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균의 민중론
교산 허균(蛟山 許筠 1569-1618)은 최초의 한글소설로 당시의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을 비판하고, 새로운 영웅과 이상향을 탄생시킨 혁명적 유토피아 소설인‘홍길동전’(洪吉童傳)을 집필한 저자로 유명하다. 그가 편찬한 문집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에는 그의 사상을 담고 있는 여러 편의 글이 실려있다. 학문의 목적과 진위를 논한 ‘학론’(學論)을 비롯해 군사제도를 정비하여 나라의 방비를 강화해야 한다는 국방정책을 제시한 ‘병론’(兵論)이 있으며,‘유재론’(遺才論)과 ‘호민론’(豪民論)’은 그의 정치 및 사회사상, 곧 민본과 민권사상인 신분계급의 타파 및 인재등용과 붕당배척의 이론을 잘 밝혀준다.
그는‘유재론’에서 하늘이 인재를 태어나게 함은 본래 한 시대의 쓰임을 위한 것인데, 조선정부가 인재를 버리는 것은 하늘을 거역하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그런데 조선처럼 작은 나라, 더구나 양편에 적을 둔 나라에서 서얼이라이라서 인재를 버리고 서얼어머니가 개가했다는 이유로 재능 있는 자를 등용하지 않는 것을 개탄한다. 21세기도 마찬가지다. 인구1억이상되어야 선진국에 들어간다는데, 그것의 딱 절반인구에 그 나마 뛰어난 인물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죽이는 한반도의 좁은 기질 때문에 국운이 가로막히고 있다. MB정부의 포용력있는 자세가 아쉽다. 참으로 쪼단하고 잘은 정부다.
필자는 이런 사실을 감안하면서 허균의‘호민론’에 입각해서 ‘민중론’을 다루고자 한다.
I. 허균의 시대상과 인간상
허균의 호(號)가 교산(蛟山)인데, 고향강릉의 사천진해수욕장 앞에 있는 교문암의 전설에서 유래한 `용 못 된 이무기처럼 생긴 산'에서 따왔는데, 그 스스로 자신의 호대로 운명을 온몸으로 부대끼며 살다 갔다. 그는 당대의 명문가, 초당 허엽(草堂 許曄, 1517-1580)의 3남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부친 허엽은 동인의 영수였고, 큰형인 이복형 허성은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진 뒤 남인을 대표하는 인물이었으며, 동복형인 둘째형 허봉은 아버지를 이어 동인의 우두머리이었고, 본명이 초희(楚姬)이고 호가 난설헌(蘭雪軒)인 누이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1589)은 조선시대 규중의 유일한 최고 여류시인이었다. 누이가 2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될 때 자신이 써놓은 방 한 칸 분량의 시들을 모두 태어버리라고 유언하자, 동생 허균은 이를 안따갑게 여겨 친정 집에 남겨놓고 간 누이의 시와 자신이 암송하는 시들을 모아 '난설헌집'을 펴내고, 1606년 그 시집을 조선에 온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에게 보이자, 그가 매우 경탄하며, 이를 중국에 가져가 '허난설헌집'을 발간하여서, 그의 시는 일약 중국에서 큰 인기를 끌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18세기엔 동래에 무역차 나온 일본인의 손에 의해 일본으로 전해져, 1711년 일본의 분다이야 지로(文台屋次郞)에 의해 간행되어 일본에서도 애송되었다.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은 허균집안을 이렇게 평가한다,“세 아들인 성(筬), 봉(篈), 균(筠)과 사위인 우성전(禹性傳), 김성립(金誠立)은 모두 문사로 조정에 올라 논의하여 서로의 수준을 높였기 때문에 세상에서 일컫기를 ‘허씨(許氏)가 당파의 가문 중에 가장 치성하다.'고 하였다."
