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교의 관계철학
그리스도교하느님은 유대교하느님, 곧 일자(一者, 唯一 新論 monotheism)가 아니다. 그리스도교하느님은 삼위(三位), 곧 성부하느님, 성자 예수 그리스도, 성령하느님께서 한 몸 됨(一體)이다(요한17:5). 성삼위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회의하시고, 결정하셨다는 사실이 이것을 입증한다(창세기1:26). 그리스도교하느님은 바로 사회적인 관계 속에 있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그리스도교는 하느님의 사회적 관계를 반영한다. 이런 관계유비(analogia relationis)는 하느님과 인간의 사귐, 인간과 인간의 사귐, 인간과 자연과의 사귐의 사회적인 관계유비(analogia relationis)다.
필자는 창세기3:7-13, 17-18을 통해서 그리스도교의 관계철학에 대해서 상고하고자 한다. 필자가 창세기3장을 택한 이유는 창세기3장이 인류의 원초적인 고향을 보여주고 있고, 서양의 문학, 예술, 철학 등에서 테마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인류가 오늘날 방황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원초적 고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이제 그 원초적 고향의 모습을 관찰해보자. 성서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가 협력하여 출판한 공동번역을 사용하며, 신의 성호는 ‘하느님’으로 통일한다.
“7그러자 두 사람은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알몸인 것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앞을 가렸다. 8날이 저물어 선들바람이 불 때 야훼 하느님께서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는 야훼 하느님 눈에 뜨이지 않게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 9야훼 하느님께서 아담을 부르셨다. ‘너 어디 있느냐?’ 10아담이 대답하였다. ‘당신께서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듣고 알몸을 드러내기가 두려워 숨었습니다.’11‘네가 알몸이라고 누가 일러주더냐? 내가 따먹지 말라고 일러둔 나무 열매를 네가 따먹었구나!’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12아담은 핑계를 대었다. ‘당신께서 저에게 짝지어 주신 여자가 그 나무에서 열매를 따주기에 먹었을 따름입니다.’13야훼 하느님께서 여자에게 물으셨다. ‘어쩌다가 이런 일을 했느냐?’ 여자도 핑계를 대었다. ‘뱀에게 속아서 따먹었습니다.’ (공동번역 창세기3:7-13)
“17그리고 아담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아내의 말에 넘어가 따먹지 말라고 내가 일찍이 일러둔 나무 열매를 따먹었으니, 땅 또한 너 때문에 저주를 받으리라. 너는 죽도록 고생해야 먹고 살리라. 18들에서 나는 곡식을 먹어야 할 터인데,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리라.”(공동번역 창세기3:17-18)
후기 인상파와 상징주의 유파의 대표적인 프랑스 화가인 폴 고갱(Paul Gaugin, 1848-1903)에게는 세상 어느 것과 바꿀 수 없는 사랑스러운 딸이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알린(Aline, 1877–1897)이었다. 그녀는 21세 젊은 나이에 이승을 버리고 저승을 택했다. 딸의 죽음은 고갱에게 무척이나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비소(砒素, arsenic)를 먹고 딸을 쫓으려 했던 고갱의 자살시도는 미수에 그치고 만다. 고갱은 혼을 불사르며 한 작품에 매달려 한 달 정도의 짧은 기간에 그의 대표작을 완성한다. 그 때가 1897년이다. 이 작품은 현재 보스턴에 소장되어 있다. 이 그림에는 무척이나 인상적이며 철학적인 제목이 붙어있다.“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이 질문은 어떤 고매한 종교가의 설교나 위대한 철학자의 사상보다 우리의 가슴을 저리게 한다. 창세기3:7-13, 17-18은 이에 대한 해답을 제시한다.
I. 인간을 찾으시는 하느님(창세기3:8-9)
하인리히 뵐(Heinrich Böll)의 작품 “아담 너는 어디서 있는가?”(Wo warst du Adam)를 보면 아담은“전쟁에 가 있었다“(Ich war im Krieg)라고 대답한다. 21세기의 아담과 이브 여러분은 어디에 있는가?
본문은 그리스도교(계시종교)와 자연종교(율법종교)와의 차이점에 대해서 논하고 있다.
그리스도교는 하느님께서 범죄 한 인간을 찾으시지만 자연종교는 인간이 신을 추구한다. 철학에서도 이런 경향을 찾아 볼 수 있다.
마르틴 하이데거 (Martin Heidegger, 1889-1976)의 철학은 제2차 세계대전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전기철학(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존재와 시간’(Sein und Zeit, 1927)에서 인간은 실존(Existenz)의 기투(企投 Entwurf)를 통해 진리를 일으키며, 이것은 실존(Existenz)에서 존재(Sein)를 능동적으로 추구하는 실존주의(Existenzialismus)라고 역설한다. 그런데 전쟁을 통해 인간의 어리석음과 나약함을 철저히 깨닫고. 나치정권에 협력했던 자신의 과오도 변호할 겸 전기사상을 뒤엎어버린다. 후기사상(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특징은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 (Was ist Mataphysik?, 1929), '진리의 본질에 관하여‘(Vom Wesen der Wahrheit, 1943), ‘초휴머니즘’(Ueber den Humanismus, 1949) 등에서 잘 드러난다. 전기사상과는 역으로 존재(Sein)가 실존(Existenz)을 찾아가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의 전기사상은 자연종교를 상징하고, 후기사상은 그리스도교를 상징한다고 보면 된다. 그런데 그는 불가지론자(不可知論者, agnostic)다.
인도의 한 수양관에서 한 수양자가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 or Mohandas Karamchand Gandhi, 1869-1948)에게 물었다. “신을 발견하려면 어찌해야 하나요?”간디는 이렇게 대답한다. “신을 발견하려면 바닷가에 앉아서 빨대로 바닷물을 빨아올려 바다를 비우는 듯이 인내해야 합니다.”
