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 대한민국에서의 좌-우파개념
한반도에서는 일제의 36년의 침략약탈병탄시기, 미군정시기, 분단국가로 말미암아 유럽의 좌-우파개념과는 전혀 다른 개념으로 정착된다.
다음과 같이 도식화할 수 있다.
“좌파=빨갱이=전체주의김일성세습독재수령체제옹호자”
“우파=일본 시다바리=미국 스파이’
이런 양분법의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시대에서의 삶이란 출구 없는 무한 고리 속에 갇혀있는 거와 같다.
그러면 대한국에서의 좌-우파 개념에 대해 살펴보자.
(1) 일제의 36년의 침략약탈병탄
일본과 연합국이 맺은 평화조약인‘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Treaty of San Francisco, Treaty of Peace with Japan, San Francisco Peace Treaty)에서 요시다 시게루(吉田 茂, 1878-1967)총리는 이렇게 밝힌다.
“한국은 일본과 전쟁상태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연합국으로 인정할 수 없으며 한국이 조인국이 되면 재일 한국인들은 연합국 시민들과 동등한 권리와 보상금을 주장할 것이다.”
“100만 명에 이르는 재일 한국인들의 대부분은 공산주의자라며 이들이 과잉 보상청구를 할 경우 혼란을 피할 수 없다”
비열한 시게루는 패전 후 일본의 재생을 꾀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재일한국인을 공산주의자로 몰아세우며 과도한 배상부담에서 벗어난다.
1905년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 1892-1950)는 1919년 도쿄유학생의 2.8독립선언서를 기초한 후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정부의 설립에 참여하여, 독립신문주필로도 활동하였다. 실력양성을 부르짖으며 “독립국민의 자격자를 키우라.”라는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 1878-1938)의 권고에 감화하여, 귀국 후 춘원은 1920년 흥사단에 가입하고 문학 활동과 저술을 통한 국민계몽을 하기도 한다.
1937년 흥사단의 국내조직인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 사건으로 도산과 함께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옥살이하다가, 1938년 병으로 보석되어 휴양 중 3월 10일 자신의 스승격이자 정신적 지주였던 도산이 병사하자, 춘원은 커다란 충격과 실의에 빠져, 그 해 11월 3일 병보석 상태에서 수양동우회 사건의 예심을 받던 중 전향을 선언한다.
1939년에 춘원은 친일어용단체인 조선문인협회(朝鮮文人協會)회장이 된다. 1940년 2월 20일 매일신보 사설란에다가 춘원은 가야마 미쓰로(香山光浪)이라는 창씨개명을 발표하고, 다음과 같이 창씨개명을 적극 옹호하는 한편, 자신의 창씨개명을 합리화한다.
“내가 향산(香山)이라고 일본적인 명으로 개한 동기는 황송한 말씀이나 천황어명과 독법을 같이하는 씨명을 가지자는 것이다. 나는 깊이깊이 내 자손과 조선민족의 장래를 고려한 끝에 이리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굳은 신념에 도달한 까닭이다. 나는 천황의 신민이다. 내 자손도 천황의 신민으로 살 것이다. 이광수라는 씨명으로도 천황의 신민이 못 될 것이 아니다. 그러나 향산광랑(香山光浪)이 조금 더 천황의 신민답다고 나는 믿기 때문이다. 내선일체를 국가가 조선인에게 혀하였다. 이에 내선일체운동을 할 자는 기실 조선인이다. 조선인이 내지인과 차별 없이 될 것 밖에 바랄 것이 무엇이 있는가. 따라서 차별을 제거하기 위하여서 온갖 노력을 할 것밖에 더 중대하고 긴급한 일이 어디 또 있는가. 성명 3자를 고치는 것도 그 노력중의 하나라면 아낄 것이 무엇인가. 기쁘게 할 것 아닌가. 나는 이러한 신념으로 향산이라는 씨를 창설했다.”
춘원은 8·15 광복 후 반민법으로 구속되었다가 병보석으로 출감했으나 6·25전쟁 때 납북되었다가 1950년 만포(滿浦)에서 병사한다.
춘원은 친일행위를 변호하기 위해 21세기처럼 분명하게 규명되지 않는 애매모호한 소련의 공산주의추종자들을 "신식 사대주의자". 곧 구식 위정척사파와 같은 수준의 사람들이라고 비방한다.
이처럼 일본은 배상금을 지불하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악질 친일세력, 일제사생아와 그 후손들은 자신들의 매국노짓거리를 옹호하기 위해서 친일파보다 공산주의자가 더 나쁘다는 너대니얼 호손(Nathaniel Hawthorne, 1804- 1864)의‘주홍글씨’(The Scarlet Letter)를 새긴다.
그런데 6.25전쟁이전까지 만해도 공산주의실상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있는 나라나 사람들이 전혀 없었다.
미국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Roosevelt, 1882-1945, 재위 1933-1945)대통령 시절만 해도, 그 행정부엔 소련의 첩자가 들끓었는데, 루스벨트는 네덜란드 출신 유대인계라 자신의 동족들이 세운 소련을 파트너로 생각하고, 소련의 첩자에 대한 보고를 무시할 정도였다.
게다가 우남 이승만 전 대통령도 청년시절 러시아가 부동항을 한반도에서 확보하기 위해 침략약탈하는 것을 목격하고 러시아를 탐탁지 않게 생각한다. 후에 우남은 러시아의 도움을 받기 위해 소련을 방문하던 중, 미국에서 왔다는 이유로 입국거부 당하자, 개인적인 모멸감 때문에 또 다시 한 번 소련의 공산주의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갖는다.
그런 가운데 스탈린연출과 미중의 주연과 김일성의 조연으로 일어난 6.25전쟁을 통해서 공산주의의 실상을 깨닫게 된다.
이런 사실에서 볼 때 시게루나 친일파들의 공산주의관은 허구이며, 시게루는 일본의 이익을 위해, 친일파들은 매국노짓거리를 변호하는 동시에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쌩구라라고 보면된다.
그래서 북한전체주의 김일성세습독재수령체제옹호자를 비롯해, 대한민국의 이익보단 중국의 이익대변자인 중국꼬봉, 미국의 이익대변자인 미국스파이들, 일제의 36년침략약탈병탄시기를 근대화로 치장하며 자신들의 악질친일행위를 정당화하는 동시에, 일본의 이익대변자인 일본의 시다바리들과 뉴라이트는 대한민국의 암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가능한 빨리 색출체포제거하거나 사형에 처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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