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와 정의의 나라/신학 이야기

‘반미주의의 기원은 바티칸이다(10)’(윌리엄 윌버포스 중심) YouTube!!!

아우구스티누스 2020. 8. 11. 14:59

반미주의의 기원은 바티칸이다(10)’(윌리엄 윌버포스 중심)YouTube로 올렸다.

 

독자 여러분께서 구글의 검색에 함시영 목사를 기입하면 함시영 목사 관련 이미지가 나타나고, 그 위에 검색결과(함 목사 강의 분야별로 정리)를 참조하면 위의 강의를 듣고, 기독교와 천주교의 차이점은 물론 철학과 타종교와도 비교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필자가 그 동안 강의한 내용도 시청할 수 있다.

 

천주교는 인간생태세계를 말살시키는 차별금지법제정에 매달린다면, 기독교는 전 인류의 구원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런 사실을 감안하며 영국의 정치가이자 박애가이며 노예무역폐지운동의 리더(a leader of the movement to abolish the slave trade)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 1759-1833)에 대해 살펴보자.

 

1. 시대배경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 1820-1895)는 자신의 저서잉글랜드의 노동계급의 상황’(The Condition of the Working Class in England, 1845)에서 산업 혁명이란 용어를 최초로 사용하였고, 이후 아널드 J. 토인비(Arnold Joseph Toynbee, CH, 1889-1975)가 자신의 저서‘18세기 잉글랜드 산업혁명 강의’(Lectures on the Industrial Revolution of the Eighteenth Century in England, 1884)1에서 이를 보다 구체화하며, 1760-1830년에 일어난 것으로 규정한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제임스 와트(James Watt, (17361819)의 증기기관이 1776년 시연에 성공한 이후 본격적으로 상업화되면서, 영국을 세계의 공장’(the workshop of the world)으로 만들었다.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 1759-1833)생애는 산업혁명의 시기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영국의 산업혁명의 어두운 면은 무엇보다도 노예무역이다.

 

15세기 이후 아프리카에서는 크고 작은 왕국들이 등장했고, 아프리카 서해안을 중심으로 아프리카인들이 아프리카인들을 잡아먹는 시대가 도래 했다. 부족끼리의 싸움은 빈번했고, 이긴 부족은 진 부족을 노예로 삼아, 유럽인들이 오면 이들을 내어주고, 그 대가로 칼과 창 같은 무기류를 구입했다.

 

유럽인들은 아프리카의 전쟁을 이용해, 팔찌나 목걸이와 같은 장신구, 럼주(서인도제도에서 사탕수수를 원료로 만든 술로 일명 해적의 술로 일컬음), 식칼, 옷과 총기 등을 주면서 흑인 노예를 사들였다. 그리고 카리브 해와 남아메리카에서 설탕 농장에 흑인 노예를 팔고 설탕을 사들인 다음 다시 유럽으로 돌아와 설탕을 팔아 돈을 벌어들였다. 유럽, 아프리카, 신대륙 세 대륙 간의 삼각 무역’(triangular trade)이 이루어졌다.

 

포르투갈의 해외팽창정책은 해양 왕 엔리케(포르투칼어 D. Henrique O Navegador, 프랑스어 D. Henri, 이탈리아어 D. Enrico, 독일어 D. Heine Henrique, 영어 Prince Henry the Navigator1394-1460)왕자에 의해 이루어진다. 1444년에 아프리카 원주민 235명을 데려와 노예로 팔았다. 이로써 설탕 산업을 위한 노예무역의 첫 단추가 채워졌다.

 

2.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 1759-1833)의 배경

 

(1) 정치입문과 윌리엄 피트 (William Pitt, 1759-1806)

 

윌버포스는 17세인 1776,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세인트 존스 칼리지 (St John's College, Cambridge)에 입학하여, 윌리엄 피트(William Pitt the Younger, 1759-1806: 1766-1768 동안 수상을 역임한 대피트인 윌리엄 피트William Pitt the Elder, 1708-1778의 차남 소피트는 24세 때 제1차 수상 1783-1801, 45세 때 제2차 수상 1804-1806을 역임)를 사귀고, 둘의 우정은 평생 계속된다. 22세 때인 1781년에 학사학위, 29세 때인 1788년 석사학위를 받는다.