허균은 어릴 때부터 글재주가 뛰어났고, `호서장서각기'(湖墅藏書閣記)에서 `만 권 책 속의 한 마리 좀벌레가 되고 싶다'고 말했을 정도로 병적으로 책을 사랑했던 `서음'(書淫)이었으며, 불교와 도교, 천주교까지 스스럼없이 섭렵하고 받아들인 성리학의 속박을 벗어난 시대의 이단아였다. 부친이 그의 나이 12세 때 돌아가시고, 연이어 둘째형과 누이가 세상을 떠나고, 임진왜란의 와중에서 아내와 첫아들마저 사별하면서 그는 정신적 충격으로 인간적 번민을 겪지만, 여섯 번 파직당하고 세 번 귀양을 갈 정도로 자유와 파격을 사랑했던 개혁가로 살다갔다. 이것은 다분히 그의 진보적 기질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II. 허균의 민중론
허균은 국가의 탄압이나 가렴주구(苛斂誅求, extortion of taxes)에 대한 백성들의 반응을 기준으로 삼아 자신의 ‘호민론’에서 “천하의 두려워할 바는 백성이다.”라고 전제한 뒤 이렇게 '민중론'을 논설한다.
"이 세상에 두려워해야 할 대상은 오직 백성뿐이다. 홍수나 화재, 호랑이나 표범보다도 더 백성을 두려워해야 하는데도, 바야흐로 윗자리에 앉은 사람들이 백성들을 업신여기면서 가혹하게 부려먹는 것은 도대체 무슨 까닭인가? 백성에는 세 부류가 있는데 그 첫째는 무릇 이루어진 일이나 더불어 기뻐하면서, 늘 보아오던 것에 얽매이며, 순순히 법이나 지키면서, 윗사람이 시키는 대로 따른 사람들이 '항민'(恒民)이다. 이들 '항민'은 두려워할 만한 존재가 아니다. 둘째, 살가죽이 벗겨지고 뼛골이 부서지도록 모질게 착취당하면서도, 집안의 수입과 땅의 소출을 다 바쳐 윗사람의 끝없는 요구에 이바지하느라 시름하고 탄식하되, 윗사람을 원망만하는 자들이 '원민'(怨民)이다. 하지만 이들 '원민'도 반드시 두려운 존재는 아니다. 셋째, '호민'(豪民)이다. 자기의 모습을 푸줏간에 숨기고 몰래 딴 마음을 품고서 세상 돌아가는 것을 엿보다가, 때를 만나면 자기의 소원을 실현하려는 사람을 말한다. 이들 '호민'이야 말로 몹시 두려워해야 할 존재이다. 이러한 '호민'은 나라가 허술해지는 틈을 엿보다가 일이 이루어질 만한 때를 노려서, 팔뚝을 걷어붙이고 밭이랑 위에서 한차례 크게 소리를 외치기라도 하면, 저 '원민'들은 그 소리만 듣고도 모여들고 함께 모의하지 않아도 외쳐댄다. 이와 더불어 '항민'들도 또한 제 살 길을 찾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호미자루, 고무래, 창자루를 들고 따라와서, 무도한 놈들을 죽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저 하늘이 임금을 세운 것은 백성을 기르게 하기 위해서였지, 한 사람으로 하여금 윗자리 에서 방자하게 눈을 부라리며 구렁이 같은 욕심을 부리도록 한 것은 아니었다......따라서 백성을 다스리는 사람은 두려워해야할 형세를 명확히 깨닫고 잘못을 바로 잡는다면 바른 다스림에 다다를 수 있다"
이처럼 허균은 순응적인‘항민’(恒民), 불만을 가지면서도 저항치 않는‘원민’(怨民) 그리고 저항적인‘호민’(豪民)으로 분류하면서, ‘항민’과 ‘원민’은 두려울 게 없지만, ‘호민’은 두려워해야 한다고 말하며, 조선엔 ‘호민’이 없다고 한탄한다. 그런데 우리가 유의(留意) 해야할 부분이 있다. 그것은 '인권탄압과 세금폭탄'을 행하는 철권통치의 정부에 대한 국민의 태도이기 때문에, 21세기의 구미선진국엔 거의 무관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구미선진국에서의 '호민'은 국가의 안정을 해치는 군상이 되고, 오히려 '항민'과 '원민'이 고귀한 시민의식을 가진 국민으로 평가받을 수 있다. 다행히도 우리나라는 경제선진강국이면서도 그 외 분야에선 개혁할 곳이 많기 때문에, 허균의 '민중론'은 여전히 효용가치가 있다.