그 때 동석했던 스탠리 존스(E. Stanley Jones 1884-1973)선교사(24세 때 미국감리교선교사로 파송 받아 인도의 최하층 계급인 불가촉천민들 가운데서 사역을 66년 동안 하고, 1928년 미국감리교총회에서 감독으로 선출되었으나 그 다음날 감독직을 사임하고 인도선교사를 자원)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하느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그분께서 나를 찾으셨습니다. 회개와 신앙을 통해 돌아서고 보니 내가 그 분의 품안에 있었습니다. 세상의 종교는 인간이 하느님을 찾아야 한다고 가르치지만, 복음은 하느님이 인간을 찾아오신다고 가르칩니다...회개하고 돌아오십시오. 그러면 당신을 찾아오실 것입니다...당신은 ‘아니요’라고 말했습니다. 이제는 ‘예’라고 말해보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하느님의 소유가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에게 다음과 같이 권면하신다.“28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 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의 영혼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 30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공동번역 마태오11:28-30).
II. 하느님께서 인간을 찾으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뱀에게는 회개 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고 곧장 형벌이 내려졌다(창세기3:14-15).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모상(형상)으로 창조하신 사람에겐 구원의 기회를 주시기 위해서 직접 인간을 찾아오신다. 최고의 결정적인 사건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이다. 일반적인 용어로 말하면 성부하느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성탄절선물이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죄인을 친히 찾아가신다.“9예수께서 자캐오를 보시며 ‘오늘 이 집은 구원을 얻었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10사람의 아들은 잃은 사람들을 찾아 구원하러 온 것이다’하고 말씀하셨다.”(공동번역 루가19:9-10).
III. 인간이 범죄 한 결과는 무엇인가?(창세기3:7-13)
(1) 지기와의 관계(창세기3:7-8): 자기로부터의 소외(격리)
세계에는 누드비치(nude beach)가 있다. 미국 라이트하우스비치(Lighthouse Beach), 캐나다 벤쿠버의 렉비치(Wreck Beach), 호주 버디비치(Birdie Beach), 프랑스의 니스비치(Nice Beach), 그리스 파라다이스비치(Paradise Beach), 브라질의 리우 데 자네이루(Rio de Janeiro Beach)등이 그것이다. 이것은 인류가 자신의 원초적인 고향에 대한 향수에 대한 상징을 보여준다. 아담과 이브는 자신들의 죄를 자각마자 자신들의 누드의 모습을 보고 자기와의 부조화(장벽, 갈등)를 느낀다. 그것이 바로 수치다. 수치는 자기상실의 모습이다. 이것이 지나치면 내성적이고 폐쇄적인 성격으로 변질되고 고독과 불안과 절망에 빠진다.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existence precedes essence)고 하며 인생의 의미와 가치는 앙가주망(engagement 참여)하는데 있다고 주장한 프랑스 철학자 사르트르(Jean Paul Sartre, 1905-80)는 ‘구토’(Nausea, 1938)에서, 43세라는 젊은 나이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프랑스의 작가 알베르 까뮈(Albert Camus, 1913-1960)는 ‘시지프신화’(Le Mythe de Sisyphe, 1942, The Myth of Sisyphus)에서 이것을 삶의 ‘부조리’(the absurd)라고 선언한다.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와 쌍벽을 이루는 독일 실존주의 철학자 야스퍼스(Karl Theodor Jaspers, 1883-1969)는 이 현상을 ‘한계상황’(限界狀況, 독어 grenzsituation, 영어 boundary situation)이라고 표현한다.
공츠(孔子, BC 551-BC 479)는 ‘논어’(論語)의 이인편(里仁篇)에서 진리의 고독을 다음과 같이 드러낸다. “아침에 도를 알 수 있으면 저녁에 죽어도 한이 없겠다”(朝聞道夕死可矣)
덴마크의 소크라테스이며 실존주의의 선구자로 루터교 교회의 성인 달력에서 교사로서 11월 11일에 기념되고 있는 키르케고르(덴마크어 Sören Aabye Kierkegaard, 1813-55)는, 절망(Verzweiflung)은 '죽음에 이르는 병'(Krankheit zum Tode, 1849)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는 타자(他者)와 대치(代置)할 수 없는 자기 독자(獨自, individuality)의 실존(Exsitenz)을 외치면서, 실존(Exsitenz)이란 신 앞에 홀로선 단독자(der Éinzelne)라는 종교적 실존을 제시한다(Exsitenz ist vor Gott). 곧 실존(Exsitenz)이란 신 앞에서 참된 자신을 발견하고 실현하기 위해서 전인격적인 자아투자를 하는 개인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은 십자가 앞(coram cruce)에 선 단독자(der Éinzelne)다.
사도바울도 이렇게 실존적인 고백을 한다.“24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육체에서 나를 구해 줄 것입니까? 25고맙게도 하느님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구해 주십니다. 나는 과연 이성으로는 하느님의 법을 따르지만 육체로는 죄의 법을 따르는 인간입니다.”(공동번역 로마서7:24-25)
(2) 하느님과의 관계(창세기3:9-10): 하느님으로부터의 소외(격리)
하느님과의 부조화는 두려움으로 나타난다.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자신의 저서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 1927)에서 공포(恐怖, 독어 Furcht, 영어 fear)와 불안(不安, 독어 Angst, 영어 anxiety)의 차이점을 이렇게 표현한다.“공포는 뚜렷한 구체적 대상을 가지고 있지만 불안은 구체적 대상이 없을 뿐만 아니라 동물에게는 불안이 없고 오직 인간만이 불안을 갖는다.”
불안에는 밖에서 오는 불안과 안에서 오는 불안이 있다.
