이었다. 21세기엔 지방자치의 활성화가 새마을운동을 대신하게 되었다.

 

 

    그리고 순복음교회의 조용기목사의‘삼박자 구원론’이 미국 번영신학의 적극적 사고사상과 함께 결합하여 긍정적인 사고가 프로테스탄트교회에 확산되자, JH정부도“싸우면서 건설하자”, “우리도 한 번 잘 살아보자” 등의 ‘Cando정신’으로 고속도로를 건설하고, 노동집약적 경공업제품을 수출주도상품으로 전환시키고, 외화획득으로 국부(國富)의 기초를 단단히 하여 조선, 기계, 철강(포항제철) 등의 중화학공업을 육성한다. 정부주도적이고 수출지향적이며 성장우선의 전략의 추진은 관제국민운동으로 변모되는 부작용도 일어난다.

 

 

    JH정부는 대기업을 전폭적으로 금융지원하고 세계 최저의 임금수준, 세계 최장의 노동시간, 세계최대의 산업재해로 표현되는 풍부한 노동력을 제공하고, 초과이윤은 재벌들에게 몰아주어 글로벌기업으로 육성한다. 불행하게도 JH는 영구집권을 위해 1969년 10월 3선 개헌을 무리하게 추진하며, 자신의 취약성을 금권정치에 의지하면서 인권을 탄압한다. 특혜와 부정부패 등으로 상징되는 정경유착으로 1997년 IMF사태가 발생하지만, 다행히도 2001년 초단기 졸업한다.

 

 

    맹자(孟子)는 '무항산무항심'(無恒産 無恒心)에 대해 말한다. 항산(恒産)이 없으면 항심(恒心)이 없다는 말로, 경제안정을 이루지 못하면 너그럽지 못하고 바른 마음을 갖기 어렵다는 말이다. 이것은 미국의 심리학자, 철학자 매슬로(Abraham Harold Maslow)가 ‘동기부여와 성격’(Motivation and Personality 1954)에서 제시한 '욕구 5단계설' (Hierarchy of needs)의 첫 단계인 생리적 욕구(Physiological Needs) 해당된다. '욕구 5단계설'을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생리적 욕구(Physiological Needs)->안전의 욕구(Safety Needs)->사회적 욕구(Belonging and Love Needs)->자존욕구(Esteem Needs)->자아실현욕구(Self-Actualization Needs)”

 

 

    제1단계의 생리적 욕구는 생존욕구를 말한다. 식사, 수면, 배설, 섹스 등과 같은 생물학적 본능적 욕구다. 이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인간은 그 다음단계로 진입할 수 없다. 일련의 인물을 소개함으로써 이 생리적 욕구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살펴보겠다.

 

 

    하루치 막걸리와 담배만 있으면 행복하다고 했던 ‘기인’(奇人) 순도높은 순수시인, 천상병은 말년에 해질 녘이면 단골 술집에 들러 혼자서 막걸리 한 두 잔 거치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당시 단골 술집의 주모는 할머니였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천시인은 단골술집을 바꾼다. 부인 목순옥여사는 천시인의 일거수일투족을, 부처님 안의 손오공처럼, 훤히 다 꿰고 있기 때문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는다.“요즘 새로 가는 막걸리 집 주모가 아주 예쁜가 보죠? ”시인은 아이들처럼 화들짝 놀라면서 늘 아내에게 했듯이 입을 삐죽거리며 대꾸한다.“문디 기시니 아이가. 그 막걸리집은 예전에 다니는 그 집보다 술잔이 훨씬 더 크다 아이가.”

 

 

    배가 고파 막걸리 한 사발로 끼니를 때웠던, 먹고살기도 너무 빠듯했던 시절을 보냈던 천시인은 막걸리 맛보다 양을 우선시한듯하다. 천시인의 ‘막걸리’라는 시를 음미해보자. “나는 술을 좋아하되/막걸리와 맥주밖에 못 마신다//막걸리는/아침에 한 병 사면/한 홉짜리 작은 잔으로/생각날 때만 마시니/거의 하루 종일이 간다...막걸리는 술이 아니고/밥이나 마찬가지다/밥일 뿐 아니라/즐거움을 더해주는/하나님의 은총인 것이다.”

 

 

    프랑스 식민지 알제리(Algeria)태생의 소설가, 극작가, 수필가로서 1957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고, 1960년 파리에서 자동차사고로 사망한 알베르 카뮈(Albert Camus)는 자신의 작품‘이방인’(L'Etranger, 1942)의 주인공 뫼르소(meursault)를 통해 인간은 철저한 생물학적인 존재임을 밝힌다. 뫼르소(meursault)는 알제리(Algeria)의 평범한 샐러리맨이다. 뫼르소(meursault)는 인근 마랑고의 양로원에 있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전보를 받고 이틀간의 휴가를 내고 양로원을 찾아가지만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무관심한 태도를 보여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장례식 이튿날 그는 슬퍼하기는커녕 지중해에서 여자친구하고 해수욕을 즐기고 코미디영화를 같이 보며 정사를 갖는다. 그리고 며칠 뒤 같은 층에 사는 이웃의 건달 레몽과 친구가 되는데, 이 친구와 불량배들과의 싸움에 우연히 말려들어 한 아랍청년을 총으로 쏘아 죽인다.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아도 상고를 거부하고 죽음을 택한다.

 

 

    인도의 독립 영웅이자 정신적 지도자이며 인류의 위대한 영혼이라 일컫는 간디(Mahatma Gandhi)는 당시 조혼 풍습에 따라 13살에 결혼하였는데, 1885년 아버지의 주검 앞에서 욕구를 참지 못하고 동갑내기인 부인 카스트루바와 관계를 가질 정도로 섹스에 푹 빠졌다고 한다. 그 후 성욕을 자제하기로 다짐한다. 자신의 금욕의지를 테스트한다면서 젊은 여자 그리고 친구나 동료의 부인들과 알몸으로 잠자리를 같이 한다. 간디(Mahatma Gandhi)의 금욕은 여성과 잠자리를 하되 삽입하지 않고, 정액을 배출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이런 행동은 간디(Mahatma Gandhi)가 자신의 방중술을 순결의지로 포장한 것이다.

 

 

    이와 같이 선천적으로 주어진 생물학적인 본능은 어느 인간도 피할 수 없다. JH는 인간의 본능인 먹는 문제에 자신의 정치생명을 건다. 그가 경제에 올인 한 것에 대해 여러 가지 의견이 있다. 그것을 대별(大別)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그 자신이 개인적으로 가난의 고통을 뼈저리게 체험했기 때문이다.

    둘째, 일본인보다 일본을 사랑한 조선출신 일본인이라는 꼬리표와 종북파라는 빨갱이 딱지를 떼기 위해서다.

