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덤 스미스(Adam Smith, 1723-1790)의 ‘국부론’(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이 경제의 법칙, 아이작 뉴턴(Isaac Newton, 1642 or 43-1727)의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 Philosophiae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의‘만유인력의 법칙’(Law of universal gravitation)이 자연의 법칙, 제임스 와트(James Watt, 1736-1819)의 증기기관이 산업혁명의 법칙을 제시하듯, 덕(moral)은 또한 마음의 행위를 제시한다.
지난 211년 하버드대학교 마이클 샌델(Michael J. Sandel)교수가 집필한 '정의란 무엇인가‘(Justice: What's the Right Thing to Do?), ’왜 도덕인가?‘(Why Morality?) 등으로 말미암아, 하버드대학에서만 통용되고, 미국인들에겐 인기가 없는 샌델의 '정의론'이 '샌들'(Sandal)을 신고 대한민국의 도처를 배회하고 있고, 모방송국에서 방영할 정도로 화제를 낳았다.
전 세계에서 조선왕조의 노예성리학의 수직문화사로 인한 도덕결벽증나라 한반도에서만 인기가 있다.
그런데 한반도는 실리보단 명분중심의 사회라 국익도 지키지 못하고, 부패지수는 상위국가에 속한다. 이러한 자가당착(自家撞着 self-contradiction)의 실태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이런 사실을 감안하면서 ’정의‘(Justice)에 대해서 살펴보자.
I. 정의의 의미
샌델교수는 정의란 미덕을 키우고 공동선을 고민하는 것, 곧 정의는 공
정하고(fair) 좋은 것(good)이라고 한다. 이러한 개념은 너무 추상적이라 마음에 와 닿지 않는다.
조선시대의 성리학은 정의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정의, 곧‘의’(義)란 이익(利)과 상대되는 의미를 뜻한다.
조선왕조는 이익(利)보다는 올바름(義)을 중요시해서 실리주의의 경제적 이익을 배제하고, 정의로운 삶을 추구하는 명분사회를 추구해 가난의 질곡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일제가 식민통치를 위해 분석한 “조선인의 사상과 성격”에서, 조선지배층은 생활능력은 제로이지만, 생존능력은 탁월한 민족이라고 폄훼할 정도다.
정의로운 삶이란 승리(勝利)의 삶을 의미한다.
승리란 단어의 한자는 이길 ‘승’(勝)과 이로울 ‘이’(利)로 구성되어 있으며, 승리란 곧 이익이라는 욕망을 정의의 이성으로 이기는 것을 의미한다. 개인의 이익을 저버리고 타인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삶이 정의다.
그런데 이러한 삶이 가능한가? 그렇지 않음을 초등학교학생들도 안다. 그래서 필자는 정의가 절대적으로 적용되는 곳과 상대적으로 적용되는 곳으로 구분하여 말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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