밖에서 오는 불안은 두 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다. 첫째, 전쟁과 가난 등에서 오는 사회적 불안, 생명의 불안으로서,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대표적인 것이 정규직이냐 비정규직이냐의 갈등이기 때문에 직장 내에서의 지위불안(Status Anxiety)이다. 둘째, 스페인 생(生)철학자, 문명비평가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José Ortega Y Gasset, 1883-1955)가 이 시대를 “역사의 방향 상실의 시대”라고 규정지었듯이 역사적 상황에서 오는 불안이다. 그래서 개별 국가의 장벽을 넘어서 공동의 번영과 평화와 사랑과 정의를 추구하는 지역공동체 건설이 세계 곳곳에서 활발하게 진행되거나 논의되고 있다. 그것은‘유럽연합’(European Union),‘메르코르수르’ (Mercorsur, 남아메리카), ‘아세안’ (ASEAN, Association of Southeast Asian Nations, 동남아 10개국),‘북미자유무역협정’ (NAFTA, the North America Free Trade Agreement, 미국, 캐나다, 멕시코 3국) 등이다. 사실 이것은 만주 하얼빈에서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いとうひろぶみ, 1841-1909)를 사살하고 사형당한 안중근(安重根, 1879-1910)님의 ‘동양평화론’의 복사판이다.
안에서 오는 불안은 인간의 존재 그 자체에서 오는 불안이다. 인간은 하이데거(Martin Heidegger)가 말한 바와 같이 무(無)와 죽음의 불안 때문에 두려움 속에 살아가고 있는 실존(Exsitenz)이다. 키르케고르(덴마크어 Sören Aabye Kierkegaard)는 그리스도교 차원에서 인간은 죄의 불안에 떨고 있다고 갈파한다. 1959년 3월 16일 Time의 표지에 실렸을 정도로 유명한 독일출신 미국의 대표적인 신정통주의 신학자 폴 틸리히(영어 Paul Tillich, 독어 Paul Johannes Tillich, 1886-1965)는 현대인들의 심령상태에 세 가지 회색 그림자가 따른다고 했다. 그것들은 공허감과 죄책감 그리고 공포감 및 두려움이다.
구약의 이사야예언자도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20그러나 악인들은 성난 바다 같아 가라앉을 줄을 모른다. 쓰레기와 진흙을 밀어 올리는 물결과 같다. 21그러니 악인들에게 무슨 평화가 있으랴?’ 나의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공동번역 이사야57:20-21).
그런데 사도바울은 두려움에서 해방할 수 있는 해결책을 제시한다. “이렇게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졌으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과의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공동번역 로마서5:1)
(3) 타인과의 관계(창세기3:11-13): 타인으로부터의 소외(격리)
옛날 그리스의 델포이의 아폴로 신전(the temple of Apollo at Delphi)의 하얀 대리석 벽에는 ‘네 자신을 알라’(그리스어 Gnothi Seauton, 라틴어 nosce te ipsum, 영어 know thyself)는 인생의 금언이 조각되어 있다. 아폴로신전에 새겨진 이 격언을 소크라테스(그리스어 Σωκράτης, 라틴어, 영어 Socrates, 독어 Sokrates; B. C. 470?-399?)가 인용한다. 논어(論語)‘위정편’(爲政篇)에선 이렇게 말한다.“아는 것을 아는 것이라고 말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인정하는 것이야 말로 아는 것이다”(知之謂知之不知謂不知是知也)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을 바로 아는 일이다. 나의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는 것이 인생을 바로 살고 보람 있게 사는 근본이다.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갈 것인가, 나의 나아갈 인생의 목표가 무엇이며, 나의 설자리는 어디며, 무엇에서 인생의 보람을 찾아야 하며, 어떻게 사는 것이 과연 옳게 사는 것인가?, 이런 물음에 대해서 명확한 대답을 갖는 것이 나 자신을 바로 아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유대인 철학자 마르틴 부버(히브리어 מרטין בובר, 영어 Martin Buber, 1878-1965))는 자기의 저서‘나와 너’(독어 Ich und Du 1923; 영어번역 I and Thou)에서 요한복음1장1절의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를 패러디(parody)한 문장이 등장한다. “태초에 관계가 있으니라.”(Im Anfang ist die Beziehung)(S. 25). 이 말의 의미는 그대 없이는 나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할 수 없고, 나는 당신이라는 거울을 통해서만 진정한 나를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한 때 김건모라는 가수가 불러 히트한 “핑계”가 현대인의 심정을 말해주듯이 타인과의 부조화는 정직보다는 “핑계”로 드러난다. 창세기3:12의 아담의 핑계와 창세기3:13의 하와의 핑계가 이 사실을 입증한다. 이 핑계는 바로 책임전가다.
조선의 역사상 가장 치욕스러운 사건 중 하나는 ‘삼전도 굴욕사건’이다.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조선 제16대 임금 인조(仁祖, 1595년~1649년, 재위 기간: 1623-1649)는 두 달도 못된 45일 만에 1637년 1월 30일 남한산성을 내려와 조선의 패망을 상징하는 상복을 입고 얼어붙은 한강기슭 삼전도(三田渡; 현재 서울 송파구 석촌동)에서 청나라의 칸(태종 홍타이지)을 향해 세 번 큰절하고 아홉 번 이마를 땅에 찧는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의 치욕을 당한다. 그런 후에도 환궁의 허락을 받기 위해서 무릎을 꿇고 기다린다. 그리고 인조의 세 아들 소현세자, 봉림대군, 인평대군, 척화파였던 김상헌과 3학사(오달제, 윤집, 홍익한)를 비롯한 약 60여만 명의 부녀자들은 청나라의 심양에 볼모(hostage)로 잡혀간다. 2년 후 조선의 집권세력은 청나라에 몸값을 치르고 인질 석방에 성공하고, 수만 여명의 부녀자들은 2년 후 조선으로 다시 돌아온다. 그러나 이들은 동네에서 추방당하거나 이혼당하는 등 수모와 치욕을 당하자 자살을 감행한다. 조선사내들. 특히 지배층사대부들은 책임감과 의리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무지렁이들이었다.
인조는 다음과 같이 명을 내린다. “환향녀(還鄕女)가 절개를 잃은 것은 음행 때문이 아니라 전란 탓이다. 대동강(평안도), 예성강(황해도), 한강(서울과 경기도), 소양강(강원도), 낙동강(경상도), 금강(충청도), 섬진강(전라도), 영산강(전라도) 등 전국 각지의 강(江)을 내 친히 지정하노니 도처에 흩어져 살고 있는 ‘환향녀’(還鄕女)들은 이 강물에 심신을 정결하게 씻어낼 것을 명하노라. 강물에 몸을 씻어낸 ‘환향녀’(還鄕女)들은 잃어버린 정조를 다시 되찾은 회절(回節)여인으로 간주할 것이다. 만일 회절한 ‘환향녀’(還鄕女)를 거부하는 집안은 중벌로 다스릴 것이다.”