 

    셋째, 5.16군사구테타에 의한 정통성 결여에 대한 명분확보와 영구집권의 합리적인 타당성을 대내외적으로 확보하기 위해서다.

 

 

    어찌되었든 간에 JH는 장면정권과 당시 경제협의회의 경제인들이 만든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근거로 하여 경제정책을 추진하여 절대빈곤인 보릿고개, 곧 ‘먹고사니즘’을 해결한다. 그래서 21세기의 대한민국은 민주화성숙과 IT산업 등으로 세계를 리드하는 국가로 발돋움하고 있다. 세계는 이런 한국의 부흥을 ‘한강기적’, ‘쓰레기더미 위에 핀 장미’라고 비유한다.

 

 

    당시 5.16군사정변에 대한 혐오감 때문에, 김영삼(YS), 김대중(DJ) 전 대통령은 JH정부가 추진하는 경부고속도로 건설, 철강산업, 조선산업 등에 반대했다. 인권을 등한시한 경제성장보다 민주화의 토대위에서 경제건설 하자는 취지다. 21세기 입장에서 보면 대다수 국민들이 이해할 수 없겠지만, 이것은 가치관의 차이다. ‘금강산도 식후경’(A loaf of bread is better than the song of many birds. or The belly has no eyes. or In any situation, eating comes first)라는 속담처럼‘먹고사니즘’에서 벗어난 것만이 인간의 생존의 의의냐 아니면“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고 한 밀(John Stuart Mill)처럼 정신적 삶을 우선시하느냐의 문제다. 사실 인간은 단조로우며 부조리한 삶 때문에 예술과, 문학과 종교 등의 정신적 삶을 다룬 테마에 더욱 열광한다.

 

 

                           II. 정신(민주주의)면에서 본 박정희

 

 

    대한민국은 세계가 인정하는 아시아 제1의 민주국가(full democracy category)다. 이것이 일본과의 차이점이며, 구미선진국으로부터 존경받는 이유다. 뿐만 아니라 세계인이 한류의 매력 속에 빠지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면 JH의 민주주의이념에 대해서 논해보자.

 

 

                             (1) 5.16구테타와 유신헌법제정

 

 

    JH는 두 번 쿠데타, 곧 5.16군사정변과 유신헌법제정을 강행하였다. 전자는 장면의 합법정부와 국회를 워커발로 짓밟고 헌정중단을 가져왔다. JH는 대통령으로 즉위하자 ‘반공’(反共)을 국시(國是)로 하고, 일본군국주의의 발전 모델을 모방하여 한국을 병영국가로 만들어, 일본식 민족주의를 국민들에게 심어놓는다. 그는 자력강화와 북한군의 억제력 강화를 위해 방위산업을 육성하며 향토방위군을 창설하여 자주국방의 기초를 놓지만, 전두환과 하나회를 육성하여 군대의 생명인 상명하복(上命下服)을 무너뜨려, 하극상(下剋上)울 당연시하는 풍조를 만든다. 그래서 하나회회원들은 JH빽만 믿고 하나회회원이 아닌 상사를 우습게 여기고 무시한다. 이것은 JH가 군대를 사유화해 자기 심복을 심어두고 군사구테타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일종의 마키아벨리(Niccolò Machiavelli)사상의 변종이다. YS정부가 들어서자마자 하나회는 된서리 맞고, 건강하며 정상적인 국민군대로 거듭난다.

 

 

    JH의 서거 후에 체육관 대통령 전두환이 탄생하고, 고려시대의 무신정권시대(1170-1270)처럼 30년의 영남출신 군인시대(박정희 18년, 전두환 7년, 노태우 5년)가 개막(開幕)되니, 국민들은 국가와 군사문화라면 치를 떤다. 결국 이것은 종북파가 활개 치는 마당을 제공하는 구실을 한다.

 

 

    미국은 이와는 달리 사회곳곳에 군사문화가 자리 잡고 있으며, 나라를 위해 희생한 장병들에 대한 존경과 경의는 대단하다. 미국엔 6.25전쟁과 베트남전쟁 때 희생당한 장병들을 위한 묘지가 있다. 오스트레일리아도 미국처럼 건강한 군사문화가 도처에 피어있다. 어느 공원이라도 한복판에 전몰자 추모탑(희생한 사람의 이름과 함께 참전한 나라, 전사한 날짜, 나이, 계급 등을 새겨 놓았음)이 있고, 그 추모탑 중앙에 헌화대가 있으며, 그 위에 “우리가 잊지 않게 하소서”(Lest we forget)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이처럼 국가를 수호한 참전용사가 있기에 평화가 존재한다는 철학을 가진 미국이나 오스트레일리아처럼 참전용사가 사회구성원으로부터 존경받는 사회는 안전하고 평화로운 나라다. 대한민국에선 5.16구테타로 인한 헌정질서파괴로 강대국의 조건에 필수불가결한 요소인 군사문화가 부정적인 요소로 자리 잡고 있다. 게다가 국민들의 법감정에 악영향을 미쳐, 법을 준수하기보단, 법망을 빠져나거나 무시하기 일쑤며, 구미선진국에선 통용되지 않는 짝퉁 좌우파개념으로 모든 것을 재단하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JH는 경제개발착수금이 없어서 케네디(John Fitzgerald Kennedy) 미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시 차관지원을 요구하지만, 케네디(Kennedy)는 JH정부를 , 군사정변으로 들어선 정권이라며 매몰차게 차관지원요청을 거절한다. JH는 낙담하며 귀국한다. 번민의 나날을 보내던 중 JH에게 한줄기 희망의 서광이 비춘다. 서독정부에서 상업차관 3000만 달러를 빌려준다고 하기에 JH는 1964년 12월 서독을 방문한다. 서독정부는 차관을 지원하는 조건으로 그것에 대한 보증을 요구한다. 보증설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JH는 결국 서독에 광부 5000명과 간호사 2000명 등 인력을 수출하고, 이들이 받는 봉급을 담보로 제공해 차관을 도입해 공업화에 투자한다.

 

 

    그리고 JH정부는 베트남전파병과 중동근로자들이 벌어들인 돈으로 경제개발에 박차를 가한다. 베트남전파병을 결정할 때 JH는 고국청년들을 전쟁터로 보내 죽이는 것이 아닌가하고 많은 고민을 하였다고 한다. 그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승들에게 자문을 구했다. 그 중 한명이 천태종의 창시자이며 숙명통(과거, 현재, 미래를 앎)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상월조사(上月祖師)다. 상월조사(上月祖師)는“국가발전에 도움이 되니 어렵더라도 파병하라”는 견해를 피력한다. JH는 상월조사(上月祖師)의 말을 듣고 근심을 털어낼 수 있었다고 한다.

