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와 정의의 나라/신학 이야기

‘좌-우파’역사성과 정체성!(7)

아우구스티누스 2014. 11. 13. 12:26

(3) ‘매카시즘’(McCarthyism)과 ’네카시즘‘(Necarthxism)

 

1950-1954년에 미국을 휩쓴 반(反)공산주의 ‘매카시즘’(McCarthyism) 선풍이 있었다.

 

미국 공화당 상원의원 깡패적인 극우보수정치가 매카시(Joseph R. McCarthy, 1908-1957)의 이름에서 유래한다. 그는 경력위조, 상대방에 대한 명예훼손, 로비스트로부터의 금품 수수, 음주추태 등으로 재선에 자신이 없자 자신의 정치적 조언자로부터 귀가 번쩍 뜨일 말을 듣는다. 그것은 ‘반공‘이란 단어다.

 

1950년 2월 그는 "미국 내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암약하고 있으며, 자신은 그 명단을 갖고 있다."고 뻥깐다. 제32대 미 대통령 루즈벨트의 뉴딜정책’(New Deal Policy)과 제34대 미 부통령을 지낸 제33대 미 대통령 트루먼(Harry S. Truman, 1884-1972, 재위 1945-53)의 사회복지정책인‘페어딜 정책’(Fair Deal)등도 매카시즘의 광풍에서 벗어나지 못할 정도였는데, 매카시가 미국육군을 공산주의자, 간첩이라고 비난하자, 제 34대 미 대통령 아이젠하워((Dwight David Eisenhower, 1890-1969, 재위 1953-1961)는 크게 분노하며 군과 장교들에게 매카시에 대한 논박을 허락해, 매카시는 추락한다.

 

이렇듯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나 정적을 논리적인 이론이나 근거 없이 빨갱이로 몰아 탄압하는 반공의 정치적 상품화를 ‘매카시즘‘이라고 한다.

 

21세기엔 네티즌(netizen)과 매카시(McCarhy) 가 결합한 단어인 ’네카시즘‘(Necarthxism), 곧‘인터넷 마녀사냥’이 심각하다. 관련 없는 사람을 무고하게 단죄하는데 미국의 ‘매카시즘'선풍이 재현되는 듯 한 인상을 준다.

 

그러면 ‘매카시즘’과 ’네카시즘‘이 생성된 배경에 대해서 고찰해보자.

 

먼저 우남(雩南) 이승만(李承晩, 1875-1965, 재위 1948-1960) 전 대통령과 죽산(竹山) 조봉암(曺奉岩1899-1959)과의 관계에 대해서 살펴보자.

 

죽산은 1919년 3ㆍ1운동 이후 독립운동과 조선공산당원으로 활동하다 1946년 공산당을 탈당하고 전향해 1948년에는 제헌국회의원이 된다. 우남은 농지개혁을 이루기 위해서는 지주가 중심인 한민당의 저항을 뚫고, 좌파의 공세도 차단하고, 농민의 지지도 확보하는 1석3조를 위해서 과거 공산주의자였던 조봉암 같은 인물이 필요해 죽산을 정권의 초대농림부장관으로 임명한다. 그 효과는 6·25 때 농민들이 인민군에 호응하지 않았던 점으로도 입증된다.

 

죽산은 1950년에 제2대 국회의원에 재선돼 국회부의장에 선출되었으나 바로 한국전쟁이 발발한다. 1952년 직접선거로 이뤄진 제2대 대통령에 출마해 당시로서는 금기라고 할 수 있던 평화통일을 주요공약으로 내세워, 반공의 기치를 높이 들고 북진통일론을 외치는 자유당 우남에게 찍힌다. 1956년 제3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하지만 다시 낙선한다. 

1957년 진보당을 창당하고 위원장에 선임되었으며, 1958년 5월 국회의원선거에 지역구후보를 내세워 원내에 진출한다.

