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전 수상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1878-967)는 한국전쟁(6.25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듣고 “신이 우리 일본을 구하셨다”고 감격해하면서 만세삼창을 했고, 1954년 맥아더(Douglas MacArthur, 1880-1964)는 한 세미나에서 “한국이 우리를 구해 주었다”고 말했으며, 커밍스는 “뉴딜(New Deal)이 금세기 미국의 제1차 국가부흥의 계기였다면 한국전쟁은 제2차 국가부흥의 계기”였다고 평가하였다. 1953년 한국전쟁에 해군장교로 참전한, 일본정책연구소장을 지낸 동북아연구분야 대가, 미외교정책전문가인 미국경제학자 찰머스 존슨(Chalmers Johnson)도 “일본에 있어 한국전쟁은 마셜플랜에 필적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고 진단한다.
그런데 한반도발전이 일본열도의 지원 덕이라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역사담론을 추종하는 뉴라이트계열을 비롯한 일본노예들이 대한민국내에 즐비하다는 사실에 절망하며, 다음 글을 읽고 주체적인 주권국가 주권국민의식을 가지길 대망하는 차원에서 강추!강추!강추!한다.
[韓발전이 日지원 덕?… 오히려 日제조업이 6·25 반사이익]
-日, 6·25전쟁으로 대박
美가 군수물자 대량 주문… "값은 묻지도 않고 사갔다" 日 5년간 40억달러 챙겨
자동차 수출 400배 급증… 소니·혼다·마쓰시타 등도 전쟁 特需로 폭발적 성장
-한국으로 기술이전엔 인색
신진자동차와 제휴 도요타… 1972년 계약파기하고 철수
1950년 6월, 일본 자동차업체 도요타는 극심한 불황으로 파산 위기에 몰렸다. 실적 부진에 파업까지 겹치면서 6월 5일 창업자인 도요다 기이치로 사장 등 경영진이 전원 퇴진하고, 권한을 위임받은 가미야 쇼타로 당시 도요타자동차판매(판매 전담 별도 회사) 사장이 23일 급히 미국 출장길에 올랐다. 회사를 살리려면 지분을 포드에 넘겨서라도 새 돈을 수혈받는 길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틀 뒤인 6월 25일 한국에서 전쟁이 터졌다. 소식을 들은 가미야 사장은 "일본 경제 회복의 천우신조(天佑神助)를 기대한다"고 했는데, 기대는 현실이 됐다. 7월 들어 미군으로부터 트럭 1000대 대량 주문이 들어온 것이다.
이후 6·25전쟁에 따른 일본 자동차업체의 총 수주량은 도요타를 필두로 1만대가 넘었다. 한 해 전인 1949년 일본의 상용차 수출은 13대에 불과했지만, 1950년 수출은 5502대로 단숨에 400배 이상 늘었다. 일본의 저력과 기업가정신 등도 물론 큰 역할을 했지만, 6·25전쟁이 죽어가던 일본 자동차산업이 되살아나는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이다.
이 점은 일본 기업인들도 인정하고 있다. 도요타를 글로벌 자동차 거인으로 일으켜 세운 주인공인 도요다 에이지(1967~1982년 도요타 사장 역임)는 회고록 '게쓰단'(決斷·2000)에서 6·25 특수(特需)에 대해 "정말 구제의 신(神)이나 다름없었다"고 말했다.
최근 일본 정부는 세계를 상대로 일본의 지원 덕에 한국의 경제 발전이 가능했다는 식의 메시지를 홍보하고 있지만, 오늘날 일본이 제조업 강국이 된 데는 6·25전쟁에 따른 특수가 시발점이 됐다는 점은 애써 무시한다. 일본이 1950년부터 1955년 사이 한국 특수로 벌어들인 외화 수입은 총 40억달러(일본 경제기획청 자료)로, 일본이 한국에 식민 지배에 대한 배상금으로 준 돈(3억달러)의 13배에 이른다. 1950년대 일본의 한 해 국내총생산(GDP)은 200억달러 수준으로 당시 40억달러이면 엄청난 돈이다. 일본 경제 전문가인 이지평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전후 달러 부족에 시달리던 일본이 6·25전쟁이라는 특수 덕에 재건할 수 있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패전 직후 일본 경제는 구제 불능 상태였다. 1945~49년 사이 물가는 79배 뛰었고, 참전 군인과 해외 식민지에 거주했던 일본인이 대거 귀국하면서 식량난과 물자난이 극심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에서 전쟁이 터지자 일본 경제인들 사이에선 "다시 (몽골의 침략에서 일본을 구제해준) '가미카제(神風)'가 불어온다"고 했다.
6·25전쟁 발발 직후인 8월 25일, 미군은 요코하마에 재일 병참 사령부를 설치해 군수물자를 대량 매입하기 시작했다. 미군의 군수물자 구매 금액은 1950년부터 1952년까지 3년간 10억달러에 이르고, 간접 특수까지 감안하면 5년간 36억달러에 달했다.
도요타뿐 아니라 현재 글로벌 대기업으로 자리 잡은 일본 대기업들은 한국 특수에서 고속 성장의 기회를 잡았다. 6·25전쟁 당시 녹음기용 테이프를 만들던 소니는 전쟁 특수로 전파 탐지기 수요가 폭증하자 매출과 이익이 폭발적으로 늘었다. 소니는 이 같은 성장세를 바탕으로 1954년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개발, 세계적인 기업으로 발돋움했다. 한국 특수는 자전거 생산 기업인 혼다를 오토바이와 4륜차 생산 기업으로 업그레이드하게 만들었고, 마쓰시타 전기, 샤프, 히타치, 도시바, 미쓰비시, 산요 등도 폭발적인 성장세를 탔다.
"김일성의 남침 소식이 일본인에게는 복음이나 다름없었다.(중략) 건축용 철재를 비롯하여 각종 트럭, 철사류, 모래주머니, 칫솔, 비누까지 값은 묻지도 않고 맥아더 사령부에서 구입해갔다."(일본 문예춘추 편집장 출신 한도 가즈토시의 '쇼와사'〈昭和史〉에서 발췌)
한국 특수는 일본의 정치 및 외교·안보 분야까지 '선물'을 안겼다. 당초 미 군정청(GHQ)은 일본의 재무장화를 엄격히 금지했지만, 6·25전쟁이 터지자 자위대의 모태가 되는 '경찰예비대' 창설을 허가해 주었다. 또 일본 기업에 대해 무기와 포탄 등의 생산 허가를 내주고, 항공기 수리 등을 발주해 중공업 관련 기술력이 보존될 수 있게 했다.
이처럼 일본은 한국 특수를 누리며 제조업 강국으로 거듭났지만, 이후 한국으로의 기술 이전엔 인색했다. 도요타는 1970년 전후까지 한국에서 신진자동차를 통해 조립생산한 차를 팔아 큰 수익을 냈지만, 한국 업체들의 일본 기술연수 등 노하우 이전에는 비협조적이었다. 결국 도요타는 1970년 '중국은 한국·대만을 돕는 회사와는 교역하지 않는다'는 등의 내용을 담은 주은래 4원칙에 따라, 1972년 신진과의 제휴 계약을 파기하고 한국에서 완전 철수했다. 도요타로서는 거대시장 중국을 노리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고 하지만, 당시 도요타의 일방적인 통고는 국내 자동차 원로들 사이에 아직까지도 뼈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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