 

 

    베트남전파병에 참여한 대가로 미국존슨(Lyndon Baines Johnson)행정부로부터 1억 6000만 달러의 차관을 지원받음은 물론 과학기술원(KIST)설립까지 이끌어 내어, 21세가의 선진강대국이 되는 초석을 놓는다.

 

 

                              (2) 국가권력에 의한 인권탄압

 

 

    중앙정보부가 안기부(안전기획부)와 국정원(국가정보원)으로 변천하는 가운데 대북, 대공, 테러, 국제범죄 등 국가안보와 국익수호를 저해하는 안보위협요인들을 색출하고 차단하는 일 등을 해왔지만, JH때 중앙정보부는 정권유지를 위한 권력의 하수인 노릇하는 정권안전기구였고, 이 때문에 각종 정보기관의 위협과 공작에 의한 정치가 뿌리를 내린다. 뿐만 아니라 다른 권력기관도 JH의 철권통치에 저항하는 사람들에게 물고문, 전기고문, 성고문, 폭력 등을 행해 인권유린을 강행한다. 그 당시 인권탄압이 없었다면 구미선진국의 원조를 더 받았을 텐데, JH는 민주주의가 경제성장을 가져온다는 사실에 대해선 무지했을 뿐만 아니라 그런 개념이 없었다.

 

 

    특히 남북한의 분단국가라는 특수한 상황과 6.25전쟁 때문에 대부분 국민들도 살인마 김일성체제를 혐오했지만, 이상하게도 박정희는 반공(反共)에 대해 노이로제 증상을 보였다. 이것은 스위스의 정신의학자이며 분석심리학의 개척자인 융(Carl Gustav Jung)의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다. 융(Carl Gustav Jung)은 어떤 사람이 자신의 정신적 내용을 의식하지 못하고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투여하는 행위를 투사(Projection)라고 한다. 이때 자신은 다른 사람 속에서 그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어두운 면, 열등한 면을 보기 때문에 강렬한 적개심을 느끼게 된다. 그림자는 인격의 어두운 면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려고 하기보다는 타인에게 투사시켜 타인을 비난함으로써 자신은 그렇지 않다고 안심한다. 이처럼 JH는 자신이 한 때 종북파인 빨갱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그림자를 타인에게 투사시킴으로써 그것에 벗어나려고 했음은 물론 용공조작도 서슴없이 자행했다. 빨갱이로 낙인찍힌 사람과 그 가족은 한을 품고 살아야 했다.

 

 

    다음의 일화는 JH가 빨갱이라는 꼬리표를 떼어내려고 얼마나 발버둥 쳤는가를 보여준다. 이것은 올해 5.16을 맞이하면서 김종필(JP) 전 총리기 조선일보와 가진 인터뷰내용이다.

 

 

    JP는 6·25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자신조차 박정희 대통령을 사상적으로 좌익이 아닌가 하고 의심했었다고 털어놓았다. JP는 "6.25가 터지자 그가 빨갱이라면 한강을 넘지 않을 것이고, 아니라면 한강을 넘을 것으로 생각했다"며 "한강 너머 수원으로 후퇴한 육군본부에서 박정희 소령을 본 순간 '아니었다' 하고 안도했다"고 했다.

 

 

    기자가 JP에게 “5.16 성공 뒤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을 왜 박정희 소장이 아닌 장도영 참모총장이 맡게 했습니까”하고 묻자, JP는 다음과 같이 답변한다.“박정희 대통령이 그렇게 하라고 그랬어. 나는 반대했지만.‘아니 장도영 장군이 무슨 관계가 있는데 그가 혁명위원회 의장을 맡느냐’고 하니까 박 소장이 눈을 감고 한참 있더니 ‘임자도 알잖아. 육군 참모총장 아닌가’ 그러는 거야. 그 한마디 속에 깊은 한이 섞여 있는 걸 알았어. 박 대통령이 마치 ‘나를 빨갱이로 모는 놈들이 있으니까 내가 지도자가 되면 혁명이 안 될지도 모른다. 현역 참모총장이면 국민이 믿어줄 것 아니가’… 그런 소리는 안 했지만, 그렇게 알아들었지. 차 한 잔 마시고 ‘네 알겠습니다’ 그랬어.”

 

 

    1960년 4.19혁명 후 내각제 정부의 제4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가 1961년 5.16군사정변으로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해위(海葦) 윤보선은 5.16으로 금지된 정치활동이 재개되자 당시 현직 대통령 JH를 ‘군부 좌익 프락치에서 여순반란 관련자’로 몰면서 사상 논쟁을 전개했다. 이는 5.16구테타로 해위(海葦)가 청와대를 떠나자, 입성한 쿠테타군들의 제 일성이 “이봐, 위스키 있어?”였으며 곧 이어 잔디들판에 멍석을 깔게 하고 술판을 벌였음을 보고 5.16구테타에 대해 회의를 가졌기 때문이다.

 

 

                                  (3) 12채의 안가

 

 

    JH는 무법불법의 타락의 상징인 12채의 안가를 지어 밀실정치를 주도하여 자신의 통치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짓밟는데 앞장섰고, 그 곳에서 수많은 여성들과의 섹스스캔들로 도덕적 타락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JH는 스트레스를 술과 여자로 풀 정도로 섹스 중독자였다고 한다. 그의 빼빼 마른 겉늙은 모습이 이를 실증한다. 그 당시 달력에 등장한 여성은 모두 JH가 불러들여 자신의 하복부를 만족시켰다고 하는 루머가 한반도를 뜨겁게 달구었다.

 

 

    12채의 안가는 JH를 이어, 그의 이복동생인 전두환, 노태우 정부 때까지 존재하다가, 김영삼(YS) 전 대통령이 안가를 헐고 공원을 만들어 시민에게 바쳤다. 이것이 안가를 이용해 인권탄압으로 국민을 휘어잡지 않으면 정권자체가 흔들리고, 여성과 질퍼덕하게 섹스의 향연을 벌이지 않으면 잠을 못 잘 정도로 불안한 자들과 안가 없이도 국가를 다스리며 국민을 사랑하고 존중하며 편안하게 숙면을 취한 YS를 비롯한 그 이후의 정부와의 차이점이다.