 

우남은 죽산을 초대농림부장관으로 임명해 농지개혁을 단행해 경제체제의 기반을 다졌지만, 이젠 죽산이 자신과 자유당의 장기집권에 거추장스러운 인물이 되자 경찰-육군특무대-검찰을 이용해 그를 간첩죄, 국가보안법 위반 및 무기불법소지로 기소하게하고 사법부로 하여금 살인죄를 적용해 사형시킨다.

 

우남은 간첩을 초대농림부장관으로 임명했기 때문에, 자신은 간첩의 괴수라는 자가당착(自家撞着, self-contradiction)에 빠지지만, 그런 논리에 개의(介意, caring about)치 않는 타고난 마키아벨리사상가요 실천가다.

 

이런 기질이 미국 및 일본과의 외교관계에서 한반도의 이익을 극대화하는데 유감없이 발휘되기 때문에 꼭 나쁘다고 할 수 없다. 국제정치란 다 그렇기 때문이다. 사실 한반도엔 국내보다 국제정치를 위해 선악의 이원론을 따르는 노예도덕주의자보다 힘의 강약에 입각한 주인도덕을 추구하는 마키아벨리의 정치가가 필요하다.

 

그러면 우남의 마키아벨리사상의 또 하나의 실례를 살펴보자.

 

우남은 미국에서 편안히 지낸 사이비애국자, 대통령병에 걸린 환자라고 혹평 받아왔다. 그가 귀국해서보니 국내정치기반이 없고, 더욱이 쩐조차 없자 친일파지주와 일제고위관료을 지냈던 매국노들을 자신의 지지기반으로 삼으려고‘반민족행위조사특별위원회’를 해산시킨다.

 

물론 여기에는 미군정의 입김도 있었다.

 

미국은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 1882)을 휴지조각처럼 버리고, 그 대신 일제의 한반도 식민지배를 용인한 '가쓰라-태프트 밀약'(The Katsura-Taft Agreement, 1905)을 근거하여 한반도를 희생시키고 일본을 통해 아시아정책을 수립했는데, 한반도에서 자꾸 친일파제거라고 떠드니 못 마땅했다. 왜냐하면 미국은 자신의 과오를 정당화하려 했음은 물론 친일파가 바로 일본사람과 동일해 자신들이 다루기 편했기 때문이다.

 

친일파는 우남과 미군정의 환대에 환호하고 일왕숭배에 앞장 선 것처럼 반공에 앞장선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도식이 성립된다.

 

"반공=친일파, 일제시다바리=종미파, 미국 스파이"

 

죽산이 간첩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사형 당하자 전제주의자 살인마 김일성은 죽산을 자신들의 편으로 해석하고, 죽산의 시신은 망우리에 묻혀있는데, 북한의 애국열사릉에 죽산의 가묘를 만들고, 노동당이 발간한 책들은 죽산을 위대한 애국자로 칭송하며, 진보당은 북한의 대남공작 역사의 중요한 한 페이지였다고 평가한다. 그래서 한반도에선 죽산을 빨갱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즐비하다.

 

그런데 죽산은 사형당하기전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긴다.

 

"나에게 죄가 있다면 많은 사람이 고루 잘 살 수 있는 정치운동을 한 것밖에 없다. 나는 이 박사와 싸우다 졌으니 승자로부터 패자가 이렇게 죽음을 당하는 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다만 내 죽음이 헛되지 않고 이 나라의 민주발전에 도움이 되기 바랄 뿐이다."

 

죽산의 유언도, 정치는 선악의 이분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힘의 강약의 마키아벨리사상에 의한 것임을 보여준다.

 

권력에 의한 사법살인을 저지른 우남은 결국 죽산사후인 아홉 달 후 대통령직에서 물러나 하와이로 망명길에 오른다.

 

이것이 민주주의가 확고히 뿌리내리지 못한 50년대 대한민국의 정치상황이다.