조선의 강들은 여성의 정절을 회복하는 ‘회절강‘(回節江)이 되었지만, 조선지배층과 사대부는 일부종사(一夫從事), 부창부수(夫唱婦隨), 여필종부(女必從夫), 수절(守節) 등의 관습화된 도덕규범을 내세워 자기들의 안전과 이익을 지키기 위해, 곧 병자호란(丙子胡亂)의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해 ’환향녀‘(還鄕女)에게 사죄하기는커녕, 그들을 ’화냥년‘이란 부정한 여인으로 낙인찍어 모든 책임을 떠넘긴다.
‘환향녀’(還鄕女)가 '화냥년'으로 변질되어 멸시와 천대의 대명사가 된다. 전자는 청나라로부터 자국 여인을 보호하지 못한 조선지배층의 무능과 무책임의 통한의 어휘로 지도자를 잘못 둔 백성의 슬픔과 회한이 서린 말이자 죄 없는 여인을 두 번 죽이는 옹졸하고 비겁한 단어이고, 후자는 색정을 채우기 위해 자의(自意, one's own will)에 의해 음탐하는 사내놈들과 무분별하게 허리 돌리며 서방질하는 계집을 일컫는다.
그런데 이런 구별 없이 두 단어가 동일한 의미로 사용한다. 그래서 환향녀가 낳은 자식을 애비없는 새끼, 호로새끼, 호로자식 또는 후레자식(寡婦子)이라고 한다. 그리고 ’환향녀‘(還鄕女)들은 그 분노와 치욕을 이기지 못해 오랜만에 만난 부모 형제를 보고 통곡은커녕 자포자기 한 채 허튼 웃음을 띠었다고 해서 싱거운 실없는 여인의 웃음을 `환녀함소‘(還女含笑)라 한다. 여기에서 ’환녀‘(還女)란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전리품으로 청나라 군대인 되놈들에게 전리품으로 끌려갔던 돌아온 ’환향녀‘(還鄕女)다. 이후 여인이 싱겁게 웃으면 “웃긴! 되놈한테 업혀갔다 왔나”하고 핀잔을 당한다.
백성을 용이하게 통치하기 위해 그리고 백성을 탄압하고 수탈하기 위해 수평관계는 철저히 무시하고 수직관계, 주종관계만 강조한 조선 성리학사상은 조선지배층이 합법적이며 합리적으로 잡년들과 질퍼덕하게 섹스의 향연을 누리도록 허락하며, 그런 잡놈들을 대량생산하는 수컷 전성 시절을 태동시킨다. 오입질은 자유롭게 하면서, 자신들의 무능력으로 청나라에 잡혀갔다가 돌아온 누이와 부인은 화냥년이라고 분홍글씨를 새겨 자신들의 책임을 이들에게 전가시킨 조선사대부들은 ‘호로자식들’이었다.
그래서인지 21세기 한국여성들도 서방질(adultery)하는데 이골이 났다. 부부 간의 도리를 다한 열녀(烈女) 대신 열 받은 열녀(熱女)가 한반도를 휘젓고 있다. 발정기에만 섹스를 갈구하는 동물들과는 달리 인간은 언제나 스탠바이 상태다. 러브호텔과 룸살롱은 대한민국의 합법적이며 공공연한 타락의 장소다. 남편의 학대를 빙자한 홧김 서방질, 신분상승과 출세를 위해 자신의 몸뚱이를 바치는 상납형 서방질, 육욕에 들떠 함부로 몸을 놀리는 색정 서방질 등 다양하다. 특히 정신적이며 육체적인 노동을 싫어하여 사내들에게 자신의 몸뚱이를 팔면서 생계를 유지하는 여인들이 너무 많다. 게다가 이들은 외국으로 건너가 그 곳에서 허리놀림을 마음껏 구사하다가 사정당국에 걸려 대한민국의 국격을 떨어뜨리기까지 할 정도로 심각하다. 그래서 일제는 자신들이 저지른 전쟁 성범죄, 성폭력을 사과하지 않고, 그 당시 조선여성들이 자원한 것이라고 우긴다. 섹스를 위한 몸뚱이의 근육만큼이나 자존심을 지키는 품위있는 생각의 근육도 단련시킬 시기가 되었다.
빈번한 트이터계의 마피아스펨 때문에 짜증제대로다. “헤이, 이제 자네를 우리 마피아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겠네. 자네는 내 초대를 받아들이게”(Hey, I just added you to my Mafia family. You should accept my invitation! :) Click here). 대한민국엔 마피아라는 특권층이 있는데, 그 꼭짓점에 재벌이 있고, 그 아래의 국가권력과 언론권력 등은 재벌과 의존하며 챙겨주어 스스로 무력화를 자초(自招)한다. 뿐만 아니라 어용지식나부랭이들은 이 구조를 정당화하며 떡고물을 챙긴다. 마피아집단이 저지르는 반칙과 불공정은 능력으로 둔갑되어, 서민에겐 수난의 역사만이 존재한다. 졸부들은 서민들이 게으로고 능력이 없어서 가난하다고 오해한다. 이들은, 이익은 자기네들 몫이고, 불이익은 고스란히 국민에게 떠넘기는 책임부재, 상식부재인간형들이다. 일제시대 때 쪽발이들이 조선인들에게 했던 그대로 그 행위를 재현하고 있다. 그런데도 국정목표가 ‘정의’(Justice)다. 누구를 위한 정의인가? 그것은 강자를 위한 정의라고 한다. 그래서 트라시마코스(Thrasymachos Ho Kalkhedon)가 대한민국에 출현해 소크라테스(Socrates)를 눌렀다고 ㅎㅎㅎ 한다. 고대로마의 격언에“민중의 소리는 신의 소리”(vox populi,vox dei)라는 말이 있다. 다수의 국민을 위한 정책은 하늘과 역사의 신이 원하는 정치이지만, 소수의 특권층을 위한 정책은 악마의 정치다.