 

 

                              (4) 집무실의 대형금고

 

 

    JH는 집무실에 대형금고를 만들어 조직 폭력배처럼 재벌들로부터 쩐을 받으며 그들의 편의와 이익을 보장해주고 부정부패를 제도화했다. 한국인들은 쩐에 약하다는 것을 간파한 JH는 격려금을 통해서 반대자들을 회유하거나 경쟁자를 마음대로 요리했고, 똘마니들을 키웠다. JH의 통치자금이 바로 정경유착이요, 재벌성장과 중소기업몰락의 상징이다. 이것은 또한 21세기에서도 국가지도층의 부정부패의 부조리가 끊이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다행히 YS가 JH에서 시작하여 전두환과 노태우정부 때까지 존재했던 대형금고를 철거하고, 그 자리에 외국 대통령과 정상외교를 하는 장소를 만들어서, 클린턴(Bill Clinton) 미 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다고 한다. YS가 타락한 무인시대를 정리하느냐고 수고 많이 했다.

 

 

                          (5) 대통령 편집증 환자와 지역감정

 

 

    이승만 전 대통령이 3선 개헌을 해 4.19혁명으로 권좌에서 내려와 하와이로 망명한 사건을 잊을 정도로 JH는 권력에 중독된 대통령병 환자였다. 그리고 정당한 선거로 대통령에 선출될 자신이 없자, 지역감정을 일으킨 주모자였다. 71년 대통령선거시 야당후보 김대중(DJ)의 돌풍에 당혹한 JH는 국회의장인 이효상(李孝祥)을 부추겨 지역감정을 조장한다. 그래서 이국회의장은 지역주의조장효시가 된다. 그의 연설내용을 들어보자. "이 고장은 신라 천 여태껏 한 사람도 없었다. 박 후보는 신라임금의 자랑스러운 후손이다. 이제 그를 대통령으로 뽑아 이 고장 사람을 천 년만의 임금으로 모시자." "경상도 대통령을 뽑지 않으면 우리 영남인은 개밥에 도토리 신세가 된다."

 

 

    후에 YS와 DJ도 지역감정을 부추기어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지역감정은 망국병이 된다. JH는 유신을 선포하고 영구집권계획을 노골화한다. 비상조치, 긴급조치, 위수령계엄선포 등으로 언론을 재갈물리고, 영장 없이 사람을 체포하며, 저항하는 사람들을 워커로 짓밟고 탱크로 민다.

 

 

    이처럼 JH는 대통령직을 영구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인권유린을 서슴없이 감행한다. 그의 대통령직에 대한 집착은 다음과 같은 사건에서 유래한다.

 

 

    강주식의 ‘대통령 이야기’에 의하면 목소리에 권(權)이 있던 박정희는 사맹격(四孟格), 곧 제왕격(帝王格)의 사주를 타고 태어났다고 한다.

 

 

    그런데 이것은 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왕이 되기 전 점(占)을 3번 보았다는 야사기록과 흡사하다. 이성계와 JH의 사주이야기는 날조된 느낌이 든다. 그러면 이성계의 설화에 대해 살펴보자.

 

 

    첫째, 위화도회군 직전에 이성계가 역술인에게 자신이 왕이 되겠느냐고 문의하자 역술인이 이성계에게 글자를 짚어보라고 한다. 이성계가 문(問)자를 짚자, “좌로봐도 우로봐도 군왕지상이라 왕이 될 것이오.” 역술인은 머리 숙여 합장하며 예를 표한다. 미심쩍게 여긴 이성계는 거지(또는 이성계의 아우 이지란이라는 설이 있음)에게 자신의 옷을 입힌 다음 역술인을 찾아가 같은 글자를 짚게 한다. 역술인은 그 거지에게“문(門) 앞에서 입(口) 벌리고 있으니 당신은 걸인이오.”하고 풀이한다. 이성계는 옳거니 하고 풀이가 다른 이유를 묻자, 역술인은 껄껄 웃으며 말한다. “똑같은 점괘라도 사람에 따라 달라집니다. 귀공의 기상은 왕이 될 정도로 팔팔한데, 저 거지는 좋은 옷을 입었어도 얼굴색이 다 죽어 있습니다.”

 

 

    둘째, 개경으로 돌아와 한 번 더 역술인에게 갔는데 이때 역술인이 땅위에 글자를 써 보라고 하자 이성계가 흙 위에 일직선을 긋자 토상(土上) 일가(一加)하니 왕(王)자 지상이라며 왕(王)이 된다고 풀이한다.

 

 

    셋째, 이성계(李成桂)의 꿈이다. 무학대사(無學大師) 자초(自超)를 처음 만난 이성계가 "간밤에 다 쓰러져가는 집에서 지게에다가 석가래만 3개 달랑 지고 나왔소"고 말하자 무학(無學)은 장래에 왕이 될 징조이니 아무에게도 함부로 이야기 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이성계의 꿈을 해몽하면, 헌 초가집은 고려를 뜻 하는 것이고 초가집이 무너졌다는 것은 고려가 이제 망한다는 것이며, 석가래는 기초를 튼튼이 하여 다른 나라를 세운다는 뜻이고, 지게에 석가래 3개가 잇는 모양은 왕(王)이라는 의미다.

 

 

    그러면 JH의 사주팔자와 역술인에 대해서 논해보자.

 

 

    정영진의 ‘청년 박정희’(1998)는 다음과 같은 일화를 보여준다. 1941년 가을의 어느 휴일, JH는 동기생 이병주, 이상진과 함께 신경(창춘)의 구 시가지를 거닐다 길거리에서 우연히 관상을 보게 된다. JH의 얼굴을 흘깃 본 60대의 중국인 관상쟁이는 “三軍叱咤之上將(삼군질타지상장) 治天下之大頭領(치천하지대두령)”이란 붓글씨를 써주어 함께 간 친구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3군 호령의 상장에 천하를 다스릴 우두머리의 상”이란 뜻이다.

 

 

    JH와 제산(霽山) 박재현(朴宰顯)과의 만남은 JH의 운명을 결정한다. 박재현(朴宰顯)은 삼성그룹을 세운 고(故) 이병철 회장이 임직원을 뽑을 때 곁에 두고 면접을 봤을 정도로 당대를 호령했던 관상가다. JH는 1960년 1월 21일에는 군수기지 사령관으로 부산에 부임한다. 여기에서 그는 경남 함양 출신의 일등병 박재현(朴宰顯)이란 젊은이를 만난다.

 

    조용헌의 ‘사주명리학 이야기’(2002)는 두 사람의 만남을 이렇게 기술한다.“제산(박재현)은 이때 박 장군에게 특별한 운명을 예언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신은 장군에서 끝나지 않고 앞으로 제왕이 될 수 있는 운명의 소유자다. 박 장군도 자신의 운명에 대한 예언을 점쟁이 일등병의 헛소리로 흘려듣지 않고, 상당히 현실성 있는 예언으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훗날 JH는 유신(維新)을 도모하기 전에 믿을 만한 수하를 박재현(朴宰顯)에게 보내어 성공여부를 타진하게 한다. 박도사는 유신(維新)을 하면 유령(幽靈)이 된다는 점괘를 내놓고, 남산지하실로 끌려가 병신이 되어 나온다. 그러나 JH는 박도사의 예언대로 유령(幽靈)이 되어 이 세상과 이별한다.