 

죽산사형 집행 52년 후인 2011년 1월 20일 대법원 전원합의체(재판관 13명, 주심 박시환대법관))에서 죽산에게 적용된 간첩혐의와 국가보안법 위반 등은 무죄이고, 1959년 내려졌던 사형 판결은 잘못된 것이라고 하며 죽산신원을 복권시킨다.

 

둘째, 박정희(朴正熙 , 1917-1979, 재위 1963-1979) 전 대통령에 대해 살펴보자.

 

박정희 전 대통령이 바늘이라면 김종필 전 총리는 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둘의 만남은 이렇다. 1949년 5월 육사 8기로 졸업한 15명의 신임소위들이 박정희가 일하는 육군본부 정보국 전투정보과에 배속된다. 1951년 김종필은 박정희의 셋째 형 빨갱이 박상희(朴相熙)의 큰 딸 박영옥(당시 구미초등학교교사)과 결혼한다. 그래서 박정희와 김종필은 혈연관계로 발전한다.

 

빨갱이 황태성은 박상희 친구로서, 박상희와 조귀분(김종필 장모)의 중매를 선다. 박상희와 황태성은 1946년 10월 대구 좌파시위에 적극 가담한다. 황태성은 선봉에 서서 군중을 선동하는 연설을 하고, 박상희는 경찰의 집중사격을 받고 사망한다. 황태성은 이북으로 도망가 북한 무역상 부상을 지내다, 1963년 12월 14일 사형집행을 당하고, 동년 12월 17일 박정희는 제5대 대통령에 취임한다.

 

박정희의 정치 자금 조달책임자 김성곤은 1946년 10월 대구 좌파시위 때 인민위원회재정부장을 역임했던 빨갱이다.

 

1948년 11월 11일 소령 박정희는 남로당프락치로 체포된다. 사형당하지 않으려고 3천명에 달하는 군내 남로당 명단을 군 수사기관에 넘겨줄 뿐만 아니라 군내 남로당의 조직 표까지 그려서 제출한다. 동거녀 이현란은 빨갱이가 싫어서 남한으로 피난 왔는데, 자신이 그토록 저주하던 빨갱이와 한방에서 뒹구는 자신의 모습이 서러워서 도망간다.

 

박정희는 대통령이 되자 자신의 콤플렉스, 곧 악질친일파, 빨갱이, 쿠데타로 인한 헌정유린 및 법질서 파괴자, 장기집권을 위한 구타고문살인의 철권통치자, 변신변절배신자, 호색가 등 오명을 씻기 위해 반공을 국시(國是)로 하여 경제개발에 매진(邁進 dashing forward)하는 동시에 압축성장의 성공신화를 창출하여 21세기 선진경제대국대한민국이 있게 한다.

 

그래서 구미선진국과는 달리 제3세계에선 박통이 추진한 새마을운동이 경제발전의 아이콘이 되고, 박통은 위대한 대통령으로 기억된다.

 

하순봉 경남일보 회장이 ‘나는 지금 동트는 새벽에 서 있다’에서 이렇게 밝힌다.

 

“박정희가 1979년에 서거하지 않았다면, 1981년 10월1일 국군의 날 행사장에서 핵무기를 내외에 공개하고 하야하려 했다. 후계자는 JP, 김종필이었다.”

 

우남처럼 박통도 끊임없이 변신할 줄 아는 위대한 마키아벨리사상가였다.

 

셋째, 김대중(金大中, 1926-2009, 재위 1998-2003) 전 대통령에 대해 살펴보자.

 

DJ는 살인마 김정일형님, 거짓말쟁이, 군모술수의 대가, 지역감정이용자, 대통령병환자 등으로 낙인찍혔지만, 미국 중앙정보국(CIA)출신으로 한국 내 각계의 민주화 요구가 분출되던 시기, 곧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이 집권했던 시절, 대한민국 주재 대사(86-89년)를 역임하고, 중국 톈안먼(天安門)사태 등이 벌어지던 격동의 시기 중국 주재 대사(89-91년)를 지냈던, 릴리(James Roderick Lilley)는 모든 서류 검토 후 “김대중이는 공산주의자라는 증거를 찾을 수 없다”고 평가했다.

