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와 정의의 나라/신학 이야기

사회진화론(social Darwinism)에서 본 대한제국쇠망

아우구스티누스 2010. 9. 28. 12:28
      지난 19, 20세기 초 세계질서의 거대담론은 사회진화론(social Darwinism)이다. 조선왕조지배계층은 이런 시대의 문법을 읽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독(誤讀)해서 노예국가로 전락한다. 잔꾀의 원숭이나라 일본은 아시아에서도 미개국가, 동아시아 장기판의 졸(卒)에 불과했음도 불구하고, 세계문법을 완전히 독파한 후, 열강의 노선에 올라타, 군국주의국가로 변신한다.

 

    사회진화론에 대해 언급하기 전 찰스 다윈(Charles Robert Darwin 1809-1882)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다윈은 50세에 출간한‘종(種)의 기원’(On the Origin of Species by Means of Natural Selection, 1859)에서 외부의 조건이 생존에 유리한 변이들은 선택되고, 불리한 변이는 도태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다윈은 아리스토텔레스(헬라어 Άριστοτέλης Aristotels, 라틴어, 독어 Aristoteles, 영어 Aristotle; B. C. 384-322)의 종(種)분류체계를 현대생명 종(種)분류법으로 전착시킨 스웨덴의 박물학자 린네(Carl von Linne 1707-1778)의 고정불변의 생명종이론, 곧 생명 종(種)은 변하지 않고 종(種)들 사이에는 서로 넘나들 수 없는 독립적인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거부한다.

 

    다윈은 생명 종(種)은 언제든지 변할 수 있고, 중간변화나 변이에 의해 새로운 종이 탄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영국의 신사계급이나 노예계급은 변할 수 없는 고정된 계층이 아니기 때문에, 노예제도의 정당성에 반대한다. 인종주의와 노예제도를 반대했던 박애주의자 다윈과 미국에서 노예해방을 선언했던 링컨이 같은 날 태어났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다윈은 교구목사와 함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공제조합을 설립한다. 그리고 매년 일정액을 기부하면서 죽는 해까지 들고 나서는 소소한 금액을 꼼꼼히 기록하면서 조합회계를 맡는다.

 

    이와 같이 다윈은 자기 사상에 입각해 노예제도를 반대하고 소외된 자들에게 사랑을 베풀었던 따뜻한 인간애를 가진 사람이다. 다윈의‘종의 기원’에는 생존경쟁의 논리만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공존의 논리도 있다. 다양한 생명종이 공존함이 이를 보여준다. 그런데 후대의 사람들이 다윈의 사상을 오역(誤譯 wrong translation) 오용(誤用 misuse)해 비참한 결과를 낳는다.

 

     그러한 사람들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은 영국 사회학을 창시자한 스펜서(Herbert Spencer 1820-1903)다. 그는 진화철학을 주장하고, 진화가 우주의 원리라고 생각하여, 사회의 발전 모드를 진화론적 관점에서 설명한다.

 

     그리고 한 인물을 생각해야 한다. 그 사람은 프랜시스 골턴(Francis Galton 1822-1911)이다. 그는 진화론의 아버지 찰스다윈과 고종사촌사이다. 골턴은 '우생학'(Eugenics) 창시자다. 우생학은 고대에도 있었다. 그리스의 플라톤(πλάτων Platon, 라틴어, 독어 Platon, Plato, 영어 Plato B. C. 427?-327?)도 ‘국가’(Politeia B.C. 374)에서 이렇게 말한다. '가장 훌륭한 남자는 될 수 있는 대로 가장 훌륭한 여자와 동침시켜야' 하며, 이렇게 태어난 아이는 양육되어야 하지만, 그렇지 못한 아이는 '내다 버려야 하며, 고칠 수 없는 정신병에 걸린 자와 천성적으로 부패한 자는 죽여 버려야 한다.'

 

     미국의 제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1858-1919, 재임기간 1901-1909)는 스펜서의 사회진화론과 골턴의 우생학의 열렬한 옹호자요 전파자다. 그는 '서부팽창사'(The Winning of the West)를 저술하게 하여, 이 정책을 기초로 ‘평화는 총구에서 나온다’고 선언하며, 미국의 인디언 정복은 ‘국제경찰행위’로 비유하며, 무력한 비문명국들은 문명국의 합법적인 먹잇감이라고 규정한다.