 

 

    이와 같이 JH는 자기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대통령의 병‘을, 자기통치에 반기를 든 JP와 JP계의 사람들에게 전가시킨다. 그는 후에 DJ에게도 ’대통령병 환자‘라는 꼬리표를 붙여준다. 고정일(高正一)소설가가 집필한 ’다시 쓰는 박정희 평전-박정희(朴正熙) 31‘의 ’불굴의 혼 대통령병 환자들‘에서 JH가 융(Carl Gustav Jung)의 투사(Projection)이론을 어떻게 적용하는가를 다음과 같이 보여준다.

 

 

    1966년 1월, 당시 여당인 공화당 당의장였던 JP는 청구동 자택으로 JH를 초대해 식사를 대접한다. JP계열 중의 누군가가 JH가 한 달 전에 지시를 내린 '공무원요정출입금지조치'에 대해 이의를 달자, JH가 불쾌하게 여겨 분위기가 썰렁했다고 한다. 술 취한 JH는“ 이 집 안방 어디엔가 니폰도(日本刀)가 있을 거야. 그걸 가져와야 해.”“이거 왜 이래. 놔! 내 칼로 저 쓸개 빠진 대통령 병든 놈들 모가지를 치기 전엔 안 돌아갈 거야.”대변인 출신으로서 박정희의 최측근인 박상길이가 비서관과 함께 JH를 무사히 청와대로 모셔다 놓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돌아 나오는데, 그 때 JH가 현관문을 뛰쳐나와 고래고래 다음과 같이 소리 질렀다고 한다. “내 권총 어딨어. 나라야 어찌되든 날뛰는 그따위 대통령병 환자 놈들 다 쏴죽이기 전에는 나 잠 못 자.”

 

 

    JH는 1970년대에 들어와서 영구적인 대통령의 병적인 집착 때문에 외국정상을 한 번도 방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국내에서 구테타가 일어나 누군가 대통령직을 차지하면 자신은 귀국하지 못하고 영원히 망명객이 되는 운명에 처해지기 때문이다. 그도 유신체제의 철권통치의 인권탄압이 악하다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다.

 

 

                   (6) 친일파가 아니라 진짜 일본사람이 되길 소망한 JH

 

 

    김상수 소설 '아버지의 새벽'의 ‘일본제국주의 황군(皇軍)들’(8)에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진다.

 

 

    JH는 1940년 4월 4일 자진해서 일제가 세운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한다. 그때 그의 창씨명은 다카기 마사오(高木正雄)였고, 240명중 1등으로 졸업한다. 당시 일본어신문인 만주일보엔 이렇게 기사화 되어있다. "다카키 마사오 '영광의 얼굴', 다카키 마사오는 졸업식 날 다음과 같은 '선서'를 힘차게 낭독했다.'대동아공영권을 이룩하기 위한 성전(聖戰)에서 나는 목숨을 바쳐 사쿠라 꽃처럼 훌륭하게 피었다가 죽겠습니다.‘" 만주일보에는 JH가 손가락을 잘라서 쓴 '충성혈서'의 기사도 수록되었다. “진충보국 멸사봉공(盡忠報國 滅私奉公: 충성을 다하여 일제에 보답하고, 자신을 죽여서 일제를 받들겠습니다)”. JH는 조선사람으로 공식적으로 유일하게 '충성혈서'로 일왕에게 충성을 맹세한 자다.

 

 

    JH는 만주군관학교를 졸업하고 관례대로 우등생에게 주어지는 일본육사입학 특전의 혜택을 누리게 되면서 완전히 일본인의 이름인, 오카모토 미노루로 바꾼다. 일본대백과 사전엔 JH의 창씨명이 오카모토 미노루로 정확하게 기록돼 있다. 일제육사를 3등이란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며, 조선인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일본 육군대신상을 수상한다. 당시 일제육군사관학교 교장 나구모 쥬이치(南雲忠一)가 JH에 대해 이렇게 평가한다. "다카키 생도는 태생은 비록 조선일지 몰라도 천황폐하에 바치는 충성심이라는 점에서 그는 보통의 일본인보다 훨씬 일본인다운 데가 있다."

 

 

    JH가 서거하자 주한 일본대사관에서 근무한 어느 일본 외교관은 이렇게 말했을 정도다.“ 다카키 마사오, 박정희의 죽음은 대일본제국최후의 군인이 죽었다."

 

 

                          (7) 굴욕적인 한일회담과 일본에 대한 애착

 

 

    1965년 6월 22일 한일회담시 JH는 청구권자금에만 혈안이 돼 당시 일제군대에 강제 동원된 조선인 군속, 징용피해자 보상, 일본군위안부문제, 사할린조선인 강제억류문제, 재일교포법적지위 문제, 독도문제 등에 대해선 아무런 해결을 하지 못한다. 특히 이승만 전 대통령이 확고하게 독도를 대한민국의 영토라고 확보해놓았는데, JH정부가 어업협정과정에서 일본 측의 강력한 요구에 의해 기존의 평화선이 무력화 되고 독도인근해역이 공동어로구역으로 설정된다. 그러한 상태로 있다가 DJ정권 때 한일간 어업협정시, 독도인근해역을 중간수역으로 설정하여 독도영토주권이 훼손된다.

 

 

    이러한 JH의 일본에 대한 애착 때문에, JH가 자신의 통치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민족의 태양으로 떠받든 성웅 이순신제독을 기리는 현충사나 광화문의 동상은 완전히 일본찌꺼기로 뒤덮여 있다.

 

 

    현충사본전에 걸린 영정은 친일인명사전에 기록된 월전 장우성화백이 그렸다. 현충사입구연못은 일본교토 니조조 니모마루 연못과 흡사하고, 일본 니가타현에서 수입해온 비단잉어가 살고 있다. 정원은 일본교토 니노마루정원을 그대로 모방해, 일본정원처럼 석등까지 배치되었다. 현충사 본전 앞 금송은 일왕상징인데, JH가 1970년 12월 청와대에 있던 금송을 옮겨 심었다. 안내책자엔 이런 기록이 담겨있다.“금송은 일본의 대표적 나무로 일본무사를 상징한다고 하여 많은 식물학자의 비판을 받고 있다.”기념품 판매점에서 파는 장난감 칼은‘일본도’다. 구국성지엔 대한민국은 없고 ‘쪽발이’풍만 잔존한다.