(1) '항민'(恒民)과 '원민'(怨民)
'항민'에서 '항'은 항상 '항'(恒)이다. 글자 의미대로 '항민'은 지배층과 자기를 동일시하기 때문에 변함이 없다. 그래서 통치자가 민주주의자든 철권통치자든 상관없이 그들의 말에 온전히 복종하는 노예형인간이라 통치자가 전혀 두려워 하지 않는 벌레에 불과하다. 그런데 성서는 이렇게 권면한다. "이제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은 마치 양을 이리떼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같이 양순해야 한다"(공동번역. 마태오 10장 16절).
'원민'의 '원'은 원망할 '원'(怨)이다. 글자 의미대로 이들은 지배층으로부터 수탈을 당하면 그 횡포에 불만을 품고는 한탄만 할 뿐 저항적 행동은 하지 않고 그저 울분을 삭히기 때문에 통치자는 이들을 '항민'처럼 두려워 하지 않는다.
'항민'과 '원민'은 서로 흡사하기 때문에 구별할 수 없다. 이 두 민중을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식으로 표현하면 선악을 평가기준으로 하는 '노예도덕'(독어 Dienersmoral, 영어 slave morality)을 견지(堅持)하는 자다. '노예도덕'에 의하면 증오하는 상대에게 겁먹은 '비열'은 '겸허', 보복할 수 없는 '무력함'은 '선량', 참는 것은 '인내', 복수할 수 없는 무능력은 '관용'의 고귀한 도덕가치로 탈바꿈된다. '항민'과 '원민'은 자신들이 지배층에게 보복하지 않고 복종하는 것은 자신들이 천성적으로 선량하고 겸허하고 너그럽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착해서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힘(권력)이 없어서 복종하는 것을 순종이라고 미화한다.
이와같이 복종이 내면화된 낙타 같은 인간에겐 원한(怨恨, resentment)과 증오와 복수심의 감정만 있을 뿐이다. 이에 반해 '호민'은 위대함과 열등감을 평가기준으로 하는 '주인도덕'(독어 Herrenmoral, 영어 lord morality, master morality)을 견지한 자로서 '힘에의 의지'(독어 Der Wille zur Macht, 영어 The Will to Power)에 의해 자신의 주인이 되어, 자기에게 닥치는 위험이나 고난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힘으로 이겨내 자신을 구원한다. 모든 비참한 자, 궁핍한 자, 무력한 자, 고통받는 자, 병든 자, 추한 자 등의 비천한 자에게 동정을 갖는 것은 어느 악덕보다도 해롭다고 보기 때문에, 후에 나치즘을 옹호하는 이데올로기로 변질된다.
중국 현대문학과 현대사상의 거장인 루쉰(노신魯迅, 본명 저우수런 周樹人, 1881-1936)이 일본 센다이 의전을 다닐 때 스승에 대한 생각을 적은 '후지노 선생'이란 글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2학년 세균학 수업시간, 한 단원이 이미 끝났는데도 시간이 남으면 시사필름을 보여주곤 했다. 물론 일본이 러시아에 이기는 장면뿐이었다. 그런데 중국인이 거기에 있었다. 러시아군의 스파이라 하여 일본군에 체포돼 총살당하는 장면이었다. 둘러싸고 구경하고 있는 사람들도 중국인들이었다. 나중에 중국에 돌아온 뒤에도 죄인들이 총살당하는 것을 태평스레 구경하는 사람들을 보았다. 그들이 술에 취한 듯 갈채를 보내지 않은 적이 있었던가!"