 

     루스벨트는 1905년 9월 15일 오후 3시 47분 미국의 동북부 휴양지 겸 군사도시인 뉴햄프셔(New Hampshire)주 해군기지 포츠머스(Portsmouth)의 해군조선소(Naval Shipyard)안 평화빌딩에서 러일강화조약(포츠머스조약)을 맺게 하고, 1906년 러일전쟁의 종식을 중재한 결과로, 미국인 중에서 최초이자 미국 대통령 중에서도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한다.  

 

     유감스러운 것은 미국의 최초의 노벨상이 조선왕조를 하나의 독립된 국가라기보다 전쟁마당에 나와 있는 커다란 전리품 처리하듯 일본에게 하사했다는 사실에 있다. 더욱이 포츠머스의 학교와 교회는 매년 9월 5일 오후 3시 47분이면, 해군조선소의 경적 소리에 맞춰 10분간 종을 울려 조선왕조의 일본의 식민지화를 조인한 포츠머스조약을 기념한다고 하니 분함과 수치심이 몰려온다.

 

    루스벨트의 일본에 대한 각별한 사랑과 조선왕조에 대한 이유없는 멸시는 러일강화조약이전, 곧 ‘태프트-가쓰라밀약’(THE TAFT-KATSURA AGREEMENT)에서 드러난다. 1905년 7월 29일 루스벨트대통령시절 육군장성 윌리엄 태프트(William Howard Taft 1857-1930, 재위 1909-1913)와 일본총리 가쓰라 다로(桂太郞 1848-1913)사이에 맺은 밀약이다. 태프트와 일본이 미국령 필리핀의 안전을 보장해주는 대신, 미국은 일본의 한국 종주권을 승인해주는 비밀 거래문서다. 1924년 미국 존 홉킨스 대학의 외교사학자 타일러 데넷가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대일 비밀조약(Theodore Roosevelt’s Secret Pact with Japan)’이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이 밀약의 전문을 수록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진다.

     

    역사적으로 보면 500여년의 조선왕조는 너무 노쇠해, 쇠망할 때도 되었지만, 왜 근대국가로 거듭나지 못하고, 일본의 노예국가로 전락했는가? 모략과 중상에 능한 소음인 일본이‘대한제국은 무능하고 자립할 능력이 없는 전주이씨 가문의 나라’라고 부정적인 견해를 구미의 열강들에게 쇠뇌 시켰기 때문인가? 실상 조선왕조는 시대의 문법을 읽지도 못할뿐더러 설령 읽는다 해도 독해할 수 없는 저능아였다. 다 쓰러져 가는 중국의 청나라만 상대했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에 반해 일본은 국제질서가 ‘땅빼앗기’라는 것을 깨닫고, 세계최고의 강대국인 미국과 영국을 비롯해 유럽의 문화와 문명을 받아들여, 일본이 열강의 식민지가 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한다. 미국과 영국과 동맹을 맺고, 이 두 나라의 강력한 뒷받침으로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여 조선을 냉큼 집어먹는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스펜서의 사회진화론과 골턴의 우생학의 주창자인 미국의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이 병적으로 무조건적으로 일본을 사랑했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의 심복 가네코 겐타로(金子堅太郞)가 루스벨트의 하버드 동창생이었다는 사실이 대한제국에는 비극의 씨앗이다.

 

    ‘태프트-가쓰라밀약’, ‘러일강화조약’이 보여주듯이,  루스벨트가 대한제국을 버리고 일본을 편애한 이것이 21세기 반미정서의 뿌리다.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언어학 및 철학과 석좌명예교수인 에이브럼 노암 촘스키(Avram Noam Chomsky 1928-)는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현대의 역사에서 가장 악랄한 인종 차별주의자이자 끔찍한 정신병자였다’고 혹평한다.

 

     21세기에도 미국은 일본을 중심으로 한 아시아정책을 펼친다. 미국은 주일미군, 주독미군은 사활적 이익(vital interest)을, 주한미군은 파생적 이익(derived interest)을 준다고 본다. 이것을 대한민국은 잘 해석하고 해결해야 한다.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은 언급하길, '역사적 사건은 두 번 발생한다. 한번은 비극으로 두 번째는 희극으로'라고 했다.

 

 

    그리스도교에도 역사의 교훈을 강조한다.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것은, 우리에게 교훈을 주려고 한 것이며, 성경이 주는 인내와 위로로써, 우리로 하여금 소망을 가지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로마서 15:4. 새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