서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달콤한 엿과 욕의 결합은 1964년 공동출제 중학입시에서 연유한다. 선다형문제에 엿기름 대신 엿을 만들 수 있는 것을 질문이 있었다. 출제자는 ‘디아스타아제’를 정답으로 했는데, 보기 가운데 ‘무즙’으로도 엿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 사단(事端, origin)이 됐다. 학부모들은 법원에 제소해도 소용이 없자 무즙으로 만든 엿을 솥 째 들고 나와 ‘엿 먹어라’를 외쳤다. 결국 깁규원 당시 서울시교육감, 한상봉 차관 등이 사표를 내고 6개월이 지나 무즙을 답으로 써서 떨어진 학생38명을 정원에 관계없이 경기중학 등에 입학시켜 수습됐다. 요즈음 대한민국에‘엿 먹어라’하고 싶은 지도층인사가 차고 넘친다.
이처럼 대한민국의 지도자들은 책임을 지기보다는 회피를 잘 한다. 이러한 자세는 한일합방이라는 치욕적인 역사를 낳았다. 1975년 이장희(1947-)라는 가수가 불러서 히트한 “그건 너”라는 노래의 가사, 곧 “그건 너 그건 너 바로 너 때문이야...하면서 껄껄 웃더군”이 오천 년 역사를 잘 대변해주고 있다.
구약성서에서도 그 현상을 찾아 볼 수 있다. 이스라엘민족은 민족적 수난과 비극을 당하면 왕을 비롯해 모든 백성들이 베옷을 몸에 감고 머리에는 재를 이고 “하느님이시여, 이게 제 탓입니다. 제가 하느님 앞에 죄를 지어서 이렇게 되었습니다”라고 회개하는데 반해, 이방민족들은 전쟁에서 실패할 경우 신에게 그 책임을 돌리며 자기들이 만든 신상을 때려 부순다. 책임을 지는 민족의 종교는 세계사를 이끌어 가는 종교를 배태했지만, 핑계를 대고 책임회피에 몰두한 민족의 종교는 지상에서 사라져갔다. 그 유대교가 바로 그리스도교가 태어난 모태다. 한반도의 역사도 책임을 질 줄 아는 민족의 역사가 되어야 한다.
`메아 쿨파‘(Mea Culpa)은 라틴어로서 ‘내 탓이오’라는 뜻으로 영어로 ’my fault‘다. 가톨릭에서 사죄의 기도를 드릴 때 “메아 쿨파 메아 쿨파 메아 막시마쿨파”(Mea culpa, mea culpa. mea maxima culpa)”라고 하는데, 이 말은 “모든 것이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내 큰 탓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하며 드리는 기도문이다. 이 기도문이 한반도에서 부활하여 우리 모두가 주체적이며 책임감 있는 민족으로 거듭나야 한다.
1928년 미국의 사회학자 R. E. 파아크(R. E. Park)가 처음 사용한 언어인 주변인(周邊人, marginal man)에 대해 생각해보자.
제3세계에서 온 사람들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불법 체류자 신분이 많다. 그들을 인간으로 대우해주기 보다는 무시하고 업신여기고 학대하며 성적 수치심까지 주고 있는 고용주들이 간혹 있다. 그들은 우리가 싫어하여 기피하는 힘든 일들을 하고 있다. 무엇보다 우리말도 모르는 동남아 여인들은 한국인들과 결혼해 농촌에서 아이들을 낳고 기르고 있다. 그런데 혼혈인 가운데에 ‘아파트’의 윤수일, ‘밤이면 밤마다의’인순이,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 조연으로 뜬 헨리 킴(본명 다니엘 헤니), 모 그룹 농구감독 만이 대우를 받고 있지, 다른 혼혈인은 튀기라 불리며 인간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 더욱이 한반도는 중국의 인접 국가이면서도 화교커뮤니티가 뿌리내리지 못한 닫힌사회다. 이렇듯 인간모독의 현장을 세계인에게 제공해주는 한반도다.
미국이 세계최강국이 된 것은 여러 이유가 있지만, 그 중 하나가 다양한 민족이 섞여 살고 있다는 것이다. 다양한 사람이 함께 일하면 새로운 자극을 주고 활기를 불러일으킨다. 그 차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생긴 에너지가 활력과 역동성을 창출한다. 반대로, 동질적인 사람들만 있으면, 서로 간에 차이가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활기가 없고 정체된다.
생물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혈통의 순수성을 고집하는 동종교배(同種交配)를 반복하면 유전자결함이 생기고, 나르시스즘(Narcissism)의 자폐적 성향 때문에 타자(他者)와의 공존을 거부하며 ‘닫힌 사회’을 지향하고, 특히 외부환경에 대해 잘 적응하지 못해 결국에는 종(種, species)이 사멸한다. 그러나 이종교배(異種交配)로 태어난 잡종은 수정(受精) 단계에서부터 이질적 요소들이 갈등투쟁 하는 가운데 수용과 융합의 과정을 거치면서 상생(相生)의 지혜를 터득해나감은 물론 환경변화에도 잘 적응하여 ‘열린 사회’를 지향하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임으로서 발전한다. 그래서 근친상간을 금하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단일민족, 백의민족이라는 인식아래 연줄의 문화, 끼리끼리의 패거리문화를 지향하는데, 이를 거부해야 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허(許)씨의 시조로 알려져 있는 허황옥(許黃玉, 33-189)은 인도 아유타국(阿踰陀國)의 공주로, A. D. 48년 7월에 불교의 승려인 오빠 장유화상(長遊和尙, 다른 이름은 寶玉仙人) 및 수행원들과 배를 타고 가락국(또는 金官伽倻)에 와서, 가락국의 시조 수로왕(首露王, ?-199)의 부인이 되어, 거등왕을 비롯해 10명의 왕자와 1명의 공주를 낳고, 왕자 2명에게 허씨 성을 쓰게 해달라고 수로왕에게 간청하여 수로왕의 동의를 얻어 2명의 왕자는 허씨 성을 쓰게 되었고, 한반도의 허씨 성이 유래된다. 왕비는 김해김씨(金海金氏), 김해허씨(金海許氏)의 시조모, 허황후(許皇后) 또는 보주태후(普州太后)라고 불린다.