루쉰은 당시 그 필름을 보고 자신에게 비친 자기 동포인 중국인들의 모습이 '항민'과 '원민' 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어, 그들의 몸의 병을 고치는 것보다 마음의 병을 고치는게 더 시급하다고 생각하고, 의학도의 길을 포기하고 사상가로의 길을 간다. 루쉰은 그때부터 낡은 정치, 낡은 국민, 낡은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써 내려 간다. 마오쩌둥(毛澤東, 1893-1976)은 이렇게 말한다. “중국에서의 루쉰의 가치를 나는 중국의 첫째 가는 성인이라고 생각한다. 공쯔(孔子)는 봉건사회의 성인이지만, 루쉰은 현대중국의 성인이다.”
(2)‘호민’(豪民)
'호민'에서 '호'는 호걸 '호'(豪)이기 때문에, 지혜와 용기가 뛰어나고 기개와 풍모가 있어, 지배층의 억압과 수탈을 보면 자신이 직접 당한 것이 아니더라도 정의감에 불타 개혁의지를 행동으로 옮기는 계층이다. 이들은 부정과 부패와 사회 부조리의 심각성을 인지하면서 때를 기다렸다가 백성들을 조직 동원하여 사회 변혁을 영도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반골기질'(反骨氣質)을 가진 인물을 뜻한다. '반골'은 거꾸로 '반'(反)과 뼈 '골'(骨)로 이루어졌는데, 직역하면 '인체의 뼈가 거꾸로 솟아 있다'는 뜻이며, 의역하면 '권세나 권위에 타협하지 않고 저항하는 기골'을 이르는 말이다. 허균이 쓴 소설 '홍길동'의 주인공이 바로 '호민'으로 캐스팅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독일의 법학자 예링(Rudolf von Jhering, 1818-1892)은 초기에는 역사법학파에 속하는 로마법 학자였지만, 후기에는 법의 사회적 실용성을 중시한 목적법학(目的法學)을 설파한다. 그는 '권리를 위한 투쟁'(Der Kampf ums Recht)이라는 저서에서 "법의 목적은 평화이며, 그것을 위한 수단은 투쟁"이라고 선언한다. 법은 평화를 위해서 존재하며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투쟁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구미선진국은 헌법이나 법을 잘 준수하는 민족이라고 알고 있다. 예링의 주장은 이런 견해를 반박한다.
'신데렐라'(Cinderella, 1950)는 프랑스 작가 샤를 페로(Charles Perrault, 1628~1720)가 구전되는 설화를 모아 정리한 단편집 '교훈이 담긴 옛날 이야기와 꽁트'에 처음 실렸다. 원래의 제목은 '성드리용 또는 작은 유리신'(Cendrillon ou la petite pantoufle de verre)이었는데, 영어로 번역이 되면서 '성드리용'(Cendrillon)이 '신데렐라'(Cinderella)가 되었다고 한다. '신데렐라'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유리구두'인데, 이는 번역상의 오류로 일어난 일이라고 한다. 사실은 '유리신'(pantoufle de verre)'이 아니라 ‘가죽신'(pantoufle de vair)이었는데, 이것이 영어로 번역되면서 'verre'(유리)와 'vair'(가죽)이 헛갈려 유리(glass) 구두가 되었고, 그 이미지가 너무나 뛰어나 나중에 다시 출간된 프랑스어 원작조차도 '유리구두'로 바뀌었다고 한다. 그리고 1950년 미국의 만화영화 제작자 디즈니(Walt Disney, 1901-1966)가 '신델라'를 장편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내자, 세계적으로 유명해지기 시작한다.
'신데렐라'의 내용을 보면, '신데렐라'는 아버지재혼으로 하녀에 불과했다. 그는 성격이 못된 계모와 의붓 언니들의 등쌀에 온갖 학대를 받고 있었지만, 집에 있으라는 계모라는 말을 어기고 무도회에 나간다. 신데렐라의 저항의식이 없었다면 어떻게 왕자를 만나 인생에서 빛을 볼 수 있었겠는가?
우리나라 역사를 통해서 '호민'상을 찾아보자.