 

 

    광화문 이순신 장군 동상의 문제점은 칼이 일본도, 갑옷은 중국갑옷, 북이 누워 있는 모습은 패전상징, 얼굴은 표준영정과 다른데, 동상을 제작한 조각가 김세중의 모습이라고 한다. 그것을 감추려고 시선을 아래로 향하게 했다.

 

 

    뿐만 아니라 전통을 자랑하는 명산대찰의 앞마당이나 연못, 독립기념관같이 민족의 얼을 기리는 역사 유적의 정원, 경복궁의 뒤뜰에 이르기까지, 일본식 조경이 넘쳐나고 있다. 빼앗긴 들엔 봄이 왔으나, 거기 조성된 공원과 나무와 연못엔 여전히 일본잔재의 삭풍이 불고 있다.

 

 

                               (8) 국민재산의 사유화

 

 

    대다수 국민들은 JH가 청렴결백한 인물로 알고 있는데, 그는 청구대학, 대구대학, 정수장학회(正修獎學會) 등을 부정축재로 몰아세워 강제로 국가에 헌납하게하고 사유화했다.

 

 

    400년 동안 9대 진사와 12대 만석꾼을 배출한 경주 최부자집의 9번째 진사이며 12대째 만석군이신 문파(汶坡) 최준(崔浚)은 "나라가 없으면 부자도 없다" 며 상해임시정부 김구선생에게 독립자금을 제공하다 그 일로 일경에 붙잡혀 고문을 당한 애국자다. 해방된 후 1947년 전재산을 투자하여 대구대학교를 설립한다. 그런데 5.16구테타로 정권을 잡은 JH의 술수로 학교운영이 어렵게 되자 최준(崔浚)은 삼성그룹의 창업자인 이병철 회장에게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학원의 설립기원(설립자는 이용익 대감이고, 2대 교주는 손병희 선생)에 대해 말하면서, 인촌이 보성학원을 맡아 고려대학교로 발전시킨 것처럼, 당신도 대구대학을 잘 운영하면 인촌처럼 대접을 받을 것이라고 당부하며 대가없이 학교를 넘긴다.

 

 

    그런데 JH는 이병철회장의 사카린밀수사건(1966년)의 빌미를 삼아 대구대학교를 강제로 인수한다. 마침 JH는 부실한 청구대학을 넘겨받아서 고심하던 차 대구대학을 청구대학에 합병시켜(1967년) 영남대학교로 개명하여 실질적 소유주가 된다(1968년). 경주 교동(校洞)69번지의 최부잣집 종가도 현재 영남대학교의 소유이다.

 

 

    그리고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가 1994년부터 2005년까지 이사장을 역임한 ‘정수장학회’(正修獎學會)에 대해 이야기 해보자. ‘정수장학회’(正修獎學會)는 장학활동을 통해 ‘인적 네트워크’을 구성하고 있다. 장학생들은 대학에 다닐 때는 ‘청오회’, 졸업 뒤에는 ‘상청회’라는 모임에 가입한다. 66년 만들어진 ‘상청회’는 교수회원만 400여명에 이르고, 김기춘한나라당 의원과 현경대전 한나라당 의원 등 정치인도 가입돼 있다.

 

 

    ‘정수장학회’(正修獎學會)의 모태는 ‘부일장학회’(釜日獎學會)다.‘부일장학회’(釜日獎學會)는 (주)삼화(三和)고무, 부산일보, 한국문화방송 등을 창업한 고 김지태(金智泰) 전 의원(2, 3대)이 1958년 설립한 재단인데, 1962년 국내재산해외도피 혐의의 무마조건으로 부일장학회’(釜日獎學會)의 땅 10만 평과 부산일보 주식 100%, 한국문화방송 주식 100%, 부산문화방송 주식 100%를 군사정권에 넘긴다.‘부일장학회’(釜日獎學會)가 인수된 뒤 닷새 후 ‘5.16장학회’로 이름이 바뀌고, 1982년 JH와 육영수 여사의 이름을 한 자씩 따 재단법인 '정수장학회'(正修獎學會)로 바뀐다.

 

 

    김지태(金智泰)는 자서전 ‘나의 이력서’(1976년)에서 강제로 헌납했다고 자신의 억울함을 하소연하고 있고, 그의 장남인 김영구 전 조선견직 회장도 자신이 장남이라 인감도장을 가지고 부산군수기지사령부 법무관실 가보니, 부친이 수갑을 찬 상태로 운영권 포기각서에 서명하고 도장을 찍었다며 당시 정황을 생생하게 전한다. 그런데 박근혜 전 대표는 여러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부일장학회의 재산 포기는 헌납이었다."고 주장한다.‘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의 발표(2005년)는 중앙정보부가 개입해 강제로 국가에 헌납하게 한 '권력의 강탈'이라고 판결한다.

 

 

                                 III. 조선시대 성군이며 계몽군주인 세종대왕과의 비교

 

 

    서양의 중세시대에 해당되는 세종통치기간동안 온전한 ‘몸’을 위한 정치가 행해졌다는 사실은 세계사적으로 유일하며, 21세기에서도 그 유일성은 계속되고 있다. 그러면 세종의 치적에 대해서 살펴보자.

 

 

    첫째, 경제계발추진

 

 

    세종은 농사법의 개량을 위해서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중국의 농서인 ‘농상집요’(農桑輯要), ‘사시찬요’(四時纂要) 등과 조선의 농서인 ‘본국경험방’(本國經驗方) 등의 농업서적을 통하여 농업기술의 계몽과 권장을 하였으며 정초가 지은 ‘농사직설’(農事直說)을 편찬, 반포하였다. 이 책의 반포는 조선시대 농업과 농업기술사에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둘째, 민본주의사상에 입각한 정치안정화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튼튼해야 나라가 평안하다는 애민정신에 입각하여 왕권과 신권이 조화를 이루는 중앙집권체제를 정비하고 정치안정에 기여한다. 전대부터 이룩된 6조 직계제를 통해 의정부(議政府)를 견제하면서 왕권의 안정을 확립한다.

 

 

    셋째, 자주국방과 국토확장

 

 

    세종은 문치(文治)만을 힘쓰지 않고 군사훈련, 화약과 화기의 제조개발, 성진(城鎭)의 수축, 봉수대(烽燧臺, 봉화대)완비, 병선의 개량, 병서의 간행 등 국방책에도 힘을 기울여 국토의 개척과 확장을 추진한다. 세종의 전술전략은 강경책과 회유책이다.