보탑실리공주 (寶塔實里公主)라고도 불리는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 보르지긴 보타슈리(魯國大長公主 孛兒只斤 寶塔實里, ?-1365)는 고려 공민왕(恭愍王, 1330-1374, 재위 1351-1374)의 왕비다. 노국공주(魯國公主)는 중국 원 순종(元 順宗, 추존)의 손자인 위왕(魏王) 베이르 테무르(魏王 孛羅 帖木兒)의 딸이다. 1349년(충정왕 1) 원(元)나라에서 공민왕(恭愍王)과 결혼하여, 1351년 12월 공민왕(恭愍王)과 함께 귀국하고, 공민왕(恭愍王)은 그 달에 즉위한다. 1365년(공민왕 14) 왕비는 난산(難産) 끝에 죽는데 왕비가 죽은 뒤 공민왕(恭愍王)은 정사(政事)를 돌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친히 왕비의 진영(眞影)을 그려 벽에 걸고 밤낮으로 바라보면서 울며 그리워했다고 한다.
허황옥(許黃玉)과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 두 사람은 국제결혼과 다문화사회의 선구자다. 우리는 서로 공존하는 다문화를 창출하여 상생의 ‘열린사회’로 나아가야한다.
대한민국은 출산율이 세계에서 제일 낮은 국가에 속한다. 선진국이 되려면 인구 1억 이상이 되어야 한다고 한다. 그래서 남북통일은 필수적이고, 미국처럼 제3세계의 인재들을 불러들여야함은 물론 국내에서 일하고 있는 외국인 근로자들에 대한 그릇된 편견을 버리고, 이들 가운데 국익에 도움 되는 사람은 대한민국의 국적을 제공해야 한다. 우리는 닫힌 사회의 특징인 국수주의적 태도를 버리고 열린 사회, 개방의 한반도를 지향해야한다. 그러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제3세계에 대한 대외 원조도 국가적 위상에 걸맞게 규모를 늘리고, 외국인들이 한반도에 이민 와 자신들의 꿈을 실현시키고 싶다는 희망에 부응하는 관대하며 풍요롭고 번영하는 나라, 사랑과 정의와 평화와 평등이 살아있는 위대한 한반도로 변해야 한다.
(4) 자연과의 관계(창3:17-18): 자연으로부터의 소외(격리)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는 자신의 시 ‘자연’에서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소외된 현상을 이렇게 노래한다. “자연은 끊임없이 우리에게/자기에 대해 말해주지만/인간은 자연의 비밀을 알지 못한다./인간은 자연의 품에 살면서도 자연의 이방인이다.”
서구 정통주의 신학계에서는 창세기1:26의 ‘다스리다’(히브리어 rahdah, 영어 to rule, to rein, to have dominion)와 창1:28의 ‘정복하다’(히브리어 kahbash, 영어 to subdue)의 단어에 근거하여, 인간에게 절대적이고 무제한적으로 자연에 대한 지배권이 있는 것으로 해석해면서, 자연을 정복하고 탈취하며 이용해와, 자연에 대해 탈마귀화, 탈신화화, 비신격화 그리고 비신성화를 가져다주었다. 그런데 이런 서구신학은 생태계에 심각한 재난을 끼치고, 그러한 사상은 근대 서구의 제국주의적 지배 이데올로기 사상으로 둔갑되어 아프리카와 아시아에게 엄청난 희생을 요구했다. 이 때 등장하는 단어가 폭력, 파괴, 압제, 예속, 노예착취, 죽임 등 같은 부정적인 언어다.
자연에 대한 성서적 관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 중심적이나 생명 중심적 또는 우주중심주의나 자연중심주의가 아니라 하느님중심주의다. 그 이유는 두 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다. 첫째, 자연이 하느님에 의해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둘째, 생명나무가 에덴동산중앙에 있었던 사실은 인간 본성의 초점이 하느님과의 교제를 지향하게 되어 있었음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지향하여 결정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생명을 택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금단의 나무를 두신 이유는 인간을 시험하기 위함이 아니라 인간이 사단의 유혹을 물리치고 하느님을 향한 자유로운 결단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함이며, 하느님의 계명 안에서 인간이 에덴동산을 관리하고 보호하여 자유를 사용해야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아담과 이브는 선악과를 따먹고, 뱀의 간계의 말대로 하느님의 모습으로 변화된 자신들을 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홀랑 벗은, 죄 된 자신들을 보며, 자신들의 죄 때문에 자연이 저주를 받는다는 심판의 선언을 듣는다.
21세기 자연의 모습은 어떠한가? 인간과 자연과의 부조화로 말미암아 생태계의 위기가 일어나고 있다. 이런 현상을 예상하고 구약시대에 안식일이 주어진다. 안식일의 목적은 하느님의 창조를 기억케 하고(창세기2:23; 출애굽기20:8-11), 하느님의 구원을 기념케 하기 위한 것(신명기5:12-15)이지만, 안식일은 인간을 위해서만 제정된 것이 아니라 생명 있는 동식물 그리고 땅을 위해서 제정되었다. 그 안식일을 기초하여 안식년과 희년이 제정된다. 이 사상을 오늘날 적용한다면 생태계의 회복에 많은 유익을 가져다 줄 것이다.
자연도 해방을 갈구하고 있다. 성서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19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의 자녀가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20피조물이 제 구실을 못하게 된 것은 제 본의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렇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희망이 있습니다. 21곧 피조물에게도 멸망의 사슬에서 풀려나서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스러운 자유에 참여할 날이 올 것입니다. 22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오늘날까지 다 함께 신음하며 진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23피조물만이 아니라 성령을 하느님의 첫 선물로 받은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날과 우리의 몸이 해방될 날을 고대하면서 속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공동번역 로마서8:19-23).