매월당 김시습(金時習, 1435 ~ 1493)은 신동(神童)으로 유명했었지만, 시대의 불운으로 과거 낙방 후 21세 때 삼각산 중흥사에서 학문에 몰두하는 중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 소식을 듣고 책을 다 불태워 버린 후 방랑길에 오른다. 방랑길 오른 1년 후 22세나이로, 단종 복위운동에 가담해 처형당한 사육신(死六臣)의 시신을 위험을 무릅쓰고 현재 서울 동작구 노량진동(鷺梁津洞)에 옮겨 묻는다. 저항의 상징, 이런 위대한 인물이 21세기 대한민국지도층을 향하여 사자후(獅子吼)를 토한다. "임금이 왕위에 올라 부리는 것은 '민서'(民庶: 민중)뿐이다. 민심이 돌아와 따르면 만세토록 군주가 될 수 있으나, 민심이 떠나서 흩어지면 하루 저녁도 기다리지 못해서 필부(匹夫)가 되고 만다. 군주와 필부의 사이는 머리카락의 차이로 서로 격해 있을 뿐이니 조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창름(倉廩: 곳집, a rice granary)과 부고(府庫: 재물 창고)는 백성의 몸이요, 의상과 관(冠: 모자)과 신발은 백성의 가죽이요, 주식(酒食)과 음선(飮膳: 음식물)은 백성의 기름이요, 궁실(宮室: 궁전안에 있는 방)과 거마(車馬)는 백성의 힘이요, 공부(貢賦: 세금)와 기용(器用: 물건)은 백성들의 피다. 백성이 10분의 1을 내서 위에다 바치는 이유는 원후(元后: 군주)로 하여금 그 총명을 써서 나라를 다스리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임금이 음식을 받게 되면 백성들도 나와 같은 음식을 먹는가를 생각하고, 옷을 입게 되면 백성들도 나와 같은 옷을 입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율곡(栗谷) 이이(李珥)는 일찌기 '언로개색흥망소계'(言路開塞興亡所係)라고 역설했다. 곧 언로(言路)가 열리느냐 닫히느냐에 따라 국가의 흥망이 달려 있다는 의미다. 이 말은 고금동서(古今東西)에 통하는 진리이자, 지배층이 싫어하는 진리다. ㅎㅎㅎ. 21세기 대한민국은 일제시다바리노릇하는데 앞장서며 같은 동포인 조선인을 짓밟으면서도 참회하지 않음은 물론 해방후에도 일제꼬봉노릇하는 철권통치의 나팔수역할에 목숨을 걸며 지금의 부와 번영을 이룩한 어용단체인 언론과 국민을 사랑하고 국익을 위해 노력하는 뉴미디어와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다행히도 뉴미디어가 대승을 할 것 같다.
일제강점기에 비탄에 빠진 조선백성을 언어로 끌어올림으로써 한국 현대시의 이정표를 세운 민족주의 시인 이상화(李相和, 1901-1943)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는 1926년'개벽'(開闢) 6월호에 발표하였지만, 폐간의 계기가 된 대표적인 저항시다. 제목과 첫 연 첫 행의 구절이 매우 함축성 있게 일제하의 민족적 울분과 저항, 그리고 조국에 대한 애정을 말해주고 있다.
지난 3년간 유대인 커뮤니트를 설득해 올해 8.15부터 유대인 커뮤니트의 심장부인 뉴욕 홀로코스트센터에서 일본군 위안부(일본에 의한 성노예, military sexual slavery by Japan) 추모 전시회를 열어 일제의 잔학상을 알리고 있다. 그것은 미국도 일제의 성폭력과 성타락을 인정했다는 뜻이다. 그래서인지 올 8월 30일 헌법재판소는 재판관 6(위헌) 대 3(각하) 의견으로 한국정부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방치한 것은 위헌이라고 판결했다.“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배상청구권을 놓고 한일양국 간에 분쟁이 있는데도 정부가 한일협정이 규정한 절차에 따라 해결하지 않아 기본권을 침해했다”
그런데 일본 정부는 “한일회담을 통해 1965년 체결한‘한일협정’으로 모든 청구권은 소멸돼 책임이 없다”고 주장해 왔다. 하지만 한일협정에는 ‘양국 간에 이 협정을 둘러싸고 분쟁이 일어났을 때 외교상의 경로를 통해 해결하고, 해결이 안 되면 중재위원회의 결정에 따른다’는 조항이 있다. 한국정부는 일본정부와 껄끄러운 관계를 만들지 않으려 사실상 외면해 왔다. 이런 노예형 MB정부 태도 때문에, 대한민국엔 일제의 성적 탄압은 합법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는 정신나간 일본시다바리들이 너무 많이 존재한다. 뿐만 아니라 독도도 일본영토라고 주장한다. 더위 먹은 인간들 때문에 한반도는 더욱 열받고 있다. 다행히 초겨울이 다가와 그 열을 식히고 있는 중이다.