 

1780, 21세의 윌버포스는 고향 항구도시 헐(Hull)에서 하원의원에 당선되고, 친구 윌리엄 피트는 그보다 한 해 늦게 하원의원이 되더니 이듬해에는 재무장관, 다시 한 해 뒤인 1783년 가을 셜번 (Shelburne) 경의 내각이 해산되고 그 해 12월에 윌리엄 피트는 24세의 나이에 수상이 되는 동시에 윌버포스는 24세의 나이에 요크셔(Yorkshire) 지역의 하원의원으로 선출되며, 45(1825년에 건강 때문에 의원직 사퇴) 간 국회의원을 지낸다. 그는 런던 사교계에 빈번히 드나들기 시작하면서 음주와 도박을 즐기는 방탕한 생활을 한다.

 

(2) 복음주의자 백부모(伯父母) 그리고 존 뉴턴(John Newton, 1725-1807)과의 만남

 

윌버포스는 1759824일 영국의 네 번째 항구인 헐(Hull) 에서 태어났다. 윌버포스가문은 헐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베벌리에서 200년 동안 장사를 해온 유명한 무역상 집안이었다. 윌버포스의 조부(William, 1690-1774 or 1776)는 발트해연안의 국가들과 해상무역을 하면서 부를 이루었고, 18세기 초에 헐로 이사 온 후에 시장을 두 번 역임했다. 그런데 윌버포스가 겨우 8살이었을 때 그의 아버지인 로버트 윌버포스(Robert Wilberforce, 1728-1768)가 사망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윌버포스의 누이도 사망하자 어머니 엘리자베스 버드(Elizabeth Bird, 1730-1798)는 충격을 받아 더 이상 정상적인 생활을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윌버포스를 제대로 돌볼 수 없었던 엘리자베스는 9살의 윌버포스의 양육을 부유한 큰아버지 부부인 윌리엄과 한나(Hannah: 잉글랜드 은행장의 아들로, 부유한 기독교 상인으로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or Whitfield, 1714-1770와 존 뉴턴John Newton, 1725-1807 등의 후원자, 박애가인 존 손튼John Thornton, 1720-1790의 누이)에게 맡기게 되었고, 윌버포스는 백부모와 함께 살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당시 윌버포스는 백부모가 가까이 지내던 설교자 존 뉴턴을 만날 수 있었다.

 

윌버포스는 1785년에서 1786년으로 넘어가는 겨울 동안 존 뉴턴 사제가 시무하는 교회가 있는 성 메어리 울노쓰근처에 숙소를 구해 거기 머물면서 존 뉴튼에게 목회지도를 받으며,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는다. 윌버포스는 존 뉴턴 사제를 영적 멘토로 삼고 뉴턴과 피트의 조언을 듣고 정치인으로 사역한다.

 

(3) 필립 도드리지 (Philip Doddrige)의 저서

 

25세 때인 178410월 윌버포스는 어머니, 누이, 친척 몇 사람과 케임브리지 퀸즈 칼리지 교수를 지낸 아이작 밀너(Isaac Milner, 1750-1820)와 함께 에 출발한 유럽 대륙 여행 중에, 사촌누이가 갖고 있던 비국교도(nonconformist, Congregationalist)의 목사, 교육가, 찬송가 작가인 필립 도드리지(Philip Doddridge, 1702-1751)의 저서영혼에 있어서 종교의 부흥과 진보’(The Rise and Progress of Religion in the Soul, 1745)를 읽고는 자신의 방탕했던 생활을 깊이 뉘우치고, 여행 중에 윌버포스와 밀너는 헬라어 신약성경을 함께 읽고 그리스도의 메시지에 관해 서로 의 생각을 나누면서, 윌버포스는 정치를 통해 개인구원, 개인성화를 뛰어 넘어서서 노예무역폐지와 노예해방의 사회구원, 사회성화를 이루고자 결심한다.

 

3. 실천

 

28세 때인 1787년 기록한 일기의 내용대로 윌버포스는 자신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간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내 앞에 두 가지 위대한 목표를 두셨다. 하나는 노예무역을 금지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도덕적 개혁을 이루는 것이다.”(God Almighty has set before me two great objects, the suppression of the Slave Trade and the Reformation of Manners<moral values>)

 

(1) 희생과 헌신

 

사재를 털어 병원과 학교를 세우며, 왕립 동물학대 금지협회와 국립 예술 갤러리(gallery) 같은 여러 기관들을 설립하면서, 박애주의 활동에 앞장섰다. 당시 사회적 약자들은 거의 모두 윌버포스의 도움을 받았다.