자연은 인간과 함께 하느님을 찬양하는 성가대원(이사야43:20-21; 44:23; 49:13)이며, 인간과 함께 심판을 받는 공동체요, 심판의 동지다(창세기6:13; 이사야51:3; 예레미야7:20; 에스겔14:21; 36:34-35). 뿐만 아니라 노아의 언약(창세기6:17-22; 8:20-22; 9:11-17)은 ‘생태학적 언약’(ecological covenant), 만물보존의 언약, 범세계적인 우주적인 언약이다. 만물을 창조하시고 하느님께서 내리신 ‘보기에 좋으시다’라는 평가는 심미적, 존재론적, 목적론적 가치판단을 상징한다.
독일 고백교회의 목사이자 신학자이며 반(反)나치스운동을 펼쳐, 히틀러 암살계획이 실패하자 1943년 게슈타포에게 체포되어 강제수용소에서 처형당한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는 자신의 저서 ‘창조, 타락, 유혹’(문희석 역.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81)에서 이렇게 말한다. “인간이 하느님을 잃으면 필연적으로 다른 하나도 잃게 된다. 하느님이 없고 형제가 없으면 인간은 대지를 잃는다. 그러나 인간은 대지에 대한 통치권을 감상적으로 두려워하다가 하느님과 형제를 상실해버렸다. 하느님과 형제와 대지는 모두 하느님께 속한 것이다. 그러나 한 번 땅을 상실한 자에게는, 한 가운데 살고 있는 우리 인간에게는 하느님과 형제에게로 가는 길 외에는 대지를 향해 들어갈 수 있는 다른 길은 전혀 없다. 인간이 대지를 향하여 가는 길은 실로 근원에서부터 하느님이 인간에게로 오는 길로서만 가능한 것이다. 하느님과 형제가 인간에게로 오는 곳에서만 인간은 대지로 돌아가는 길을 찾을 수 있다. 하느님과 타인을 위하여 자유롭게 되는 것과 세계에 대한 인간의 통치권에서 인간이 피조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은 최초의 인간이 지닌 하느님의 모습이다.”(p. 56).
이렇듯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구원은 인간구원만이 아니라 자연을 포함한 우주적 구원을 말한다.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는 공생적이고 상호의존적인 관계다. 그래서 우리는 독일출신유대계미국 생태철학자 한스 요나스(Hans Jonas, 1903-1993)의 '책임윤리'(독어 Ethik der Verantwortung, 영어 responsibility ethics)를 고민할 때가 되었다. 그는 인간 중심의 전통윤리학을 벗어나 새로운 생태윤리학으로 가야한다고 주장하며, 생명공학에 대한 철학적 비판을 처음으로 시도한다(He was one of the first philosophers to concern himself with ethical questions in biological science). 그는 첨단과학기술과 기술의 산업화가 삶의 터전인 생태계를 황폐화하고, 생명체의 생존을 위협하고, 자연생명을 조작하는 상황에서, 본격적으로 ‘책임’(독어 Verantwortung, 영어 responsibility)을 철학의 주제로 삼는다.
지금까지 살펴본 사실에서 우리는 다양한 신약사상을 간파할 수 있다.
첫째, 자기와의 관계, 자기로부터의 소외(격리)(창3:7-8)만 강조하면 그것은 심리학에 불과하며 정신병원이나 상담학 분야에서도 다루고 있다.
요즈음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교제에서 우러나온 사랑과 섬김의 철학보다는 적극적인 사고방식의 자기암시가 신앙으로 변질되어 타인을 지배함으로써 자기로부터의 소외를 해결하고자 한다. 그것은 그리스도교 사상이 아니라 지난 세기 때 유행했던 구미열강의 제국주의의 특징인 정복지배아래 약탈 및 착취하는 인생관이다.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 프랑스 그리고 영국 등 서유럽국가가 아시아나 아프리카를 이방민족 또는 열등민족으로 취급하며 복음전파라는 명목으로 선교사를 이용하여 식민지로 삼았던 역사가 이를 입증한다. 태평양 시대를 맞이한 지금도 미국이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또는 문화적으로 세계국가를 종속시키는데 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쟁도 불사하면서까지 자국과 자국민의 소외의식을 해결하고자 무던히 애쓰고 있음을 우리는 처절히 느끼고 있다.
둘째,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하느님으로부터의 소외(격리)(창세기3:9-10)만 강조하면 문화나 과학이나 사회 문제에 대해 무지한 신앙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사상은 초대교회의 교부 테르툴리아누스(라틴어 Quintus Septimius Florens Tertullianus, 영어 Turtulian, 155?-230?) 계통의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는 자기 저서를 통해 이렇게 주장한다.
“철학자들과 이단 사상가들은 모두 동일한 주제를 논의하면서, 이와 관련된 똑같은 주장들을 펴고 있다. 가엾은 아리스토텔레스여! 저들에게 변증법을 가르쳐서 저들로 하여금 헤치고 부수는 일에 참피온이 되게 한 자가 바로 당신이었군요...아테네와 예루살렘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아카데미와 교회 사이에 무슨 일치가 있는가? 이교도와 그리스도인과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는가?...내가 살피기로 사람이 원하기만 하면, 스토아적 기독교, 플라톤적 기독교, 그리고 변증법적 기독교도 나올 수 있지만 이미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제는 이 문제에 관하여는 더 이상 알아 볼 것도, 조사해볼 일도 없는 도다“(이단 규정론 제 7장).
”철학자와 그리스도인사이에 무슨 공통점이 있으며 그리스의 제자와 하늘의 제자 사이에, 명예를 위하여 일하는 자와 구원을 위하여 일하는 자 사이에...진리를 도둑질하는 자와 진리를 보존하는 자와 사이에 무슨 공통점이 있는가“(변증론 P. 46).