이렇듯 노예제의 폐지, 여성참정권허용, 신앙의 자유, 신체부자유자들을 위한 복지문제 등과 같은 위대한 업적들은 수세기에 걸쳐서 계속된 저항과 투쟁을 통해 쟁취되었다.
III. 나가는 말
21세기 대한민국도 허균시대에 일어났던 동잏한 현상이 비일비재(非一非再 frequent occurrence)하게 재현된다. 통풍이 되지 않으면 그 곳엔 곰팡이가 쓰는데, 바람 같은 건설적인 비판을 하는 '호민'이 나타나면 그 사람을 키워서 부정과 부패와 부조리를 제거하려고 하기 보단 죽이려고 모든 힘을 쏟는다. MB정부는 그것에 앞장 서고 있다.
그래서 21세기 뉴미디어의 등장은 대한민국의 축복이다. 이는 뉴미디어가 한국인들에게 저항과 비판정신을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 니체(Nietzsche Friedrich Wilhelm, 1844-1900)는 '아침놀'(Morgenroethe)에서 이렇게 선언한다. "허물을 벗지 않는 뱀은 죽고만다. 사고의 신진대사가 필요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루가의 복음서 13장 32절에서 로마제국에 빌붙어 권력을 유지하면서 백성들 앞에서는 폭군노릇을 하고, 세례 요한을 죽인 부도덕한 인간, 굴이나 또 땅 속에 살면서 주위를 뱅뱅 돌며 농사를 망치고 특히 포도원에 포도송이를 따먹고 파괴하는 여우처럼 당신을 죽이려고 작전을 펴는 사악한 지도자인 Herod Antipas를 '여우'라고 저항하셨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마태오의 복음서 23장에서 위선자들을 다음과 같이 책망하셨다.
"23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아, 너희 같은 위선자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에 대해서는 십분의 일을 바치라는 율법을 지키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 같은 아주 중요한 율법은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십분의 일세를 바치는 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겠지만 정의와 자비와 신의도 실천해야 하지 않겠느냐? 24이 눈먼 인도자들아, 하루살이는 걸러내면서 낙타는 그대로 삼키는 것이 바로 너희들이다. 25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아, 너희 같은 위선자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잔과 접시의 겉만은 깨끗이 닦아놓지만 그 속에는 착취와 탐욕이 가득 차 있다. 26이 눈먼 바리사이파 사람들아, 먼저 잔 속을 깨끗이 닦아라. 그래야 겉도 깨끗해질 것이다. 27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아, 너희 같은 위선자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겉은 그럴싸해 보이지만 그 속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썩은 것이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다. 28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옳은 사람처럼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 차 있다. 29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아, 너희 같은 위선자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예언자들의 무덤을 단장하고 성자들의 기념비를 장식해 놓고는 30우리가 조상들 시대에 살았더라면 조상들이 예언자들을 죽이는 데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고 떠들어댄다. 31이것은 너희가 예언자를 죽인 사람들의 후손이라는 것을 스스로 실토하는 것이다. 32그러니 너희 조상들이 시작한 일을 마저 하여라. 33이 뱀 같은 자들아, 독사의 족속들아! 너희가 지옥의 형벌을 어떻게 피하랴?“(공동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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