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와 정의의 나라/신학 이야기

윤이상은 간첩인가 아니면 원조 블랙리스트 희생자인가???

아우구스티누스 2017. 9. 18. 11:32

한반도가 낳은 세계적인 작곡가 윤이상(尹伊桑, 1917-1995)은 과연 간첩인가 아니면 원조 블랙리스트 희생자인가? 필자는 객관적으로 윤이상에 대해 비평하니까 독자여러분이 판단하기 바란다.

 

1. 대한민국

 

(1) 1963년 윤이상은 강서고분 사신도를 보기 위해, 또 어릴 적 친구 최상한(북한에서 조선국립교향악단의 콘트라베이스 단원으로 활동하고 있었음)을 만나보고 싶어 처음으로 평양을 방문한 후 1967년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강제소환 되어, 고문 끝에 대규모 간첩단 사건인 동백림(동베를린)사건’(당시 중앙정보부가 예술인, 유학생, 교수, 의사, 공무원 등 194명이 동베를린에서 대남 적화활동을 했다고 판단)의 핵심으로 지목돼 1심 무기징역, 2심 징역 15, 최종 징역 10년을 선고 받고 수감되어 1969225일 대통령 특사로 석방된다.

 

(2)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 윤이상이는 자신이 작곡한 오페라 심청이 성공적으로 공연되자, 대한민국에서 공연하고 싶다고 박 정부에게 의견을 제시해 허락을 받았는데, 1973DJ납치 사건이 터지자 윤이상은 동백림 사건의 악몽이 되살아나 남쪽 방문을 포기한다.

 

(3) 1212주역인 전두환 정권이 윤이상을 수차례 초청하지만, 윤이상은 그 제안을 거부한다.

 

(4) 2007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가 동백림사건의 조사를 거쳐 박정희 정권이 정치적 목적을 위해 대규모 간첩사건으로 사건의 외연과 범죄사실을 확대, 과장했으므로 정부는 관련자들에게 사과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5) 비평

 

반공을 국시로 삼은 박정희 전 대통령은 김일성세습독재수령체제의 추종자인 윤이상을 스파이로 수감했다가 특사로 석방했는데, 이에 대해 매우 의문부호가 붙는다. 빨갱이었던 박 전 대통령이 자신에게 주홍글씨 새겨진 빨갱이신분에서 벗어나기 위해 윤이상을 희생자로 삼았는가? 그리고 후에 박 전 대통령은 왜 윤이상을 초청하려고 했을까? 게다가 박 전 대통령의 사생아인 전두환 정권도 왜 윤이상의 초청에 열을 올렸을까?

 

2. 김일성세습독재수령체제

 

(1) 1971년 추방된 윤이상은 이듬해 독일 국적을 취득한다. 1979년 김일성은 윤이상을 평양으로 초대한다. 김일성은 우리나라의 예술을 해외에 알리는 재간둥이라고 칭찬하면서 음악연구소를 만들어 북쪽의 음악계를 위해서 일해 달라고 부탁한다. 그 뒤로 윤이상은 1년에 한두 차례씩, 한 달 정도 평양에 머물면서 윤이상관현악단 단원들에게 음악교육을 시킨다.

 

(2) 김일성은 윤이상을 극찬한다.

 

1)‘김일성 교시집’(2000)

 

내가 윤이상을 아껴야 한다는 것은 음악계에 그런 재간있는 사람을 보기 드물기 때문이다

 

2) ‘음악연구’(2000)

 

그는 우리 민족의 귀중한 재산이고 재간둥이다


3. 독일

 

(1) 1972년 독일은 빨갱이짓거리하다가(?) 추방당한 윤이상에게 독일국적을 허락하는 동시에윤이상 세계 학회를 발족시켰으며, 그의 사후 베를린시에서 인류에 명예로운 유산을 남긴 인물들을 위해 만든 가토우지역 특별묘지에 안장했다.

 

(2) 1987년 독일연방공화국에서 윤이상에게 대공로 훈장을 수여했다.