 

 

    여진(女眞)과의 관계는 무력으로 강경책을 쓰거나 회유하는 화전(和戰) 양면책을 썼는데, 최윤덕과 김종서로 하여금 여진족을 물리쳐 4군 6진을 설치하도록 하여, 압록강에서 두만강 유역까지 국경선을 확립한다. 이곳에 백성들을 옮겨 살게 하는 사민정책(徙民政策)을 실시하여 국토의 균형된 발전에 노력하였다.

 

 

    일본에 대하여도 강경책과 회유책을 함께 썼다. 1419년(세종 1)에는 이종무(李從茂) 등에게 왜구의 소굴인 쓰시마섬(대마도)를 정벌하게 하는 강경책을 써서 쓰시마 도주(島主) 소 사다모리[宗貞盛]로부터 사죄받고, 1426년 (세종 8)에 삼포(三浦)를 개항하며, 1443년(세종 25)에는 계해조약(癸亥條約)를 맺어 이들을 회유하기도 하였다.

 

 

    넷째, 과학기술의 발전과 기술 및 의약서적의 편찬

 

 

    간의대(簡儀臺)엔 혼천의(渾天儀), 혼상(渾象), 규표(圭表)와 방위(方位) 지정표(指定表)인 정방안(正方案) 등이 구비되었고, 천체관측기계인 혼천의, 시간을 측정하는 해시계와 물시계를 제작하였으며 측우기도 발명하였다. 천문, 역서의 정리와 편찬이 이루어졌고,‘향약채집월령’(鄕藥採集月令),‘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의방유취’(醫方類聚) 등의 의약서적도 편찬되었다.

 

 

    다섯째, 조선역사에 입각한 독창적인 민족문화창출

 

 

    조선지배층과 성리학자들은 사서(史書)보다 경서(經書: 유학서)를 선호한 반면, 세종은 반대로 경서(經書: 유학서)보다 사서(史書)를 중요시했다. 세종실록(7년 11월 29일)은 이렇게 기술한다. “내가 경연에서 좌전(左傳) 사기(史記) 한서(漢書) 강목(綱目) 송감(宋鑑)에 실린 고사(古事)를 물으니 모두 알지 못했다...지금 유학자(儒者)들이 경학을 닦았다고 하지만 그 이치를 궁구(窮究)하고 마음을 바르게 가진 선비(正心之士)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

 

 

    세종은 국가의 역사서를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하여 종래 춘추관(春秋館), 충주(忠州)의 두 사고(史庫)였던 것을 성주(星州), 전주(全州) 두 사고를 추가 설치하게 함으로써, 곧 4대 사고(史庫)를 확립함으로써 임란중 전주사고본이 전화(戰禍 havoc of war)를 면하고 오늘날 조선 전기의 실록이 전해질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세종은 단군사당을 따로 세워 봉사하게 하고 신라, 고구려, 백제의 시조묘를 사전(祀典)에 올려 치제(致祭)하게 하는 등 민족의 역사와 그 뿌리를 소중히 하게 여김으로써, 중국문화를 참조하되 모방하지 않고 주체성과 독창성을 가미해 찬란한 민족문화를 꽃피었다.

 

 

    여섯째, 조선음악의 발전

 

 

    세종은 국가의 의례인 오례에는 그에 합당한 음악이 따르기 때문에 음악에도 관심을 기울여 아악(雅樂)의 부흥, 악기(樂器)의 제작, 향악(鄕樂)의 창작, 정간보(井間譜)의 창안 등에서 업적을 남겼다.

 

 

    일곱째, 불교진흥정책

 

 

    1444년(세종 26)에 광평대군(廣平大君), 그 이듬해(세종 27)에 평원대군(平原大君), 1446년(세종 28)에 왕후를 연이어 잃게 됨에 따라 정신적으로 큰 타격을 입고, 세종 자신도 건강이 악화하자 1448년(세종 30)에는 모든 신하의 반대를 물리치고 궁중에 내불당(內佛堂)을 세우고, 승과제도(僧科制度)와 경행을 인정하는 등 왕실불교로 장려하여 불교 발달에도 도움을 주었다. 세종이 성리학이 국교인 시대에 불교를 용인하고 발전시켰다는 것은 다원주의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

 

 

    여덟째, 훈민정음(訓民正音)창제와 선포

 

 

    세종은 집현전 학자들의 도움으로 1443년(세종25)년에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창제하고, 3년간의 검증 기간을 거쳐 1446년 음력 9월에 반포한다. 세계의 문자 가운데 그것을 만든 사람과 반포일, 창제원리까지 알려진 것은 한글이 유일하다.

 

 

    유엔(UN)산하의 유네스코(UNESCO)가 1990년에 ‘세종대왕상’을 제정했는데, 정식 이름은 "세종대왕 문맹퇴치상"(King Sejong Literacy Prize)이다. 매년 문맹 퇴치에 커다란 공을 세우거나 성공적인 활동을 펼친 단체에게 공로상으로 수여한다. 2009년 10월 초 세계최고의 문자를 뽑는 "제1회 문자올림픽대회"에서 한글은 금메달, 그리스어는 은메달, 이탈아어는 동메달을 획득했다. 더욱이 2011년 한글은 "세계 7대 Twitter언어"로 진입했다. 그리고 조선시대정궁(正宮)경복궁은 훈민정음을 창제, 반포한 곳이므로 성지(聖地)로 만들어야한다.

 

 

    이처럼 20세기의 박대통령의 업적을 중세시대의 세종업적과 비교할 때, 비교 그 자체가 부끄러울 뿐이다. 경제의 근대화(modernization)는 이루었는가는 모르지만, 민주주의와 정신가치의 등한시로 근대성(being modern)은 이루지 못했다. YS와 DJ의 열정적인 저항과 갈망으로 온전한 민주주의는 아니지만 부분적인 민주주의는 이루어졌다. 그래도 JH의 산업화와 YS, DJ의 민주화의 성취를 합해도 세종의 업적을 따라가지 못 한다. 그래서 중세시대, 조선의 세종대왕동상이 21세기에도 광화문 한 복판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IV. 평가

 

   

    미국의 대표적 동북아 전문가인 에즈라 보겔(Ezra Feivel Vogel) 하버드대 명예교수는 2011년 5월 26일(현지시각) 뉴욕 맨해튼의 코리아소사이어티에서 열린 `박정희 시대: 한국의 변화(The Park Chung Hee Era: The Transformation of South Korea)'이란 저서와 관련한 강연에서 이렇게 박정희를 평가한다. "박정희는 전두환, 노태우 등과 달리 경제를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지에 대한 비전이 있었고, 계속해서 경제를 배워가는 비상한 능력도 지녔다" 김영삼, 김대중 등 민주화시대 대통령들과의 비교에서는 "박정희와 그들은 서로 다른 시대의 리더들"이라고 했다. 그는 "김대중 대통령은 넓은 비전을 갖고 박정희 시대에 불가능했던 진전을 이뤄냈지만 그가 1961년에 집권했다면 박정희와 같은 경제발전을 이뤄냈을지 의심스럽다"고 했다. 시대가 요구한 역할이 달랐다는 것이다.