"철학자들은 이교도의 족장들이며 플라톤은 그들의 두목이다”(영혼론 P. 3).
이러한 신학사상은 로마서12:1-2절의 세대를 변혁시키는 명제나 로마서13:1-7절에 나타난 국가관에서 살펴볼 때 그릇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 취할 태도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과 성서를 통해 문화나 과학 또는 사회문제를 적극적으로 변혁시키거나 해결해야 한다.
셋째, 타인과의 관계, 타인으로부터의 소외(격리)(창3:11-13)만 강조하면 피안이 없는 현세주의와 윤리적인 세계질서만 강조하는 문화적 그리스도교가 된다. 초월적인 가치가 무시됨으로써 그리스교의 계시가 인간의 사상에 불과하다는 사상이 대두된다.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는 ‘순수이성의 범위에서의 종교'(Die Religion innerhalb der Grenzen der blossen Vernunft, Phb 45, 7, 1961)에서 예수는 우리 인간이 실현해야 할 “선한 원리가 인격화된 관념”(the personified idea of the good principle)(S. 63)이라고 주장한다. 예수는 도덕적 이상의 구현이요 도덕적 이념의 모범사례, 곧 인간의 원형(the archetype)이라는 것이다.
슐라이어마허(Friedrich Ernst Daniel Schleiermacher, 1768-834)는 ‘그리스도교 신앙’(Der Christliche Glaube II)에서 "원형(Urbild)이라는 것만이...그리스도의 인격적 가치에 대한 적절한 표현“(S. 35)이라고 한다.
리츨(Albrecht Benjamin Ritschl, 1822-1889)은 '그리스도교칭의와 화해교리‘(Der Christliche Lehre der Rechtfertinug und Versöhung III)에서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완전한 계시자이시며 세상에 대한 영적지배의 원형(Urbild)“이시며(S. 367), "하느님나라를 세상 가운데에 건설하시는 분”(S. 391)이시라고 평가한다.
야스퍼스(Karl Jaspers; 1883-1969)는 '대철인들‘(Die großen Philosophen I)에서 예수님은 소크라테스와 붓다와 공자 등과 마찬가지로 표준적인 인간(die massgebende Menschen)(S. 206, 219)이라고 주장한다.
틸리히(Paul Tillich; 1886-1965)는 자신의 저서 ‘조직신학(Systematische Theologie II)에서 예수님은 본질과 실존의 피안에 계신 하느님자신이 아니라, 실존의 상황 속에서 하느님과 완전히 하나가 되신 분이라고 언급한다.
그런데 이 사상은 십자가와 부활이 빠진 곧, 복음이 없는 사회 복음주의나 민중신학 아니면 해방신학(여성해방신학, 흑인해방신학 등) 또는 정치신학 등의 화려한 인본주의 신학사상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 사실 이런 신학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에 입각한 신학이라기보다는 인권운동에 기초한 신학이라 할 수 있다.
넷째, 자연과의 관계, 자연으로부터의 소외(격리)(창3:17-18) 강조하면 요즈음 인류가 관심을 보이고 있는 생태계 신학에 불과하다. 미국 생태계여성철학자 캐롤린 머천트(Carolyn Merchant, 1936)는 여성의 억압과 자연의 억압은 쌍둥이 억압이라고 주장한다. 미국 진보여성철학자이며 신학자인 메어리 데일리(Mary Daly, 1928-2010)도 생태학적인 문제의 근본원인은 가부장주의에 있으며 환경의 파괴와 여성의 억압문제는 분리될 수 없다고 본다. 한결같이 이들은 세계를 하나님의 몸으로 보고 우주가 하느님의 자궁으로부터 나왔다고 본다.
첫째와 셋째 그리고 넷째는 다른 분야에서도 전문적으로 다루고 있다. 곧 그것들은 일반은총의 영역에서 충분히 취급될 수 있는 문제다. 그러나 구원은 전 우주적 구원을 의미하기 때문에 정통신학사상의 입장은 모두 강조하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관점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IV. 나가는 말
그리스도교는 라오츠(老子)의 생태계사상이나 불교의 공사상(空思想) 또는 유교의 인간의 관계 맺기 기술과는 다르다. 그리스도교는 수직적 대신관계, 수평적 대인관계, 순환적 대물관계를 강조한다. 사물의 존재를 다른 사물과의 상호의존성이라는 수평적 관계에서만 파악하는 라오츠(老子)사상이나 불교의 화엄사상 또는 유교의 관계철학과는 달리 수평적 관계를 넘어 모든 존재자의 존재를 가능케 하는 하느님이 계신다고 믿는다. 그래서 라오츠(老子)의 ‘도’(道)나 불교의 ‘공’(空) 또는 유교의 ‘역사의 신’은 하느님을 대신 할 수 없다.
그리스도교는 또한 개인의 회심을 통해 복음을 받아들이는 개인구원, 그리스도인 각자가 사회구조악을 근절시켜 정의 위에 기초한 평화와 번영, 행복과 희망의 사회를 이루는 사회구원, 수질오염, 대기오염, 토양오염, 방사능오염 등으로 파괴되어가는 생태계를 회복하는 생태계구원을 총망라한 전인적인 우주적인 구원을 지향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개인은 물론 이웃, 사회, 국가, 세계, 자연과의 관계에서 하느님나라를 실현해야 한다.
성서는 총체적 우주적 구원에 대해서 이렇게 묘사한다.
“6늑대가 새끼 양과 어울리고 표범이 숫염소와 함께 뒹굴며 새끼 사자와 송아지가 함께 풀을 뜯으리니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7암소와 곰이 친구가 되어 그 새끼들이 함께 뒹굴고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으리라. 8젖먹이가 살무사의 굴에서 장난하고 젖뗀 어린아기가 독사의 굴에 겁 없이 손을 넣으리라. 9나의 거룩한 산 어디를 가나 서로 해치거나 죽이는 일이 다시는 없으리라. 바다에 물이 넘실거리듯 땅에는 야훼를 아는 지식이 차고 넘치리라.”(이사야 1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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