 

(3) 독일 출신 클라리넷 여제 자비네 마이어의 칭송

 

윤이상의 음악은 모차르트의 음악처럼 50, 100년 후에도 연주될 것이다

 

4. 평가

 

(1) 윤이상은 범민련(조국통일범민족연합) 공동의장직 등을 역임했다.

 

(2) 오길남 박사는 서독에서 마르크스 경제학을 공부하면서 유신정권에 저항하며, 1974년 서독 유학생을 중심으로 결성된 친북반한단체에 가입해 활동한 후 자연스럽게 친북성향의 지식인들과 가깝게 지낸다. 43세 때인 1985년에 독일 브레멘 대학교에서 '마르크스 노동가치설과 생산가격 이론의 재구성'이라는 논문으로 경제학 박사를 취득한 후 오 박사는 강의할 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방황하자, 작곡가 윤이상, 재독학자 송두율, 김종한 등이 찾아와 당신의 지식을 북한에 가서 활용하라는 제의를 한다. 동년 12월 오 박사는 교수직제의와 아픈 부인에게 최상의 진료를 보장하겠다는 약속을 믿고 가족(부인과 두 딸)과 함께 월북한다. 북한에서 경제학 교수가 아니라 한민전 산하 칠보산연락소에서 근무하며 대남흑색선전 담당 공작원이 된다.

 

198611월 초, 오 박사는 서독으로 다시 가 한국 유학생 2명을 유인해 월북하라는 지령을 받으면서, 자신이 속은 줄 깨닫고 오씨는 덴마크 코펜하겐 카스트로트공항 입국 심사대에서 공항 직원에게 구조요청 메모를 전달해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한다.

 

오 박사는 그 후 5년 동안 독일에 거주하면서 작곡가 윤이상을 만나 북한에 있는 가족을 송환해 달라고 간청하지만, 윤이상은 북한에 있는 오 박사 부인이 쓴 편지를 건네주는 동시에 부인과 두 딸의 육성이 녹음된 테이프 한 개와 가족사진 여섯 장을 주며 당신은 미제 간첩이다. 은혜를 베풀어 준 김일성 주석을 배반했으므로 가족을 인질로 잡아둘 수밖에 없다다시 입북해 김일성에게 충성을 다할 것을 강요한다. 오 박사는 19924월 독일주재 한국대사관에 출두하여 자수하고, 5월 입국한다.

 

부인 신숙자 여사와 두 딸 혜원과 규원은 오 박사의 탈출로 정치범 수용소인 함경남도 요덕 수용소 대숙지구에 감금되고, 부인은 얼마 후 요덕수용소에서 작고하고, “오씨가 가족을 버렸고 두 딸의 어머니를 죽음으로 내몰았기 때문에 이들은 오씨를 아버지로 여기지 않는다이들은 오씨를 상대하는 것을 강력히 거부했으며 더 이상 괴롭히지 말 것을 요청했다고 북한 당국은 발표한다.

 

오 박사가 저술한 잃어버린 딸들 오! 혜원 규원을 기초해 제작한 영화 출국이 지난 14일 개봉했기 때문에 그 영화를 보면 오박사 사건의 실체를 알 수 있다.

 

(3) YS 정권에서 윤이상에게 전향서만 쓰면 과거를 묻지 않고 귀국을 보장하겠다는 제의를 했으나 그는 끝내 거부했다.

 

(4) 윤이상의 고향 경남 통영시는 국비와 도비 1,480억 원을 들여 윤이상 음악당 건립을 추진하다 480억 원 규모로 축소했다. 200911월에 경남도와 통영시는 매년 가을에 열었던 경남 국제음악 콩쿠르윤이상 콩쿠르로 개칭하여 개최했다.

 

(5) 루이제 린저와의 대담 상처입은 용의 모국어판(1988) 서문에서 윤이상은 이렇게 고해성사한다.

 

정치 이데올로기는 길게 보면 활엽수처럼 계절에 따라 무성하고, 착색되고, 낙엽이 지는 것이지만, 민족은 창공처럼 엄숙하고 영원한 것이다

 

(6) 독일정부와 세계음악가들은 윤이상을 빨갱이로 보지 않고 위대한 음악가로 인식한다.

 

(7) 윤이상의 조국은 대한민국과 북한, 곧 한반도였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