 

(2) 연합

 

국가 수입의 1/3 이상을 노예무역에서 창출하던 시절, 두 번의 암살 위기 등 온갖 시련에도 불구하고 17895월 최초로 윌버포스는 친구 피터를 비롯해 뜻을 같이하는 클래펌 공동체(The Clapham Sect or Clapham Saints: 1792년에 은행가 헨리 손턴의 제의로 클래펌에 거주했던 영국의 사회개혁가들의 교회이자 공동체group of evangelical Christians, prominent, wealthy in England from about 1780 to 1840, who campaigned for the abolition of slavery and promoted missionary work at home and abroad. The group centred on the church of John Venn, rector of Clapham in south London. Its members included William Wilberforce, Henry Thornton, James Stephen, Zachary Macaulay, and others.)와 함께 영국 경제제도의 주축을 이루고 있던 노예무역폐지에 앞장선다.

 

4. 성과

 

(1) 윌버포스는 노예무역폐지의 법안을 의회에 상정하나 번번이 부결 되고, 노예무역으로부터 이득을 챙기는 사람들로부터 갖은 비난과 중상모략을 감수한다. 1807223일 드디어 영국하원에서 노예무역폐지법법안이 통과된다. 20여 년 동안 투쟁한 결과였다. 26년이 지난 1833726일 노예제도폐지 법안이 마침내 하원에서 3차 독회를 통과했다는 소식(12번째 법안 상정하여 44년 만에 이뤄낸 성과)을 윌버포스는 병상에 누워 듣고 기쁨 속에서 사흘 뒤 729일 웨스트민스터사원(Westminster Abbey) 그의 친구 윌리엄 피트 수상 가까이에 안치된다.

 

(2) 대영성경공회(The British and Foreign Bible Society, 줄여서 the Bible Society) 설립

 

윌버포스를 주축으로 윌리버스의 동료들은 1804년에 대영성경공회를 설립하고, 그 영향으로 1816년에 미국 성경 협회( American Bible Society)가 설립된다.

 

(3) 저서

 

윌버포스의 저서진정한 기독교’(1793-1797)는 당시 베스트셀러였고, 지금도 심금을 울리는 명작이다.

 

기독교는 가진 자에게 베풀라고 가르친다. 권력자에게 겸허하게 직책에 맞는 책임을 다하라고 가르친다. 겸허한 마음을 가져 부유함을 자랑하지 말며, 권력을 남용하지 말 것이다. 그러면 불평등으로 사회가 갈등을 겪는 일이 줄어든다. (......) 기독교는 또한 장차 모든 인간은 차별 없이 살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 하지만 이름뿐인 기독교는 이런 일을 실현할 수 없다. 참된 기독교만이 그럴 수 있다. 겉보기로의 기독교가 아니라, 속으로의 기독교가 그럴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런 선한 일들이 실현되고, 정치가 부패하지 않게 하려면, 참된 믿음을 배양해야만 한다.”(‘진정한 기독교에 비추어 본, 이 나라 중상류층의 자칭 기독교인들에게서 유행하는 종교체계에 대한 실천적 견해A Practical View of the Prevailing Religious System of Professed Christians in the Higher and Middle Classes of This Country Contrasted With Real Christianity‘, 줄여서진정한 기독교Real christianity’,1793-1797)

 

5. 종합

 

1833년 윌리엄 윌버포스가 자신의 온 생애를 성삼위 하나님께 바치자, 하나님은 잉글랜드에게 대영제국을 선사하신다.

 

윌버포스의 서거 4년 후, 71세 캔터베리 대주교( Archbishop of Canterbury, 1828-1848) 윌리엄 하울리(William Howley, 1766-1848)18살 처녀를 방문하여 차기 왕으로 내정됨을 알리고, 그 처녀는 그대로 무릎을 꿇고 성경을 펼친 뒤 주님, 제가 영국의 왕이 되면 당신의 말씀대로 통치하게 해주소서라고 기도한다. 윌리엄 하울리 대주교는 1837620일 빅토리아를 영국의 여왕으로 추대하고 1838628일 새 여왕의 대관식을 거행하며, 빅토리아(Queen Victoria, 재위 1837-1901, 1819-1901)시대(Victorian era/엘리자베스 1Elizabeth I, 재위 1558-1603, 1533-1603, 엘리자베스 2Elizabeth II, 재위 1952-, 1926-)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불렸던 대영 제국의 시대가 개막되고, ‘킹 제임스 성경은 전 세계를 비행하며 기독교세계관을 전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