 

이렇듯 미국에서 DJ는 북한 전체주의자 김일성세습독재수령체제옹호자인 종북좌빨이 아니라고 판단을 내렸기 때문에, DJ는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

 

DJ는 또한 2000년 대한민국 최초로 대한민국민주주의수호와 한반도통일을 위한 자유와 평화를 위해 헌신한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함으로써 그에게 평생 따라다녔던 빨갱이의 꼬리표를 떨쳐버리고, 박정희 전 대통령처럼 한반도를 뛰어넘어 전 세계적인 대통령으로 추앙받고 있다. DJ도 끊임없이 변신할 줄 아는 위대한 마키아벨리사상가였다.

 

넷째, 노무현(盧武鉉, 1946-2009, 2003-2008) 전 대통령에 대해 살펴보자.

 

노무현 전 대통령도 부인 권양숙 여사의 조부모와 부친 권오석(權五晳)이가 6.25남침시 친북좌익활동한 경력으로 곤욕을 치렀다. 그러나 노무현정권에서 추진한 신자유주의경제체제구축, 한미FTA추진, 이라크 파병, 반기문(2003-2004 대통령비서실 외교보좌관, 2004-2006.11 제33대 외교통상부 장관; DJ정권시 2000-2001 외교통상부 차관, 2001.09 -2003 제56차 UN총회 의장비서실 실장, 2002 외교부 본부대사역임)유엔사무총장배출 등은 노통령이 종북좌빨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무엇보다도 미국 부시 전 대통령이 동갑내기인 노통을 인간적으로 좋아했다는 사실은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노통은 부산에서 한나라당에 패할 줄 뻔히 알면서도 지역주의타파를 위해 기득권을 내 던지고 국회의원후보로 여러 번 나와서, '바보 노무현' '노짱'이라는 애칭을 얻었고, 한국 최초의 정치인 팬클럽인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약칭 노사모)'이 결성되어 대통령까지 오르게 된다.

 

그리고 노통은 재임기간 중 원시형성리학노예사상의 수직문화, 권위주의를 깨뜨리고 주체적이며 평등한 민주주의의 인간형을 위한 수평문화창출에 앞장선다.

 

지역주의타파와 권위주의의 수직문화척결을 통한 구미선진국보다 발전된, 위대한 민주주의구현은 역대 어느 대통령도 감히 엄두도 내지 못했음은 물론 미래의 어느 대통령도 해 낼 수 없는 위대한 업적으로 꼽힌다.

 

이처럼 정치란 미묘해서 이념이나 선악의 잣대로 평가할 수 없다.

 

햇볕정책 등을 근거로 DJ, 노무현 전 대통령재임기간을 종북좌빨정권10년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초등학교수준도 안 되는 정신세계를 드러내는 유치한 짓거리에 불과하다.

 

그 이유는 올드 걸 댓글 대통령의 3종 세트 외교안보정책, 곧 ‘한반도 신뢰프로세스’, ‘동북아평화협력구상’,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는 DJ와 노통의 정책을 고스란히 답습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올드 걸 댓글 대통령은 DJ나 노통과는 달리 전술전략이 부재하기 때문에 다음과 같이 비판을 받는다.

 

“간판은 그럴듯한데 팔 물건이 없다”(송민순 전 외교통상부 장관)

 

“1층 없는 2층집 짓기”(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위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수꼴’(수구꼴통, 꼴통보수)과 ‘좌빨’(빠돌이)이란 용어는 자신의 사상을 합리화하고 타인을 부정하고 폄훼하기 위해 만들어낸 말에 불과하다. 곧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기행위이다.

 

독서를 하면 모두 수용할 수 있는 사상인데, 독서를 멀리하는 우뇌형한국인의 특징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한심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