 

 

    '중국의 부상(浮上)'(The Rise of China)이란 책을 쓸 정도로 미국의 대표적인 중국전문가인 윌리엄 오버홀트(William H. Overholt) 하버드대 케네디행정대학원 애쉬연구소 선임연구원은 2011년 5월 31일 문화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한국의 오늘은 박정희모델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고 생각한다. 미국인들은 늘 민주주의를 얘기하는데 민주주의는 극단주의적인 빈곤과 갈등이 있는 곳에서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박정희의 정치적 배경은 아주 극좌였던 것은 사실인데 중요한 것은 그가 정치적 입장이나 이데올로기에 의해 좌우되지 않고 경제가 중요하다는 입장에서 한국을 살릴 방법을 모색했다는 점이다. 그게 아시아의 모델이 된 것이다.”"덩샤오핑(登小平)은 한국의 발전전략, 즉 '박정희 모델'을 그대로 모방했다."

 

 

    JP는 5.16에 대해서 긍정과 부정의 두 가지 견해를 제시한다.

 

 

    먼저 긍정적인 그에 답변을 들어보자. JP는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5·16에 참가했던 사람으로서 평가를 한다는 것은 옳지 않아요. 다만 우리는 가지고 있는 것을 다 불사르고자 했다는 점은 말하겠습니다. 그때 우리나라엔 근대화라는 말 자체도 없었어요. 우리가 '민족중흥'과 '조국 근대화'라는 말을 처음 쓴 것입니다. 5·16은 조국 근대화의 출발점이 됐습니다. 그리고 18년 동안 근대화의 기조(基調)를 닦을 수 있었습니다. 최빈국에서 경제대국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JP는 1995년 김영삼 정부가 전두환, 노태우 신군부 세력의 ‘성공한 쿠데타’를 처벌하는 법을 만들 때 찬성했다. 그때 모기자가 “본인은 쿠데타를 했으면서 왜 다른 사람의 쿠데타를 처벌하려 하느냐”고 묻자 JP는 웃으며 “내가 해봤으니까 나쁜 줄 알지”라고 의미심장한 답변을 한다.

 

 

    2011년 5월 12일 도널드 그레그(Donald Phinney Gregg) 전 주한미국대사는 한겨례신문과의 인터뷰에서 JH에 대해 이렇게 평가한다.“경제발전이라는 ‘빛’과 독재라는 ‘그림자’를 동시에 지닌 인물”이며, “박정희의 양면성이다. 박정희의 한쪽 면이 박태준, 남덕우, 정주영, 이병철이라면, 또 다른 한쪽 면이 이후락, (로비스트) 박동선이다.”

 

 

    JH의 서거모습도 긍정과 부정의 두 가지 견해를 보여준다.

 

 

    첫째, 긍정적인 반응: 철권통치를 행했지만, 삶은 검소하며 질박(質朴 plainness)했다.

 

 

    JH의 서거시, 허름한 시계를 차고, 벗겨진 넥타이핀을 꽂고, 헤어진 혁대를 두르고 있어서 시신(屍身)을 검안한 군의관이 "꿈에도 박대통령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고 한다.

 

 

    둘째, 부정적인 반응: 궁정동의 총성은 유신의 종말이었다.

 

 

    무법불법으로 타락한 안가에서 얼굴을 식별할 수 없을 정도로 총탄세발을 맞고 비참하게 죽었기 때문에 이것은 그가 치러야 할 대가였다.

 

 

 

                                                           V. 나가는 말

 

 

    한국인은 인간의 기분이나 감정을 장기(臟器)에 비유한다.

 

 

    무서운 일을 당하면 ‘간담이 서늘해진다’거나 ‘간이 콩알만 해지다’, 정상적이지 않은 무모한 행동을 할 때 ‘간이 부었다’, 용기가 있다는 말은‘담이 크다’또는 ‘담력이 세다’라고 한다. 기회주의자를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또는 ‘간에 가 붙고 염통에 가 붙는다’고 하며, 줏대도 없고 비겁한 사람을 ‘쓸개가 빠졌다’고 한다.

 

 

    음식의 양이 너무 적어서 먹은 것 같지도 않다는 표현을 ‘간에 기별도 안 간다’고 한다.‘장이 타들어갈 만큼 불안하고 걱정스러운 심리상태를 ’애간장이 다 녹는다‘ 또는 ’애가 타다’로 표현한다. 사물에 대해 좋고 언짢음을 느끼는 기분을 비위(脾胃 spleen and stomach)로 표현한다. 남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을 ‘비위 건드리다’, 알랑거리는 것을 ‘비위맞추다’, 기분이 상하는 것을 ‘비위 상하다’, 싫은 것을 잘 견디어 내거나 뻔뻔스러운 것을 ‘비위 좋다’고 한다.

 

이처럼 몸은 단순히 신체를 의미하는 말이 아니라 육체와 정신이 결합한 인간의 전인성을 뜻한다.

 

 

    구미선진국을 비롯해 중국과 일본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근본적인 생물학적인 욕망인 ‘먹고사니즘’을 해결해주어서 JH의 지도력과 업적을 극찬하지만, 이들은 한국에서 살아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JH가 자신의 영구적인 통치를 위해 일본식 군국주의를 모방해 저지른 헌정질서유린, 인권탄압,정경유착의 부정부패고착화, 민주주의발전의 저해, 국민재산의 사유화 등에 대해선 무관심하다. 그런데 2011년 6월 9일 영국 경제일간파이낸셜 타임스(FT)는 이례적으로 JH를 “한국경제를 건설한 군사독재자”로 평가한다. JH는 온전한 ‘몸’을 위한 정치는 실패했다. 그는 이념보단 실리적인 것을 추구하는 소음인형이라 정신적 가치에 대해선 아주 무지하고 관심조차 없었다.

 

 

    그런데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JH가 추진한 ‘새마을 운동’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아이콘이 되었고, 세계의 브랜드가 되었다. ‘새마을 운동’에 대해서도 여러 의견이 있을 수 있지만, 세계가 인정하기 때문에, 우리도 JH에게 ‘근대화아버지’칭호를 수여하거나 그의 동상건립엔 반대할지라도, 그를 ‘위대한 경제대통령’으로 인정은 해야 한다.

 

 

    우리는 JH의 산업화와 YS, DJ의 민주화를 기초하여 정보혁명을 일으켜 세계를 리드하는 국가로 거듭났다. 이제 한반도가 통일되어 세계평화를 주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